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교회에서 창립 28주년 감사 및 임직예배 설교를 부탁받고 그렇게 약속했다. 그런데 지난 주중에 성경 본문과 설교제목을 보내달라는 연락을 받고 난처했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아서다. 그 교회의 현재 사역이며 교우들의 형편을 알지 못해 어떤 메시지도 정할 수 없었다. 얼마간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렸지만 아무런 영감도 받지 못했다. 아니 주님께서는 침묵가운데 답해 주셨지만 내가 들을 수 없는, 귀가 먼 상태인 것일까?
최소한 어떤 한 말씀이나 감동이라도 주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때 가까운 이웃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날씨가 좋은데 가까운 해변에 가서 커피나 마시자고 했다. 갑자기 연락을 받고 한 시간여만에 투운 베이(Toowoon Bay)에서 만났다. 여름에는 차들로 가득했던 넓은 주차장이 거의 비어 있었다. 가을철 오후 시간 때문인 것 같다. 한 테이블위에 천을 깔고 세 부부가 둘러 앉았다. 그 친구가 준비해 온 커피를 마셨다. 비스켓에 블루 치즈를 발라 맛있게 먹었다. 눈부신 햇살과 하늘, 바람 때문에 행복했다. 함께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은 잊었지만, 편안한 분위기와 커피 냄새와 따뜻했던 그 느낌은 남아있다.
해변으로 내려가 함께 백사장을 걸었다. 맨발에 와 닿는 모래의 촉감이 좋았다. 파도가 찰삭거리며 가끔 종아리와 덜 걷어올린 옷을 적시기도 했다. 아내는 걸으면서 작고 예쁜 조개껍질을 주웠다. 가을 오후라 곧 해가 저물고 어둠이 오기전에 두시간여의 짧은 만남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함께 했던 그 소박하고 격식없는 느긋한 만남의 시간을 통해 어떤 휴식과 재충전된 에너지를 경험했다.
집에 돌아와서 설교를 위해 좀 더 맑은 정신으로 집중하고 몰두해서 기다리는 시간을 계속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내 마음속에, 그 분의 은밀한 성소가 있고, 불씨가 있음을 나는 믿는다. 침묵의 기다림을 통해서 그 불씨를 살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에 내 안에서 울리는 나즈막한 속삭임을 들었다. 네가 그 교회와 사람들을 사랑하는가하는 물음이었다. 그 물음에는 주저없이 예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뒤늦게 목사로 안수받은 후 사역했던 첫 교회였다. 첫사랑같은 애틋한 기억이 있는 교우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네가 좋아하는 대로 설교 하라는 그런 내 안의 작은 음성같은 것을 들었다. 그래서 내 마음가는대로 성경의 한 말씀을 택해서 묵상한 후 곧 설교제목을 정해서 보낼 수 있었다.
은퇴 전까지 8년간 사역했던 호주 교회에서 연락이 왔다. 장로이며 평신도 설교자 였던 존이 암투병을 이기지 못하고, 지금은 임종을 앞두고 호스피스 돌봄 (Palliative Care)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전연 기대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는 유능한 교장으로 일하던 건강한 장년이었다. 개인적으로 나의 신실한 믿음의 친구이며 동역자였다.
이런 경우에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다 좋은 것이다’라고 담담하게 받아 드릴 수 있는 큰 믿음의 사람들도 있는 줄 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믿음이 없는 것 같다. 우선 인간적으로 남은 아내와 세 자녀들의 슬픔을 생각하며, 특히 바로 옆집에 사시는 나이든 부모님의 고통스러운 심경을 헤아리며 마음이 힘들고 무거웠다.
또한 나보다 훨씬 더 젊은 친구가 그런 형편에 놓인 사실을 접하며, 문득 내 자신의 삶도 가을 오후에 접어 들었음을 깨닫게 된다. 은퇴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9년의 세월이 흘렀다. 가을 오후에 이른 내 삶을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까? 첫째,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사랑하라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가까이 있는 아내와 가족들과 친구들을 사랑하며, 잠옷을 입고 차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는 그런 작은 일까지 감사하고 싶다. 그렇게 사랑하며 감사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도 제한되어 있지 않는가.
둘째로 내가 좋아하는 일, 해야 될 그런 일들을 오늘해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오늘은 내 남은 삶에서 가장 젊고 건강한 날이다. 그렇다고 서둘러서 조급하게 다 하려는 의도는 없다. 가능한대로 알 수 없는 내일로 미루지 말자는 뜻이다. 어쩌다 보니 아직 좋아하는 단풍구경을 못 갔는데, 벌써 단풍이 다 떨어지고 없다고 한다. 그런거야 괜찮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주님을 뵙게 된다면 부끄럽지 않겠는가..
최정복 (jason.choi46@gmail.com 은퇴목사, 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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