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선착순의 값어치가 최대로 인정 받은 때가 있었다. 60 여 년 전 시골에서 걸어서 장을 보다가 소위 신작로(新作路)라는 큰 길이 생기면서 버스가 드문드문 다닐 때이다. 장날이 되면 이고지고 수십리 장길을 다니다가 면 사무소 근처로 버스길이 트이게 되자 전 면민이 차를 타려고 하다가 보니 장날 버스를 타는 그 장면은 참으로 볼만했다. 차 다니는 횟수는 적은데 이용자는 많으니 당연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버스 정류소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다. 특히 장날 막차는 한층 더 가관(可觀)이었다. 크고 작은 보따리를 이고온 장꾼들은 먼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난리법석이다. 짐칸이 따로 없던 시대라 버스안은 짐 반 사람 반 이었다. 그렇다 보니 먼저 올라간 사람이 자기짐을 옆자리에 놓아두고는 친구의 자리를 잡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이 적은 평소(장날이 아닌 날)에는 그것의 효력이 발생하지만 장날엔 그 보따리의 효력이 상실당한다. 뒤따라 올라간 사람들이 그 보따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에 그러하다. 보따리를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시비가 자주 일어나게 될 정도로 자기 앉은 자리의 가치가 드세었다. 그런 문제가 일어나다 보니 이젠 밖에서 창문을 통해서 자기 보따리를 들어 밀어넣는 방법으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한다.
출발 시간도 정해진 것이 없다. 막차라는 조건 때문에 오는 대로 기다리다 보니 그야말로 콩나물 시루 버스이다. 그 땐 살 것도 왜 그리 많았던지 이고 든 것이 한 두 개가 아니다. 게다가 여름 철에 수박을 사서 들고 버스를 탔다가 흔들거리는 비포장도로로 인해서 그것이 깨어져서 버스안은 한 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거기다가 버스요금을 그 복잡한 통로를 비집고 다니면서 받다가 보니 그 속에서 또 한바탕의 아비규환이 일어난다. 어디에서 타서 어느 곳에 내리는지에 따라서 요금이 다른데도 아무런 증표가 없으니 시비가 끊어지질 않는다.
그러나 총각들은 그 때가 은근히 신이 난다. 동글동글 예쁘게도 생긴 차장 아가씨들과 몸을 부닥쳐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보니 일부러 몸을 비비적 거리면서 차와 사람에 밀리는 듯 버드나무 줄기처럼 흔들거린다. 그래서 처녀와의 신체적 접촉을 최대한 활용한다. 그 때만큼 앉은 자리에 따른 선착순이 부러운 때도 없었다.
그래서 5일장은 시골 사람들의 생일이라 할 정도로 기다려지는 날이었다. 버스 속에서 일어났던 갖가지의 재미나는 이야기와 시장 터에서 사돈과 막걸리를 한 잔 하면서 주고 받은 저간의 소식, 그리고 갖가지의 물건을 사고 파는 과정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주고 받는 그 모습들은 꼬마였던 나에겐 그곳은 천국처럼 느껴졌던 또 다른 세계였다.
그 이후 반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은 어느 분야에서건 서두르기만 하면 자기 자리를 안심하고 확보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있어서 생로병사의 일련의 과정 속에서의 차례는 예나 지금이나 보장 받을 수가 없다. 지난 주말 28일(토)에 채스우드에서 일어났던 불행한 사건의 최모 양의 영결식을 집전했다. 이 곳 시드니에 와서 여러 유형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 보았지만 그날처럼 비통의 현장을 목격하긴 처음이었다.
그녀의 부모들은 땅바닥에 주저 앉아 거의 실신 직전의 애통함을 토로했다. 특히 그의 아버님은 관에 매달려 “내하고 바꾸자”며 주저 앉고 서길 몇번이나 반복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많은 조문객들도 여기 저기서 훌쩍거렸다. 인생행로의 여정 속에서 차례대로 마감하지 못할 때의 고통의 무게를 바라보면서 차례의 소중함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 누가 부모보다 앞서는 그 길을 선택하길 바라겠는가? 그렇게 되기까지는 그 만큼의 본인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그 어떤 큰 짐이 있었을 것이다. 그 무거웠던 짐 속의 내용물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문득 한국에서 일하는 어떤 형사의 말이 생각난다. “끔찍한 사건사고의 경우 98%는 돈과 애정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번의 경우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부모의 가슴속에 대못을 박아두고 떠나게 하는 그 재색(財色)의 정체에 대해서 우린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바르게 관리해야 될 것인가? 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쉽지는 않겠지만 깊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
고려 때의 보조국사는 그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재물과 이성을 잘못 관리하는데서 나와지는 재앙은 살모사에게 물리는 것보다도 더 클 수가 있다(財色之禍 甚於毒蛇). 그러하니 그것을 탐닉하는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려서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할 것이다(省己之非 常須遠離)”.
차례됨의 순리는 안정되고 평화롭다. 4계절 변화의 차례 속에서 만물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그 기운을 받은 우리 인생 또한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친다. 그런 이치를 불교에선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했다. 모든 것은 변하니 고정된 실체는 없는 것이라고... 그 이치 속에서 부모가 앞장서고 자녀들이 뒤따라가는 순차적 질서는 진리에 부합되는 아름다운 모습일 수도 있겠다.
흐르는 강물을 따라 내려가는 뗏목에 탄 사람들은 콧 노래를 부를 수 있겠으나 그 물을 거슬러 뗏목을 밀고가는 그들의 힘듦은 아는 이만이 알고 있는 일이다. ‘부모보다 앞서가는 불효가 없다’ 는 그 말을 되새김하면서 그 엄중한 차례를 지킬 수 있는 삶의 행로가 유지되도록 우리 모두가 긴 외나무 다리를 건너 듯 조심 조심 살피고 또 살펴야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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