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아침. 컴퓨터를 켜고 뉴스를 검색한다. 과거에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던 심해어가 수심 1만 미터가 넘는 심해에서 관찰되었다는 소식이다. 동영상을 클릭한다. 창백한 빛깔의 올챙이 같은, 아직 학명이 지어지지 않은 심해어는 컴퓨터 스크린을 가득 채운 채 천천히 유영하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해수어는 2만 여종. 이 중 수심 200미터 이하에서 서식하는 물고기들을 ‘심해어’라고 한다.
수심 1만 미터에서의 수압은 수면에서 보다 1천배 가량 높다. 바로 그런 가공할 만한 수압 때문에 심해는 달이나 화성의 표면만큼이나 인간의 접근이 어렵다. 아직도 심해 속에는 인간에게 발견되지 않은 어족들이 무수히 많다고 한다. 이번에 발견된 심해어의 경우도 엄청난 해수압을 견딜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된 잠수정에 의해 베일이 벗겨졌다. NASA의 허블 망원경이 인류의 전역사를 통해 가려졌던 우주의 비밀을 조금씩 벗겼듯이, 깊은 바닷 속 세계는 최첨단 심해 장비를 갖춘 현대 해양학자들에 의해 그 은밀한 곳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지상에서의 삶이 권태로 얼룩지고 지루해 질 수록 인간은 계속해서 우주 밖으로, 해저 밑으로, 탐사를 계속해 나갈 것이다.
깊은 바닷속이라고 삶이 다를까? 깊은 바다 속에서 빛이 미칠 수 있는 수심은 150미터 까지이다. 그 밑의 바다는 칠흑같은 어둠의 세계이다. 그 곳은 온도변화가 거의 없으며, 빛이 도달하지 않기 때문에 광합성 작용도 없고 따라서 식물이 살수 없는 공간이다. 결과적으로 먹이는 희귀하고 그나마 있다해도 구하기가 어렵다. 도대체 그런 곳에 생물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비요,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생존 경쟁은 더 정교해지고 치열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심해어는 한결같이 괴물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바닷 속 깊이까지 떨어진 얼마 안되는 생명의 잔해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다 보니 모두가 그렇게 그로테스크한 형태를 갖게 된듯 하다.
털이 숭숭한 거미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촌충과 같은 모습을 한 놈도 있다. 어떤 심해어의 경우는 거대한 눈이 흔적으로만 남았는데 발광 기능을 갖추어 먹이를 유인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으며, 어떤 심해어는 입이 몸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생존을 위해 먹어야 한다는 명제가 이렇게 절박한 모습을 띠게 한 것이다. 심해어들의 이러한 모습은 아무리 현대적인 미학을 기준으로 삼는다해도 아름답지는 않다. 한마디로 추하다. 아니, 악이 노골적으로 형상화된 모습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어쩌면 조물주가 세상을 창조할 때 지하 창고에 폐기해 버린 생물체가 이런 모양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창조의 원형이 바로 그런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원형적인 형태로 시작해서 수백만년에 걸쳐 점차 복잡하고, 우아하게, 급기야는 수학적으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황금비율에 부합되는 고등동물의 모습으로 진화된 것인지도.
심해어가 존재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심해어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또는 기생충처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생태계의 미세한 틈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은하계 저편에 또 하나의 은하계가 시작되고, 그 너머로 또 다른 우주가 시작되며, 그 곳으로 부터 발해지는 미세한 파동이 우리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다가 결국에는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어 버리고 마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은 신비의 영역이다. 그리고 신비란 밝혀지기 위한 것이 아니다. 수백만 년 동안 신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신비의 역할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심해 잠수정을 만들어 바다 속 구석 구석을 샅샅이 탐사하여 보여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심해의 어떤 세계는 알려지지않은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할 수도 있다. 바닷속의 비밀을 파헤쳤다고, 달 표면에 인간의 발자국을 찍었다고 과학과 미디어가 성급하게 팡파레를 울리는 것은 유치한 일이다. 원자의 궁극적 구조를 알고 나서 우리가 얻은 것이 핵에 의한 인류의 멸망이라는 위협 밖에 무엇이 있는가? 달 속에 계수나무가 없다는 것을 밝혔다고 해서 지구인 중 누가 더 행복해졌는가? 줄기세포를 이용해 복제한 장기를 사용해서 인간의 수명이 몇 년 더 연장되었다고 우리의 행복한 나날이 늘어날 것이라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신종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연구소가 신종 바이러스 감염의 온상이 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현대의 과학자들은 마치 불의 파괴력을 모르고 불장난치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자연과 우주는 아름답지만 동시에 신비로 가득차 있고 장엄하며 엄숙하다. 그리고 그 내부에 어떤 가공할 파괴력이 잠들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신은 사랑의 신이면서 동시에 파괴의 신이며 심판의 신이기도 하다. 단지 우리들은 탐욕에 눈이 가려져 있어 그것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내 속에서 끊임없이 조잘거리는 가벼운 한담과 잡담, 비판과 냉소의 소리를 잠시 잠재워 보자. 한 10 분만이라도. 역겨울 정도로 가벼운 자아의 채널을 끄고 우주의 방송에 우리의 주파수를 맞추어 보자.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우주의 배꼽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장엄한 베이스 음, 그 생명의 신비한 움트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컴퓨터 스크린의 심해어 동영상을 클릭해 본다. 하얀 올챙이 심해어가 유령처럼 너울거리며 춤을 추고 있다. 수 만년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춤이다. 동영상의 사운드 볼륨을 좀더 올려본다. ‘솨 …’ 하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 더 집중하고 그 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신의 숨소리다. 그 음성을 듣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최무길
번역가, 수필가
수필집 '무너지는 것들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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