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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해변을 막 출발했다고 속초에서 보내온 아침 편지에 가을이 두 섬이다 하얀 파도와 빨간 등대를 짊어진, 길은 이차선 왼쪽 모래는 맷돌에서 나온 콩가루처럼 노랗다 몇 개의 태풍을 견뎌낸 소나무가 힘차고 바위에 부딪치는 물결에도 사연이 겹겹이다 국난을 너머 들들 끓는 지구전에도 상하지 않은 여러 폭의 풍경 모래알을 차면서 나도 9.4킬로를 걷는다 낚싯대 내리고 서 있는 사내의 갈고리를 지나 기암괴석 돌밭을 건너며 비로소 굳은 등줄기를 폈다 사색과 태양이 남매 같은 해파랑 길 등대와 의자들이 반가운 친지 같다 아이야 바다를 뚫고 가는 길에는 속도만이 최선은 아닐 거야 옛날처럼 숨바꼭질도 하면서 천 길 물속을 넘나들어 보자 다림질된 곶 앞에 해오라기 몇 마리 웅성거린다 시월 바다에 뛰어들까 말까 가을 하늘 속으로 날아들까 말까 할머니가 그러셨다 너무 깔끔해도 곁이 없다고 그땐 바다가 둘둘 멍석처럼 말리는 흰 마당 같앴다 동네 안길, 출렁이는 황금색 억새에 어른거리는 두고 온 식구들 낮은 기와집 앞 너른 연리지에는 흔들리는 연잎이 귀향을 재촉한다 아버지 손에 들려오는 학꽁치나 전어가 있었지 엄마 손을 따라오는 두렁박 속 소라나 전복도 있었지 빈 집을 지키는 아이들에게 구르며 달려가 허기진 밥상을 서두르시던 세월이 흘러도 어른거리는 자연산 회 한 접시 위로 선홍빛 해가 기울어간다 가을바다 누운 볕에 서둘러 가진 항에 도착했다 고맙고 억센 2020년 가을 한 날 갯내음이 물씬 묻어나는 해조의 편지는 어느새 내 젖은 그리움의 무게이고 아직도 걷고 있는 네 푸른 파도의 교차점이구나

  14/10/2020
  문학지평

호주의 명산 블루 마운틴**을 나는 청산이라고 부른다. 1. 웬트워스 폴스, 찰스다윈 코스를 따라가다 만난 폭포 앞에 섰다. 웅장한 물줄기가 높은 절벽을 타고 하강한다. 낙하하는 물줄기에 몸을 실어 물살을 느껴본다. 거침이 없지만 거칠지 않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부대끼며 바위를 깎아내린 것일까.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요란하지 않다.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물줄기를 이루고, 물줄기가 모여 계곡을 만들면서, 폭포는 숲의 젖줄이 되었다. 숲의 젖줄은 웬트워스에 이르러 운명처럼 만난 절벽 위에서 당당하게 떨어지고 있다. 그 위용은 날카로운 것을 둥글게 하는 힘이기에, 오랜 세월을 다듬듯이 살아낸, 내 어머니의 모습처럼 웅숭깊다. 절벽에 붙어서도 궁색하지 않게 자란 나무들을 올려다본다. 끝에서 곧게 뻗은 나무는 하늘과 맞닿을 기세다. 높은 곳에 있지만, 전혀 위협적이거나 고압적이지 않다. 폭포수가 내어준 바위틈으로 나무 하나가 절벽을 부둥켜안고 있다. 폭포를 지키고 있는 전사의 자세다. 뿌리가 바위를 뚫고 땅에 닿았는지 산바람에도 흔들림이 없다. 폭포수를 동반 삼아 버틴, 절벽처럼 가파른 세월을 지탱하고 이겨낸, 내 아버지의 모습처럼 의롭고 강인해 보인다. 하강하는 것과 높이 솟는 것이 절벽을 사이에 두고 조화롭다. 청산이어서 가능한 일이다. 다행히 나는 이 자연의 조화를 내 집 정원에 들어 앉히려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는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그런 믿음이 있기에 조급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는다. 산이 보고 싶고, 산에 목이 마르면 산에 오르면 그뿐이다. 산을 걷고, 바라보고, 듣고, 매만지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뿐인 것이다. 이제는 껴안고 싶어도 껴안을 수 없는 거리에 계신 당신들이 그곳에 있다. 2. 카툼바 세자매 봉에서 루라 케스케이드 쪽으로 길을 잡는다. 3백여 미터쯤 지나서 세 갈래 길이 나온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안내 표시가 어디에도 없다. 안내판이 붙어 있던 자리에는 지지대만이 홀로 남아 휑하다. 방향으로 보아 오른쪽 아랫길은 아니다. 왼쪽으로 난 두 길 중 하나인데 가늠이 되지 않는다. 휴대폰을 열어 지도를 검색한다. 인터넷 시그널이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 폰과 잠시 실랑이를 벌이다 포기하고 감으로 방향을 잡아 움직인다. 내게 더 이상의 지도는 없다. 다음 시그널을 기대할 뿐이다. 2백여 미터쯤 더 가니 두 갈래 길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또 안내판이 보이지 않는다. 무엇인가 이상하다. 어디를 가도 이정표를 따라 다니면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청산 트레킹 코스다. 그런데 길잡이 안내판이 없으니 판단을 할 수가 없다. 먹을 것이라곤 겨우 물 한 병이다. 하루 내내 걸어야 하는 긴 코스로 진입하게 되면 낭패다. 엉뚱한 곳으로 빠져나가게 되면 차 있는 곳까지 다시 가는 일도 만만치 않다. 이쯤에서 감을 믿고 방향을 정할 것인지, 되돌아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주변을 살펴보니 누군가 고의로 안내표시판을 망가뜨린 흔적이 보인다. “누가 왜 그랬을까. 카운슬에 신고는 되었겠지. 실연당한 젊은이가 애인과 같이 왔던 길을 더듬다가 홧김에 부숴 버린 것인가. 안내판을 제작하는 사업체에서 일을 만들려고 한 것인지도 몰라. 설마 타지 사람들에게 불만을 품은 청산 주민의 짓은 아닐 테지...” 더듬듯이 길을 찾으며 나는 청산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각에 몰두한다. 길잡이가 없으니 길 뿐만 아니라, 생각도 방향을 잃고 있다. 왼쪽 길을 선택해 몇 발자국 떼던 나는 결국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되돌아선다. 길은 훤하게 뚫려있는데 내 눈이 너무 어둡다. 3. 메가롱 벨리, 숲이 내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숲 한가운데서 계곡물 소리가 첼로 음처럼 장중하게 들리고, 물 건너에서 새소리가 메조소프라노 솔로 파트로 들려온다. 머리 뒤로는 작은 새들이 재잘거림이 배경음악처럼 깔린다. 물기 머금은 초록 사이로 풀벌레 소리와 바람 부딪히는 소리가 한꺼번에 공명을 만들고 있다. 나뭇가지마다 이파리들이 음표처럼 팔랑거린다. 바람의 지휘에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어느 바닷가 민박집에서 들었던 숲의 소리이기도 하다. 자연이 낳은 것들은 같은 소리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나 보다. 한 줄기 햇살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는 공터가 보인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없는 곳에 빈 의자가 놓여있다. 반갑다. 숲을 찾을 때마다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지만, 정작 내 오감을 깨우는 것은 사람의 흔적일 때가 많았다. 혼자서 옷깃은 여밀 수 있으나, 혼자서 내 등을 껴안을 수는 없다. 새삼 숲의 빈 의자에서 내리는 외로움에 대한 정의다. 의자에 앉아 숲이 내는 소리를 제대로 듣는다. 밖에서는 들을 수 없던 소리가 하나하나 분리되어 들려온다. 그리고 실체를 모르던 내 내면의 소리도 튀어나온다. 이정표에 의존해서 목적지만 보고 걷는 사이, 내 안에 있던 소리가 분절음을 냈던 행로, 그건 불협화음이기도 했다. 겉에서 보이는 화음만이 정도라 여기며 오선지에 그려온 내 삶의 단조로운 곡들이 들려온다. 화성의 종류가 여러 갈래인 것을 모르고 연주하고 있는, 귀가 어두운 연주자의 곡처럼 어설프기 그지없다. 물이 흐르는 메가롱 벨리 숲에서 나는 지금 내 삶의 변주를 위해 지나온 삶을 편곡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청산이라서 가능한 일이다. 숲으로 들어가 보자. 햇빛 좋은 겨울날, 유칼립투스 향 짙은 청산 숲속으로 들어가 보자. 겉에서는 들리지 않던 당신만의 소리가 연주될 것이다. *널리 알려진 작자 미상의 고려가요 제목을 그대로 썼다. 제목에 얽힌 에피소드는 블루 마운틴을 소재로 한 다른 작품에서 따로 다루었다. **시드니 시티에서 서쪽으로 약 100km 쯤에 떨어져 위치한 산으로, 그레이트 디바이딩 산맥의 일부이다. 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칼립투스에서 나오는 유증기가 햇빛을 통과하면서 푸른색을 띠기 때문에 블루 마운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20/08/2020
  문학지평

리카의 주근깨가 짙어졌다. 볼에 박힌 깨가 오늘따라 유난히 크고 까맣다. 혹시 달거리 중인가? 찬찬히 들여다보려는데 찡긋 윙크 한번 날리고는 재빨리 라커룸을 빠져나간다. 153센티미터 남짓한 키에 22인치쯤 되어 보이는 잘록한 허리를 가진 필리핀 여인, 리카가 떠난 자리에 향수 내음이 진동한다. 리카와 나는 회사에서 장애우 직원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이 출근하면 그날 해야 할 일을 개인의 상태에 맞게 배치해 주고, 완성된 분량을 보고서에 기록하는 일이다. 직원들 대부분은 성격장애나,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어 겉으로 보아서는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개인차가 크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일하는 동안 긴장감을 유지하며 몸과 마음을 효율적으로 써야만 하는 이유이다. 리카는 장애우 직원들에게 지나치게 친절해서 문제가 되곤 한다. 그들이 독립적으로 일을 하게 도와야 하는데 자기 몸을 먼저 쓰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조금만 힘들어한다 싶으면 어느새 달려가서 해결해 주고 있다. 성질이 급해서라기보다는 지시나 요구를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이다. 테이블 세팅에서부터 각자 맡은 일까지 마무리해 주느라 몸을 한시도 가만히 두질 못한다. 그래서 리카는 인기가 많고 정말 바쁘다. 손놀림은 마치 드럼 주자처럼 정교하고 리드미컬하다. 때론 무거운 것도 거침없이 들곤 하는데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지 혀가 내둘러질 때가 많다. 리카가 지적 장애우인 로이와 결혼해서 호주에 왔다는 사연을 알게 된 것은 입사하고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결혼이민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 둘이 부부라는 것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뭔가 조화가 맞지 않는 이 커플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젊고, 예쁘고, 지적으로도 빠지지 않는 리카가 로이를 선택한 것은 누가 봐도 어색했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이라면 경제적인 이유인데, 리카는 아무리 피곤해도 오버타임을 마다한 적이 없을 정도로 여전히 경제적인 면에서도 자유롭지 못해 보였다. 더구나 로이는 지적장애뿐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많이 약해 보이는 친구가 아닌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로이는 시력이 나빠 몸이 굼뜬 것에 비해 말이 빠르고 많은 편이다. 그런 상태를 깜빡 잊고 그와 말 댓거리를 하다가는 종종 낭패를 보게 된다. 나 또한 로이와의 사이에서 잊을 수 없는 모멸의 추억이 하나 있다. 회사 식당에 걸린 대형 텔레비전에서 북한에 대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북한을 한국 전체로 착각하고 있던 로이는 한국에 대한 위험을 알리며 여행을 하면 절대 안 되는 나라라고 주변에 대고 열을 내며 떠들기 시작했다. 핵의 위험과 가난 등등 너무 구체적으로 북한 상황을 나열하면서 서울을 들먹거렸다. 부드럽지 않은 이미지 때문에 종종 ‘김정은 누나가 아니냐’는 농담을 듣는 나로서는 신경이 곤두섰다. 결국, 한국을 가려거든 가까이에 있는 일본을 가야 한다고 말하는 지점에서 참지 못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리고는 한반도 상황에 대해 꾸역꾸역 설명을 했다. 내가 한국인인 줄 모르고 있던 로이는 살짝 당황하는 기색이더니 이내 낯빛을 바꾸고는 내 영어 발음을 따라서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내며 놀려댔다. 나보다 한참 부족하다고 여기던 이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꼴이 되고 보니 내 처지가 한심스럽고 어이가 없었다. 말 때문에 겪은 사연이야 한둘이 아니었지만, 회사에서 내가 겪은 첫 번째 언어 수모 사건이라 잊을 수가 없다. 이런 로이가 내가 좋아하는 리카의 남편이라는 게 속상하고 답답하기까지 했다. 당시 리카의 낯빛은 어두웠다. 웃음도 자연스럽지 않았고, 로이와 붙어 있는 것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길을 걸을 때도 몇 걸음 앞서 걸었다. 로이는 그런 리카를 엄마처럼 따랐다. 가끔 그녀에게서 적잖이 짜증 섞인 목소리가 여과 없이 튀어나오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리카가 영주권을 받으면 분명히 로이 곁을 떠날 것이라고 단정했었다. 지금 보니 그 모습은 그 후에 내가 겪은 신앙심 깊고, 사려 깊은 리카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로이 부모의 전격적인 경제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리카가 계속 일을 하는 이유가 알려질 즈음이었다. 영주권 획득 후 장기 휴가를 내어 필리핀에 다녀온 뒤였다. 리카의 주근깨가 갑자기 눈에 띄었다. 드러나게 많아진 듯도 했다. 9남매의 맏딸인 리카가 보내 준 돈으로 필리핀에 있는 형제들이 공부하고, 집을 두 채나 샀다는 소문이 돌았다. 생각해보니 갑자기 주근깨가 많아진 것이 아니라 낯빛이 환해져서 주근깨가 상대적으로 잘 보였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즈음 주근깨를 가리려고 유난히 분첩을 두드려 대는 리카와 화장실에서 종종 마주치곤 했다. 그때마다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멋쩍은 미소를 보내왔다. 지난번 크리스마스 파티 때는 페이스페인팅으로 주근깨를 완전히 덮고 나타나 놀라게 했다. 그날 스테이지가 좁다고 느낄 정도로 춤을 추던 리카는 격렬하게 날갯짓하는 한 마리 새처럼 보였다. 지난 금요일 퇴근길에 맥주를 한잔하러 가는 길에서는 로이와 팔짱을 꼭 끼고 나란히 걸었다. 전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은 과장되게 로이를 보살피는 리카에게서 여인의 향취가 물씬 뿜어져 나왔다. 나는 그 향취에 취해 덩달아 붉어졌고, 리카의 주근깨도 한껏 붉어졌다.   리카의 주근깨가 확연히 커지고 까매진 이유는 역시 떠버리 매니저 에드나에 의해 밝혀졌다. 주근깨를 빼려고 레이저 시술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몇 달쯤 후면 나는 리카의 주근깨를 더이상 볼 수 없을 것이다. 얼굴은 더 고와지고, 여인의 향기는 더 진해질 테지. 몇 년 후에도 주근깨 없이 환해진 리카의 얼굴을 회사에서 계속 볼 수 있을까. 아무래도 그녀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고 있는 것만 같다.

  14/10/2020
  문학지평

철학적 사유를 실천한다는 의미가 뭘까 생각해 본다. 무조건 대상을 두고 종일 골똘한 사유에 잠긴다고 철학적 사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고 싶은 명품 시계 또는 지하철에서 우연히 내 앞을 스치고 지나간 아름다움 금발의 여성에 대해 종일 생각에 잠겨 있을 수도 있을 테니. 그렇게 말하고 보니까 욕망의 지시를 따라 생각하는 것은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철학적 사유란 나의 현재, 나의 정체성, 나의 실존에 대한 회의부터 시작한다고 보겠다. 대체로 큰 사고나 불치의 병을 겪은 후에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철학적 사유로 들어간다. 사고로 인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지금까지 공들여 쌓아온 나의 사업이나 경력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었다는 사실을 직면할 때 사람들은 철학자가 된다. 그런 면에서 생각해 볼 때 위기란 철학에 입문하기에 적절한 기회가 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위기를 당하고 철학적 사유로 대처하는 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좌절과 실망으로 인해 우울증에 빠져서 정신병 상담을 받아야 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으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철학적 사유란 지금까지 내가 당연시 생각해 왔던 나의 존재, 나의 정체성 (그것이 무엇이든) 대한 깊은 회의로부터 시작되며 이 지점에서 180도 방향을 틀어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기 위한 때론 힘들고 때론 희열을 가져다주는 긴 여행을 떠나는 일종의 사유의 자유여행가가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내가 누구인데? 내가 지금까지 어떤 사회적 경제적 위치를 누려왔으며 많은 사람에게 어떤 명예스러운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얼마를 노력했는데... 라고 생각하며 낡아빠진 훈장들을 가슴에 주렁주렁 달고 만나는 사람마다 과거의 영광을 보여주는 빛바랜 앨범 사진을 계속 펼치는 사람은 이런 자유 여행가가 될 소질도 자격도 없다. 그는 자신이 구축한 이미지에 실종된 남자이다. ‘나’라는 본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가족과 자신이 속했으며 충성을 바친 조직(기업이나 사회 종교 단체) 안에서 성형수술을 받듯이 인위적으로 쌓아 올린 가공의 건물 또는 ‘기호 이미지’를 ‘나’라고 착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 기호 이미지가 위기에 봉착하여 무너졌을 때 그는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으나 기호학적으로는 사망한 존재이다. 정신병원 아니면 자살 외는 다른 옵션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위기에 처한 기업이나 정치인 또는 최근에 연속해서 발생하는 Kpop 연예인들이 자신의 삶을 자살로 결론을 내는 것이 아닐까? 프랑스의 지성계 거목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를 시뮬라시옹 시대로 규정한다. 시뮬라시옹은 또는 시뮬라크르는 ‘가상현실’ 모조품 ‘이미지’ 정도로 해석된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대중매체와 전광판, 인터넷 등을 통해 ‘이미지’로 범람한 사회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해상도를 갖는 이러한 이미지로 구축된 시뮬라시옹 세상이 현실을 대체하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진단을 내린다. 다른 말로 우리는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이 가진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다. 심하게 말하면 이미지에 목숨 걸고 사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 안에 본질이 존재할 여백은 없다. 이미지가 본질을 앞서 버린 사회가 우리가 매일 살아내야 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대 석학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철학적 사유는 이러한 현실을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게 해준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사유 이후에는 반드시 실천과 적용의 문제에 부딪힌다. 그것은 자유 여행가 각자의 몫이 되겠지만... 명품차를 종일 묵상하는 습관을 갖기는 아마도 어려울 것 같다. 사진: 뉴질랜드 풍경, 자연 조차 적극적인 관광 소비의 대상으로 이미지화 되어 버렸다. 우린 뉴질랜드의 본래의 모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우리의 상상력은 뉴질랜들을 알리려는 광고 이미지에 이미 점령당했기 때문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우리는 나와 당신의 본질을 모른다. 우리는 단지 서로에게 알려진 이미지를 교환하고 있을 뿐이다. 시뮬라시옹이 본질을 압도해 버린 세상에 살고 있다. 최무길 이민법무사, 통번역사,수필가 수필집 '무너지는 것들 속에서' 역서'블루 이코노미'

  28/10/2020
  문학지평

고요한 아침. 컴퓨터를 켜고 뉴스를 검색한다. 과거에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던 심해어가 수심 1만 미터가 넘는 심해에서 관찰되었다는 소식이다. 동영상을 클릭한다. 창백한 빛깔의 올챙이 같은, 아직 학명이 지어지지 않은 심해어는 컴퓨터 스크린을 가득 채운 채 천천히 유영하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해수어는 2만 여종. 이 중 수심 200미터 이하에서 서식하는 물고기들을 ‘심해어’라고 한다. 수심 1만 미터에서의 수압은 수면에서 보다 1천배 가량 높다. 바로 그런 가공할 만한 수압 때문에 심해는 달이나 화성의 표면만큼이나 인간의 접근이 어렵다. 아직도 심해 속에는 인간에게 발견되지 않은 어족들이 무수히 많다고 한다. 이번에 발견된 심해어의 경우도 엄청난 해수압을 견딜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된 잠수정에 의해 베일이 벗겨졌다. NASA의 허블 망원경이 인류의 전역사를 통해 가려졌던 우주의 비밀을 조금씩 벗겼듯이, 깊은 바닷 속 세계는 최첨단 심해 장비를 갖춘 현대 해양학자들에 의해 그 은밀한 곳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지상에서의 삶이 권태로 얼룩지고 지루해 질 수록 인간은 계속해서 우주 밖으로, 해저 밑으로, 탐사를 계속해 나갈 것이다. 깊은 바닷속이라고 삶이 다를까? 깊은 바다 속에서 빛이 미칠 수 있는 수심은 150미터 까지이다. 그 밑의 바다는 칠흑같은 어둠의 세계이다. 그 곳은 온도변화가 거의 없으며, 빛이 도달하지 않기 때문에 광합성 작용도 없고 따라서 식물이 살수 없는 공간이다. 결과적으로 먹이는 희귀하고 그나마 있다해도 구하기가 어렵다. 도대체 그런 곳에 생물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비요,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생존 경쟁은 더 정교해지고 치열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심해어는 한결같이 괴물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바닷 속 깊이까지 떨어진 얼마 안되는 생명의 잔해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다 보니 모두가 그렇게 그로테스크한 형태를 갖게 된듯 하다. 털이 숭숭한 거미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촌충과 같은 모습을 한 놈도 있다. 어떤 심해어의 경우는 거대한 눈이 흔적으로만 남았는데 발광 기능을 갖추어 먹이를 유인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으며, 어떤 심해어는 입이 몸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생존을 위해 먹어야 한다는 명제가 이렇게 절박한 모습을 띠게 한 것이다. 심해어들의 이러한 모습은 아무리 현대적인 미학을 기준으로 삼는다해도 아름답지는 않다. 한마디로 추하다. 아니, 악이 노골적으로 형상화된 모습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어쩌면 조물주가 세상을 창조할 때 지하 창고에 폐기해 버린 생물체가 이런 모양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창조의 원형이 바로 그런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원형적인 형태로 시작해서 수백만년에 걸쳐 점차 복잡하고, 우아하게, 급기야는 수학적으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황금비율에 부합되는 고등동물의 모습으로 진화된 것인지도. 심해어가 존재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심해어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또는 기생충처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생태계의 미세한 틈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은하계 저편에 또 하나의 은하계가 시작되고, 그 너머로 또 다른 우주가 시작되며, 그 곳으로 부터 발해지는 미세한 파동이 우리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다가 결국에는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어 버리고 마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은 신비의 영역이다. 그리고 신비란 밝혀지기 위한 것이 아니다. 수백만 년 동안 신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신비의 역할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심해 잠수정을 만들어 바다 속 구석 구석을 샅샅이 탐사하여 보여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심해의 어떤 세계는 알려지지않은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할 수도 있다. 바닷속의 비밀을 파헤쳤다고, 달 표면에 인간의 발자국을 찍었다고 과학과 미디어가 성급하게 팡파레를 울리는 것은 유치한 일이다. 원자의 궁극적 구조를 알고 나서 우리가 얻은 것이 핵에 의한 인류의 멸망이라는 위협 밖에 무엇이 있는가? 달 속에 계수나무가 없다는 것을 밝혔다고 해서 지구인 중 누가 더 행복해졌는가? 줄기세포를 이용해 복제한 장기를 사용해서 인간의 수명이 몇 년 더 연장되었다고 우리의 행복한 나날이 늘어날 것이라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신종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연구소가 신종 바이러스 감염의 온상이 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현대의 과학자들은 마치 불의 파괴력을 모르고 불장난치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자연과 우주는 아름답지만 동시에 신비로 가득차 있고 장엄하며 엄숙하다. 그리고 그 내부에 어떤 가공할 파괴력이 잠들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신은 사랑의 신이면서 동시에 파괴의 신이며 심판의 신이기도 하다. 단지 우리들은 탐욕에 눈이 가려져 있어 그것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내 속에서 끊임없이 조잘거리는 가벼운 한담과 잡담, 비판과 냉소의 소리를 잠시 잠재워 보자. 한 10 분만이라도. 역겨울 정도로 가벼운 자아의 채널을 끄고 우주의 방송에 우리의 주파수를 맞추어 보자.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우주의 배꼽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장엄한 베이스 음, 그 생명의 신비한 움트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컴퓨터 스크린의 심해어 동영상을 클릭해 본다. 하얀 올챙이 심해어가 유령처럼 너울거리며 춤을 추고 있다. 수 만년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춤이다. 동영상의 사운드 볼륨을 좀더 올려본다. ‘솨 …’ 하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 더 집중하고 그 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신의 숨소리다. 그 음성을 듣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최무길 번역가, 수필가 수필집 '무너지는 것들 속에서'

  14/05/2020
  문학지평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팔 분전 열한시, 현관으로 다가갔다. 니콜이란 걸 알고 있었다. 눈을 비비자 악어하품이 쏟아졌다. 그녀가 문을 붙잡고 천천히 닫았다. 그리고 십대 소녀처럼 쑥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새끼손가락을 깨물던 그녀가 눈을 감고 다가와 입술을 포갰다. 나는 금방 단단해졌다. 촉촉한 혀가 내 입술을 파고드는 동안 나는 판단했다. 올 것이 왔구나. 피할 수 있는 공식을 머릿속에 굴렸다. 그녀가 점점 몸을 밀착시키며 작은 손으로 내 등을 쓰다듬었다. 노브라셔츠 안의 유방이 단추처럼 오뚝 서서 내 피부를 찌르고 들었다. “생각해 봤어?”그녀가 물었다. “힘들 것 같아.” 내가 대답했다. “인권단체에 내 스타일 구겨버릴 작정이라면…… 알아서 해!” 그녀가 빡세게 말을 비틀었다. “내 환자들은……” “난민소년은 이미 죽었어. 소녀까지 죽게 내버려 둬야겠어? 입을 꿰맸다는 13살 난민소녀가 죽어간다잖아.” 그녀가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 수세미로 만들었다. “사이클론 예고는 어쩌고......” 나는 눈가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입김으로 훅 불어 떼며 말했다. “내일 중에 출발하면 사이클론은 피할 수 있을 것 같고.” “...................” “생각을 해봐. 사람이 죽어 가는데도 내버려 두는 주권과 권력의 통치술…… 살게 할 권리가 아니라 살게 할 인간애에서 계산해보자고. 죽음의 진열대에 세팅 된 사람들 어떻게 하는 게 인간의 기본이냐고?” 그녀는 이미 내가 가야 한다고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사랑하는 여자의 신념을 바꿔 놓을 수 없는 한, 이길 수 있는 남자가 존재할 리 없었다. 싸움에 이기려면 때로는 져야 했다. 불문곡절하고 항복 했다. 그동안 지나치게 아부적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행위가 끝난 그녀는 등을 돌리고 깊이 잠들었다. 나는 통 잠이 오지 않았다. 사이클론 예고는 둘째 치고 위급한 환자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내 환자들을 눈감고 난민수용소까지 가야할 처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 눈으로 보지 못한 13살 소녀의 존재가 도무지 실감나지 않았다. 엎치락뒤치락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순간 한 영상이 갈채를 받으며 수면위로 떠올랐다. 호주생활이 시작된 첫날이었다. 따져보면 첫사랑이 싹 텄던 날이었고, 내 안에서 알 수 없는 측은지심이 샘솟던 날이었다. 내 눈을 처음 붙든 것은 여자의 익사체였다. 익사자가 물을 토해 세계지도를 그려놓았고, 구조대가 엎어져 있는 몸을 뒤집자 아시아 소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이 모래로 도배 되어 있었지만 알 수 없는 친근함이 내 안에서 파도처럼 밀려왔고 그것은 낯설면서 친근했다. 세 명의 구조대가 겹친 두 손으로 익사자의 가슴을 규칙적으로 번갈아 박자를 맞추어 펌프질했지만 소녀의 숨결은 쉽사리 트이지 않았다. “자, 자, 환자에게 위험해요. 뒤로 물러나요.” 땅땅한 구조대가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멀대같은 구조대가 목에 파란 동맥을 세우며 소녀의 원피스 수영복을 배꼽 아래까지 끌어내렸다. 소녀의 유방이 튀어나왔다. 뜨거운 태양과 파란 창공을 향해 치솟은 부드러우면서도 견고한 원추형 유방을 본 내 동공이 압정에 박힌 것처럼 거기에 고정되었다. 수백 개의 시선이 그녀의 유방에 꽂혀 있다고 믿었고 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붉은색 패드 두개가 소녀의 젖꼭지 아래 빗장뼈 부위에 각각 붙었다. 자동심장충격기의 스위치를 누르자 상체가 활처럼 휘어졌다가 곤두박질쳤다. 순간 내 호흡도 헉 멎었다 뚫렸다. 가슴이 폭발할 것 같았다. 소녀의 숨이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불규칙적으로나마 호흡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누구도 사실을 설명하지 않았고 설명할 상황이 못 되었다. 나는 군중 사이에 끼어서 연거푸 마른 침만 삼켰다. 일초가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때 익사자의 부모가 뜨거운 모래밭을 캥거루처럼 뛰어왔다. 공중화장실에 갔던 그들의 손에는 딸에게 주려고 산 ‘쭈쭈바’가 들려있었다. 딸임을 확인한 중년여자가 불타는 모래밭에 돌처럼 넘어졌다. 내동댕이쳐진 쭈쭈바가 실신한 여인의 다리에 깔려 피처럼 녹아내렸다. 엄마가 급히 이빨로 그것을 물어뜯어 여인의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 광경들을 접하고 있는 내 마음은 새로 출시된 인터넷게임을 시작할 때처럼 복잡하고 미묘해졌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동그란 인간사설 사이가 찰나처럼 잠시 끊어지며 어떤 목소리가 튀었다. “아이 엠 코리언” 사슬이 닫히고 단발머리가 소녀가 동그란 프레임 선 안으로 돌출했다. 익사자의 아버지와 구조대 사이를 다리 놓는 투명한 영어 발음, 똘똘한 태도, 자신감 넘치는 단발머리의 몸짓에 내 입과 턱이 쩍 열리고 심장이 뛰었다. 내 가슴의 감각기관들이 칼에 벤 것처럼 가늘게 피를 뿜었다. 통역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조금 전의 알 수 없었던 친근함을 진원지를 알 것 같았다. 익사자는 나와 같은 13살이고 또 중학교 2학년이었다. 순간 그 동질감이 세계지도를 보는 것처럼 크게 느껴졌다. 익사자의 숨이 완전히 멎어버린 것 같았다.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들고 있는 익사자를 살리려는 구조대들의 처절한 전쟁도 거부하며 전사자처럼 검푸르게 변해갔다. 허옇게 풀어져 있던 눈동자가 커튼을 내리듯 눈꺼풀을 감았다. 내 숨은 점 점 더 빨라졌다. 그 때 멀리서 앰뷸런스 소리가 들렸다. 들것으로 소녀를 태운 코뿔소트럭이 폭풍처럼 달려갔다. 도로변에 정차해 있는 앰뷸런스를 향해 질주하는 코뿔소가 모래 회오리를 일으켰다. 그때 나는 모래 연기 사이로 왕골 비치백을 발견하는 것과 동시에 그 안의 노란 운동화를 발견했다. 한 손에 한 짝씩 운동화를 움켜쥐고 초인의 다리로 뛰었다. 터질 것 같은 허파의 숨을 뱉으며 닫히고 있는 앰뷸런스에 운동화를 던져 넣었다. 간발의 차이로 운동화 한 짝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나는 운동화 한 짝을 힘껏 차 날리며 소리쳤다. “제발, 노란 운동화를 신고 꼭 다시 세상을 힘차게 달려야만 한다고!” 순간 찢어지는 비명이 들린 곳은 내 등 뒤였다. 뒤로 날아간 운동화에 머리를 얻어맞은 통역이 내 쪽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익사자 가족과 구급요원 사이를 통역하며 코뿔소 트럭에 얹혀 먼저 도착한 통역이 경계석에 앉아 숨을 돌리던 참이었다. 놀란 나는 네 발 짐승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한참을 달리다 털썩 주저앉아서 다리를 쭉 뻗었다. 그리고 맨발의 모래를 털면서야 내 회색 운동화를 손에 들고 비치에서 기다리고 있을 엄마를 기억해냈다. 한 달 후 나는 다시 한 번 더 크게 놀랐다. 처음 등교하는 호주 중학교의 정문에서 통역을 만났다. 본다이 비치에서 사경을 헤매는 소녀를 목격했던 동공 두 쌍이 전기쇼크를 일으키며 최대한 크게 벌어졌다. 연애기술을 아직 제대로 연마하지 못한 채 그날 나는 위험구역에 입성을 한 셈이었다. 그 후 얼마나 많은 순간을 은밀한 기쁨과 슬픔을 그리고 스스로 미심쩍어하며 절망과 희망을 오르내렸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익사한 소녀를 목격하기 바로 전날 부모님과 함께 시드니에 도착한 한 것이다. 아빠가 시드니 지사에 발령을 받았기 때문이었는데 그 날은 새해 아침이었다. 시드니 공항 밖으로 나왔을 때 더위는 아빠와 함께 다니던 건조한 찜질방에 들어갔을 때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함에도 내 안에서 새로운 세계관의 질서가 재편성되느라 발길이 어지러웠다. 회사에서 본다이 동네에 아파트를 얻어 주었다. 아빠는 도착한 그 다음날부터 수출육가공 지사에 출근했다. 출근하는 아빠를 향해 불퉁거렸다. “사내자식이, 너도 어른이 되어 봐!” 엄마가 눈을 부라리며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섭씨 45도라니, 더위는 끔찍했다. 에어컨이 없는 아파트에서 짐을 풀다 엄마가 손을 놓았다. “이러다간 땀에 익사하고 말겠다, 해변에라도 나가자” 비치에는 다족다양한 사람들이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인터넷의 사진과는 사뭇 다른 이질감이 느껴지는 바다를 접하자 진짜 호주에 왔다는 실감을 들었다. 하지만 비키니차림의 풍만한 젖가슴을 보고 너무 쉽게 감동받는 내가 싫었고 너무 깊이 감동받는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얕은 물에서 수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물속에 발만 담근 채 서 있던 엄마가 놀라 위급해진 날치모양 펄쩍펄쩍 뛰며 손짓했다. 익사자나 마약사고라고 예감했다. 호주에 오기 전 본다이비치를 너무 많이 검색한 탓에 일어난 직감이었다. 이미 둥근 사슬로 엮이어 있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본 모래 바닥에는 직감을 적중시키며 익사체가 엎어져 있었다. 구조대가 막 시체를 돌려 눕히려던 참이었다. 훗날 정리된, 익사자와 니콜 그리고 내 나이가 미리 계획된 우연처럼 똑 같았다. 진행형 서술처럼 그로부터 15년이 움직였다. 다음날은 13살 소녀를 치료하러 난민수용소로 가야 될 운명의 별이 머리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 익사자 소녀의 사건을 목격했던 날로부터 삼 년 후 지사의 업무가 끝난 아빠는 귀국했지만 나는 호주에 남았다. 피부전문의가 된 나에게는 그때 통역했던 니콜이 여자 친구로 내 옆에 있었다. (계속) 테리사 리 소설가 15회 재외동포 문학상 소설대상, 11회 민초문학상 대상 수상 소설집

  20/01/2021
  문학지평

최무길 우선 재미있다. 구성이 치밀하다. 장르가 블랙코미디 아닌가. 그래서인지 이 영화가 좌파 앵글을 갖고 제작되었다는 고정관념이 틀렸다는 것을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10분도 채 안 되어 시인하게 된다. 영화는 극부층과 극빈층을 대조시키면서 전개된다. 2020년 현재 서울 경기 지역에서 반지하 또는 지하에 사는 세입자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김 기사(김기택) 가족은 집이 없는 하류층 가족들을 대표한다. 반면에 박 사장(박동익) 가족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자기 사업을 일으켜 성공한 사업가,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승자 계층을 대표한다. 박 사장이 사는 아름다운 저택은 유명 건축가 남궁 현자가 직접 설계하고 시공한 집이다. 건물의 자재와 미관도 훌륭하지만, 내부 실내 장식이나 편의성 그리고 여유로운 공간적 배려 등등이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모던한 건축물이다. 그래서 박 사장의 저택은 한국의 많은 젊은 사람들에게 코리언 드림이며 종착점을 상징한다. 건물은 건축 미학을 넘어 한국 사회 구조를 그대로 반영하기까지 한다. 저택 지하에는 이미 파괴와 자멸을 가져올 수 있는 기생충 가족( 가정부 국문광 부부)이 몇 년째 기생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숙주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지금의 코비드 19 바이러스처럼. 문제의 발단은 더욱 진화되고 그래서 더욱 강력하고 대담한 새로운 기생충 변종이 숙주의 몸에 파고들면서 시작된다. 숙주는 무력하게 그리고 순진하게 이 신종 기생충에게 자기 몸을 허락하지만 새로운 기생충은 동일한 숙주 몸 안에서 뜻밖에 기존의 기생충과 맞닥뜨려 대결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어서 발견하게 되는 놀라운 사실! 이 저택은 3개의 층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지상층과 지하실 그 밑의 비밀 통로로 연결되는 지하 벙커! 한반도 내 핵전쟁의 발발 가능성 때문에 건축 설계가 남궁 현자 씨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전쟁 대피용 지하 벙커를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유명인사라는 사회적 위치 때문에 새 집주인으로 입주하는 박 사장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두 주인을 섬기게 된 전 가정부는 진술한다. 영화 속에서 하나의 중요한 무대가 되는 이 어두컴컴한 지하 벙커는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똬리를 튼 전쟁에 대한 악몽과 공포를 상징한다. 특히 전쟁이 나면 잃어버릴 것이 많은 가진 자들의 공포는 세인의 상상을 초월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서울 호화 단독 주택 아래에는 이런 비슷한 전쟁 대피용 지하 벙커가 많이 지어졌을 것이라는 추측도 들게 한다. 그런데 지하에는 놀랍게도 또 다른 벙커 인생이 서식하고 있었다. 수년 동안 햇빛도 보지 못하는 수인 아닌 수인, 그는 전 가정부가 두 주인 몰래 숨겨놓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는 지하에 살면서 아내가 밤마다 날라주는 주인의 냉장고에서 훔친 음식으로 연명해 왔다. 박 사장은 물론 가정부가 조금 '많이 먹는 편'이라는 불만이 있기는 하지만 그녀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인정하고 묵인하고 더는 의심치 않는다. 숙주와 기생충의 생태학적 공존이 이루어진 셈이다. 물론 상대방의 존재를 서로 모르고 있다는 전제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조건 하에서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숙주와 기생충의 공생은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장면이다. 자연은 사회를 그리고 사회는 자연을 서로 미러링하고 있다고 할까? 인도에는 4개의 뚜렷한 카스트라는 신분 제도가 있다. 제사장 계급인 브라만으로 시작하여 크샤트리아, 수드라, 바이샤가 그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이름이 주어져 있지 않은 제5의 계급이 존재한다. 불가촉천민을 말한다. 이 불가촉천민은 마치 바이러스처럼 접촉하면 부정을 타고 사회 전체가 병들고 타락한다는 믿음이 있어 인도인들은 이 천민들을 격리하고 이들과의 접촉을 피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한마디로 사람의 모습만 하였지 인간 이하의 존재인 셈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스트 제도는 긴 역사를 가진 인도라는 복잡다단한 다민족 다종교 사회를 유지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한데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는 카스트 제도는 자본주의의 사회에도 존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을 구별시켜주는 매개체는 돈이다. 카스트보다도 훨씬 다양하고 복잡한 차등 구조가 자본주의 계급사회이다. 돈 앞에서는 법도 권력도 허리를 굽힌다. 많은 한국인이 자신의 실력 보다 부풀려서 스펙을 제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야 좀 더 나은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명함이 왜 그렇게 세련되고 화려하며 많은 직함이 인쇄되었는지 이해가 간다. 물론 영화에서는 위조된 졸업장, 가짜 명함과 천민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 덧칠한 화장과 가짜 교양, 가짜 어투로 나타난다. 학벌과 직함과 교양은 내가 한국 사회에서 어느 계층에 속한 사람인지 그 계급을 보여주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신분증은 프린터로 교양은 유튜브에서 얼마든지 주워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맞추어 적절하게 장식할 수 있다. 어차피 인생은 연극 아닌가! 1997년 후반 한국은 IMF 상황을 맞는다. 그러한 경제적 격변은 많은 박 사장 가족을 김 기사 가족으로 만들었다. 중산층은 엷어지고 중하층이 넓어지고 두터워졌다. 그 이후 지금까지 한국 사회 내에서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무해한 자본주의에서 급속하게 유해한 자본주의로 변형된다. 실업률이 늘고 취직이 되었지만, 평생 돈을 모아도 자기 집을 장만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적어도 서울 지역에서. 돈을 벌어서 박 사장의 저택을 사겠다는 김 기사 아들의 꿈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중산층이 사라진 자본주의 토양에서는 유해한 좌파나 급진 국가 사회주의가 발흥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다. 미국에서는 중산층 계급에서 중하위로 떨어진 급진화된 우파 세력을 등에 업은 부동산 재벌 트럼프가 정치 전면에 나타났고 한국에서는 대학 졸업장을 쥐고도 택배회사나 아니면 임시직에 머물러 조직적인 착취를 감내해야 하는 3, 40대 젊은 불만층을 등에 업은 좌파 정부가 들어선다. 이른바 촛불 세력의 출현이다. 더는 신분 이동이 지난해져 버린 사회에서는 계급 간 불신과 증오밖에 남는 게 없다. 다윈의 정글 법칙만이 남는다. 음습한 반지하에 살고 있어서 늘 썩은 행주 냄새를 온몸에 달고 살아야 하는 김 기사 가족이 맑은 공기와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샤넬 향수나 에스프레소 커피 향기가 배어있는 박 사장 부부를 좇아갈 현실적인 방도는 거의 없다. '사기'와 '음모' 외에는. 천민 특유의 저속과 천박함과 속임수와 범죄 그리고 어두운 정서가 몸에 땀 냄새처럼 배어있는 반지하 주민들의 작은 혁명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혁명은 비극적인 유혈로 끝난다. 사회적 패자는 물질적으로 가난할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영적으로도 가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김 기사는 서서히 깨닫는다. 부의 기초가 튼튼해야 도덕과 정직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현실을 김기택은 눈으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 보며 심장으로 느낀다. 그러한 깨달음은 곧 이미 일기 시작한 질투와 분노에 불을 지른다. 혁명의 에너지는 바로 이 부자에게서 받는 모멸감과 분도 그리고 건널 수 없는 간극에 대한 질투이다. 그 질투는 결국 김기택의 손에 부엌칼을 쥐여준다. 그리고 흉기는 박 사장의 가슴에 꽂혀 버린다. 카인과 아벨의 해묵은 이야기가 다시 한번 반복된 셈이다. 영화는 자신들의 원 처소인 반지하 주택으로 돌아온 김 기사 아들의 독백으로 끝난다. 그리고 분노에 가까운 질투로 가득 찬 혁명은 현재진행형이다. 영화 속에는 음식 모티프가(음식은 기생충이 숙주에게서 훔쳐먹는 자양분) 많다. 그중 압권이 짜파구리이다. 갑작스레 쏟아진 폭우로 캠프를 취소하고 예정보다 일찍 돌아오는 박 사장 부인이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가정부로 위장해서 일하고 있는 김 기사 아내에게 짜파구리를 주문한다. 아마 텐트 속에서 먹도록 기획했던 음식이었는지 모른다. 예상치 못한 기상 변화로 인해 실행하지 못한 짜파구리를 집에 도착하자마자 먹어야겠다는 매우 로맨틱한 발상이며, 아무튼 그것은 박 사장 가족이 즐기는 게임의 연장이다. 아들의 생일 파티를 위해 인디언 전쟁 게임을 기획했듯이…말할 것도 없이 인디언 게임은 미국 백인 개척자들의 인디언 학살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짜파구리가 뭔가? 기생충 계층의 식탁에나 상시로 올려지는 음식이다. 빈자에게는 생존을 위한 양식이지만 부자는 가끔 게임 삼아 재미로 먹는다. 빈자에게는 생존의 문제가 부자에게는 재미이고 게임이다. 그게 짜파게티와 너구리 라면을 합성한 짜파구리이다. 물론 부자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조소가 양념으로 들어간 음식이다. 정말 먹어보면 맛있다. 청와대에서 있었던 아카데미상 수상 축하 파티 석에서까지 제공된 메뉴이다. 이미 슈퍼 부자가 된 봉준호 감독의 입맛에 딱 맞았을 것이다. 가난했던 무명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러나 영화를 제대로 감상했다면 짜파구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이다. 그것은 가난한 자의 최후의 자존심이고 자산이며 로고스로 작동하는 '가난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받은 후 한동안 부자들이 집성촌을 이룬 강남의 한 고급 레스토랑의 인기 메뉴가 되는 명성을 누린 짜파구리! 그렇다면 영화 기생충은 또 하나의 부자들의 고급문화 놀이였던가? 아직도 반지하에 사는 천민들을 조롱하는. 최무길 이민법무사, 통번역사, 수필가 수필집 '무너지는 것들 속에서' 역서'블루 이코노미'

  03/09/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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