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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은 눈앞의 장애물을 뛰어넘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마약의 게임에서 목표 달성은 포식자가 피포식자를 손아귀에 넣는 일이다.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을 추측하기란 식은 죽 먹기일 테니까.  그때까지도 소년이 아테나로부터 그것을 덥석 받지 않고 있었으나, 극도로 초조해진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거푸 마른 침을 삼켰다.  동영상을 분리해서 저장해야 내게 유리하게 경찰에 신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손가락을 달달 떨어가며 앨범(1)을 닫고 앨범(2)을 만들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전조등을 밝힌 차가 다가와 급히 차선을 바꾸었다. 내 차를 뒤에서 박아버릴 것처럼 밀어붙이는 사이, 소년이 스케이트보드를 옆구리에 낀 채 달려 나갔다.  차에서 튀어나온 사내가 소년을 추적했다. 쇠줄이 절커덕거리는 소리가 어둠속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들렸다. 나는 차문을 박차고 화살처럼 뛰어나갔다. 오랜 생활지도교사의 몸에 달라붙은 관성이 재빠르게 작동해 주었다. 나는 동영상을 찍으면서 그들을 추적했다. 앞에서 달리는 소년과 추적하는 사내가 파도처럼 출렁거리며 액정에 담기고 있었다. 미치광이 사내가 소년을 이삼 미터까지 따라붙었다. 그가 막 소년의 뒷덜미를 잡으려는 순간 나는 고함을 질렀다.  “그만두지 못해!”  뒤돌아선 사내의 얼굴은 달빛을 받아 파리했다. 사내가 어딘가에서 소년과 아테나를 감시하고 있었다면 나까지도 염탐했을 것이다. 나 외에 사람의 그림자라곤 찾아보기 힘든 곳이었으니까. 나는 재빠르게 휴대폰을 호주머니 집어넣었다. 아테나는 어디로 줄행랑을 놓아버린 것인지? 헉헉거리며 다가온 사내의 입에서 허연 김이 뿜어져 나왔다. 대머리에 듬성듬성 자란 수염과 우람한 몸의 사내를 보고 악마와 한 판 싸우리라 각오를 했다. 그가 두 손을 마주 비벼대며, 찌푸린 표정으로 나를 향해 가소롭다는 듯이 희죽 희죽 웃었다. 곧추세운 눈썹을 실룩거리더니, 충혈이 된 눈알을 뒤집고 비명을 지르며 나를 향해 덮친 건 그 순간이었다. 다짜고짜 내 멱살을 잡고 바짝 조이며 내 주머니의 휴대폰을 빼앗아 콘크리트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의 발에 짓밟힌 기기가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날아오는 사내의 주먹을 가까스로 피했으나 연이어 발길이 날아왔다. 무서운 힘이었다. 내 인생에 처음 경험해 보는 무지막지한 마약의 폭력에 나는 찍, 하고 길바닥에 넘어져 나뒹굴고 말았다.  내 두려움과 악마 사이엔 아무 방패막이도 없었다.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와 맞서다간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죽은 것처럼 엎드려 쓰러져 등짝을 짓밟거나 말거나 이를 악물고 견디었다. 신음을 토하며 꿈틀거리다가 무서운 한기를 느꼈고 곧 근육에 아무런 감각이 없어졌다.  어떻게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너덜너덜한 휴대폰을 주워들고 차를 몰고 집까지 올 수 있었는지? 그건 아직도 의문이다. 어떻게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정아나, 밥 묵었나? 밥 마이 묵어야 한데이!  윤선생이 딸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안방으로 들어왔다.  -아이고 정생, 이기 우찌된 일인교. 윤선생이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헷 참, 정생 날 원망하지 마이소. 사모님이 하도 한인들 없는데 점포를 얻어달라고 해서. 존덴 죄다 한인들이 차지하고 이서서 고만.  -아, 괜찮습니다. -아임더, 정생! 내가 바시면 그 가시나를 고마 팍 발바 문질러 부리실낀데.  -관심을 가진 제 잘못입니다.  -지 혼자 처묵고 콱 디져버리지. 지새끼한테 똥 파라라꼬 길가 내모는 문디새끼! 거기 인간인교. -제가 모른 척 했어야 하는데…….  -금마들 파는 야기 어데서 온긴지 아는교. 마 배떼지에 새비너코 와가지고 똥구녕으로 배터낸 긴지도 우째 알겠는교. 아이머 여편네들 얼라집에 새비너코 와 피무치고 나온긴지. 더러번 김더. 헷 참.  아내가 도라지차를 들고 들어왔다.  -사모님, 이제 다 잘 될낌더. 심카드 경찰에게 넘기고 오는 길임더. 그새끼는 깜빵 갈 끼고, 그 가시나는 미성년자니까 훈계만 하고 보낼끼고요.  -아나 아빠가 살아서 돌아온 것이 기적입니다. 아내가 말했다.  -갸들 잔인한 거 말도 모탐더. 그 새끼 나오기 전에 점포를 한인들 마이 사는데 옴기야 될거 가심더. 통증이 가라앉자 잠이 쏟아졌다. 진통제에 마약성분을 얼마나 강하게 처방했는지, 정신이 몽롱하더니 두 사람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다 끊어졌다.   몸은 망가졌지만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운 느낌이었다. 전직교사가 뭔가를 해냈다는 자긍심에 헛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지역신문의 구석구석을 읽어본다든가, 목발을 짚고 경찰서 안을 기웃거린다든가, 정신의 힘으로 간신히 견디고 있었다. 제우스와 아테나는 경찰조사를 받는 것 같았다.  윤선생이 경찰에 넘겼다는 심카드의 동영상(1)과 동영상(2)는 기계의 특권인 사실을 똑똑하게 보여주었을 테니까. 거기다 아테나의 자백을 받아내면 제우스를 잡아 구속하는 것은 땅 짚고 헤엄치기일 것이다.  이민을 온 후 처음으로 자랑스러운 일을 한 것 같았다. 아나를 잘 키우고 숍을 운영하며 평범한 이민생활을 하리라 다짐했다. 한국정부가 준 장학금으로 취득한 학위와 그리고 교사자리를 팽개치고, 무책임하게 이민을 온 것에 대한 죄의식도 조금이나마 반감되는 것 같았다.  길거리 청소년지도를 하다 붙잡은 학생이, 어린 마음에 어쩌다 불량한 일을 저질렀지만, 내 교훈 한 마디에 반성을 하고 행동에 변화를 보일 때면,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마음이 아파서 상담실에 숨어서 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옛일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사건이 있던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상처도 좀 가라앉은 것 같았고 침대에서 보내자니 답답해 환장할 지경이었다. 숍에 나가는 아내의 차에 올라탔다. 꼴이 말이 아니라 손님들 앞에 나가지도 못하고 창고에서 하루를 견디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거기에 가보고 싶다고 아내에게 억지를 부렸다. 범죄자가 현장을 확인하고 싶은 심정 같은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날의 그 거리가 나를 잡아끌었다. 또 직접 내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성이 안 풀렸다. 아내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밤에 겪은 고통의 쾌감이 되살아났다. 문득 낯설게만 느껴지는 거리에는 스케이트보드나 자전거를 타는 청소년들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한 편으론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했다는 자부심이 내부 깊숙한 곳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길거리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마약(street drug), 한 번 손을 대게 되면 장기가 파괴되고 살이 썩고 뇌가 녹아버려도 끊지 못한다. 청소년을 보호하는 일이 특별히 나만의 일이야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한 행동이 전직의 책임감이든, 시민의 양심이든, 가족애든, 세상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어깨가 무거웠다. 교육은 가장 높은 순간에서 판단해야하고 범죄자는 가장 낮은 순간에서 판단할 뿐이다, 생각을 하다 담배를 꺼내고 말았다. 찢어지는 아내의 눈길을 외면하며 불을 붙였다. 몸이 완쾌되면 아나를 데리고 그 거리에서 스케이트보드를 배워보고 싶다는 청소년 같은 꿈이 솟구쳤다. 아테나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제우스도 없었다. 그는 이미 구속이 되어 있을 터였다.  거리가 어둑어둑해지자 갑자기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날 밤도 그랬다. 밤이 되면 기이할 정도로 거리가 정적에 싸이는 지역이었다. 쥐구멍 같은 엘리자베스 서킷을 돌아 나오는데 무의식적으로 내 눈을 잡아끄는 끈끈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눈을 비볐다. 잘 못 본 것인가? 고개를 몇 번 흔들었다. 다시 응시했다. 아테나였다.  모르는 소년을 붙들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분명 아테나였다. 나는 아내의 휴대폰을 잡아채서 그 장면을 서너 번 찍으며 소리쳤다.  -빨리, 빨리……. 출발해, 빨리! 섬뜩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디서 제우스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현기증이 일어났다. 그럼 그렇지! 아테나는 제우스의 마리오네트 인형이니까, 제우스와 끊을 수 없는 관계였다. 코너를 돌면서야 고개를 뒤로 빼보았다. 제우스라 착각했던 남성은 다행히 환영에 불과했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지만 자정이 되도록 자반뒤집기를 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이 들었다가도 식은땀을 흘리며 몇 번이나 깨어났다. 온몸의 상처가 제우스에게 짓밟히던 날처럼 뒤틀리며 고통스러웠다.  전화벨이 울었다. 깊은 잠에 골아 떨어져 있던 아내가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안절부절 못하며 “예스, 예스.” 대답만 하다 급히 전화를 끊은 아내는 황급히 아나의 방문부터 열어보고 “쉬!” 하며 손가락을 입술에 세웠다. 추리닝에 다리를 끼워 넣느라 꼬꾸라지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아내는, 어딘가에 전화를 했다. 밖으로 나온 아내는 지갑과 휴대폰을 집어 들고 소 닭 보듯 힐끔 한 번 내게 눈길을 주었다.  -도대체 누구야? 그녀는 들은 척 만 척 했다.  잠시 후 택시가 도착했다. 그녀는 평소 밤눈이 어두웠다. 맨발에 잠옷 바람으로 목발을 짚으며 따라나서는 나를 아내가 밀쳐버렸지만, 치맛자락을 붙들고 택시에 탔다.  -어디 가는 거야? 몇 차례 물어도 아내는 꿀 먹은 벙어리 모양 묵비권을 행사했다.  소방차 한 대가 택시 뒤에서 요란하게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왔다. 택시가 갓길로 빠져 길을 비켜주었다. 그때서야 불난 숍에 소방대원들이 거인의 오줌 줄기 같은 물총을 쏘아대며 불길을 잡고 있는 광경이 한 눈에 보였다.  숍 앞의 4차선 도로는 이미 물바다였다. 단층 슬레이트지붕을 뻥 뚫은 화마는 멋지게 타오르고 있었다. 일주일 새에 배가 볼록해진 달이 신나게 불구경 하는 것을 올려다보며 나는 껄 껄 껄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당신 미쳤어요? 아내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왜! 나는 웃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는 거요?  -누가 어디 웃지 말랬어요! 웃으려면 뭘 좀 알고나 웃어요. 이렇게! 이렇게요. 아내가 눈알을 희번덕거리더니 흰자위를 뒤집어서 헤실, 헤실 웃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웃음이 싹 달아났다. 섬뜩하고 오싹해서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찰나, 아내의 모습에서 청소년 때 보았던 실성한 여자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그 미친 여자는 동네에 불이 날 때마다 빠지지 않고 제일 먼저 나타나, 불길의 리듬에 맞추어서 덩실 덩실 춤을 추며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가려고 했다. 쫓아버려도 가지 않고 불꽃을 보고 헤실, 헤실 웃으며 환장을 하는 여자를 나무에 묶어 놓고서야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택시 기사가 입을 벌리고 뜨악하게 두 사람을 번갈아 흘겨보더니 고개를 흔들며 떠났다. 나는 아내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았다. 카메라를 클릭하고 동영상을 찍었다. 난생 처음 보는 아내의 기묘한 행동을 놓칠 수가 없었다.  아내가 불속으로 뛰어 들어 갈 것처럼 허적허적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목발을 짚고서 동영상을 찍으며 아내를 따라잡으려다 몇 번이나 넘어졌다. 미친 듯이 춤을 추며 타오르는 화마를 향해 빠르게 나아가는 아내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최대한으로 줌을 넓혀야 했다. 그녀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다 다시 넘어졌다. 넘어진 채 자욱한 잿빛 연기 속에서 아내의 어깨가 들썩거리는 액정 장면을 감상했다. 춤인지 오열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손가락을 떨어가며 동영상을 멈추지 않았다.  집을 떠난 새는, 두고 온 고향의 둥지를 그리워하느라 제 둥지가 불타고 있는데도 불구경에 미쳐서 날개를 훨훨 저어서 불길을 살린다더니, 저 여자가……. 나는 중얼 중얼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한 참을 신명나게 찍다가 내 눈가를 만져보니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연기 때문일까? 알 수 없었다. (끝)테리사 리 소설가15회 재외동포 문학상 대상수상11회 민초문학상 대상수상소설집 <비단뱀 쿠니야의 비밀> <어제 오늘 내일>   

  그저께
  문학지평

 가로등 뒤에서 토막 난 다리 한 개가 툭 튀어왔다. 맨살 다리였다. 오늘날 대다수의 충동범죄가 약물중독이 그 원인라고 생각하다 놀라서 움찔했다. 부리나케 차문을 열고 튀어나가다 그만 바닥에 떨어져 있던 담배를 밟고 말았다. 운동화발로 담배를 싹싹 문질러 비비는데 번개처럼 여긴 한국이 아니고, 나는 더 이상 생활지도교사가 아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사건현장을 응시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가로등 뒤에 서 있던 누군가가 스케이트보드 위에 올린 다리 하나를 앞으로 불쑥 내민 것이었다. ‘무릎보호대’와 ‘가로등그림자’가 교묘하게 칼끝처럼 서로 맞물려서 내 눈에 마치 토막 난 다리처럼 보였고, 뱀의 머리가 그려진 짙은 바탕의 스케이트보드가 밤이라서 내 눈이 그만 착시를 일으켰다.    목덜미를 긁으며 꼬리 내린 개처럼 차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무성한 가로수가 충분히 차를 가리고 있었지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CCTV를 확인했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된 나는 크리넥스 한 움큼을 뽑았다. 카메라의 눈들만 남기고 휴대폰을 가렸다. 무음 닌자 캠 어플의 비밀번호를 푼 다음 옴짝달싹하지 않고 앉아서 액정을 지켜보았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 대각선 10미터 전방이 액정에 떴다.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상대는 소녀였다. 옆얼굴을 보다가 다시 한 번 화들짝 놀랐다. 아테나가? 설마하니! 그녀가 갑자기 허리를 접는 바람에 더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녀를 아테나라고 단정해 버렸다. 그러자 본능적인 호기심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친구지간일 수도 있어. 아냐, 두 사람의 하는 짓거리를 봐! 친구지간이라고 하긴 너무 이상하잖아. 나는 혼잣말을 지껄였다. 액정이 그들의 행동을 거짓 없이 보여주었다. 귓불을 꼬집자 전직의 직감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친구지간이면 자연스럽게 장난을 치거나 총알보다 더 빠르게 조잘대기 마련이다. 하지만 둘의 행동은 눈을 닦고 보아도 기이했다. 나는 못을 박듯 손가락에 힘을 눌러 줌을 조절했다.    갈수록 둘의 행동거지가 내 마음을 불안하게 흔들었다. 더구나 그곳은 푸시어(마약 딜러)가 판을 치는 구역이었다. 심지어는 열 살 미만의 아이들도 마약을 들고 거리로 나선다고 풍문으로 들었으며,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경찰 사이렌 소리를 들을 때면 진저리가 쳐졌다. 마약 상습자가 우글거리는 위험한 구역에 숍을 낸 일을 후회하기도 했다. 윤선생을 원망할 때도 많았다.    왜, 녀석이 초조하게 손을 배배꼬다가, 어깨를 움찔거리고, 그러다 한 쪽 다리를 떨어대는지? 옆구리에 낀 스케이트보드를 메뚜기처럼 까딱거리다가, 발바닥을 땅에 비벼대며 허리를 비트는지?    녀석의 표정은 얼음처럼 꽁꽁 얼어 있었다. 상대의 말에 귀를 곧추세우고 서 있는 소년은 호기심과 두려움이란 두 가지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소년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제발 옆구리에 끼고 있는 스케이트보드를 땅에 내리고 손살 같이 도망가! 나는 한 마디 교훈을 던지고  싶어서 숨통이 막힐 지경이 되었다.    마침내 소년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스케이트보드를 탁, 하고 바닥에 내렸다. 내 직감이 틀리지 않다면, 왼발을 보드에 올리고 오른발로 콘크리트 바닥을 밀고 달려갈 차례였다. 성능 좋은 카메라에 달린 눈들이 잡아주는 소년의 행동을 보자 희망이 솟구쳤다. 땀에 젖어 끈적거리는 액정을 휴지로 닦다 전화벨 소리에 죄지은 사람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빠! 어디야, 늦게 생겼잖아.    -어, ……어, 나, 나……, 곧 도착한다. ……금방, 지금 집 앞이야.  손가락을 떨며 거짓말로 둘러댔다. 껌뻑껌뻑하더니 가로등에 파란불이 들어왔다. 아테나가 맞았다. 파리한 불빛을 받은 아테나가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숨을 골랐다. 그리고 내 직감에 스스로 감동했다.    아테나는 수시로 숍에 나타나 옷과 스케이트보드와 신발 그리고 모자와 액세서리들을 사갔다. 완벽한 곡선미를 가진 야릿야릿한 다리, 또 도톰한 입술에는 항상 립글로스가 반짝거렸고, 거기다 씀씀이가 헤퍼서 부유한 집의 딸이라 생각했다. 비교적 아테나 브랜드만 구입하기에 그녀를 아테나로 기억해 버렸다. 그녀는 요즘 세상에 흔치않은 꼬깃꼬깃한 지폐로 지불하는 별난 단골고객이었다.      드문 일이긴 하지만 아테나는 아빠에게 줄 선물이라며 제우스 브랜드 스노우보드 용품을 사 가기도 했다. 언젠가는, 티브이에서 보았던 낯익은 의사가 숍에 들어왔다. 마약중독자 재활센터에 수감된 아들을 방문하러 가는 길인데, 후디를 찾고 있다고 했다. 기이한 우연처럼 마침 아테나가 손에 들고 있던 제우스 브랜드가 그가 찾는 사이즈였다. 의사의 표정이 하도 간절해서 내가 나서서 아테나를 설득했다. 아테나는 괜찮다며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도 그녀는 웃기도 잘 웃고 입심도 뛰어났다.  아테나는 사건 전날, 문을 닫기 직전에 나타나 뱀의 머리가 그려진 스케이트보드와 방패와 창이 그려진 티셔츠 그리고 올빼미 연속무늬 운동화를 사갔다. 그래서 기억이 생생했다. 왁스와 휠도 함께 사간 것까지 잊지 않았다.  홍학의 다리 같은 아테나의 맨살다리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가 걸음을 뗄 때마다 짧은 스커트가 들썩거렸다. 시간이 갈수록 ‘몰카’를 찍는 흥분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는 내가 이상했다.  그때 맞은편에서 차 한대가 전조등을 번득이며 달려오더니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납작 엎드렸다. “빌어먹을! 불빛에 다들 도망갔겠군.” 중얼거리는데 가래가 끓어올랐다. 물을 마시며 곰곰 생각을 해보니 잘 된 일이었다. 식도를 타고 내러간 미지근한 물이 얼마간 마음을 식혀주어서 나는 마음 편하게 출발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어찌되었든 한국소년이 위험한 상황에서 구조되었으니까.  휴대폰의 전원을 끄기 전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달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두 청소년이 아직도 그곳에 있는 것이 눈에 띈 건 고개를 아래로 내리면서였다. 둘의 모습이 마치 피카소의 추상화처럼……, 기형동물이 엉켜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저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어떤 연상 작용을 동반한 섬뜩한 현기증이 일면서 갑자기 소년의 발밑에서 세상이 비틀거리며 흔들렸다.  머리로는 충분히 알고 있지만, 직접 피부로 느끼기 전까지는 어떠한 정화행동을 하지 않으며, 아무리 무시무시한 위험이 다가온다 한들 대부분 사람들은 그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뿐이라는 ‘가든즈 역설’이 기억났다. 눈앞에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일을 보고만 앉아 있자니, 정수리에 강렬한 뇌우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담배를 한 개비 뽑았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의자를 밀고 뒷자리로 넘어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였지만, 맛이 꼭 화재현장에서 연기를 들이마신 것만 같았다. 그때서야 내가 손을 심하게 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동안 내 손가락이 세상을 뒤흔들고 있었던 것을 알아내고 껄껄 웃고 싶었다.    아테나가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마치 거인처럼 팔 그림자가 어마어마하게 길었다. 그 바람에 꽉 쥐고 있는 그녀의 주먹 그림자가 소년의 손에 닿아 있었다. 약기운이 뇌로 올라오는지 뒷골이 당겨서 뒤통수를 툭툭 때려야 했다.  아테나가 움켜쥐고 있는 주먹에 흉기나 폭발물 같은 물질이 들어있다고 유추되어 나는 튀어나가려고 했다. 그 물체를 당장 낚아채야 한다는 전직의 책임감이 악몽처럼 무겁게 다가왔지만 쉽게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눈에서 축축한 것이 흘러내렸다. 눈물이었다.  소년의 차림새는 아주 말쑥했다. 스케이트보드에서 계속 발이 미끄러지는 꼴이 영락없이 지금 스케이트보드 타는 법을 막 배우기 시작한 초보 티가 났다. 보드를 마치 보물처럼 겨드랑이 꽉 껴안고 있는 모양새도 부모를 졸라 갖게 된 첫 보드로 보였다. 고급 브랜드의 형광 로고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했다.    하늘이 낳은 주황색 알 같은 달이 소년의 머리통에 후광을 드리워 똑똑해 보이게 했다. 태권도 정도는 배웠을 것 같았고, 잘 하면 누이동생 하나 정도는 있어 보였다. 남들이 하는 것을 다 따라하고 싶어 하는 호기심 많은 유형일 것이고, 나이는 많아야 열두세 살, 아나 또래로 보였다. 나는 녀석을 한국인으로 간주해 버린 상태였다.  남들에게 뒤질까봐 하늘의 달이라도 뽑아 줄 것 같고, 아들이 너무나 귀해서 투명한 수족관처럼 들여다보고 일일이 간섭을 해야만 마음이 놓일 부모 밑에서 자랄 것 같았다. 반면 본인은 일 거수 일 투족을 주시하는 부모로부터 자유를 갈망하다 툭 하면 부모와 거래를 할 것이며, 안 된다고 호통을 치던 부모는 돌아서서 고등어자반 뒤집듯 소년의 요구를 들어줄 것 같았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는 법이니까.    자식의 일이라면, 다 죽어가던 몸도 벌떡 일으킨다든가 우박만 떨어져도 하늘이 무너졌다고 가슴을 쓸어내린다든가 할 것 같았다. 이민 일세답게 뼈가 부러지기 직전까지 쪽잠을 자가며 일해서 소년이 의사나 변호사가 되기를 바라며 뒷바라지를 할 것이고,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인생에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할 것 같았다.    현관문 밖에다 옹기종기 신발을 벗어놓고, 앞마당 양지바른 터에는 깻잎을, 물기 많은 터엔 미나리를, 숱 많은 초록 머리카락 같은 부추는 화분에 각각 재배해서, 양파링 모양으로 오징어를 썰어 넣고 부침개를 부쳐 먹는 집에서 살 것 같았다.    서양인에 비해서 왜소한 소년의 기를 죽이지 않으려고 옷이며 신발, 학용품과 스포츠 용품은 무조건 최고급 브랜드로 사줄 것 같았다. ……컴퓨터는 애플, 신발은 나이키, 티셔츠와 바지는 폴라……. 점심은 아시안 티를 내지 않으려고 꼭 샌드위치나 햄버거를 싸줄 것 같아보였다.    막상 소년은, 고여 있는 물웅덩이처럼 더디게 째깍거리는 시간 앞에서 온몸을 비비꼬아대며, 하루빨리 어른이 되어 부모로부터 자유를 찾고 싶어 할 것 같았다. 날마다 학교 앞에서 차를 대놓고 기다리는 부모 때문에 친구들의 눈치를 살필 것이고, 어쩌다 길거리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내심을 감추려고 용감무쌍한 제스처를 해 보일 것 같았다.  -완전 망했어. 이제부터 아빠 안 믿어.  문자가 들어왔다. 1초가 급했다. 가긴 가야 하는데 가지 못하는 나도 미쳐버리기 직전이었다.  -어쩌자고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이러고 있어. 딸이 기다리고 있는데. 하지만, ……지금 가봐야 풋볼 경기는 이미 틀렸잖아.  혼잣말을 하는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한쪽에는 떠나야 한다는 마음이 또 한쪽에는 호기심 가득한 욕망이 서로 싸웠다.    소년이 스케이트보드를 튕겨 올려 겨드랑이에 꼭 껴안는 행동이 집에서 멀리 온 것이라 짐작되었다. 반면 아테나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누군가를 노리고 있다가 마침 소년을 만난 것이었다. 아테나가 꾸미고 나온 모양새는 충분히 상습범으로 보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확신에 차서 소년에게 다가갔을 것이다. 한편 소년은 처음 당하는 일이라 두려웠지만 상대가 소녀이기 때문에 겁쟁이 티를 내지 않으려고 도망치지 못하고 노련한 척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0미터 전방에서 벌어지는 그 수작의 절차와 결과가 명료하게 유추되었다.  악착같은 아테나의 행동은 제우스로부터 총애를 독차지 할 것 같았다. 제우스는 핏줄과 양육이란 두 밧줄로 딸을 당기고 늘리며,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조절할 것이고, 제우스의 야망이 눈에 보이는 는 듯 했다. 부모마다 자식에게 거는 기대와 욕망은 각각 다르겠지만 결론적으로 모두가 그들의 머리에서 튀어나온 것일 테니까.  만약 내가 소년이라면 단호하게 스케이트보드를 땅바닥에 탁, 떨어뜨려 재빨리 왼발을 보드 위에 올리고 오른발로 노를 젓듯 땅바닥을 힘차게 밀치고 가버릴 것 같았다. 40mm 휠이 콘크리트 바닥을 긁으며 굴러가는 소리도 잠시, 아테나가 따라잡지는 못할 테니까. 손을 올려 마른세수를 하자 얼굴이 아니라 거친 바위를 만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타이밍을 기다렸다는 듯이 아테나가 미소를 띠고 소년에게 바짝 붙어서 따발총처럼 쏘아댔다. 멋쩍어 하던 소년도 호기심을 물리치지 못하고 주먹안의 그것을 받으려고 손바닥을 펼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나도 더 이상 우두망찰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계속)테리사 리 소설가15회 재외동포 문학상 대상수상11회 민초문학상 대상수상소설집 <비단뱀 쿠니야의 비밀> <어제 오늘 내일>

  13/10/2021
  문학지평

어젯밤 엄마는 귀신에 홀린 듯 걸음이 빨랐다. 동생과 나는 허덕이며 엄마를 쫓아갔다. 슬리퍼가 종아리까지 진흙물을 튀겼다.‘철벅 철벅!’엄마가 돌아보지도 않고 소리쳤다.“그만 집에 가... 계속 따라오면 가만 안...!”장대비 속에서 엄마 목소리가 계속 끊어졌다.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흘러내렸다. 나는 동생 손을 잡아끌며 소리쳤다. “그만 울어! 제발 집으로 돌아가자.”울부짖던 동생이 빗속에서 떨고 있었다. “강리야, 우리가 돌아가야 엄마가 온다!”동생 손을 잡아끌고 갔던 길을 돌아왔다. 뛰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개울가에 멈추어선 엄마가 지하여장군처럼 서 있었다. 집에 오니 우리는 물에 빠진 생쥐가 되었다. 어둠속에서 빨간 담뱃불이 빛났다. 아빠가 현관문 밖에 서서 중얼거렸다.“감기 걸릴라.”나는 말없이 동생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동생은 젖은 머리를 털며 배고프다고 했다. 냉장고를 열었지만 빼빼 마른 빵 조각이 전부였다.“빨리 먹기나 해.”우리는 꾸역꾸역 식빵을 삼켰다. 그것은 마른 나뭇잎처럼 퍼석거려 목이 메었다. 곧 잠이 든 동생은 꿈속에서도 가끔씩 흐느꼈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는데 아빠가 들어왔다. 나는 잠든 척 돌아 누었다. 술 냄새를 풍기는 아빠가 우리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얼마가 지났는지 눈을 뜨자 장마 후 여름햇살이 눈부시다. 어젯밤 일이 꿈은 아니었다. 아빠 방에서 풍기는 시큼털털한 냄새랑 동생 얼굴에 마른 눈물자국이 그걸 말해주었다. 동생을 깨울까 하다 그냥 가방을 멨다. 그래도 우리를 지켜보던 아빠에게 동생을 미루기로 했다.학교 가기 전 엄마가 걷던 길을 걷는다. 엄마가 있을 리 없지만 행여나 하는 마음에. 젖은 돌계단을 따라 개천으로 내려간다. 장맛비를 뒤집어쓴 시퍼런 돌들이 얼음처럼 미끄럽다. 두 번이나 넘어져 무릎에 피 먹과 풀물이 푸르죽죽하다. 시퍼런 풀숲 아래로 쏟아지는 물이 콸콸 소리를 지르며 쓸려간다. 개울 앞 넙적 돌 위에 서니 눈앞이 부옇게 흐려진다. 엄마가 서 있던 자리다. 행여나 했지만 기적은 없다. 엄마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어느새 학교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또 지각인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빛나가 다가왔다. “지지리!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네가 일등으로 오다니!막 교실로 들어가려던 나는 엉거주춤 섰다. 빈정대는 빛나 목소리가 날카로운 가시처럼 와 박혔다. 정말 내가 어떻게 일등으로 온 건지 모르겠다. 항상 뒷자리가 내 단골자리였는데. 우리 반은 지난달부터 일찍 온 순서대로 앉기로 했었다.내 진짜 이름은 지해리다. 언제부턴가 반 애들이 나를 놀리며 지지리로 불러댔다. 지지리 못하는 게 많다면서. 사실 내가 공부를 못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왕따 당할 정도로 못된 아이는 아닌데 말이다. 빛나가 선생님 앞으로 팔랑거리며 나간다. 머리 위의 노란 리본이 춤을 춘다.“선생님, 안녕하세요?”“응, 노란 나비가 앉았나? 빛나 덕에 교실이 환하네.”예쁜 빛나는 더욱 빛나고 나는 졸은 쫄면처럼 바짝 오그라든다. 잡초에 젖은 옷에서는 쉰내까지 난다. 눈치를 보며 엉덩이를 들어 딸려 올라가는 속옷을 잡아 내렸다. 그때 ‘탕탕탕!’ 창문이 흔들렸다. 모두 놀라서 창문을 보니 수찬이었다.“엄마아!”유리창에 바짝 댄 수찬이 얼굴이 납작 만두가 되었다. 빛나도 그 모습에 배꼽을 잡고 웃었다. 납작 만두면 어떻고 둥글 만두면 어때. 어쨌든 난 수찬이 덕에 살았다. 선생님 외아들 수찬이는 착한 애인데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다. 순간 선생님 얼굴이 시커먼 먹지처럼 어두워졌다. 수찬이가 복도로 사라진 후 선생님이 다시 나를 향했다. 항상 꼴찌로 오는 지지리가 최고로 일찍 왔으니 뭔가 수상하기도 하겠지. 빛나도 자꾸 나를 힐끗거렸다. 나는 빛나에게서 되도록 멀리 의자 끝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드니 코앞에 수족관이 있다. 세상에나, 그곳에 황색 금붕어가 노는 걸 처음 보다니! 나는 항상 단골 지각이라 뒷자리가 지정석인데다, 고기밥을 한 번도 주어보지 않았다. 날쌘돌이 아빠와 배불뚝이 엄마 금붕어가 껴안은 채 바위 밑으로 들어간다. 주위를 맴돌던 새끼들도 꼬리를 물고 따라 들어간다. 새끼들은 엄마를 놓칠까봐 안절부절 못한다. 앗! 엄마 아빠 붕어가 사라졌다. 허둥대던 새끼들마저 없다. 건달 물풀만 김샌 듯 혼자서 흐느적거린다.  시퍼런 물풀 아래 조약돌들이 강가에 있던 그 미끄러운 이끼돌처럼 푸르죽죽하다. 그때 빛나가 코를 막으며 소리쳤다.“선생님, 냄새 나요!”나는 얼음놀이 때처럼 숨을 참고 정지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쉰내가 퍼져나갈 것만 같다. “그렇지, 이끼 때문이야.”휴, 이번엔 선생님이 나를 살렸다.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선생님이 말했다.“이끼가 끼면 고기가 죽어.”“네, 선생님. 내일이 수족관 물청소 날이에요.”“잊지 않았구나. 내일 방과 후 실시한다. 시간 되는 친구들 함께 참여하도록.”앗, 그러고 보니 엄마 얼굴에도 이끼가 끼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라며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깔깔대는 소리가 크게 다가왔다. 빛나가 국어책을 두드리며 종알거렸다. “지지리, 뭐해? 선생님이 너 이 동시 읽으라 하시잖아.”수십 개의 눈동자랑 선생님 얼굴이 확대되어 다가왔다.“해리,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와!”따르릉 첫 교시 끝나는 종이 울린다.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한다. 나는 멍하니 수족관만 바라본다. 앗, 엄마 금붕어가 나타났다. 배를 내밀고 으스대면서. 아빠 금붕어가 꼬리로 엄마 배를 다독인다. 새끼 금붕어들이 엄마 주위를 빙빙 돌며 황홀한 율동을 한다.  새끼 금붕어들은 참 좋겠다. 엄마가 절대 수족관 밖으로 못 나갈 테니까. 갑자기 주황색 금붕어가 부옇게 보인다. 눈에 티끌이 들어간 것도 아니면서. 개천으로 급히 내려가던 엄마의 모습도 그랬다. 그때가 엄마와 아빠가 큰 소리로 싸운 후였다. 베게가 날아다니고 TV 리모컨이 깨졌다. 엄마 아빠가 다툴 때면 돈, 학원비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빠는 술 담배를 많이 하다 어느 날 회사를 그만두었다. 아니 회사를 그만두어서 술 담배를 많이 한 건지도 모르겠다. 오전 수업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꼬르륵거리는 배꼽시계를 얼른 움켜쥔다. 나는 나쁜 딸이다. 엄마가 가출을 했는데도 배가 고프다니. 교무실 밖에서 눈치를 보는데 선생님이 손짓을 했다. 선생님 옆에 앉았다. “해리야. 집에 힘든 일이 있는 거 내가 다 알아. 요즘 많은 회사들이 경제 위기를 겪고 있지. 빨리 경제가 좋아져야 할 텐데.”선생님이 내 무릎의 풀물을 보고도 못 본 척했다. 그것이 창피하고 더 슬펐다. 참았던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해리야, 나랑 수찬이를 봐라. 세상에 걱정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잘 견뎌내야만 환한 미래가 있어.”그때 교무실 창문이 쾅쾅거렸다. 수찬이가 하회탈처럼 너털웃음을 짓자, 선생님이 다가갔다. 엄마 품에 안긴 수찬이는 온 몸을 흔들며 팔을 꼬았다.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환히 웃었다. “수찬이가 방과 후에 또 달리기를 하겠대. 패럴림픽에 나간다고. 기적이야, 기적.”수찬이는 걷는 것조차 싫어했었다. 그러던 수찬이가 캐나다 패럴림픽 중계를 보며 달리기를 시작했고, 노력을 거듭하다 대표로 뽑혔다. ”해리야, 너 수업 내내 수족관만 들여다보던데. 이끼 보았지? 돌멩이가 좁은데 갇혀서 멈춰 있으니 이끼가 끼는 거다.” “네∼”“그런데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낄 수 없단다. 돌이 구르면서 때로는 쪼개져 제 몸을 깎아내리고 거센 물살과 폭풍을 만나기도 해. 그렇게 힘든 아픔을 참아내는 돌엔 이끼가 끼지 못해. 그건 기적이지. 기적은 저절로 생기지 않아. 스스로 노력해 만들어 가는 거야.”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리야, 목표를 정하고 네 자신을 돌처럼 굴려보는 거야. 네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그게 힘든 부모님을 돕는 일이지.”얼마 후 오후 수업이 시작되었다. 내 맘속에 엄마가 들어와 앉았다. 나는 귀를 쫑긋하고 선생님 설명을 열심히 들었다. 빛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지해리, 너 오늘 뭐 잘못 먹었어? 웬 일?”이번에는 지지리라고 부르지 않았다. 수업 후 다가왔다.“너 혹시 이 문제집 가질래? 두 권이나 있어서.”그걸 받아 가방에 넣었다. 빛나가 내 마음을 읽은 걸까. 운동장을 나오는데 수찬이가 트랙을 달리고 있었다. 결승선 쪽에서 선생님이 두 팔 높이 초시계를 들어올렸다. 수찬이를 안을 듯 양팔을 벌린 엄마와 땀투성이 아들의 모습이 마치 영화 같았다. 가슴이 뭉클해져 나도 교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집이 가까워지자 가슴이 쿵쾅거렸다. 엄마, 라고 외치며 무작정 안방으로 달려갔다. 역시나 엄마는 없었다. 눈물이 쿡 솟구쳐 앞 이를 꽉 물었다. 아빠가 빠져나온 애벌레 껍질 모양의 이불에서는 구린 냄새가 지독했다. 코를 막은 채 창문을 활짝 열고 커튼을 젖혔다. 장마 후 따가운 햇살이 살 속으로 콕콕 파고들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나는 펑펑 울고 말았다. 엄마가 동생 강리랑 외갓집에 있단다. 아빠가 동생을 데리고 엄마를 찾아갔던 거다. 전화를 끊고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울 엄마가 온다!”갑자기 삼손처럼 힘이 솟았다. 퀴퀴한 이불을 불끈 들어 쨍한 햇볕에 널었다. 책상과 방바닥에 빠득빠득 걸레질을 했다. 물을 틀어 설거지도 쏴쏴 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빛나가 준 문제집과 책을 가지런히 펼쳤다. 집중이 잘 되는 게 기적이다. 가슴이 덜컹덜컹 설렌다. 엄마가 빨리 오면 좋겠다. 어느새 방싯 웃는 엄마 얼굴이 보인다. 내일 학교에 일찍 가고, 수족관 물청소도 도울 거다. 이끼가 끼면 고기가 죽는다.  제3회 한우리문학상 등단으로 동화쓰기 시작해 <코나의 여름> <구다이 코돌이><버니입호주 원정대>등의 장편동화 출간과 현재 <캥거루소녀>출간을 앞두고 있슴.최근 청소년역사소설 <대장간소녀와 수상한 추격자들>(2021.2)의 속편 <동학소년과 녹두꽃> (2021.7)을 출간하였으며 시리즈로 계속 집필 중임.이마리 전자우편 leemalhya.yahoo@gmail.com으로 연락주세요.

  16/09/2021
  문학지평

자갈길에 덜컹거리던 봉고차가 초라한 집 앞에 섰다. 미닫이 유리문으로 된 집이다. 유리문은 시커멓게 먼지가 껴 안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엄마 어릴 때 고향이라 다시 시골로 이사를 온 거다.“휴! 차가 분해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아빠가 이마의 땀을 닦는다. 겨울인데도 땀투성이다. 아빠는 살림도구를 다 비집고 엄마 휠체어부터 꺼낸다.“자, 먼저 엄마를 밀고 집으로 들어가라.”아빠는 짐을 옮기고 나는 엄마 휠체어를 민다. 하마터면 자갈밭에 엄마를 굴릴 뻔했다.매서운 겨울바람이 집을 통째로 날려 보낼 듯 으르렁거린다. 귀신이 나올 듯 썰렁하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에 눈이 맵다.“윤빈아, 나를 싱크대 쪽으로 밀어주고. 밖에 가서 쌀부터 날라 올래?”나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곧 엄마의 쌀 씻는 수돗물소리에 빈집이 술렁거렸다 시골로 이사한 첫날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밥을 먹고 우리는 이삿짐을 정리했다. 아빠는 대패랑 연장을 공방 차릴 곳에 진열했다. 엄마는 휠체어를 탄 채 작은 짐을 이쪽저쪽으로 날랐다.얼마 후 나는 얼룩진 천장을 보며 잠을 청했다. 우리 가족은, 아니 나는 서울생활이 무서웠다. 학교에선 아이들이 나에게 판자촌놈이라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이곳 시골 아이들은 좀 순하겠지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뒤척이는 소리를 들었는지 엄마가 말했다.“좀 추워도 참아라. 그래도 이 집엔 네 방이 따로 있잖아?”비닐로 천막을 쳐놓은 서울 판자 집보다 이곳이 훨씬 찬바람이 약했다. 새우처럼 옹크려보았다. 면적을 적게 해야 덜 춥다던 아빠 말을 떠올리면서.새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무리 추워도 새는 숲이 좋은가보다. 숲은 춥고 학교 가는 길은 멀다. 첫날이라 아빠와 함께 갔다. 담임 선생님이 나를 교실로 데리고 갔다.“서울서 전학 온 채 유빈이다. 해룡아, 네 옆에 앉히고 잘 지내도록.”나는 해룡이 옆자리에 앉았다. 쉬는 시간에 해룡이가 물었다.“너 서울에서 온 거 맞아?”아이들이 까마귀 떼처럼 달려들었다.“그런데 우리보다 더 시골뜨기네?”나는 속으론 열불이 나는데도 못들은 척했다. 해룡이가 날 힐끗거리며 아이들에게 말했다.“수업 끝나고 알지? 등나무 아래 모이는 거.”해룡이 말에 모였던 남자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너도 초대한다. 채 유빈!”그때 급식당번이 소리쳤다.“서바이벌 흡입시간!! 일급비밀, 담임 샘은 옆 교실에서 식사 예정!”아이들이 로봇 춤을 추며 달려 나갔다. 나는 제일 뒤에 식판을 들고 섰다. 내 차례가 오자 해룡이가 달려왔다. 그는 내 앞 아이 식판에 남은 닭볶음탕을 몽땅 부어주었다.“아이 이걸 어쩌나? 서울 친구에게 줄 게 없네. 이거라도 받으시지.”밥 한 숟갈만 얹힌 식판을 들고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자꾸 헛기침이 나왔다. 목에 멍울이 얹힌 듯 울컥해서다.“야, 밥 먹는데 재수 없게 왜 컥컥 대냐?”해룡이 숟가락을 탁 털고 일어선다. 아이들도 모두 일어선다.“서울 급식하고 다르냐? 안 먹을 테면 받지를 말던가.”해룡이가 내 식판에 퇴! 하고 침을 뱉었다. 내 두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순간 식판을 들어 해룡이 얼굴에 처박았다.아악! 비명과 함께 밥알이 해룡이 얼굴에 납작 달라붙었다. 꼭 곰보 탈바가지가 허우적거리는 듯했다. 그때 선생님이 들어오셨다.“내가 없으면 꼭 이 모양! 음식으로 장난치는 녀석은 용서 못해. 벌로 너희 둘 오늘 수업금지. 해룡이, 유빈이 다 교무실로.”나는 건물 끝 귀퉁이 음악실에 해룡이는 교무실에 갇혔다. 오후 내내 선생님은 나를 부르지 않았다. 배속에서는 속도 없이 자꾸 꼬르륵 소리가 났다. 눈물이 나왔다. 흐릿한 눈으로 창밖을 보았다. 들판 위에서 떨고 있는 허수아비가 좀비처럼 움직였다. 재수 없는 날이라고  투덜대며 주위를 둘러봤다.큰 북이 눈에 띄었다. 북채를 잡고 둥 쳐봤다.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울렸다. 다시 쳐봤다. 더 큰 소리가 났다. 두둥. 두둥둥. 두둥둥둥. 점점 소리가 커져갔다. 한참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음악실이 외따로 떨어진 게 이래서였나보다.이제 미친 듯 북을 두드렸다. 땀이 줄줄 흘렀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선생님이 들어왔다.“화가 좀 풀렸니? 참는 게 이기는 거야. 나쁜 녀석들이 신고식을 지나치게 시켰구나. 녀석들 가만두지 않을 거다.”선생님이 내 등을 다독이며 이제 집에 가도 좋다고 했다. 집에 오니 이미 저녁밥이 챙겨져 있었다. 정신없이 밥을 퍼 넣었다. 자꾸 목이 막혔다. 아빠가 뭔가를 눈치 챈 듯 국을 밀었다.“유빈아, 체할라. 국이랑 먹어라.”엄마가 말했다.“아빠는 벌써 일감이 들어왔대. 휴, 이사 온 게 얼마나 다행인지. 너도 그렇지?”“네? 아 네.”집에 도착했을 때 공방에서 나가던 아줌마 뒷모습이 생각났다. 그 아줌마가 손님인 것 같았다. 식사 후 설거지는 항상 내 몫이다. 아빠는 열심히 대패질을 한다. 향긋한 나무 향이 집안을 헤엄쳐 다닌다. 아빠는 벌써 <나무향기>라고 쓴 간판을 달고 있다. 엄마는 휠체어에 앉은 채 부지런히 사포질을 한다. 아빠가 만든 목공품은 모두 엄마의 손을 거쳐 완성된다.날씨가 얼음장 같다. 학교 가는 숲길에 나무들이 죽은 듯 서 있다. 저 나무에 언제쯤 새순이 날까? 보송한 솜털로 싸인 볼록한 곳에 더운 입김을 불어주었다. 학교에 도착해 가만히 교실 문을 열었다. 앗, 해룡이가 문 뒤에서 귀신처럼 나타나 쏘아붙였다.“야! 너 어제 노예놀이 하러오라니까 왜 그냥 갔는데?”“........”“너 같은 신참이 노예 해야 했어. 네 덕분에 내가 노예 했잖아?”다른 녀석이 소리쳤다.“어쨌든 채 유빈, 넌 이 시간부터 노예다.”나는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뭐해? 이 가방 들고 내 옆자리에 앉아!”나는 말없이 가방을 들었다.“야, 그 노예 쓸 만하다.”내가 앉자 애들 눈이 나를 좇았다.“야, 노예가 어디 주인이랑 함께 앉으려고? 넌 바닥에 앉아.”둘러선 녀석들이 나를 한 방씩 먹였다. 주먹을 피해 쓰러지려는 내 몸을 해룡이가 잡았다.“인마, 노예가 어디서 맘대로 쓰러져?”해룡이가 다시 명령했다.“이제 쓰러져. 어서!!”여자애가 소리쳤다.“야, 너무 심한 거 아냐?”“너, 까불면 알지? 선생님한테 이르기만 해봐라.”누군가가 소리쳤다.“선생님 납시오!”삽시간에 아이들이 자리에 앉았다. 휴! 담임이 나만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나는 아픈 볼만 어루만졌다.“방학 동안에 국악반에 가입할 사람은 신청해라. 초보자도 대환영. 석 달 후엔 군청에서 열리는 대회가 있다. 상금도 걸려 있고.”수업 내내 북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수업 후 음악실로 달려갔다. 문을 여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았다.“노예께서 북을 쳐 보시겠다?”돌아보나마나 해룡이가 틀림없었다.“이 노예야. 말 좀 해봐. 너 혹시 벙어리는 아니지?”“에이씨.”“에이씨? 언어순화 좀 시켜줘야겠군. 너 이리 따라와.”내가 끌려간 곳은 급식관 모퉁이였다. 이미 모여 있던 남자애들이 나를 가운데 놓고 돌아가며 한 대씩 때렸다. 나중엔 내 가방을 마구 밟았다. 나는 콩 벌레가 되었다.“헐, 작은 고추가 맵다더니?”그때 슬리퍼 끄는 소리가 가까워졌다.“담임이다! 토껴!”아이들이 삽시간에 흩어졌다. 찬 시멘트 바닥에 코피 몇 방울이 떨어졌다. 골이 띵 했다.“유빈아! 일어나라!”겨우 눈을 들었다.“나쁜 녀석들. 이제 그만 둘 때도 되었는데. 그렇게 말했는데 또.”나는 선생님을 따라 음악실로 들어갔다. 선생님은 말라빠진 코피를 물휴지로 닦아주었다. 돌처럼 굳은 내 손을 한참 녹이더니 북채를 꼭 쥐어주었다.“자, 마음껏 쳐라. 이 북이 죽이고 싶도록 미운 놈이라고 생각하면서.”둥, 둥둥, 두둥둥 북소리가 커졌다. 맘껏 두들기고 나니 눈물이 쏟아졌다. 북을 치며 울다 웃다가 소리도 질렀다.“나쁜 녀석들!”한참 후 선생님이 들어왔다.“유빈아, 북을 치면 정신 건강에 아주 좋단다.”“아, 네.”“국악반 악동들을 훈련시켜 많이 나아졌는데 아직 갈 길이 멀어. 너도 신고식을 치렀으니 이제 친구가 될 거야.”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네 북소리는 힘이 있어. 아주 소질이 있어 보여.”가슴이 막 뛰었다. 곧 선생님이 악보를 들고 왔다.“자, 여기 세모와 동그라미가 있지. 세모는 북 모서리를, 동그라미는 북 가운데를 울려 진동시키는 거야.”“네.”“첫날 네 북소리를 들었지. 네가 북하고 인연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갔어. 잘 참아내는 사람이 북도 끝까지 잘 치거든. 악동들도 북, 장구, 징을 두드리며 마음이 많이 열려가고 있어. 혹독하게 연습하며 애들이 성장하지. 해룡이 녀석 부모 문제로 잠깐 비뚤어지긴 했는데 맘은 여린 놈이지.”“.....”‘그래도 나쁜 녀석이에요.’라는 말이 내 입속에서만 맴돌았다.“악동들이 연주하면서 마음이 하나가 되더라. 목표를 세우고 함께 가다보면 어느새 아이들이 친구가 되지.”선생님 말에 얼었던 마음이 봄눈처럼 녹고 있었다.“집에서 북채만 가지고 와. 아버지께 한 개 만들어달라고 부탁드리지?”담임은 벌써 아버지가 공방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 내일부터 열심히 연습하자.”선생님과 헤어져 숲속을 걸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숲길은 그다지 춥지 않았다. 희한하게도 아이들한테 맞은 일도 이미 잊었다. 저녁을 먹으며 아빠를 보았다.“아빠, 저 북채 하나 만들어주세요.”아빠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와, 우리 유빈이도? 북 채 주문을 30개 받았는데. 이제 31개네?”“유빈아, 엄마 어릴 때 친한 친구가 여태 이곳에 살고 있더라. 그 아줌마가 북 채를 주문한 거야. 그 집 아들도 국악반이라던데.”‘누굴까?’그때 아빠가 긴 나무 조각을 내밀었다.“우리 유빈이 북채는 제일 단단한 박달나무가 어떨까?”“아빠, 이런 얼룩무늬는 싫어요. 깨끗한 걸로요!”“이 얼룩무늬는 착한 옹이야.”“옹이가 뭐예요?”아빠는 내일 뒷산에서 옹이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시골에 와 처음 맞는 주말이기 때문이다. 아빠는 일을 쉬고 엄마를 엄마가 좋아하는 절에 데리고 가기로 했다.숲속으로 난 낙엽 위로 엄마 휠체어를 천천히 밀어주었다. 햇살이 일렁이며 엄마 얼굴 위로 번져갔다. 엄마 얼굴이 환해졌다. 아빠도 싱글벙글 난리다. 아빠가 나무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유빈 학생, 이 혹 같은 거 보이지요? 이걸 톱으로 켜면 얼룩처럼 보이는 겁니다. 이게 뭘까요? 옹이라는 겁니다.”“선생님, 옹이는 왜 생길까요?”“에헴. 나뭇가지가 바람에 꺾이거나 사람들이 자르면 그 자리에 상처가 생겨요. 나무도 힘들 때는 사람처럼 눈물을 흘리거든요. 그 눈물을 삼키며 참고 노력하면 착한 옹이가 되죠. 나무와 한 몸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견디어내지 못하면 나무 살에서 떨어져 나와 죽은옹이가 되는 겁니다.”엄마가 유빈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우리 유빈이 옹이는 어떻게 생겼을까요?”나는 생각에 잠겼다.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아들, 나무에 옹이가 있듯 사람들의 가슴에 사람들 각자의 옹이가 있단다. 착한 옹이가 생기면 그만큼 넉넉한 마음을 가질 수 있지.”엄마의 옹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싸했다. 나와 해룡이의 가슴속 옹이는 어떤 모양일지 궁금했다. 그 후 북치는 일이 공부보다 더 재미있었다. 내가 늦게 시작했다는 생각에 다른 아이들보다 더 열심히 북을 쳤다. 아빠가 만들어준 옹이가 든 북채를 들면 마음이 넉넉해졌다. 악동들도 열심히 북을 쳤다. 해룡이가 한 번씩 내 손을 잡고 북 치는 걸 가르쳐주었다. 나는 말없이 따라했다. 천방지축 악동들이 야무지고 단단한 국악 악동들이 되어갔다.드디어 공연 날이 다가왔다. 무대에서 우리 악동들은 하나가 되었다. 연주가 끝난 후 모두가 땀이 질퍽했다. 사람들은 계속 앙코르를 외쳤다. 학부모 한 명과 담임이 무대 위로 나왔다. 담임이 말했다.“아버님 어머님들, 우리 귀여운 악동들을 믿고 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디어 하나로! 라는 우리의 꿈은 이루어졌습니다.”이번엔 학부모가 마이크를 받았다.“선생님, 우리 말썽꾸러기들을 지도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훌륭한 연주를 하도록 북채를 만들어준 분께도 감사드립니다.”떠나갈 듯 박수소리가 들렸다. 아! 무대 옆에서 엄마의 휠체어가 다가오고 있었다.“바로 제 고향친구 채 유빈 엄마를 소개합니다.”사람들이 모두 일어서서 환호했다.“유빈아, 너희 엄마하고 우리 엄마다!”아, 집에 왔던 그 아줌마였다. 해룡이가 속삭이며 내 손을 쥐었다. 땀으로 끈끈했지만 나는 그 손을 빼지 않았다. 엄마 눈에서 눈물이 반짝였다. 악동들이 북채를 두드리며 우우 환호했다. 눈을 감으니 기쁨에 찬 옹이들의 춤사위가 보이는 듯했다. 북소리에 맞추어 공연장에 모인 모두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덩더꿍 덩더꿍” “얼씨구 절씨구” 악동들과 온 동네가 한마음이 되었다. 북소리의 뜨거운 열기가 그치질 않았다. 차가운 겨울이 저만치 물러나 앉았다.<목포신인문학상 수상작> 기고글제3회 한우리문학상 등단으로 동화쓰기 시작해     <코나의 여름> <구다이 코돌이><버니입호주 원정대>등의 장편동화 출간과  현재 <캥거루소녀>출간을 앞두고 있슴.최근 청소년역사소설 <대장간소녀와 수상한 추격자들>(2021.2)의 속편 <동학소년과 녹두꽃> (2021.7)을 출간하였으며 시리즈로 계속 집필 중임.이마리 전자우편  leemalhya.yahoo@gmail.com으로 연락주세요.

  01/09/2021
  문학지평

'발그림'님의 멜빵바지 삽화 페북서 발췌차가 끼익 문 앞에 섰어. 엄마가 틀림없는 거야. 외할머니가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리는 게 보였거든. “어휴, 저렇게 밤낮으로 사들이는 옷을 언제 다 입힌다고!”엄마는 쇼핑봉투를 잔뜩 들었어. 뾰족구두가 엄마를 쓰러뜨릴 것만 같아.“다녀왔습니다. 흐흐, 세일 기간이라 어찌나 싼지 이것저것 사다 그만.”엄마는 실실 외할머니 눈치를 보았어. 리안이 소리치며 달려갔어.“엄마, 내 옷은?”딸과 손녀딸을 지켜보던 외할머니가 중얼거렸어. “쯧쯧. 옛날엔 이 할미가 네 어미 옷을 다 만들어 입혔는데.”외할머니가 딸, 마리의 멜빵이 이야기를 시작하셨어. 손녀딸 리안이 귀를 쫑긋 기울이네.  늦더위에 지쳤던 과꽃이랑 맨드라미가 보스락거리며 고개를 드네. 처마 밑의 빨간 감이 내려다보며 속삭이고, 뒤뜰에선 여린 갈대들이 노래하기 시작해. 아기 갈잎 하나가 마당을 건너 마리 엄마 옆에 사뿐 내려앉았어.“응. 밤이 깊었다고? 바느질 그만 하라고?”마리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 마친 바느질감을 들어 올렸어. 그걸 멀찌감치 들고 감상하는 눈치였어. 나는 몸이 떨렸지. 내가 누구냐고? 나는 마리 엄마가 밤새 만든 감색 멜빵바지야. 마리 아빠의 헌 양복바지를 잘라 태어난 꼬마 바지지. 마리 엄마가 말했어. 바지 날이 반듯한 게 마리 동화책 속 프랑스 꼬마병정 같다나. 난 내 모습을 내려다봤어. 가슴 위로는 네모난 양 모서리에 단추가 달려 있고, 등에서 양쪽 가슴으로 내려오는 멜빵이 두 개 있어. 그 양쪽 멜빵에 송충이처럼 송송 단추 구멍이 나 있지. 아, 그런 멜빵바지를 입어본 적이 없다고? 그렇담 한 번 상상해서 그림을 그려보렴. 마리 엄마는 허리를 펴며 일어섰어. 나를 대청 옷걸이에 걸고 쓰다듬으며 말했어. “내일 마리에게 입혀야지.”휴, 내가 맘에 드나봐. 노란 달빛이 대청마루를 성큼 디디니 귀뚜라미가 날개를 비비네. 찌르르 찌르르. 옆방에서 마리 아빠 코 고는 소리랑 합창하면서.하얀 달빛에 비친 내 모습에 맘이 설렜어. 벽에 걸린 다른 옷들이 한 마디씩 했거든.“깜놀 멜빵!”“오, 프랑스 병정 납시오.”“헌옷 싹싹 잘라 쓱쓱 박아 나온 요술바지!”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잠을 청했어. 내일 마리를 빨리 만나고 싶어. 그러다 곧 단잠에 빠졌나봐. 얼마를 지났을까 아침햇살에 눈이 부셨어. 고소한 음식냄새가 풍겨오네. 대청마루가 통통거리고, 까르르 웃음소리는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듯했어.마리 엄마가 다가오더니 나를 옷걸이에서 내렸어. 바로 내 앞으로 소녀가 달려왔어. 앗, 마리다. 내 가슴이 콩콩 뛰었어. 까만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귀여운 아이야. 마리 엄마가 말했어.“마리야, 이 바지는 돈 주고도 못산단다. 세상에 딱 하나뿐인 바지야.”“우리 엄만 ‘세상에 하나뿐인’을 너무 좋아해.”종알대는 소리까지도 귀엽더라니까. “와, 우리 마리, 너무 멋지다!”엄마는 마리에게 나를 입힌 후, 마리를 앞뒤로 돌려세우며 감탄했어. “우리 마리는 큰딸이라 속이 꽉 찼어요.”엄마는 사람들에게 마리 칭찬을 하곤 했어. 마리는 엄마가 돈을 아껴 쓰는 것을 알았어. 마리에게 새 옷을 사줄 돈이 없다는 것도 물론. 엄마는 매달 할머니 댁에 쌀이랑 고기를 사보내야 했지. 사람들은 엄마표 마리 옷을 보며 칭찬을 했어. 언젠가부터 마리는 점점 사람들 칭찬이 진짜라는 걸 알게 되었지. 그래도 마리는 친구들과 같은 바지를 입어보고 싶었어. 친구들은 모두 코르덴 고무줄 바지를 입고 다녔어. 허리에 고무줄이 들어간 풍덩한 바지였지. 시장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다고 했어.“엄마, 나도 애들처럼 고무줄바지 한 번 입어봤으면.”마리가 애원해도 엄마는 모른 척했어.“공장에서 찍어낸 옷보다 멜빵이가 얼마나 멋진데.”사실은 화장실 갈 때가 죽음이었어. 학교 전체에 여자 화장실이 일곱 개 밖에 안 되었거든. 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곤 했지. 다른 애들은 그냥 고무줄바지만 쑥 내리면 되었지. 그러나 멜빵인 단추가 말썽이었어. 화장실에 들어간 후 단추를 푸느라 시간이 걸렸어. 그만 실수한 적도 있었지. 일을 본 후 다시 단추를 채워야하니 더 애가 탔어. 꼭 그때면 수업시작 종이 울렸어. 아이들이 쾅쾅 화장실문을 두드렸어. “빨리 나와. 마리 죽었니?”그러니 고무줄바지를 입는 게 마리의 소원이었어. 그런데 엄마는……. 드디어 시장으로 고무줄 바지를 구경 가기로 한 날이 다가왔어. 마리와 짝꿍 순희는 신이 났어. 시장이라는 말에 나도 가슴이 설레었어. 시장엔 없는 게 없다고 했거든. 비릿한 생선가게 앞을 지났어. 커다란 생선 눈알이 우릴 보고 눈을 끔벅거렸어. 나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만 같았어. 그 옆은 돼지머리 파는 곳이야. 돼지 콧구멍에 돈도 끼워져 있어. “널 잡아먹을 테야.”라며 쫓아오는 거야. 우리는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지.한참 가니 늦여름 옥수수가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처럼 쌓여있네. 방앗간에선 막 찐 빨간 팥떡을 엎고 있었어. 김이 몽실몽실 오르자 우리는 꼴깍 침을 삼켰어. 얼씨구절씨구 춤을 추는 호박엿장수를 지나 달렸어.드디어 고무줄 코르덴바지가 산더미처럼 쌓인 옷집이 나왔어. 마리는 넋을 놓고 고무줄바지만 훔쳐보는 거야. 순희가 입은 빨간 바지들이 잔뜩 누워 있었거든. 나는 풀이 죽고 말았어. 옷집 아줌마가 다가오더니 나를 만지작거렸어. 그리고 마리에게 말했어. “너 이딴 멜빵바지 말고, 유행하는 빨간 고무줄바지 입고 싶지? 그러면 엄마를 데려와.”난 화가 나 씩씩거렸어. 그런데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어. 마리가 돌아서서 “가자.”라고 말했어. 우리는 흙냄새 풍기는 감자가게를 지났어. 빨간 감이랑 사과가 수북한 과일가게도 거쳤어. 그리고 말없이 시장을 빠져나왔어. 갑자기 마리가 순희에게 소리쳤어. 학교까지 달리기 내기를 하자는 거야. 이긴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라면서. 순희는 고개를 끄덕였어. 마리는 순희가 좋아하는 짝꿍이니까.마리와 순희가 달리기 시작했어. 논둑을 지나 좁은 길을 휙휙 달렸어. 다리를 지나고 농협창고를 돌아 드디어 학교에 닿았어. 마리가 소리쳤어.“내가 이겼다!”화장실로 들어오라며 순희에게 고갯짓을 했어. “빨리 들어와!”나는 가슴이 떨렸어. 마리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마리가 들어가자 순희도 따라 들어왔어. 마리는 화장실 안에서 문을 잠갔어. 그리고 내 몸의 단추를 풀기 시작하는 거야. 나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어. 순희 눈도 왕방울이 되었어. 마리가 다시 명령했어.“약속이니까, 너도 바지 벗어!”순희는 벌벌 떨며 빨간 고무줄바지에 손을 넣었어.“자, 빨리 벗어. 약속은 약속대로.”마리는 어느새 벗은 나를 순희에게 건네주었어. 나는 눈을 꼭 감아버렸어. 주인이 바뀌는 순간이었어. 마리가 다시 달래듯 말했어.“자, 네가 내 멜빵이를, 나는 네 고무줄바지를 입는다!”똥 냄새가 지독했어.“자, 숨 쉬지 마. 빨리 입고 나가자.”그때서야 울먹이던 순희 얼굴이 펴졌어. “순희야. 내일 하루만 바꿔 입는 거야. 너도 내 멜빵이를 입어보고 싶었지?”빨간 고무줄바지를 입은 마리는 신이 났어. 허리가 큰 줄도 모르고 손을 넣어 여기저기 돌려봤어. 너무 편하다며 중얼거렸어. 그런데 순희는 바지를 제대로 못 입는 거야. 나는 속으로 안달이 났어. 휴, 마리가 몇 번이나 도와준 후 겨우 내 몸의 단추를 채워주었어.“휴! 그런데 엄마한테 들키면 어쩌지?”“바보. 집에 들어가면 네 방으로 직행. 치마로 갈아입는 거야. 내일은 소풍날, 멜빵이를 입고 와. 소풍가방이 넓적하니 잘 가리고.”화장실에서 나온 우리는 맑은 공기를 흠뻑 마셨어.  그날 그럭저럭 소풍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이었어. 순희가 갑자기 멜빵을 당기며 울상이었어. 김밥을 너무 많이 먹었나봐. 설사가 나올 것 같다고 발을 동동 굴렀어. 나는 땅이 꺼지는 것만 같았어. 내 몸이 누런 똥으로 변신하는 게 어른거렸어. 마리가 사정했어.“순희야, 조금만 참아. 제발.”“흐흑. 폭발 일보직전인데.”“순희야. 여기서 똥 싸면 아이들과 멀어져. 우린 숲에서 길을 잃고 말아.”드디어 학교가 보였어. 마리와 순희는 온 힘을 다해 화장실로 달리기 시작했어. 화장실에서 순희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어. 마리가 문을 두드렸어.“순희야, 왜 그래?”“바지 단추가 안 풀려서 그만. 흑흑”마리가 화장실로 들어갔어. 마리는 내 몸의 단추를 풀고 나를 벗겼어. 그리고 순희에게 말했어.“내가 바지를 빨아올게. 그동안 넌 속옷을 벗어서 버리는 거다.”마리는 나를 움켜쥐고 수돗가로 달려갔어. 나는 삽시간에 물을 왕창 뒤집어썼어.“어휴. 똥 냄새.”마리가 나를 탈탈 털었어. 가을 햇살 속에 누런 물방울이 떠다녔어. 나는 숨을 죽였어. 물을 터느라 마리는 정신이 없었나봐. “앗!” 벗겨지는 고무줄 바지를 주워 올리며 마리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어. 허겁지겁 주위를 살피네. “맴 맴.” 매미소리만 운동장을 떼며가라 울어댔어. 마리와 순희는 겨우 바지를 바꿔 입었어. 나는 다시 주인을 찾아 돌아간 거야. 마리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내 몸을 쓰다듬으며 말했어.“나는야, 내 게 좋아!”나는 너무 좋아 울고 싶었어. 순희도 자기 고무줄바지에 손을 넣고 싱글벙글했어.“나도야!”쨍한 해님이 내 손을 꼭 쥐었어. 축축했던 몸이 어느새 가을 고사리처럼 고실거리네. 아, 하늘까지 땅 끝까지 달리고 싶어. 내 마음을 읽은 듯 마리가 소리쳤어. “우리 집까지 달리기 내기할래?”“좋아, 이번엔 내가 이길 거야!”순희가 어느새 앞장서 달리네. 살랑거리는 갈바람 속으로 바지 두 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가네. 감색 멜빵이와 빨간 고무줄바지가. -코로나로 우울한 즈음 이 동화로 웃어보세요--2021 부문협 우수작품선집 기고 글- 제3회 한우리문학상 등단으로 동화쓰기 시작해 <코나의 여름> <구다이 코돌이><버니입호주 원정대>등의 장편동화 출간과  현재 <캥거루소녀>출간을 앞두고 있슴.최근 청소년역사소설 <대장간소녀와 수상한 추격자들>(2021.2)의 속편 <동학소년과 녹두꽃>(2021.7)을 출간하였으며 시리즈로 계속 집필 중임.이마리 전자우편  leemalhya.yahoo@gmail.com으로 연락주세요.

  18/08/2021
  문학지평

 화장 하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을 뚫고 나온 칼날 같은 빛줄기에 눈이 벨 것 같았다. 새벽 어스름이 벗겨지고 태양이 떠오른 것이었다. 나는 반쯤 눈을 감았다. 꼬랑지머리가 벌떡 일어선 건 그때였다. 날카로운 빛이 그에게로 확 쏠렸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나는 한 동안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여자에게 신경을 뺏긴 탓이었을까. 강한 빛을 받은 꼬랑지머리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꼬랑지머리의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립스틱을 바르던 여자가 동작을 멈추고 그를 향해 콤팩트를 집어던졌다. 꼬랑지머리는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자와 꼬랑지머리가 한동안 옥신각신 다투기 시작했다. 지독한 슬랭을 쏟아놓는 그의 발음을 나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의 표정조차 안 보이는 상태에서 여자가 지껄이는 말만 듣고서는 그들의 관계를 알 길이 막막했다.  도대체 꼬랑지머리는 여자의 누구인가? 재형과 나처럼 딱 1개월을 동거한 ‘엑스(x)’? 벌떡 일어나 물어보고 싶은 심정을 억눌렀다.  “후처의 출생에 웃을 땐 벌건 잇몸이 한 뼘이나 드러나는…….” 재형의 어머니 목소리에선 독기마저 느껴졌었다. 그녀가 우리의 극적 결말을 내리던 날을 떠올리다 나도 모르게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고 말았다. 경주에서 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러 올라온 그녀에게 나는 고스란히 낭패를 당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불치병에 가까운 그녀의 독특한 기질을, 아들은 알고 있었겠지만 나는 생판 모르고 있었다.  잠시 후, 슬그머니 일어선 꼬랑지머리가 원시부족이 춤을 추는 것처럼 건들건들, 머리를 이상한 각도로 젖힌 채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나는 그가 다음 역에서 하차하리라 직감했다. 기차는 정차하려고 속도를 줄였다. 대놓고 꼬랑지머리의 면전에서 무기수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질퍽하게 화장을 고치는…… 둘의 관계가 점점 더 궁금해졌다. 하긴 이 세상에 하지 못할 사랑은 없는 법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 있을 뿐.  꼬랑지머리가 떠난 것을 확인한 여자는 머리를 숙이고 콤팩트를 찾기 시작했다. 한 파트는 여자의 좌석 밑에 한 파트는 꼬랑지머리가 앉았던 좌석 밑에 뒹굴고 있었다. 콤팩트를 집어든 여자가 뚜껑과 몸체를 끼워 맞춰보려고 애를 썼다. 포기한 여자는 주술에 걸린 듯 갈증과도 같은 집념으로 물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는 나르키소스처럼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 재형이 깨어나 몸을 스트레칭 하느라 그의 손이 내 옆구리의 경락을 건드렸다. 흠칫 놀라는 순간 기차가 네 번째 터널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가 질문을 쏟으며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렸다.  “감옥의 러브레터, 아니 먼저 알렉산더 그린이란 사형집행인부터 확인해야겠는데, 칼이라고 했어 도끼라고 했어? 대체 호주 사람들 발음이 왜 이래.” 질문을 많이 하는 것은 그의 직업병인 모양이다.  “완전 술 중독자였데. 감옥의 담벼락에 접목한 코티지에서 살았는데, 술독에 빠져, 수천 명의 관중이 교수형 장면을 즐기려고 모여 있는데, 목사나 신부가 사형수에게 마지막 명복을 빌기도 전에 밧줄을 내려버리곤 했다지. 밧줄을 내릴 순간이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늦는 바람에 사형수의 목이 제대로 안 잘리면, 술에 떡이 된 몸으로 비칠비칠 달려 내려가 칼로 사형수의 목을 단칼에 잘랐다고 해. 사무라이처럼.” 내 목을 내가 자르는 액션을 보여주었다.  “알렉산더란 사내가 셰익스피어 비극에나 등장하는 인물 같지?” 나는 덧붙였다. “사형집행인의 부주의로 교수대에서 살아나는 행운을 얻었다면 살려줘야 하는 것 아냐?” 재형이 기자답게 자신이 원하는 질문만 푸고 있다.  “그건 나도 몰라. 해부용으로 팔려가다 살아난 사형수나, 무덤에서 살아난 사형수 이야기는 들었지만, 사형집행인 부주의로 살아난 사형수에 관련해선 나도 아는 게 없네 뭐.” 나는 내가 아는 만큼 설명해 주려고 애를 썼다.  “호주문학의 아버지란 칭호로 불리는 헨리 로슨은 왜 세 번씩이나 수감 되었지?” 재형이 머리를 갸웃거린다.    “그야 그의 부인이 끌어다 넣은 것이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술에 미친 시인과 사형집행인이라……, 뭔가 상통하는 게 있는 것 같다. 그렇지?” 나는 한 번 웃겨보겠다고 기껏 농담을 뱉었지만, 그것도 농담이냐는 식으로 그는 웃지 않는다. 하긴 그는 원래 잘 웃지 않는 남자였다. 바보와 시인의 차이는 종이 한 장밖에 안 된다는 말을 접고 대신 조금 고상한 말을 골라 덧붙였다.  “맑은 정신으론 독자의 영혼을 송두리째 꿈틀거리게 할 정도의 시를 쓸 수 없었나 보지 뭐, 헨리 로슨은.”  “러브레트 말인데, 직접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가 계속해서 내 말은 씹어버리고 자판을 두드리며 자기 질문만 한다.  “오리지널 러브레터는, 지금은 아트스쿨이 된 그곳 감옥의 도서관에 전시되어 있어. 오늘은 토요일이어서 개관을 하지 않았고.” 나도 기자가 묻는 질문에만 대답하기로 작심했다.  한 동안 이야기는 별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야기 할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옛 감옥에서 굶주림을 견디다 죽어간 죄수들의 빈 위장에 감염된 것처럼 허기가 몰려왔다.  “래밍턴이라고 들어봤어?” 내가 재형에게 질문했다.  “응.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안톤 쉬거가 사용하던 산탄총이잖아.” 나는 백팩에서 종이봉투 속 래밍턴을 꺼내 재형에게 한 개를 한 개는 입에 물었다. “말하자면 이게 호주전통 케이크야, 래밍턴. 조리법을 발명한 사람의 신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크하하하”그가 웃었다. 드디어 그를 웃겼다. 그가 하도 재미있어 하는 바람에 나는  레밍턴과 래밍턴에 대해 언급하지 못했다.  재형은 래밍턴을 우적우적 씹으며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기차가 일곱 개의 터널을 관통하기 전에 ‘감옥의 사랑’에 대한 기사를 끝낼 기세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아침에 일어난 사건을 생각한다. 여자는 무사할까? 기차가 몸을 흔들며 다섯 번째 터널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나 또한 일곱 개의 터널을 관통하기 전에 아침에 보았던 사건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다. * 기차가 막 역에 정차했을 때 망막에 사물과 사람들이 헛돌아 보이기 시작했다. 햇빛을 맞받으며 출구 쪽으로 꼬랑지 머리가 나가고 몇 분 후의 일이었다. 그가 객차와 플랫폼 사이에 떨어지는 것을 내 눈이 보았다. 강렬한 아침 태양빛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반쯤 눈을 감은 상태로, 그 광경을 보고 귀신을 본 것처럼 놀랐다. 잠시 시간이 정지하는 것 같았다. 자동으로 놀라는 감정을 막을 수 없었다. 벌떡 일어난 나는 밖으로 뛰어나가려고 했지만 밀고 들어오는 승객들 때문에 한 발도 떼지 못하고 꼼짝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꼬랑지머리가 휘청하더니 기차와 플랫폼 사이에 푹 꼬꾸라졌다고 믿었다. 나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손바닥만 세차게 문질러댔다.  기차가 출발 했다. 꼬랑지머리가 다쳤다면 기차가 정상으로 출발하진 못할 터였다. 그때서야 나는 안도의 숨을 들이켰다. 헛것을 보았나? 나는 내가 이상했다. 설마하니 내가 꼬랑지머리가 기차에 빠지길 바라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내가 잘 못 본 것이든, 혹은 꼬랑지머리가 빠르게 중심을 잡고 플랫폼으로 뛰어올랐든, 잘 된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여자를 떠난 것은 정말 잘 한 일이었다. 둘이 마주 앉아 있어봤자 계속 사랑싸움만 하게 될 것 같았다. 기차는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102살 중환자라고요!” 빽빽한 승객들의 밀림에서 한 여성의 외침이 들렸다.  “누구도 이 여인을 건드려선 안 돼! 감옥에 면회 가는 몸이야.” 꼬랑지머리였다. 나는 청신경을 곤두세웠다. 조금 전 사투리를 뒤섞어 지껄이던 그 자 특유의 발음이 틀림없었다. 믿을 수 없었다. 그가 객실에…… 한 번 떠났으면 됐지, 왜 언제 어떻게 무엇 때문에 돌아 왔는가.  “누구와도 함께 앉을 수 없어. 누나는…… 종신형의 애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꼬랑지가 하이에나처럼 소리쳤다. 누나? 그럼 그렇지,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세상엔 누나라고 부르는 애인도 흔하디흔하다.  “애인? 그 알량한 몸이 소중하다면 출구의 대기구역, 아니 객차와 객차를 연결하는 대차공간에라도 나가 무기수인지 뭔지를 오매불망 그리워하면 되잖아!” 여자 승객이 쌀쌀맞게 소리쳤다.  “몇 번을 말해야 해. 안된다고 했어.” 꼬랑지머리가 딩고처럼 으르렁댔다.  사람들이 일어선 것 그때였다. 검지를 곧추세워 흔들어대며 여자와 꼬랑지를 향해 메뚜기처럼 떼를 지어 몰려갔다. 덤빌 테면 덤비라는 식으로 앉아 있는 여자의 얼굴이 승객들의 다리 사이로 삐뚤삐뚤 보였다.  여자는 꼼짝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서, 거울만 깨져라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자에게 그들의 존재는 그리 중요하게 보이는 것 같지 않았다. 어떤 특별한 목표에 정신이 꽂혀버려, 외부적인 모든 일들이 상대적으로 그 힘을 잃어버린 의식상태라고나 할까.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뱉어냈다.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날마다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에 물든 관성 탓이야. 스스로를 달랬지만 한 번 떠들린 패닉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저 여자와 남자를 끌어내야 한다.”누군가 날카롭게 외쳤다. 몇몇 승객이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여자와 꼬랑지머리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정말 여자를 밖으로 끌어내릴까. 멀리 희미하게 다음 정차할 역의 입간판이 보였다. 하차하려는 승객들은 가방을 들고 힘겹게 출구로 빠져나가면서도 여자를 흘끔거리는 것만은 놓치지 않았다.  “경찰이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경찰이 얼굴을 내밀자 순식간에 객차의 분위기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빼빼마른 승객이 자신이 신고를 했다며 밀림을 헤치고 나가 경찰에게 접근했다. 그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그 동안의 일을 설명했다. 남자와 여자 경찰은 빼빼마른 승객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여자와 꼬랑지머리 앞에 버티고 섰다. 그때서야 여자와 꼬랑지머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빠른 동작으로 여자와 꼬랑지머리가 앉았던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금 전 102살 환자에게 자리를 양보한 승객까지 포함해서 모두 다섯 명이었다.  꼬랑지머리와 여자를 앞세우고 출구로 나가는 경찰의 뒷모습을 승객들은 복잡한 눈길로 지켜보았다. 경찰은 다음 역에서 꼬랑지머리와 여자를 하차시킬 모양이었다. 오래 되어 낡고 허름한 기차는 심하게 몸체를 덜컹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기차의 엔진 소리가 몸서리치는 금속성을 질렀다. 바퀴의 마찰음이 고막을 찢으며 급정거 했다. 불시착이었다. 금속이 타는 냄새가 진동하고 연기가 솟구쳤다. 앉아 있던 승객들이 파도처럼 일어섰다.  꼬랑지머리의 절규가 들렸다. 사람이 다쳤으니 가만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라는 경찰의 경고가 승객들을 제압했다. 기차 아래 여자가 떨어졌다고 누군가 입가에 손을 대고 속삭였다. 어떻게? 굳게 문을 닫고 달리는 기차에서 어떻게? 그렇다면 차량과 차량의 연결 고리 사이의 아득한 틈새에? 잠시 후 하늘 저 편에서 헬리콥터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나는 숨을 죽이고 째깍째깍 시간의 흐름을 가늠했다. 플랫폼에 내려앉은 헬리콥터의 날개 회전하는 소리가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구조대가 여자를 들것에 태우는 광경을 손바닥으로 햇볕을 가리고 쳐다보았다. 승객들도 손가락을 바퀴벌레 다리처럼 차창에 붙이고 쳐다보고 있었다. 하늘색 담요를 덮고 누워 있는 여자에게 인공호흡을 시도하진 않았다. 생명에 지장이 없거나, 또는 아예 숨을 멈췄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다. 밀폐된 차창으로 바라볼 순 있었지만, 정확한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었다.  곧이어 헬리콥터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동시에 기차도 출발했다. 낡은 기차의 엔진 소리는 한 동안 헬리콥터 날개소리와 뒤섞였다. 기차는 시드니를 향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자가 떠난 객차의 ‘조용한 칸’은 죽음처럼 고즈넉했다. 나는 충격 받은 감각기관들을 추스르며 잠시 완벽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아담을 만나러 가던 이브가 떠난 객차에서 나는 한자도 읽을 수 없었다. (끝)테리사 리 소설가 15회 재외동포 문학상 대상수상11회 민초문학상 대상수상소설집 <비단뱀 쿠니야의 비밀> <어제 오늘 내일>  

  05/0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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