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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을 여기에서 논한다면  먼 나라 이야기가 될까? 아니다. 적어도 여기 1세와 1.5세 한인들이 이용하는 매체는 호주가 아니라 대부분 고국의 제품이다. 왜 그런가는 짐작으로 쉽게 알 수 있다.이들의 매체 이용 패턴도 그렇다. 인터넷으로 고국에서 날라와 현장을 동시에 볼 수 있게 해주는  텔레비전, 유튜브, 카톡 화면과 그 콘텐츠가 압도적이다. 그 외는 역시 인터넷 화면에 뜨는 한국의 신문과 간행물 말고는 거기에서 실려 오는 종이 책을 읽는 것이다. 현지에 발행되는 교민 신문과 간행물인데 우리말이니 넓게는 한국 언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게 교민의 의식구조와 행태에 크게 영향을 미칠 건 분명하다. 모두 좋은 조사, 연구 감이지만 그런 건 한인사회에서 말도 꺼낼 수 없을 만큼 관심 밖이다. 왜 글 머리가 이런가?한국의 언론 환경에 대하여 조금 쓰려는데 강 건너 불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서다. 한 가지 불행한 것은 고국과 해외 한인사회 간의 뉴스의 흐름은 ‘일방향형(One way)’이어서 고국을 향하여 무슨 말을 한들 허공에 뜨고 만다.지금 한국에서는 여당이 발의한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놓고 여야가  격돌하고, 언론사, 언론 단체, 한국언론학회가 언론 탄압이라며 반대 입장을 밝히는 등 난리 법석이다. 한국은 지난 몇 십년 동안 언론을 규제했다가 완화했다가를  여러 번 반복했었다. 그러니 데자 뷔(Déjà vu!)다. 이 개정안은 조만간 국회의 본회의에 상정될 것이지만, 통과가 되든 아니든 이 글의 입장은 그대로다.언론의 핵심 이슈를 논할 때 먼저 써야할 키워드는 언론의 사회적 책임과 자유의 두 가지다. 그리고 언론의 자유와 규제, 어느 쪽이든 그  목적은 전자에 있다. 어느게 더 중요할까? 한국을 떠나오기 전 언론의 현장에 있었고, 나와서도 지켜봐온 나의 결론은 이렇다. 언론의 사회적 책임은 언론 자체가 알아서 잘 해야지 밖에서 누른다고  나아지지 않는다. 그게 언론의 본질이다.밤의 대통령지금의 언론이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거나 망각하고 있다면 그 원인은 언론 사주나 언론인이 이론과 제작 기술 면에서 미흡해서가 아니다. 대개는 기업으로 봐서는 이윤, 종사자로 봐서는 이권 챙기기라는 도덕성에 있는게 보통이다. 힘을 발휘해보려는 인간의 본능도 있다. 일종의 권력이다. 언론은 글을 잘 또는 나쁘게 써줌으로써, 폭로의 경우는 침묵을 지켜줌으로써 상대에게 이익, 불이익을 안겨줄 수 있다. 상대가 정권인 경우는 그 위력이 엄청나게 크다. 언론 사주를 한때 ‘밥의 대통령’, 기자를 ‘무관의 제왕’이라고 부르지 않았나.그런 잠재력을 가진 언론이 사회적 책임을 버리고 딴 짓을 할 가능성과 방법은 마음만 먹으면 눈에 보이지 않게 무진무궁하다. 법으로 규제한다고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기자들의 수준이 이번 개정안의 초점이 가짜 뉴스의 양산의 징벌에 있다고 하지만 언론은 더 나쁜   대안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언론은 법조와 관료 못지 않게 머리 좋은 엘리트 집단이다.박정희 정권 18년동안 언론에 대한 정부의 직간접 통제는 최고조로 달했었다. 그때 언론인의 촌지와 이권 개입 또한 최고였다. 똑똑한 언론인은 정부에 비판적이기 보다 오히려 협조해 촌지와 이권을 챙기는게 상책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김대중과 노무현 정권 아래 각각 세무조사와 기자실 폐쇄 등을 수단으로 한 이른바 언론개혁 조치치고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게 잘 되었으면 지금 왜 새로 언론 길들이기가 필요할까.가짜 뉴스내가 한국을 떠나올 무렵, 김성진씨가 공보부 장관을 할 때 신문과 간행물출판은 정부 허가제였다. 한 가지 언론 규제다. 얼마 있다가 등록제로 바뀌었는데 어디 이 자유화 조치가 언론으로 하여금 사회적 책임을 더 성실히 수행하게 만들었는가? 우후죽순격으로 늘어난  매체들간 극심한 광고 경쟁 속에서 불공정 보도와 언론의 비리는  더 늘어났다.  박정권 시절에 텔레비전은 지상파 셋이 전부였다. 당시 경제부총리도 지내고 한국일보 사주였던 장기영씨가 컬러 텔레비전을 하고 싶어했으나 박정희씨가 허가 해주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아래 지상파와 맞먹는 종편채널을 대폭 허가하여 텔레비전 방송국이 갑자기 늘어났다. 그 결과 이 매체산업은 외형은 몰라도 수준은 못해졌다.치열해진 시청률과 광고 경쟁은 이 매체의 콘텐츠는 좋게 말해서 대중문화화, 나쁘게 말해 저속화로 치닫게 만들었다. 시드니에서 텔레비전을 틀어보면 안다. 어떤 시간대든 광고가 압도적으로 많다.    광고료도 이전보다 내려가 광고를 더 받아도 성이 안차 그런 것 아닌가.제 4권부앞에서 언론이 이권을 챙기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그 하나는 매우 한국적이고 후진적이나 일반 한국인이 그게 왜 나쁜지 잘 모른다. 정권이 불러 주면 머리 아픈 언론 그만 두고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갈아타는 것이다. 선진국에서 드문 그런 사례가 한국에서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앞으로 더 그럴 것 같다.문제는 누가 이른바 제 4권부(The Fourth Estate)를 지킬 것인가이다. 김빠진 언론이 제 구실을 못하고 독재국가에서처럼 장식(裝飾)품이나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언론 규제에 앞서는 정치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고 싶다. 특히 언론을 버리고 떠나온 이른바 언론계 출신 국회의원이  여기에 선봉장 노릇을 하는 것을 볼 때 그렇다.  마지막으로 언론에 자유를 마음껏 누리게 한다면 잘 될까? 아니다. 그것도 지금의 정치사회문화 풍토에서는 어림도 없다. 대부분 선진국에서처럼 한국에도 언론의 횡포를 막는 명예훼손금지법이 잘 되어 있으니 그걸 활용하면 되는데 그게 안 되는 이유도  바로  정치사회문화에 있다. 언론도 사회의  일부이므로 언론만 나무랄 것이 아니디. 사회에 대한 총체적  분석이 먼저다.그런 맥락에서 나는 그 많은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한다는 언론학 교수, 양심있는 전직 언론인 출신, 이해 관계가 없는 독립적인 여러 다른 정치사회 관련 분야 학자와 지식인들이 팀을 이뤄 공동으로 하는 다학문적(Multi-disciplinary)이며  심층적인 연구로 길을 밝힐 것을 제안한다. 이 다학문적 접근에는 사회심리학(Social psychology) 전문가들이 끼어야 한다. 선진국이라는 한국이 계속 혼란을 겪고 사회통합이 어려운 것은 구성원 간 존재하는 큰 심리적 거리감(Social distancing, 이는 코로나 방역을 위한 물리적 distancing이 아니다) 때문이기에  그렇다.당장 해법은 못되어도 옳은 방향은 나올 수 있다. 쉬운 일이  아니나 그 길 밖에 없다. 지금과 같은 정권마다 다른 임시 땜방질인 입법이나 행정 조치로는 나라 돈만 축내고 소용없다. 그런 돈 아껴 이미 기술한 장기적이고 범국민적 대안마련에 쓰기를 건의한다.350개도 넘는 한국의 대학은 대부분 언론 관련 학과를 두고 있다. 대부분 한국의 언론 종사자는 그 학과 출신이 아니며 거기와 직접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언론 이론의 모체인 그 방대한  학계가 이런 큰 현실 사회문제를 보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교수들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학술 논문 발표 말고는 신문 칼럼을 쓰거나 방송 시사토론에 나와 얼굴을 알리는 데 열을 올리는 걸 볼 수 있다. 그리고  사회가 시끄러워지면 면피용으로 시국 성명이나 발표한다. 그런 식으로는 교수들의 또 다른 역할인 사회참여(Community contribution)를 제대로 할 수 없다.  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skim1935@gmail.com

  02/09/2021
  김삼오 칼럼

몇일 전 유튜브 공간에서 어느 인사가 차기 한국의 지도자는 누구여야 하느냐를 놓고 열띤 연설을 했다. 다가오는  제20대 (한국) 대통령 선거를 바라보며 그 자리에 나설 후보감을 놓고 온 나라가 들떠있으니 매우 적절한 연설 제목이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하여 생각이 좀 달라 여기에 써보고자 한다. 한국에는 다른 선진국에 비하여 유난히 지도자론이 많다는 사실이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잘 못 되어 가는 정치와 사회의 책임은 지도자(leaders)에게만 돌리고 거기에서 추종자(followers)는 빼는 어찌 보면 오래 쌓인 ‘노예 근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왕실정치나 피식민지 시절이라면 모르겠다. 3권 분립, 막강한 언론, 그 많은 종합 대학, 시민 단체와 자율 단체, 더 넓게는 국민이 주인이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통치자 혼자 사회를 개혁하거나 개선해나갈 수는 없다. 정치인, 관리, 법관, 언론인이 잘 못한다면 그들에게 가세하는 가족, 친척, 친지와 주변 세력들이 많으니 그런 것 아닌가. 그들은 국민이고 팔로워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의 지도자론은 지도자 개인의 덕목과 자질만이 아니라 국민과의 관계 속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믿는다. 지도자론과 함께 국민행태론이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다. 한국에서 지도자의 덕목으로 크게 치는 것 하나가 지조다. 역사적으로 지도자들이 얼마나 지조를 헌신짝처럼 버렸으면 그렇게 됐을까 생각해본다. 그런데 과거 그들이 그렇게 된 상황을 잘 분석해 본다면 거기에서 국민의 책임을 빼놓을 수 없다. 현대사에서 지조를 살려 원칙을 고수하려고 애쓴 지도자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오래 가지 못했다면 그런 소신있는 지도자를 아껴주고 받들어주는 사람들이 없어 그렇게 됐을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 아닌가. 지조와 원칙을 고집하는 사람을 리더쉽이 없다고, 주변머리가 없다고, 돈 잘 안 쓴다고 하나 둘씩 모두 떠나가버린다면 그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관운이란 무엇인가 5.16 쿠데타로 집권한 불법, 부당한 군사 정부는 대학 교수들의 참여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었다. 나의 한 대학 은사는 청렴한 학자라 정부로부터 달콤한 유혹을 받았지만 처음 대단히 비협조적이었다. 그리고 나를 만날 때마다 ‘에이, 망할 놈들’하고 욕을 했었다. 그런데 동료와 후진들이 하나 둘씩 장관, 국회의원, 무슨 총재 등 고위직으로 등용되고,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관운(官運)이 좋다고 부러워하며 모두 한 자리 하려고 동분서주하니 더 견디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결국 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되고 대사도 지냈다. 국민 대다수가 독재정권에 영합하는 것을 출세가 아니라 변절이라고 지탄하는 사회 분위기라면 그렇게 됐을까? 그런 상황은 5.18후 신군부 정권과 그 뒤를 이은 정권은 물론, 거기에서 벗어났다는 현 정권 아래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반세기도 더 지난 지금도 친일파 논쟁이 한창이다. 그런데 이들이 친일 부역을 하게 된 과정도 그랬을 것 같다.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하나 둘씩 총독부에 의하여 고관대작으로 등용되고 그것이 세인으로부터 수치가 아니고 관운이며 명예로 인정되니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과거 어느 정권이든 예외 없이  서정쇄신의 이름으로  비리를 척결하고 사회기강을 바로 세우려는 여러 프로그램을 내놓았었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요즘 대선을 앞두고 패거리끼리 라이벌 후보와 그 진영의 대어급 불의와 비리를 폭로하는 걸 보면 아연실질색을 하게 된다. 어느 쪽 주장이 맞는지 여기에 앉아 판단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어떤 지도자를 내세우든 국민이 지금과 같다면 나라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해외 한인의 대부분은 국적상 한국인이 아니다. 그러나 서방 지역의 한인들은 행태와 정신면에서 고국 사회의 영향권에서 산다. 이들도 우리 민족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skim1935@gmail.com

  29/07/2021
  김삼오 칼럼

한국은 차기 대통령감을 놓고 온 나라가 난리다. 대선 패거리끼리 치고받는 현장을 미주알고주알 밤낮으로 보도하는 언론, 거기에 온통 정신이 팔린 국민을 보면 참 우매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통령 하나만 잘 뽑으면 나라가 잘 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지 않은가.해외 한인사회와 무관한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해외 한인들은 나부터가 한국의 언론 환경 속에서 산다. 아이러니컬하지만 사실이다. 술상과 밥상 화제에서 그게 안 빠진다.과거를 돌아보자. 힘으로 집권하고 독재로 버틴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은 그렇다고 하자. 그 후는 민선이라고 했다. ‘보통 사람’이란 간판을 내건 노태우, 배짱 좋다는 YS,  ‘햇빛’을 들고 나온 DJ, 서민 대통령 노무현, 경제 대통령 이명박, 공주 이미지의 박근혜, 촛불로 탄생한 문재인 대통령, 모두 대선 때는 세상이 바뀔 것같이 들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나아진 건 없었다. 오히려 메가톤급 비리 아니면 참사로 끝난 게 더 많다. 굳이 “역사는 되풀이 한다(History repeats itself)”는 명언보다 사회도 과학이라는 말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이 보인다. 여건이 그대로라면 정치도 그대로일 수 밖에 없다.지정학적 여건이 상수라면 앞으로 한국을 바꿀 최대 변수는 국민이다. 대통령 출사표를 낸 후보들의 면면을 보면 자유민주의를 함부로 짓밟지 않고 나름대로 잘 해보려고 할 것 같다.  그러나 대통령은 혼자서 통치를 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 국민은 달라지지 않았다. 한 가지만 말해보겠다. 대통령은  권력을 거머쥐고 있어야 하니 충성을 우선으로 자기 사람을 쓰고, 이렇게 해서 등용된 사람은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나라가 아니라 개인의 영달을 좆아 혈안이니 어떤 정권도 안정이 될 수 없다. 이 악순환을 먼저 끊어야 한다.   그러나 어디 그들뿐인가? 개인 이익을 좆아 ‘풀 속에 숨은 독사(The viper in the grass)’와 같은 기회주의자가 너무 많다. 지금 이 나라가 정말 걱정해야 할 인물은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을 올바르게 이끌 정신적 지도자다. 지도자 한 두 사람으로 될 일도 아니다. 미국 사회학의 이론대로 지도자를 형식적 지도자(Formal Leader)와 비형식적 지도자(Informal Leader)로 나눈다면 한국이 지금 절대 필요로 하는 지도자는 후자다. 왜 그럴까? 양자의 구분은 제도권 지도자와 비제도권 지도자와 같은데  한국에서 원래 괜찮은 사람도 제도권에 들어가면 몹쓸 사람이 되고마는 게 보통이다.거기는 이미 물이 흐려져 있기 때문이다. 기회가 주어져도 사양하고 제자리를 지키는 독립적 마인드를 가진 지도자가 많아야 이게 바뀔 수 있다. 고국의 한국인과 해외의 동포들이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이냐보다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민족의 장래가 희망적이 될 것이다.  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skim1935@gmail.com

  08/07/2021
  김삼오 칼럼

대중은 물론, 학자들도 인문학과 인문사회과학이란 말을 섞어 쓰는 걸 흔하게 본다. 그러나 양자는 구별되어야 맞다.  전자가 기록, 정서, 사상(이상 보통 文史哲이라고도 부름), 제도 등에 대한 지식과 경험의 결과물인 통찰력을 가지고 사회 현상을 평면적으로 기술(Description)하는 학문이라면, 후자는 그 현상의 원인을 실증적 자료를 가지고  증명하려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해결을 위한 첫걸음은 전자의 지식으로 시작되지만 그것만으로는 미흡하다. 그 원인을 짐작, 가설, 통찰력에서 한발 더 나가 과학적으로 찾아야 올바른 해법이 나온다. 그게 없다면 인문학은 말로 끝이기 쉽다. 병의 치료라면 병에 대한 기술 뒤에는 처방(Prescription)이 따라야 하는 것과 같다.   가치, 철학, 신앙, 사유와 같은 영역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실물 및 현실 사회(Real world)를 사는 사람의 행동은 과학적이다. 사람도 아무렇게나가 아니라 일정한 방향으로 생각하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고통을 피하고 안락을 추구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게 한 가지 예다. 그러므로 한 개인, 한 집단이 다른 사람, 다른 집단과 다르게 행동한다면 거기에는 꼭 그럴만한 이유, 즉 과학성이 있다. 그걸 찾아야 한다.  그런데 과거 해봐서 알지만 한국의 학문 및 지적 풍토는 이 점 매우 취약했다. 잘 모르지만 지금도 그럴 같다. 그래서 사회문제 논의가 거의 탁상공론이거나 핵심을 빠뜨리기 일쑤다. 고국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우리대로의 연구가 불가능한 해외 한인사회는 더 그렇다. 사람과 사람 간 관계인 사회 현상의 과학적 분석은 고도의 방법론 지식과 작업을 필요로 하는데, 그렇게 하는 학자와 전문인이 대접을 받지 못해 그런 것이다. 다른 선진국도 어느 정도는 같다. 인성교육이 강조되고 지도자, 종교가, 문장가들의 좋은 강의와 설교와 글이 널려 있어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 이유가 상당 부분 거기에 있다. 오래 쌓인 심오한 문사철 지식과 역사에도 불구하고 중국이나 한반도가 서구에 비하여 근대화 과정에서 크게 뒤떨어졌던 이유가 또한 그것이다. 딱딱한 과학 해설한국과 세계 한인공동체가 물질적으로는 모르지만 사회발전 면에서 혼란을 겪는 것은 학자, 정치인, 지식인들이 사회문제에 대한 과학적 근거 없는 이론과 주장을 멋대로 쏟아내기에 그런 것이다. 그러니 독재 때는 별 수 없었다지만, 자유민주주와 표현의 자유가 회복되어도 사회는 오히려 혼란을 겪는 것이다.  특히 학자들의 책임이 크다.  이들이 권위있는 실증적 조사연구로 지식과 실천 프로그램을 내놓아 길을 밝혀야 갈피가 잡힐 텐데 그런 움직임이 없다. 나는 우리 사회의 이런 맹점을 글로나마 다루고 싶었으나 쓰기 어렵고, 써도 독자가 적을 것 같아 못했었다. 이번 이런 글이나 써보는 것은 2주 전 한호일보(6월 4일자)에 난 해양지질학자 김대철 박사의 신간 <나 박테리아야> 기사를 읽고 나서다. 그는 인터뷰에서 동화 형식으로 책을 쓴 이유가 딱딱해질 자연과학적 내용을 어린이와 일반인들에게 좀더 쉽게 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자연과학도 어렵다면 인문학의 과학화(化)를 이해시킨다는 건 몇 갑절 더하다. 동화로 가능할까?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나온 김에 헛수고가 될 지 모르지만 작은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이미 사사한 대로 그 필요성은 절대적이다.    산소 1과 수소 2가 합하면 물이 된다.  과학하면 그래도 쉽게 머리에 떠올릴 수 있는 건 눈으로 보고, 만지며, 냄새 맡으며 느낄 수 있는 자연과학 현상이다. 그러므로 먼저 자연과학은 무엇이며 인문사회과학은 이와 어떻게 다른가를 설명해보면서 이 문제에 다가가 보겠다. 중고등학교 때 물리학, 화학 실험 시간을 기억 못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때 본 대로지만 과학의 첫째 조건은 같은 여건(같은 원인, 연구방법론 용어를 쓴다면 선행 또는 독립 변수)이면 언제든지 같은 결과(종속 변수)가 온다는 자연의 약속이다. 바로 인과관계이며 과학성이다.  예컨대 화학 실험에서 수소 2와 산소 1이 합하면 물이 된다(H2 O1 =H2O). 예외가 없다. 어떤 때는 물이 되고 어떤 때는 밀가루가 된다면 거기에 인과관계와 과학성은 없다. 물속에 무거운 돌을 던지면 꼭 가라 앉는다. 가끔 뜨기도 한다면 마찬가지다. 반복성의 원리라고 불러도 되는 이 과학성이 있기에 현상에 대한 예측과 문제해결 방법이 나오는 것이다.   같은 여건에서 같은 결과가 나오는 과학성은 숫자로 증명할 때 가장 정확하다. 그래서 과학에서는 변수의 측정(Measure)이 필수다. 위 예에서 수소 2와 산소 1이 그것이다. 이 측정의 대상인 실체를   데이터(Data, 자료)라고 부른다. 이 점에서 인문사회과학의 경우는 제약이 많다. 여기의 대상은 거의 인간의 행태인데 그걸 알기 위하여 사람을 실험실에 동원할 수 없다. 그게 가능하다해도 사람의 마음 속을 수소 2와 산소 1식으로 잴 수 없다. 기껏 질문지에 답을 쓰게 해 그걸 종합해야 하는데 정확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또 과학성은 합리성과 같은 말인데 사람에게는 비합리성을 보이는 예외적 사례가 늘 있다. 나 때 중고등학교에는 난방 시설이 없었다. 겨울 수업 시간에 덜덜 떨던 학생들은 강의가 끝나자마자 거의 모두 햇빛이 쪼이는 따뜻한 건물 한쪽으로 모여들었다. 고통을 줄이기 위한 합리성이며 과학성이다. 정신병자이거나 특이한 성격 소유자가 달리 행동한다면 한 가지 그런 예다.과학의 두 번째 조건은 원인이 될 변수는 모두 빼놓지 않고 분석에 넣을 수 있어야 한다. 조사, 연구의 대상이 물질이 아니고 사람과 사회 현상인 인문사회과학의 경우 이게 또 다른 큰 제약이다.  수소 2와 산소 1과는 달리 변수가 대개 여러 개일 뿐만 아니라 서로 복합해있다. 이것들을 서로 가려낼 수 있어야 하나 이게 아주 어렵다. 고도의 방법론 지식과 기술이 필요하다.장님 코끼리다리 만져보기그 결과 일반인은 물론, 전문인도 쉽게 한 두 가지를 원인이라고 보는 우를 범하기 쉽다. 까마귀 나르자 배 떨어졌을 때 원인 변수는 까마귀가 아니고 다른 것일 수 있는 데 까마귀가 범인이라고 단정한다면 그런 경우다. 거기에 가려져있어 잘 안보이는 숨은 또는 제3의 변수(Hidden or third variables)는 빠뜨리기 십상이다. 장님 코끼리 다리 만져보고 그 큰 동물을 묘사한다면 마찬가지다.이 같은 제약 때문에 이 분야 조사, 연구 결과의 신뢰성은 낮기 쉽다. 대안은 샘플 집단을 크게 잡는 것과 확률(probability)에 의지하는 일이다. 10명 중 여덟이 이렇다면 유의미한 결과가 나온 셈이다. 그리고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1) 단정보다는 개연성, (2) 하나가 원인인 게 확실하지 않다면 인과관계(causal relationships) 대신 서로 연관성이 있다는 의미로 그저 상관관계(co-relationship), (3) 다른 조건이 같다면(Other things equal) 이것이 원인이라는 식으로 결론을 밝히는 게 안전하다.이런 제약 속에서라도 가능한 한 과학적으로 증명된 지식을 내놓고 대중이 그런 시각을 가지고 사회를 바라본다면 세상은 크게 달라진다. 그러나 현실은 아니다. 국정 이슈를 놓고 경제학자는 경제, 법학자는 입법, 철학자는 당위, 군사 전문가는 군사력 지식만을 가지고 갑론을박 각자 다른 주장을 내놓으니 올바른 해답은 없고 혼란만 가증된다. 국가 최고통치자와 각계 지도자들의 생각에 큰 영향을 주는 게 주요 신문의 사설과 기획 시리즈, 주요 방송의 시사토론인데 그 내용들은 미사여구로 짧게 쓰거나 멋있게 말해야 하니 원인으로서 한두 개의 변수를 가지고 주장을 펴는 비과학적인 게 다반사다. 거기다가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소속사나 자기집단, 자기이익을 고려해야 하기에 더 그렇게 된다.우리가 평소 접하는 많은 고사성어와 동양의 교훈과 덕담들이 “다른 조건이 같다면”이란 조건을 빼놓아 과학적이 못 된다. 예컨대 돈이 아니라 인격이 중요하다는 말은 모든 사람들의 재력이 비슷하다는 전제 아래에서 타당하다. 사회를 어지럽히는 사기꾼이 득실거리는 사회에서 남의 말은 하지 말라고 설파하고 다닌다면 실효성이 없다. 국민당 대표로 뽑힌 이준석씨를 30대 젊은 나이의 지도자라며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젊음은 지도자의 자질이나 운신을 결정하는 그 많은 변수 가운데 하나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 추진력 있는 젊은이가 더 좋다고 말해야 과학적이다.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skim1935@gmail.com 

  17/06/2021
  김삼오 칼럼

인류학은 문화를 크게 물질문화(material culture)와 정신문화 (또는 비물질 nonmaterial culture)로 나눈다. 이 2분법은 한 나라를 먼저 경제와 사회로 나누어 평가하게 한다. 양자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일 테지만, 한쪽이 잘 되면 다른 한쪽도 언제나 잘 되는 정(正Positive)의 상관관계는 아니다. 해방 후 부모님을 따라 일본에서 한국에 왔을 때 고국(그때 이름은 조선)은 말도 못하게 가난했다. 보릿고개야 물론, 대부분 농촌 가정은 벼룩과 이가 득실거렸고, 버릴 잡기장 종이도 없어 칙간에 가 지푸라기를 비벼 화장지로 쓰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곳간에서 살인 난다는 속담대로 기아(飢餓)선상에서라면 도덕이고 법이고 체면이고 있을 수 없다. 무조건 물질이 먼저다. 한 때 한국의 중앙 신문의 사설 제목 대로 “경제가 알파요 오메가다.” 요새말로 경제성장제일주의다. 경제가 발전하고 생산이 늘면 다른 건 금새 좋아질 수 있다. 이때는 물질문화와 정신문화의 발전은 거의 1대1의 함수관계다. 그러나 이 시기가 지나 물질이 넘칠 만큼 풍요해지면 어떻게 될까? 99을 가진 사람이 100을 채우려고 한다는 옛말대로 부자가 얼마고 갖고자 탐욕을 부림으로써 빈부격차가 눈덩이처럼 커지고, 부자는 분수에 넘는 자리와 삶을 추구하니 불의와 부도덕이 만연하고 사회는 불안해진다. 이때는 물질과 정신은 상당 부분 부(否negative)의 상관관계다. 학술용어를 쓴다면 전자는 단순모델 (Linear model), 후자는 하기에 따라 이리 저리로 휘는 복선적 모델 (culvilinear model)이다. 한국은 좋은 사례 연구감이다. 한국은 부자 나라다? 왜 이 글을 이렇게 시작하는가? 고국에 대하여 평소 비판적인 시각으로 글을 써온 나의 변(辨)이기도 하다. 그런 시각은 평소 남과의 대화에서 나타나기 마련이어서 가끔 마찰을 겪기도 했었다. 그들의 반박은 그래도 한국은 저렇게 잘 살게 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거꾸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논리다, 여러 가지 경제 지표만이 아니라 현장에 가 눈을 휘둥그러지게 하는 대형 병원, 고충 건물, 첨단 시설, 깨끗한 변소, 돈을 흥청망청 쓰는 사람들을 직접 보면 아니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도 한국은 부자 나라라고 했다. 미군 주둔 군사비를 짜내기 위한 말인지 몰라도. 어떤 지인, 심지어 일부 친척은 내가 해외에 나가 못사니까 고국에 대하여 부정적이라고 말했단다. 그건 아니다. 나는 살기 어려워 떠나 오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원하는 직장을 갖고 안정된 생활을 했었다. 그래도 비판적이었다. 부전자전이라고 할까? 젊어서 돈과 연줄 없이는 장래가 암울했던 사회를 바라보고 일본으로 건너간 부모님과 같은 심정으로 나도 그런 모험을 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고국에 대한 지금의 지적과 비판과 기대는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으며 물질의 풍요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쇄신되어야 한다고 보고 사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태어난 지 70년이 넘는 오늘의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아무리 나쁜 언론도 사회를 비취는 거울이다. 멀리 갈 것 없다. 이번 서울과 부산 시장을 뽑는 선거 동안 언론이 보도한 부정적 정치사회상은 가히 놀랄 만하다. 권력을 업고 하는 공직자들의 조직적 부동산 투기, 탈법 이권 개입, 사기, 은폐, 거짓 말, 쓰자면 한이 없다. 한마디로 온통 비리 투성이다. 모두 가짜 뉴스라고? 그 자체도 후진성이다. 텔레비전, 페이스북, 유튜브에 나와 신랄한 비난, 폭로, 공방전을 벌인 당사자들은 서민들이 아닌 유명 인사들이다. “다, 썩었다”는 제목으로 유튜브에 나와 설교를 한 목사도 있다. 사회가 이렇다면 물질이 흔해도 선진국이 아니며 상류층을 뺀 서민은 행복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매 선거 때 그랬듯이 나라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가 물으면 사람들은 민생, 즉 경제라고 한다. 이게 우리 국민의 수준이 아닌가. 케인즈 경제 요즘은 코로나19로 세계 어디에서나 경제가 정말 어렵다. 그렇지만 그 전에도 우리에게는 늘 경제가 No1 이슈였고 그 해답으로 경제 성장을 내세웠다. 년 2-5% 프로, 또는 그 이상의 성장과 국민소득 3만 달러, 4만 달러의 목표가 그것이다. 가난을 나눌 수는 없고 파이(Pie)를 키워 생산에 참여한 구성원에게 그 과실이 돌아가게 한다는 이 성장론의 원조는 케인즈(J. M. Keynes, 1883-1946)다. 그는 세기가 낳은 큰 경제학자지만 분배라든가 성장에 따르는 후유증은 그의 관심 영역은 아니었다. 그건 사회학자, 사회심리학자, 종교가, 양심 있는 지성인들의 몫이지만 경제, 경제만을 외치는 목소리 속에 모두 파묻히고 말았다. 또 경제는 우리만이 얼마고 엿가락 늘리도록 키울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른 신흥국가들과 극심한 경쟁을 해야 하며 후기 산업사회가 되면 임금이 높아져 성장률은 둔화된다. 거기다가 자원의 고갈, 기후변화, 자연 재해 등이 그 한계를 들어 낸다. 지금의 코로나 사태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잘 살기 위한 케인즈 경제의 한 가지 골자는 ‘부스러기 효과(Trickling-down effects)’다. 낙수효과(落水效果)라고도 불린다. 파이가 커지면 빈부의 격차가 생기기더라도 부자들이 떨어뜨리는 부스러기 덕을 볼 수 있다는 이론이다. 재벌에 대한 작은 협력 업체, 강남의 부자 동네에 모여드는 영세 영업자와 행상들의 사례가 그것인데 그게 쉬운 일인가. 갑질을 당하는 아파트 경비원은 말할 것 없고, 부자 고객의 필요와 입맛에 맞는 상품과 별의별 서비스를 개발해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업자들이 느낄 소외감을 생각한다면 그렇다. 잘 살게 되었다지만 빈부격차가 우리 세대에는 죽어도 해소할 수 없을 만큼 커져 사회가 온통 불신과 증오로 차 있어 나라가 저렇게 시끄럽다면 국민통합이 잘 되겠는가. 나는 밖에서 고국을 그저 헐뜯고자 이런 글을 쓰지 않는다. 이미 시사한 것이지만, 이와 같은 현실이 국론을 분열시키고 힘을 빼는 좌우 대결이 계속 된다면 통은 말뿐 영영 오지 않을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그 동안의 글에서도 나타난 대로 나는 적어도 윤곽만이라고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건설적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게 리서치를 바탕으로 좀더 깊이 있고 실천적 프로그램이 되었으면 싶지만 지금의 나의 처지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없고, 해 내도 많은 독자에 가 닿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대정부 로비 나는 그런 대안을 쓴다면 경제 성장을 멈추라고 하지 않겠다. 성장을 추진하되 이제는 좀더 정의롭고 공정한 방법으로 하고 그 과정에 국민의 역할과 구체적 실천 방안을 부각하겠다. “윗물이 맑아야 아래물이 맑다”고 하며 비리의 뿌리를 권력에 돌리지만, 잘 살펴보면 국민의 책임도 크다는 점을 부각시키겠다. “탱고를 혼자 출 수 없다(It takes two to tango)”는 영어 표현대도 불의와 비리를 권력자 혼자 저질을 수는 없다. 거기에는 사리사욕을 따라 동조하는 민간인이 꼭 끼어 있다. 그와 함께 해외 한인사회의 역할을 넣겠다. 특히 서민주의 사회(Egalitarian society)에 살고 있는 호주 한인들에게 대하여서다. 호주인들은 권력과 직위와 돈에 목매지 않아 우리에 비하여 훨씬 평등적이다(이 또한 국제경쟁의 압력과 제3세계 이민자들의 대거 유입으로 많이 퇴색했지만). 이 가치를 몸소 실천하고 고국의 동포들에게 전파하는 일이다. 나는 1980년대 초 여기에서 창간한 에서 호주 한인들의 고국을 향한 사회문화전도사 역할을 제안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꿈꾸는 소리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간의 추세를 보면 호주 한인들은 한국적 가치에 함몰되어 왔다고 봐진다. 나는 과거 한국의 통일 전문가와 정치인들이 호주에 와서 여는 세미나에서 언제나 고국을 위한대(對)호주 정부 로비를 해달라는 당부를 듣고 늘 웃긴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의 한국과 호주는 동심일체라고 할만큼 서로간의 이해가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고 보는데, 우리가 따로 로비 할 사항이 무엇일까? 로비가 필요하다면 1차적으로 자체 커뮤니티의 발전과 위상을 위해서라고 믿는 것이다. 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skim1935@gmail.com

  06/05/2021
  김삼오 칼럼

아래 ‘’이란 제목의 글은 5행시도 코미디도 아닌 시사 풍자라고나 할까? 카톡에 날라 들어온 이 글을 여기에 소개하는 이유는 재미 때문이 아니다. 또 글에 언급된 지적을 모두를 받아들여서도 아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내는 격이 될지. 이걸 소재로 한국의 인재 발탁의 실상을 한번 더 짚어보고 싶어서다. 이게 고국의 정치와 사회, 그 연장선에 있는 해외 한인사회에도 당연히 심대한 영향을 끼쳐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지만 그 부분은 여기에서 논외다. 높은 연봉과 연구비를 받는 인문학자들이 해야 할 실용적 연구과제지만 그런 리서치가 있을 것 같지 않다. 9급 공무원 수험생 만큼의 지식도 없는 김제동이 헌법을 강의하고!/20년간 주부로 지내던 최윤희가 문체부 차관을 하고!/저속한 개그나 하던 김미화가 안산문화재단 대표이사장하고!/통역사하던 강경화가 외무고시 출신들을 지휘하는 외무장관하고!/사시패스도 못한 조국이 법무장관 하고!/하기사! 조국ᆞ추미애가 법무장관 하는 세상인데! 김미화가 못할 것도 없지!/김제동을 헌법재판관에 임명하라!/참 능력 오지게 없는 사람이 대통령 되니 나라가 개판이네!!! 지면상 세 가지다. (1) 사법, 행정, 외무 어느 거든 고시합격 하나로 평생 파격적인 인재 대접을 받거나 그걸 당연하게 보는 일반의 시각은 매우 전근대적이다. 어떤 시험이든 시험은 무엇을 테스트(test or measure)하느냐가 관건이다. 이 국가 고시는 과목 당 뭐뭐를 논하라는 출제에 대하여 1시간 내에 해답을 써내야 하는 주관식 필기 시험이다. 이 시험을 몇 년에 걸쳐, 때로는 청춘을 바쳐 준비하는 응시자 치고 해당 지식을 잘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모두 거기서 거기다. 따라서 이 시험의 점수 차이는 제한된 시간 내에 얼마나 빨리 답안을 써내느냐에 있다. 결국 기억력 좋고 펜을 빨리 굴리는 자가 합격하게 되어 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동량재(棟梁材)를 불과 몇 가지 과목에 대한 이와 같은 교과서 지식과 순발력 테스트로 결정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조선조 때의 과거시험과 왜정 때의 고등문관시험을 답습한 건데 이게 얼마나 나라에 누를 끼쳤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한문 실력 하나를 보는 건 물론이고, 상상력, 자유주의 사상, 인품과 같은 정말 중요한 인적 요소는 도외시한 과거 일본의 등용제도가 말 잘 듣고 튼튼한 행정관료, 기술관료와 군벌 집단을 만든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획일성 때문에 미국을 상대로 무모한 전쟁을 일으킬 때까지 어느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없어 나라가 잿더미가 되는 비극을 맞지 않았는가. 거수기 장관 (2) 자유민주의 국가에서는 주요 기관과 단체의 의사결정은 합의체를 거쳐 하게 되어있다. 대통령책임제 아래도 15-20명의 장관으로 구성되는 되는 내각(또는 국무회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승만 초대 대통령 시절부터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의 일방적 지시나 정책에 토를 달 수 있는 장관이 하나라도 있었나? 이건 보수와 진보 또는 좌와 우 어느 성향의 정부 모두 마찬가지였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거수기가 아닌 인물을 장관직에 발탁하지 않았다. 이때 가장 우선적인 덕목은 충성심이다. 무슨 불의의 지시에도 마다하지 않는 하수인 말이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이 대통령 시절에는 국무위원 중 다소 할 말을 하는 인물이 더러 있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탁월한 재능으로 칭송을 받던 이런 용인술을 따라 매 정권마다 팔자에 없는 장차관, 국회의원, 기관장을 지낸 사람은 무지기수로 많았다. 강경화, 최윤희씨의 경력을 나는 자세히 모른다. 그러나 통역사가 어때서? 미군정시절은 물론 70년대 초반까지도 통역관은 아무나 하는 직업이 아니었다. 그리고 강씨가 통역일 만 했을까. 통역에다가 대학교수를 했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석학으로 알려진 대학교수, 판검사에다가 3선,4선 국회의원을 자랑하는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이른바 중진급 인사가 입각을 하여 소신대로 일하여 나라에 크게 기여한 사례가 있었나. 그러니 무식하거나 전문성이 떨어져도 말 잘 듣고 때깔 좋으면 충분하다. 정부 정책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내려 앉는 용기만이라도 있으면 진짜 인재로 쳐주어야 한다. 장관은 국무위원 말고도 소관 행정부서를 관장하고 수백명 부하를 지휘, 통솔한다. 요즘 한국의 정부는 얼마나 비대해졌는지, 장관 밑에 차관, 제1차관, 2차관, 국장 등 수십 명의 참모를 두고 있으니 장관은 전문성은 없어도 된다. 충성 경쟁을 하는 부하들만 잘 다스리면 되니까. (3) 정치를 논하면서 정치사회문화란 말을 빼놓을 수 없다. 정치는 통치자와 정권 홀로가 아니라 피통치자인 국민과 함께 하게 되니 그런 것이다. 국민의 힘이란 이름의 야당도 이미 생겼지만, 정권에 대한 여론지지도에 목을 매는 요즘 정치를 보면 이게 더 뚜렷해졌다. 이 때는 국민 수준을 말하는 국민 행태, 즉 민도가 관건이다. 지도자 복이 없는 나라를 한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지도자를 키울 수 있는 민족인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힘으로 집권한 박 대통령은 그 정통성 없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강한 충성심을 보고 하는 인선이 절대 필요했다. 그런데 선거를 거쳐 정당하게 집권한 다른 정부에서도 정도 차이가 있을 뿐 그 관행은 그대로인 건 왜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자면 역시 정치사회 풍토라고도 불리는 우리의 정치사회문화 속을 깊이 들어다 봐야 한다. 지금의 대학 교수, 법관, 대부분 고위직을 지낸 전문인들은 퇴임 후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그런데 왜 초연한 원로로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정치판을 배회하는 자가 그리 많은가. 그게 정치사회문화다. 고국에 대하여 훈수와 비판을 아끼지 않는 해외 한인들도 생각해 볼 수 있기 바란다. 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skim1935@gmail.com

  01/04/2021
  김삼오 칼럼

물질과 물량 규모와 풍요가 지표인 경제대국과 함께 문화대국이 목표라면 한국은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한다. 잘 살게 되니 세계 무대에 나가 뛰는 연예인 그룹도 많고, 볼쇼이나 뉴욕 필하모닉 등 세계적 공연단들이 한국을 찾아오고, 세계적으로 큰 문화 행사에 활발하게 참가하는 한국인 개인과 단체도 많아졌는데 이게 무순 뚱단지 같은 소리인가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란 교육과 마찬가지로 넓고 넓은 분야다. 당연히 영화, 관광, 스포츠 등 얼른 눈에 보이고 돈 되는 분야에서는 선진국 모델을 그대로 따라 손색이 없을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은 데에서는 허술한 곳이 아직도 많다. 풍요해져도 오히려 나빠진 사람들 매너는 한가지 사례다. 이 글에서는 많은 걸 다룰 수 는 없고 쉽게 간과하기 쉬운 외래어 한글 표기에 대하여 써보고자 한다. 호주 퀸즐랜드주의 수도 Brisbane을 브리즈번 또는 브리즈베인, Melbourne을 멜번 또는 멜버른, 어느 쪽을 쓰던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술과 교육과 문화 면에서 보면 이런 것 하나 통일 못하고 사람마다 달리 쓰는 나라는 선진국이 아니다. 또 한국어를 배웠다는 외국인이 여행 중 비행기 안 지도와 거리 표지판에서 보는 같은 도시 이름이 서로 다른 걸 볼 때 어떤 기분일까? 나는 이 토픽을 과거 글에서 몇번 다뤘지만, 최근 여기 시드니에서 이메일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한국에서 책 한 권을 내면서 경험한 예를 들어 또 한번 이 문제를 짧게 거론해보고자 한다. 국립국어원 여기서 첫번째 보낸 원고에 출판사측이 빨강 밑줄을 쳐 보낸 외래어 네 개가 그것이었다. 타스마니아(Tasmania)는 태즈메니어, 웤홀러는 워홀러, 랄프 나달(Ralph Nadar, 70년대 미국 소비자 운동의 대부)는 랠프 나다르, 밴달리즘(Vandalism, 기물파괴 행위)은 반달리즘으로 고쳐야 하지 안겠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인터넷 검색기를 통하여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인 국립국어원이 제정한 한글 철자법과 외래어표기 통일안을 따라 색출한 결과인 게 분명하다. 대부분의 한국의 교육기관, 언론사, 출판사들이 이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이메일 편지로 의견을 교환하다가 일을 순조롭게 마치기 위하여 타스마니아를 빼고는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기분이 찜찜하고, 뭔가 잘 못되어 있어 이 통일안은 리뷰를 거처 일부 수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과거를 돌이켜 보건데, 한국은 정권 유지나 나라의 큰 돈벌이 같은 얼른 봐 위정자들에게 이해관계가 큰 과제말고는 몇 사람 주무 관청의 실무자나 사계의 실세들이 졸속으로 결정하거나 한정된 전문 그룹에 위촉하고 끝내버리는 게 특징이다. 이런 사안은 상당 기간을 두고 각계, 각층의 많은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쳐 해야 하는데 아니다. 웤홀러 해방 후 한글 맞춤법과 외래어표기법이 그렇게 자주 바뀌거나 서로가 다르게 쓰여져 온 이유가 그것 아닌가. 2004년에 발족한 국립국어원이 외래어표기법을 통일시킨 과정을 나는 모르나 짐작이 가는건 미국에서 유학한 일단의 젊은 교수들에게 위촉하여 만들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타스마니아는 호주 땅이다. 나 개인으로서는 그 지명을 태즈메니어라는 이상한 소리로 발음하는 호주 사람 못봤다. 미국 영어만이 전통 영어가 아니다. 같은 영어지만 미국은 A를 ‘애’로, 영국과 호주를 포함한 대부분 영연방국들은 ‘아’로 발음한다. 한국에서 영문학을 좀 한 사람은 오래 전 부터 미국 시인 Ralph Emerson을 랄프 에머슨으로 불러 왔다. 랄프가 어째서 랠프라고 굳이 혀꼬부라진 미국 발음으로 불러야하는가. 그런가 하면 밴달리즘은 어찌 반달리즘인가? 웤홀러 또는 워홀러는 Working Holiday maker의 줄인 우리말 약자다. 국가 간 호혜원칙에 따라 상대국 젊은이들에게 일하면서 여행을 하게 하는 비자 입국자를 의 미한다. 나는 이 비자의 대상자도 아니였고 지난 30여년 간 매년 약2- 3만명의 한국인이 이 프로그램으로 호주를 거쳐 갔으나 이와 어떤 이해관계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 제도에 특별히 인연을 느끼는 이유가 있다. 호주 연방정부는 정부가 호주국립대학(ANU)의로스 가나(Ross Garnaut) 교수에게 위촉해 외교, 무역, 문화 면에서 호주의 동북아 진출을 위한 건의서를 발간하게 했다. 그 결과1989년 나온 게 이른바 가나 보고서 ( 정식 명칭 Australia and the North-East Asia Ascendancy)로서 역시 연방정부의 자금으로 설립된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Australian National Korean Studies Centre)의 한 가지 지침서가 되다시피 여겨졌었다. 그 무렵 그 연구소에서 일한 나도 이 보고서를 자세히 읽었는데 특별히 내 눈을 끈 부분은 당시 일본과 주요 유럽 국가들과 실시 중이던 이 프로그램을 한국으로도 확대할 필요성과 가능성 제기였다. 연구소를 떠나와 교포신문에 쓴 칼럼에서 이 사실을 언급했었고 그 후 한국의 매체에도 조금 보도되었다. 1994년 호주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과의 기자 회견 중 수행한 한국 기자들이 이 문제를 거론하자 호주 정부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실시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알기로는 오늘 한국이 여러 선진국들과 체결하여 실시하고 있는 이 워킹 홀리데이 제도의 시발은 호주라고 생각한다 (틀리다고 생각하는 독자는 알려주기 바란다). 나는 처음 내가 썼던대로 이 제도를 워킹 홀리데이 방문자, 아니면 웤홀러 (또는 워크홀러)라고 쓸 것을 고집한다. 무릇 모든 약자는 음절 (Syllables)이 늘어나지 않는 한 될 수록 원문에 가깝게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어학자가 아니나 웤홀러, 워크홀러, 워홀러 모두 두 음절로 발음할 수 있다고 본다. 워홀러는 무슨 벌레 이름 같이 들린다. 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skim1935@gmail.com

  04/03/2021
  김삼오 칼럼

한호일보 새해 둘째 주 본란(1월 15일)의 후속으로 한국의 재외동포정책 관련 글을 쓰고있던 중 ‘라이드 시티 대규모 지원금 현재 신청 접수 중’이라는 광고가 나와 서둘러 그 이야기를 먼저 하기로 바꿨다. 이유는 평소 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외부 공익 지원금 (Grant)에 관심이 컸던 나는 재작년 7월 100명도 넘는 한인이 참석한 제롬 락살 라이드(The City of Ryde)시장과 카운슬러들과의 대화의 모임에서 이 문제를 거론한 적이 있고, 한호일보에 난 광고를 보니 첫 라운드인 이번 응모의 신청 마감일은 2월 12일로 촉박하기 때문이다. 그때 상항을 ‘라이드 카운슬 모임 참관기’라는 제목으로 같은 신문에 썼었다. 그 내용을 일부 적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대화는 락살 시장과 사회 및 통역을 맡은 피터 김 시의원과 주경식 목사가 앞 테이블에 앉고 참석자 전원이 차례 차례 마이크 앞에 나와 거주자로서의 애로 사항이나 제안을 말하고 카운슬측이 즉답을 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질문 내용의 성격으로 봐 마지막에 할 요량이었으나 앞에 앉은 사람부터 시작하라고 해서 1착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평소 어느 한인 또는 한인 단체가 해당 카운슬에서 보조금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어오던 차라 이렇게 물었다. 나는 라이드 거주자는 아니나 한인사회 일원으로 묻겠는데 카운슬이 내부적이 아니라 공개적인 광고로 널리 알려 신청자를 받아 심사하여 공여하는 그런 계획은 없는가였다. 이에 대한 즉답을 한쪽 자리에 앉아 있던 내가 알기로는 라이드시의 행정 책임자인 제너럴 매니저(General Manager)가 했다. 그는 그런 계획이 있다면서 머지 않은 장래에 실천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광고를 보고 이 사람들은 한다면 하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한인들이 이에 관심을 갖고 기회를 활용해보려고 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영미사회에 그랜트가 많지만 그걸 받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흔히 영미 단체 그랜드 담당자들이 하는 말이 있다. “ You should be prepared for disappointment”이다. 실패할 각오로 접근하라는 뜻이다. 그만큼 경쟁적이니 신청을 위한 준비를 잘해야 하고 우리 한인사회도 그런 일에 익숙해져야 할 시점이다. 그때 모임 관련 글에서도 지적한 대로 각자가 필요하다고 보거나 느끼는 요구 사항들을 즉흥적으로 쏟아내는 식이면 백전백패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충분한 사전 정보다. 이런 공개 신청 프로그램에는 신청 자격과 사업 기준에 대한 세칙이 있을 텐데 이걸 먼저 입수해야한다. 짐작하건대 이 신청은 한인사회만이 아니라 라이드 거주자와 단체 전체가 대상일텐데 분명치 않다. 광고에 따르면 2,3 라운드가 금년에도 두번 더 있다니 이번에 잘 못해도 시간을 두고 준비할 수 도 있겠다. 또 중요한 건 신청 준비는 개인도 못지 않게 한인사회 차원의 전략이다. 위에서 말한 각개 약진이 아니라 한인사회의 전체의 이익이란 틀안에서 개별 프로젝트 간 조울이 필요하지만 이 사회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신청 사업 설명(project proposal)을 설득력 있게 작성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신청자가 반을 낼 테니 나머지를 요청하는 이른바매칭펀드(Matching fund) 방법을 제안하는 것도 경쟁력을 높이는 일이다. 자체적으로 돈을 반정도를 내겠다면 사업의 성공률은 그만큼 보장된다고 봐야 한다. 한 개인 또는 단체가 아니라 여럿이 공동으로 하는 사업을 제안하는 일종의 신디케이트(Syndicate)형식도 마찬가지다. 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skim1935@gmail.com

  28/01/2021
  김삼오 칼럼

재외 한인들의 고국 지향성 새해 첫번째 글도 한국, 더 넓게는 한민족 관련이 되었다. 해외에 살면 거기 일이나 잘하지 왜 고국이며 한민족이냐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답을 과거 여러 글에서 썼지만, 말을 좀 바꿔 써본다면 이렇다. 재외동포, 그 중에서도 자유 이민으로 지난 반세기 동안 서방사회로 나온 1세대들은 대부분 고국 지향적이다. 생계를 위한 게 아니라면 심리와 행태 면에서 현지 미국인, 호주인, 캐나다인, 브라질인과는 동떨어진 우리식 삶을 산다는 것이다. 여기 한인사회의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이어령, 정세현, 문정인, 이재명씨 같은 한국의 저명 인사들이 시드니를 다녀갔다. 그들의 공개 강연 모임에 각각400여명의 한인들이 모였었다. 정씨와 문씨는 한반도 통일정책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멘토로서 그 분야 굵은 직함을 갖고 있고, 이씨 한 분은 대통령 유망주인 정치인이고. 또 한 사람 이씨는 노태우 정권 때 장관으로 몸 담은 바 있지만 네임벨류 있는 학자다. 그런 분들이 여기와서 헛소리를 할 리는 없다. 그렇다고 그간 듣지 못한 새로운 발언을 할 것도 아니었다. 더욱 교민과 직접 관계가 있는 호주나 호주 한인사회 사안에 대하여는 문외한인데 무슨 말을 하겠나. 그런데도 한인들이 그렇게 모여드는 이유는 간단하다. 고국지향적인 정서, 그 가운데서도 유다른 한국인의 관존민비 또는 관숭배 사상이다. 여기 한인 인사가 우리 문제를 가지고 무슨 말을 하고자 공개 강연이나 학술 발표를 하겠다면 30명을 모으기가 어렵다는 걸 봐도 안다. 또 하나 대조적인 사실은 호주 대학이나 호주 기관이 가끔 주최하는 대중 강연장에 나가보면 한국인은 거의 하나도 없다. 언어장벽이 한 가지 이유일 수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역시 이 지역 해외 한인들이 주류사회의 일원이 아니라 한국인으로 산다는 증거다. 재외동포정책 이들의 매체 사용(Media uses)을 봐도 그렇다. 신문과 책과 잡지 등 간행물과 탤레비전도 한국에서 실려오거나 전파되어 오는 것들을 주로 읽고 본다. 요즘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휴대하고 다니면서 밤낮 시간을 소모하는 스마트폰 속 읽을거리, 볼거리도 우리 말이며 소재가 대부분 한국에서 출발한 것들이다.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의 장면이 그렇고, 카톡이나 메시지 채널로 전달되는 문자도 거의가 우리말이다. 한·호 국가대항 축구시합을 한다면 교민들은 어느쪽을 응원할 것인가? 각자 자신들이 대답해보기 바란다. 이런 현실은 이 지역 한인들의 가치와 행태는 아이러니컬하게 거주국보다도 고국으로부터 더 영향을 받는다는 가설을 설득력 있게 만든다. 더욱 그런 가치관과 행태는 근대화, 국제화, 민주화, 선진화라는 기준에서 본다면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 부분 떠나올 때 버리고 왔거나 지금이라도 버려야할 것들이다. 또 지나친 고국지향성은 코리안 커뮤니티의 주류사회로의 진입을 다른 소수집단에 비하여 크게 뒤떨어지게 할 전망이다. 이게 바로 내가 고국의 실태나 재외동포정책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이유다. 그런 사례 중 중요한 하나가 한국 정부의 재외동포정책 자체다. 이 정책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다. 동포들이 (1) 민족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2) 주류사회에 뿌리를 잘 내리게 돕는데 있다. 그런데 내가 40년간 현지에서 지켜본 바 결론은 이 정책이 가만 두어도 될 전자에 치중하고, 가만 두어서는 잘 안되는 후자를 등한시 해왔다는 것이다. 이 가설을 길면 안 읽는 이 지면에서 다룰 수 없다. 제대로라면 논문 하나를 써야한다. 나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차후 칼럼으로라도 더 써볼 생각이다. 다만 한마디만 여기에서 남긴다면, 먼저 해외 각 한인사회의 필요를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지적 구심점이 없는 현지에서는 물론, 본국에서 이 분야 책임을 맡는 전문인이나 연구비를 받을 수 있는 어느 학자가 그런 조사. 연구를 했거나 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는 재외동포청이나 보도된 대로 재외동포 교육문화센터를 설립해도 별로 달라질 건 없어 보인다. 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skim1935@gmail.com

  14/01/2021
  김삼오 칼럼

요즘 한국 사람들이 엘리트란 말들을 잘 쓴다. 거의 한국어화가 된 영어(원래 불어 Elite, 선택된 소수)의 뜻을 찾아보고, 실제 어떤 사람을 그렇게 부르는가를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관찰을 하게 된다. 엘리트는 대중 가운데 극소수를 의미하지만, 영어사전에 설명된 ‘the best of the group(그룹 중 최고층)’대로라면 그냥 소수가 아니라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최고 역할과 특권이 주어지는 소수이다. 무력으로 싸워서 이기는 게 목적인 군대의 경우는 이런 소수 정예부대의 역할과 특권에 대하여는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 일당백이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정권의 핵심이 되는 몇 사람의 권력 엘리트(The power elite), 행정의 윗선인 소수 엘리트 관료, 국가의 부를 많이 거머쥐어 남다른 힘을 발휘하는 몇 안되는 재벌 총수와 그 일가족, 소수 지성으로 명성을 누리는 학자들에 대하여는 지금처럼 무조건적으로 엘리트란 타이틀을 붙여도 좋은가 묻게 된다. 극소수 정예가 사회를 이끈다 또는 지배한다는 뜻의 엘리트주의(Elitism)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물론 일리는 있다. 행정에 대한 지식과 경륜이 없는 관료가 행정부를 잘 운영할 수 없다. 오죽하면 해방 공간에서 우리대로의 잘 훈련된 고위 경찰, 행정가, 법관이 없거나 모자라 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일본에 부역한 전문 인재들을 상당수 등용해야했었다. 이게 오랜 과거 청산의 시비거리가 되어 왔다.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니다. 엘리트주의를 내세우고 엘리트들에게 나라를 이끌고 발전시키는 역할과 특권이 부여되고 그런 이유로 최고의 명예가 주어진다면 이들 엘리트들에게는 한 가지 새로운 자격 요건이 부과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름이 아닌 도덕성이다. 특히 오늘의 한국적 상황에서는 그렇다. 무슨 말인 지 사례를 들어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일류대학 법과를 나와 젊은 나이에 고시를 합격한 수재로서, 법관과 변호사 생활을 거쳐 축적한 돈, 해박한 법률 지식, 유창한 언변에 힘 입어 국회에 입성하고 나중에는 청와대 수석이된 행운아들(?)은 분명 언론과 사람들이 만든 엘리트다. 그런데 이들 엘리트들이 사회에 기여보다는 누를 끼친 정황이 더 많다. 권력 엘리트는 어떤가? 총칼로 헌정을 짓밟은 전력은 물론이고, 그 와중에 정치 8단이니 9단이 하는 잔꾀로 정치판에 끼어든 소수 정예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엘리트 지식인이라는 명망을 팔아 밀어서는 안 될 정권에 빌붙어 출세한 ‘먹물’들도 그렇다. 엘리트라는 용어를 함부로가 아니라 가려서 써야할 이유다. 송구영신 (送舊迎新)과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크리스마스의 계절에 이렇게 딱딱한 글을 써 송구스럽다. 그러나 이 특별한 시즌에 누구나 쓰는 말은 온 지구상의 평화와 밝은 새해다. 그건 말로만이 아니라 쉬지 않고 노력해야 될 일이다. 아디유! 다시 오지 않을 2020년.. 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skim1935@gmail.com

  17/12/2020
  김삼오 칼럼

제가 쓰고 있는 칼럼의 명칭인 ‘독자의 편지’는 서방신문에 빠지지 않는 ‘편집자에 대한 편지(Letters to the Editor)’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면은 많은 독자가 참여할 수 있게 기고자가 길지 않게 자기 제안이나 의견, 남의 글에 대한 논평을 쓰는 게 보통이어서 ‘공개 토론의 광장’이 됩니다. 또 잘 쓴 글에 힘을 실어주는 피드백(Feedback, 메아리) 난이기도 합니다. 다만 호주 한인 신문에 그런 독자의 참여가 거의 없다 보니 이 귀한 지면을 제 혼자 독불장군으로 쓰고 있는 기현상입니다. 독자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오늘 ‘독자 편지’는 지난주 한호일보(11월20일자)에 실린 기후 스님의 ‘중맹모상(衆盲模像)과 아전인수(我田引水)’ 제목의 글(금요단상 칼럼)에 대한 피드백입니다. 다만 서두의 몇 마디가 사족(蛇足)이 되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스님은 평시 칼럼에서 불교 사상과 동양철학을 바탕으로 현실생활에 매우 유익한 지혜와 함께 가끔은 고국과 여기 한인사회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아 개인적으로는 많은 감명을 받았고, 한인 언론에 크게 기여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해외 한인사회의 실태는 고국과 고국의 재외동포정책을 떠나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말 잘하는 정치인 이번 ‘중맹모상과 아전인수’는 오늘 잘 살게 되었다는 고국이 저렇게 시끄러운 이유가 이 두 사자성어에 잘 담겨있다고 보는 게 분명 합니다. 백번 동감하면서 곁다리로 제 생각을 한 두 가지 보태고자 합니다. 중맹모상은 칼럼에서도 풀이된 대로 맹인이 코끼리의 각기 다른 작은 일부분만을 만져 보고 그 거대한 동물을 논하는 우(愚, 어리석음)를 지적합니다. 그런데 이건 오늘 많이 배웠다는 한국의 학자와 지식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연 현상과는 달리 살아있는 인간이 실체가 되는 사회현상은 대부분 원인이 되는 변수가 많고, 그것도 쉽게 분리할 수 없게 서로가 복합되어 있는 게 특징입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를 놓고 찬반 논쟁을 벌일 때 논객들은 각자 주장을 자기에게 익숙한(또는 눈에 쉽게 보이는) 한 두 개 제한된 변수를 가지고 펴기 쉽고, 그러다 보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끝나 말 잘하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결과가 됩니다. 그리하여 올바른 해법을 못 찾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회과학은 이러한 맹점에 대비해서 오래 축적된 사회과학적 연구 방법론을 마련해 놓고 있지만 그게 힘 센 정치인이나 웅변가들의 관심이 되겠습니까. 더 문제인 것은 아전인수, 즉 자기 논에 먼저 물을 대는 자기 이익 중심의 주장입니다. ‘독재 정권’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현 문제인 정권은 박정희 군사정권과는 비교가 안 되게 많은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고 봅니다. 자유민주주의 아래 의견의 다양성을 위하여 언론의 자유는 필수입니다. 그러나 다양한 의견도 양심에 따라 정직하게 표출될 때 미덕이 될 수 있지 아니면 백해무익합니다. 요즘 유튜브 화면에서 많은 새로운 정보와 뉴스를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일부 TV출연자와 유튜브 운영자들의 담대한 발언과 행태를 지켜 볼 때는 이들이 특정 세력의 하수인들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품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과거를 돌이켜보건대 한국에서 그런 기회주의자들이 승승장구하였습니다. 이런 구태가 없어져야만 나라가 안정될 것입니다.

  26/11/2020
  김삼오 칼럼

한국인은 큰 것과 높은 것을 유달리 좋아한다. 민족성이며 문화다. 어렸을 때 집안 아저씨 하나는 나를 볼 때마다 커서 ‘대장이 될래’, ‘똥 풀래’하고 놀리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대장, 높은 자리, 우두머리가 되라고 가르친 셈이다. 당연히 잘난 한국인은 크고 높은 사람이 되어 큰 일을 해야 하고, 궂은 일은 작고 지위가 낮은 사람이 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작은 것을 뜻하는 소(少)자보다 큰 대(大)자를, 아래를 뜻하는 하(下)자보다 높은 상(上)자가 언제나 좋다. 대통령, 대법원, 대학, 대장정, 대기업, 상관, 상급자, 상품(上品) 등 모두 그렇다. 중소기업보다 대기업이 자본과 시설과 인원이 많아 크고 높고 세게 보여 직장으로서 이미지가 월등히 좋은 것이다. 그러나 기계를 생각해 보면 이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를 곧 알게 된다. 작은 부품 단 하나라도 부실하면 기계는 불협화음을 내고 전체가 멈춰버린다. 그러니 큰 것과 작은 것 사이에 차별을 할 수 없다. 정밀기계 기술이 앞선 스위스는 작으니 비싼 고급 시계로 세계 시장을 석권해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회도 마찬가지지만 이때는 작은 걸 소홀히 하더라도 전체는 돌아가니 그 차이를 쉽게 보지 못한다. 후유증은 크지만 식별하기 어렵다. 오늘 한국 사회의 불안정 요소가 대부분 거기에 있지만 그걸 걱정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중앙집권제에 오래 익숙해진 한국인들의 1차 관심은 정치와 권력이다. 그리하여 잘난 사람은 모두 서울로 가야하고 대장과 우두머리가 되려고 이전투구하고, 대중의 관심은 누가 대통령, 청와대 수석, 장관, 서울시장이 될 것인가에 집중되니 사회는 조용할 날이 없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누가되든 별 수 없는데도 말이다. 그런 분석을 하는 사람이 없어 보인다. 학계도 마찬가지다. 사회 현상을 학문적으로 다루는 방법론은 크게 거시(Macro)와 미시(Micro)다. 전자는 현상을 큰 그림을 그려 보는 방식이고 후자는 현미경으로 봐야할 만큼 잘게 쪼개서 보는 방식이다. 이 구분을 우리의 생활과 가까운 정치와 경제를 사례로 들어보자. 정치를 논하면서 3권 분립, 정부 조직, 대통령의 권한, 공직 선거, 사법부의 독립과 제도를 이론으로 배우고 이걸 시행하기 위하여 법을 제정하고 법치주의를 논하는 것은 거시적 분석이다. 그러나 제도와 법과 법치주의는 그걸 집행하거나 따르는 공직자와 일반 사람들이 정직하게 행할 때 비로소 그 효과가 발생하지, 아니면 장식에 불과하다. 공직 인사가 정실에 따라 이뤄지고, 선거 부정이 많고, 하찮은 단체의 회장이라도 하겠다면 먼저 밥을 사야 하는 풍토라면 그런 경우다. 한국은 법관과 변호사들의 천국인 게 틀림 없다. 매일 같이 터지는 크고 작은 고발 사건을 볼 때 그렇다. 법 위반이 팽배하다는 증거가 아닌가. 제도와 법이 미비해서가 아니다. 사람이 문제다. 행태 연구가 필요한데 그건 미시적 분석이다. 국민소득 미화 3만불 시대 경제를 거시적으로 분석하려면 보통 GNP, 인구, 국토, 자원, 통화량, 물가, 철강, 육류 등 제품의 생산량과 수출량 같은 개념과 지표를 가지고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한 나라의 경제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는 국민의 근면성과 도덕성, 반대로 과욕을 분석에 넣는다면 그것도 미시다. 잘 살게 되어도 빈부격차가 벌어지면 사회는 평화롭지 못하고 성장은 저해된다. 한국은 몇 개 재벌에게 재원을 모아주어 경제를 발전시킨 나라다. 이걸 꼭 잘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 과정에 정경유착과 부의 편중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에 비하면 대만은 중소기업 중심으로 경제를 일으킨 나라다. 이 두 수출주도형 발전모델과 삶의 질을 비교한다면 미시적 분석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이 앞으로 균형적이며 건전한 발전을 원한다면 거시적인 것과 함께 미시적 연구가 활발해야 한다. 거대담론으로만은 안 된다. 그러나 현실은 아니다. 미시적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 많지도 않지만 있어도 갈 곳이 없다. 박사로서 교수 자리를 얻었다면 아주 운 좋은 케이스다. 그 흔한 경제, 통일, 군사 관련 국책 연구소는 넘쳐나지만 도덕성같은 행태와 사회 전반을 미시적으로 연구하는 기구는 정부와 민간 할 것 없이 거의 전무하다. 한국인들 사이에 널리 쓰여온 격언이 우리의 생활 태도와 사회상을 잘 나타낸다. 그 하나가 “말로 배워 되로 풀어 먹는다.” 또는 “되로 배워 말로 풀어 먹는다”이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되로 배워 말로 풀어 먹는 건 잔머리를 굴려 쉽게 높고 큰 자리를 차지한다는 뜻이 아닌가. 내실보다 겉모양을 더 중요시 한다는 말이 아닌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입만 움직이고(Move mouth)’ 먹고 사는 자리라는 냉소적인 말을 듣고 배웠다. 비슷하게 한국에서도 ‘혀만 굴려 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있었다. 이 모순을 고치는 방법은 임금체계를 고치는 것이다. 선진 서구사회의 사례가 이점 우리보다 앞서있다. 서양 어느 누구였던가 기억은 안 난다. ‘먹물’의 상징인 교수직에 목을 메느라 일어나는 여러가지 비리를 개탄하면서 대안은 교수 봉급을 낮추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의원에 대하여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매우 패러독시컬한 말이지만 일리는 있어 보인다. 호주만 해도 열심히 일하는 배관공들의 벌이가 교수의 보수보다 더 많다. .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이건 먼 한국의 이야기라고 가볍게 넘기지 말기를 바란다. 해외 한인들은 나와서도 한민족의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고 움직이지 않는가. 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 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skim1935@gmail.com

  19/11/2020
  김삼오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