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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트럴 코스트에는 선착장(wharf)들이 많이 있다. 이들을 보수하고 신축하는데 큰 예산이 필요하다. 금년 3월부터 시작되는 워이워이(Woy Woy) 선착장 재개발공사를 위해 532만 달러가 투자된다. 집 건너편에 보이는 고스포드 선착장에는 정박된 빈 배들이 많다. 그 모습은 아름답고 평화스럽다. 선착장은 빈배들의 정박을 위한 것처럼 생각 할 수 있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자동차의 주차장처럼, 운행하지 않는 빈 배들이 정박하는 곳이다. 때로는 폭풍우가 올 때 배들을 안전하게 피신시키기 위해 선착장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사실에 대해 다른 의견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볼 수도 있겠다. 선착장의 크고 작은 빈배들을 가까이서 지켜 본적이 있는가? 안전을 위해 다른 배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정박한다. 닻을 내린 배 안은 썰렁하고 적막하다. 그저 물결치는 대로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그 빈배들은 무기력하고 을씨년스럽다. 모든 배는 선착장을 떠나 파도를 가르며 움직일 때 훨씬 더 활기차고 아름답다. 그것이 배가 만들어진 목적이다. 그 배들을 만들고, 운행하는 사람은 배보다 더 귀하다. 선착장은 배들의 다음 운행을 위해 기다리며 준비하는 임시 정박의 장소이다. 선착장은 근본적으로 배의 소유자 혹은 사용자들을 위한 장소이다. 이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코로나-19 사태’는 짧은 기간안에 지구촌의 문제가 되었다. 나라마다 출입국을 봉쇄 혹은 제한하고 있다. 사람 뿐만이 아니다. 각종 수출입 물류도 마찬 가지다.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사회비용이 지출되고 있다. 인간의 일상과 여러 국가의 계획들이 작은 바이러스에 쓰나미처럼 한꺼번에 무너져가는 것을 본다. 한국 뉴스를 보니, 교회며 성당, 사찰의 정기 모임들이 잠정적으로 폐지되었다. 학교 개학이 4월로 미뤄지고 각종 행사들이 취소되었다. 그 모든 필요성을 수긍하면서도 당혹감을 느낀다. 이전에 한번도 경험치 못했던 일들이기 때문인 것 같다. 붐비던 시장과 거리들이 한산하다. 마스크를 사기 위해, 긴 줄을 서 기다려야 한다는 그런 현실이 안타깝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명동 성당, 조계사 등의 썰렁하게 빈 공간들을 보며 무기력한 적막감을 느꼈다. 마치 선착장의 빈배들을 가까이서 바라볼 때처럼 말이다. 그러나 침착한 가운데 사재기 현상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감염 위험이 높은 곳으로 자원 봉사를 가는 사람들도 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크고 작은 나눔과 배려의 소식들이 들려 흐뭇하다. 성숙한 시민의식의 품격인 줄 안다. 아니 그것이 원래 인간성의 용기며 아름다움이 아닐까? 호주의 코로나 확진자는 17일 기준 449명으로, 아직 한국에 비해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스콧 모리슨 총리는 100년만의 전염병으로 최악의 경우 5만 이상 15만명까지도 사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번 주부터 500명 이상이 모이는 모든 스포츠, 문화 행사며 부활절 쇼등이 취소됐다. 다시 100명으로 대상이 낮춰졌다. 악수 금지와 개인간 1.5m이상 거리를 유지하라는 지침도 나왔다. 이런 뉴스들의 영향 때문인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과민 반응으로 스트레스와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패닉 상태에 빠진 듯 싶다. 그런 심리적인 불안감에서 생필품 사재기를 하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화장지를 사기 위해 몸싸움을 하는 민망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작은 물결에도 흔들리는 선착장의 빈배처럼, 우리 인간도 그렇게 예민하게 흔들리는 연약한 존재인 것일까? 코로나에 감염되어 병원에 가도, 병실은 우선적으로4-50대에 주기로 정해져 있어 나이 든 사람은 입원이 힘들 것이라는 말도 들린다.노년의 한사람으로 씁쓰레한 기분이다. 먼저 나 자신을 위해 적극적으로 코로나 감염을 예방키 원한다.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고, 손을 자주 씻고, 햇빛을 쐬며 걷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과 사회적 거리두기, 떨어져 앉기 등을 해야 한다는 지침에는 거부감을 느낀다. 그런 것들에 신경쓰고 반응하는 것 자체가 불편하다. 오히려 스트레스가 되어 내 안의 면역력을 떨어지게 할 것 같다. 옥시토닌이라는 신경 호르몬은 각종 스트레스와 두려움을 덜어주고 편안함과 행복감을 준다. 지금의 모두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처방 약이다. 그런데 이 호르몬은 신뢰하는 친구나 이웃과 만나서 가까이 함께 할 때, 특히 친밀한 사람들과의 악수나 포옹, 키스 등 신체접촉을 할 때 분비된다. 건강한 삶을 위한 이 호르몬의 가치는 값을 매길 수 없을만큼 중요하다. 코로나라는 폭풍우를 피한다며 스스로 선착장의 빈배처럼 격리되어, 우리 안에 주어진 필요한 호르몬까지 위축시키는 건 아닐까? ‘카푸네’는 브라질식 포르투갈어로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 올리는 행동이라는 뜻이다. 이는 사랑하는 연인이든, 부모나 자식이든, 친구나 이웃이든 그 대상에 상관없이 물리적인 거리감 없이 안전하고 따스한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말이다. 코로나 이차 감염을 막기 위해 사람들을 피하라는 것과는 정반대의 말이다. 어수선한 이런 때일수록 역설적으로 건강한 친구들과의 ‘카푸네’는 더욱 유익하지 않겠는가? 선착장의 빈 배가 안전하지만, 선착장을 떠나 항해하는 배가 더 중요하다. 우리의 삶에는 안전과 경계가 필요하지만, 만나야 할 건강한 사람들도 있고, 함께 해야 할 일들도 많다. 어떤 가치나 목표를 위해, 때로는 벼랑 끝에 서는 용기도 필요하다. 사순절 셋째 주일이다.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주님, 또한 우리를 친구로 불러 주신 그분과 ‘카푸네’하는 시간으로 초대하고 싶다. 너무 길었던 산불과 가뭄이 끝난 것 처럼, 이 코로나 위협도 결국 끝이 올 줄 안다.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그날이 속히 앞당겨 지기를, 일상의 상태로 회복시켜 주시기를 기도한다. 최정복(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 jason.choi46@gmail.com

19/03/2020
금요단상 - 최정복 목사

멜번시는 8월5일(수) 자정부터 재난사태 4단계에 들어갔다. 코로나 감염 확산을 막겠다는 비상조치다. 이날 하루 최다인 15명이 사망했다. 저녁 8시부터 통행금지가 시행된다. 대부분의 숍들도 문을 닫아야 한다. 뉴스에 나오는 멜번의 도심이, 죽은 도시처럼 썰렁하고 적막했다. 그 도심에 있는 유나이팅교회 총회 사무실에서 5년여 사역해서 낯익은 거리다. 자유분방하고 활기 넘치던 모습과 비교되어 마음이 아프다. 고스포드(Gosford)는 비교적 자유롭지만, 자원해서 집콕 격리를 하고 있다. 그런 어수선한 날에, 창밖의 전경을 바라보다 우연히 주운 괜찮은 생각도 있다. 시인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가 있다. 호주는 한국과 반대로 북향으로 낸 창문이 바람직하다. 창은 그 방향에 못지 않게 크기도 중요하다. 건축가는 좋은 전망을 위해 가능한 넓은 창을 내려고 애쓴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의 건축가도 그렇게 한 것 같다. 거실의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다. 크고 넓은 창문인 셈이다. 그래서 작은 공간이지만 갑갑하지 않아 좋다. 브리스베인 워터가 보이고, 더 멀리로는 마을과 산등성이들이 이어진다. 하늘은 수시로 변하는 구름의 형상으로 새롭게 채워진다. 바다의 색깔은 아침 저녁으로, 또 하늘의 색깔에 따라 변한다. 노을빛으로 채색된 해질녁의 하늘은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보인다. 바다까지 같은 노을빛으로 물들여진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너무 쉽게, 몇분안에 어두움에 묻히고 만다. 삶 속에도 큰 행복이나 황홀한 순간이 있지만 그렇게 짧은 시간 머물다 스쳐가는 건 아닐까? 전에는 왜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 지난 주간에는 이삼일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하늘은 희뿌연 구름으로 덮히고 바다는 잿빛 안개 커튼으로 가리워졌다. 바다 건너편의 그린 포인트며 엠파이어 베이와 워이워이의 정경을 전연 볼 수가 없었다.아름다운 풍광도 비오는 날이나, 짙은 안개가 덮히면 보이지 않는다. 밤에는 더욱 그렇다. 우리의 삶속에도 비오는 날이 있고 안개로 싸여 분별이 흐려질 수도 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느껴지는 밤같은 시간도 있다. 실상 중요한 것들이 여전히 그곳에 있는데도 말이다. 믿음의 생활도 때로는 그와 같지 않을까? 믿음의 실상이 분명한 것을 알지만, 눈으로 볼 수 없을 때가 많지 않는가! 집의 창은 채광을 위한 기능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그 창을 통해 바깥 세상을 보게 하며, 느끼게 하며 생각케 한다. 창 밖의 모든 것들과 소통하며, 교감케 하는 통로가 된다. 지식의 창을 통해 볼 수 있는 제법 묵직한 상념도 있다. 보통 집이나 산과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고 해는 동쪽에서 떠 올라 서쪽으로 진다고 말한다. 우리 눈으로 매일 확인하는 평범한 현상이다. 또 이것은 우리가 잠자고 일어나고 일하는 생활의 리듬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더 확실하고 중요한 사실이 있다. 해는 항상 제 자리에 있다. 지구가 돈다고 했던 갈릴레오의 말처럼, 지구는 매일 한바퀴씩 자전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밤과 낮이 구분되고, 대기의 순환 등이 일어 난다. 1년에 한번씩 태양 주위를 돌고 있어 계절의 변화를 경험 할 수 있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단순한 과학 지식이다. 매일 이 큰 지구가 빠르게 돌고 있는데 왜 아무런 진동을 느낄 수 없을까? 지구의 자전 속도는 시속 1,670Km이다. 서울 부산간의 거리를 11분만에 갈 수 있는 속도다. 그런 속도라면 엄청난 굉음이 예상된다. 그런데 왜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는가? 인간의 청력은 범위 밖의 너무 크거나 작은 소리는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지구를 싸고 있는 대기도 같은 속도와 방향으로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큰 소리를 줄여 준다. 이 모든 것이 우연히 그렇게 진화 되었다고 말한다. 나의 논리로는 전혀 불가능하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고 지금도 직접 주관하신다고 믿는 것이 더 쉽다. 더 논리적이다. 그래서 나는 평범한 아침과 저녁을 맞으며 감동할 때도 있다. 작은 일상과 자연을 통해서도 문득 그 분의 임재와 손길을, 경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현재라는 창을 통해, 오늘 하루를 붙잡고 충실하게 살기 원한다. 나이 들어 가면서 사람은 과거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옛 사건들을 얘기하며 과거의 자랑이나 일들을 그리워한다. 반면에 다수의 젊은이들은 미래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며, 준비하며 산다. 이해할 수 있다. 필요한 덕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이 너무 힘들고 아프지 않는가? 내일이나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는게 아닌가? 살아온 날에 비해 살아갈 날이 더 짧고 제한되어 있는 내게는, 현재 오늘 하루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란 구절이 있다. 보통 우리말로 “오늘 하루를 즐겨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줄 안다. 원래 ‘카르페’는 농사에 관련된 말로 추수하다는 ‘카르포’ 동사의 명령어이다. 그래서 오늘을 수확하라 혹은 오늘에 의미를 두라고 해석 할 수 있다. 추수의 기쁨과 연관시켜 즐거워하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기쁨, 감사, 충만함, 영혼의 평화를 의미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카르페 디엠에 공감한다. 오늘에 충실해서, 기뻐하며, 감사하며, 의미를 느끼며 평화 가운데 살기 원한다. 과거의 자랑이며 후회는 이미 지난 것이고, 내일은 최소한만 믿을 수 있는 불확실한 것이니까 말이다. 나이 70이 넘어서도, 나는 여전히 실없는 농담을 좋아하고, 게으른 습관 그대로이다. 어리숙하면서도 무시당하면 참지 못하고 화를 내고는 한다. 많이 덜 된 사람이다. 아내의 말이니까 90% 이상 정확한 내 모습인 줄 안다. 그래서 현재의 창을 통해서 세상을 보며, 소통하며, 배우며 ‘카르페 디엠’하는 매일을 살기 원한다. 그것이 비록 요즈음처럼 질병으로 재난사태가 선포되는 등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런 현재라도 상관이 없다. 아니 어렵고 어수선한 현재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살기로 다짐해 본다. 최정복 (은퇴 목사, 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 jason.choi46@gmail.com

06/08/2020
금요단상 - 최정복 목사

최정복 목사 학기 중에 정부 지침에 따라 준비도 없이 원격 수업으로 바꿔야 했다. 익숙한 교실 강의와는 질적으로 차이가 크다. 어설프고 낯선 경험이었다. 토론중심의 강의를 중요시하는 내게는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가끔 인터넷 연결이 불안정해질 때는 학생들의 말을 놓치기도 했다. 인터넷을 통해 재택근무를 하는 직장인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도 어수선한 때에 모두에게 더 안전하고, 학교를 오가는 번거로움이 없는 것은 좋았다. 아내 친구분의 딸과 사위, 어린 손녀가 미국에서 시드니를 방문했다. 호주의 코로나 대책에 따라 2주간의 격리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 후 부모님을 방문했지만 마당에서 얼굴만 보고 잠시 얘기하다 돌아 갔다고 했다. 모처럼 멀리서 온 손녀를 한번 안아 보지도 못하고 말이다. 후에 한 스냅 사진을 보내주었는데 부모는 마스크를 쓰고 현관 문 앞에 서 있고 몇 미터 거리를 두고 마스크를 쓴 딸이 손녀를 안고 서 있는 모습이었다. 그 가족 사진을 보며 웃을 수도 없는 씁쓰레함을 느꼈다. 그런 경우에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좋아하는 한 친구가 갑자기 암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에 들어갔다는 연락을 받았다. 외출도 제한하는 때, 병원에 가서 6시간정도 치료를 받는다고 했다. 그런 친구의 심경을 헤아리며 마음이 무겁다. 그를 찾아가 손이라도 잡아 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 안타깝다. 첫 치료 후 일주일 뒤에 혈액검사 등의 검진을 받았는데 모두 좋다고 했다. 온전히 주님께 맡기며 평안, 기쁨을 깨닫고 있다고 했다. 때로는 인간의 상식과 환경을 초월한 그런 평안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아는 비밀이다. 그러한 기쁨이 투병 중인 친구에게 강력한 치료의 능력이 되기를 기도한다. 나 자신도 언제든 비슷한 형편에 처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얼마 전부터 왼쪽 눈 속에 이물질이 덮혀 불편하다. 가까운 날에 안과 전문의를 만날 계획이다. 아내는 요즈음 내가 소리를 잘 못 듣는다며 더 나빠지기 전에 보청기를 알아 보자고 한다. 감기 예방주사를 맞으려고 의사를 만난 기회에 이를 문의해 보았더니 아직은 괜찮은 청력이라고 했다. 그 말에 위로삼아 보청기는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내게 다른 질병이 없지만, 몸의 여러 기능이나 세포가 조금씩 약해지며 죽어가고 있다고 본다. 다만 그것을 잊고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가난한 마음이 된다. 조금은 쓸쓸하다. 이젠 ‘마음의 눈과 귀’를 더 의존해야 될 나이가 된 것 같다. 삶의 위기는 두렵고 위험한 것이다. 동시에 또 다른 기회가 된 구체적인 사례들도 많다. 영어로 슬림 찬스(slim chance)는 가능성이 적다 혹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팻 찬스(fat chance)는 그 반대의 의미로 추측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둘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지금 세계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심각한 위기 상황이다. 어떤 이들은 중환자실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 다수의 사람들은 사업체를 닫거나 일을 못해서 경제적 위협을 받고 있다. 사람은 음식 만이 아니라 화장지와 손소독제와 마스크가 있어야 산다는 말도 유머 이상의 공감되는 현실이 됐다. 추한 인종차별의 사례도 보도된다. 유튜브나 온라인을 통한 예배, 홈 라이브 컨서트나 관중없는 스포츠 경기 등 낯선 것들이 우리의 생활 속에 들어와 있다. 그런 낯선 것들 때문에 나이든 사람들이 느끼는 당혹감은 더 크다. 견고한 사회질서나 국가체계들도 미세한 바이러스에 힘없이 무너지고 혼란에 빠져 있음을 본다. 그것도 매우 짧은 기간에 말이다. 이같은 위기 상황이 동시에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는가? 어떤 적극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가령 친구들과의 만남이며, 손자 손녀들을 안고 포옹하는 것, 일터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등의 평범한 일상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배우고 있지 않는가! 또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영국의 총리든 이름없는 노숙자든 차별없이 감염시킨다. 남여노소나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전혀 차별 대우를 하지 않는다. 원래 모든 인간은 그렇게 평등하며 꼭같이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 준다. 딸은 요즘 남편과 자녀들까지 종일 집안에 있게 되니 식사 준비 등으로 몸이 피곤하고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했다. 한 홍콩계 친구는 이런 저런 스트레스 등이 너무 힘들어 생뚝맞게 이혼을 생각했노라고 말해서 함께 웃었다고 들었다. 가정 주부들도 심리적으로 민감하고 어려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일터에 나가지 못하는 남편, 학교에 가지 못하는 자녀들에게도 다른 아픔과 갑갑함이 크지 않겠는가! 역설적으로 이런 원치 않은 기간이 가정, 부부관계, 부모와 자식 관계, 그리고 함께 먹는 집 밥의 소중함 등을 나누고 경험하는 유익한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삶의 여정에는 작은 언덕이나 큰 산이 있기 마련이다. 코로나 사태와 이로 인한 문제들은 지구촌의 개인이나 가족, 사회와 국가들이 함께 넘어야 할 큰 산이다. 안전한 치료백신이 나오기까지 상당기간 더 주의하며 기다려야 될 줄 안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하다. 현재의 코로나 사태를 과거로 기억하는 그런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을 바라며, 느긋하게 인내하면서 이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오직 자연만이 홀로 초연한 듯 싶다. 그래서 나는 몸과 마음을 돌보기 위해, 그 자연을 벗하며 걷기를 좋아한다. 더 맑아진 하늘, 빛나는 햇살과 상쾌한 공기가 온 몸을 감싸 준다. 동네길의 평범한 꽃들과 싱그러운 바람이 나를 환영하며 반긴다. 생명은 아름답다고 속삭인다. 무엇보다 작은 언덕을 큰 산으로 착각하지 않는 분별력을 배우라고 내게 속삭이는 것 같다. 최정복 (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 jason.choi46@ gmail.com

23/04/2020
금요단상 - 최정복 목사

시드니 시티에 있는 한 프랑스 식당에서 몇 사람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후에는 잠시 걸어서 카페로 옮겨 커피, 차 등을 마시며 담소했다. 바로 앞에서 보는 바다와 도심의 야경이 참 아름다웠다. 그런데 낯익은 그 거리와 밤 풍경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너무 오랜만에 온 때문일까?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식당안은 여러 고객들이 있어서 괜찮았다. 하지만 그 좋은 경관의 넓은 카페에도 우리 일행 일곱명과 또 다른 테이블의 서너명이 전부였다. 그런 분위기가 을씨년스럽고 썰렁해서 미안했다. 무엇보다 밤낮없이 사람들의 물결로 가득했던 거리들이 너무 한산한 것이 이상했다. 아니 작은 충격이었다. 소매업자들의 형편이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절박한 실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 피부로 실감했다.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강요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불안감 고립감 등으로 건강 상태가 나빠졌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짜증과 불만, 어떤 분노를 경험하기도 한다. 답답함이 지나쳐 탈진감을 느끼며 자해와 우울증세로 병원 진료를 받은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금년 9월까지의 자살 신고가 작년 전체에 비교해 1,200건 정도 더 늘었다고 한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했던 개인적인 절망은 다 알 수 없다. 큰 상실감으로 아파하는 그런 가족들을 위해, 이웃이나 친구로써 함께 있어주며, 특별한 관심과 사랑으로 도와 주는 감동적인 사연들도 많다. 그런 배려와 돌봄의 이야기를 들으며 작은 위로를 받는다. 사람의 향기를 느낀다. 뉴스에 나오는 중요한 사건이나 유명인사들을 통해서 그런 사람의 향기를 느낀 경우는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오히려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이나 호주, 미국 등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문제는 경제다. 아니다 정치다 등의 말도 수긍이 간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이 아닐까? 나는 모든 사람들이 원래 선함과 행복을 추구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이루어가라고 우리 안에 큰 빛과 값진 향유를 숨겨 놓으셨다고 믿는다. 12월 둘째 주를 맞으며, 가는 한해를 되돌이켜 본다. 내게는 힘들고 무거웠던 기억보다 감사한 일들이 더 많은 한해였음을 발견한다. 코로나 사태에도 내 삶이 크게 위축되거나 직접 영향을 받은 것은 생각나지 않는다. 나이 들수록 해서는 안 될 혹은 하기 어려운 일들의 목록을 읽은 적이 있다. 가령 새로운 곳으로 이사하는 일, 오래 지니고 있던 물건을 버리는 일, 새로 친구를 사귀는 일 등을 피하라는 팁 등이 생각난다. 나는 시드니에서 낯선 고스포드로 이사했다. 오래 친숙했던 물건들 거의 전부를 버렸다. 아쉬운 마음도 있지만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후회하지도 않는다. 가장 힘들다는 새 친구도, 이 낯선 곳에서 만나고 사귈 수 있었으니, 난 아직 나이가 덜 든 사람인걸까? 오랜 친구들과도 전화며 메시지 등으로 계속 연결되어 소통할 수 있었다. 솔직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한 친구와는 거의 매일 간단한 메시지와 영상을 주고 받았다. 서로를 격려하며, 기도하며 가까이 연결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서로에게, 내면의 빛을 밝혀주며, 면역력을 강화시키는 치유의 향기가 된 것 같다. 추수감사절을 보낸 미국은 새로운 코로나 감염자 수가 하루에 20만명이 넘어섰다고 한다. 그러나 백신접종을 12월부터 시작될 수 있겠다고 전망했다. 한국의 코로나 뉴스는 금년 겨울이 최대 고비라는 우려가 큰 것 같다. 그러나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은, 효능과 안정성이 뛰어난 항체치료제의 시판이 내년 1월부터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또한 한국내에는 원가로 공급해서, 세계에서 첫 코로나 청정국의 꿈을 이루고 싶다고 했다. NSW주는 이미 모임 제한을 완화시켜 발표했다. 콘서트는 3천명, 교회모임도 500명까지 허용된다. 그런 반가운 소식들로 가슴이 설렌다. 성탄과 연말을 통해서 우리들의 생활 패턴이 조금씩 바꾸어졌으면 좋겠다. 새해부터는 우리 모두가 그 이전의 정상적인 삶과 일, 만남의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기도한다. 한 선배 교수가 ‘나이듦의 기도’라는 팔순 기념 문집을 보내 주셨다. 화학을 가르치시다 은퇴하셨지만, 또한 시조 시인으로써 열세 번째로 출간한 시조집이었다. 매우 짧은 시조속에 깊은 생각들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시구절의 행간 여러 곳에 은은한 그 분의 향기, 믿음의 열정 등이 베어 있었다. 오랜 세월을 시와 사랑, 믿음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사셨던 그러한 삶의 열매인 줄 안다. ‘꽃의 향기는 백리를 가고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는 옛말이 생각난다. 지금처럼 어렵고 불확실한 세대에서 사람의 향기란 무엇일까? 내게 사람의 향기가 있는 것일까?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아니 없어도 좋다. 다만 세상이나 물질, 종교에 메이지 않는 넉넉하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연말과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 친구들은 어떤 선택보다는 조건없이 주어진 특별한 선물인 줄 안다. 그렇게 받아들일 때, 모든 친구들이 귀하고, 더불어 사는 기쁨은 더 커질 수 있으리라. 삶의 무게는 가벼워지고, 얽히고 맺힌 관계속에서도 평화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일상속에 , 그리고 혹 이 글을 읽는 모든 마음의 친구들에게 그러한 체험들이 더 많아지는 12월이 되기를 소망한다. 최정복 (은퇴목사, 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 jason.choi46@gmail.com

03/12/2020
금요단상 - 최정복 목사

코로나 팬데믹으로 멈추고 닫힌 것들이 많았다. 건강한 사람도 여러 형태의 격리와 정지를 강요받았다. 서로에게 의존했던 삶에서 홀로서기를 배워야 했다. 두어달이 지났지만 내게는 아직 낯설고 불편하다. 이 기간이 도박 중독의 치료기회가 되었고 어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시작한 사람도 있다. 부부 혹은 자녀들과의 관계를 회복한 사람들도 있다. 다행한 일이다. 반면에ABC공영방송에 따르면 호주인 2,297명의 설문조사 결과, 우울과 절망을 느끼는 횟수가 3배 이상, 혼란을 느끼는 사람수는 5배 이상이라고 한다. 학생과 젊은이, 장년이나 노년에 상관없이 엇비슷한 블루 터널을 통과 중인 것도 사실이다. 괜찮은 척 하다보면 속 사람은 더 아플 수 있다. 적응하기 힘들다. 돈 문제로 심각하다. 지루함, 무기력함, 우울증과 분노를 느낀다. 심리적 탈진을 경험하고 있다 등 문제를 사실대로 인정할 때, 오히려 건강해 질 수 있다.정부에서 다양한 무료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보통 부부나 가족관계도 갈등에 빠지고 악화되기 쉽다. 실제로 가정폭력이며 온라인 도박 등이 증가한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소통과 공감만이 이런 아픔 등을 예방할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피차 성급한 판단을 보류하고, 먼저 상대의 마음이나 감정을 느끼며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하다. 때로 내 마음을, 자주 변하는 감정을 자신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배우자나 자녀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찾아 구하며 댓가를 지불해야 할만큼 귀한 가족 관계이지 않는가! 다른 사건이나 현상에 대해서도 우리는 너무 쉽고 빠르게 판단하기 마련이다. 단지 우리의 눈높이와 기준에서 말이다. 가령 프레드 홀로우(Fred Hollows) 재단에 의한 저개발국가 맹인들의 최근 실태를 읽었다고 하자. 5명 중 4명은 20분여의 간단한 수술을 받으면 24시간 후에는 볼 수 있다. 그러나 케냐같은 나라에서는 $25을 지불할 수 없어 혹은 그런 수술 기회를 가질 수 없어 맹인으로 산다. 어찌 그런 가혹한 일이 있는가? 그렇게 한심한게 나라인가? 우리는 즉시 분노하며 혹평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상황을 더 알 수도, 바꿀 수도 없다. 대신 판단을 멈추고, $25이라도 기부하는 것이 이 문제와 소통하며 변화에 참여하는 방법이 아닐까? 에포케(epoché)는 헬라어 에페케인(멈추다)에서 비롯된 철학용어로 ‘판단중지’라는 뜻이다. 심리학에서는 의사소통과 공감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자신의 판단을 보류하고, 먼저 상대의 말, 생각과 형편 그대로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 때 소통과 공감이 가능하다. 우리 모두에게는 편견과 선입관이 있지 않는가? 먼저 그런 자신의 판단을 멈추라. 그런 판단이나 관점에 따른 즉흥적인 말이나 댓글, 행동을 중지하라. 고리타분한 말처럼 들릴 수 있다. 에포케의 본질은 이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마음의 소통을 시작하는 방법이다. 공감과 변화를 이루기 위한 과정이다. 꽃들은 사람들을 판단치 않고 꽃을 피우며 향기를 내품는다. 해와 달, 별도 각기 다른 사람들을 판단치 않고 자신의 궤도를 돌며 자리를 지킨다. 그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며 공감을 주는 것이 아닐까? 무지개도 그렇다. 찬비가 추적이며 햇살이 뒤섞인 그런 아침이었다. 한 친구의 아내가 큰 수술을 받기 전날이었다. 브리스베인 워터에서 시작하여 건너편 산등성이 끝까지 선명한 무지개가 떠 있었다. 내가 본 것 중 가장 크고 완전한 무지개였다. 감동을 느끼며 쳐다 보았다. 친구 부부를 위해 기도했다. 모바일로 이 무지개 사진을 찍어 그 친구에게 보냈다. 어떤 위로와 소망, 약속의 메시지로 공감되기를 원해서다. 백무산 시인은 ‘정지의 힘’이라는 시에서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달리는 이유를 안다.”고 했다. 코로나 사태가 조금씩 진정되며 6월부터 여러 규제와 멈춤 등이 완화 된다. 이 사태 또한 끝나고 지나갈 줄 안다. 그러나 이 멈춤의 영향으로 미래의 세상과 삶의 방법은 크게 변화될 것이 분명하다. 다만 큰 혼돈이 없기를 바란다. 그간 정지에 있던 어려움들을 통해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배웠으면 한다. 그토록 숨가프게 달려온 우리 삶의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스트우드 한인상우회의 주관으로 동포 청년들을 위해 8주 동안, 물품지원과 함께 3000여개의 무료 도시락을 제공했다는 소식을 신문을 통해 알게됐다. 먼저 자신들의 사업이 어려운 중에도 동포 청년들의 힘든 형편에 대한 배려와 공감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결과로 도움을 받은자, 여러 한인 후원자, 직접 일하고 나눈 모두에게 따뜻한 감동을 주었다. 상우회 부회장으로 이 나눔을 위해 많이 애쓴 한 분은 “이민 생활 중 가장 큰 보람이었다”라고 말했다. 그것을 읽으며 나도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 엔돌핀은 통증을 해소하고 암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 최근 의학은 이 엔돌핀보다 4000배 효과가 큰 ‘다이돌핀’을 발견하였다. 이 호르몬은 어떤 좋은 음식이나 신약으로 가능치 않다. 큰 감동을 받을 때, 특히 어떤 진리를 깨달았을 때, 우리 안에서 생성되는 호르몬이다. 어려운 때 일수록 누군가를 탓하고, 분노하기 쉽다. 그 대신에 피차 ‘에포케’를 선택하면 어떨까? 먼저 이웃의 말과 형편을 그 마음을 그대로 느끼며 받아들이는 배려와 소통, 공감이 필요치 않는가! 거기에서 크고 작은 감동의 물결이 시작되고 확장될 수 있다. 많은 한인 동포들이 우리안에 주어진 다이돌핀의 강력한 효과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최정복 (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 jason.choi46@gmail.com

28/05/2020
금요단상 - 최정복 목사

집 가까운 곳에 노웨스트 전철역이 있다. 이 전철노선의 13개 역중 8개가 넓고 깨끗하게 신축된 역이다. 에핑, 체스우드 등 다섯개의 기존역도 새로 개축 보완되어 다른 노선들과의 연계와 환승이 편리하다. 시간표를 보지 않고 나가도 오래 기다리지 않고 탈 수 있다. 객실의 구조가 한국의 전철과 비슷하여 친근감을 준다. 이 메트로가 빠르고 또 신뢰할 만한 서비스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운전자 없이 자동 운행된다는 점에서 작은 의구심을 갖는다. 어떤 돌발적인 사고나 상황에서는, 운전자가 있어야 보다 더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아날로그 시스템에 익숙한 내 자신의 개인적인 기우임을 인정한다. 젊은 세대들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웃기는 생각인지도 알고 있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는, 만화나 영화 속에서나 나오는 상상속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드론택시’라는 이름으로 이런 자동차가 10년안에 등장하리라고 한다. 이를 위해서 보잉, 아우디, 벤츠 등 유명 기업들이 대규모 투자로 새로운 비행체 시장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우버는 2023년부터,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자율형 비행체를 예약하고 탈 수 있는 ‘우버 에어’ 서비스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아니 내년부터 호주 멜번과 미국 달라스 등에서 시험운행을 한다는 계획이다. 물론 시작 단계에는 기존 택시비보다 비싸겠지만 머지않아 그 비용은 더 적어지고 시간은 몇배 이상 짧아질 것이라고 한다. 인기있는 새로운 사업이 될 것이라고 예상된다. 내게는 아직 사람을 통한 서비스가 편안하다. 반면에 젊은 세대들은 오히려 직접 대면 서비스를 기피하는 경향이 많다고 한다. 그런 취향을 반영하며 또한 효율성과 비용절감의 장점 등으로 인공 지능을 통한 자동화 서비스는 주도적인 흐름이 될 것 같다. 물론 이러한 흐름에 정서적 혹은 기술적인 문제로 적응하지 못하는 노년층의 소외감은 더 커지고 갈등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한국인터넷 진흥원은 전문가 13명을 초청해서 가까운 미래 사회모습을 예측한 내용을 발표했다. 그중에서 우리의 삶과 직접 관련된 몇가지를 소개한다. 2045년경에는 인간의 평균 수명이 120세가 될 것이라고 한다. 10년 안에 자율주행 자동차가 대중화되고, 자연스럽게 운전면허증이 없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로봇 가격이 싸져서, 사람들은 개나 고양이 대신 애완동물로 혹은 집 청소를 시키려고 구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시속 6000Km로 달리는 진공관 고속열차로 세계 어디든 여섯 시간 안에 갈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내게도 장미빛 환상처럼 보인다. 정말 그렇게만 볼 수 있을까? 필자가 한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교실안의 학생들 뿐만 아니라 켄버라, 멜번 등에 있는 학생들도 함께 얼굴을 보며 대화하며 강의에 참여한다. 현재는 학생이나 선생에게 불편하고 질적인 문제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앞으로 가상현실과 3D 디스플레이 기술이 향상되면, 집에서도 높은 수준의 학교 교육이며 병원 진료 등이 가능할 것이다. 여러 외국어를 실시간으로 정확히 번역하는 스마트 안경 및 귓속형 통역기가 나올 것이므로 외국어교육 자체가 없어질 것이라고 한다. 몇 년 후면 집에서 외국대학 강의실에 들어가 공부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본다. 아마 큰 교실이나 학교 건물이 필요 없게 될지도 모른다. 또 책들로 가득한 도서관은 어떨까? 미국에서는 이미 2013년에 책없는 공공도서관이 샌 안토니오에 세워졌다. 지금은 폴리텍 대학 등 6개 이상의 책없는 도서관, 즉 인공지능 도서관들이 있다고 한다. 한국 대구에도 500억원을 들여2021년 완공될 대표적인 도서관을 짖고 있는데, 책없는 도서관이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크다고 한다. 이러한 모든 변화가 환상적으로 좋은 것만은 아닌 줄 안다. 너무 낯선 것이 새로운 일상이 되는 그런 세상에서는, 과거 아니 현재의 지식이나 경험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이다. 젊은이들도 스트레스가 클 줄 안다. 지금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잘 몰라 버걱거리는 사람들은 더욱 설자리가 없어 질것이다. 인공지능은 바둑만 잘 두는 것이 아니다. 지금 젊은이들이 공부하고 있는 중요한 직업들이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크다. 도서관의 사서 등이며 책 출판에 관련된 직업, 요가강사, 교사, 은행원, 회계사, 판검사, 의사 등의 일자리를 인공지능이 빼앗아 갈 수도 있다. 물론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변하리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 변화가 너무 커서 삶의 기본패턴까지 바꿔야 할 것이다. 그런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정신적 탄력성과 균형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그것을 어디서 어떻게 배울 것인가? 이것까지 인공지능에 의존하려는 것은 더 위험한 도박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나는 또 다른 어두운 실상을 예감한다. 삶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해감에 따라 인간의 고귀함 특히 부서지기 쉬운 내면이 소홀히 다루어 질 수 있다. 사람이나 가족 관계의 아름다움과 행복의 가치도 뒷전으로 밀려 날 수 있다. 영적인 혼란은 더 커질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가령 자녀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공부하면 등하교시 픽업 할 필요가 없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추세에 따라 혹 주일예배도 교회 가지 않고 집에서 드리자는 그런 움직임이 있을지 누가 아는가? 지금도, 호주를 포함해 동성 결혼이 합법화된 나라들이 있지만, 미래의 그때에는 더 심각한 윤리적, 영적 혼란이 예상된다. 유엔 미래보고서에 따르면, 2045년 이후의 일은 우리 인간이 통제할 수도, 상상할 수 없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한다. 혹 이런 미래가 환상적이라며 열광해야 하는가? 내게는 두렵고 섬뜩한 일이다. 그러한 세상 속에서 과연 어떻게 살것인가?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절실한 질문이지만 나는 그 해답을 모르겠다. 솔직히 그런 미래의 환상들이 내게는 낯설게 느껴진다. 그런 변화의 대부분이 내게는 허상이거나 중요하지 않는 것이기를 바란다. 다만 한가지, 땅과 세계가, 현재와 미래, 영원까지 하나님께서 홀로 주관하신다는 분명한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확실하고 중요한 내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며 그분을 향한 믿음과 소망, 사랑 가운데 매일의 삶을 겸허하게 감사하며 살기 원한다. 최정복 (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 jason.choi46@gmail.com

25/07/2019
금요단상 - 최정복 목사

대학 입학은 수험생이나 가족에게 중요한 일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시험 공부의 결과이다. 한국이나 호주도 마찬가지다. 시험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 청소년들도 많다. 그래도 참고 공부해서 원하는 대학이나 학과에 들어가려고 한다. 그런 공부도 필요하다. 의사며, 회계사 등 자격고사를 위해 혹은 석.박사 학위 논문을 쓰는 공부도 중요하다. 나는 학교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다. 아내에 비교해서 그렇다. 그런 아내는 가끔 내가 ‘엉터리 박사’라고 한다. 그건 사실이다. 책을 더 많이 읽고, 대학에서 10여년 가르치기도 했지만 가사일이며 생활 속에 모르는 것이 많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할 어리숙한 학생이다. 공부는 학교에서 하는 것만은 아니다. 삶속에서 배우는 것이 ‘진짜 공부’다. 한 이웃 친구가 저녁 식사 초대를 했다. 불과 몇시간 전에 받은 갑작스런 초청이었다. 식사 후 밤에만 피는 한 특별한 꽃을 함께 즐기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 꽃 이름은 여왕이라는 의미의 ‘레지나’(Regina)라고 했다. 그 분 아내의 이름 또한 레지나였다. 저녁 식사 후 7시경부터 시작해서 눈에 띄게 변해가는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9시 30분경에 크고 소담한 일곱 송이의 꽃들이 모두 한꺼번에 만개하였다. 눈부신 흰 백색의 우아하고 기품있는 꽃이었다. 은은한 향기도 좋았다. 여왕이라는 그 이름에 걸맞는 꽃이었다. 이튿날 아침, 그 친구는 한 사진을 보냈다. 어젯밤의 레지나 꽃송이들 전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쳐저 있었다. 활짝 핀 그 모습으로 하루만 계속된다면 아니 낮에 핀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아쉬움이 크다. 반면에 밤 몇 시간만의 그토록 짧고 황홀한 만개때문에 오히려 레지나는 내게 더 강렬한 감동을 주었다. 마치 새해 첫 시간, 시드니 하버브릿지의 휘황찬란한 불꽃 쇼처럼 말이다. 실상 레지나 꽃은 전에 살던 집 정원에 몇 그루가 있었다. 다만 우리가 이름도 몰랐고 밤에만 핀다는 것은 더욱 알지 못했다. 그래서 꽃봉오리가 커지면 활짝 피기를 기대하곤 했었다. 이튿날 아침에 갑자기 시들어 버린 것을 보며, 어떤 병이 들었나 벌레 때문인가 궁굼해 시든 그 봉우리를 찢어 안을 살펴 보기도 했었다. 너무 몰라서 그랬다. 세상에도 그처럼 무지한 말과 행동이 또 얼마나 많은가! 집 베란다에 있는 한 다육이는 화분 전체가 레지나 꽃 한송이보다 작다. 잎 주위에 작은 가시들이 돋혀 있어 고약스러워 보인다. 그 다육이가 샛노란 꽃 두 송이를 피웠다. 오후 2시쯤 활짝 피었다가 해가 지면 오므라 들었다가 이튿날 다시 피기를 계속하고 있다. 이런 단순한 앎을 통해, 나는 레지나 뿐만 아니라 앙증맞은 이 다육이도 좋아하게 되었다. 지방을 쓸 때에 어떤 벼슬을 하지 못했던 고인의 이름 앞에 ‘학생’이라는 칭호를 먼저 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세상이라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이다. 살면서 경험하는 모든 것이 공부다. 성공이나 실패, 행복이나 고통, 만남과 이별도 공부의 한 과정이다. 이민 생활을 통해 이 세상은 본향을 향해가는 나그네 길임을 배우고 있다. 호주 교인들을 위한 목회도 유익한 공부였다. 빅토리아와 타스마니아주의 다민족교회와 목회자들을 섬기는 선교사역을 통해 여러 도전과 보람을 경험했다. 내 삶의 지경을 넓혀주는 가치있는 공부였다. 은퇴자의 삶은 자유함이 있어 좋다. 반면에 또 다른 의미와 목적을 찾는 새로운 공부다. 코로나 사태로 일년이 넘도록 제한된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또한 처음 해보는 어려운 공부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느긋해진다. 새해를 맞으며, 모처럼 서울에 있는 동생과 긴 통화를 했다. 외숙부 내외가 돌아 가신 것이며, 한참 아래인 사촌동생이 신장이식을 못해 죽었고, 한 조카는 이혼을 했다는 등의 소식을 들었다. 일부러 연락을 안했다고 한다. 핸드폰 연락처에서 지난해 돌아가신 두분의 이름을 발견했다. 마음으로 그 분들을 배웅하며 그 전화번호를 삭제했다. 앞으로 어느날, 누군가는 엇비슷한 심경으로 나를 저 세상으로 배웅할 그런 날이 정녕 오지 않겠는가! 쓸쓸한 상념만은 아니다. 오늘을 감사하자고 다짐해 보는 공부 시간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말하고 행동했던 날들도 있었다. 지금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내 삶의 모든 것, 가족, 건강, 친구 등 모든 것들이 주님 은혜의 선물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가난한 심령이 된다. 그것을 배우고 깨닫는 것이 진짜 중요한 지혜라고 생각한다. 한 친구 목사의 아내는 지금 극심한 고통가운데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그 사모뿐만이 아니다. 그 친구도 함께 벼랑 끝에서 어려운 공부를 하고 있다. 지금은 다 이해 할 수 없는 큰 고통가운데 있지만,매일 감당할 수 있는 그 만큼의 능력을 주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누구든지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고 아플때도 있지만, 그런 날에도 삶이 괴롭다거나 기쁨이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님을 외치고 싶다. 문제와 고통이 큰 만큼 동시에 주님 주시는 넘치는 위로와 더 큰 산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걸 배우는 것이 진짜 공부요 지혜가 아닐까? 최정복 (은퇴 목사, 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 jason.choi46@gmail.com

28/01/2021
금요단상 - 최정복 목사

센트럴 코스트는 파통가(Patonga)에서 시작하여 디 엔터런스(The Entrance)까지의 지역이다. 고스포드로 이사 온 후 새로 알게 되었다. 파통가는 시드니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말한다. 지도를 보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파통가 해변에서 손에 잡힐듯한 곳에 시드니의 웨스트 헤드(West Head)가 있다. 바로 그 옆에 있는 팜 비치(Palm Beach)도 볼 수 있다. 실제로 페리를 타면 피트워터(Pittwater)까지 짧은 시간에 갈 수 있다. 그러나 자동차로는 고스포드를 거쳐 돌아가야 한다. 교통이 혼잡할 때는 2시간도 걸릴 수 있다. 물리적 거리는 가깝지만 시간거리는 먼 곳이다. 사람에 따라 멀거나 가까운 거리가 될 수 있다. 호주와 한국과의 거리는 8,340Km다. 직항 비행기로 평균 10시간 50분이 걸린다. 먼 곳이다. 그러나 호주에 사는 동포들은 한국에서 수입된 식품이며 가구, 옷 등 생활용품을 구입한다. 한국의 정치며 뉴스에 관심이 많고 티비 프로그램도 좋아한다. 단순히 언어의 불편 때문만이 아니다. 전문직종에서 매일 영어로 일하는 동포라도 큰 차이가 없는 줄 안다. 비록 외국에 살고 있지만, 삶과 생각의 바탕에 한국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한국에 기쁘거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멀리서도 그것을 함께 느낀다. 어머니를 향한 자녀들의 마음처럼 그렇게 친밀하고 애틋하다. 한국은 멀지만 늘 가까운 곳에 있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 김치며 스시, 우동 등 입맛이며 문화와 정서적인 면에서 서로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여행객으로 오가는 사람들도 빈번하다. 오랜 재일동포들의 역사며 그 수가 많아 현실적으로 중요하다. 일본에서 일하고 있거나 사업 관계 혹은 결혼 등으로 맺어진 끈끈한 가족 관계도 의외로 많다. 그러나 일본은 다수의 한국인들에게 비호감의 감정이 더 큰 줄 안다. 얼키고 뒤엉킨 옛 상처의 흔적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도 독도며 위안부 이슈 등으로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민감한 현안들이 해소되지 않아 갈등의 골이 깊다. 한국과 일본은 서로에게 멀고도 가까운 나라다. 한반도의 남과 북의 관계는 어떠한가? 한민족으로 같은 언어와 문화,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아직도 남과 북에 헤어져 살고 있는 이산가족들도 많다. 남과 북 모두 가장 큰 소원이 통일이라고 말한다. 2003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 평양에서 개성을 거쳐 공동경비구역까지 가 보았다. 개성에서 판문점까지는 아주 가까왔다. 북쪽 판문각에서 반대로 남쪽 자유의 집을 바라보며 착잡한 감회에 잠겼다. 남과 북은 지난 70년동안, 볼 수도 없는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휴전상태에 있다. 가장 불편하고 민감한 갈등관계에 있다. 휴전이 깨지고 전쟁이 터질 수도 있다며 불안을 느끼는 국민들도 많다. 슬프게도 남과 북은 그렇게 멀고도 가까운 관계이다. 두 주일 전, 매우 가까운 두 지인이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나셨다. 삶과 죽음과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보통 ‘구만리 황천길’ 혹은 ‘되돌아 올 수 없는 강’등의 표현대로 멀고도 먼 거리이다. 그러나 불과 며칠 사이에 산 자가 죽은 자로 되었다. 한 분은 매장되고 다른 한 분의 육체는 화장되어 몇줌의 재가 되었다. 삶과 죽음간의 거리는 나이며 건강 등으로 대강 추측할 수는 있다. 그러나 아무도 장담할 수는 없다. 아무리 젊고 건강한 청년이라도 어느날 갑자기 죽은 자가 될 수 있다. 누구에게든 삶과 죽음의 거리는 아주 멀지만 동시에 매우 가까운 것이 아닐까?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와 속편인 이 있다. 인간들이 보고, 듣고, 경험하는 사랑과 죽음,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삶을 선택한 천사들의 이야기다. 십여년 전에 본 영화지만 잔잔한 감동과 여운이 남아 있다. 천사들은 사랑을 전하는 일을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매일 일에 메달려 더 소리지르며, 더 천박해지며, 심장은 더 무디어져 간다. 시간의 노예처럼 산다. 그래서 곁에 있는 천사들의 메시지를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고, 가슴으로 이해 할 수 없다. 천사와 사람이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안타까움이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천사들의 이야기가 오늘 문득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을 생각나게 한다. 사람들과는 너무 먼 거룩하신 분이지만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고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슬프고 아파하며 힘들어하는 사람들과 모든 삶의 현장에 친구처럼 가까이 계신다. 우리 곁에서 아니 우리 안에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계속하신다. 또한 자신의 부활을 통해 삶과 죽음의 벽을 허물어 주셨다. 그래서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지만, 동시에 주님과의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된다. 나처럼 부족한 사람에게도 이것을 믿게 해 주셨다. 그래서 종교와 세상에 메이지 않는 큰 자유와 소망 주신 것을 감사한다. 지금도 그 분은 계속 말씀하시고, 사람들, 사건, 자연과 우주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보여 주신다. 다만 우리가 그 분의 메시지를 들을 수 없고, 그 분의 하시는 일을 볼 수 없고, 그 분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벤더스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아직은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끝나지 않았다. 많은 한인 동포들이 일이나 모임보다 홀로 있는 시간들이 많은 줄 안다. 이런 기회에, 자신과 주위, 지구촌의 문제를 새롭게 챙겨보는 진지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열린 마음으로 아니 정직하게 기도하는 태도로 말이다. 먼저 나 자신이 그런 시간을 갖고 싶다. 주님의 마음과 손길과 하시는 일들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경험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최정복 (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 jason.choi46@gmail.com

02/07/2020
금요단상 - 최정복 목사

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학생들을 위한 집중강의에 참여했다. 이번 학기에는 시드니 지역에서 떨어진 애들레이드, 호바트, 골드코스트에서 참석한 분들도 있었다. 온라인 과정에 등록한 학생들이었다. 대부분 4-50대의 나이로 대학에 입학해서 공부할 나이가 지난 만학도들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74세의 나이로 학사과정에 새로 등록한 한분이 단연 돋보였다. 가장 나이가 많은 학생이었다. 뒤늦은 배움의 열정으로 쉽지 않은 결정을 한 그 분의 용기가 존경스럽다. 하나의 신선한 충격이다. 유엔이 발표한 청년의 연령대는 25세부터 64세까지이다. 언뜻 동의하기 어렵지만 이것은 공식적인 사실이다. 그 기준에 따른다면, 65세부터 74세, 아니 84세까지를 장년기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어쨌든 그러한 분들을 가르치는 선생의 한사람으로써 더욱 겸허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 교재나 지식 이상의 강의로 섬겨야겠다는 다짐을 하게한다. 그리고 내 자신 또한 저들 청장년처럼 진취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되겠다는 도전을 받는다. 가는 세월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 세월에 따라 나이가 더해지고 이런저런 연약함이 드러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을 거부하거나 위장하려고 안간힘을 쓴다면 그것은 억지요 생떼를 부리는 어리석음이다. 세월에 마모되어가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주어진 기회 중에서 새로운 배움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은 적극적이고 아름다운 도전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더 이상 기다리거나 미룰 수 있는 세월이 제한되어 있어 과감히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한다고 볼 수는 없을까? 미국에 사는 아들 가족이 손자들의 방학을 맞아 시드니를 방문했다. 아내와 나는 2년 전에 미국에 가서 저들을 만나고 왔다. 그 사이에 8학년짜리 손자는 나보다 더 큰 키로 훌쩍 커 버렸다. 4학년짜리 막내도 훨씬 더 의젓하고 활동적인 어린이가 되었다. 세월의 위력을 실감케 한다. 같은 기간의 세월인데, 내게는 아무런 긍정적인 변화가 없었던 것 같다. 아니다. 오히려 시력이며 기억력, 순발력 등이 퇴보한 것을 깨닫고 조금은 쓸쓸한 생각이 든다. 아들 가족이 여행의 피곤을 풀고 시차에 적응하는 처음 며칠은, 그냥 집에서 함께 보냈다. 같은 교회에 가서 함께 주일 예배를 드렸다. 함께 자고 일어나며, 식사를 하는 그런 평범한 일들도 아주 좋았다. 막내 손자의 깔깔대는 웃음소리를 듣는 것도 행복했다. 그리고 마젠타 해변에 있는 풀만 리조트에 가서 2박3일을 같은 빌라안에서 함께 생활했다. 산책을 하고, 가까운 해변을 걷기도 했다.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며, 몸을 부딪히면서 물장난도 했다. 멀지 않은 롱 젯트에 가서 거닐며 스냅 사진을 찍기도 했다. 엔트란스의 펠리칸 먹이주는 것도 구경했다. 저녁 에는 윷놀이를 하고, 손주들이 닌자 용사들을 좋아한다고 해서 텔레비젼에서 2018년 호주 닌자 결승전 (Australian Ninja Warrior Grand Final 2018)을 시청했다. 그런 작은 것들이, 아니 혼자서라면 결코 하지 않거나, 보지 않았을 것들도 즐거웠던 것은 손자들과 함께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된 것을 알기 때문인 것 같다. 큰 손자는 속이 깊고 듬직해서 믿음직하고, 막내손자는 쾌활하고 애교가 넘쳐 사랑스럽다. 막내는 “할머니가 만들어주시는 음식이 제일 맛있다. 미국보다 호주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기 원한다. 그러나 한가지 나쁜 것은 할머니께서 힘들게 요리해서 싫다”고 말해 할머니를 감동시킨다. 하루에도 몇번씩, 안아주고 키스하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녀석의 솜사탕같은 애교에 나도 모르게 매료된다. 저들이 시드니에 있는 17일 중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앞으로 아들 가족들이 친구들과의 만남이며, 케언즈 여행, 사촌들과 함께 자며 보낼 계획 등도 정해져 있다. 그만큼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남은 시간이 더 짧게 제한되어 있다는 게 아쉽다. 은퇴 후 벌써 5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인생시계의 오후에 이른 것을 안다. 그러나 심리학자 융은 이 시기를 ‘인생의 대낮’이라 했다. 사회활동이나 생물학적인 면에서는 결코 아닌 줄 안다. 그렇다면 그런 표현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 내적인 면에서 삶의 지혜와 세월의 무게 등의 측면에서 한 말이 아닐까 싶다. 현재의 내 삶이 ‘대낮’이 될 수 있는 긍정적인 이유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를 자문해 본다. 먼저 일에 대한 어떤 의무감이나 부담이 없다. 자녀들을 위한 기도 외에 실제로 저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하거나 신경 쓸 것이 별로 없다. 물질에 대한 큰 필요도, 욕심도 없어 자유스럽다. 그렇게 내 자신이 원하는데로 매일을 자유롭게 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또한 지금까지의 삶을 통해 만나고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소중하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후회되고 가슴 아픈 옛일들까지 말이다. 그것은 세월 속의 경험이 깨우쳐주는 작은 지혜인 듯 싶다. 꽃과 바람, 하늘과 구름, 바다와 숲의 신비와 아름다움이 예전보다 더 귀하게 느껴진다. 문득 지금이 내 인생의 대낮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앞으로 남은 내 삶의 세월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작은 일, 평범한 일상도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기 원한다. 마치 시드니를 방문한 손자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으로, 저들과 함께하는 작고 평범한 일들까지도 소중히 여기듯 말이다. 가난한 마음으로 사랑을 주고 받으며 대낮처럼 밝게 살수 있기를 기도한다. 세월이 살같이 빠르게 가고, 그만큼 내 삶의 경주는 끝에 가까와진다는 소망이 크기 때문이다. 최정복 (호주 연합교회 은퇴 목사) Jason.choi46@gmail.com

02/08/2018
금요단상 - 최정복 목사

최정복 목사 아침마다 멀리 달리기를 하는 한 친구가 있다. 그는 이 운동이 최고의 건강법이요 만병 통치약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친구의 말에 동의한다. 지금 그의 몸 상태며 혈색 등이 20여년 전보다 오히려 더 좋은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모두에게 달리기를 권면하곤 한다. 달리는 과정에 힘든 고비가 있지만 동시에 절정의 황홀감(Runner’s High)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고 들었다. 그런 중독성이 강한 매력 때문에 달리기를 계속하는 분들이 많은 줄 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달리기를 하지 않고 있다. 재미가 없다느니 혹은 골프장에 가서 걷는 것도 괜찮다는 등의 핑계들이 있어서다. 달리기를 새로 시작하고 싶은 어떤 간절한 바램도 없다. 아니 무리한 달리기가 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으며 굳이 필요치 않다는 그런 변명 때문인 것 같다. 얼마 전 그 친구를 만났다. 그는 보통 10km 정도를 뛰는데 그날 아침은 20km를 뛰었다고 했다. 피곤치 않느냐고 물었더니 전연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 비결은 입을 약간 벌려 웃는 모습을 하고, 눈은 거의 감고, 두 다리가 아닌 두 팔로 달리는 것이라고 했다. 싱거운 우스개 말처럼 들려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 친구는 실제로 그것이 힘 안 들이고 뛰는 진짜 비결이라고 했다. 나는 그 비결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눈을 감고 웃는 얼굴로 다리가 아닌 팔로 움직인다는 그런 이미지가 에너지 사용을 낮추는 것 같은 심리적 기대 효과 혹은 어떤 플라시보 효과가 아니냐고 물었다. 상담학을 가르치는 그 친구는 ‘뇌과학의 적용’이라고 응답 했다. 이번주에 우연히 ‘습관과 뇌의 역할’에 관한 아주 짧은 글을 읽었다. 습관은 의식적인 것보다 무의식적인 영역에 더 가깝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두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어떤 일이나 습관에, 먼저 의미를 부여하라고 했다. 그래야 우리 안의 동기부여 시스템이 작동해 더 잘 기억하며, 행동과 습관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했다. 둘째, 새로운 것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21일 이상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 반복된 경험이 대뇌피질에서 뇌까지 내려가는데 소요되는 최소한의 기간이라고 한다. 내게는 설득력이 있는 실제적인 가르침이었다. 매일의 습관처럼 달리기하는 그 친구를 생각해 본다. 그는 달리기가 만병통치약이라는 최고의 가치와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십수년간 달리기를 계속해서 지금은 습관 이상인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 문득 그가 눈을 감고, 웃으며 다리가 아닌 팔로 움직이듯 20km를 쉽게 달릴 수 있는 것은 반석처럼 든든한 그 습관의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게 말했던 그의 비결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라고 보여진다. 다음에 만나서는 그가 달리기에 적용한다는 뇌과학의 원리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물어 보아야 되겠다. 어떤 숨겨진 가르침이 있는지 기대된다. 나도 새로 달리기를 시작하고 싶어서인가? 그건 아니다. 습관과 뇌 역할에 대한 사실에 근거해서 다른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려고 한다. 나는 디지털 공간의 일을 쉽게 더 잘 할수 있는 습관 만들기에 도전하고 싶다. 코로나 사태 이후, 인터넷, 스마트폰, 페이스북 등 디지탈 공간의 영향력이 일상 생활 속으로 성큼 들어왔다. 온라인을 통한 예배며 성찬식 참여 등이 그렇다. 강의며 각종 모임등도 쥼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공과금 지불이며 일처리 등이 이제는 평범한 상식이 되었다.골프 게임의 스코어도 스마트폰 엡 마이스코어(myscore)를 통해 제출한다. 몇개월째 온라인 강의를 하고 있지만,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버걱거리며 당황할 때가 있다. 어떤 순서를 잊어 버릴 때도 있다. 나는 솔직히 디지털 공간의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필요한 일들만을 하고 있지만, 스트레스를 느낄 때도 있다. 그저 내가 기계 다루는데 서툴고, 기억력도 좋지 않은데, 새로 구입한 렙톱에 아직 익숙치 못하기 때문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들이 근본 이유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먼저, 디지털 공간의 일과 가치에 대한 내 생각의 전환이 필요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나는별 관심이 없었다. 크게 신경 쓸 필요없다는 소극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가 끝나도, 그 영향력은 결코 줄어들 것 같지 않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필요한 새로운 규범으로 더 강화될 것 같다. 누구도 이런 흐름을 달리 거부하거나 바꿀 수 없다. 돌이켜 보니,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요 받으면서도 디지털 공간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소통할 수 있었다. 문이 닫혀진 기관들이 많았지만, 큰 혼란없이 사회 기능이 유지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디지탈 공간의 묵직한 의미와 중요성을 느끼며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또한 가능한 디지탈 공간 속에 자주 드나들며 간절함으로 그 체계와 원리를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단순히 기술적인 방법을 이해하고 기억하기 보다는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하나의 습관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것을 상상하고 행동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반복해 보려고 한다. 새로운 것에 익숙해지는 습관 만들기는 최소 3주간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지 않는가! 그것도 사람이나 나이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니 나는 금년 말까지 넉넉한 기간을 예상하면 더 안전할 것 같다. 내 친구의 달리기 습관처럼 그런 높은 경지나 특별한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 공간에 친숙해지고, 스트레스 대신에 어떤 재미를 느끼며, 자연스럽게 활용할 수 있는 그런 새로운 습관을 갖게 되었으면 좋겠다. 이를 통해 아들과 딸 가족들과 비슷한 눈 높이에서 지금보다 더 자주 또 가깝게 소통할 수 있게 된다면 더욱 좋겠다. 최정복 (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 jason.choi46@ gmail.com

22/10/2020
금요단상 - 최정복 목사

어수선한 가운데 새해 첫 달을 보냈다. 아니 그렇게 떠밀려 온 기분이다. 감기 몸살에다 잦은 기침으로 며칠동안 밤잠을 설치곤 했다. 수년만에 겪는 일이라 몸과 마음이 무거웠다. 산불과 가뭄, 메케한 연기 등에 너무 신경을 쓴 때문일까? 아직 여름은 끝나지 않았고 산불의 위협은 여전하다. 얼마 전에도 폭염 중에 거센 바람이 불어 NSW남해안 지역에서 큰 산불이 일어났다. 거기서 산불 진화를 하던 소방 항공기의 추락사고로 대원 세명이 사망했다. 미국에서 지원 파견된 베테랑 팀이어서 안타까움이 크다. 세 영웅들의 삶과 죽음에 옷깃을 여미고 경의를 표한다. 같은 날 캔버라 서편의 산불 지역에서 한 시신이 발견됐다. 그는 59세의 남성으로 지역 주민으로 확인됐다. 몇 개월간의 산불로 NSW 에서만 10만명의 주민들이 대피했고, 25명이 숨졌고 2천여채의 주택이 불탔다. 또한 4억 8천만 마리의 포유류, 조류, 파충류들이 희생된 것으로 추산된다. 이중에 코알라의 서식지들이 NSW에 집중되어 있어 호주 전체의 코알라들 중1/3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호주 전체의 산불피해는 이보다 훨씬 더 크다. 피해지역의 넓이가 남한의 전체 면적을 넘는다고 한다. 여기에 관광 및 유학산업, 다른 경제 및 사회적인 피해의 실상은 치명적인 줄 안다. 치유와 회복은 오랜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또 이것은 단지 호주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하나의 지구촌으로 나라와 대륙의 경계를 넘어 직접 영향을 주고 받는다. 일본 기상청의 위성은 호주 산불의 규모와 참상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푸르고 싱싱하게 빛나는 지구속에서 호주 대륙만이 피로 물든 것처럼 검붉은 색깔로 드러났다. 산불로 인한 연기들이 주위로 번지고 있는 것도 포착됐다. 그 일그러진 모습을 바라보며 섬뜩한 전율을 느꼈다. 실제 호주의 산불로 인한 연기 때문에, 뉴질랜드의 빙하가 흰색이 아닌 회색으로 변했다고 한다. 더 먼 남미의 하늘까지 영향을 준다고 했다. 바로 그 날, 미국에 사는 동생 내외가 남미 파타고니아 지방을 여행 중이라는 카톡을 보내왔다. 지난해 9월, NSW 중북부 해안가인 타리(Taree) 지역에서 처음으로 산불이 일어났다. 작은 타운 보빈(Bobin)의 주민들은 137년의 역사가 있는 학교를 포함, 순식간에 삶의 터를 잃어버렸다. 그 후 지금까지 그들은 임시 거처나 카라반 혹은 텐트 등에 살고 있다. 그들은 인터뷰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로 마실 물과, 불탄 잔해 등 쓰레기 처리와 자녀들의 학교 등을 얘기했다. 그러나 직접 찾아와 도움의 손길을 펴주는 낯선 이웃들 때문에 힘과 용기, 격려를 받았다고 했다. 시드니에서 온 한 부인은 직접 생필품 등을 차에 싣고 와서 주고 갔다고 했다. 어떤 부부는 자신의 카라반을 빌려주어 지금 거기서 살고 있는 주민도 있다. 어떤 이들은 그냥 그들 곁에 와서 함께 있어주며 임시거처나 텐트 치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전혀 알지 못했던 외지인들의 배려와 나눔이었다. 그런 따뜻한 이웃들과 또한 서로 위로하며 함께 견딜 수 있는 주민들이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고 있다고 했다. 정상적인 상태로 복구하려면 얼마나 걸리겠는가 하는 물음에 주민들은 최소 2-6년을 예상했다. 모두 옛 집터에 새로 집을 짖기 원하지만, 보험을 들지 않았거나 여유 돈이 없는 주민들도 많아 예측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부득히 떠날 수 밖에 없는 주민들도 있어 피해 전의 타운으로 회복되기는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화재를 당했던 그 다음 주일후부터,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복구하기 시작하여 82일만인 지난 주부터 수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비록 15명의 학생들을 위해, 우선 필요한 교실들과 화장실 등 기본적인 것들을 위한 작업이었지만 피해 주민들에 의한 성취라는 점에서 감동을 준다. 내 마음까지 흐믓하게 해준다. 구정이고 호주의 날 연휴라며 엔터런스(The Entrance)의 한 친구집에서 초대를 했다. 고마웠다. 저녁 식사후 해변 광장에 나가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바람이 서늘했고, 가까이서 즐기는 불꽃놀이도 인상적이었다. 폭죽이 높히 올라가 터질 때마다 화려한 색깔과 다양한 형상의 불꽃으로 밤하늘을 장식한다. 그러나 다음 폭죽이 올라가는 짧은 순간에 그 화려한 형상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불꽃의 실체는 폭죽이 파열되고 가루로 부서져가는 아픈 과정의 빛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것을 보지 못한다. 새로 드러나는 불꽃만을 주시하며 환호한다. 계속 스러져가는 형상들도 관심이 없다. 곧 잊어 버린다. 불꽃만이 아니다. 산불이며 가뭄, 어떤 자랑이나 아픔, 건강이나 질병 또한 살다 보면 모두 지나간 것으로 잊어 버리지 않는가! 그런 스치는 생각이 어떤 치유와 소망의 빛을 주었다. 친구의 배려와 그 불꽃 쇼가 내게는 아름다움 그 이상이었다. 감기 몸살로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지고, 감정의 찌거기들이 부서지고 사그러지는 경험이었다. 볼 수 있는 어떤 이유와 조건으로 말미암은 위로와 기쁨은 인간적인 상정이다. 산불로 인한 피해든 사업이나 건강 혹은 가족문제로 힘들어하는 이웃들에게, 그리고 저들을 위해 크고 작은 나눔과 도움의 손길들을 베푼 모두에게,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와 기쁨이 공유되기 바란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런 이유와 근거없이 주어지는 위로와 기쁨도 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 모두에게 더 필요한 경험이다. 오늘도 감당키 힘든 짐들과 문제 가운데 있는 모든 이웃들에게, 주님께서 그런 조건 없는 위로와 기쁨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2월 첫 주간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가 심상치 않다. 전염성이 강하고 3백명 이상이 숨졌는데 아직 그 실체도 밝히지 못하고 국제비상사태가 선포됐다. 이 질병의 위협이 반중 감정으로 또한 반아시아 차별로 변질될 우려도 있다. 산불비상에 들어갔던 캔버라지역이 이번 주초의 강풍으로 더 많은 집들이 불탔다고 한다. 난 아직 감기 기운이 남아 있다는 핑계로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이런 때 일수록 속히 생활의 리듬을 되찾아야 함을 느낀다. 감사하며 긍정적인 태도로 매일의 삶에 충실하리라 다짐해 본다. 최정복(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 jason.choi46@gmail.com

06/02/2020
금요단상 - 최정복 목사

지난 주말까지12일 동안 남태평양 크루즈 여행을 다녀왔다. 90세 되신 장모님 중심으로 편한 것을 찾다 보니, 우리에게는 조금 단조로운 여정이 된 것 같다. 어쨌든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바다와 그 수평선에 맞닿은 하늘 만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간 산불로 인해 볼 수 없었던 탁 트인 하늘과 바다의 정경이 시원했다. 마침 발코니가 있는 8층 캐빈이어서, 때로는 새벽이나 밤 시간에도 그곳에 앉아 하늘과 바다를 쳐다보기도 했다. 내게는 그런 시간이 좋았다. 모든 일을 멈추고, 시간 모드를 ‘아주 천천이’로 바꿀 때 새로운 것을 볼 수 있었다. 처음으로 바다와 하늘이 계속 변하고 움직이고 있음을 가까이 지켜 보았다. 하늘의 구름과 빛깔도 아침과 저녁이 다르다. 수평선과 맞닿은 하늘빛은 또 다르다. 밤 하늘은 전혀 다른 세계다. 그렇게 많은 별들이 있었는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지 못했다. 아니 오래 잊고 살았던 그것을 다시 보았다. 바다의 색깔도 장소에 따라 옅은 소라색에서 짙은 코발트, 검푸른 색까지 다양하다. 밤 바다는 신비롭다. 은빛 여울로 넘실대는 밤의 파도는 감당 할 수 없는 두려움을 준다. 그 하늘과 바다를, 아니 지구와 우주를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크신 분인지, 또 내 자신은 얼마나 작은 자인지를 절감한다. 뉴칼레도니아에서는 기차 모양으로 제작된 긴 관광 자동차로 수도 뉴메아(Naemea)를 둘러보았다. 제임스 쿡 선장이 처음 발견했으나 프랑스 자치령이 된 것이며 2차 대전 때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남태평양 전략본부가 된 것등 역사 설명도 들었다. 아직 남아 있는 흔적들을 보았다. 다음 날의 정박지인 소나무 섬 (Isle of Pine)도 인상적이었다. 작은 섬이어서 30여명 탈 수 있는 셔틀 배 다섯척이 섬과 크루즈 선을 오가며 관광객들을 운송했다.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는 소나무들이 많아, 외부인들은 ‘소나무 섬’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러나, 현지인들이 사용하는 이름은 ‘낙원에서 가장 가까운 섬’이라고 했다. 참 귀한 이름이다. 우리는 다른 관광대신에 천천히 해변과 그 주변을 걷기로 했다. 해변이 완만해서 어린이들도 깔깔대며 신나게 놀았다. 바다 색깔이 눈이 부시도록 투명했고 백사장의 모래는 밀가루처럼 고왔다. 타즈마니아의 와인 글라스 해변이나, 시드니 본다이 해변, 골드 코스트의 해변들과는 또 다른 원시적인 매력을 느꼈다. 다른 상업 시설이 거의 없었다. 직접 따온 코코넛을 파는 것과, 원주민 형식으로 촘촘히 머리를 땋아 주고 얼마의 돈을 받는 정도였다. 관광객들을 위해서 대여섯명의 마을 주민들이 전통 춤을 추는데 내 눈에는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미소를 번지게 했다. 춤을 통해서도 저들의 심성이 느껴졌다. 맨발로 해변을 걸으며, 때로는 나무 그늘아래서 쉬며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런 시간을 통해서 나의 속 사람이, 때 묻은 감정들이 어떤 씻김과 힐링을 경험했다. 바누와투의 첫번째 정박지인 미스터리 아일랜드(Mystery Island)도 기억에 남는다. 바누와투 열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작은 섬이다. 전통적으로 이 섬에 악령이 역사한다는 그런 미신 때문에 지금도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무인도라고 했다. 그러나 영국 여왕이 이 나라를 방문했을 때, 예정에 없던 이 섬을 들려 갈 정도로 특별한 섬이라고 한다. 지금도 마실 물이며 전기, 전화, 인터넷 등이 없는 곳이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 때문에 매년 65, 000명의 크루즈 관광객들과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 휴가를 즐기려는 소수의 사람들이 찾는다고 했다. 정작 이 섬에 도착해 보니, 환영의 노래를 불러주는 원주민 청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무 가지와 잎들로 지은 임시 가게들도 있었다. 모두 관광객들을 맞기 위해 이웃 섬들에서 온 주민들이라고 한다. 세멘트 블럭으로 지어진 서구식 화장실도 있었다. 우리 세 식구는, 배 밑 유리를 통해 바다속 산호며 물고기, 거북 등을 구경했다. 한 호주 관광객은 먼 바다 낚시를 위해 $180을 지불했는데, 현지에서는 $80 - $90이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물고기를 한마리도 잡지 못했고 작은 배속에서 고생만 했다며 볼멘 투정을 했다. 크루즈 배에서 매일 발행되는 안내서에서, 이 나라는 팁이 없고 물건을 사고 파는데 흥정이나 할인도 없다고 읽었다. 그러나 이런 순박한 전통이, 몰려오는 상업주의 물결에 허물어져가고 있음을 보았다. 저들의 오래된 미신, 즉 이곳 미스터리 섬에는 악령이 역사 한다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바누와투 수도인 빌라 항구에 정박한 하루는 다른 관광을 하지 않고, 한국인 선교사 두 분과 만나기로 했다. 두 분 모두 첫 만남이었다. 정 선교사 내외가 가까운 선교지와 현지 교회 두군데로 안내해 주었다. 빈부의 격차는 하늘아래 어디에도 있지만, 이곳의 슬럼가는 보기가 민망스러워 고개를 돌려야 했다. 한 중국식당에서 김 선교사 내외까지 함께 만났다. 우리가 점심을 대접했다. 식사 후에는 김 선교사가 주관하는 영성센터의 건설현장을 둘러보았다. 장모님은 김 선교사님이 낯익은 얼굴로 시드니에서 뵌 분 같다고 하셨다. 아내는 다른 분과 착각하시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그 분은 얼마전 시드니교회에서 설교한 적이 있다고 했다. 또한 머잖아 1월 6일에는 시드니교회 담임 목사님과 11명의 교우들이, 이곳으로 선교여행을 올 계획이라고 했다. 내가 그 교회 초대 목사였던 것을 알게 된 김 선교사는, 하늘아래 세상은 참 좁고, 바다를 건너서도 가까이 연결시킨다는 것이 놀랍다고 했다. 나는 지금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며 이 글을 적고 있다. 직접 내 눈으로 하늘과 바다의 실상을 볼 수는 없다. 가득한 스모그가 하늘과 바다를 가리고 있다. 특히 어제와 오늘은 최악의 상태이다. 바로 앞 스타디움이며 바다와 하늘을 전혀 볼 수 없다. 그러나 마음의 눈으로 보고 있다. 때와 장소, 환경에 따라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과 바다는 각기 다르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전히 같은 하늘이고 바다라는 사실이 아닐까? 그 스모그 벽 건너편에 여전히 바다가 있고 하늘이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늘과 바다와 만물을 지으시고 돌보시는 크신 하나님께 큰 비 주시기를 기도 드린다. 내 눈으로 바다와 하늘을 보기 원해서가 아니다. 오랜 가믐과 산불로 고통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과 동식물들과 메마른 땅을 위해서다. 주님, 저희 모든 피조물들이 큰 비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최정복 (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jason.choi46@gmail.com

12/12/2019
금요단상 - 최정복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