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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달타(悉達多, 싯다르타)는 인도 가비라국(迦毗羅國, 카필라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의 뜻은 ‘다방면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는, 장래 통치자의 내공을 준비하라는 의미다.그는 자라나면서 그의 아버지인 정반왕의 뜻을 거부하려는 언행을 보였다. 약육강식의 잔인한 생명 세계의 무자비와 권력의 횡포에 대한 깊은 회의 때문이었다. 불안해진 정반왕은 그의 마음을 되돌려 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 궁을 잘 지어서 모진 더위도 느끼지 않게 하고, 저녁엔 기녀들을 모아 춤과 노래로 밤을 지새운다.어느 날 저녁, 태자 싯달타는 잠들어 있는 무녀들의 방안을 보게 된다. 진한 화장을 하고 갖은 교태를 부리면서 노래와 춤을 출 땐 그럴듯하게 보였으나, 옷을 걷어붙이고 허벅지를 내놓고 코를 골며 잠꼬대까지 하면서 정신없이 자고 있는 그녀들의 모습을 본 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내가 저런 사람들을 좋아하고 함께 손뼉을 치면서 놀았다니…’ 그런 태자의 마음을 눈치챈 부왕은 서둘러 결혼을 시킨다. 예쁜 여성을 만나 자녀를 두게되면 그로 인한 애착심이 출가의 뜻을 막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의 부인이 아들을 순산했다는 소식을 들은 싯달 태자, 그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면서 독백을 한다. “오! 라훌라!” 이 말은 ‘장애’라는 뜻으로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쓰여졌다. 일말의 애정이 방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싯달타는 아무리 생각해도 출가수행의 뜻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의 나이 29살 되던 새벽에 마부 차익을 불러서 눈 덮인 히말라야 설산으로 혈혈단신 수행 길에 접어든다. 흔히 말하는 부귀와 공명이 보장된 왕권을 버리고 그는 왜 홀로 그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을까? 생존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인도 사회에서 수많은 철인과 수행자들을 만나서 많은 토론을 해 보았으나 한 사람도 성에 차지 않았다. 전통적 이론의 답습과 관념적 희론으로는 그저 흉내만 낼 뿐, 자신이 희망하는 근원적인 문제 해결은 어렵겠다고 판단한 그는 혼자서 6년의 명상에 몰입한다. 어느 날 새벽 그는 그가 그토록 원했던 정각을 이룬다. 모든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진리적 안목을 갖춘 것이다. 작은 나라의 왕이 되어 오욕락을 즐기려는 그 옹졸한 마음을 버리고, 출가하여 대도를 이룬 그는 불교의 창시자가 되면서 삼계의 법왕이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그가 발견한 진리의 요체는 연기론이다. 모든 존재는 이것과 저것의 관계 속에서 창조와 발전, 변화가 지속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는 중심 세력은 마음이라는 한 생각의 오묘한 작용이다. 인본주의가 핵심이 되는 불교의 원리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수많은 경전 중 대표격인 화엄경엔 이런 말씀이 있다.“만약 어떤 사람이 불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 내용을 알고 싶다면 이 세계의 모든 존재의 실상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임을 잘 관찰하면 된다.“불교의 용어는 언제 들어도 아리송하여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것을 쉽게 풀이해서 부연한 글을 논서(論書)라고 한다. 그 글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기신론(起信論)이다. 믿음을 일으키게 하는 글이라는 뜻의 이 책도 난해하고 딱딱하긴 경전 못지않다. 그래서 붙은 별칭이 ‘깐깐 기신’이다. 인도의 마명이 지은 것의 한문 번역본을 다시 한글로 해석하다 보니 어렵긴 매한가지다. 이 이론을 가장 명료하게 해설한 분이 신라 때의 원효대사이다. 불교는 마음이라는 오묘한 생각의 심층 심리를 다루는 분야라 그냥 지나가는 생각으로는 도저히 그 기저에 깔려있는 깊고 복잡다단한 감정의 흐름을 분명하게 파악하기가 매우 힘들다. 원효는 해골바가지 물을 맛있게 먹게 된 것을 계기로 마음의 본성을 깊게 깨달았기 때문에 기신론에 대한 분명한 해설을 할 수가 있었다. 당시 그렇게 콧대가 높았던 중국의 고승들이 앞다투어 원효의 글을 보고서 감탄했다고 하는 기록이 지금도 남아있다.논서엔 일심을 주제로 내세우고 두 문을 열어둔다. 우리의 마음엔 진심과 망심의 두 가닥이 있다. 거기서 본질과 모습과 작용이 함께 나와 설친다. 그렇게 되어 오염된 마음의 확산과 본질로 회귀하려는 양심적 작용이 복잡하게 전개되고, 그것이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키며 때론 전쟁과 살상을 일으키게 되는 역사를 창조하게 된다. 그의 원동력은 무지이며 무지는 진리를 모르는 한 생각에서 비롯된다. 무지는 가없는 자기 팽창을 추구하면서 그 목적지는 오욕락의 성취이다. 재물, 애욕, 식욕, 권력, 방탕이 그 중심 세력이다. 이 과정에서 개발로 인한 자연파괴, 권력을 연장해 보려는 권모술수와 독재, 온갖 부정과 부패가 잦아지면서 많은 문제를 양산한다. 이렇듯 일념을 앞세운 문명의 급속한 발달은 편리함을 제공하는 반면에 균등하게 적용되어야 할 창조성이 소멸되어 점점 더 물질과 문명에 기대게 되고, 진심의 응용력은 점점 감소해 간다.코로나 역시 그런 피폐한 인간의 탐욕에서 파생된 일종의 경고성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거래가 단절된 6월부터 지금까지 호미 하나로 땅을 파고 돌을 골라내면서 겨우 한 평 크기의 토굴을 만들었다. 그곳에 들어가면 가능한 한 핸드폰과 별거를 해야할 것 같다. 손바닥 속에 세계 정보가 다 들어있고 손가락만 까딱하면 한국에 있는 부모님과 얼굴을 바라보면서 대화할 수 있는 좋은 세상이 되었다.반면에 코로나로 인해 비행기가 멈추고 집 밖을 못 나가게 되는 이 불편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하면 좋을까? 옛말에 인간의 마음이란 사랑을 극대화하면 우주를 삼키고도 남을 수 있지만, 탐욕을 채우기 위해 시기하고 질투하는 생각은 바늘구멍에도 못 들어간다고 했다. 지나친 발달과 편리함의 추구는 인간의 본성을 훼손하고 공존의 상식을 허물어뜨릴 수가 있다.그래서 필자는 토굴에 들어가면 핸드폰을 하루 3번씩만 만질 작정이다. 전화기는 본채에 두고 토굴에서 지내다가 식사 때만 올라와서 전화나 문자 확인하고 응대할 생각이다. 그 전엔 그래도 한국 소식은 일부라도 알면 좋지 않겠나 하고 이곳저곳 유튜브를 들여다보았는데 이제 그 소식을 끊은 지가 두 달이 되어간다. 진실과 상식에 어긋나는 게 워낙 많은 줄 알면서도 이젠 좀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가끔 기웃거려 보았는데 이젠 아예 문을 닫아 버리기로 한 것이다.영어가 안되니 호주 TV는 처음부터 안 봤고. 안 보면 궁금하고 보고나면 짜증 나던 조국의 소식도 이젠 아예 끊어버릴 생각이다. 그러면서도 덕지덕지 흙을 발라 만든 한 평의 토굴에 두더지처럼 들어박혀 살려고 하니 나는 참으로 문명의 배반자가 된, 이 시대의 낙오자가 된 것이다. 문명의 배반자여! 그대는 이 시대에 무엇을 희구하면서 땅굴에서 먼산만 바라보고 있는가?기후 스님(시드니 정법사 회주) kgy8856@gmail.com

  14/10/2021
  금요단상 - 기후 스님

내가 머물고 있는 우드포드의 지세는 경사가 좀 심한 곳이라 전망은 좋으나 땅 사용도는 낮은 편이다. 2년 전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이따금씩 비탈진 곳을 바라보면서‘토굴을 하나 지어봤으면…’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곤 하였다. 오죽 대나무가 자라고 있는 곁에 손바닥만 한 텃밭이 하나 있는데 낮은 곳에서 쳐다보니 흙도 많은 듯해서 일하기도 수월하고 지상에 그리 크게 올라 오지도 않을 듯하였다. 하지만 다른 생각과 일에 밀려서 그럭저럭 지냈다. 그러다가 록다운이 시작된 6월경부터 이때다 싶어 호미 하나만 들고 그 일을 시작했다.창고를 정리할 때 눈 여겨 봤던 각목, 판자와 이곳 구석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여러가지를 주워 모으면 너끈하게 토굴 하나는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짝이 맞게 된 것이다. 나는 약골이라 삽이나 괭이질은 겁이 나나, 앉아서 하는 호미 일은 즐겨한다. 곧장 땅을 파기 시작했다. 시내 인근의 땅을 파보면 금방 딱딱한 붉은 흙이 나와서 일하기가 매우 힘이 드는데 이곳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흙 파기가 쉬워서 내 뜻대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니 재미가 났다. 갈 곳도, 오는 이도 없으니 일의 능률이 높아져서 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어느 정도 파고들어 가니 이게 웬일인가? 그 속엔 이 집을 지을 당시 못쓰게 된 벽돌 조각이나 돌 등이 소복하게 묻혀 있지 않은가? 난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파고 또 팠다. 이것 들로 벽을 만들고 흙만 넉넉히 바르면 멋진 토굴이 되는 것이다. 또 뭔가 짐작되는 곳 밑바닥까지 흙을 걷어내고 보니 방 하나 정도의 크기가 반석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뒷날 이곳에 토굴을 하나 지으리라는 예상을 하고 벽돌 등을 묻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부지런히 땅을 팠다.오직 호미 하나로만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자다가도 잠이 깨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에 잠긴다. 생각에 골몰하면 묘책이 나온다. 판판한 반석을 재어보니 가로세로 2m 40cm에, 1m 60cm 정도의 방은 될 듯 하다. 고작 한 평 정도의 크기지만 한 사람이 들어가 앉고 누울 공간으론 충분하다. ‘아무리 그래도 기둥 역할을 할 힘 받는 곳이 몇 군데 있어야 하는데…’하고 고심하던 중 이곳 저곳에 내팽개쳐져 있는 플라스틱 우유 박스가 떠올랐다. 그것은 상당히 단단하고 썩지도 않아서 매우 좋게 느껴졌다. 그곳에 깨진 벽돌 조각과 흙을 짓이겨 넣어서 차곡차곡 쌓으니 멋진 기둥이 된다. 다섯 개를 쌓으니 지상까지 올라오고 3개를 더 포개니 거의 2m 높이가 된다. 지붕이 문제였지만 봐둔 것이 있었다. 일하다가 남아 있는 널빤지 등등의 나무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그것을 볼 때마다 생각하곤 했었다.흔히 ‘도랑치고 가재 잡는다’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을 얘기하지만, 이 일을 하다 보니 일거삼득(一擧 三得)이 되었다. 못 쓰는 것들을 주워 모아 재활용하면서 구석기 시대의 토굴까지 생겼으니… 하여튼 집 주변 구석구석에 처박혀 있던 못 쓰는 돌조각 등이 총동원되었다. 이것도 집이라고 벽을 만드는데 많은 것이 필요하였다. 흙과 함께 벽을 만들다 보니 모양은 울퉁불퉁 볼품이 없어도 가능한 실용적으로 살려고 하다보니 벽을 두툼하게 만드는데 흙이 많이 쓰여졌다. 마침 경사진 곳이라, 여러 차례 흙으로 메꾸니 더 큰 힘이 되었다.땅을 파다 보니 맨 아래는 반석이고 그 위엔 노란색의 모래흙이며 그 위는 외부에서 가져온 흙으로 작은 돌과 섞인 황토, 또 그 위엔 검은 색깔의 거름흙인듯 하고 마지막으로 잔디를 깔기 위한 흙… 그야말로 층층이 흙이었으니 호미 하나로만 집을 짓는 본인에게는 그야말로 횡재가 아닐 수 없었다.땅을 파다가 보니 거북이처럼 생긴 큰 돌이 나왔다. 생각 끝에 작은 연못을 양쪽으로 2개를 만들었다. 빗물을 받는 2개의 큰 물통을 믿고 낸 나름의 아이디어였다. 처음에 생각만했던 일들이 점점 그 모습을 갖춰가고 힘들게 여겨졌던 문제들이 깊은 사유 속에서 척척 해결되어가니 손목이 얼얼하게 아파도 호미질을 할 땐 신바람이 난다. 거기다가 생각지도 않았던 연못까지 생겼으니…안팎으로 흙이 덕지덕지 발린 토굴을 바라본다. 꼴은 우스워도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훈훈할 것이다. 그곳에 홀로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서 명상에 잠길 일을 생각하면 가슴 속이 훈훈해짐을 느낀다. 이 모두가 코로나 덕분이다. 생각에만 맴돌았던 일이 그로 인해 실천에 옮겨졌으니 참으로 고맙지 않을 수가 없다.그 어떤 일이건 발생하게 되면 불편이 없을 수가 없다. 본인은 지금까지 개인이나 사회적으로 무슨 힘든 일이 발생하면 그 상황을 역이용하여 스스로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활용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이번 코로나의 경우도 그 습관의 하나에 해당한다.불경에선 말한다. 무슨 일이건 시작도 과정도 그 결과도 좋아야 된다고 하였다. 항상 마음 한켠에 도사리고 있었던 진짜 토굴을 하나 만들고 너구리처럼 그곳에 들어앉아서 궁상을 떨어봤으면 하는 희망이 있었는데 이곳 호주에 와서 겁 없이 땅을 파고 괴상한 황토방을 하나 만들었으니…없던 토굴의 형상이 하나 생긴 것은 한 생각 때문이고, 그 생각이 현실화된 건 코로나 덕택이다. 그 생각의 실체는 무엇이며 우리에게 불편을 안겨주는 코로나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둘 모두가 존재의 원천이며 생명력의 진원지라고 생각된다. 생각해보면 동질성의 다른 모습과 이름일 뿐이다. 이왕이면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도움되는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피차에 고맙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 하루를 보내면 어떨까?기후 스님(시드니 정법사 회주)

  02/09/2021
  금요단상 - 기후 스님

오랫동안 막힘이 지속되고 있다. 처음엔 마스크로 코와 입을 막더니 이젠 가고 오는 길까지 막고 있으니, 더욱 더 갑갑함을 느낀다. 그나마 트인 것은 전화나 유튜브뿐이다. 이를 통해 안부를 묻고 다소의 소통을 하면서 모두가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 감정의 교류는 걱정과 한숨으로 가득하다. 오늘은 어느 지역에서 몇 명이 나왔으며, 다음엔 또 어떤 조치가 내려질까에 대한 걱정과 궁금증이 화제의 전부이다.평소엔 손자, 손녀 자랑만 길게 하던 할머니들도 요즘은 코로나 소식엔 모두 척척박사다. 어느 지역의 어떤 이는 무슨 규칙을 어겨서 벌금을 1,000달러나 냈다는 등등의 얘기로 거의 하루를 때운다. 그만큼 생명 보전에 대한 불안감과 물질에 관한 소중함이 그 무엇보다도 크다는 방증이다. 이런 때에 생명과 코로나, 그리고 불안해하는 심리에 대해서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코로나가 이 땅에 와서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부합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생명은 무엇인가?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며 그들은 각각의 그 개체로서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우리 인간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 왔던가? 자기 우월적 교만함에 취해서 뭇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는 않았는가?또 물질에 대한 애착은 어떠한가? 물질의 획득과 문명의 발달은 인류가 평화스럽게 공존할 수 있는 기본 수단이 되어야지, 더 많이 갖고, 더 크게 발전시키려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탐욕과 경쟁을 부추기게 되어있다. 그로 인해 체제의 우월성을 희론(戱論)하며 자기 세계의 확장을 시도하니 그것의 종점은 전쟁으로 비화되어 뭇 생명을 살상하고 문명과 문화의 유적을 파괴하게 된다.이러한 밝은 듯 어둑한 시점에 코로나가 출현하여 세상을 설치고 있다. 그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다가 지금에 태어났으며, 무슨 고약한 생각으로 이 땅에 온 것일까? 대답을 들을 순 없지만, 어림짐작은 할 수가 있다.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며 불안에 떨게 하는 것을 보면 무슨 앙갚음을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또한 생명 경시 풍조와 물질 만능에 찌들어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경종을 울리려고 나타난 것은 아닐는지? 이런 때에 너무 겁만 먹고 불안에 갇혀 있으면 그들은 얼마나 기분이 좋겠는가? 평소엔 그렇게 잘났다고 설쳐대던 전 인류가 보이지도 않는 작은 저들의 출현에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 돌아다니는 꼴을 보고 얼마나 많은 미소를 짓겠는가? 이러한 그들의 음흉한 계략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도리어 우리도 어깃장을 한 번 놓아서 그들이 얼른 떠나가도록 시도해 보는 것이다. 손님 접대를 잘해주면 그곳에 오래 머물고 싶지만 홀대해 버리면 일찍 떠나게 되는 원리를 차용해 보는 것이다. 일단은 본체만체 관심을 두지 말고 눈길조차 주지 말자. 한편으론 그들이 은근하게 요구하는 합리적 진리의 세계인 평화와 안정된 상태를 엿보는 것이다.그동안 우리들은 그들의 위력으로 인해서 불안해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완화해 보려고 핸드폰이나 TV를 통해 각자 관심 있는 내용을 보고 듣는 것으로 일시적 위로를 받으며 시간을 보내오고 있다. 그것이 조금의 도움은 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상대성에 머물기 때문이다. 이런 매체를 통해 형성되는 교감의 여파는 일시적이어서 당시는 도움이 되는 듯하나, 돌아서면 허전하여 반복을 요구하는 세력으로 남는다. 곰곰이 따져보면 마약성의 일종이다.막힘과 불안감이 더해진 이런 때에 그런 정보들을 제공하는 전화 등의 기기를 최대한 멀리하고 오로지 자신과 마주 앉아 보는 것은 어떨까? 스스로의 내면세계를 유심히 바라보면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숨죽이고 생각을 가라앉혀서 자신과의 만남을 시도해본다. 내 장점과 단점은 무엇이며 지금까지의 내 생각과 삶의 태도는 올바른 것이었는가? 때론 허세를 떨면서 자기도취 되지는 않았으며, 그때 그 언행과 결정들은 정당했던가? 반복된 물음과 깊은 사유의 시간을 갖다 보면 막다른 골목 에서 참 자기와 만나게 되는 기회가 온다. 가짜 나에게 속아서 살아온 수많은 나날, 마음은 개운하고 세상이 밝고 평화스러움으로 느껴진다.그때의 에너지는 절대적인 상황에서 발현되는 무가지보(無價之寶)가 된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최고의 가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비와 사랑으로 나타나는 참 생명의 광명이다. 불안을 안정으로, 탐욕을 절제로 교만을 하심으로 유도하여 그야말로 전 인류가 화합하여 평화스럽게 살기를 희망하는 그 속셈이 코로나가 이 땅에 나타난 참 목적인지도 모르겠다.    기후 스님(시드니 정법사 회주)

  29/07/2021
  금요단상 - 기후 스님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요즈음이다. 비바람이 불면서 빗방울이 유리 창문에 후두둑 떨어지는 날이면 한결 더 몸이 움츠러들면서 마음까지도 스산해진다. 이럴 때 제일 생각나는 것이 따끈한 온돌방 아랫목이다. 이에 대비해서 우리 사찰은 방방마다 전기 온수 보일러를 설치해서 음산한 이곳 겨울을 잘 보내고 있다. 전기로 인해서 살기에 편리한 부분이 놀랄만큼 많아졌다. 반면에 무슨 일이건 쉽게 이뤄지게 되면 삶의 깊이가 엷어지게 된다. 성취되는 결과에 따르는 과정적 경험이 축소되기에 그렇다. 나무를 때어 그 두꺼운 돌을 달구는 과정은 힘들고 복잡하다. 하지만 그 속에서 소중함과 고마움을 저절로 느낀다.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에 친구들과 함께 눈싸움을 하다가 저녁나절에 온돌방을 찾게 된다. 나무가 워낙 귀할 때라 아랫목엔 언제나 국방색 담요나 얇은 이불이 늘 깔려 있다. 그때에 또래의 꼬마들이 쪼르르 큰방 아랫목으로 달려들며 얼얼해진 두 손을 거의 동시에 이불 속에 들이민다. 그때에 손길을 시작으로 심장까지 전해지는 그 따끈함의 정감은 어머니의 품속보다도 더 포곤함을 느낀다. 평소에 맘에 들던 건넛집의 춘자 손을 더듬을 수 있는 좋은 기회도 덤으로 그때에 주어진다. 거의 머리가 맞닿아질 정도로 그렇게 손을 녹인 후엔 딱지치기나 다른 놀이로 이어진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그곳에서 저녁까지 먹고 놀다가 어느 땐 사랑방에서 자고 가기도 한다. 어릴 때 그렇게 지낸 친구들은 평생을 잊지 못한다.  나의 고모님은 팔순이 훨씬 넘었지만, 지금까지도 그때의 친구들과 계 모임을 하고 있다. 그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참석해서 일박을 한다고 했다. 밤을 새워 하는 얘기는 어릴 때에 고향에서 있었던 그때의 추억담으로 채워진단다. 고락을 함께 느낀 시간이 많을수록 그 인간적 정감은 그에 정비례하여 간직되며 나이의 수치만큼이나 더 커져 나간다. 계산과 눈치 없이 그냥 순수하게 만나고 헤어졌던 순진무구한 동심의 영향이리라. 가족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식구는 많고 이불은 적을 때라, 한두 개의 이불을 네댓 식구가 같이 쓰다 보니 저녁이면 이불 쟁탈전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잠이 들기 전엔 그나마 어느 정도 정리가 되지만 잠이 들고 나면 서로가 잡아당기느라 정신이 없다. 어느 땐 추워서 깨어보면 동생들이 똘똘 말아 덮고 자면 슬그머니 빼앗아서 덮고 잔다. 그러면서 자다 보니 어느 땐 꼬랑내 나는 두 발을 상대방의 얼굴에 갖다 대고 자는 때도 허다했다. 그래서 아침이 되면 어제저녁 잠잤던 얘기가 학교 가기 전까지 이어진다. 그렇게 자란 형제와 자매들은 성장해서도 우애가 매우 좋다. 따뜻한 아랫목을 서로 차지하려고 발길이 부딪히는 과정에서 동기간의 인정이 더욱 깊이 스며들고 오랜 시간 담소를 나누는 삶의 열정 속에서 서로 이해하며 화합하는 방법을 피차가 습득했기 때문이다.  전기로 인해서 발전된 지금은 어떠한가? 서울의 고급 아파트에선 동지, 섣달에도 런닝셔츠 차림으로 지낸다고 들었다. 인공적 편리함으로 계절의 감각을 잊고 지낸다. 그 속에서 자연의 질서와 조화로 살아가게 되는 평화로움의 삶의 가치는 점점 줄어들고 오로지 물질적 욕구에 정신이 팔려버린다.  온돌방은 자연스럽게 산교육의 현장이었다. 아랫목은 으레껏 어른과 손님의 차지요, 윗목은 주인과 꼬마들의 몫이었다. 장유유서나 노인 우대는 그렇듯 현장에서 체감하면서 배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세상이 너무나 좋아져서 방 하나에 침대 하나로 쓰고 있는 지금, 출퇴근 시간이 달라서 한집안에서도 얼굴을 맞대고 대화할 시간이 별로 없다고 한다. 재산 때문에 동기간에도 불화가 일어나는 사건사고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 모두가 따끈따끈한 온돌방 인정이 사라지고 난 뒤에 더 많이 발생하고 있다. 눈부시게 발전된 문명 속에 잿불처럼 사그라지고 있는 우리네의 정신문화, 그 둘을 함께 향유할 수 있는 묘안은 없을까? 문명과 문화를 다 같이 창조하고 느끼는 주체는 바로 우리의 마음과 육체이다. 경중과 선후를 따져보면 근본은 생각이 된다. 그 일념을 잘 다스리면 온돌방 인정을 간직할 수가 있다.  일단은 핸드폰과 별거를 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 외부로 인한 정보와 재미는 남의 것이다. 돈도 내 것이 되어야 내 맘대로 유용하게 쓸 수가 있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꼼꼼하게 들여다보게 되면 저절로 상대방의 마음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밖으로만 향하고 있는 내 마음을 안쪽으로 되돌려서 내가 나의 마음을 자세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이해의 폭이 넓어지게 되면 저절로 자비심이 생겨난다. 온돌방 인정을 유지함은 땔감의 재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 씀씀이의 지혜로움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기후 스님(시드니 정법사 회주)

  24/06/2021
  금요단상 - 기후 스님

요즈음 미나리로 세계 영화계가 떠들썩하다고 한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땐 ‘영어 단어로 된 새로운 뜻이 있는 미나리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 한국 식물인 그 미나리라고 해서 그게 무슨 영화 제목감이 되는가 하면서 또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여러 평론가들의 설명을 들으니 그럴듯하게 이해되었다. 역시 어떤 분야이건 전문가들의 안목은 남달랐다. 평범을 비범으로, 다름을 동일체로 바라보게 하는 그들의 깊은 사유의 세계가 공감의 박수를 이끌어내게 하는, 하나됨의 장으로 승화되게 하는 힘으로 작동된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얘기와 비슷하거나 아니면 전혀 색다른 모습이나 내용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보인다. 이 영화는 그런 두 부분을 충족시켰기에 세계적인 화제가 된 듯하다. 미나리는 하나의 식물 이름이다. 그것이 풍토와 문화가 전혀 다른 미국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것은 강인한 뿌리 덕분이다. 그 뿌리는 무엇을 먹으면서 자라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살고 싶어하는 천연적 생명력이며, 이 우주 어느 곳에서나 상존하면서 그 가능성을 크게 확장시키려는 본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생명력의 동일체 속엔 각기 다름의 개성이 존재한다. 살고있는 곳의 조건과 환경, 보고 들으며 익혀온 관습이 다른 곳에서 살아왔기에 그렇게 된다. 지구촌의 66억 가량 되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모두 다름은 그 이치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선 ‘인연론’이라고 말한다. 이 세계가 형성된 과정이나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생명의 탄생과 존망의 과정이 창조론이나 우연이나 필연론도 아니며 단지 이것과 저것이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 속에서 창조와 변혁이 반복, 지속된다는 뜻이다. 그러한 인연 생기의 원리에 따라서 산은 높이 솟아 등산을 하게 하고 물은 낮게 흘러 배를 띄우게 하는 이익을 준다. 선과 악, 시와 비, 중상과 모략 등이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한국 사회의 현재적 상황도 모두가 인연 지음에 따라서 나타나고 있는 인과 업보의 연속상이다. 그 누가 싸우라고 부추겼는가? 그 어떤 이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창조했는가? 그 모두가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자업자득이다. 미나리하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것이 거머리이다. 그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은 미나리 논이나 묘판 논이다. 그곳은 그들이 살기엔 천국이다. 미지근한 물이 항상 고여있으며 식물이 밀집해 있어서 숨어서 지내기가 매우 좋다.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사람의 피다. 드라큘라나 흡혈귀의 사촌 정도는 충분히 될 듯 한데 그들의 생일날은 바로 모내기하는 때다. 특히 묘판에 일을 할 때 보면 그들은 바쁘게 헤엄치며 다닌다. 통통하게 살이 찐 처녀들의 장딴지 피를 빨아먹기 위해서다. 아마 여성의 피가 더 맛이 있는지 소스라치면서 놀라서 펄쩍펄쩍 뛰는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며 또한 처녀들이다. 거머리들의 피 뽑는 기술은 숙련된 간호사보다도 더 실력이 있다. 피를 빨며 피가 장딴지에서 흘러내려도 본인은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이니 그렇다. 주로 그 모습을 발견해 주는 것은 총각들이다. 그 모습을 본 여성들은 놀라서 기겁하면서도 거머리들을 내치지 못한다. 그 모습이 매우 징그럽기 때문이다. 그때 총각들이 다가가서 도움을 주는데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몸체가 물렁물렁 하면서 고무줄처럼 길게 늘어지기 때문에 손으론 떼어낼 수가 없다. 그땐 손바닥으로 힘있게 때려야 비로소 떨어진다. 장딴지에선 피가 주르륵 흘러내려도 그때는 진흙으로 상처를 쓱쓱 문지르면 지혈을 하고 일을 계속한다. 우리 이웃 동네인 감나무골에선 거머리 떼어준 인연으로 결혼을 해서 거머리 부부가 탄생된 인연도 있었다. 미나리와 거머리는 언제나 함께 산다. 물이 고여 있는 곳엔 언제나 푸르게 잘 자라고 있는 미나리, 그것을 미국까지 갖고 가서 잘 키워서 아들과 손자 등 가족들에게 잘 먹여 보려는 할머니의 마음, 그렇게 선한 마음의 어른들이 있는 반면에 미나리를 의지해서 피를 빨아 먹으려는 거머리들도 이곳저곳에서 설쳐댄다. 들은 바에 의하면 이곳 호주 거머리들은 나무 위에서 지내다가 사람들이 지나다니면 머리에 낙하해서 피를 빨아먹는다고 하니 등산할 땐 언제나 모자를 착용해야 될 듯하다. 우리 동포 사회에서도 어느 구석에서 거머리가 숨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들을 소몰이꾼이라는 은어로 부르면서 조심하라고 하는 말은 들었으나 깜박 잊고 본인도 거머리에 크게 물린 적이 있었다. 내가 만일 정이삭 감독이라면 미나리 후속편으로 거머리를 만들어 보고 싶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려는 막연한 희망이 무지를 바탕한 허튼 상상력에서 비롯되었다면 절망감의 분출은 현장 속에서 직접 체험한 역동적인 생명의 참 에너지이다. 그 절망적 삶의 밑바닥에서 참 희망의 샘물을 조금이라도 발견하는 지혜적 안목을 갖추게 된다면 절망은 새로운 희망의 농장을 가꿀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2005년 수술 후 절망감을 안고 봉화의 첩첩산중에서 호롱불을 켜고 살 때 일으킨 한 생각을 다시 끄집어내어 본다. 희망은 날 속이는 덴 천재다 이곳보다는 저곳이 저 사람보다는 이 사람이 더 좋을 것이라고 꼬득인 그대는 바람잡이이다 그러나 난 그대가 없었던들 차 밀린 십자대로에서 납작한 뻥튀김 되어 조각조각 동강이가 났을 거다. 우린 외나무다리를 함께 건너야 하는 동반자 그래서 난 오늘도 내일을 넘본다. 기후 스님(시드니 정법사 회주)

  13/05/2021
  금요단상 - 기후 스님

얼마전 한국에서 화장품이 도착했다. 난생 처음 받아 보는 희귀한 선물이라 미소가 저절로 번져 나왔다. 내일 모레면 80 줄을 넘어다 보는 노승에게 보낸 것이니 이 어찌 신문에 내지 않을 수 있으리요. 10 여 년 전 잠시 휴양차 한국에 머물 때 봉화에 있는 축서사라는 고찰에서 만난 그녀는 내가 호주로 돌아온 뒤에도 무슨 날이 되면 가끔씩 통화나 문자를 주고 받는 그런 사이였다. 서울에서 이런 저런 소규모의 사업을 한다는 얘기를 직간접적으로 듣고 있었는데 최근엔 화장품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며칠 전 좀처럼 없었던 페이스 톡이 왔다. 얼굴이 번질번질 윤기가 흐르고 매끈하게 보였다. 인사 겸 얼굴이 어찌 그렇게 포동포동하게 좋아졌느냐고 물었더니 기다렸다는 듯 장광설(長廣說)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아마 작심하고 전화한 듯 화면도 흔들리지 않고 고정된 채로 내 얼굴은 오른쪽 상단에 손톱 크기 정도로 나오고 그이의 모습은 화면 전체를 채웠다. 주요 내용은 자신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스님 얼굴 흉터도 반 정도는 메워질 수 있는 특효 보톡스 수술 효과를 볼 정도의 바르는 화장품이라 오래 바르게 되면 진짜 기후스님을 잃어 버리게 될까 걱정이 된다는 농담으로 한 시간이 훨씬 넘는 통화를 끝냈다. 그로부터 10 여 일 후 화장품 한 박스가 도착하게 된 것이다. 열어 보니 화장품 케이스 마다 겉 표면에 굵은 펜으로 사용법이 크게 쓰여져 있었다. ‘ ○1번은 효소 파우더로 손바닥에 비벼서 사용하라 ○2번째 것은 금가루 로션으로 피부 진정 보습 효과가 높고 ○3은 스킨 + 에센스로 리프팅 및 미백 효과가 탁월함이라 했고 ○4는 보톡스 크림으로 살살 펴 바르세요 ○5는 3종 기능성 썬크림으로 미백, 주름 개선, 자외선 차단이라 했고 ○6은 탈모 예방 특허 제품으로 천연 샴푸, 트리트먼트라고 쓰면서 두피도 피부입니다 ’ 라고 적었다. 글 쓰인 부분을 번호대로 세워 두고 한참을 바라다 보았다. 아마 번호 순서대로 발라야 되는 듯 한데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시원찮은 얼굴이라 꾸미기를 아예 포기하고 평생을 크림 조차도 바르지 않아온 입장에서 6 가지를 덕지덕지 바르고 쓰다듬으라고 하니… 특히 반질 머리에 탈모 예방 샴푸까지 뿌리라니 나오려던 미소조차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얼굴이 잘 생겼으면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한결 같은 바람이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이미 결정되어 태어나진 이후의 한발 늦은 희망이라 때론 부모를 원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엄격하고 냉정하게 따져보면 그건 자신의 책임이다. 누가 그렇게 태어나라고 떠민 사람이 있는가? 자업자득의 공평한 결과물이며 만고불변의 진리적 소산일 뿐이다. 수 년 전 한국에 갔을 때 해운대에 있는 유명한 중국 식당에 초대된 적이 있었다. 그곳 입구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물이 담긴 대야처럼 생긴 그릇에 손바닥을 문지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그 물건 양쪽 위엔 ㄷ 자 모양의 볼록 나온 부분이 있는데 그곳을 두 손바닥으로 한참을 문지르니 대야 물에서 아주 작은 물방울이 수없이 튀어 올랐다. 그 때에 얼굴을 갖다 대고 그 물방울로 세수를 하고는 닦지 않고 그냥 두게 되면 피부가 매우 예뻐진다고 하였다. 그것이 바로 양귀비 세수법이며 이 그릇이 양귀비가 썼던 그 세수 대야라고 하였다. 문제는 물방울이 많이 높게 튀어 올라야 만족한 세수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떤 이는 아예 올라 오지도 않고 또 다른 이는 쪼금 올라오다가 끝나는 것이었다. 많이 올라오게 할려면 요령이 필요했다. 기도하는 자세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 앉히고 너무 급하게도 느리게도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었다. 물이 출렁거리지도 않으면서 열이 잘 전달되어야 많은 물방울이 높이 올라오게 되어 있다. 미남, 미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많았던지 두개의 손잡이가 반질반질 윤이 나서 방금 닦아 놓은 놋쇠 그릇처럼 번쩍번쩍 빛이 났다. 그 그릇의 이름을 용세안(龍洗顏)이라고 했다. 귀한 사람의 세수 대야라는 뜻이리라. 그 뒤에 그 그릇에 흥미가 있어서 중국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구할 수 있는 길을 몇몇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 보았는데 구할 수가 없었다. 봉화에서 지낼 때 어떤 이가 영주에 중국 물품을 전문으로 수입하는 곳이 있다해서 그이와 함께 갔다. 허름한 큰 창고에 많은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구하려는 물품을 자세히 설명했더니 한참 후에 그와 비슷한 것을 갖고 나왔다. 참으로 반가워서 5 개를 몽땅 샀다. 사찰에 오자마자 물을 담아 놓고 두 손바닥으로 문질러 보았다. 갖가지 방법으로 몇 번을 해봐도 물방울은 보이지 않았다. 가짜였다. 아마 철과 구리 등등의 비율이 적당해서 열 전도가 잘 되어야 되는 듯 한데 이것은 두들겨 보니 양철 소리만 땡땡 날 뿐이었다. 보톡스 크림도, 양귀비 대야도 빌리지 않고 참 미인이 될 수 있는 길은 정녕 없는 것일까? 본인은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것은 마음씨를 잘 심고 정성을 다해 가꾸는 일이다. 마음의 세력은 온갖 것을 뜻대로 이뤄지게 하는 위대한 에너지이다. 그것을 굳게 믿고 일상에 꾸준하게 실천하면 미남, 미녀의 좋은 기운이 얼굴에서 저절로 배어 나온다. 잘 익은 마음씨를 심고 때에 따라 물을 주면서 잡초를 제거하고 비료를 잘 주면 그 열매는 속이 차면서 잘 익어간다. 마음씨는 우선은 착해야 되며 그 속에 자비와 사랑의 따뜻한 손길이 스며 있어야 한다. 밝음과 맑음의 마음씨로 서로를 북돋우며 희망과 용기의 떡 잎을 키워 나갈 때 우리 모두는 잘난 사람으로 가없는 칭찬을 듣게 될 것이다. 기후 스님(시드니 정법사 회주)

  08/04/2021
  금요단상 - 기후 스님

오래 간만에 한국에서 온 도톰한 책 한 권을 받았다. 80년대 초반 길을 가다가 마주쳐서 몇 마디의 말을 건넨 것이 인연이 된 그 분의 책이다. 상담심리학을 전공하고 있었던 그는 내 처소에서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재미있는 얘기를 많이 해주었다. 나는 정신없이 들으면서 크게 관심을 보였더니 그 자세가 40여년 가까이 이어져 오면서 책을 보낸 것이었다. 나는 그저 여러 사례들과 함께 논리정연하게 얘기하는 것에 재미가 있어서 그저 들었을 뿐인데 심리학자의 입장에선 그런 공감과 지지가 무척 돋보였다고 나중에 편지로 전해 주었다. ‘ 침묵이 금이다 ’ 라는 말이 그를 두고 했을까? ‘ 불편한 관계 걷어 차기 ’ 는 바로 그가 보낸 책 제목이다. 한국에서 심리학 공부를 하다가 미국에 가서 그 분야의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서양인 중심의 기존 심리학은 한국인에겐 어느 부분은 적용하기가 부적합하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걸맞는 새로운 틀의 이론을 제시하며 ‘ 역동 심리학회’ 를 만들어서 꾸준하게 연구해 오고 있다. 이번에 보내온 책은 그의 4번째 저술로써 수많은 상담 사례 중에서 중요한 내용을 뽑아서 만든 것이었다. 그 내용을 단숨에 다 읽고 책장을 덮고는 허공에서 솜털처럼 떠도는 백운을 바라 보면서 가녀린 한 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많은 갈등을 안고 고달프게 사는 사람들이 저렇게도 많을까? 불편한 관계를 가져다주는 그 원인은 무엇이며 또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공을 차버리듯이 걷어 차서 내 마음속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는 특출한 묘방(妙方)은 없는 것일까? 특히 이민자의 특수한 삶의 현장에선 그 불편한 관계가 생길 수 있는 요소가 더 많은 것 같다. 그것을 수업료를 지불한다고 점잖게 표현한다. 적게 낸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고 어떤 이는 전 재산을 탕진하고 패가망신한 이도 더러 있다. 주 원인은 언어 불통으로 인해서 법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곳에 살고 싶어하는 욕망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법률 전문가에게 의지하거나 먼저 와서 산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조언을 듣는 과정에서 잘못되면 큰 수업료를 지불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떠한가? 난 상대를 내 맘처럼 믿다가 상당한 수업료를 지불하면서 큰 고통을 당했다. ‘ 믿음은 수행을 하게 되는 근본이고 모든 공덕을 짓게 되는 모태이다. 또한 일체의 선행을 기르게 되어 의심의 그물을 끊어 버리게 하는 좋은 마음 자세이다. ’ 화엄경에 나오는 거룩한 말씀이다. 그러한 선행의 순수한 믿음 자세를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 드는 도구로 역이용하려는 이들이 교민 사회에선 오늘도 미소띈 얼굴로 힘들게 살고 있는 이들에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급할수록 돌아가라 ’ 는 말과 ‘ 아무리 바빠도 바늘 허리 매어 못쓴다 ’ 는 격언은 다들 알고 있지만 막상 자신의 일로 닥치는 난감한 상황이 되면 허둥대며 서두르기 마련이다. 많은 수업료를 챙기려는 이들은 그런 심리를 십분 활용한다. 안될 일을 된다고 한다거나 어려운 것을 쉽다고 말해 줘서 일단은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다. 그러다가 결과가 좋지 않으면 불편한 관계가 형성된다. 그것을 최소화하려면 무슨 일이건 신중하게 접근하는 꼼꼼한 자세가 요구된다. 특히 친척이나 친구 등과 함께 무슨 일을 도모하다가 잘못되어 피차가 불행하게 되는 경우를 가끔씩 보게 된다. 어떻게 하면 그 불편한 ‘업 덩이’를 내 품에서 걷어 차서 없애 버릴 수가 있을까? 그 책에선 여러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있으나 내용은 비슷한데 같은 처방으로 해소가 안 되는 부분도 상당히 많았다. 살아온 여러가지 조건과 경험들이 각양각색이기 때문이니 ‘ 병 하나에 약은 천가지이다 ’ 라는 말이 이를 입증해 준다. 모든 사람들이 어떤 유형의 것이건 불편함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상당한 분량의 그 불편함을 간직한 채로 살고 있다.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 상황인가? 아니면 생존에서 주어진 필연적 과정으로 감수해야만 되는 각자의 몫인가? 내가 당한 과정적 해법을 생각해 본다. 우선은 문제의 발단에 대한 역추적으로 거슬러 되돌아 가서 깊은 생각을 해 본다. 그곳에서 자신의 부실했던 부분과 만날 수 있는 일말의 경솔했던 허물이 보인다. 그 때엔 결과적 책임을 반반으로 수용하게 되어 원망심은 반으로 줄어든다. 그 다음은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모두들 이 먼 타향에 와서 살아 보려고 몸부림 치는 인간의 군상들, 자세하게 바라보면 너나 없이 측은하게 생각되는 가없는 생명들이다. 자비와 사랑으로 보듬어 주어야 될 대상들이다. 여러가지로 얽힌 껄끄러운 관계가 회복되면 더 없이 좋겠지만 그 반의 무게라도 걷어차 버릴 수 있다면 멀지 않은 미래엔 그 불편함이 온전하게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 기후 스님(시드니 정법사 회주)

  25/02/2021
  금요단상 - 기후 스님

기후스님 새 달력 한 장이 일주일을 남겨두고 있다. 희망찬 새해를 맞이 하라는 인사를 숨이 넘어갈 듯이 전해오는 카톡을 들은 지가 얼마되지 않았는데… 세월이 유수(流水)처럼 흐른다는 옛 사람들의 표현이 실감나는 요즈음이다. 희망은 언제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은 설날에 찾아온다. 가물거리는 호롱불에 바늘을 가까이에 갖다 대고 바늘 귀에 실을 꿰면 그 때부터 동심은 밤잠을 설친다. 집집마다 새 옷을 마련하는 다듬이 방망이 소리가 골목으로 새어 나오면 그 땐 어린이들은 메뚜기처럼 폴짝폴짝 뛰면서 설날을 기다렸다. 새 이불을 마련하는 그 중간에 뒹굴면서 정말로 손가락을 꼽으면서 설날을 기다린다. 그 동심엔 기쁨과 희망이 함께 녹아 있다. 우선은 설이 되면 새 옷이나 새 신발을 가질 수 있다. 그 다음은 쌀이 좀 더 많이 섞인 밥과 두부나 생선 등 좋은 반찬이나 떡 등을 먹을 수가 있고 또 세뱃돈으로 또래들과 화투 놀이를 해서 눈깔 사탕을 맛볼 수가 있는데다 6일 동안은 나무해오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없으니 그보다 더 좋은 신나는 일이 있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생존의 기본 조건인 의식주 3 건이 좀 더 좋아지고 쉬게 되는 때가 바로 설날이기에 그렇게 기다렸지 싶다. 반면에 어른들은 새해가 오기 전에 그 해에 진 빚은 반드시 갚아야 된다는 책임감 같은 것이 있었다. 당시엔 빚이라야 쌀 몇 말이거나 얼마 안 되는 금전이었다. 우리 친구 아버지는 남의 집 일을 도맡아 하였는데 내년 일 삯을 먼저 받아서 빚을 갚고 새해를 맞이할 정도였다. 꼬마들은 무작정 희망을 얻기 위한 날이 설이었고 어른들은 진 빚은 갚고 새롭게 출발하려는 자기 다짐의 날이 바로 설날이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그럴듯한 인사와 멋지게 그려진 예쁜 그림만 카톡으로 전해올 뿐 새해를 맞이한 우리들의 마음은 모래알처럼 건조하다. 각계 각층에서 희망이 없는 사회가 되었다고 아우성이다. 그 원인과 분석, 해결책은 무수하게 쏟아진다. 그럴수록 답답하고 불안함은 더 가중되고 있으니 그야말로 모순이다. 문제는 이론과 관념은 넉넉한 반면 그를 받쳐주는 실천력이 빈곤하기 때문이며 그 밑바탕엔 탐욕이 극성을 부리기에 그렇다. 그 탐욕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야기된다. 진리적 삶은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지는가? 선종(禪宗)의 대가 6조 혜능선사(慧能禪師)는 이렇게 말했다. 진리를 완력으로 빼앗으려고 그를 쫓아온 군인 출신의 승려 도명(道明)존자에게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하라고 일렀다. 선도 악도 마음에 두지 말라고 했다. 일반적으론 선은 숭상하여 기르고 악은 멀리해서 자라나지 않도록 하라고 하는 것이 사회의 규범이다 하지만 온전한 진리의 본체인 참 마음을 깨달아서 무상(無常)속에서 영원의 삶을 노래함에는 선악의 상대성은 미흡하다는 뜻이리라. 선악의 양단에 매몰되지 않고 그들을 함께 용해시켜서 현실적 삶에 적용시킬 수 있는 지혜로운 몸짓과 마음가짐, 그것이야 말로 우리 사회가 역동적 희망을 안고 살아가게 되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라고 혜능은 강하게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본인 역시 하나의 희망이 남아 있다면 그런 진리적인 삶의 모습을 구현하고 싶은 것이다. 머릿맡에 없던 건강 기능 식품의 숫자가 늘어나고 운동량은 점점 줄어진 이때에 옳고 그름의 두 극단을 하나로 용해시켜서 그 에너지를 현재적 상황으로 승화시켜 보고 싶은 것이다. 현재는 과거의 적집(積集)이며 미래는 현재의 연장이다. 한호일보를 구독하는 우리 모두는 올해엔 좀 더 희망이 이뤄지는 새해가 되었으면 참으로 좋겠다. 지나친 물질적 추구는 언제나 그것에 대한 목마름을 촉발시킬 수가 있다. 그것을 바라보며 생활에 응용해가는 우리들의 마음이 없음에도 주눅들지 않고 있다고 으시되지 않을 수 있는 지혜로운 진리적인 삶의 처신이 희망을 기르는 원천이 될 것이다. 기후 스님(시드니 정법사 회주 스님)

  21/01/2021
  금요단상 - 기후 스님

기후 스님 날씨 변덕이 매우 심하다. 월요일엔 여름처럼 덥더니 화요일은 가을같이 서늘하다. 모든 것은 이렇듯 변화의 연속이다. 일러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테스형도 지나가고 코로나도 사그러질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그 이치에 역행하는 것이 하나 있다. 좀처럼 시비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인은 60 여 년전 선거 부정으로 이승만 물러 가라고 형들 따라 소리 지르면서 국회 의원 집에 가서 불을 지르려는 그들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 지금 까지도 그와 유사한 시비가 주기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생각해 보면 옳고 그름에 대한 명확한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이고 그 대상은 권력자들에게 해당되는 내용이다. 불경에 중맹모상이라는 말씀이 있고 세상엔 아전인수격이라는 격언(格言)이 있다. 전자는 여러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각자가 만져 본 부위만 고집한다는 뜻이고 후자는 잘 알다시피 큰 가뭄이 왔을 때 자기 논에만 물을 댄다는 뜻이다. 특히 한국에선 그런 현상이 더 심화되고 있는 듯하여 정말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나마 그전엔 고개 숙이고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있어서 앞으로는 좀 나아지겠거니 하고 위로를 받기도 했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무조건 억지를 부리며 변명을 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리스로 날아가서 테스형에게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다. 참, 장님 코끼리 만진 식이며 아전인수가 너무 심한 작금의 현상이다. 그 어떤 문제가 발생했으면 우선은 법 절차에 따라 모든 것이 해결되어야 함은 법치 국가에선 재론할 여지가 없다. 물론 우리 인간이 제정한 헌법 등 기타의 법령 등에 완전무결은 없지만 그나마 일차적 시비를 가리고 거기에 따라 승복하는 것은 민주사회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근본적 원동력이다. 그런 이론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법의 허점을 노려서 자기 논에만 물을 대려고 억지를 쓰고 있으니 민초들이 보았을 땐 가슴이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옛말에 먹줄에 의지하지 않고 대패질을 하는 목수에게 집 일을 맡길 수가 없고 국경을 잘 지키지 않는 군인들에게 보초를 세우게 되면 머지않아 평화가 무너진다고 하였다.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비슷한 내용의 시와 비에 대해서 분명하게 판가름을 못하고 허둥되는 우리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으며 그 해결책은 어떤 것일까? 우선은 중맹모상의 어리석음에서 벗어 날려고 애를 써야 된다. 우린 누구나 각자의 견해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정치 얘기만 나오게 되면 그 분위기가 혼란해지는 현상이 바로 우리들의 현재의 모습이다. 그 다름을 이해는 하고 있으나 그것이 현장에서 회자되면 다름은 어디론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자기 주장과 고집만 남는다. 옳고 그름에 대한 냉정한 객관화는 사라지고 자기가 만져본 코끼리의 등짝에만 매몰되어 코끼리는 평편하게 생긴 동물이라고 우겨 대기만 한다. 어찌됐건 자기 논에만 물을 대서 자신의 나락만 살리고 보자는 식이다. 거기에 패거리가 생기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힘과 수치와 교묘한 재주로 자기 식구들을 늘린다. 그 미끼가 바로 욕심을 채우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시비를 재는 눈금은 출렁거리고 사회는 혼탁해지며 국민들의 정서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최소 한도의 사회 규범인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데서 오는 분명한 결과이다. 자신의 주장이 진리에도 부합되고 상식에도 어긋나지 않으며 미래 세대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는 견해일까? 아전인수격의 감정만 앞세워서 시비를 제대로 가름할 수 있는 각자의 안목이 확립되지 않는다면 조국의 미래는 암담해질 것이다. 일분 일초라도 자기의 주장과 견해를 허공에 떠 올려 놓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평가하는 시간을 가질 때 자신도 좀 더 성숙되고 조국도 당당해질 것이다. 평온한 마음으로 지혜의 눈을 뜨고 코끼리 전체를 바라보면 시비가 잠적할 것이고 남의 논의 나락이 비틀어 지는 것을 자세히 눈 여겨 보면 그 논에도 물을 주게 되는 넉넉한 마음이 생겨날 것이다.

  19/11/2020
  금요단상 - 기후 스님

요즘은 어딜 가나 많은 꽃들과 마주친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하지만 꽃과 만나면 미소가 번진다. 색상이 곱고 각각의 독특한 향기가 있기에 그렇다. 며칠 전 두 지인들과 함께 꽃 마중을 나갔다. 늦은 감은 있었으나 워낙 유명한 곳이라 하니 따라 나섰다. 그곳은 블랙히스에 있는 로도덴드론 가든이었다. 1960년 그 지역에 살았던 소렌슨이라는 꽃을 좋아하던 사람이 18.5 헥타르를 다듬어 꽃나무를 심고 길을 내어 가든을 만들면서 점점 더 유명해지게 되었단다. 기차역에서 1 Km 쯤 떨어진 그곳은 지난해에 50주년 기념 꽃 잔치를 성대하게 한 이후 한층 더 명성을 더했다. 특히 크고 붉어 눈을 부시게 하는 2000 여 그후의 로도덴드론과 아잘리아, 카멜리아, 매이플스 등의 다양한 색상의 화사한 꽃들은 관람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우리 역시 좌우로 고개를 돌리면서 꽃 모습에 취해 내려가다가 작은 연못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곳엔 생각지도 않았던 올챙이들이 새까맣게 떠다니며 헤엄치고 있었다. 이곳에 온 지 내년이면 30 년이 되지만 올챙이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가까이 가서 자세히 바라 보았다. 까맣고 긴 꼬리를 살랑거리면서 헤엄치는 모습들이 너무나 정겹게 느껴졌다. 게다가 잠자리까지 연못 위를 날아 다니고 있었다. 잠자리도 시드니 근교에서 한두 번 본 적이 있지만 자주 볼 수는 없었다. 그곳에선 상당히 많은 잠자리들이 올챙이와 함께 놀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그것 보다는 작고 날씬했지만 어릴 적에 보아왔던 그들과 함께 만났으니 마치 고향의 연못가에 앉아 있는 듯한 포근한 느낌이 들어서 그들이 노는 모습을 여러 각도로 영상에 담았다. 그럴 즈음 높은 나무 위에선 매미들의 노래 소리가 꽃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미소 짓는 사람들의 즐겨하는 소리와 함께 하여 그 연못에 내려 앉고 있었다. 몇 포기의 수련 아래에서 새까맣게 떼지어 노는 올챙이들과 그 위를 날아 다니며 숨바꼭질을 하듯 비행을 하고 있는 날씬한 잠자리들, 그리고 매미들의 합창이 함께 어우러진 그 꽃동산 속에서 난 문득 고향과 동심의 세계로 회귀하고 있었다. 불경 말씀에 “과거는 지나간 것이니 회상하지 말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마음에 두지 말고 오직 지금 이 자리에만 전념하라” 고 일렀으나 나는 때때로 그렇게 못하고 있으니 이것도 적은 문제가 아니다. 특히 여름에도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이곳이라 여러 해 전에 경남 남지에 사는 젊은 불자에게 개구리 소리를 녹음해서 MP3로 보내 달라고 부탁해서 저녁에 불을 꺼두고 그 소리를 가끔 듣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연못 늪 속에선 그런 개구리 소리도 은근하게 들려 왔고 장차 그런 노래를 부르게 될 올챙이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저들이 머지 않아 없던 다리가 생기고 있는 꼬리는 없어져서 팔짝팔짝 뛰기도 하는 개구리가 된다하니 변화하는 생명체의 신비로움은 참으로 부사의(不思議)한 것이다. 잠자리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 보기엔 멋스럽게 날아 다니지만 그들의 입장에선 작업 중이다. 날파리나 깔따구 등을 잡아 먹으려고 부지런히 날개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원해 보이는 나무 숲속에서 온 종일 큰 소리로 울어대는 매미들은 또 어떠한가? 그들은 최소 5 년 정도 땅 속에서 굼벵이로 지내다가 날개 달린 매미로 변신해서 저렇게 목 놓아 소리내어 자기 짝을 찾은 후 일주일쯤 뒤엔 사라진다고 한다. 내가 사는 우드포드 마당 앞 검츄리 밑둥엔 정확하게 22개의 매미 허물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다. 그들은 주로 이른 새벽이나 밤중에 땅속에서 올라 와서 나무 줄기에 매달려서 어깨 부위가 갈라지면서 매미가 되어 살금살금 나온다. 처음 나올 땐 날개와 몸 전체가 푸르스름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검은 색으로 변한다. 올챙이와 굼벵이도 그렇게 변하는데 나는 툭하면 어릴 적 고향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꼴통중에 상 꼴통이지 싶다.

  15/10/2020
  금요단상 - 기후 스님

“세상 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세상 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업신 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생각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이 세상을 살아가라”하셨나니라. 보왕삼매론 (寶王三昧論)이라는 짤막한 10 가지 교훈 중의 한 구절이다. 뭇 생명들은 안락이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 그 이면엔 그만한 노력이 요구되고 그것의 지속적인 과정 속에서 곤란한 일이 생길 수 있다. 우리가 보기엔 긴 날개를 펴고 허공을 시원스럽게 날아 다니고 있는 많은 새들의 모습이 무척 평화스럽게 보여 진다. 그것은 먹잇감을 찾기 위한 힘든 날개짓이며 그들은 언제나 강자의 눈초리를 피하느라 불안감에 떨고 있다고 한다. 우리 인간 역시 삶의 내용이 그 새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힘듦은 우리들의 면역력으로 인해서 감내할 수 있지만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 그 곤란함의 범위와 강도(強度)가 심하다. 그렇지만 그 시간이 반년에 가까워 오면서 서서히 그 힘든 상황에 적응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그 역시 살아남기에 민감한 생명력의 현실 적응의 지혜로움 이리라. 현인(賢人)은 이른다. 어떤 개인이 어려움 없이 사업이나 학업 등을 성취하게 되면 남을 업신 여기는 마음이 생긴다고 했다. 그럴듯한 말씀이다. 그런 이들 중에 더러는 자신처럼 되지 못한 사람들을 내심으로 얕보는 수가 종종 있다. 자기 중심 생각으로 대상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만한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와서 거드름을 피운다. 그렇게 영민해서 사회적으로 출세해서 부와 권력이 생기게 되면 사치한 생각이 나게 마련이다. 자기 과시의 외형적 모습은 사치함에 그 초점이 맞춰지며 정서적 세계는 오욕락(五慾樂)의 탐닉이며 그 대표가 권력과 이성(異性) 등을 통한 자기 존재감의 극대화이다. 그들의 종말(終末)은 우리가 수차례 목도한 비극적 마감이다. 그래서 현자는 근심과 곤란으로써 이 세상을 살아가라고 하신 것이다. 누구나 근심과 어려움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희망이 그러함에도 지금 이 자리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수십 년을 통해서 그런 뜻을 이룬 이는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정신적 근심과 육체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성공한 사람일수록 인간미가 있고 인격이 야무지게 다져진다고.. 그들은 곤란을 겪음으로써 상대방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는 변별력이 생겨나고 괴로움을 맛보면서 즐거움의 농도를 더 진하게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생존, 치열한 경쟁속에서 어쩌면 근심과 곤란은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생명성의 또 다른 모습이리라. 자연의 조화로움과 생명성의 평등과 고귀함으로 무장되지 않는 한 힘들고 곤란함은 언제나 자신의 그림자처럼 나를 졸졸 따라다닐 것이다. 곤란함과 불편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는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코로나 바이러스의 크기가 얼마나 되느냐고 알 만한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대답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토록 작은 크기의 바이러스가 전세계인을 마스크를 쓰게 하면서 이토록 큰 곤란을 주게 하는 것은 그 무엇 때문일까? 생명에 대한 협박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생명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어떤 젊은 승려가 대도인에게 물었다. “선사님은 생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그가 답했다. “물 속 달빛으로 숲 속 바늘을 찾으려 하고 모래밭 흙 먼지로 만리성을 쌓으려 하네. 가을 기러기 다람쥐와 다투지 않는데 툇마루 애 늙은이 밤송이와 씨름하네.”

  10/09/2020
  금요단상 - 기후 스님

정법사 입구 왼쪽 담장 곁엔 세그루의 감나무와 하나의 귤나무가 있다. 감나무는 감보다는 꽃을 바라 보면서 옛적 동심에 젖기 위함이었고 귤은 열매를 보고 심었다. 두 종류의 나무가 점점 크게 자라게 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조금 익기 시작하면 그 열매를 따 먹으려 모여드는 새들의 성화 때문에 도저히 그냥 둘 수가 없었다. 쪼아 먹다가 떨어져 있는 그 열매를 차량이 오가게 되면 그것들이 시멘트 도로 바닥에 달라 붙어 버리면 쓸어 내기가 몹시 고약해진다. 생각 끝에 긴 가지들을 잘라서 키를 많이 낮춰서 열매에게 손이 닿을 정도로 조절해 두었다. 그후 감꽃 수는 좀 줄어도 감으로 인한 불편은 거의 없어졌고 귤도 좀 더 큰 모습으로 달리었다. 엊그제 그 곁에 가 보았더니 상당히 많은 숫자의 열매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두어 개를 따서 먹어 보았더니 맛이 아주 좋고 향내도 진했다. 반면에 씨앗이 매우 많았다. 탱자 만한 작은 열매에 정확하게 20 개의 씨가 들어 있었다. 그것들을 뱉어 내면서 문득 한 생각이 일어났다. ‘ 이들은 왜 이처럼 많은 씨앗을 품고 있을까? ‘ 자기 종족의 무성한 번식을 희구하는 그 염원이 그 속에 담겨져 있지 않을까?’ 그 무슨 식물이건 토종이나 잡초일수록 그에 따른 씨앗이 많다. 감나무의 접 붙임인 고염도 그렇고 풀섶 어디에서도 꽃 피우는 민들레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민들레나 할미꽃 등은 솜털같은 날개를 만들어 풍선을 띄우듯이 자신의 종자를 멀리 멀리 실어 나른다. 반면에 자연 종자에게 변형을 일으켜 유전자 조작을 한 새로운 과일 등은 그 종자의 숫자가 매우 적다. 인위적으로 종자 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는 어떠한가? 한국 통계청이 2020년 2월 7일 발표한 전년도 출산율 발표에 따르면 합계 출산율은 0.92 명을 기록했다. 1970년 조사 이후 50년만의 최저치의 기록이라고 하며 세계에서 꼴찌의 출산율이라고 한다. 이런 현상은 장차 국가의 존립 문제와도 직결되는 중대한 현상인데도 목전의 이해타산에만 몰두하고 있는 근시안적 태도에 적이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정부는 그동안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서 176 조원이나 투자해서 출산과 육아에 대한 배려를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그 근본 원인에 대해서는 전혀 접근을 못하고 그저 자리 다툼이나 이념 투쟁에 골몰하며 시시비비만 일삼고 있으니 나라의 장래가 암담하기만 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인간세계는 힘이 지배하는 무리들이 사는 곳이다. 거기엔 경제력이 앞서고 그것을 받쳐주는 위해 인구가 많아야 된다. 그런 여러가지 기초적인 조건이 하나라도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곳이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다. 그런데도 내년부터는 자연인구가 감소되는 상황이라고 하니 큰 걱정이 앞선다. 어릴 때에 잔디를 뽑아서 눈물 싸움을 해 본적이 있다. 씨가 맺힌 줄기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러서는 눈물을 만든 다음 누가 이기느냐는 내기다. 그러면 작은 것은 큰 것에 흡수되기 마련이다. 출산율이 점점 감소되는 근원적 원인은 우리의 의식속엔 국가는 없고 개인만 있으며 내일 보다는 오늘만 생각하는 좁은 틀 속의 굳어진 생각 때문이다. 이런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위정자들이 앞장서서 정책을 계발하고 그것을 교육에 반영시키면서 국민을 계도해 나가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통계의 수치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의 문제는 국민들의 지나친 배금주의와 출세지향주의적 굳어진 삶의 태도이다. 이 둘의 문제는 피차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육아와 교육의 뒷받침이 있어야 그 꿈을 이룰 수가 있다. 게다가 내 집에 대한 애착은 아마 세계 1등이지 싶다. 내집 마련을 위해서 출산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 이를 잘 반증해 주고 있질 않는가? 모든 생명은 자기종족이 더 번성되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 생명의 본성이다. 길가에 밟혀 가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잡초들을 뽑아 보면 그 뿌리의 숫자가 많으며 가늘고 길게 뻗어져 있다. 우리 한국인은 우리 한국인의 정체성의 뿌리를 어느 것에 두고 있는가? 단군인가? 세종대왕인가? 이순신인가? 기독교인가? 불교인가? 유교인가? 반공인가? 친공인가? 해방 후 75년이 다 된 지금에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현실이다.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은 꽃과 열매를 보기 위함이며 그것을 위해서 정성껏 가꾼다. 그 열매 속엔 수십배의 씨앗을 담아서 자기 종족이 더 많이 퍼지길 희망하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며 종족 보존의 일차적 수단이다. 그러한 자연의 법칙과 생명의 본성을 거스르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우리 한국인의 젊은 세대가 갖고 있는 메마른 삶의 삐뚤어진 정서, 돈과 좋은 직장만 있으면 만사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단세포적 사고에 깊은 걱정이 앞선다. 자신이 씨 뿌려 푸릇 푸릇 자라나는 생명체를 바라 보면서 느끼는 그 풋풋한 마음이 그 어찌 한 채의 집이나 좋은 직장에 비견될 수 있겠는가? 작은 돌 감귤을 먹다가 씨앗이 너무 많아 뱉으면서 생각난 한 조각을 단상에 올려본다. 기후 스님(시드니 정법사 회주 스님)

  30/07/2020
  금요단상 - 기후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