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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사 입구 왼쪽 담장 곁엔 세그루의 감나무와 하나의 귤나무가 있다. 감나무는 감보다는 꽃을 바라 보면서 옛적 동심에 젖기 위함이었고 귤은 열매를 보고 심었다. 두 종류의 나무가 점점 크게 자라게 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조금 익기 시작하면 그 열매를 따 먹으려 모여드는 새들의 성화 때문에 도저히 그냥 둘 수가 없었다. 쪼아 먹다가 떨어져 있는 그 열매를 차량이 오가게 되면 그것들이 시멘트 도로 바닥에 달라 붙어 버리면 쓸어 내기가 몹시 고약해진다. 생각 끝에 긴 가지들을 잘라서 키를 많이 낮춰서 열매에게 손이 닿을 정도로 조절해 두었다. 그후 감꽃 수는 좀 줄어도 감으로 인한 불편은 거의 없어졌고 귤도 좀 더 큰 모습으로 달리었다. 엊그제 그 곁에 가 보았더니 상당히 많은 숫자의 열매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두어 개를 따서 먹어 보았더니 맛이 아주 좋고 향내도 진했다. 반면에 씨앗이 매우 많았다. 탱자 만한 작은 열매에 정확하게 20 개의 씨가 들어 있었다. 그것들을 뱉어 내면서 문득 한 생각이 일어났다. ‘ 이들은 왜 이처럼 많은 씨앗을 품고 있을까? ‘ 자기 종족의 무성한 번식을 희구하는 그 염원이 그 속에 담겨져 있지 않을까?’ 그 무슨 식물이건 토종이나 잡초일수록 그에 따른 씨앗이 많다. 감나무의 접 붙임인 고염도 그렇고 풀섶 어디에서도 꽃 피우는 민들레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민들레나 할미꽃 등은 솜털같은 날개를 만들어 풍선을 띄우듯이 자신의 종자를 멀리 멀리 실어 나른다. 반면에 자연 종자에게 변형을 일으켜 유전자 조작을 한 새로운 과일 등은 그 종자의 숫자가 매우 적다. 인위적으로 종자 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는 어떠한가? 한국 통계청이 2020년 2월 7일 발표한 전년도 출산율 발표에 따르면 합계 출산율은 0.92 명을 기록했다. 1970년 조사 이후 50년만의 최저치의 기록이라고 하며 세계에서 꼴찌의 출산율이라고 한다. 이런 현상은 장차 국가의 존립 문제와도 직결되는 중대한 현상인데도 목전의 이해타산에만 몰두하고 있는 근시안적 태도에 적이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정부는 그동안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서 176 조원이나 투자해서 출산과 육아에 대한 배려를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그 근본 원인에 대해서는 전혀 접근을 못하고 그저 자리 다툼이나 이념 투쟁에 골몰하며 시시비비만 일삼고 있으니 나라의 장래가 암담하기만 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인간세계는 힘이 지배하는 무리들이 사는 곳이다. 거기엔 경제력이 앞서고 그것을 받쳐주는 위해 인구가 많아야 된다. 그런 여러가지 기초적인 조건이 하나라도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곳이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다. 그런데도 내년부터는 자연인구가 감소되는 상황이라고 하니 큰 걱정이 앞선다. 어릴 때에 잔디를 뽑아서 눈물 싸움을 해 본적이 있다. 씨가 맺힌 줄기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러서는 눈물을 만든 다음 누가 이기느냐는 내기다. 그러면 작은 것은 큰 것에 흡수되기 마련이다. 출산율이 점점 감소되는 근원적 원인은 우리의 의식속엔 국가는 없고 개인만 있으며 내일 보다는 오늘만 생각하는 좁은 틀 속의 굳어진 생각 때문이다. 이런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위정자들이 앞장서서 정책을 계발하고 그것을 교육에 반영시키면서 국민을 계도해 나가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통계의 수치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의 문제는 국민들의 지나친 배금주의와 출세지향주의적 굳어진 삶의 태도이다. 이 둘의 문제는 피차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육아와 교육의 뒷받침이 있어야 그 꿈을 이룰 수가 있다. 게다가 내 집에 대한 애착은 아마 세계 1등이지 싶다. 내집 마련을 위해서 출산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 이를 잘 반증해 주고 있질 않는가? 모든 생명은 자기종족이 더 번성되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 생명의 본성이다. 길가에 밟혀 가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잡초들을 뽑아 보면 그 뿌리의 숫자가 많으며 가늘고 길게 뻗어져 있다. 우리 한국인은 우리 한국인의 정체성의 뿌리를 어느 것에 두고 있는가? 단군인가? 세종대왕인가? 이순신인가? 기독교인가? 불교인가? 유교인가? 반공인가? 친공인가? 해방 후 75년이 다 된 지금에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현실이다.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은 꽃과 열매를 보기 위함이며 그것을 위해서 정성껏 가꾼다. 그 열매 속엔 수십배의 씨앗을 담아서 자기 종족이 더 많이 퍼지길 희망하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며 종족 보존의 일차적 수단이다. 그러한 자연의 법칙과 생명의 본성을 거스르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우리 한국인의 젊은 세대가 갖고 있는 메마른 삶의 삐뚤어진 정서, 돈과 좋은 직장만 있으면 만사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단세포적 사고에 깊은 걱정이 앞선다. 자신이 씨 뿌려 푸릇 푸릇 자라나는 생명체를 바라 보면서 느끼는 그 풋풋한 마음이 그 어찌 한 채의 집이나 좋은 직장에 비견될 수 있겠는가? 작은 돌 감귤을 먹다가 씨앗이 너무 많아 뱉으면서 생각난 한 조각을 단상에 올려본다. 기후 스님(시드니 정법사 회주 스님)

30/07/2020
금요단상 - 기후 스님

요즘은 어딜 가나 많은 꽃들과 마주친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하지만 꽃과 만나면 미소가 번진다. 색상이 곱고 각각의 독특한 향기가 있기에 그렇다. 며칠 전 두 지인들과 함께 꽃 마중을 나갔다. 늦은 감은 있었으나 워낙 유명한 곳이라 하니 따라 나섰다. 그곳은 블랙히스에 있는 로도덴드론 가든이었다. 1960년 그 지역에 살았던 소렌슨이라는 꽃을 좋아하던 사람이 18.5 헥타르를 다듬어 꽃나무를 심고 길을 내어 가든을 만들면서 점점 더 유명해지게 되었단다. 기차역에서 1 Km 쯤 떨어진 그곳은 지난해에 50주년 기념 꽃 잔치를 성대하게 한 이후 한층 더 명성을 더했다. 특히 크고 붉어 눈을 부시게 하는 2000 여 그후의 로도덴드론과 아잘리아, 카멜리아, 매이플스 등의 다양한 색상의 화사한 꽃들은 관람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우리 역시 좌우로 고개를 돌리면서 꽃 모습에 취해 내려가다가 작은 연못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곳엔 생각지도 않았던 올챙이들이 새까맣게 떠다니며 헤엄치고 있었다. 이곳에 온 지 내년이면 30 년이 되지만 올챙이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가까이 가서 자세히 바라 보았다. 까맣고 긴 꼬리를 살랑거리면서 헤엄치는 모습들이 너무나 정겹게 느껴졌다. 게다가 잠자리까지 연못 위를 날아 다니고 있었다. 잠자리도 시드니 근교에서 한두 번 본 적이 있지만 자주 볼 수는 없었다. 그곳에선 상당히 많은 잠자리들이 올챙이와 함께 놀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그것 보다는 작고 날씬했지만 어릴 적에 보아왔던 그들과 함께 만났으니 마치 고향의 연못가에 앉아 있는 듯한 포근한 느낌이 들어서 그들이 노는 모습을 여러 각도로 영상에 담았다. 그럴 즈음 높은 나무 위에선 매미들의 노래 소리가 꽃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미소 짓는 사람들의 즐겨하는 소리와 함께 하여 그 연못에 내려 앉고 있었다. 몇 포기의 수련 아래에서 새까맣게 떼지어 노는 올챙이들과 그 위를 날아 다니며 숨바꼭질을 하듯 비행을 하고 있는 날씬한 잠자리들, 그리고 매미들의 합창이 함께 어우러진 그 꽃동산 속에서 난 문득 고향과 동심의 세계로 회귀하고 있었다. 불경 말씀에 “과거는 지나간 것이니 회상하지 말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마음에 두지 말고 오직 지금 이 자리에만 전념하라” 고 일렀으나 나는 때때로 그렇게 못하고 있으니 이것도 적은 문제가 아니다. 특히 여름에도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이곳이라 여러 해 전에 경남 남지에 사는 젊은 불자에게 개구리 소리를 녹음해서 MP3로 보내 달라고 부탁해서 저녁에 불을 꺼두고 그 소리를 가끔 듣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연못 늪 속에선 그런 개구리 소리도 은근하게 들려 왔고 장차 그런 노래를 부르게 될 올챙이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저들이 머지 않아 없던 다리가 생기고 있는 꼬리는 없어져서 팔짝팔짝 뛰기도 하는 개구리가 된다하니 변화하는 생명체의 신비로움은 참으로 부사의(不思議)한 것이다. 잠자리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 보기엔 멋스럽게 날아 다니지만 그들의 입장에선 작업 중이다. 날파리나 깔따구 등을 잡아 먹으려고 부지런히 날개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원해 보이는 나무 숲속에서 온 종일 큰 소리로 울어대는 매미들은 또 어떠한가? 그들은 최소 5 년 정도 땅 속에서 굼벵이로 지내다가 날개 달린 매미로 변신해서 저렇게 목 놓아 소리내어 자기 짝을 찾은 후 일주일쯤 뒤엔 사라진다고 한다. 내가 사는 우드포드 마당 앞 검츄리 밑둥엔 정확하게 22개의 매미 허물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다. 그들은 주로 이른 새벽이나 밤중에 땅속에서 올라 와서 나무 줄기에 매달려서 어깨 부위가 갈라지면서 매미가 되어 살금살금 나온다. 처음 나올 땐 날개와 몸 전체가 푸르스름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검은 색으로 변한다. 올챙이와 굼벵이도 그렇게 변하는데 나는 툭하면 어릴 적 고향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꼴통중에 상 꼴통이지 싶다.

15/10/2020
금요단상 - 기후 스님

조용하면 절간과 같다고 했다. 시드니가 그와 같다. 모두가 집안에서 안거 중이다. 불가에선 일년에 두차례의 안거가 있다. 여름엔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겨울엔 10월 15일부터 1월 15일까지 각각 3개월이다. 출입을 통제하고 하루 10시간이나 12 시간씩 4차례 나누워서 용맹 정진을 한다. 이른바 면벽관심(面壁觀心)이다. 밖으로 향하며 늘 헐떡거리는 마음을 거둬 들여서 자신의 생각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 가고 있는지를 살피는 일이다. 어떤 대상에 재미를 붙이면 시간은 잘 가고 재미있는 듯이 느껴지지만 끝나고 나면 허전하다. 생각이 두개로 흐트러지기에 그렇다. 그 무엇이건 나눠지면 힘이 없다. 하나가 되어야 안정이 되고 그 속에서 희망과 평화를 엿보게 된다.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안거의 행태와 내용은 비슷하다. 생사의 문제로부터 파생되는 불안함이 그 안에 공존한다. 다름은 승가에선 자발적 통제를 택한 것이지만 속가에선 피동적 강압으로 인한 자가격리다. 무슨 일이건 스스로가 좋아해서 하는 것은 신바람이 나지만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게 되면 짜증이 생긴다. 이 기회에 한번쯤은 돌이켜 생각할 수 있는 ‘반조(返照)의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그것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전해주려는 메시지인지도 모르겠다. 우린 너무 함부로 살아온 부분이 없지 않다. 욕심을 따라 부나비처럼 쫓아 다녔고 자연의 조화를 허물어 뜨렸으며 타자의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를 놀라운 발전이란 페인트로 색칠해 버렸다. 그런 오만함과 허세의 기운을 꺾어 버릴려고 그 악성 바이러스가 출현했는지도 알 수가 없다. 또한 불안과 불편을 주는 그 핵심엔 생사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 용어가 듣기 싫든 좋든 간에 현실적인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그럴 바엔 막연하게 피하려고하기 보단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수용해서 깊이 있게 생각해 보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선승(禪僧)들은 그러한 생사의 불안에서 벗어나서 영원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주야로 정진한다. 그것은 불안 심리를 찬찬이 들여다 보는 자기 시간을 많이 갖는데서 생긴다. 자기 마음이 허둥대며 돌아다니는 내용을 잘 들여다 보면 때론 우습기도 하고 자신이 초라해질 때도 있다. 그럴수록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이 많아야 안정이 되고 발전이 있다. 그런 시간을 외면하고 남의 나라 확진자 수만 헤아리게 되면 불안만 더해지고 갑갑함은 곱으로 늘어난다. 코로나는 그런 인간의 약점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기세가 등등하게 설치고 다닌다. 또한 이번 기회에 평소의 생활이 얼마나 행복했고 모든 순환적 유통됨이 얼마나 편안함을 제공했는지에 대한 감사함을 절감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되겠다. 그 옛날 평생을 면벽하며 참선을 한 고승이 있었다. 어느날 젊은 선객이 찾아가서 “큰스님, 참 도가 어떤 것입니까?” “피곤하면 쉬고 배고프면 밥 먹는 것이니라.” “그게 무슨 대도(大道)입니까?” “나갈 땐 나가고 들어올 땐 들어오는 것이니라.” 우린 지금 매우 불편하고 부자유스럽다. 그리고 마음은 불안하다. 유통이 되지 않고 주머니가 텅텅비니 어쩔 수 없다. 평소에 자기만 최고인 양 거들먹 거리고 돌아다닌 우리들, 생사의 무상함이 어디에서 어떻게 비롯되어 어떻게 끝나는지도 모르면서 교만을 떨며 살아온 민초들의 방만했던 일상. 그런 만물의 영장이 미세 바이러스에 쩔쩔매는 모습을 바라 보며 은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텅텅 빈 시내 곳곳을 기웃거리며 돌아 다니고 있을 것이다. 기후 스님(시드니 정법사 회주 스님)

16/04/2020
금요단상 - 기후 스님

“세상 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세상 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업신 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생각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이 세상을 살아가라”하셨나니라. 보왕삼매론 (寶王三昧論)이라는 짤막한 10 가지 교훈 중의 한 구절이다. 뭇 생명들은 안락이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 그 이면엔 그만한 노력이 요구되고 그것의 지속적인 과정 속에서 곤란한 일이 생길 수 있다. 우리가 보기엔 긴 날개를 펴고 허공을 시원스럽게 날아 다니고 있는 많은 새들의 모습이 무척 평화스럽게 보여 진다. 그것은 먹잇감을 찾기 위한 힘든 날개짓이며 그들은 언제나 강자의 눈초리를 피하느라 불안감에 떨고 있다고 한다. 우리 인간 역시 삶의 내용이 그 새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힘듦은 우리들의 면역력으로 인해서 감내할 수 있지만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 그 곤란함의 범위와 강도(強度)가 심하다. 그렇지만 그 시간이 반년에 가까워 오면서 서서히 그 힘든 상황에 적응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그 역시 살아남기에 민감한 생명력의 현실 적응의 지혜로움 이리라. 현인(賢人)은 이른다. 어떤 개인이 어려움 없이 사업이나 학업 등을 성취하게 되면 남을 업신 여기는 마음이 생긴다고 했다. 그럴듯한 말씀이다. 그런 이들 중에 더러는 자신처럼 되지 못한 사람들을 내심으로 얕보는 수가 종종 있다. 자기 중심 생각으로 대상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만한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와서 거드름을 피운다. 그렇게 영민해서 사회적으로 출세해서 부와 권력이 생기게 되면 사치한 생각이 나게 마련이다. 자기 과시의 외형적 모습은 사치함에 그 초점이 맞춰지며 정서적 세계는 오욕락(五慾樂)의 탐닉이며 그 대표가 권력과 이성(異性) 등을 통한 자기 존재감의 극대화이다. 그들의 종말(終末)은 우리가 수차례 목도한 비극적 마감이다. 그래서 현자는 근심과 곤란으로써 이 세상을 살아가라고 하신 것이다. 누구나 근심과 어려움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희망이 그러함에도 지금 이 자리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수십 년을 통해서 그런 뜻을 이룬 이는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정신적 근심과 육체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성공한 사람일수록 인간미가 있고 인격이 야무지게 다져진다고.. 그들은 곤란을 겪음으로써 상대방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는 변별력이 생겨나고 괴로움을 맛보면서 즐거움의 농도를 더 진하게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생존, 치열한 경쟁속에서 어쩌면 근심과 곤란은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생명성의 또 다른 모습이리라. 자연의 조화로움과 생명성의 평등과 고귀함으로 무장되지 않는 한 힘들고 곤란함은 언제나 자신의 그림자처럼 나를 졸졸 따라다닐 것이다. 곤란함과 불편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는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코로나 바이러스의 크기가 얼마나 되느냐고 알 만한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대답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토록 작은 크기의 바이러스가 전세계인을 마스크를 쓰게 하면서 이토록 큰 곤란을 주게 하는 것은 그 무엇 때문일까? 생명에 대한 협박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생명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어떤 젊은 승려가 대도인에게 물었다. “선사님은 생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그가 답했다. “물 속 달빛으로 숲 속 바늘을 찾으려 하고 모래밭 흙 먼지로 만리성을 쌓으려 하네. 가을 기러기 다람쥐와 다투지 않는데 툇마루 애 늙은이 밤송이와 씨름하네.”

10/09/2020
금요단상 - 기후 스님

한때 선착순의 값어치가 최대로 인정 받은 때가 있었다. 60 여 년 전 시골에서 걸어서 장을 보다가 소위 신작로(新作路)라는 큰 길이 생기면서 버스가 드문드문 다닐 때이다. 장날이 되면 이고지고 수십리 장길을 다니다가 면 사무소 근처로 버스길이 트이게 되자 전 면민이 차를 타려고 하다가 보니 장날 버스를 타는 그 장면은 참으로 볼만했다. 차 다니는 횟수는 적은데 이용자는 많으니 당연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버스 정류소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다. 특히 장날 막차는 한층 더 가관(可觀)이었다. 크고 작은 보따리를 이고온 장꾼들은 먼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난리법석이다. 짐칸이 따로 없던 시대라 버스안은 짐 반 사람 반 이었다. 그렇다 보니 먼저 올라간 사람이 자기짐을 옆자리에 놓아두고는 친구의 자리를 잡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이 적은 평소(장날이 아닌 날)에는 그것의 효력이 발생하지만 장날엔 그 보따리의 효력이 상실당한다. 뒤따라 올라간 사람들이 그 보따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에 그러하다. 보따리를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시비가 자주 일어나게 될 정도로 자기 앉은 자리의 가치가 드세었다. 그런 문제가 일어나다 보니 이젠 밖에서 창문을 통해서 자기 보따리를 들어 밀어넣는 방법으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한다. 출발 시간도 정해진 것이 없다. 막차라는 조건 때문에 오는 대로 기다리다 보니 그야말로 콩나물 시루 버스이다. 그 땐 살 것도 왜 그리 많았던지 이고 든 것이 한 두 개가 아니다. 게다가 여름 철에 수박을 사서 들고 버스를 탔다가 흔들거리는 비포장도로로 인해서 그것이 깨어져서 버스안은 한 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거기다가 버스요금을 그 복잡한 통로를 비집고 다니면서 받다가 보니 그 속에서 또 한바탕의 아비규환이 일어난다. 어디에서 타서 어느 곳에 내리는지에 따라서 요금이 다른데도 아무런 증표가 없으니 시비가 끊어지질 않는다. 그러나 총각들은 그 때가 은근히 신이 난다. 동글동글 예쁘게도 생긴 차장 아가씨들과 몸을 부닥쳐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보니 일부러 몸을 비비적 거리면서 차와 사람에 밀리는 듯 버드나무 줄기처럼 흔들거린다. 그래서 처녀와의 신체적 접촉을 최대한 활용한다. 그 때만큼 앉은 자리에 따른 선착순이 부러운 때도 없었다. 그래서 5일장은 시골 사람들의 생일이라 할 정도로 기다려지는 날이었다. 버스 속에서 일어났던 갖가지의 재미나는 이야기와 시장 터에서 사돈과 막걸리를 한 잔 하면서 주고 받은 저간의 소식, 그리고 갖가지의 물건을 사고 파는 과정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주고 받는 그 모습들은 꼬마였던 나에겐 그곳은 천국처럼 느껴졌던 또 다른 세계였다. 그 이후 반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은 어느 분야에서건 서두르기만 하면 자기 자리를 안심하고 확보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있어서 생로병사의 일련의 과정 속에서의 차례는 예나 지금이나 보장 받을 수가 없다. 지난 주말 28일(토)에 채스우드에서 일어났던 불행한 사건의 최모 양의 영결식을 집전했다. 이 곳 시드니에 와서 여러 유형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 보았지만 그날처럼 비통의 현장을 목격하긴 처음이었다. 그녀의 부모들은 땅바닥에 주저 앉아 거의 실신 직전의 애통함을 토로했다. 특히 그의 아버님은 관에 매달려 “내하고 바꾸자”며 주저 앉고 서길 몇번이나 반복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많은 조문객들도 여기 저기서 훌쩍거렸다. 인생행로의 여정 속에서 차례대로 마감하지 못할 때의 고통의 무게를 바라보면서 차례의 소중함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 누가 부모보다 앞서는 그 길을 선택하길 바라겠는가? 그렇게 되기까지는 그 만큼의 본인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그 어떤 큰 짐이 있었을 것이다. 그 무거웠던 짐 속의 내용물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문득 한국에서 일하는 어떤 형사의 말이 생각난다. “끔찍한 사건사고의 경우 98%는 돈과 애정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번의 경우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부모의 가슴속에 대못을 박아두고 떠나게 하는 그 재색(財色)의 정체에 대해서 우린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바르게 관리해야 될 것인가? 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쉽지는 않겠지만 깊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 고려 때의 보조국사는 그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재물과 이성을 잘못 관리하는데서 나와지는 재앙은 살모사에게 물리는 것보다도 더 클 수가 있다(財色之禍 甚於毒蛇). 그러하니 그것을 탐닉하는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려서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할 것이다(省己之非 常須遠離)”. 차례됨의 순리는 안정되고 평화롭다. 4계절 변화의 차례 속에서 만물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그 기운을 받은 우리 인생 또한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친다. 그런 이치를 불교에선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했다. 모든 것은 변하니 고정된 실체는 없는 것이라고... 그 이치 속에서 부모가 앞장서고 자녀들이 뒤따라가는 순차적 질서는 진리에 부합되는 아름다운 모습일 수도 있겠다. 흐르는 강물을 따라 내려가는 뗏목에 탄 사람들은 콧 노래를 부를 수 있겠으나 그 물을 거슬러 뗏목을 밀고가는 그들의 힘듦은 아는 이만이 알고 있는 일이다. ‘부모보다 앞서가는 불효가 없다’ 는 그 말을 되새김하면서 그 엄중한 차례를 지킬 수 있는 삶의 행로가 유지되도록 우리 모두가 긴 외나무 다리를 건너 듯 조심 조심 살피고 또 살펴야 될 일이다. 기후 스님(정법사 회주)

02/11/2017
금요단상 - 기후 스님

먼동이 트니 차들이 질주하고 나무위에는 새들이 지저귄다. 그렇듯 뭇 생명들은 밝음의 기운을 받아서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것이 살아있음의 일차적 현상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움직인 만큼의 대가에서 나오는 소득으로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간다 그것이 충족되면 정서적 안정을 추구하려는 2단계를 지향한다. 코리안가든(Korean Garden) 건립목적의 경우, 그 2단계의 성취욕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벚꽃이 필 때면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어번의 재패니즈가든(Japanese Garden)을 둘러보면서 우린 왜 이 정도의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을까하는 비교 하위적 아쉬움에 젖어 들곤 했었다. 그러한 마음이 함께한 바탕이 코리안가든의 건립을 희망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10년 전 2007년도에도 그 문제로 인해서 소란스러웠다. 그때 필자는 신병 치료차 한국에 가 있었다. 어느날 법등 주지스님이 내 처소를 방문했다. 그는 몇 장의 서류를 내어 보이면서 장황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코리안가든의 건립 가능성이 가시권에 들어 왔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스트라스필드 카운슬(Strathfield Council)에서 부지를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가 나왔고 그 규모가 3만평 정도 된다고 했다. 그 부지 중 일부에 정법사를 지을 수 있다고 하면서 그 조건은 조계종에서 정원건립 비용을 전부 충당하면 된다고 했다.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면서 열변을 이어갔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듣고만 있었다. 그가 그렇게 힘주어 말할 수 있는 배경은 매우 간단했다. 그 당시 문광부 장관으로 취임한 이와 구룡사 정우 스님과 상당히 친분이 있는데다가 며칠후 면담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고 했다. 그 때에 문화정책 차원에서 코리안가든 경비를 건의해 보겠다고 말을 한 것이 전부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다소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특정 종교 단체로 정부 돈을 지원 받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을 것이란 말만했다. 그 뒤에 시드니 현지에서 그에 대한 언론 보도를 알아보니 비슷한 상황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정우 스님에게도 전화를 해서 알아보니 그 장관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호주에선 거대 종단을 들먹이면서 그 큰 자금이 마련되어 있는 줄 알고 주도권 다툼으로 시비를 벌이고 있었으니 정말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기독교계에서 반대해서 그 사업이 무산되었다는 식으로 책임 전가를 하면서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그로부터 꼭 10년 후 2번째의 시도에서는 자유당 시의원들의 지지로 다소 조직적으로 여러해 동안 애쓴 흔적은 있지만 최근 아쉽게도 또 다시 절망적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같은 사안에 대해서 왜 두 번째의 실패를 맞이하게 되었을까? 하긴 재수, 3수도 있고 7전 8기도 있다. 그렇지만 우린 그런 실례를 들어가면서 우리 교민 스스로를 위로만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개인은 의지력만 강화시키는 성실함만 있으면 다음을 바라볼 수 있지만 우리 한인사회는 도리어 무기력에 빠지면서 불신감이 조장되어 그에 대한 응집력이 더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많은 교민이 희망하는 코리안가든 건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주에 발간된 모 월간 잡지에 이런 기사가 게재됐다. 지금 경영난에 빠진 코카콜라의 새 CEO로 입명된 제임스 퀸시(James Quincey)는 "실패하되 똑똑하게 실패하라"는 말로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전기자동차업체 테슬라의 최고 경영자 멜론 머스크 역시 "실패는 하나의 옵션이다"라고 했다. 더 나아가 G&P라는 세계적인 회사는 실패를 통해서 깨달음을 준 직원이나 팀에게 영웅적 실패상을 수여하면서 직원들의 도전 정신을 키운다고 했다. "다만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있다. 똑똑한 실패가 필요하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언급한 똑똑한 실패는 그 실패적 결과를 통해서 최대한 많은 것을 배운다는 것이었다. 그 실례를 7가지를 제시했는데 그 중에서 코리안가든의 경우에 가장 적합하게 느껴지는 것은 5번째의 것이다. "불확실성을 통제한다는 결정을 내리는 시점에서 해소해야 할 불확실성의 수는 최소화될수록 성공의 비율은 높아진다"라는 부분이다. 이에 견주어 보았을 때 코리안가든 건립추진위가 구성되었을 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재원 조달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이에 대한 동포 사회의 우려에 대해서 그 불확실성이 얼마나 해소되었던가? 이 부분에서 애쓴 당사자들은 좀 서운해 할 부분도 있을 것이다. 건립기금 마련엔 무관심 하면서 잘 안 되면 뒷전에서 타박만 일삼는다고.. 그렇듯 냉소적인 것은 우리 한인 사회가 그동안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 책임을 그 어떤 대상에게 떠넘기기 바쁘다보니 서로간의 불신만 가중됐다. 이른바 ‘멍청한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러면 왜 그런 일이 반복되고 있을까? 일단은 주먹구구식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이라는 점이다. 가령 2천만불의 소요 경비가 필요하다면 그 절반 정도라도 확보해 두고 시작해도 주민 반발 등 여러 저해 요소들이 생길 수 있다. 그런데 거의 5년 동안 모은 기금이 5만불도 안 되는 소액으로 기천만불의 공사를 하겠다고 발표한 한인들이 아니었던가! 그저 막연한 생각만으로 정부 기관과 대기업과 연결하면 어느 정도의 지원이 있을 것이라거나 명분뿐인 자매결연 도시에서도 얼마만큼의 보조가 있을 것이라는 추상적인 계산으로 일관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저 식당 머리에 앉아서 가상적인 관념에 사로잡혀서 그 큰일을 해 내겠다고 사진을 찍고 기사를 내 보내서 그 만큼 우려의 폭은 더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그에 대한 대안은 어떤 것이 있는가? 필자의 생각은 건립 추진을 아예 그만 두는 것이 최고의 대안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한인 사회의 현재 상황으로는 아직 때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 근거는 불신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신용을 상실한 사회는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 설령 그 어떤 일이 뜻대로 이뤄졌다 하더라도 곧 분열과 시비를 낳게 된다. 그 바탕이 불신이기 때문이다. 우리 동포사회에서 가장 유력하고 합심이 잘되는 곳은 종교 단체이다. 그곳에 가면 힘 닿는대로 상당한 성금을 낸다.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만일에 코리안가든의 건립에 우리 동포 모두가 공감을 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되겠다는 신뢰가 형성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합심해야 된다면 자기 집을 소유하고 있는 1만 세대가 1천 달러씩 1년동안 납부하면 1천만불의 기금이 마련될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현재의 시드니 동포 사회에선 그런 일을 맡을 만한 적임자가 없다고 할 정도로 신뢰지수가 낮아져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일단은 개개인의 사업에 충실하게 일하면서 부를 축적하고 서로간의 신뢰를 돈독하게 쌓을 수 있는 본래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래서 복, 덕이 많고 지혜있는 인사들이 출현해서 흩어진 동포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다. 그 때 남의 곳간을 넘어다보면서 우리 집을 지으려고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접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코리안가든을 설계하는 당당한 한인으로서의 자세가 확립될 것이다. 그 언제쯤 3번째의 코리안가든 건립 움직임이 성사되어 무궁화 동산을 거닐면서 한인됨의 자긍심을 느끼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기후 스님(정법사 회주)

10/08/2017
금요단상 - 기후 스님

오래 간만에 한국에서 온 도톰한 책 한 권을 받았다. 80년대 초반 길을 가다가 마주쳐서 몇 마디의 말을 건넨 것이 인연이 된 그 분의 책이다. 상담심리학을 전공하고 있었던 그는 내 처소에서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재미있는 얘기를 많이 해주었다. 나는 정신없이 들으면서 크게 관심을 보였더니 그 자세가 40여년 가까이 이어져 오면서 책을 보낸 것이었다. 나는 그저 여러 사례들과 함께 논리정연하게 얘기하는 것에 재미가 있어서 그저 들었을 뿐인데 심리학자의 입장에선 그런 공감과 지지가 무척 돋보였다고 나중에 편지로 전해 주었다. ‘ 침묵이 금이다 ’ 라는 말이 그를 두고 했을까? ‘ 불편한 관계 걷어 차기 ’ 는 바로 그가 보낸 책 제목이다. 한국에서 심리학 공부를 하다가 미국에 가서 그 분야의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서양인 중심의 기존 심리학은 한국인에겐 어느 부분은 적용하기가 부적합하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걸맞는 새로운 틀의 이론을 제시하며 ‘ 역동 심리학회’ 를 만들어서 꾸준하게 연구해 오고 있다. 이번에 보내온 책은 그의 4번째 저술로써 수많은 상담 사례 중에서 중요한 내용을 뽑아서 만든 것이었다. 그 내용을 단숨에 다 읽고 책장을 덮고는 허공에서 솜털처럼 떠도는 백운을 바라 보면서 가녀린 한 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많은 갈등을 안고 고달프게 사는 사람들이 저렇게도 많을까? 불편한 관계를 가져다주는 그 원인은 무엇이며 또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공을 차버리듯이 걷어 차서 내 마음속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는 특출한 묘방(妙方)은 없는 것일까? 특히 이민자의 특수한 삶의 현장에선 그 불편한 관계가 생길 수 있는 요소가 더 많은 것 같다. 그것을 수업료를 지불한다고 점잖게 표현한다. 적게 낸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고 어떤 이는 전 재산을 탕진하고 패가망신한 이도 더러 있다. 주 원인은 언어 불통으로 인해서 법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곳에 살고 싶어하는 욕망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법률 전문가에게 의지하거나 먼저 와서 산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조언을 듣는 과정에서 잘못되면 큰 수업료를 지불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떠한가? 난 상대를 내 맘처럼 믿다가 상당한 수업료를 지불하면서 큰 고통을 당했다. ‘ 믿음은 수행을 하게 되는 근본이고 모든 공덕을 짓게 되는 모태이다. 또한 일체의 선행을 기르게 되어 의심의 그물을 끊어 버리게 하는 좋은 마음 자세이다. ’ 화엄경에 나오는 거룩한 말씀이다. 그러한 선행의 순수한 믿음 자세를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 드는 도구로 역이용하려는 이들이 교민 사회에선 오늘도 미소띈 얼굴로 힘들게 살고 있는 이들에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급할수록 돌아가라 ’ 는 말과 ‘ 아무리 바빠도 바늘 허리 매어 못쓴다 ’ 는 격언은 다들 알고 있지만 막상 자신의 일로 닥치는 난감한 상황이 되면 허둥대며 서두르기 마련이다. 많은 수업료를 챙기려는 이들은 그런 심리를 십분 활용한다. 안될 일을 된다고 한다거나 어려운 것을 쉽다고 말해 줘서 일단은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다. 그러다가 결과가 좋지 않으면 불편한 관계가 형성된다. 그것을 최소화하려면 무슨 일이건 신중하게 접근하는 꼼꼼한 자세가 요구된다. 특히 친척이나 친구 등과 함께 무슨 일을 도모하다가 잘못되어 피차가 불행하게 되는 경우를 가끔씩 보게 된다. 어떻게 하면 그 불편한 ‘업 덩이’를 내 품에서 걷어 차서 없애 버릴 수가 있을까? 그 책에선 여러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있으나 내용은 비슷한데 같은 처방으로 해소가 안 되는 부분도 상당히 많았다. 살아온 여러가지 조건과 경험들이 각양각색이기 때문이니 ‘ 병 하나에 약은 천가지이다 ’ 라는 말이 이를 입증해 준다. 모든 사람들이 어떤 유형의 것이건 불편함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상당한 분량의 그 불편함을 간직한 채로 살고 있다.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 상황인가? 아니면 생존에서 주어진 필연적 과정으로 감수해야만 되는 각자의 몫인가? 내가 당한 과정적 해법을 생각해 본다. 우선은 문제의 발단에 대한 역추적으로 거슬러 되돌아 가서 깊은 생각을 해 본다. 그곳에서 자신의 부실했던 부분과 만날 수 있는 일말의 경솔했던 허물이 보인다. 그 때엔 결과적 책임을 반반으로 수용하게 되어 원망심은 반으로 줄어든다. 그 다음은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모두들 이 먼 타향에 와서 살아 보려고 몸부림 치는 인간의 군상들, 자세하게 바라보면 너나 없이 측은하게 생각되는 가없는 생명들이다. 자비와 사랑으로 보듬어 주어야 될 대상들이다. 여러가지로 얽힌 껄끄러운 관계가 회복되면 더 없이 좋겠지만 그 반의 무게라도 걷어차 버릴 수 있다면 멀지 않은 미래엔 그 불편함이 온전하게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 기후 스님(시드니 정법사 회주)

25/02/2021
금요단상 - 기후 스님

기후 스님 날씨 변덕이 매우 심하다. 월요일엔 여름처럼 덥더니 화요일은 가을같이 서늘하다. 모든 것은 이렇듯 변화의 연속이다. 일러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테스형도 지나가고 코로나도 사그러질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그 이치에 역행하는 것이 하나 있다. 좀처럼 시비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인은 60 여 년전 선거 부정으로 이승만 물러 가라고 형들 따라 소리 지르면서 국회 의원 집에 가서 불을 지르려는 그들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 지금 까지도 그와 유사한 시비가 주기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생각해 보면 옳고 그름에 대한 명확한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이고 그 대상은 권력자들에게 해당되는 내용이다. 불경에 중맹모상이라는 말씀이 있고 세상엔 아전인수격이라는 격언(格言)이 있다. 전자는 여러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각자가 만져 본 부위만 고집한다는 뜻이고 후자는 잘 알다시피 큰 가뭄이 왔을 때 자기 논에만 물을 댄다는 뜻이다. 특히 한국에선 그런 현상이 더 심화되고 있는 듯하여 정말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나마 그전엔 고개 숙이고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있어서 앞으로는 좀 나아지겠거니 하고 위로를 받기도 했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무조건 억지를 부리며 변명을 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리스로 날아가서 테스형에게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다. 참, 장님 코끼리 만진 식이며 아전인수가 너무 심한 작금의 현상이다. 그 어떤 문제가 발생했으면 우선은 법 절차에 따라 모든 것이 해결되어야 함은 법치 국가에선 재론할 여지가 없다. 물론 우리 인간이 제정한 헌법 등 기타의 법령 등에 완전무결은 없지만 그나마 일차적 시비를 가리고 거기에 따라 승복하는 것은 민주사회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근본적 원동력이다. 그런 이론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법의 허점을 노려서 자기 논에만 물을 대려고 억지를 쓰고 있으니 민초들이 보았을 땐 가슴이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옛말에 먹줄에 의지하지 않고 대패질을 하는 목수에게 집 일을 맡길 수가 없고 국경을 잘 지키지 않는 군인들에게 보초를 세우게 되면 머지않아 평화가 무너진다고 하였다.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비슷한 내용의 시와 비에 대해서 분명하게 판가름을 못하고 허둥되는 우리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으며 그 해결책은 어떤 것일까? 우선은 중맹모상의 어리석음에서 벗어 날려고 애를 써야 된다. 우린 누구나 각자의 견해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정치 얘기만 나오게 되면 그 분위기가 혼란해지는 현상이 바로 우리들의 현재의 모습이다. 그 다름을 이해는 하고 있으나 그것이 현장에서 회자되면 다름은 어디론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자기 주장과 고집만 남는다. 옳고 그름에 대한 냉정한 객관화는 사라지고 자기가 만져본 코끼리의 등짝에만 매몰되어 코끼리는 평편하게 생긴 동물이라고 우겨 대기만 한다. 어찌됐건 자기 논에만 물을 대서 자신의 나락만 살리고 보자는 식이다. 거기에 패거리가 생기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힘과 수치와 교묘한 재주로 자기 식구들을 늘린다. 그 미끼가 바로 욕심을 채우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시비를 재는 눈금은 출렁거리고 사회는 혼탁해지며 국민들의 정서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최소 한도의 사회 규범인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데서 오는 분명한 결과이다. 자신의 주장이 진리에도 부합되고 상식에도 어긋나지 않으며 미래 세대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는 견해일까? 아전인수격의 감정만 앞세워서 시비를 제대로 가름할 수 있는 각자의 안목이 확립되지 않는다면 조국의 미래는 암담해질 것이다. 일분 일초라도 자기의 주장과 견해를 허공에 떠 올려 놓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평가하는 시간을 가질 때 자신도 좀 더 성숙되고 조국도 당당해질 것이다. 평온한 마음으로 지혜의 눈을 뜨고 코끼리 전체를 바라보면 시비가 잠적할 것이고 남의 논의 나락이 비틀어 지는 것을 자세히 눈 여겨 보면 그 논에도 물을 주게 되는 넉넉한 마음이 생겨날 것이다.

19/11/2020
금요단상 - 기후 스님

지구촌이 코로나 천국이 되었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유별나다. 마스크 대란에다 신천지가 열리더니 금테 손목 시계가 등장한다. 도대체 왜 이렇게 소란스러울까? 세상살이가 복잡하다고 하지만 지금처럼 혼란스러움은 처음이다. ‘코로나’란 무슨 뜻일까? 이 바이러스를 현미경으로 확대해 보니 왕관처럼 되어 있으며 라틴어로 왕관이 코로나라고 한데서 이름 지어졌단다. ‘왕관의 모습’이 왜 이렇게도 만민을 불안에 떨게 만드는가? 어질지 못한 임금은 백성을 고달프게 만든다. 무지로 인한 탐욕이 괴질(怪疾)을 낳고 그것으로 인해 백성은 불안에 떤다. 그렇다고 마스크만 쓰고 걱정만 하다가 그 고비만 넘기고 말면 언제 또 다시 그런 상황을 만나야 될지 모른다. 백신과 마스크를 만드는 노력과 함께 그런 병이 생기게 된 근원을 파악해서 삶의 태도와 마음 씀씀이를 고칠 수 있는 지혜를 계발해야 한다. 현상과 결과에만 매몰되어 허둥지둥 대는중생의 삶 속에서 암담한 미래를 예견한다. 구 한말에 이 땅에 살았던 경허(鏡虛)선사는 우리들에게 매우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는 매우 영리했던 분으로 충청도 공주 동학사 불교 전문대학 교수로 봉직하며 온갖 수승한 대승 경전을 섭렵했다. 어느 여름 방학을 맞이해서 스승을 만나러 가다가 천둥 번개와 함께 소나기가 내렸다. 급한 김에 비를 피하려 대문을 두드렸다. 대부분의 집들은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드물게 문을 연 주인은 살고 싶으면 얼른 이 동네를 떠나라고 하였다. 지금 이 동네엔 ‘호열자(虎列刺)’란 전염병이 생겨서 집집마다 사람이 죽어 나간다는 것이다. 그 땐 콜레라를 호열자라고 불렀다. 호랑이가 살 점을 찢어내는 듯 고통스럽고 무서운 병이라는 뜻이다. 집집마다 쫓겨난 경허도 죽음이란 문턱 앞에서 두려움에 휘둘렸다. 그는 벼락과 천둥이 번갈아 가며 치면서 큰 비를 몰고 오는 여름 밤을 큰 느티나무 아래에서 지새며 큰 시름에 잠겼다. 평소에 생사가 하나라며 죽음을 두려워 할 것이 없다고 큰 소리친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는 밤새며 생사에 따른 불안한 심정과 이론과 실제의 간극에 대해서 크게 고민을 한 나머지 발길을 되돌려 동학사로 왔다. 학인들을 모아 놓고 폐강을 선언한 그는 “ 내가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가르친 내용은 전부가 거짓이었다. 마치 배고픈 이가 음식 얘기만 한 것과 같았다. 난 내일부터 불안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알기 위해서 명상에 들되 그 답을 얻지 못하면 방에서 나오지 않겠다. ” 그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 가며 잠을 자지 않고 3 개월 간 피나는 용맹 정진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마을 집에 다녀온 시자가 문 밖에서 물었다. “스님, 오늘 집에 갔더니 부모님이 공부 잘 하고 있느냐? 고 묻기에 대충 대충 지나간다고 했더니 그렇게 공부하면 죽어서 소가 된다고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소가 되어도 콧구멍이 없는 소가 된다고 했는데 콧구멍 없는 소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 이 말을 듣는 순간 경허는 크게 깨달았다고 했다. 그러고는 깨달음의 노래를 지었다. ‘홀연히 콧구멍 없는 소란 말을 듣는 순간 이 세계가 온통 내 집임을 깨달았네 6월 달 연암산 자락에 오가는 이들 그 모두가 태평가를 부르며 한가롭게 노니네 ‘ 忽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我家 六月燕巖山下路 野人無事太平歌 그는 고함을 지르며 문을 박차고 나와 미친 듯이 날뛰었다. “ 콧구멍 없는 소라 콧구멍 없는 소” 그는 콜레라란 그 무서운 죽음의 인자를 통해서 생사를 극복하여 대 자유인이 된 것이다. 코로나 폐렴을 두려워 하는 것은 결국은 죽음이란 검은 그림자 때문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생사에 대한 깊은 통찰과 함께 밋밋하게 느끼며 짜증냈던 일상 생활이 얼마나 평화롭고 가치 있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또한 발병 원인에 대한 깊은 관찰을 동반한다면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되고 독사가 물을 먹으면 독이 된다는 옛 성인들의 말씀을 한번 더 귀 기울여 듣고 깊이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기후 스님(시드니 정법사 회주 스님)

12/03/2020
금요단상 - 기후 스님

살다보니 내가 쓰고 있는 방이 3 개나 된다. 빅토리아 애비뉴(Victory Ave.) 2번지와 4번지, 우드포드(Woodford) 3 번지의 블루마운틴 상락원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3 채의 집을 오가면서 지내니 집 없는 분들에겐 미안한 마음이 생긴다. 2 번지 방은 원래 주지실인데 전임 주지가 몸이 불편해서 자리를 비우게 되어 내가 임시로 그곳을 쓰게 되었고 4 번지는 내가 쓰고 있는 방이다. 우드포드(Woodford)의 집은 1년 전 인연이 되어 우리가 구입해서 내가 가끔 들리면서 사용하고 있다. 팔자가 좋은 것인지 또 역마살이 붙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텅 빈 기차를 타고 오가면서 푸른 겨울산을 바라보는 한가로움에 그저 미소를 짓는다. 그 보다도 더 훈훈함을 느끼게 하는 것은 이 산중에 며칠만에 주기적으로 오는데도 비워둠에 대한 불안감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곳은 약간 경사진 곳이라 문이 3 개나 된다. 언제나 열려 있는 그 문들이지만 언제 와도 같은 모습으로 제 자리에 서 있다. 그런 분위기를 바라볼 수 있는 시드니의 주택가들, 그래서 가끔은 이곳에 사는 것이 은근히 자랑스러울 때가 있다. 물론 부엌으로 들어가는 중간문은 잠그고 내려간다. 그렇지만 내 방 3 곳은 열쇠가 없다. 한국에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소유를 생각해서 일부러 적게 가져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른 이가 탐이 나서 갖고 싶을 만한 물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였는지 옆방 승려들이 출타시에 주먹만한 큰 자물통을 잠궈둔 모습이 내 마음엔 그리 좋게 보이질 않았다. 그 스님들은 귀한 책이나 고가의 미술품 등을 소장한 이도 있었지만 그런 물품이 전혀 없는 승려들도 나갈 땐 반드시 문을 걸고 나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곳에 와서도 마찬가지로 나의 호주머니엔 내 방 열쇠가 없다. 하긴 있는 것이라곤 잿빛 장삼과 가사, 불경책 몇 권이니 기독교 일색인 이곳에서 그걸 누가 가져갈 것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메디케어 카드 등 신분에 관한 것들이다. 그런 것은 손들개 작은 천가방에 들어 있으니 그것만 들고 나오면 만사 오케이다. 잠그지 않고도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 시드니의 분위기, 시간이 지날수록 이곳에 살고 있음에 대한 자부심이 이따금씩 물안개처럼 피어 오른다. 이런 분위기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그 도를 더해간다. 언젠가 브리즈번 가는 길목에 아보카도 모양을 크게 만들어 놓은 간판이 보였다. 그곳에 들려서 농장 구경을 했는데 그 근처에 작은 바나나 줄기를 수북하게 쌓아 두고 가격만 적어 놓고 아무도 없는 현장을 목격하였다. 그 많은 차량이 오가는 도로변에서도 돈 통만 놓아둘 수 있는 그 신뢰의 길, 그런 길을 오갈 때의 발걸음은 한결 더 가볍고 마음 또한 상쾌하다. 어느 때였던가? 어딜 찾아 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 만나게 된 시골 마을 길가에 계란 박스를 소복하게 쌓아 두고 그 곳 역시 값만 적어 두고 돈 통만 곁에 있었다. 작은 플라스틱 통 속엔 20 달러, 5달러 등의 지폐와 동전이 제법 많아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믿고 사는 세상의 넉넉함이 내 마음을 움직여서 3 박스나 사게 되었다. 드러내 놓고 신뢰를 보일수록 그 믿음은 두배의 신뢰로 향기까지 더해져서 주인에게 되돌아 간다.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기분좋게 살 수 있다는 증표를 내보인 두 곳의 모습, 호주의 시골은 그런 풍경이 있는 곳이 상당히 많을 것이다. 본인의 방 열쇠 없음이 욕심 적음의 은근한 자랑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건 아니다. 가만히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 나의 성정이 본래 그렇고 그것은 자신이 지은 복력의 크기가 그 만큼이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많이 가지며 지키는 것도 그 만큼의 힘과 분수가 받쳐 주어야 된다. 나는 그런 것이 있으면 도리어 짐스럽고 마음이 불안하다 보니 내 살기에 편안하기 위해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고 보면 또 다른 이기적 발상에서 그렇게 된 것이다. 화엄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 ‘단비 시방에 골고루 내리지만, 그릇만큼 사람들은 받아 간다네.’ 열쇠 없는 3 개의 내 방은 내 몫 만큼의 풍족한 공간이 되어 주고 있는 오늘과 내일이다. 기후 스님(시드니 정법사 회주 스님)

25/06/2020
금요단상 - 기후 스님

반면교사(反面教師)라는 말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자성어(四字成語)이다. 남들이 하는 잘못된 언행을 보고 자신의 잘못을 깨우친다는 뜻이다. 그것에 약간의 변조를 더해서 반경교사라는 언구는 본인이 흉내내 지어본 말이다. 반면이 대상을 통해서 어떤 것을 배운다는 뜻이라면 반경은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가 바라 보면서 뭔가를 다짐하고 개선해 보려는 근접적인 의지적 노력이다. 우리 사찰엔 3 개월 전에 한국에서 특별 초대된 성화 스님이 기도하고 있다. 나와는 절친한 도반으로 바쁜 와중에서도 큰 마음 내어 왔는데 때마침 코로나 때문에 2주간 격리를 당하고 49일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를 봉행하게 되었다. 윤달이 든 해에 자신이 지은 허물을 49일간 스스로가 부처님께 참회하는 불교의 전통 의식 중의 하나이다. 그전 같으면 동참한 이들과 함께 기도하게 마련인데 이번엔 혼자서만이 하게 된 특이한 경우가 된 것이다. 곁들어서 지난번 산불로 희생된 사람들과 숱한 동물들의 영혼들을 위한 위령재도 함께 드리게 되었다. 무슨 일이나 기도든지 여럿이 함께 하면 좀 수월한데 혼자서 해보면 힘이 들게 마련이다. 힘을 좀 얻은 이들은 혼자 행할수록 그 방면에 더 깊게 침잠할 수도 있다. 이 스님은 기도에 가피를 입은 분이라 처음엔 하루 10시간 4회씩 나누어 진행하다가 점점 기도 열락(悅樂)에 빠져들어 시간을 늘리게 되었다. 마지막 일주일을 남겨두곤 16 시간을 채우기로 작정하고 기도에 몰입했다. 그 시간을 한층 더 효과적으로 채우기 위해서 법당에서 하다가 장소를 옮겼다. 큰 법당에서 복지원 골방으로 가 기도를 하게 된 것이다. 큰 공간은 기력이 산만해지기 쉬우나 작은 골방은 안정감을 주게 된다. 우리가 어머니 태중에서 10 개월을 보호받으며 성장한 그 배경이 그런 영향을 느끼게 한다는 말도 있다. 그 방엔 옷장문이 두개가 있는데 한쪽 전면이 거울로 만들어졌다. 너무 크고 보기도 좀 안돼서 내가 중앙에 큰 거울 크기로만 두고 나머지 부분은 세로판으로 막아 버렸다. 처음엔 그 거울에 졸리는 듯한 자신의 흐트려 지려는 모습을 바라 보면서 일념을 챙겨 정신을 차리다가 나중엔 세로판 전부를 걷어내 버리고 자신의 전부가 보이도록 기도를 드려보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기도가 그렇게 잘 되었다고 했다. 반경교사는 그 얘기를 듣고 내가 써 본 신 사자성어인 것이다. 우린 대상을 통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반면교사의 경우는 가끔씩 만나나 반경의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반면에 자신의 모습을 자기가 바라보며 개선점이나 창의력을 찾다보면 참으로 흥미로움을 느낄 때가 많다. 우선은 가깝고 깊게 응시할 수가 있기에 깊은 통찰력을 발휘하게 된다. 반면이 일회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교사라고 한다면 반경은 항상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현재적 교사가 되는 것이다. 이번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 모두는 큰 불편을 겪었다. 홀로 갇혀 있으면서 거래가 중단된 상황에서 여러가지를 새롭게 느끼게 되는 내용도 많았다. ‘일실일득(一失一得)’인 것이다. 하나를 잃으면 또 다른 하나를 얻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그 어떤 큰 재난이 또 닥칠지도 모른다. 인구가 많고 과학이 발달되어 살기가 편안해 질수록 반대급부로 그 어떤 고약한 일이 발생하여 우리들을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 이번에 코로나가 주는 불편으로 인해서 인생과 삶이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살면 그런 재앙를 물리칠 수 있을지 깊이 있게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는다면 코로나에게 고마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그를 환대하게 되면 코로나도 고맙다고 하면서 빨리 우리 곁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반면과 반경을 함께 아울어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해야 할 것이다. 기후 스님(시드니 정법사 회주 스님)

21/05/2020
금요단상 - 기후 스님

유난히도 봄볕을 그리는 시간이 길었던 이번 겨울이었다. 그 기다림 속엔 변화를 바라는 희망의 싹이 움트고 있고 새로움을 창조하려는 생명의 기운도 함께 한다. 창문 너머로 바라보이는 푸른 봄 하늘엔 몇 조각의 새털구름이 한가롭게 노닐고 청록색 가로수 잎새 속엔 새들의 지저귐이 요란스럽다. 따뜻하고 밝은 기운에 바람 한 점 없는 이런 날엔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반복되는 일상의 갑갑한 테두리를 벗어나서 대자연의 조화로움과 상쾌한 기운을 함께 느껴보라는 천지신명의 부추김일 것이다. 그 기운에 떠밀려서 가까이에 있는 플라워 파워에 갔다. 엔필드에 있는 그곳에 가면 갖가지의 나무들과 예쁜 꽃들도 많이 볼 수 있고 분위기 있는 커피숍에서 담소도 나누기가 좋아서 가끔씩 찾게 되는 그곳이다. 거기엔 봄기운이 완연해서인지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들은 비료와 꽃 등을 트롤리에 가득 싣고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계산대에 줄을 지어 있었다. 우리도 화단을 한 바퀴 돌아 보면서 마음에 드는 화분 등을 점찍어 두고 차 한잔을 마셨다. 눈에 익은 노란 부리의 새들이 겁도 없이 식탁에 날아와서 과자나 설탕을 빼앗아 먹는 모습이 너무나 훈훈한 느낌을 준다. 한국에선 도저히 볼 수 없는 평화스러움의 한 장면이다. 난 꽃씨가 진열되어 있는 곳으로 갔다. 일단은 꽃 그림을 보면서 한 바퀴 돌았다. 어떤 꽃을 심을까? 우선은 내가 아는 꽃에 일순위를 두고 그다음은 꽃의 화사함을 보면서 꽃씨를 골랐다. 코스모스와 사루비아, 국화 종류가 선택되었고 이름 모르는 다섯 종류의 꽃씨들도 더 보태졌다. 사찰에 돌아와서 이미 준비해둔 화단과 화분에 정성 들여 꽃씨를 심었다. 그때 어떤 한국인이 내 등 뒤에서 말했다. “기와 담장이 너무나 참해서 지나다 들렀는데 한 번 둘러봐도 괜찮겠습니까?” 70대 정도로 보이는 그녀는 자태가 매우 우아하였고 후덕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그런 인상이었다. ‘저분은 마음씨가 참으로 좋겠다’는 생각에 미치자 상당한 상념이 떠올랐다. 꽃씨에 비교되는 마음씨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수 년 전 KBS2에서 “마음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심층 보도를 한 적이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생물학자, 과학자, 의사, 심리학자를 상대로 이영돈 PD가 야심한 기획으로 제작된 작품이었다. 결론은 “마음이란 그 무엇이라고 정의 내릴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라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마음도 모르는데 마음씨를 규명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것임이 틀림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일상 생활 속에서 마음씨가 좋아 보인다거나 고약할 것 같다는 말을 자주 듣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어림짐작의 판단을 하게 하는 근거는 얼굴이다. 얼굴은 글자 그대로 얼이 모인 굴이라는 뜻이다. 그곳의 형태와 눈, 귀, 코 등의 감각기관 조화와 거기에서 나와지는 여러 기능들, 그리고 피부색에서 나와지는 여러 가지의 상태를 직감적으로 판단하게 하는 그 바탕이 바로 우리들의 얼굴이다. 그런 이해가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면 마음씨의 모습은 어림짐작이 가능하다. 바로 그 얼이 마음씨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것은 모습도 질량도 없다. 그 어떤 것에도 제재받지도 않는다. 그 때문에 그로 인한 결과 역시 무한대의 파장을 일으킬 수가 있다. 그 소중한 것을 어떻게 가꾸어야 할까? 얼이 마음의 본바탕이라고 하면 생각은 그것에서 파생된 영향력 있는 실체적 에너지이다. 불교 인식론에 유식철학(唯識哲學)이라는 것이 있다. 만법이 오직 한 생각의 영향권에서 지배된다는 것이다. 그 학문만을 7년 동안 공부해야만 이해될 정도로 광범위하고 까탈스러운 조직으로 짜여 있다. 거기에 마음씨 가꾸기에 대해서인, 연과의 삼단론법을 통한 상의상관(相依相關) 관계에서 영향을 서로 주고받는 기본 이론이 전개된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는 이 인연의 원리로 이루어진다. 가을에 좋은 결실을 가져오려고 한다면 봄에 좋은 종자를 심어야 한다. 그리고는 여름을 지나는 동안 김도 매어주고 비료와 물 등등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때에 제공해 주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여기서 종자는 인(因)이며 돌봄은 연(緣)이다. 그렇다면 좋은마음씨란 어떤 것일까? 일단은 진실로 알차 있어야 한다. 거기에 성실함이 더해지는 관심이 지속하면 가을 곡간은 넉넉하게 채워질 것이다. 그러한 일련의 관계 속에서 전개되는 수확량의 총량적 결과는 인간의 삶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우린 서로서로 의지하면서 살고 있다. 그 매개체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씨의 오고 감이다. 신뢰하고 서로 존중하며 사랑하는 마음씨를 주고받을 때 우리들의 삶은 농익은 열매로 행복감을 채우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어떤 마음씨를 가꾸고 있는지는 나에게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게 된다. 옛 성현의 글에 “잔디 속의 나무는 석 자 이상 크지 못하고 소나무를 의지한 칡은 천 길을 따라 올라간다”고 하였다. 마음이 좋게 보여지는 얼굴 모습을 가짐엔 그만큼 주변의 여러 인연들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다는 뜻이다. 우리 한인 사회의 여러 정황들이 더러는 마음씨를 잘 가꾸지 못하게 하는 흐트러진 내용들이 산재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선은 자신의 마음씨를 잘 가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로 인해서 나와 인연된 주변의 사람들도 그들의 마음씨를 잘 가꾸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이다. 화사하게 피어날 아름다운 꽃 모습을 상상하면서 여린 화초에 아침저녁으로 정성껏 물을 주는 허리 굽은 이웃집 할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기후 스님(정법사 회주)

07/09/2017
금요단상 - 기후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