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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FAQ ③  → “교회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그릇된 성경 상식들”김경진 교수 (알파크루시스 대학교)※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을까? 교회에서 믿는 성도의 삶이 예수를 구주로 믿고 난 다음 달라져야함을 강조할 때 흔히 사용되는 표현이 바로 이것이다. 사울이 변해 바울이 된 것처럼, 예수 믿는 이들은 세상에 속했던 이전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한다는 주장이다. 즉 박해자 사울이 변하여 전도자 바울이 된 것처럼 그렇게 이전과는 180도 다른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사실 신약성경에서 불신자로 있다가 예수를 믿고 극적으로 변화된 사람의 대표적 실례가 바로 사도 바울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주장은 옳은 것일까? 과연 사울은 변화되어서 바울이 된 것일까? 사실 이 질문은 사도행전을 주의 깊게 읽기만 하면 금방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사도행전 초반에(7장) 헬라파 지도자 스데반이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설교할 때 사울이 처음 언급된다. 스데반이 설교를 마치자, 설교 내용 중 성전 무용론을 구실로 삼아서(행 7.49) 이스라엘 백성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에 사울이 등장한다(행 7.59,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스데반 처형의 증인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후에도 스데반 사건과 관련하여 사울은 두 번 더 언급된다(행 8.1, 3). 이처럼 스데반 사건과 관련하여 사울이 세 번씩이나 등장하는 것은 두 사람 사이의 신학적 연속성을 염두에 둔 저자 누가의 세심한 배려로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스데반의 성전 무용론은 곧 제사 무용론으로써, 전통적으로 희생제사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는다는 유대교의 구원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인데, 이러한 개념에 예수 신앙을 연계시킨 장본인이 바로 바울(사울)인 것이다. 우리는 그 증거를 사도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행한 설교에서 확인할 수 있다.“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예수)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니라.” (행 13.38-39).이러한 스데반과 사도 바울 사이의 신학적 연속성을 근거로 하여, 어떤 이들은 바울을 스데반의 후계자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스데반 사건 이후 다시 사울이 등장하는 곳은 바로 사도행전 9장, 즉 그 유명한 다메섹 도상에서이다. 많은 설교자들은 이 다메섹 사건을 근거로 하여 변화 전후의 삶을 비교하며 강조한다. 즉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우리 각자에게도 삶과 믿음의 분명한 전환점이 되는, 다메섹 사건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철저하게 변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이 말이 사실이라면, 사울은 다메섹 사건 이후부터 즉시 그 이름이 바울로 바뀌어져야 한다. 그러나 사울이 아닌 바울이 등장하는 것은 한참 지나서 13장, 즉 바울의 1차 선교여행 무렵이다(행 13.9, “바울이라고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그렇다면 9장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소명을 받은 이후, 13장의 제1차 선교여행 때까지 여전히 바울은 사울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다 (행 9.11, 17, 18, 19, 22, 23, 24, 25, 26; 11.25, 30; 12.25; 13.1, 2). 다메섹 체험과 함께 이름은 바뀌지 않았다. 결국 사울 바울의 이름의 변화는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체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분명한 성경적 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늘날 한국교회의 일부 강단에서는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러면 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초반에는 사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다가 후반에는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울이란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된 상황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알 것은 사울은 유대식 이름이고, 바울은 로마식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알다시피 베냐민 지파 사람이기에 아마도 그 부모는 베냐민 지파의 대표적 영웅,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인 사울 왕의 이름을 따라 그의 유대식 이름을 지었을 것으로 본다. 아울러 그 가족이 로마 시민이기에 로마식 이름을 또한 가졌을 것이다. 이렇게 두 개의 이름을 가진 또 한 사람이 바로 요한 마가(John Mark)이다(행 12.12). 마가는 로마식 이름이고, 요한은 유대식 이름이다.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 민족이 일본에 의해 식민지 통치 받을 때와도 같은 배경이다. 이런 맥락에서 누가가 사도행전 초반에는 사울이라는 이름을 쓰다가, 중반 이후부터 바울이라는 이름을 쓴 것은 3차에 걸친 선교여행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교여행 이전 예루살렘 사역에서는 여전히 사울이라고 불렸으나(행 8.19-30; 11.30; 12.25), 선교여행을 떠난 후부터 바울이라고 불린 것은 그의 선교의 대상이 주로 이방인들이었고, 따라서 그 이방인들에게는 유대식 이름보다는 로마식 이름이 더 적절했기 때문인 것이다. 어쩌면 저자 누가가 선교전략적 차원에서 그렇게 이름을 바꾸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부분은 정작 바울 자신은 그의 모든 서신에서 한 번도 자신을 사울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즉 사울이라는 유대식 이름을 사용한 것은 역사서인 사도행전에서 바울이란 인물을 소개면서 누가만이 그렇게 부른 것이다. 결국 오늘날 일부 설교자들이 강단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면서, “사울이 변해서 바울이 된 것처럼”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성경에 없음으로 비성경적이고 잘못된 것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와 같이 회자(膾炙)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2/09/2022

신약성경 FAQ ②  → “교회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그릇된 성경 상식들”김경진 교수 (알파크루시스대학교)※ 동방박사들은 정녕 별 따라 왔을까?마태복음에 기록된 성탄절 이야기(마 2.1-12)에 등장하는 동방박사는 동방(아나톨레), 아마도 페르시아(오늘의 이란)에서 별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온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과연 그럴까? 만일 그들이 별을 보고, 별을 따라 예루살렘에 왔다면, 왜 아기 예수가 있는 집으로 곧장 가질 않고, 아기 예수가 없는 왕궁으로 갔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아기'가 왕궁에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가 있는 집으로 바로 가질 않고 왕궁으로 갔다는 것은 그들이 별의 인도를 받지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별을 따라서 왔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찬송가에서도 왜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 (“동방박사 세 사람”; 찬송가 116장; “동방에서 박사들 귀한 예물 가지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별 따라 왔도다.”) 그것은 우리말 성경이 그렇게 읽도록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마 2.2)“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 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마 2.9)그러나 헬라어 원문에 의하면 2, 9절의 동사는 모두 (부정)과거형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를 원문에 따라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의 별을 보았고,”(2절) “동방에서 보았던 그 별이.”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서 이 단어들이 현재형으로 되어있으니, 우리는 동방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계속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별을 따라 온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문에 의하면, 그들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았고, 그래서 경배하러 온 것이고(2절), 실망해서 왕궁에서 빠져나올 때 동방에서 보았던 그 별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9절). 그렇다면 별을 연구하던 점성술사였던 동방박사들은 하늘의 별들을 관찰하다가, 어느 날 유대인의 왕이 태어나실 것이란 별의 징조를 보고는 유대인의 왕이니까 당연히 왕궁에 있을 줄 알고 왕궁으로 갔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별이 그들을 줄곧 인도했다면 처음부터 그들은 바로 아기 예수가 있는 집으로 갔을 것이다. 결국 동방박사들은 별 따라 오지 않았다. 별은 그들을 줄곧 인도하지 않았다. 동방에서 징조로 나타났던 별이 다시 나타난 것은 동방박사들이 왕궁에 아기 예수가 없음을 알고 낙심하여 왕궁을 나올 때(9절), 그 때부터 왕궁에서 아기 예수가 있는 집까지만 인도하였다. 그렇다면 동방박사들이 별 따라 왔다는 말은 그릇된 상식인 셈이다. 성탄절이 되면 교회에서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성극(聖劇)을 상연하는데, 그 때 등장하는 동방박사들은 동방에서 예루살렘까지 그 머나먼 길을 별을 보고 별을 따라 온 것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별은 그들의 모든 여정을 인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왕궁에서 아기 예수가 있는 집까지만 인도했을 뿐이다. 성극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사실 동방박사들은 동방에서 예루살렘까지 오는 시간을 감안할 때에 아기 예수가 탄생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에 방문하였다. 반면에 누가복음 성탄절 이야기에 등장하는 목자들은 천사의 지시를 받고 즉시 그 집을 방문하였다(눅 2.9;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그렇다면 그들은 같은 시간에 함께 자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성극에서 동방박사들과 목자들이 함께 있는 그림은 사실과는 다르다.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동방의 먼 나라에서 별의 징조를 보고 예루살렘까지 몇 달에 걸쳐서 애써 찾아온 동방박사들이 유대 왕궁에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안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은 얼마나 실망하고 절망하였을까? 그렇게 절망하였을 그들에게 동방에서 나타났던 별이 문득 다시 나타나서 마침내 그들을 아기 예수의 집으로 인도하였다. 여기서 ‘문득’으로 번역된 단어는 사실 원문에서는 ‘보라’(behold, look; 이두)이다. 이 단어는 종종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킬 때 사용되는 감탄사이다. 그렇다면 저자 마태는 먼 여행의 수고를 무릅쓰고 찾아온 동방박사들을 위로하는 것처럼, “보라, 여기 너희들이 동방에서 본 그 별이 다시 나타났도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머나먼 여행의 불편을 무릅쓰고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수고롭게 찾아온 그들을 하나님은 실망시키지 않고, 마침내 다시 나타나 바른 길로 인도하여주셨던 것이다. 종종 우리는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가 있고, 그래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데 도중에 실망할 때가 적지 않다. 왜냐하면 가는 도중에 전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보이질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가던 길을 계속 가야하는 것은, 만일 우리가 가는 도중에, 왕궁을 나온 동방박사들처럼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 주님께서는 ‘문득’ 다시 나타나셔서 마침내 우리를 목적지까지 인도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 주님은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는 만큼 우리를 신뢰해 주신다.

21/09/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