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시티에 있는 한 프랑스 식당에서 몇 사람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후에는 잠시 걸어서 카페로 옮겨 커피, 차 등을 마시며 담소했다. 바로 앞에서 보는 바다와 도심의 야경이 참 아름다웠다. 그런데 낯익은 그 거리와 밤 풍경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너무 오랜만에 온 때문일까?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식당안은 여러 고객들이 있어서 괜찮았다. 하지만 그 좋은 경관의 넓은 카페에도 우리 일행 일곱명과 또 다른 테이블의 서너명이 전부였다. 그런 분위기가 을씨년스럽고 썰렁해서 미안했다. 무엇보다 밤낮없이 사람들의 물결로 가득했던 거리들이 너무 한산한 것이 이상했다. 아니 작은 충격이었다.
소매업자들의 형편이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절박한 실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 피부로 실감했다.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강요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불안감 고립감 등으로 건강 상태가 나빠졌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짜증과 불만, 어떤 분노를 경험하기도 한다. 답답함이 지나쳐 탈진감을 느끼며 자해와 우울증세로 병원 진료를 받은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금년 9월까지의 자살 신고가 작년 전체에 비교해 1,200건 정도 더 늘었다고 한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했던 개인적인 절망은 다 알 수 없다. 큰 상실감으로 아파하는 그런 가족들을 위해, 이웃이나 친구로써 함께 있어주며, 특별한 관심과 사랑으로 도와 주는 감동적인 사연들도 많다. 그런 배려와 돌봄의 이야기를 들으며 작은 위로를 받는다. 사람의 향기를 느낀다.
뉴스에 나오는 중요한 사건이나 유명인사들을 통해서 그런 사람의 향기를 느낀 경우는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오히려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이나 호주, 미국 등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문제는 경제다. 아니다 정치다 등의 말도 수긍이 간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이 아닐까? 나는 모든 사람들이 원래 선함과 행복을 추구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이루어가라고 우리 안에 큰 빛과 값진 향유를 숨겨 놓으셨다고 믿는다.
12월 둘째 주를 맞으며, 가는 한해를 되돌이켜 본다. 내게는 힘들고 무거웠던 기억보다 감사한 일들이 더 많은 한해였음을 발견한다. 코로나 사태에도 내 삶이 크게 위축되거나 직접 영향을 받은 것은 생각나지 않는다. 나이 들수록 해서는 안 될 혹은 하기 어려운 일들의 목록을 읽은 적이 있다. 가령 새로운 곳으로 이사하는 일, 오래 지니고 있던 물건을 버리는 일, 새로 친구를 사귀는 일 등을 피하라는 팁 등이 생각난다.
나는 시드니에서 낯선 고스포드로 이사했다. 오래 친숙했던 물건들 거의 전부를 버렸다. 아쉬운 마음도 있지만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후회하지도 않는다. 가장 힘들다는 새 친구도, 이 낯선 곳에서 만나고 사귈 수 있었으니, 난 아직 나이가 덜 든 사람인걸까?
오랜 친구들과도 전화며 메시지 등으로 계속 연결되어 소통할 수 있었다. 솔직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한 친구와는 거의 매일 간단한 메시지와 영상을 주고 받았다. 서로를 격려하며, 기도하며 가까이 연결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서로에게, 내면의 빛을 밝혀주며, 면역력을 강화시키는 치유의 향기가 된 것 같다.
추수감사절을 보낸 미국은 새로운 코로나 감염자 수가 하루에 20만명이 넘어섰다고 한다. 그러나 백신접종을 12월부터 시작될 수 있겠다고 전망했다. 한국의 코로나 뉴스는 금년 겨울이 최대 고비라는 우려가 큰 것 같다. 그러나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은, 효능과 안정성이 뛰어난 항체치료제의 시판이 내년 1월부터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또한 한국내에는 원가로 공급해서, 세계에서 첫 코로나 청정국의 꿈을 이루고 싶다고 했다.
NSW주는 이미 모임 제한을 완화시켜 발표했다. 콘서트는 3천명, 교회모임도 500명까지 허용된다. 그런 반가운 소식들로 가슴이 설렌다. 성탄과 연말을 통해서 우리들의 생활 패턴이 조금씩 바꾸어졌으면 좋겠다. 새해부터는 우리 모두가 그 이전의 정상적인 삶과 일, 만남의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기도한다.
한 선배 교수가 ‘나이듦의 기도’라는 팔순 기념 문집을 보내 주셨다. 화학을 가르치시다 은퇴하셨지만, 또한 시조 시인으로써 열세 번째로 출간한 시조집이었다. 매우 짧은 시조속에 깊은 생각들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시구절의 행간 여러 곳에 은은한 그 분의 향기, 믿음의 열정 등이 베어 있었다. 오랜 세월을 시와 사랑, 믿음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사셨던 그러한 삶의 열매인 줄 안다.
‘꽃의 향기는 백리를 가고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는 옛말이 생각난다. 지금처럼 어렵고 불확실한 세대에서 사람의 향기란 무엇일까? 내게 사람의 향기가 있는 것일까?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아니 없어도 좋다. 다만 세상이나 물질, 종교에 메이지 않는 넉넉하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연말과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 친구들은 어떤 선택보다는 조건없이 주어진 특별한 선물인 줄 안다. 그렇게 받아들일 때, 모든 친구들이 귀하고, 더불어 사는 기쁨은 더 커질 수 있으리라.
삶의 무게는 가벼워지고, 얽히고 맺힌 관계속에서도 평화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일상속에 , 그리고 혹 이 글을 읽는 모든 마음의 친구들에게 그러한 체험들이 더 많아지는 12월이 되기를 소망한다.
최정복 (은퇴목사, 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 jason.choi4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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