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도 봄볕을 그리는 시간이 길었던 이번 겨울이었다. 그 기다림 속엔 변화를 바라는 희망의 싹이 움트고 있고 새로움을 창조하려는 생명의 기운도 함께 한다. 창문 너머로 바라보이는 푸른 봄 하늘엔 몇 조각의 새털구름이 한가롭게 노닐고 청록색 가로수 잎새 속엔 새들의 지저귐이 요란스럽다. 따뜻하고 밝은 기운에 바람 한 점 없는 이런 날엔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반복되는 일상의 갑갑한 테두리를 벗어나서 대자연의 조화로움과 상쾌한 기운을 함께 느껴보라는 천지신명의 부추김일 것이다. 그 기운에 떠밀려서 가까이에 있는 플라워 파워에 갔다. 엔필드에 있는 그곳에 가면 갖가지의 나무들과 예쁜 꽃들도 많이 볼 수 있고 분위기 있는 커피숍에서 담소도 나누기가 좋아서 가끔씩 찾게 되는 그곳이다.
거기엔 봄기운이 완연해서인지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들은 비료와 꽃 등을 트롤리에 가득 싣고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계산대에 줄을 지어 있었다. 우리도 화단을 한 바퀴 돌아 보면서 마음에 드는 화분 등을 점찍어 두고 차 한잔을 마셨다. 눈에 익은 노란 부리의 새들이 겁도 없이 식탁에 날아와서 과자나 설탕을 빼앗아 먹는 모습이 너무나 훈훈한 느낌을 준다. 한국에선 도저히 볼 수 없는 평화스러움의 한 장면이다.
난 꽃씨가 진열되어 있는 곳으로 갔다. 일단은 꽃 그림을 보면서 한 바퀴 돌았다. 어떤 꽃을 심을까? 우선은 내가 아는 꽃에 일순위를 두고 그다음은 꽃의 화사함을 보면서 꽃씨를 골랐다. 코스모스와 사루비아, 국화 종류가 선택되었고 이름 모르는 다섯 종류의 꽃씨들도 더 보태졌다. 사찰에 돌아와서 이미 준비해둔 화단과 화분에 정성 들여 꽃씨를 심었다.
그때 어떤 한국인이 내 등 뒤에서 말했다. “기와 담장이 너무나 참해서 지나다 들렀는데 한 번 둘러봐도 괜찮겠습니까?” 70대 정도로 보이는 그녀는 자태가 매우 우아하였고 후덕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그런 인상이었다. ‘저분은 마음씨가 참으로 좋겠다’는 생각에 미치자 상당한 상념이 떠올랐다. 꽃씨에 비교되는 마음씨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수 년 전 KBS2에서 “마음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심층 보도를 한 적이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생물학자, 과학자, 의사, 심리학자를 상대로 이영돈 PD가 야심한 기획으로 제작된 작품이었다. 결론은 “마음이란 그 무엇이라고 정의 내릴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라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마음도 모르는데 마음씨를 규명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것임이 틀림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일상 생활 속에서 마음씨가 좋아 보인다거나 고약할 것 같다는 말을 자주 듣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어림짐작의 판단을 하게 하는 근거는 얼굴이다. 얼굴은 글자 그대로 얼이 모인 굴이라는 뜻이다. 그곳의 형태와 눈, 귀, 코 등의 감각기관 조화와 거기에서 나와지는 여러 기능들, 그리고 피부색에서 나와지는 여러 가지의 상태를 직감적으로 판단하게 하는 그 바탕이 바로 우리들의 얼굴이다. 그런 이해가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면 마음씨의 모습은 어림짐작이 가능하다. 바로 그 얼이 마음씨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것은 모습도 질량도 없다. 그 어떤 것에도 제재받지도 않는다. 그 때문에 그로 인한 결과 역시 무한대의 파장을 일으킬 수가 있다. 그 소중한 것을 어떻게 가꾸어야 할까? 얼이 마음의 본바탕이라고 하면 생각은 그것에서 파생된 영향력 있는 실체적 에너지이다.
불교 인식론에 유식철학(唯識哲學)이라는 것이 있다. 만법이 오직 한 생각의 영향권에서 지배된다는 것이다. 그 학문만을 7년 동안 공부해야만 이해될 정도로 광범위하고 까탈스러운 조직으로 짜여 있다. 거기에 마음씨 가꾸기에 대해서인, 연과의 삼단론법을 통한 상의상관(相依相關) 관계에서 영향을 서로 주고받는 기본 이론이 전개된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는 이 인연의 원리로 이루어진다. 가을에 좋은 결실을 가져오려고 한다면 봄에 좋은 종자를 심어야 한다. 그리고는 여름을 지나는 동안 김도 매어주고 비료와 물 등등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때에 제공해 주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여기서 종자는 인(因)이며 돌봄은 연(緣)이다. 그렇다면 좋은마음씨란 어떤 것일까? 일단은 진실로 알차 있어야 한다. 거기에 성실함이 더해지는 관심이 지속하면 가을 곡간은 넉넉하게 채워질 것이다. 그러한 일련의 관계 속에서 전개되는 수확량의 총량적 결과는 인간의 삶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우린 서로서로 의지하면서 살고 있다. 그 매개체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씨의 오고 감이다. 신뢰하고 서로 존중하며 사랑하는 마음씨를 주고받을 때 우리들의 삶은 농익은 열매로 행복감을 채우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어떤 마음씨를 가꾸고 있는지는 나에게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게 된다.
옛 성현의 글에 “잔디 속의 나무는 석 자 이상 크지 못하고 소나무를 의지한 칡은 천 길을 따라 올라간다”고 하였다. 마음이 좋게 보여지는 얼굴 모습을 가짐엔 그만큼 주변의 여러 인연들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다는 뜻이다. 우리 한인 사회의 여러 정황들이 더러는 마음씨를 잘 가꾸지 못하게 하는 흐트러진 내용들이 산재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선은 자신의 마음씨를 잘 가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로 인해서 나와 인연된 주변의 사람들도 그들의 마음씨를 잘 가꾸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이다. 화사하게 피어날 아름다운 꽃 모습을 상상하면서 여린 화초에 아침저녁으로 정성껏 물을 주는 허리 굽은 이웃집 할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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