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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구가 실뱅 테송의 책 ‘희망의 발견’을 읽고 몇 인용구절들을 보내왔다. 2010년에 바이칼 호수 옆 시베리아 숲속의 한 통나무집에서, 6개월 혼자 살면서 쓴 글이라고 했다. 그 중에서 네가지를 소개한다.  고독해 질 때 하나님과 우정을 맺을 수 있다. 목표와 목적이 줄어 들거나 없어져야 삶에 더 많은 의미가 생겨난다. 자연은 그 자체대로 사랑해야 한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하루 한번은 정장 차림으로 식사한다이다. 도심속 사람들 가운데서 강요된 격리생활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적용해 볼 수 있는 실제적인 지혜와 방법을 발견한다.젊은날 산 속에서 혼자 캠핑을 한적이 있다. 새벽과 밤 시간에 산의 숨결을 듣는 것 같은 그 경험을 잊을 수 없다. 그래서 짧은 6일정도라도 혼자만의 은둔 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지금은 가능치 않다. 이 격리상태가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로 백신 접종을 마쳤다. 한국에서 만든 마스크가 숨쉬기에 더 편하고 괜찮아 보여 넉넉히 구입했다. 록다운 기간에 상관없이, 움츠리지 않고 맞서 보겠다는 다짐의 표시다.실뱅이 숲속의 통나무집에서 혼자 정장을 하고 식사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언뜻 하나의 쇼나 괴짜의 모습처럼 보일 수도 있다. 웃기는 코미디 일수도 있겠다. 내게는 외딴 그곳에서도, 자신의 생활과 마음을 바로 잡으려는 큰 몸짓으로 이해된다. 요즈음은 누군가 집을 방문하는 사람도 없고, 나 또한 밖에 나갈 일이 많지 않다. 그러나 보니, 일상이 흐트러져 잠옷에 가운만 걸치고 아침 식탁에 앉은 적도 있었다. 지금은 매일 면도를 하고, 잠옷을 갈아 입고 침대를 정리하고 스트레칭 등 간단한 운동을 한 뒤에 아침을 먹는다. 가능한 시간을 내어 걷기도 한다. 가까운 골프장에 부킹이 되는대로 아내와 함께 라운드를 하고 있다. 애써 평상시의 몸과 마음 상태며, 생활의 리듬을 유지하기 위해서다.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 발코니에서 나가 있는 때도 많아졌다. 그냥 하늘과, 바다, 산등성이들을 쳐다 보기도 한다. 바다는 밀물 썰물에 따라 계속 움직이고 하늘의 빛깔에 따라 그 색도 달라진다. 하늘의 구름, 바람의 흐름과 방향도 계속 바뀐다. 그 자연은 내게 그처럼 움직이라 변하라, 너의 삶에도 리듬을 가지라고 귀띔해 주는 것 같다.  가까이서 보는 다육이들과  작은 그 꽃들이 앙증맞다. 하얀색 긴 풍란은 꽃이 예쁘지만, 보랏빛 풍란은 그 향기가 깊고 은은하다.  제라늄은 사철 꽃을 피우고, 독특한 냄새로 해충이나 모기를 쫓는다. 지금은 군자란과 팬지꽃 아프리칸 바이올렛이 한창이다. 제각기 다르지만, 모두 사랑스럽다. 포도송이처럼 아래로 쳐지는 다육이가 있다. 몇주전, 강한 바람으로 그 화분이 떨어져 깨어졌다. 다육이는 크게 상했고, 네 줄기중 하나는 떨어져 나갔다.  아내는 새 화분에 옮기고, 끊어진 한 줄기도 다른 화분에 심었다. 오늘보니 두 화분의 다육이가 거의 정상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 치유의 능력과 속도가 참 놀랍다. 사람의 몸과 마음에 상처가 커도, 그것을 아물게하고 회복시키는 신비한 힘이 이미 내 안에 있음을, 그 다육이를 통해 배운다.보통 삶의 목적이나 목표를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바람직하다. 그러나 실뱅은 목표와 목적이 적거나 없어져야 삶에 더 많은 의미가 생겨난다고 했다. 왜 그러할까? 그런 목적은 주로 자신을 위해, 또한 미래의 성취를 위한 것들이다. 그 과정에 가족과 이웃에게 여러가지 희생과 고통을 주기도 한다. 오히려 그런 목표가 줄거나 없을 때, 삶속에 더 많은 보람과 의미가 생긴다는 그의 말에 수긍이 간다.엊그제 한국 대전에 있는 한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던 건축가로 열정적으로 일하던 분이다. 안타까운 상념가운데서 문득 지금이 내 삶의 어떤 계획이나 일들을 더 줄이고 내려 놓아야 하는 그런 때라는 자각을 했다. 메이지 않는 더 큰 자유함을 위해서다. 어떤 목표나 일이 없어도, 내 삶이 알찬 의미와 보람으로 채워지기를 바란다.휴대전화나 컴퓨터도 쓸 수 없는 외진 곳에서. 사람 소리를 듣지 않으니, 하나님이 나타나고 그 분과 사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실뱅의 고백이 가슴에 와 닿는다. 돌이켜보니, 이 격리 과정을 통과하면서, 나는 그 분과 조금 더 가까이 그리고 더 친밀한 사귐의 기회를 가질수 있었다. 아니 그 분께서 그렇게 허락해 주셨다. 그 분은  내게 속사람을 강하게 하라, 네 자신에 몰두하지 말라, 록다운 상황에 위축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이미 알고 경험한 나의 사랑과 은혜안에 거하라. 모든 일에 기뻐하라, 감사하라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 있다. 그러한 말씀들이 귀하지만, 그 분 자체가 내게는 가장 큰 소망의 빛이다.최정복 (호주연합교회 은퇴 목사)

  09/09/2021
  금요단상 - 최정복 목사

8월 첫 주간이다. 날씨가 한결 포근해졌다. 봄 소식을 알리는 목련꽃들이 한창이다.  보랏빛 , 흰빛 꽃송이들이 소담스럽다.  그러나 아직 내 마음은 저만치 뒤에서 머뭇거리며  서성이고 있다. 새 봄의 정취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어서다.코로나로 인한 록다운이 8월 말까지 다시 연장 되었다.  필요한 치과 치료도 그냥 기다리는 중이다. 금년 생일이며 결혼기념일을 아내와 둘이서만 보내야 했다.  매년 그런 날을  구실 삼아 가족들과 또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해 오던 터여서 조금 적적했다. 그럴수 밖에 없는 상황인 것을 알면서도 씁쓰레한 앙금을 떨쳐 버릴수 없다. 그런 작은 것들이 쌓여 무기력한 피로감을 준다.  이런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은퇴자인  나의 평범한 삶도 그러 할진데,  청장년들이며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더해  힘든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시드니 도심에서 록다운 반대 시위가 열리고 수십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런 행동이  적절치 못함을 알면서도 어떤 비난보다는 그들의 좌절감과 욕구불만을 생각하며 연민을 느낀다.지구촌(Global Village)의 이미지는 밝고 긍정적이다. 인터넷과 항공, 통신 등 첨단기술의 발전으로 전 세계가 하나의 마을처럼 가까워 졌다. 쉽게 왕래하고 소통할 수 있다. 도쿄 올림픽의  경기는 무관중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나는 고스포드 집안에서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손자들이 방학을 맞아 휴스톤에서 시카고로 여행왔다는 아들 가족과 긴 시간 화상통화를 했다. 같은 지구촌에 살기 때문이다. 반면에 코로나 감염의 경우는  바로 이같은 지구촌의 삶 때문에 모든 나라에 이처럼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어두운 측면도 있다.코로나만이 아니다.  기후변화,  종교간의 갈등, 경제력의 격차 등이 지구촌의 삶에  직접 영향을 끼친다. 또 그런 결과는 어느 한 나라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그 정도와 시간 차이는 있지만 지구 마을 모두가 함께  그 댓가를 치러야 한다. 아니 인간만이 아니다.  바다와 숲과  평야, 그 안에 서식하는 모든 피조물들도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 받는,  하나의  동일한 지구촌의 삶이기 때문이다.한 친구가 윌프레드 세시저가 쓴 ‘절대를 찾아서(Arabian Sands)’라는 책을 읽고 몇구절을 보내왔다. 그 중에 두가지가 기억난다. 첫째, 베두인들은 나눔이란 당연한 것이지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둘째, 어떤 고난이나 결핍도 인간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닌, 그대로 받아 들여야하는 훈련이다.  삶속에 고난이 있다는 것은 최고의 축복이다. 편하게 사는 것보다 고통에 개의치 않고 사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가 열악한 사막에서 생존하며 더불어 상생할 수 있게 하는 지혜요 버팀목이 된 줄 안다.지금 지구촌에는, 백신이 충분해도 접종을 거부하는 사람들로 고심하는 부자 나라들이 있다. 반면에 절실하게 필요하지만, 백신이 없어 접종할 수 없는 가난한 나라들도 있다. 그런 와중에 추가 접종까지 실행하고 있는  나라들도 있다. 안타깝고 슬픈 그림이다. 그런 이기적이고 냉혹한 지구촌의 현실이  베두인들의 사막과  흡사하지 않는가!최근에 아마존의 베이조스, 버진 그룹의 리차드 브랜슨 회장 등이  우주여행을 다녀왔다. 한사람 당 316억 6천만원의 돈을 지불하고  짧은 시간동안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베이조스는 “그것이 당신을 변화시킨다. 인류와 당신과의 관계를 바꾼다”고 말했다. 정말 그러할까?  솔직히 나는 그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내년 1월부터 본격적인 우주관광시대가 시작되는데 10일간의 여행경비가 617억 5천만원 이라고 한다. 혹 그런 관광 사업을 선전하는 호들갑스러운 표현인 것일까?나도 우주에서 찍은 초록빛나는 지구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지구는 다른 항성들과  비교해서 비록 크기는 작지만, 독특하고 경이로운 곳이다. 현재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지구뿐인 줄 안다.  우주에서 지구를 보는 것보다 지구안에서 가까이 보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의 우주관광 자체를 탓하는건 아니다. 자기 돈  쓰는 것을 시비하는 건 더욱 아니다. 다만 지구촌이 가뜩이나 어려운 그 때가 못마땅하고,  이웃의 아픔과 필요를 외면하는듯 싶은 그런 행동이 유감일 뿐이다. 만일 그 많은 여행경비로 가난한 나라들을 위해 백신을 사 주었다면 얼마나 큰 변화, 아름다운 관계로 바꾸어 질 수 있었겠는가!지구촌 여러 곳에서 델타변이가 너무 빠르게 전파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현재 상황이 나쁜 그런 나라안에서, 현존하는 백신으로 통하지 않는 더 강력한 변이 바이러스가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지금 그러한 나라들과 백신을 나누는 것이 더 심각한 지구촌 펜데믹을 예방할 수 있는 길이라고 한다.이 멈춤의 기간이 언제까지 연장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록다운 된 삶이 때로는 사막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내 삶이 전능자의 선물로 허락된 것처럼, 이런 불편함도 내게 주어진 훈련으로 여기고  잘 감당하려고 한다. 또한 어려운 이웃과 친구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돌봄과 나눔을 실천해야 되겠다고 다짐한다. 이것이 나를 향한 그 분의 선한 뜻이요, 곧 내 자신을 위한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최정복 (은퇴목사, 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 jason.choi46@gmail.com

  05/08/2021
  금요단상 - 최정복 목사

삶은 소중하다. 모든 나이층의 삶에 각기 다른 의미와 재미가 있다. 은퇴자로써 나의 삶 또한 그렇다. 은퇴후에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줄어든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물론 이것이 외로움이나 상실감을 주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난 이것을 하나의 자유로 만끽하며 즐기고 있다. 기분 좋은 쉼 혹은 어떤 재미를 위해 사람들을 만나고 연락한다. 여왕 생일 3일간의 연휴가 있었다. 건너편 스타디움에서는 많은 관중들이 참석한 축구 경기가 열렸다. 헤비 메탈 음악 컨서트가 열렸다. 난 친구 부부와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혼스비에 있는 한 일식점으로 갔다. 그날 오전에 갑짜기 그렇게 정했다. 은퇴자들만이 할 수 있는 그런 여유며 재미다. 가는 길에 보니까 시드니에서 센트럴 코스트 지역으로 나가는 차량들로 가득했다. 고속도로지만 마치 도심의 길처럼 천천히 가다가 멈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다시 고스포드로 올 때는 복잡한 고속도로 대신에 퍼시픽 하이웨이를 통해 왔다. 한가해서 좋았다. 직선의 고속도로보다 지형에 따른 부드러운 곡선 도로와 그 주변 경치가 수려했다. 마운트 화이트(Mt. White) 지역에 있는 ‘말 안장들’ (Saddles)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까페에 들렀다.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였다. 120석이나 되는 큰 규모였지만 빈 자리가 없어 되돌아 나와야 했다. 원래는 페딩톤 경주말들의 마굿간이었는데 그곳을  사랑하는 기업가와 건축가 그리고 유명 요리사가 함께 개발했다고 한다. 까페 바로 뒤에 개인 댐이 있었고 탁 트인 주변 경관이 아늑하고 평화스러웠다. 휴일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인기있는 명소인 것 같다. 다음에 다시 오고 싶은 곳이다. 오는길에 퍼시픽 하이웨이 옆에 있는  작고 소박한 커피 솝에서 커피를 마셨다.  마지막 져가는 가을 단풍들의 모습이 아쉬어 차를 멈추고  스냅 사진을 찍기도 했다. 주변 농장들에서 생산되는 채소와 과일들을 파는 가게를 구경삼아 들렀다. 아내는 물건들이 싱싱하고 좋다며 몇가지를 샀다. 한 나절의 나들이로  편안한 쉼과 새로운 것들을 보고 배우며 맛보는 재미를 경험했다. 고속도로에 비해 시간도 큰 차이가 나지 않으므로, 가끔 구도로를 이용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마크 부카난(Mark Buchanan)이 쓴 ‘하나님의 안식 (Rest of God)’이라는 책을 읽었다.  ‘안식’ 이라는 번역이 혹 무겁거나 종교적인  어휘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냥 ‘쉼’ 혹은 ‘멈춤’이라는 일상적인 말로  바꾸어도 상관이 없다.  다만 무엇을 위한 멈춤 혹은 쉼인가 하는 목적이 중요한 줄 안다.  저자는   다시 생각하기 위해,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우리의 날수를 계수하기 위해, 종교나 율법이 아닌 기쁨을 위해, 조각들을 다시 모아 맞추고 기억하기 위해, 영원이나 천국을 맛보기 위해서라고 했다.  비우는 것이 실상은 채우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지금의 내게 유익하고 필요한 내용이다. 그렇게 멈추고 쉬며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여,  내 자신을 비우며 채우는 그런 연습을 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쉼과 재미가 현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하는 다른 심리학자도 있다. 그가 밀하는개념은 조금 독특하다.   쉼은 자기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그런 몸과 마음의 상태를 뜻한다. 재미란 자신을 잊어버리게 할 정도로 몰두케하는 어떤 취미나 여가활동들이다. 가령 개인에 따라 등산이나, 마라톤, 골프,  바둑, 그림, 공부나 각종 자원봉사 등 그 종류와 방법은 다를수 있다.그러나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이를 통해서, 내면의 자신과 진지하게 대화할 수 있으며  또한 자신을 잊게할 정도로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재미있게 사는 것이 행복이요,  정신건강을 위해 매우 유익하다고 주장한다. 지난 주말 저녁에  NSW 주정부는 코로나 감염자 확산을 막기 위해  외출 금지령(2주 록다운)을 발표하었다.  시드니 광역권 이동 제한이었다. 주일 예배며 다른  약속 두개를 취소하며 씁쓸했다. 더 젊고 활동적인 가정들과, 사업을 하는 분들에게는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이겠는가! 주일엔 온라인 예배였지만 찬양과 말씀에 몰입되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쉼을 경험했다. 사람들은 안식일을 거룩한 날로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실상은  이날이 사람들을 구별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오늘은 지난 며칠간의 평범한 나의 일상을 기억하며, 생각의 조각들을 모아 이 단상을 쓰고 있다.  적절한 어휘나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 갑갑할 때도 있다. 생각의 흐름이 끊기거나 곁길로 가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내 자신과 대화하며, 때로는 자신을 잊어버리는 몰입의 시간도 경험한다. 이 또한 내게는 ‘쉼과 재미’를 위한  하나의  방법이요 수단이 되는 것일까? 아침부터 찬비가 추적였다. 잔뜩 찌뿌린 구름으로 하늘을 볼 수 없다.  코로나 델타변이 확진자들이 호주 전역에 퍼졌다는 소식 등으로 몸과 마음이 움추려든다. 창밖을 보니 커다란 무지개가  바다 끝에서 산등성이 위까지 걸쳐 있었다. 얼마 후에는 비가 멎고 밝은 햇살이 빛났다. 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이 드러났다. 마음이 무겁고 생활이 힘든 사람들에게 그런 감동의 무지개를 보여 주었으면하는 아쉬움이 크다. 요즈음 같은 때, 저들 모두가 어떤 형태로든 본질적인 의미의  쉼과 재미를 경험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최정복 (은퇴 목사,  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 jason.choi46@gmail.com

  01/07/2021
  금요단상 - 최정복 목사

한 교회에서 창립 28주년 감사 및 임직예배 설교를 부탁받고 그렇게 약속했다. 그런데 지난 주중에 성경 본문과 설교제목을 보내달라는 연락을 받고 난처했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아서다. 그 교회의 현재 사역이며 교우들의 형편을 알지 못해 어떤 메시지도 정할 수 없었다. 얼마간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렸지만 아무런 영감도 받지 못했다. 아니 주님께서는 침묵가운데 답해 주셨지만 내가 들을 수 없는, 귀가 먼 상태인 것일까? 최소한 어떤 한 말씀이나 감동이라도 주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때 가까운 이웃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날씨가 좋은데 가까운 해변에 가서 커피나 마시자고 했다. 갑자기 연락을 받고 한 시간여만에 투운 베이(Toowoon Bay)에서 만났다. 여름에는 차들로 가득했던 넓은 주차장이 거의 비어 있었다. 가을철 오후 시간 때문인 것 같다. 한 테이블위에 천을 깔고 세 부부가 둘러 앉았다. 그 친구가 준비해 온 커피를 마셨다. 비스켓에 블루 치즈를 발라 맛있게 먹었다. 눈부신 햇살과 하늘, 바람 때문에 행복했다. 함께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은 잊었지만, 편안한 분위기와 커피 냄새와 따뜻했던 그 느낌은 남아있다. 해변으로 내려가 함께 백사장을 걸었다. 맨발에 와 닿는 모래의 촉감이 좋았다. 파도가 찰삭거리며 가끔 종아리와 덜 걷어올린 옷을 적시기도 했다. 아내는 걸으면서 작고 예쁜 조개껍질을 주웠다. 가을 오후라 곧 해가 저물고 어둠이 오기전에 두시간여의 짧은 만남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함께 했던 그 소박하고 격식없는 느긋한 만남의 시간을 통해 어떤 휴식과 재충전된 에너지를 경험했다. 집에 돌아와서 설교를 위해 좀 더 맑은 정신으로 집중하고 몰두해서 기다리는 시간을 계속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내 마음속에, 그 분의 은밀한 성소가 있고, 불씨가 있음을 나는 믿는다. 침묵의 기다림을 통해서 그 불씨를 살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에 내 안에서 울리는 나즈막한 속삭임을 들었다. 네가 그 교회와 사람들을 사랑하는가하는 물음이었다. 그 물음에는 주저없이 예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뒤늦게 목사로 안수받은 후 사역했던 첫 교회였다. 첫사랑같은 애틋한 기억이 있는 교우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네가 좋아하는 대로 설교 하라는 그런 내 안의 작은 음성같은 것을 들었다. 그래서 내 마음가는대로 성경의 한 말씀을 택해서 묵상한 후 곧 설교제목을 정해서 보낼 수 있었다. 은퇴 전까지 8년간 사역했던 호주 교회에서 연락이 왔다. 장로이며 평신도 설교자 였던 존이 암투병을 이기지 못하고, 지금은 임종을 앞두고 호스피스 돌봄 (Palliative Care)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전연 기대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는 유능한 교장으로 일하던 건강한 장년이었다. 개인적으로 나의 신실한 믿음의 친구이며 동역자였다. 이런 경우에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다 좋은 것이다’라고 담담하게 받아 드릴 수 있는 큰 믿음의 사람들도 있는 줄 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믿음이 없는 것 같다. 우선 인간적으로 남은 아내와 세 자녀들의 슬픔을 생각하며, 특히 바로 옆집에 사시는 나이든 부모님의 고통스러운 심경을 헤아리며 마음이 힘들고 무거웠다. 또한 나보다 훨씬 더 젊은 친구가 그런 형편에 놓인 사실을 접하며, 문득 내 자신의 삶도 가을 오후에 접어 들었음을 깨닫게 된다. 은퇴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9년의 세월이 흘렀다. 가을 오후에 이른 내 삶을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까? 첫째,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사랑하라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가까이 있는 아내와 가족들과 친구들을 사랑하며, 잠옷을 입고 차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는 그런 작은 일까지 감사하고 싶다. 그렇게 사랑하며 감사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도 제한되어 있지 않는가. 둘째로 내가 좋아하는 일, 해야 될 그런 일들을 오늘해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오늘은 내 남은 삶에서 가장 젊고 건강한 날이다. 그렇다고 서둘러서 조급하게 다 하려는 의도는 없다. 가능한대로 알 수 없는 내일로 미루지 말자는 뜻이다. 어쩌다 보니 아직 좋아하는 단풍구경을 못 갔는데, 벌써 단풍이 다 떨어지고 없다고 한다. 그런거야 괜찮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주님을 뵙게 된다면 부끄럽지 않겠는가.. 최정복 (jason.choi46@gmail.com 은퇴목사, 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

  20/05/2021
  금요단상 - 최정복 목사

공사장 주변 도로에는 정지(Stop) 와 서행(Slow)이라고 쓰인 표지판을 들고 차량 운행을 통제하는 교통 정리원(Lollipop Worker)이 있다. 아파트 건축 현장앞 도로를 지나려는데 두 청년이 그 표지판을 들고 한 라인만을 통해 양쪽의 차량들이 안전하게 오갈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반대편 차량들이 천천이 통과 할 동안에 나는 정지 표지앞에 멈춰 기다려야만 했다. 그 표지판을 든 젊은이를 보며 문득 한 교우와 그 아들 사이에 오갔다던 대화가 생각나 혼자 미소를 지었다. 그 분은 당시 10학년 이었던 아들 때문에 걱정이라고 푸념한 적이 있었다. 그 아들은 덩치만 크지 철부지고, 공부는 관심없고 놀기만 좋아한다고 했다. 하루는 그 아들에게 나중에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묻자 모르겠다고 했다. 생각해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라고 했더니, 잠시 인터넷 탐색을 하더니 공사장의 교통 정리원도 괜찮겠다고 말했다. 왜 그런 일이냐고 물으니, 일이 쉽고 임금도 높아서라고 답했다. 비싼 학비 내고 사립학교에 보내고 있는데 녀석의 생뚱맞은 대답에 기가 막혀 그 분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그 분에게 대충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아들이 부족함 없는 가정 환경에서 자라 세상을 너무 모를수 있지만, 앞으로 조금씩 배워갈 것이다. 그 나이에 어떤 일을 하기 원하는지, 대학에서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 솔직한 대답일 수도 있다.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준비하는 또래의 학생도 있지만, 자주 바뀌거나 이룰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지금 예민한 사춘기에 느긋하고 밝은 성격으로 친구들과 잘 지내는 것으로 감사하자, 염려를 멈추고 천천히 기다려 보자고 권면했다. 그 분의 아들이 금년에 대학생이 되었다. 의학과 법학 두 분야를 함께 공부하고 있다. 법학은 흥미가 없었지만, 첫 과제를 하면서 재미있었고 성적도 높게 나왔다고 한다. 요즘은 금, 토요일 저녁에 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며 그 아들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한번 그 식당에 함께 가서 아들 일하는 것도 보고 식사를 하자고 초청했다. ‘정지와 서행’ 은 안전한 차량 운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삶을 위한 지혜다. 다만 우리 스스로가 분별하고 선택해야 한다. 가령 분노에 휩싸였을 때, 일단 행동을 멈추고, 의식적으로 말을 천천히 하는 것이 유익이다. 그 감정대로 행동하고, 말을 쏟아낸 후에는 큰 댓가를 치러야 한다. 내 자신의 경험이다. 또한 멈춤으로 볼 수 있는 소중한 것들, 천천히 갈 때에 경험할 수 있는 행복이 있지 않는가. 어떤 일 중독자는 수면 시간이 아깝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잠자는 시간에 몸과 마음이 회복되고 재충전된다. 그런 멈춤은 일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부모와 자녀, 아니 부부 사이의 관계에도 ‘멈춤과 천천히 기다림’의 요령이 필요하다. 이 세대는 멈춤이 없는 질주, 그것도 점점 더 빠르게 행동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것이 목표요, 가치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너무 바쁜 사람들 중에 마음이 공허하고 아픈 사람들이 많다. 그런 분들은 잠시 멈춰도 괜찮다. 아니 멈춰야한다고 말하고 싶다. 멈춤과 천천히 가기를 몰라, 세계가 이처럼 큰 갈등과 문제가운데 있다.미국 아틀랜타의 총격 사건의 범인은 수사관에게 성중독의 충동, 반아시아 및 여성 혐오증을 멈출 수 없어서라고 했다. 미얀마 군인들이 시민들을 향해 총격을 가하는 비극의 근원에는 소수의 군 지도자들이 권력에의 탐욕을 멈추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인 줄 안다. ‘정지와 서행’ 의 표지판을 들고 개인과 각 나라의 삶을 통제해 주는 그런 교통정리원이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동화같은 상상을 해 본다. 호기심에서 교통 정리원의 임금을 검색해 보았다. 소규모 공사장의 일용직은 현재 시간당$30 수준이다. 그러나 퀸즐랜드주의 새로운 정책제안은 연간 18만 달러이다. 간호사나 교사들 임금의 3배 정도의 높은 수준이다. 그만큼 이 직종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다만 일반 전문직들과의 임금격차가 커서 최종 결정이 어찌될지 궁굼하다. 어쨋든10학년생의 눈높이에서 하고 싶은 일로 선택했던 그분 아들의 말에 공감이 간다. 그래서 한번 더 나를 미소짖게 했다. 성큼 가을이 다가왔다. 낮에는 햇살이 눈부시고 쾌적하지만 아침의 체감온도는 제법 쌀쌀하다. 이른 아침에 습관대로 반바지 반팔 소매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더니, 콧물이 나오고 목이 조금 아팠다. 그런 상태로 세 시간 줌 강의를 마치고 나니, 목감기에 걸린 것처럼 머리가 아프고 음식 먹기가 불편하고 말하기도 힘들었다. 아내는 내가 옷도 제대로 갈아 입지 못하는 둔감한 사람이라고 핀잔을 준다. 그건 사실이지만, 진짜 이유는 지난 며칠간의 내 생활의 리듬과 마음상태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랩톱이 고장 나서 이를 고치기 위해 이틀에 걸쳐 두군데의 수선소를 가야 했다. 마이크로웨이브가 갑자기 작동을 안해 워런티 서비스 예약을 하고 기다리는 과정 등이 너무 느려서 짜증이 났다. 둘다 기계적인 문제가 아니고 단순히 전자 작동 체계의 오류여서 수선은 싱겁게 해결됐다. 둘 다 매일 사용하는 것으로 수선이 급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를 위한 조급함 때문에 허둥대며 신경쓰다 보니 내 마음의 균형이 흐뜨러지고 면역력이 떨어지게 된 것 같다. 채근담에 나오는 정중동(靜中動 )과 동중정(動中靜 )의 대조적인 두 단어가 생각난다. 나의 지난 며칠이, 겉으로는 바쁘게 애쓰며 움직인 것 같았으나 정작 내가 한 일은 없다. 무기력하고 정체된 ‘동중정’의 시간이었다. 집의 꽃들은 겉으로 보면, 다른 움직임이 없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으나 계속 새로운 꽃송이들을 피우고 있다. 그 꽃들에게서, 보이지 않으나 중요한 일들을 하는 ’정중동’의 모습을 본다. 나도 그런 꽃들처럼 ‘정중동’의 삶을 살고 싶다. 이를 위해서 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멈추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또 무엇을 향해 천천이 가야 되는 것일까? 최정복 (은퇴 목사, 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 jason.choi46@gmail.com

  15/04/2021
  금요단상 - 최정복 목사

몇 개월 동안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했다. 코비드 펜데믹으로 집에서 온라인 예배에 참여하고 있다. 처음엔 예배 드림 같지 않은 어설픈 느낌이었다. 그런데 얼마간 반복하다 보니, 조금씩 거부감이 덜해졌다. 나도 모르게 적응이 된 것일까? 아직 미흡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그래도 이런 형태의 낯선 예배가 새로운 하나의 정상이 된 것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라게 된다. 이번 주일부터 시작되는 은목회 예배가 기다려진다. 줌(zoom)을 통한 원격 강의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작년에는 교실에서 대면 강의를 하다가 학기 중에 비대면 강의로 바꾸게 되었다. 서로의 안전과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지만, 그냥 불편했다. 만족스럽지 못했다. 물론 이런 형태의 줌 강의를 달가워하지 않는 학생들도 있었다. 금년에 새학기를 맞으며 상황이 많이 완화되었다. 예방수칙을 지키면 교실의 대면 강의도 가능하게 되었다. 학생들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의외로 줌을 통한 강의를 더 선호해 지금 그렇게 비대면 수업을 하고 있다. 유발 하라리 교수는 집에서도 학교 수업에 참여할 수 있어, 등하교의 번거로움이며 학교의 넓은 교실이 필요없어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가 2018년에 쓴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이라는 책에 언급된 내용이었다. 코비드 확산으로 인해 그의 말은 예측보다 앞당겨 우리의 생활 속에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학교 수업만이 아니다. 재택 근무를 하는 직장인들이 많다. 식료품 등 여러 상품 구매도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배달시키는 새로운 방법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추세이다. 이 또한 낯설지만 새로운 하나의 생활 방식으로 자리를 넓혀가고 있다. 금년에 대학 신입생이 된 손자는 첫 오리엔테이션을 줌을 통해 참여했다. 설날이라고 미국에 있는 아들 가족이 영상 세배를 보내왔다. 나도 장례식이며 목사 임직식 등을 줌을 통해 참여했다. 텍사스주의 한 지역 수영대회의 실황을 접속비 10여 달러를 내고 지켜 보았다. 손자가 고등학교 대표 선수로 참석해서다. 단체전 계주 경기에서 그의 학교가 대회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 또 개인전 500야드 자유형 경기에서 손자가 우승했다. 실시간 경기를 보면서 응원하며 기쁨의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어 좋았다. 금년 엠마오대학 졸업식은 제한된 인원수만이 참석할 수 있어 많은 졸업생들이 줌을 통해 참여했다. 프레드 나일 NSW 상원의원 등 하객도 참석했는데 전처럼 찬양이며 축하 순서 등이 없어 아쉬었다. 너무 멀고 낯설다고 여기던 것들이 이미 내 생활의 한 부분이 된 것을 발견한다. 요즈음 내 안의 낯섬과 익숙함의 경계가 모호해진 느낌이다. 며칠 전 한국의 작은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부친의 형제 중 막내로 유일한 생존자셨다. 은퇴 후에는 족보 만들기와 선산의 가족묘지 정비에 큰 관심과 열정을 쏟으셨다. 그 분은 가족묘지에 묻히시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런데 유가족의 뜻에 따라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고 했다.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이다. 그것은 명예로운 일이고, 서울에 사는 가족들이 쉽게 방문할 수 있다는 유익 때문이다. 나 역시 오랜 외국 생활을 했으니, 죽어서라도 선산에 묻히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 시드니의 맥쿼리 공원묘지에 장지를 마련했다. 나는 가족중심의 소박한 장례식을 원하지만, 결국 자녀들이 좋을대로 할 줄 안다. 내게 관한 일이지만 자녀들이 정하는 것이 순리요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상념들이 낯설어 조금은 쓸쓸해진다. 사람이 70세가 되면, 마음 가는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고 공자는 말했다. 그만큼 삶의 지혜와 원숙함에 이르게 된다는 뜻인 줄 안다. 나는 이미 그 나이가 지났다. 그러나 내 마음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직도 철부지다. 때로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리 저리로 내닫곤 한다. 그 마음가는대로 하면 정녕 어긋남이 있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 마음을 절제하고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만 하는 사람이다. 낯선 노년의 모습인 것일까? 지금의 나는 어떤 새롭고 큰 성취를 꿈꾸지 않는다. 과거에 어떤 성취라고 우쭐대던 것들도, 돌이켜 보니 스쳐가는 바람처럼 아니 그림자처럼 부질없는 것이었음을 보게 된다. 비교적 평탄한 삶으로 나를 인도해 주셨고 또 자녀들이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건전한 사회 구성원의 역할을 감당케 하심도 감사하다. 모두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베푸신 은혜임을 고백한다. 다른 욕심없이 단순하고 겸허히 살아야 한다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조금씩이라도 매일 그리스도를 배우며 성숙해가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사순절 기간이다. 주님의 사랑과 임재하심에 감격해서 많이 울었던 날들이 생각난다. 지금은 왜 그런 감동이 낯설게 느껴지는가? 그저 나이가 들어 감정이며 눈물샘이 메말라진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만지심을 기다리며 십자가를 묵상하는 사순절 여정이 되기 원한다. 그런 기다림이 낯설고 불편할 줄 안다. 그래도 내게 필요한 새로운 회복과 치유의 길이 되기를 소망한다. 최정복 (은퇴 목사, 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 jason.choi46@gmail.com

  04/03/2021
  금요단상 - 최정복 목사

대학 입학은 수험생이나 가족에게 중요한 일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시험 공부의 결과이다. 한국이나 호주도 마찬가지다. 시험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 청소년들도 많다. 그래도 참고 공부해서 원하는 대학이나 학과에 들어가려고 한다. 그런 공부도 필요하다. 의사며, 회계사 등 자격고사를 위해 혹은 석.박사 학위 논문을 쓰는 공부도 중요하다. 나는 학교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다. 아내에 비교해서 그렇다. 그런 아내는 가끔 내가 ‘엉터리 박사’라고 한다. 그건 사실이다. 책을 더 많이 읽고, 대학에서 10여년 가르치기도 했지만 가사일이며 생활 속에 모르는 것이 많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할 어리숙한 학생이다. 공부는 학교에서 하는 것만은 아니다. 삶속에서 배우는 것이 ‘진짜 공부’다. 한 이웃 친구가 저녁 식사 초대를 했다. 불과 몇시간 전에 받은 갑작스런 초청이었다. 식사 후 밤에만 피는 한 특별한 꽃을 함께 즐기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 꽃 이름은 여왕이라는 의미의 ‘레지나’(Regina)라고 했다. 그 분 아내의 이름 또한 레지나였다. 저녁 식사 후 7시경부터 시작해서 눈에 띄게 변해가는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9시 30분경에 크고 소담한 일곱 송이의 꽃들이 모두 한꺼번에 만개하였다. 눈부신 흰 백색의 우아하고 기품있는 꽃이었다. 은은한 향기도 좋았다. 여왕이라는 그 이름에 걸맞는 꽃이었다. 이튿날 아침, 그 친구는 한 사진을 보냈다. 어젯밤의 레지나 꽃송이들 전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쳐저 있었다. 활짝 핀 그 모습으로 하루만 계속된다면 아니 낮에 핀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아쉬움이 크다. 반면에 밤 몇 시간만의 그토록 짧고 황홀한 만개때문에 오히려 레지나는 내게 더 강렬한 감동을 주었다. 마치 새해 첫 시간, 시드니 하버브릿지의 휘황찬란한 불꽃 쇼처럼 말이다. 실상 레지나 꽃은 전에 살던 집 정원에 몇 그루가 있었다. 다만 우리가 이름도 몰랐고 밤에만 핀다는 것은 더욱 알지 못했다. 그래서 꽃봉오리가 커지면 활짝 피기를 기대하곤 했었다. 이튿날 아침에 갑자기 시들어 버린 것을 보며, 어떤 병이 들었나 벌레 때문인가 궁굼해 시든 그 봉우리를 찢어 안을 살펴 보기도 했었다. 너무 몰라서 그랬다. 세상에도 그처럼 무지한 말과 행동이 또 얼마나 많은가! 집 베란다에 있는 한 다육이는 화분 전체가 레지나 꽃 한송이보다 작다. 잎 주위에 작은 가시들이 돋혀 있어 고약스러워 보인다. 그 다육이가 샛노란 꽃 두 송이를 피웠다. 오후 2시쯤 활짝 피었다가 해가 지면 오므라 들었다가 이튿날 다시 피기를 계속하고 있다. 이런 단순한 앎을 통해, 나는 레지나 뿐만 아니라 앙증맞은 이 다육이도 좋아하게 되었다. 지방을 쓸 때에 어떤 벼슬을 하지 못했던 고인의 이름 앞에 ‘학생’이라는 칭호를 먼저 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세상이라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이다. 살면서 경험하는 모든 것이 공부다. 성공이나 실패, 행복이나 고통, 만남과 이별도 공부의 한 과정이다. 이민 생활을 통해 이 세상은 본향을 향해가는 나그네 길임을 배우고 있다. 호주 교인들을 위한 목회도 유익한 공부였다. 빅토리아와 타스마니아주의 다민족교회와 목회자들을 섬기는 선교사역을 통해 여러 도전과 보람을 경험했다. 내 삶의 지경을 넓혀주는 가치있는 공부였다. 은퇴자의 삶은 자유함이 있어 좋다. 반면에 또 다른 의미와 목적을 찾는 새로운 공부다. 코로나 사태로 일년이 넘도록 제한된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또한 처음 해보는 어려운 공부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느긋해진다. 새해를 맞으며, 모처럼 서울에 있는 동생과 긴 통화를 했다. 외숙부 내외가 돌아 가신 것이며, 한참 아래인 사촌동생이 신장이식을 못해 죽었고, 한 조카는 이혼을 했다는 등의 소식을 들었다. 일부러 연락을 안했다고 한다. 핸드폰 연락처에서 지난해 돌아가신 두분의 이름을 발견했다. 마음으로 그 분들을 배웅하며 그 전화번호를 삭제했다. 앞으로 어느날, 누군가는 엇비슷한 심경으로 나를 저 세상으로 배웅할 그런 날이 정녕 오지 않겠는가! 쓸쓸한 상념만은 아니다. 오늘을 감사하자고 다짐해 보는 공부 시간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말하고 행동했던 날들도 있었다. 지금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내 삶의 모든 것, 가족, 건강, 친구 등 모든 것들이 주님 은혜의 선물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가난한 심령이 된다. 그것을 배우고 깨닫는 것이 진짜 중요한 지혜라고 생각한다. 한 친구 목사의 아내는 지금 극심한 고통가운데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그 사모뿐만이 아니다. 그 친구도 함께 벼랑 끝에서 어려운 공부를 하고 있다. 지금은 다 이해 할 수 없는 큰 고통가운데 있지만,매일 감당할 수 있는 그 만큼의 능력을 주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누구든지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고 아플때도 있지만, 그런 날에도 삶이 괴롭다거나 기쁨이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님을 외치고 싶다. 문제와 고통이 큰 만큼 동시에 주님 주시는 넘치는 위로와 더 큰 산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걸 배우는 것이 진짜 공부요 지혜가 아닐까? 최정복 (은퇴 목사, 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 jason.choi46@gmail.com

  28/01/2021
  금요단상 - 최정복 목사

시드니 시티에 있는 한 프랑스 식당에서 몇 사람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후에는 잠시 걸어서 카페로 옮겨 커피, 차 등을 마시며 담소했다. 바로 앞에서 보는 바다와 도심의 야경이 참 아름다웠다. 그런데 낯익은 그 거리와 밤 풍경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너무 오랜만에 온 때문일까?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식당안은 여러 고객들이 있어서 괜찮았다. 하지만 그 좋은 경관의 넓은 카페에도 우리 일행 일곱명과 또 다른 테이블의 서너명이 전부였다. 그런 분위기가 을씨년스럽고 썰렁해서 미안했다. 무엇보다 밤낮없이 사람들의 물결로 가득했던 거리들이 너무 한산한 것이 이상했다. 아니 작은 충격이었다. 소매업자들의 형편이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절박한 실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 피부로 실감했다.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강요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불안감 고립감 등으로 건강 상태가 나빠졌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짜증과 불만, 어떤 분노를 경험하기도 한다. 답답함이 지나쳐 탈진감을 느끼며 자해와 우울증세로 병원 진료를 받은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금년 9월까지의 자살 신고가 작년 전체에 비교해 1,200건 정도 더 늘었다고 한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했던 개인적인 절망은 다 알 수 없다. 큰 상실감으로 아파하는 그런 가족들을 위해, 이웃이나 친구로써 함께 있어주며, 특별한 관심과 사랑으로 도와 주는 감동적인 사연들도 많다. 그런 배려와 돌봄의 이야기를 들으며 작은 위로를 받는다. 사람의 향기를 느낀다. 뉴스에 나오는 중요한 사건이나 유명인사들을 통해서 그런 사람의 향기를 느낀 경우는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오히려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이나 호주, 미국 등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문제는 경제다. 아니다 정치다 등의 말도 수긍이 간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이 아닐까? 나는 모든 사람들이 원래 선함과 행복을 추구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이루어가라고 우리 안에 큰 빛과 값진 향유를 숨겨 놓으셨다고 믿는다. 12월 둘째 주를 맞으며, 가는 한해를 되돌이켜 본다. 내게는 힘들고 무거웠던 기억보다 감사한 일들이 더 많은 한해였음을 발견한다. 코로나 사태에도 내 삶이 크게 위축되거나 직접 영향을 받은 것은 생각나지 않는다. 나이 들수록 해서는 안 될 혹은 하기 어려운 일들의 목록을 읽은 적이 있다. 가령 새로운 곳으로 이사하는 일, 오래 지니고 있던 물건을 버리는 일, 새로 친구를 사귀는 일 등을 피하라는 팁 등이 생각난다. 나는 시드니에서 낯선 고스포드로 이사했다. 오래 친숙했던 물건들 거의 전부를 버렸다. 아쉬운 마음도 있지만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후회하지도 않는다. 가장 힘들다는 새 친구도, 이 낯선 곳에서 만나고 사귈 수 있었으니, 난 아직 나이가 덜 든 사람인걸까? 오랜 친구들과도 전화며 메시지 등으로 계속 연결되어 소통할 수 있었다. 솔직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한 친구와는 거의 매일 간단한 메시지와 영상을 주고 받았다. 서로를 격려하며, 기도하며 가까이 연결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서로에게, 내면의 빛을 밝혀주며, 면역력을 강화시키는 치유의 향기가 된 것 같다. 추수감사절을 보낸 미국은 새로운 코로나 감염자 수가 하루에 20만명이 넘어섰다고 한다. 그러나 백신접종을 12월부터 시작될 수 있겠다고 전망했다. 한국의 코로나 뉴스는 금년 겨울이 최대 고비라는 우려가 큰 것 같다. 그러나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은, 효능과 안정성이 뛰어난 항체치료제의 시판이 내년 1월부터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또한 한국내에는 원가로 공급해서, 세계에서 첫 코로나 청정국의 꿈을 이루고 싶다고 했다. NSW주는 이미 모임 제한을 완화시켜 발표했다. 콘서트는 3천명, 교회모임도 500명까지 허용된다. 그런 반가운 소식들로 가슴이 설렌다. 성탄과 연말을 통해서 우리들의 생활 패턴이 조금씩 바꾸어졌으면 좋겠다. 새해부터는 우리 모두가 그 이전의 정상적인 삶과 일, 만남의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기도한다. 한 선배 교수가 ‘나이듦의 기도’라는 팔순 기념 문집을 보내 주셨다. 화학을 가르치시다 은퇴하셨지만, 또한 시조 시인으로써 열세 번째로 출간한 시조집이었다. 매우 짧은 시조속에 깊은 생각들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시구절의 행간 여러 곳에 은은한 그 분의 향기, 믿음의 열정 등이 베어 있었다. 오랜 세월을 시와 사랑, 믿음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사셨던 그러한 삶의 열매인 줄 안다. ‘꽃의 향기는 백리를 가고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는 옛말이 생각난다. 지금처럼 어렵고 불확실한 세대에서 사람의 향기란 무엇일까? 내게 사람의 향기가 있는 것일까?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아니 없어도 좋다. 다만 세상이나 물질, 종교에 메이지 않는 넉넉하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연말과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 친구들은 어떤 선택보다는 조건없이 주어진 특별한 선물인 줄 안다. 그렇게 받아들일 때, 모든 친구들이 귀하고, 더불어 사는 기쁨은 더 커질 수 있으리라. 삶의 무게는 가벼워지고, 얽히고 맺힌 관계속에서도 평화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일상속에 , 그리고 혹 이 글을 읽는 모든 마음의 친구들에게 그러한 체험들이 더 많아지는 12월이 되기를 소망한다. 최정복 (은퇴목사, 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 jason.choi46@gmail.com

  03/12/2020
  금요단상 - 최정복 목사

최정복 목사 아침마다 멀리 달리기를 하는 한 친구가 있다. 그는 이 운동이 최고의 건강법이요 만병 통치약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친구의 말에 동의한다. 지금 그의 몸 상태며 혈색 등이 20여년 전보다 오히려 더 좋은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모두에게 달리기를 권면하곤 한다. 달리는 과정에 힘든 고비가 있지만 동시에 절정의 황홀감(Runner’s High)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고 들었다. 그런 중독성이 강한 매력 때문에 달리기를 계속하는 분들이 많은 줄 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달리기를 하지 않고 있다. 재미가 없다느니 혹은 골프장에 가서 걷는 것도 괜찮다는 등의 핑계들이 있어서다. 달리기를 새로 시작하고 싶은 어떤 간절한 바램도 없다. 아니 무리한 달리기가 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으며 굳이 필요치 않다는 그런 변명 때문인 것 같다. 얼마 전 그 친구를 만났다. 그는 보통 10km 정도를 뛰는데 그날 아침은 20km를 뛰었다고 했다. 피곤치 않느냐고 물었더니 전연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 비결은 입을 약간 벌려 웃는 모습을 하고, 눈은 거의 감고, 두 다리가 아닌 두 팔로 달리는 것이라고 했다. 싱거운 우스개 말처럼 들려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 친구는 실제로 그것이 힘 안 들이고 뛰는 진짜 비결이라고 했다. 나는 그 비결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눈을 감고 웃는 얼굴로 다리가 아닌 팔로 움직인다는 그런 이미지가 에너지 사용을 낮추는 것 같은 심리적 기대 효과 혹은 어떤 플라시보 효과가 아니냐고 물었다. 상담학을 가르치는 그 친구는 ‘뇌과학의 적용’이라고 응답 했다. 이번주에 우연히 ‘습관과 뇌의 역할’에 관한 아주 짧은 글을 읽었다. 습관은 의식적인 것보다 무의식적인 영역에 더 가깝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두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어떤 일이나 습관에, 먼저 의미를 부여하라고 했다. 그래야 우리 안의 동기부여 시스템이 작동해 더 잘 기억하며, 행동과 습관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했다. 둘째, 새로운 것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21일 이상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 반복된 경험이 대뇌피질에서 뇌까지 내려가는데 소요되는 최소한의 기간이라고 한다. 내게는 설득력이 있는 실제적인 가르침이었다. 매일의 습관처럼 달리기하는 그 친구를 생각해 본다. 그는 달리기가 만병통치약이라는 최고의 가치와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십수년간 달리기를 계속해서 지금은 습관 이상인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 문득 그가 눈을 감고, 웃으며 다리가 아닌 팔로 움직이듯 20km를 쉽게 달릴 수 있는 것은 반석처럼 든든한 그 습관의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게 말했던 그의 비결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라고 보여진다. 다음에 만나서는 그가 달리기에 적용한다는 뇌과학의 원리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물어 보아야 되겠다. 어떤 숨겨진 가르침이 있는지 기대된다. 나도 새로 달리기를 시작하고 싶어서인가? 그건 아니다. 습관과 뇌 역할에 대한 사실에 근거해서 다른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려고 한다. 나는 디지털 공간의 일을 쉽게 더 잘 할수 있는 습관 만들기에 도전하고 싶다. 코로나 사태 이후, 인터넷, 스마트폰, 페이스북 등 디지탈 공간의 영향력이 일상 생활 속으로 성큼 들어왔다. 온라인을 통한 예배며 성찬식 참여 등이 그렇다. 강의며 각종 모임등도 쥼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공과금 지불이며 일처리 등이 이제는 평범한 상식이 되었다.골프 게임의 스코어도 스마트폰 엡 마이스코어(myscore)를 통해 제출한다. 몇개월째 온라인 강의를 하고 있지만,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버걱거리며 당황할 때가 있다. 어떤 순서를 잊어 버릴 때도 있다. 나는 솔직히 디지털 공간의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필요한 일들만을 하고 있지만, 스트레스를 느낄 때도 있다. 그저 내가 기계 다루는데 서툴고, 기억력도 좋지 않은데, 새로 구입한 렙톱에 아직 익숙치 못하기 때문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들이 근본 이유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먼저, 디지털 공간의 일과 가치에 대한 내 생각의 전환이 필요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나는별 관심이 없었다. 크게 신경 쓸 필요없다는 소극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가 끝나도, 그 영향력은 결코 줄어들 것 같지 않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필요한 새로운 규범으로 더 강화될 것 같다. 누구도 이런 흐름을 달리 거부하거나 바꿀 수 없다. 돌이켜 보니,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요 받으면서도 디지털 공간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소통할 수 있었다. 문이 닫혀진 기관들이 많았지만, 큰 혼란없이 사회 기능이 유지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디지탈 공간의 묵직한 의미와 중요성을 느끼며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또한 가능한 디지탈 공간 속에 자주 드나들며 간절함으로 그 체계와 원리를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단순히 기술적인 방법을 이해하고 기억하기 보다는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하나의 습관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것을 상상하고 행동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반복해 보려고 한다. 새로운 것에 익숙해지는 습관 만들기는 최소 3주간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지 않는가! 그것도 사람이나 나이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니 나는 금년 말까지 넉넉한 기간을 예상하면 더 안전할 것 같다. 내 친구의 달리기 습관처럼 그런 높은 경지나 특별한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 공간에 친숙해지고, 스트레스 대신에 어떤 재미를 느끼며, 자연스럽게 활용할 수 있는 그런 새로운 습관을 갖게 되었으면 좋겠다. 이를 통해 아들과 딸 가족들과 비슷한 눈 높이에서 지금보다 더 자주 또 가깝게 소통할 수 있게 된다면 더욱 좋겠다. 최정복 (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 jason.choi46@ gmail.com

  22/10/2020
  금요단상 - 최정복 목사

시드니 사찰인 정법사의 기후 스님을 만났다. 불교의 세계관에 대한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다. 내가 먼저 이것을 배워야 할 필요가 생겨서다. 9월 학기부터 ‘세계관과 상담’이라는 강좌를 새로 가르치고 있다. 교재를 읽다보니 주로 서양인의 관점에서 씌워진 것이었다. 기독교 세계관은 좋았지만 이슬람교는 빠져있고, 동양의 것은 미흡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불교는 소홀히 취급됐다. 그것도 불경에 근거한 내용이 아니라 헤르만 헷세의 소설 ‘싯다르타’에 묘사된 표현 등으로 대신했다. 한호일보에 금요단상 필자 중 한 분인 기후 스님께 전화로 연락했다. 불교의 세계관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응해주셨다. 그래서 몇가지의 질문과 함께 각각 40-50자 미만의 답을 부탁드리는 메시지를 보냈다. 며칠 후 스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글로 써 보내는 것보다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게 좋겠다고 하셨다. 불경의 가르침은 쉽고 단순하지만, 짧은 글로 표현하기 어려워서 그렇다며 소탈하게 웃으셨다. 고스포드(필자의 집)로 오시겠다고해서 기차 역에서 만나 집으로 모셨다. 훤출한 키에, 정갈한 회색빛 승복을 입고 오셔서 보기 좋았다. 조계종 소속으로 90년대에 포교를 위해 시드니에 왔다고 하셨다. 연세가 나보다 세살 더 많지만 건강하고 활달한 분이셨다. 비슷한 세대에 같은 한국인으로 태어나 같은 도시에서 30년가량 살며, 같은 집안에서 함께 대화하며 먹고 마셨으니, 옷깃을 스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어떤 인연인 줄 안다. 그래선지 첫 만남이지만, 친밀감을 느꼈다. 두시간 정도 나는 묻고, 그 분은 진지하게 답해 주셨다. 불교에 대해 낯선 내게는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가령 참된 최고의 실재란 마음도 존재도 없는 것, 어떤 행위나 자아도 없는 무위, 무아의 경지라고 하셨다. 세계의 본질은 빈 것에서 생긴 것으로 모든 것이 하나이다. 이것과 저것이 하나요, 현상과 정신, 부처와 중생이 모두 하나라고 하셨다. 인간이란 윤회의 체계에서 전생에 선과 악을 적절히 함께 한 업보로 태어난 존재이며, 역사란 강가의 한 지점을 통과하는 물 흐름같은 현상이라고 하셨다. 어떻게 보면 역설적인 내용과 비합리적인 표현들이지만 그 의미들은 어림해서 추측할 수 있다. 직관적인 깨달음을 청하는 문구들이 신선한 면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가르키는 하나의 큰 그림, 즉 불교의 세계관은 솔직히 내게는 아직 분명치 않다. 그것을 너무 쉽게 보기 원한다면 이 또한 불경에서 가르치는 10악 중의 하나인 탐심이 되는 것일까? 다행히 이 주제를 가르칠 10월까지 혼자 더 공부해야 될 방향을 잡았으니 감사하다. 그러나 불교에서 지식이란 “나누고 구분하는 헛된 망상으로, 도를 깨닫는데 방해 되는 것”이라고 했으니, 더 공부 하면 할수록 더 흐릿해지는 건 아닐런지 모르겠다. 나는 하이든의 교향곡 45번을 좋아한다. 다른 웅장한 교향곡과 달리 조금은 차분하고 외로운 정감이 흐르는 곡인 때문인지도 모른다. 4악장의 끝무렵에 모든 악기들이 하나씩 연주를 멈춘다. 최후에는 바이올린 두사람만이 남는다. 첫 공연에서 각 연주자들은 자기 연주를 끝내면, 각자 보면대의 촛불을 끄고 악기를 들고 조용히 무대를 퇴장 했다고 한다. 그렇게 텅빈 무대로 연주를 끝냈다. 그 후부터 이 교향곡은 ‘작별’이라는 또 다른 부제로 알려지게 되었다. 나도 어느날 그렇게 조용히 이 세상과 작별하기 원한다. 장례예식도 가족중심으로 간소하게 이루어지기 바란다. 스님이 말씀 하신 ‘마음도 존재도 없이, 어떤 행위나 자아도 없는 무아의 경지’라는 구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불교적 표현이지만, 이는 본질적인 면에서 또한 기독교 영성에서도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지금의 나는 감히 그런 순전한 경지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향으로 돌아가야하는 이 생의 마지막 작별의 순간이 오면 나의 모든 생각이나 행위, 바램이나 욕망을 포기하고 겸허히 주님만을 바라게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런 때에는 보다 쉽게 아니 어쩔 수 없이 내 자신의 아집과 착각,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안다. 나를 온전히 부정하고 비우고 아니 내 자아를 잊어 버리는 그런 순간에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 줄을 내가 스스로 알 게 될 줄로 믿는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던 사도 바울의 메시지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그렇게 연습하면 더 유익하지 않겠는가? 조금씩 흉내를 내보지만, 그것이 쉽지 않는 걸 고백한다. 나이 들수록 더 생각하고, 자주 몸을 움직이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라는 것도 오늘 주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이 땅에서의 지혜인 줄 안다. 사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런 단상을 쓰고 강의를 하며 운동도 하고 새로운 친구들도 만나고 있다. 그래서 난 아직도 내 마음과 존재, 행위나 자아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너무 구차한 변명이 될까? 글쎄 올시다! 최정복 (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 jason.choi46@gmail.com

  17/09/2020
  금요단상 - 최정복 목사

멜번시는 8월5일(수) 자정부터 재난사태 4단계에 들어갔다. 코로나 감염 확산을 막겠다는 비상조치다. 이날 하루 최다인 15명이 사망했다. 저녁 8시부터 통행금지가 시행된다. 대부분의 숍들도 문을 닫아야 한다. 뉴스에 나오는 멜번의 도심이, 죽은 도시처럼 썰렁하고 적막했다. 그 도심에 있는 유나이팅교회 총회 사무실에서 5년여 사역해서 낯익은 거리다. 자유분방하고 활기 넘치던 모습과 비교되어 마음이 아프다. 고스포드(Gosford)는 비교적 자유롭지만, 자원해서 집콕 격리를 하고 있다. 그런 어수선한 날에, 창밖의 전경을 바라보다 우연히 주운 괜찮은 생각도 있다. 시인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가 있다. 호주는 한국과 반대로 북향으로 낸 창문이 바람직하다. 창은 그 방향에 못지 않게 크기도 중요하다. 건축가는 좋은 전망을 위해 가능한 넓은 창을 내려고 애쓴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의 건축가도 그렇게 한 것 같다. 거실의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다. 크고 넓은 창문인 셈이다. 그래서 작은 공간이지만 갑갑하지 않아 좋다. 브리스베인 워터가 보이고, 더 멀리로는 마을과 산등성이들이 이어진다. 하늘은 수시로 변하는 구름의 형상으로 새롭게 채워진다. 바다의 색깔은 아침 저녁으로, 또 하늘의 색깔에 따라 변한다. 노을빛으로 채색된 해질녁의 하늘은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보인다. 바다까지 같은 노을빛으로 물들여진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너무 쉽게, 몇분안에 어두움에 묻히고 만다. 삶 속에도 큰 행복이나 황홀한 순간이 있지만 그렇게 짧은 시간 머물다 스쳐가는 건 아닐까? 전에는 왜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 지난 주간에는 이삼일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하늘은 희뿌연 구름으로 덮히고 바다는 잿빛 안개 커튼으로 가리워졌다. 바다 건너편의 그린 포인트며 엠파이어 베이와 워이워이의 정경을 전연 볼 수가 없었다.아름다운 풍광도 비오는 날이나, 짙은 안개가 덮히면 보이지 않는다. 밤에는 더욱 그렇다. 우리의 삶속에도 비오는 날이 있고 안개로 싸여 분별이 흐려질 수도 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느껴지는 밤같은 시간도 있다. 실상 중요한 것들이 여전히 그곳에 있는데도 말이다. 믿음의 생활도 때로는 그와 같지 않을까? 믿음의 실상이 분명한 것을 알지만, 눈으로 볼 수 없을 때가 많지 않는가! 집의 창은 채광을 위한 기능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그 창을 통해 바깥 세상을 보게 하며, 느끼게 하며 생각케 한다. 창 밖의 모든 것들과 소통하며, 교감케 하는 통로가 된다. 지식의 창을 통해 볼 수 있는 제법 묵직한 상념도 있다. 보통 집이나 산과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고 해는 동쪽에서 떠 올라 서쪽으로 진다고 말한다. 우리 눈으로 매일 확인하는 평범한 현상이다. 또 이것은 우리가 잠자고 일어나고 일하는 생활의 리듬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더 확실하고 중요한 사실이 있다. 해는 항상 제 자리에 있다. 지구가 돈다고 했던 갈릴레오의 말처럼, 지구는 매일 한바퀴씩 자전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밤과 낮이 구분되고, 대기의 순환 등이 일어 난다. 1년에 한번씩 태양 주위를 돌고 있어 계절의 변화를 경험 할 수 있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단순한 과학 지식이다. 매일 이 큰 지구가 빠르게 돌고 있는데 왜 아무런 진동을 느낄 수 없을까? 지구의 자전 속도는 시속 1,670Km이다. 서울 부산간의 거리를 11분만에 갈 수 있는 속도다. 그런 속도라면 엄청난 굉음이 예상된다. 그런데 왜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는가? 인간의 청력은 범위 밖의 너무 크거나 작은 소리는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지구를 싸고 있는 대기도 같은 속도와 방향으로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큰 소리를 줄여 준다. 이 모든 것이 우연히 그렇게 진화 되었다고 말한다. 나의 논리로는 전혀 불가능하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고 지금도 직접 주관하신다고 믿는 것이 더 쉽다. 더 논리적이다. 그래서 나는 평범한 아침과 저녁을 맞으며 감동할 때도 있다. 작은 일상과 자연을 통해서도 문득 그 분의 임재와 손길을, 경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현재라는 창을 통해, 오늘 하루를 붙잡고 충실하게 살기 원한다. 나이 들어 가면서 사람은 과거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옛 사건들을 얘기하며 과거의 자랑이나 일들을 그리워한다. 반면에 다수의 젊은이들은 미래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며, 준비하며 산다. 이해할 수 있다. 필요한 덕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이 너무 힘들고 아프지 않는가? 내일이나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는게 아닌가? 살아온 날에 비해 살아갈 날이 더 짧고 제한되어 있는 내게는, 현재 오늘 하루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란 구절이 있다. 보통 우리말로 “오늘 하루를 즐겨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줄 안다. 원래 ‘카르페’는 농사에 관련된 말로 추수하다는 ‘카르포’ 동사의 명령어이다. 그래서 오늘을 수확하라 혹은 오늘에 의미를 두라고 해석 할 수 있다. 추수의 기쁨과 연관시켜 즐거워하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기쁨, 감사, 충만함, 영혼의 평화를 의미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카르페 디엠에 공감한다. 오늘에 충실해서, 기뻐하며, 감사하며, 의미를 느끼며 평화 가운데 살기 원한다. 과거의 자랑이며 후회는 이미 지난 것이고, 내일은 최소한만 믿을 수 있는 불확실한 것이니까 말이다. 나이 70이 넘어서도, 나는 여전히 실없는 농담을 좋아하고, 게으른 습관 그대로이다. 어리숙하면서도 무시당하면 참지 못하고 화를 내고는 한다. 많이 덜 된 사람이다. 아내의 말이니까 90% 이상 정확한 내 모습인 줄 안다. 그래서 현재의 창을 통해서 세상을 보며, 소통하며, 배우며 ‘카르페 디엠’하는 매일을 살기 원한다. 그것이 비록 요즈음처럼 질병으로 재난사태가 선포되는 등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런 현재라도 상관이 없다. 아니 어렵고 어수선한 현재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살기로 다짐해 본다. 최정복 (은퇴 목사, 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 jason.choi46@gmail.com

  06/08/2020
  금요단상 - 최정복 목사

센트럴 코스트는 파통가(Patonga)에서 시작하여 디 엔터런스(The Entrance)까지의 지역이다. 고스포드로 이사 온 후 새로 알게 되었다. 파통가는 시드니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말한다. 지도를 보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파통가 해변에서 손에 잡힐듯한 곳에 시드니의 웨스트 헤드(West Head)가 있다. 바로 그 옆에 있는 팜 비치(Palm Beach)도 볼 수 있다. 실제로 페리를 타면 피트워터(Pittwater)까지 짧은 시간에 갈 수 있다. 그러나 자동차로는 고스포드를 거쳐 돌아가야 한다. 교통이 혼잡할 때는 2시간도 걸릴 수 있다. 물리적 거리는 가깝지만 시간거리는 먼 곳이다. 사람에 따라 멀거나 가까운 거리가 될 수 있다. 호주와 한국과의 거리는 8,340Km다. 직항 비행기로 평균 10시간 50분이 걸린다. 먼 곳이다. 그러나 호주에 사는 동포들은 한국에서 수입된 식품이며 가구, 옷 등 생활용품을 구입한다. 한국의 정치며 뉴스에 관심이 많고 티비 프로그램도 좋아한다. 단순히 언어의 불편 때문만이 아니다. 전문직종에서 매일 영어로 일하는 동포라도 큰 차이가 없는 줄 안다. 비록 외국에 살고 있지만, 삶과 생각의 바탕에 한국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한국에 기쁘거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멀리서도 그것을 함께 느낀다. 어머니를 향한 자녀들의 마음처럼 그렇게 친밀하고 애틋하다. 한국은 멀지만 늘 가까운 곳에 있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 김치며 스시, 우동 등 입맛이며 문화와 정서적인 면에서 서로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여행객으로 오가는 사람들도 빈번하다. 오랜 재일동포들의 역사며 그 수가 많아 현실적으로 중요하다. 일본에서 일하고 있거나 사업 관계 혹은 결혼 등으로 맺어진 끈끈한 가족 관계도 의외로 많다. 그러나 일본은 다수의 한국인들에게 비호감의 감정이 더 큰 줄 안다. 얼키고 뒤엉킨 옛 상처의 흔적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도 독도며 위안부 이슈 등으로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민감한 현안들이 해소되지 않아 갈등의 골이 깊다. 한국과 일본은 서로에게 멀고도 가까운 나라다. 한반도의 남과 북의 관계는 어떠한가? 한민족으로 같은 언어와 문화,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아직도 남과 북에 헤어져 살고 있는 이산가족들도 많다. 남과 북 모두 가장 큰 소원이 통일이라고 말한다. 2003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 평양에서 개성을 거쳐 공동경비구역까지 가 보았다. 개성에서 판문점까지는 아주 가까왔다. 북쪽 판문각에서 반대로 남쪽 자유의 집을 바라보며 착잡한 감회에 잠겼다. 남과 북은 지난 70년동안, 볼 수도 없는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휴전상태에 있다. 가장 불편하고 민감한 갈등관계에 있다. 휴전이 깨지고 전쟁이 터질 수도 있다며 불안을 느끼는 국민들도 많다. 슬프게도 남과 북은 그렇게 멀고도 가까운 관계이다. 두 주일 전, 매우 가까운 두 지인이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나셨다. 삶과 죽음과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보통 ‘구만리 황천길’ 혹은 ‘되돌아 올 수 없는 강’등의 표현대로 멀고도 먼 거리이다. 그러나 불과 며칠 사이에 산 자가 죽은 자로 되었다. 한 분은 매장되고 다른 한 분의 육체는 화장되어 몇줌의 재가 되었다. 삶과 죽음간의 거리는 나이며 건강 등으로 대강 추측할 수는 있다. 그러나 아무도 장담할 수는 없다. 아무리 젊고 건강한 청년이라도 어느날 갑자기 죽은 자가 될 수 있다. 누구에게든 삶과 죽음의 거리는 아주 멀지만 동시에 매우 가까운 것이 아닐까?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와 속편인 이 있다. 인간들이 보고, 듣고, 경험하는 사랑과 죽음,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삶을 선택한 천사들의 이야기다. 십여년 전에 본 영화지만 잔잔한 감동과 여운이 남아 있다. 천사들은 사랑을 전하는 일을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매일 일에 메달려 더 소리지르며, 더 천박해지며, 심장은 더 무디어져 간다. 시간의 노예처럼 산다. 그래서 곁에 있는 천사들의 메시지를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고, 가슴으로 이해 할 수 없다. 천사와 사람이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안타까움이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천사들의 이야기가 오늘 문득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을 생각나게 한다. 사람들과는 너무 먼 거룩하신 분이지만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고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슬프고 아파하며 힘들어하는 사람들과 모든 삶의 현장에 친구처럼 가까이 계신다. 우리 곁에서 아니 우리 안에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계속하신다. 또한 자신의 부활을 통해 삶과 죽음의 벽을 허물어 주셨다. 그래서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지만, 동시에 주님과의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된다. 나처럼 부족한 사람에게도 이것을 믿게 해 주셨다. 그래서 종교와 세상에 메이지 않는 큰 자유와 소망 주신 것을 감사한다. 지금도 그 분은 계속 말씀하시고, 사람들, 사건, 자연과 우주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보여 주신다. 다만 우리가 그 분의 메시지를 들을 수 없고, 그 분의 하시는 일을 볼 수 없고, 그 분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벤더스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아직은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끝나지 않았다. 많은 한인 동포들이 일이나 모임보다 홀로 있는 시간들이 많은 줄 안다. 이런 기회에, 자신과 주위, 지구촌의 문제를 새롭게 챙겨보는 진지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열린 마음으로 아니 정직하게 기도하는 태도로 말이다. 먼저 나 자신이 그런 시간을 갖고 싶다. 주님의 마음과 손길과 하시는 일들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경험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최정복 (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 jason.choi46@gmail.com

  02/07/2020
  금요단상 - 최정복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