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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 제목은 서강대 교수 출신으로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주미 대사를 지낸 조윤제씨가 낸 책(2015 발간) 이름과 같다. 신문에 썼던 글들을 모은 칼럼집으로서 그 명제에 초점을 맞춘 책은 아니다. 또 그 제목은 “제 자리를 지켜라”로 고쳐도 될 평범한 말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과 장래를 위해 의미 심장하다. 아래를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제 자리로 돌아 가라” 또는 “제 자리를 지켜라”는 여러 분야의 공인과 사안에게 넓게 적용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얼마 전 한국에서 빅 뉴스와 빅 이슈가 되었던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현재 국회의원으로 탈바꿈한 윤미향씨가 이끌었던 무슨 연대, 연합, 재단, 포럼 등 여러 이름의 무성한 한국의 시민단체와 시민운동의 맹점이라고 생각되는 한 가지를 지적해보고 싶어서다. 결론부터 말해보면 시민운동으로 뜨는 인물들은 초심을 잃지 말고 제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애당초 정권이나 정부 고위직에 진입하기 위한 발판으로 그런 단체를 만든다면 말할 것 없고, 나중에 그렇게 변심한다면 말로가 좋지 않고 나라에 누를 끼치고 만다는 점이다. 나는 근래에 현지보다 고국 관련 사회 비평을 더 많이 쓰고 있다. 무단히 그런 건 아니다. 해외 한인, 특히 서방지역에 사는 한인들은 갈수록 고국 지향적이 되어가고 있다. 그게 고국에 도움이 되자면 그 사회와 지도자에 대한 이해와 시각이 올바라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여담으로 오해받을 개인사를 조금 써보고자 한다. 이 글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12살까지 거기서 살다가 한국에 나온 후 1969년 처음 그 곳을 찾아가 볼 수 있었다. 우선 크게 바뀌지 않은 사실에 놀랐었다. 살던 집도 대문만 바뀌었지 과거 그대로였고, 근처 이발관(보통 일본 말로 도꼬야)을 찾아가니 옛날 주인은 아들과 함께 그 영업을 하고 있었고, 나를 알아보고는 “아, 네 누나를 잘 기억하지”하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몇 발짝 거리에 살면서 아버지 사업을 도왔던 일본인 나가쓰까씨를 찾아 가니 옛날 그 집에서 그대로 사는 거였다. ‘에너지 쇼크’ 2년 전인 그 해 일본 경제는 한국과는 비교가 안되게 호황이며 앞서 있었던 시절이다. 작년 9월에 거기를 다시 한번 가 봤었다. 반세기 만이다. 나가쓰까씨는 돌아가고, 그 아들 부부가 집을 수리 한 채 그대로 살고 있었다. 근처에 사는 한 일본인 노파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 지역을 훤히 꿰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거기에서 살았던 게 분명하다. 그 이발소 자리에 세븐 일레븐이 문을 연 것은 불과 얼마 전이라는 설명이었다. 이 도시는 인구 40만의 한국의 진해(鎭海)격인 해군 기지 요코스카시(市)다. 거리도 크게 바뀌지 않아 길 잃을 걱정은 전혀 없었다. 더 크게 놀란 사실은 도쿄로 가는 요꼬스카역은 어떻게 보존을 한 건지 어려서 본 그대로였다. 바로 옆이 군항인데 울타리가 없어져 미 7함대의 웅장한 항공모함을 지근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게 다를 뿐 역시 그대로였다. 요코스카와 도쿄 간의 거리는 전동차로 약 1시간, 그 중간에 과거 산업 중심지였던 요코하마가 있다. 전동차에서 바라보니 2차대전 때 융단 폭격을 맞은 이 도시의 주택들이 목조에서 2, 3층의 시멘트나 벽돌 건물로 바뀌고 멀리까지 뻗어 나간 낮은 공장 시설들이 보일뿐 한국에 흔한 15층, 20층 고층 아파트 대단지는 별로 없다. 자리에 없는 사장님들 한국은 다이나믹한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역동성으로 이룩한 압축 고성장은 우리의 자랑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잃는 것, 희생한 가치는 없을까? 빨리 바뀌고 비약하는 과정에서 제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없다. 줄 하나 잡으면 하루 아침에 장관, 대사, 총장, 위원장, 청와대 수석과 높은 자리를 할 수 있으니 가만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바보다. 잘 살게 되었다는 한국이 저렇게 시끄러운 이유다. 70년대 한국을 떠나기 전 미국인들이 한국의 회사 사장님들을 ‘자리에 없는 사장’(Absentee presidents)이라고 불렀었다. 정치하러 다니느라 자리에 없다는 뜻이었다. 지금도 그렇지 않을까. 일부 나의 형제와 친척과 과거 직장 동료들이 한국에 아직도 살아 있다. 과거의 같은 동네와 집에서 거의 전부 3번, 4번 옮겼다. 그렇게 해서 재산을 크게 늘린 것이었다. 요즘 서울의 노른 자위라는 그린벨트 해제나 수도 이전 이야기로 사람들이 뒤숭숭한 것도 그래서다. 투기업자가 따로 없다. 모두 밥술이나 먹는 공인들이며 배운 사람들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많은 시민운동과 민간 단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그 체제가 건전한 다원화(pluralism)와 다양성(diversity)의 가치에 기대하기 때문이다. 모두 언론과 함께 권력을 감시하거나 권력이 못하는 일을 보충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런 숭고한 사명은 운동가와 단체장들이 권력에 쫓아 들어갈 때 증발하고 만다. 박원순씨는 과거 여러 시민 단체의 활동으로 인기가 대단했었다. 더 욕심부리지 말고 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윤미향씨는 그간 오랜 세월을 바쳤다는 그 ‘위안부 정신’을 국회에 가서 어떻게 펴나갈 지 궁금하다. 과거 시민 운동을 거쳐 권력으로 진출한 다른 많은 인사들, 그리고 학자, 언론인, 법조인들이여! 제자리를 떠나 출세(?)를 했겠지만, 나라에 무슨 기여를 남겼는지 한번 돌아봤으면 좋겠다. 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 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skim1935@gmail.com

06/08/2020
독자의 편지 - 김삼오

지난 주말 한호일보(10월2일자)에 실린 정원일 공인회계사의 글을 잘 읽었다. 제목은 ‘보안관’으로 우리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한 가지 반갑지 않은 사회 환경에 대한 지적이다. 나는 과거 칼럼에서 서방사회의 제3세계화 신드롬이란 말을 몇 번 썼었다. ‘보안관’은 거기까지 가지는 않았으나 그 문제로 확장시킬 수 있는 현장 보도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쓴 제3세계화 신드롬은 호주와 다른 영미국가들이 제3세계인들을 대거 이민으로 받은 결과 이들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와 대인 간 매너가 전근대적으로 후퇴하고 있는 징조다. 제3세계는 서방 선진국을 기준으로 하여 그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전통사회(traditional society)를 뜻하는 말이다. 아프리카 대륙, 인도, 동남아 여러 나라, 태평양 섬나라, 아랍계, 아마도 중국이 여기에 속 한다. 한국은 여기 어디에 위치할지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전체 인구에 비하여 영미문화에 아직 익숙하지 않거나 아예 그러려 하지 않는 이민자의 비율이 정확히 얼마인지 수치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출생지와 혈통을 기준으로 어림 잡을 수 밖에 없는데 부쩍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시드니만 해도 지역에 따라서는 기차에서 백인을 보기 어려운 곳이 많다. 어떤 지역은 누군가 말한 대로 기차를 타보면 중국의 광동성에 있는 느낌이다. 같은 사람인데 뭐가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제3세계 사회의 특징이지만 성장배경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이들은 좀 나은 자리에 앉으면 평균적 앵글로색슨 영미인에 비하여 더 권위주의적이며 인권사상이 박약하다. 스트라스필드나 리드콤 기차역 홈과 출입구에서 근무하는 직원 10중 8은 유색인이다. 뭘 묻거나 말을 걸면 짧게나마 정중하게 대답하는 게 공무원으로서의 의무일 텐데 그런 사람 거의 없다. 정 회계사가 소개한 보안원은 어느 인종인지 모르나 그보다 훨씬 더 못된 것 같다. 백인 또는 유색인이 어떻고 한다면 인종적 편견으로 욕먹을 수 있다. 어느 인종이 됐든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확률 아닌가. 이민 오기 전이나 후 영미사회에 대한 우리의 1차 관심과 우려는 아무래도 백인에 의한 인종차별이었다. 그런데 인종차별이란 무엇인가? 쉽게 말해서 타민족으로부터 받는 무례하거나 불평등한 대접이다. 내 개인으로 보면 그런 태도로 잠깐이나마 슬프게 만든 상대는 백인보다도 유색 이민자이거나 그 후손 가운데 많았다. 보안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공무원을 나무라고, 이 나라에서 법이 철저히 지켜질 필요성을 시비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것과 선진 자유민주의 국가의 가치인 상대의 인권을 존중하는 매너는 다르다. 왜 이런 삶의 질(Quality of life)을 결정하는 문제가 호주에서 사회 이슈로 대두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 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skim1935@gmail.com

08/10/2020
독자의 편지 - 김삼오

요즘 한국 사람들이 엘리트란 말들을 잘 쓴다. 거의 한국어화가 된 영어(원래 불어 Elite, 선택된 소수)의 뜻을 찾아보고, 실제 어떤 사람을 그렇게 부르는가를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관찰을 하게 된다. 엘리트는 대중 가운데 극소수를 의미하지만, 영어사전에 설명된 ‘the best of the group(그룹 중 최고층)’대로라면 그냥 소수가 아니라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최고 역할과 특권이 주어지는 소수이다. 무력으로 싸워서 이기는 게 목적인 군대의 경우는 이런 소수 정예부대의 역할과 특권에 대하여는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 일당백이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정권의 핵심이 되는 몇 사람의 권력 엘리트(The power elite), 행정의 윗선인 소수 엘리트 관료, 국가의 부를 많이 거머쥐어 남다른 힘을 발휘하는 몇 안되는 재벌 총수와 그 일가족, 소수 지성으로 명성을 누리는 학자들에 대하여는 지금처럼 무조건적으로 엘리트란 타이틀을 붙여도 좋은가 묻게 된다. 극소수 정예가 사회를 이끈다 또는 지배한다는 뜻의 엘리트주의(Elitism)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물론 일리는 있다. 행정에 대한 지식과 경륜이 없는 관료가 행정부를 잘 운영할 수 없다. 오죽하면 해방 공간에서 우리대로의 잘 훈련된 고위 경찰, 행정가, 법관이 없거나 모자라 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일본에 부역한 전문 인재들을 상당수 등용해야했었다. 이게 오랜 과거 청산의 시비거리가 되어 왔다.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니다. 엘리트주의를 내세우고 엘리트들에게 나라를 이끌고 발전시키는 역할과 특권이 부여되고 그런 이유로 최고의 명예가 주어진다면 이들 엘리트들에게는 한 가지 새로운 자격 요건이 부과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름이 아닌 도덕성이다. 특히 오늘의 한국적 상황에서는 그렇다. 무슨 말인 지 사례를 들어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일류대학 법과를 나와 젊은 나이에 고시를 합격한 수재로서, 법관과 변호사 생활을 거쳐 축적한 돈, 해박한 법률 지식, 유창한 언변에 힘 입어 국회에 입성하고 나중에는 청와대 수석이된 행운아들(?)은 분명 언론과 사람들이 만든 엘리트다. 그런데 이들 엘리트들이 사회에 기여보다는 누를 끼친 정황이 더 많다. 권력 엘리트는 어떤가? 총칼로 헌정을 짓밟은 전력은 물론이고, 그 와중에 정치 8단이니 9단이 하는 잔꾀로 정치판에 끼어든 소수 정예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엘리트 지식인이라는 명망을 팔아 밀어서는 안 될 정권에 빌붙어 출세한 ‘먹물’들도 그렇다. 엘리트라는 용어를 함부로가 아니라 가려서 써야할 이유다. 송구영신 (送舊迎新)과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크리스마스의 계절에 이렇게 딱딱한 글을 써 송구스럽다. 그러나 이 특별한 시즌에 누구나 쓰는 말은 온 지구상의 평화와 밝은 새해다. 그건 말로만이 아니라 쉬지 않고 노력해야 될 일이다. 아디유! 다시 오지 않을 2020년.. 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skim1935@gmail.com

17/12/2020
독자의 편지 - 김삼오

행태 연구가 밥 먹여 주나|? 선동적인 요소가 없으면 관심을 못 끄는 요즘, 행태와 같은 무덤덤한 말로 시작하는 글이 잘 읽힐 리 없겠다. 한국인(고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에 퍼져 나간 모든 한인을 포괄한 민족이란 넓은 뜻으로 쓴다) 대부분이 오래 잘 못 익숙해진 물질과 재미 중심의 안일한 태도 탓이다. 왜 그게 안일한가? 고국이 잘 살게 되었다지만 저렇게 시끄럽고 망신스러운 사건들(물론 좋은 일도 없지 않지만)로 국가 이미지가 먹칠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고, 당연히 그 해법 또한 거기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행태(Behavior)란 무엇인가? 굳이 설명한다면 가치관과 그게 밖으로 나타나는 행동양식이다. 영미국가에서는 이 말을 이빨 빠진 할머니들도 잘 쓴다. 행태 관련 조사.연구도 많고, 그 만큼 그 말도 흔하게 듣게 되니 그럴 것이다. 한 20여 년 전 만 해도 행태를 형태로 고치는 편집장이 한국에 더러 있었다. 지금은 그런 정도는 아니나, 그 말은 역시 무덤덤하고 탁상공론을 즐기는 학자들의 용어 정도로 치부 되기 쉽다.. 행태를 행동양식이라고 정의한다면 행태의 레퍼토리는 우리의 일상생활 영역만큼이나 넓지만, 여기 논의의 핵심은 그 가운데 공동선을 위하여 구성원이 지켜야 할 도덕성과 보편타당한 가치와 그 실천이다. 우리가 인성교육을 말하느라 양심, 정직, 성실, 반대로 비양심, 사기, 후안무치, 탐욕, 기회주의와 같은 행위를 말한다면 바로 그것이다. 특정 민족과 집단이 다른 민족과 집단에 비하여 행태적으로 더 못하다거나 좋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꼭 있다. 그 이유를 과학적으로 찾아 내는 일은 사회과학의 몫이다. 다른 나라들도 활발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지만, 돈 안 되는 이 분야는 한국에서 황무지와 같아 보인다. 대체적으로 사회가 돌아가는 형편은 대중매체를 보면 안다. 비리를 폭로하고 질타하는 인문학자들의 글은 과잉이라고 할만큼 많지만, 왜 그런가를 총체적으로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종합적 연구를 개인 또는 일단의 교수들이 추진하고 있다거나 이미 결과 보고서가 나와있다는 보도를 보고 들은 적이 없다. 연구 발표 하나가 지금과 같은 얽히고 설킨 사회 문제를 당장 해결할 수 없지만, 그런 길을 밝히려는 체계적 노력마저 없다면 백년하청(百年河淸)이다. 후안무치 앞에서 우리 사회가 잘 살게 되었다지만 시끄럽고 망신스럽다고 말했었다. 이건 나의 오버센스일까? 기대어야 할 잣대는 역시 대중매체다. 매체는 잘하든 못하든 사회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전통 매체는 일단 접어두고, 누구나 휴대하고 다니는 스마트폰에 뜨는 유튜브 장면만 보고 말해 보자. 그것 모두 가짜 뉴스라고? 한때 책임 있는 자리에서 ‘내로라 했던’ 인물들이 나와 가짜 뉴스를 가지고 저렇게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사회는 시끄럽고 망신스러운 게 아닌가? 시끄러운 뉴스와 논란의 메뉴는 너무도 많고 다양하다. 이 글을 위해 하나만 들어본다. 이른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돕고 정의를 찾겠다며 30여 년째 국제사회에서까지 큰 반향을 일으키며 활동해온 시민단체를 놓고 최근 불거진 깜짝 놀랄 비리 공방이다. 비리의 진위를 멀리서 성급하게 속단할 수 없다. 그러나 보도된 두 가지 쟁점 사안만 들어봐도 대단한 국가 망신이다. 하나는 정의 회복을 위하여 투쟁해 왔다는 이 시민단체는 불운한 ‘할머니’들을 팔아 자기들 배만 채웠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는 가짜도 섞여 있다는 빌미를 주기에 충분한 발언들이다. 모두 직접 이해 당사국인 일본이 고소해 하고 한국인을 조롱하기에 딱 맞다 이때까지 쓴 것은 한국에서 자세히 보도되고 있는 사건과 이슈를 단순히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과거 나의 고국 관련 글의 목적과 스타일이 그런 대로 이번에도 한민족의 총체적 정직성(integrity)의 위기 속에서 해외 한인사회의 위치와 역할을 또 한번 조명해 보자는 것이다. 길게 쓸 수는 없겠다. 앞서 말한 대로 해외 한인들은 한민족의 일부다. 그 가운데 서방지역의 한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지역보다 더 고국지향적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한국의 경제와 국력이 커지면서 더 그렇다. 고국이 잘 되어야 우리가 해외에서 기를 펴고 살 수 있다고들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 자체에 잘 못은 없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고국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60-70년 대와는 달리 주머니에 달러가 두두룩해진 한국은 디아스포라들에게 외화를 보태 달라고 하지 않는다. 더욱 가치가 떨어진 호주화는 가져가도 몇 푼 안된다. 그렇다면 선진국에 살게 된 우리가 고국에 기여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길은 이 나라가 잘 살뿐더러 반듯한 나라와 사회가 될 수 있게 멀리서나마 모범을 보이는 일이다. 큰 돈을 못 벌어도 정직하게 사는 학습 현장이다. 미국은 몰라도, 해외 한인사회에서는 쉽게 돈 벌 수 없고 거기에 굴러 다니는 눈 먼 돈이 없어 외견 상 조용하다. 그러나 몇 푼의 이권이나 작은 안위를 위하여 고국을 떠나올 때 버리고 왔어야 할 후안무치한 꼼수를 부여잡고 사는 인사들은 없는 지 모르겠다. 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 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원) skim1935@gmail.com

21/05/2020
독자의 편지 - 김삼오

한국인은 큰 것과 높은 것을 유달리 좋아한다. 민족성이며 문화다. 어렸을 때 집안 아저씨 하나는 나를 볼 때마다 커서 ‘대장이 될래’, ‘똥 풀래’하고 놀리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대장, 높은 자리, 우두머리가 되라고 가르친 셈이다. 당연히 잘난 한국인은 크고 높은 사람이 되어 큰 일을 해야 하고, 궂은 일은 작고 지위가 낮은 사람이 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작은 것을 뜻하는 소(少)자보다 큰 대(大)자를, 아래를 뜻하는 하(下)자보다 높은 상(上)자가 언제나 좋다. 대통령, 대법원, 대학, 대장정, 대기업, 상관, 상급자, 상품(上品) 등 모두 그렇다. 중소기업보다 대기업이 자본과 시설과 인원이 많아 크고 높고 세게 보여 직장으로서 이미지가 월등히 좋은 것이다. 그러나 기계를 생각해 보면 이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를 곧 알게 된다. 작은 부품 단 하나라도 부실하면 기계는 불협화음을 내고 전체가 멈춰버린다. 그러니 큰 것과 작은 것 사이에 차별을 할 수 없다. 정밀기계 기술이 앞선 스위스는 작으니 비싼 고급 시계로 세계 시장을 석권해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회도 마찬가지지만 이때는 작은 걸 소홀히 하더라도 전체는 돌아가니 그 차이를 쉽게 보지 못한다. 후유증은 크지만 식별하기 어렵다. 오늘 한국 사회의 불안정 요소가 대부분 거기에 있지만 그걸 걱정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중앙집권제에 오래 익숙해진 한국인들의 1차 관심은 정치와 권력이다. 그리하여 잘난 사람은 모두 서울로 가야하고 대장과 우두머리가 되려고 이전투구하고, 대중의 관심은 누가 대통령, 청와대 수석, 장관, 서울시장이 될 것인가에 집중되니 사회는 조용할 날이 없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누가되든 별 수 없는데도 말이다. 그런 분석을 하는 사람이 없어 보인다. 학계도 마찬가지다. 사회 현상을 학문적으로 다루는 방법론은 크게 거시(Macro)와 미시(Micro)다. 전자는 현상을 큰 그림을 그려 보는 방식이고 후자는 현미경으로 봐야할 만큼 잘게 쪼개서 보는 방식이다. 이 구분을 우리의 생활과 가까운 정치와 경제를 사례로 들어보자. 정치를 논하면서 3권 분립, 정부 조직, 대통령의 권한, 공직 선거, 사법부의 독립과 제도를 이론으로 배우고 이걸 시행하기 위하여 법을 제정하고 법치주의를 논하는 것은 거시적 분석이다. 그러나 제도와 법과 법치주의는 그걸 집행하거나 따르는 공직자와 일반 사람들이 정직하게 행할 때 비로소 그 효과가 발생하지, 아니면 장식에 불과하다. 공직 인사가 정실에 따라 이뤄지고, 선거 부정이 많고, 하찮은 단체의 회장이라도 하겠다면 먼저 밥을 사야 하는 풍토라면 그런 경우다. 한국은 법관과 변호사들의 천국인 게 틀림 없다. 매일 같이 터지는 크고 작은 고발 사건을 볼 때 그렇다. 법 위반이 팽배하다는 증거가 아닌가. 제도와 법이 미비해서가 아니다. 사람이 문제다. 행태 연구가 필요한데 그건 미시적 분석이다. 국민소득 미화 3만불 시대 경제를 거시적으로 분석하려면 보통 GNP, 인구, 국토, 자원, 통화량, 물가, 철강, 육류 등 제품의 생산량과 수출량 같은 개념과 지표를 가지고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한 나라의 경제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는 국민의 근면성과 도덕성, 반대로 과욕을 분석에 넣는다면 그것도 미시다. 잘 살게 되어도 빈부격차가 벌어지면 사회는 평화롭지 못하고 성장은 저해된다. 한국은 몇 개 재벌에게 재원을 모아주어 경제를 발전시킨 나라다. 이걸 꼭 잘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 과정에 정경유착과 부의 편중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에 비하면 대만은 중소기업 중심으로 경제를 일으킨 나라다. 이 두 수출주도형 발전모델과 삶의 질을 비교한다면 미시적 분석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이 앞으로 균형적이며 건전한 발전을 원한다면 거시적인 것과 함께 미시적 연구가 활발해야 한다. 거대담론으로만은 안 된다. 그러나 현실은 아니다. 미시적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 많지도 않지만 있어도 갈 곳이 없다. 박사로서 교수 자리를 얻었다면 아주 운 좋은 케이스다. 그 흔한 경제, 통일, 군사 관련 국책 연구소는 넘쳐나지만 도덕성같은 행태와 사회 전반을 미시적으로 연구하는 기구는 정부와 민간 할 것 없이 거의 전무하다. 한국인들 사이에 널리 쓰여온 격언이 우리의 생활 태도와 사회상을 잘 나타낸다. 그 하나가 “말로 배워 되로 풀어 먹는다.” 또는 “되로 배워 말로 풀어 먹는다”이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되로 배워 말로 풀어 먹는 건 잔머리를 굴려 쉽게 높고 큰 자리를 차지한다는 뜻이 아닌가. 내실보다 겉모양을 더 중요시 한다는 말이 아닌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입만 움직이고(Move mouth)’ 먹고 사는 자리라는 냉소적인 말을 듣고 배웠다. 비슷하게 한국에서도 ‘혀만 굴려 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있었다. 이 모순을 고치는 방법은 임금체계를 고치는 것이다. 선진 서구사회의 사례가 이점 우리보다 앞서있다. 서양 어느 누구였던가 기억은 안 난다. ‘먹물’의 상징인 교수직에 목을 메느라 일어나는 여러가지 비리를 개탄하면서 대안은 교수 봉급을 낮추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의원에 대하여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매우 패러독시컬한 말이지만 일리는 있어 보인다. 호주만 해도 열심히 일하는 배관공들의 벌이가 교수의 보수보다 더 많다. .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이건 먼 한국의 이야기라고 가볍게 넘기지 말기를 바란다. 해외 한인들은 나와서도 한민족의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고 움직이지 않는가. 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 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skim1935@gmail.com

19/11/2020
독자의 편지 - 김삼오

대중매체의 보도 영역은 우리의 생활만큼 넓고 크다. 그 대중 전달수단은 사회 전체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모든 보도 영역이 중요하지만, 이 분야를 전공한 나로서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건 인물 보도다. 인물 보도가 한 사회의 가치관을 이끄는 선봉장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일제 때 일본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책과 다른 매체(교과서,영화, 만화 포함)를 읽고 보고 들으며 감명을 크게 받지 않을 수 없던 게 전쟁영웅 이야기였다. 그건 당시 일본 군국주의를 반영하는 대표적 가치관이었다. 그런 대세에 떠밀려 일본은 진주만을 용감하게 기습 폭격했고, 결국 원자탄 세례라는 국가적 재앙을 맛보고 패망한 것이었다. 지금의 한국, 더 넓게는 한민족에게 가장 절실한 가치관은 무엇일까? 부지런함과 돈 자체는 아니다. 그건 더 이상 잘 할 수 없다. 잘 안 되고 있는 가치관은 정직성과 성실성이다. 꼼수로 출세하고 돈을 버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잘 살게 되었다는 나라가 저렇게 시끄러운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 아닌가? 어떻게 해야 정직과 성실을 중하게 여기고 실천하는 풍토가 우세해질까? 센 신문 사설, 유명 인사의 강연, 목사의 설교를 매일 내보내면 잘 될까? 아니다. 그 보다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산 사람, 사는 사람을 실제 생활에서 대접해주어야 그렇게 될 수 있다. 그 대접 가운데 가장 확실한 게 대중매체의 인물 보도다. 어린 아이들이 아닌 성인이라면 대중매체가 어떤 사람을 저명하거나 ‘별 볼일 없는’인물로 대접 또는 푸대접을 하는가를 지켜보면서 그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게 된다. 결국 도의와 윤리 교육은 대중매체가 내세우는 사회적 모델(Social model)이 한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대중매체는 이 모델을 정직하게 내세울 엄중한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의 대중매체는 어떤가? 과거 한국의 신문과 잡지는 ‘장관 열전’과 같은 연재 제목으로 미사여구를 써가면서 고위직에 등용된 인물에게는 아첨을 했었다. 지금도 그 전통은 남아 있다. 벌써 반세기도 전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안 건데 남의 전기 집필자(Biographer)는 당사자에 대하여 적어도 1년 이상을 널리 조사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런 전통이 있는가? 자서전(Autobiography)은 자신의 생애를 자신이 쓰는 게 원칙이지만 보통 남에게 맡긴다. 돈이나 다른 이권이면 대신 써주는 글쟁이들이 얼마고 있어 그렇다. ‘그는 누구인가’ 거의 30년 전 한국에 가 일할 때다. 해직 언론인이라는 모 인사가 인명사전(Who’s Who)을 낼 텐데 책을 사주고 조금 지원을 해주면 이름과 이력을 화려하게 올려주겠다는 오퍼를 해온 적이 있다. 사양했었다. 경영이 어려운 많은 작은 간행물들이 ‘이달의 인물’이니 ‘그는 누구인가’와 같은 거창한 제목을 달고 인물 사진을 표지에 올리는 걸 흔하게 보게 된다. 이번 글은 박원순 전 서울특별시장의 비보를 접하고 쓰게 되었다, 나는 호주에서 평소 글을 읽고 한국 사회와 민족을 위하여 공인으로서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깊이 공감했던 세 분이 있었다. 고인이 된 박원순씨 말고 원로 철학자 김형석 교수, 기독교 장로 손봉호 교수다. 그럴 리 없지만, 이들에 대하여 인물평을 쓰라면 나는 할 수 없다. 함께 같이 지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래 전이다. 손봉호 교수에게는 성원하는 뜻으로 내가 쓴 책 한 권과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응답이 없었다. 우편 사고였는지 상대가 대수롭지 않아 그랬는지 알 도리가 없다. 누구든 다른 사람의 인물평을 쓸 수 있다. 그러나 대중매체에 기고할 때는 조심할 게 있다. 상대에게 신세를 졌다든가, 앞으로 필요할 것 같아서와 같은 사적 이유로 부정직하게 써서는 절대 안 된다는 점이다. 인물평은 개인 사항이 아니다. 왜 해외에서 고국의 문제에 관심이 크냐고 물을 독자들에게 하는 말이다. 나와 아내만 해도 이 나이에도 아직 다섯 친형제와 20여 명의 친 조카와 그 아래 많은 손자들이 한국에 살고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해외 한인들이 고국에 큰 관심을 갖고 잘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져야 한다. 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 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skim1935@gmail.com

16/07/2020
독자의 편지 - 김삼오

지난 주 한 교포신문에 난 짧은 기사를 보고 과연 했었다. 횡간을 읽고 짐작 하건대 한국인 관련 건이라고 봤다. 시드니 시내의 한 식당 앞에 ‘침 뱉지 마시오’라는 한글 경고판이 영문 ‘No Spitting’과 함께 부착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여러 비자로 한국에서 들어와 일시 체류 중인 젊은이들이 잘 모이는 장소일 것 같다. 나는 지난달 23일까지 3주간 경기도 안산의 가장 번화가인 중앙동 유흥가(또는 ‘먹자골목’) 끝자락에 위치한 오피스텔형 아파트에서 묵었었다. 조카가 하는 치과에서 집사람과 내가 치료를 받아야 해 거기를 정했었다. 숙소에서 중앙역 바로 앞인 치과로 가는 5-10분 거리가 번화한 이 먹자골목이어서 대부분의 시간을 거기를 왔다갔다하면서 보냈다. 식사도 주로 거기에서 해결하면서 마치 취재 나온 기자처럼 근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여러 가지를 말 할 수 있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는 여기 저기 식당 앞에 모여 담배를 피우면서 젊은이들이 침을 뱉는 건 예외가 아니라 다반사라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이다.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까지 거기서 살았다. 그때를 잘 기억하지만, 길거리 침 뱉기는 야만인이나 하는 아주 수치스런 버릇으로 배웠고, 실제 대부분 일본인들의 매너가 모범적이었다. 침 뱉기만이 아니다. 지능, 외모, 교육과 문화 배경 등 많은 면에서 우리와 비슷한 그 사회로부터 우리가 배울 게 많다. 일본에서 살았고 일본을 좋게 말한다고 해서 나는 ‘일본을 사랑하는 사람(Japan lover)’은 아니다. 그 나라가 우리에게 위협이 되고 그래서 그 나라를 이겨야 한다면 그 나라를 알고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손자병법 대로 ‘지기지피 백전불패 (知彼知己 百戰不殆)’가 아닌가. 작년 9월 일본 도쿄를 짧게 여행했었다. 내가 제일 관심을 가졌던 곳은 비교적 혼잡한 그 도시의 유흥가인 신주쿠(新宿)다. 우리가 택시를 타고 찾아 갔던 날 밤 비가 쏟아져 구경을 제대로 못했다. 거기를 여러 번 가 본 사람의 논평을 듣고 싶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 1970년대에는 직장 동료들과 함께 무교동 낙지집을 일과 후 자주 갔었다. 식당은 있으나 화장실이 없어 만취한 고객들이 모두 울타리에 소변을 보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가 언제인가? 지금 인천국제공항은 다른 시설도 그렇지만 화장실이 깨끗하기로 아마도 세계 일등이다. 물질적으로 다른 일등이 많다. 그런 한국에 젊은이들의 침 뱉기는 전혀 걸맞지 않는다. 해외에서 잘 알려진 한류, 두각을 나타내는 성악가, 예술가, 스포츠맨, 골퍼, 다른 재능들이 많다. 다 좋다. 그러나 이런 작은 후진적인 행태가 국가 이미지에 먹칠을 한다. 동포사회를 위해 활동한다는 많은 단체들이여!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잘 안 보이는 일에 대하여도 눈을 뜨기를 바란다. 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 박사) skim1935@gmail.com

07/11/2019
독자의 편지 - 김삼오

돌발적인 전 세계적 전염병 재앙으로 그간 잘 듣지 못했거나 생각 못한 개념과 장래에 대한 새로운 예측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그런 말 가운데 거의 매일 듣게 되어 귀에 익숙해진 하나는 사회적 거리 두기(Social distancing)이다. 이 말은 내가 알기로는 미국 학자(Nira Liberman과 기타)가 10여년 전 심리학 학술지에 올린 논문에서 쓴 게 시발이 된 것이다. 내가 이해한 대로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이 개념은 사물과 다른 사람이나 집단과의 관계에서 갖는 심리적 거리감(Psychological distance)인데 이걸 사회적 거리감(Social distance)과 공간적 거리감(Spatial distance) 등 몇 가지로 나눠 통찰한 데서 나온 것이다.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인지 몰라도, 나는 이 사회적 거리감을 주로 국민 구성원 간 유대감(또는 응집력, 일체감)을 어렵게 만드는 심리적 거리감으로 주로 해석했었다. 여러 나라들을 보면 이스라엘처럼 국민 간 결속력이 강한 민족과 그렇지 못한 민족이 있다. 취약한 결속력은 구성원간 큰 심리적 및 사회적 거리감의 결과라는 가정이다. 한국은 인구, 경제 규모, 군사력 모든 면에서 북한과는 비교가 안 되게 월등하게 앞서있지만 전쟁 공포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은 취약한 이 결속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북한 국민이 결속력은 자율적이 아니고 강압에 의한 것이긴 해도 말이다.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후 유행어가 되다시피, 한 사람 간 최소 1.5미터의 거리 두기는 물론 심리적 거리감과는 무관한 공간적 또는 지리적 거리다. 바이러스 확산의 방지책으로 나온 사람 간 거리 두기를 보면서 거론하고 싶은 것 하나는 우리와 다른 영미인들의 기존 신체접촉(Physical proximity) 문화의 차이다. 그건 일상 생활에서 남과 떨어져 있어야 할 물리적 거리, 달리 말하면 각 개인이 쓸 수 있는 공간 또는 영역에 대한 인식 또는 정서인데 저들은 그 차원에서 우리와 많이 다르다. 학자들에 따르면, 인구가 과밀한데다가 빈곤한 집단주의적 사회에서라면 사람 간 영유할 수 있는 공간은 좁기 마련이고 서로 몸이 닿는 빈도가 높고 말 소리도 크게 한다. 우리와 다른 줄서기 문화 인구 밀도가 낮고 개인주의적이고 풍요한 사회라면 상황은 대체적으로 반대다. 개인 간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할 공간은 커야 하고, 신체접촉에 대하여 대단히 예민하다. 말 소리도 작에 한다. 영미권인 호주는 후자, 한국은 전자에 속한다. 여기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뭔가 할 때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몸이 서로 닿지 않게 거리를 두고 한다. 함께 걸을 때나 줄서기에서도 가능한 한 서로 거리를 두며, 지나가다 남과 몸이 스친다면 어느 실수가 되었건 “I am sorry”를 연발하는게 바로 그거다. 이런 예의는 붐비는 버스 안, 백화점 에스컬레이터나 기차를 타고 내릴 때와 그 외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서 모두 그렇다. 저들은 전시장이나 매장에서 앞사람 뒤에 딱 붙어 서지 않는다. 은행 카운터나 민원 창구 앞과 혼잡한 영화관, 행사장 입구에서의 줄서기는 한국과 모두 크게 다를 게 없다. 번호표 장치가 있다면 그대로 따르면 되고, 아니면 비슷하게 줄을 선다. 그러나 여기 카운슬, 도시 외각 마을 지역에 있는 재래식 가게, 아침 일찍 문 열기 전 동네 병원(GP clinic, Surgery)의 공터에서 순서를 기다릴 때는 좀 다르다. 열을 촘촘하게 서있지 않고 여기 저기 흩어져 편하게 앉아 있거나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럴 때도 각자 자기 순서를 알고있고 모를 때는 서로가 챙긴다. 예컨대 불확실하면 “당신이 먼저이신가요?” 하고 묻거나 적어도 눈짓으로라도 확인을 해야 한다. 간격이 비어 있다고 얼른 끼어 들면 실수가 된다. 흩어져 서 있는 고객들에게 직원이 누가 먼저냐고 묻기도 한다. 자기가 뒤라면 “After you”’라고 말하고 뒤로 물러서야 한다. 코로나가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겠다. 이번을 계기로 우리도 조금은 저들의 공간 개념과 신체접촉 문화에 가까워져야겠다. 끝으로 한마디한다. 지난 40년간 해외에 살면서 영미권 문화와 우리를 비교한다는 게 어려워졌음을 느낀다. 급증하는 이민 유입과 인구의 도시 집중으로 이 지역이 제3세계화되고 있어 그렇다. 위에서 말한 신체접촉에 대한 이야기도 그 점을 감안해서 읽어 주기 바란다. 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 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원) skim1935@gmail.com / 삽화 손한순

08/04/2020
독자의 편지 - 김삼오

한국은 잘 알려진 대로 한자와 유교 문화권이다. 우리가 오래 전부터 읽고 배워온 고전 문헌을 보면 안다. 한자와 도의와 윤리가 핵심이다. 일제 시절 교육 받은 1세대 한국인들은 초등학교 때 필수과목인 수신(修身)을 배웠다. 그 이름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한 논어의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내용이 모두 도의와 윤리다. 일본 또한 한자와 유교 문화권 아닌가. 해방 후 우리는 초중고교 수준에서 처음 공민부터 시작, 도덕과 윤리와 같은 과목을 배워왔다. 수신의 연장선이어서 내용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 도의와 윤리에 대한 교육과 감화에 관한 한, 한국은 더 있다. 불교 말고도 해방 후 미국 선교사들의 덕택으로 기독교 국가가 된 사실이다. 이 두 종교는 영혼에 대한 준비와 함께 현실 사회에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행하라고 설파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한국인은 도덕과 윤리 면에서 다른 나라 민족보다 앞서있거나 아니면 그 점을 더 뼈 아프게 생각하는 민족일까? 아니다. 신문 칼럼, TV 시사토론, 유튜브에 나오는 각계 지도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경제, 남북관계, 과학기술, 군사력, 우주 철학, 인공 지능과 같은 거대담론이 거의 전부다. 국민의 높은 도의와 윤리 수준은 당연하다고 여겨 그러는걸까. 그런 토픽을 꺼내는 사람은 그것 밖에 모르거나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을 사는 낡은 세대로 치부되고 마는 것 같다. 사분오열된 사회 나는 원래 머리 좋은 수재가 아니나, 공부를 좋아해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은 학교를 다니느라 귀한 세월을 보내고 젊어서는 부모님을 너무 고생시켜드렸다. 또 여러 학문 분야를 들어가 보았다. 역마살이 끼었다고나 할까. 보통 사람보다 많은 직장을 가봤다. 그 결과 지금 우리가 으뜸으로 여겨야 할 가치는 역시 도의와 윤리라는 시국관 또는 사회관을 갖게 되었다. 우리 민족이 앞으로 가장 잘 살게 되는 길은 거기에 있다는 말과 같다. 경제, 경제하지만, 경제를 지금보다 더 잘 할 수는 없다. 이미 이룩한 물질과 기회를 더 균등하게 나눠 갖는 일이 더 중요한데 그것은 도의와 윤리의 문제다. 경제가 아무리 잘 되어도 좀 잘난 사람은 모두 분수에 넘는 자리를 탐내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되겠다고 동분서주한다면 어떻게될까? 잘 살게 되었다지만 나라가 사분오열되어 저렇게 시끄러운게 그것이다. 누가 아직도 과도기라고 감히 말할 것인가. 고국에서 매 정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쓰는 말이 개혁이다. 개혁의 대상은 물론 법과 제도와 정책이다. 그런데 그 흔한 개혁은 약발이 먹히지 않은 게 분명하다. 법과 제도와 정책은 구성원들에게 잘 살기 위한 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바르게 행하도록 만들려는 장치다. 그러나 그 장치는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실천으로 옮긴다. 사람이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면 사태는 달라지지 않는다. 역시 도의와 윤리로 귀결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사람이 우선이라고 했는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건 아닌 것 같다. 올바르게 사세요 도의와 윤리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나만이 아니라 전체를 위하여 올바르게 행동하는 일이다. 한참 전에 호주에서는 “Do the Right Things(올바르게 사세요)”라는 제목의 노래로 된 공익 텔레비전 광고가 한동안 방영되었었다. 올바른 삶을 굳이 설명하겠다면 준법정신, 질서의식, 정의감, 양심, 정직, 겸양, 인권, 공평성, 평화와 같은 개념과 말들을 동원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지금 일부 국민들이 대통령의 하야를 부르짖고, 교수들이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부동산 대란, 비리와 고소 고발 사건으로 사회가 뒤끓고 있는데 사람들이 양심이 있고, 정직하고, 정의로워 진정 남과 더불어 살 생각이 있다면 그런 논쟁 없이도 잘 될 수 있을 것이다.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남북통일 문제도 그렇다. 길게 보면 통일은 한 쪽이 절대적 체제우위에 놓이게 될 때 이뤄질 것이다. 경제와 군사력은 분명 체제우위의 한 큰 요건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의 아래 자율적인 국민통합 없이 경제와 군사력이 무슨 힘을 쓰겠는가? 국민통합은 구성원들이 도의와 윤리로 뭉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 결국 국민의 도의와 윤리 수준을 높일 방법이 관건이다. 도의와 윤리 교사와 인문학 대중강의를 늘리면 될까?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역시 사람들은 무엇이 도의와 윤리인지 몰라 그러는 게 아니므로다. 사람은 사회가 가르친다. 교육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유대인 어머니(Jewish Mother)’를 언급하는 글을 자주 읽게 된다. 하지만 가정은 자녀들의 행태를 결정하는 많은 변수 가운데 하나다. 친구, 직장, 단체, 권력, 돈 등 그밖에 많다. 가장 중요한 건 100년도 더 된 이반 파블로프의 ‘개의 실험’ 이후 교육의 대원칙이 된 상벌(賞罰, Reward and punishment)이론이다. 보상이 없는 도의와 윤리의 실천을 누가 하겠나. 인간은 합리적이다. 실천하는 사람을 대접해주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했다지만 한국은 대체적으로 올바르게 살면 손해보는 사회가 되었다.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그런 풍토에서는 그게 아니라고 아무리 역설해도 먹히지 않는다. 그에 필적하는 다른 심리적 및 정신적 보상, 달리 말하면 사회적 인센티브가 있어야 한다. 누가 어떻게? ‘위로부터’를 의미하는 톱다운(Top Down)방식으로는 안 된다. 그건 이미 해보지 않았는가. 풀뿌리와 민심 차원의 21세기형 새로운 도덕재무장(MR, Moral Rearmament Movement) 운동을 벌여야 하다. 이웃, 교회, 그 외 단체 등 일상의 작은 모임과 개인 간 교류에서 1차 관심과 대화거리가 되어야 한다. 전염병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옮기듯 올바른 행동도 전파된다.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말이다. 고국을 잊을 수 없는 여기 한인들의 대화거리는 무엇인가? 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 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skim1935@gmail.com

24/09/2020
독자의 편지 - 김삼오

지난번 본란(3월 13일자)에서 대중매체의 의제설정 기능 이론을 설명하면서 덧붙이고 싶어도 못한 게 몇 가지 있었다. 그 하나가 한국에서 거의 정치 패션이 되다시피 한 정권과 지도자에 대한 지지도(Approval rating)와 여론조사다. 매체의 의제설정 이론에 따르면 특정 정치 이슈나 사항에 대한 국민의 인식은 대중 매체의 보도 패턴에 따라 결정된다. 그 전제가 받아진다면 비싼 돈 드리지 않고 매체의 보도 내용만을 추적해도 여론의 향방을 알 수 있다는 판단이 선다. 그 결과 언론 보도가 불공정하면 지지도와 여론 조사의 결과도 불공정하다. 거기다가 여론조사마저도 공정치 못하다면 그 결과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거기서 나오는 수치 발표는 휴지만도 못하다. 정당과 선거와 맞먹게 현대 정치과정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지지도 및 여론 조사의 세계적 대명사는 갤럽이다. 그래서 갤럽 조사(Gallup poll)다. 왜 그런가? 아이오와(Iowa)주와 언론학자 출신의 미국인 George Gallup(1901~1984)이 1935년 컬럼비아대학 교수직을 마지막으로 미국여론조사소(The American Institute of Public Opinion)를 개설 이 분야의 개척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갤럽이란 이름과 기능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 시절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강의가 아니라 미국의 정치학 원서를 읽어서였다. 그만큼 그때까지는 한국에서는 이 제도에 대하여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70대 초 뉴욕에서 저널리즘 공부를 할 때 학교가 초빙한 TV시청률과 브랜드 인기도 조사 등을 전문으로 하는 니엘슨(Nielsen)과 다른 회사 대표들의 강의를 듣고 관심을 더 갖게 되었었다. 대도급 정치 세력 과문인지 모르겠다. 이게 한국에 처음 도입된 때는 내가 서울에 다시 나가 일하던 1998~1991년 중이었다. 그 때 한국에서 처음 문을 연 여론조사소를 한번 찾아가 대표자(그의 이름을 지금은 정확히 기억 못한다)를 만났었다. 그는 자기 방에서만 대화를 했고 내가 바라던 작업실 안내는 사양했었다. 지금 한국에도 갤럽과 제휴한 여론조사 기관이 있고, 그 외 새로 생겨난 리서치란 말이 붙는 동종의 여러 기관들이 갤럽의 조사. 분석의 관행과 공법을 그대로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 알다시피 한국에서는 정치와 관련, 민심이 천심이다라는 말이 국민 간에 오래 희자 되어왔다. 그렇다면 오늘의 매체의 정치 보도와 여론조사는 민심이 천심을 잘 반영하게 본연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언론의 비공정 보도에 대한 논란은 일상이 되었으니 여기에서 더 쓰지 않겠다. 여론조사 기관은 신뢰할만한가? 어느 정권 아래에서였던가. 언론인 출신 청와대 실세가 한 유력한 여론조사 기관의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대부분 여론조사 기관과 정부에서 일거리를 받는 민간 단체들이 정부에 몸담았다가 나온 사람들을 회장이나 기타 주요한 자리에 영입한 사례가 많다. , 전근대적 왕정 시절은 민심은 어느 정도 그대로 천심이었다. 고도로 산업화가 된 오늘은 어떨까? 아니다. 대도(大盜)급 정치 세력과 재벌 그룹도 돈과 권력으로 고도로 발달된 대중매체나 여론조사를 조작하여 애국자 노릇을 할 수 있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뭐 널 뛰듯 하는 그런 여론조사 결과를 듣고 바라보는 게 우리가 아닌가 싶다. 칼은 쓰기에 따라 유용하거나 위험한 연장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도 사람이 올바르지 못하면 마찬가지다. 나는 왜 고국에 대한 이런 비판적인 글을 자주 쓰는가? 누구 말대로 해외에서 못살고 어려워서 그런 건가? 한반도의 반쪽인 북한은 세계 2등가라면 서운해 할 독재와 비리와 인권유린 국가다. 또 다른 반쪽인 한국은 잘 살게 되었다지만 갈수록 더 해가는 정치의 난맥상을 보면 후진국이다. 각자 나름대로의 이유로 고국을 떠난 해외 한인들은 어떤가? 본인도 모르는 정체성의 혼미 속에서 살아간다. 모두 민족이 함께 고민해야 할 크나 큰 숙제다. 뭐가 문제냐며 따진다면 양심이 없는 사람이다. 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 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원) skim1935@gmail.com

26/03/2020
독자의 편지 - 김삼오

지난 2월 7일(금)자 한호일보에 실린 ‘헬조선 그리고 그 속의 희망’이란 제목의 번역 기사(홍수정 기자)를 주의 깊게 읽었습니다. 글에서 호주 ABC 방송이 한국 사회 특집 보도를 정리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방영된 내용과 장면을 직접 듣고 보지 못했지만 내용을 우리말로 아주 유창하고도 세련되게 잘 옮겼다고 봐 그 노고에 찬사를 보냅니다. 한국은 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의 고국입니다. 그리고 그 사회의 참상은 거기에 사는 한국인, 즉 우리의 부모와 형제자매들만이 알면 되고 그들만의 노력으로 달라질 일이 아닙니다. 그건 한민족의 행태적 고질이어서 민족이라는 큰 틀 안에서 이해되고 논의되어야 할 국가적 과제입니다. 더욱 모두가 목전의 이해에 파묻혀 눈이 멀기 쉬운 고국의 혼란상을 생각할 때, 밖에서 사는 동포들의 참신한 시각과 모범으로 기여가 필요한 때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기회에 길게는 못하고 한 두 가지를 적어볼까 합니다. 모든 사회 현상에는 그 원인이 꼭 있기 마련입니다. 그 원인을 찾아야 단기적이든 장기적이든 해결책이 나옵니다. ‘시간이 해결하겠지요’라고 말하는 건 대안이 아닙니다. 그게 사회과학의 존재 이유입니다. ‘헬조선’ 신드롬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한국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공갈에 떨고 안보와 경제 논리에 밀려 북한 전문가와 경제학자들의 목소리만 들리지, 사회를 좀 먹는 악재들을 깊이 연구하고 널리 알리는 사회과학자는 전혀 없어 보입니다. 앞에서 행태란 말을 이미 썼지만, 그 악재는 바로 사람에게 있습니다. 저는 최근 라는 이름의 책을 출판하려고 합니다. 사회 평론이 아니고 평생의 반을 해외에서 보낸 한 원로의 현장 수기입니다. 왜 뜬금없이 자기 책 홍보를 하나 오해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실은 ‘한국은 잘 살게 되었다는데 왜 사회가 그렇게 시끄러운가’라는 제목을 붙인 이 책의 후기에 담긴 내용이 ‘헬조선’ 대안 연구에 한 가지 단서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후기는 오래 전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추모사로서 혹독한 가난 속에서 어머니의 뼈를 깎는 회생으로 대학을 마쳤고 그런 분의 기대에 맞게 높은 자리를 못 한 불효자(?)이며 무능한 사람의 이야기와 그간의 우리 사회의 잘 못 된 실상을 적었습니다. 1950-60년대의 한국은 ‘보릿고개’라는 대명사로 불리듯 지독하게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어감이 안 좋아 덜 쓰지만 그 때의 빈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다른 한 가지는 미군 기지촌에 구름과 같이 모여든 매춘부들입니다. 어디 기지촌뿐인가요. 전국 요소마다 널려 있었습니다. 대학 1년 때인 1954년에는 안암동 대학교 정문 바로 앞 양가집에도 그런 여성들을 들여 놓아 주말 미군 트럭이 군인들을 싣고 들어 닥치면 이불을 옮기느라 들고 여기 저기 뛰어 다니는 가정부들이 많았습니다. 1967년 보건사회부를 출입하면서 자주 만났던 주정일 부녀아동국장의 1차 관심이 이것이었는데, 당시 공식 숫자는 적어도 1백만 명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왜 기억하기도 싫은 과거를 들추는 거냐고요? 이들도 모두 가정의 귀여운 딸이고, 누나며, 손녀입니다. 얼마나 살기가 어려웠으면 이들이 가출하여 이런 지옥에 가도록 내버려 두었을까요? 그보다 더 중요한 의문은 이렇게 처참한 세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입니다. 두 가지 예측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쓰라린 과거를 거울삼아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그 지독했던 가난과 불행의 원수를 갚겠다며 얼마고 더 갖고, 얼마고 개인의 이익과 안위를 누리겠다는 악덕한 사람으로 변절하는 경우입니다. 후자가 지금의 현실이고 그래서 우리가 ‘헬조선’을 자초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입니다. 핵심은 우리 민족의 유달리 강한 과욕입니다. 생계조차 꾸리지 못하는 가장은 논외입니다. 그만하면 성공한 대기업이 문어 발 식으로 사업을 무리하게 늘리고, 그만하면 잘 사는 특권층들이 더 갖겠다며 부동산 투기 현장으로 모여드는 과욕을 내버려 둔다면 ‘헬조선’은 영원히 갈 것입니다. 기자의 말대로 그 속에서 희망의 싹이 트일까요? ‘시간이 해결할 겁니다’와 같은 안일한 생각입니다. 김삼오 (커뮤니케이션학 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skim1935@gmail.com

13/02/2020
독자의 편지 - 김삼오

늘 그랬지만, 특히 현 문재인 정부 아래 한국은 통일전문가들의 전성시대가 아닌가 싶다. 텔레비전과 유튜브를 열어보라. 북한학과 교수, 무슨 무슨 연구소 수석 연구원, 한반도평화연구센터장, 군사문제연구소장 같은 직함을 가진 사람이 나와 진행하는 열띤 통일 논쟁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 날이 드물다. 오지라고 할 수 있는 여기 시드니에서 나도 이 백가쟁명(百家爭鳴)에 글로 한마디 끼어보려고 하는데 먼저 왜 한국에 통일문제 전문가가 그렇게 많고 나마저인가에 대하여 여담이 될지 모르나 써보고자 한다. 첫째 이유는 물론 통일의 중대성이다. 왜 중대한가를 설명한다면 잔소리가 된다. 그만큼 중차대하다. 둘째 이유는 보통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좀 어렵다. 통일을 다루는 학문적 바탕은 국제정치학인데 이 학문은 인문학은 되어도 사회과학은 못 된다. 사회과학이라고 불리려면 적어도 인과관계(이유와 결과 또는 장래)를 실증적으로 밝힐 수 있어야 하는데 국제정치학은 그럴 수 없다. 한 예로 남북관계 연구가 실증적이 되기 위하여는 김정은과 다른 북한 내 권력 실세들을 찾아가 면접을 하거나 그들 머리 속을 들여다볼 과학적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그건 어림도 없다. 또 국제관계는 국내관계보다 몇 배 더 유동적이다. 모두 장래 일어날 불확실한 주변국 변수들에 크게 의존한다. 그러기에 이 분야는 학문적 연구보다도 제한된 지식과 통찰력을 가지고 점을 치는 걸 더 많아 한다. 국제정치학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통일부, 국정원, 통일연구원. 심지어 군 등에서 일하면서 그 잦았던 남북협상 테이블에 적어도 한번쯤 앉아 봤던 실무자라면 모두 전문가 행세를 해보고 싶어 하는 이유다. 도덕주의가 아니라 국가이익 나는 50년대에 대학 정치학과를 나왔다. 그때는 외교학이나 국제정치학을 공부할 수 있는 곳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빼고는 그냥 정치학과였다. 지금은 많은 대학에 정외과와 국제정치학과가 따로 있다. 해봐서 아는데 이 학문 연구방법은 과거 국가 간에 일어난 역사적 사례에 기대어 하는 예측이 주로다. 가령 국가 간 관계는 도덕주의(Moralism)가 아니라 힘의 관계였으며 힘은 물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게 되어 있으니 국방은 세력균형(The balance of power)으로만 가능하다든가, 국제관계에서는 국가이익(National interest)이 먼저라든가, 1938년 히틀러-체임벌린 간의 뮌헨협약을 들어 팽창주의 국가에 대한 유화정책을 경고하는 게 그런 예다. 대표적 학자는 시카고대학의 한스 모겐소((Hans Morgenthau,1904-1980) 교수다. 그의 역작인 Politics Among Nations을 나는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거의 50만의 조회수를 자랑하는 이춘근 박사의 미국의 극동정책, 지금의 한반도정세, 미•중 간 갈등을 분석하는 유튜브 강의를 들어보면 그도 모겐소계의 국제정치학자 밑에서 미국 박사를 한 것 같다. 3대로 내려온 세습정치 그럼 나의 통일 시나리오와 결론은 무엇인가? 1953년 정전 이래 수십 번의 아슬아슬한 위기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재발하지 않은 것은 유화나 강경 어느 정책도 아닌, 한미동맹을 주축으로 한 남한의 막강한 군사력에 따른 세력균형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무슨 짓을 해도 통일은 커녕 남북화해와 공존이 어려운 것은 21세기 대명천지에 불가사의한 북한의 정치체제에 있다. 알다시피 북한은 3대째 세습으로 통치를 해왔다. 4대째도 그래야 할 것이다. 안 그러면 거기 통치자는 2차대전 후 이태리의 무솔리니와 동구권 몰락 때 루마니아 차우세스크 신세가 될 게 뻔하니 지금과 같은 무자비한 숙청과 인권 탄압, 그리고 전대미문의 고립정책을 고수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는 남한이 그런 정권과 진정한 협상을 한다는 건 그야말로 연목구어(緣木求魚)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와 바이든, 누가 대통령이 되든 한반도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 한반도 전문가로 알려진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 교수는 몇 년 전 시드니에 와 가진 세미나에서 북한 정권이 붕괴하면 통일이 올 수 있다고 말했으나 내 생각은 다르다. 정권이 붕괴한다면 국제정치학 용어로 힘의 공백(Power vacuum)이 오는 건데 누가 그 공백을 메울 것인가가 불확실하다. 대한민국은 아직 시기상조다. 미국도 그런 상황을 원치 않을 것이다. 그게 통일은 내가 상대에 대한 절대적 체제우위에 의한 자연스러운 수순으로만 가능하고 장기적이 될 수 밖에 없다고 보는 이유다. 독일의 통일이 그렇게 이뤄진 게 아닌가. 한국은 정치체제, 경제, 아마도 군사력에 있어서는 북한보다 우위겠으나 그것만으로 절대적 체제우위일 수 없다. 거기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게 국민통합 또는 결속이다. 아마도 국민 수준 탓일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나라가 늘 4분5열이다. 크게 벌어진 빈부격차 때문일까, 불만 세력도 너무 많다, 한국 사회가 체제상 절대 우위인가 알아보는 시금석은 여러 가지다. 한 가지는 남북 간 자유왕래가 허용되면 북한 인구의 반이 남으로 내려오고, 행복하게 잘 섞여 살 수 있을까이다. 그렇게 된다면 핵은 무용지물이다. 그 질문은 탈북자나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거나 살다간 재중 동포들에게 물어봐야 한다. 처음 배고픔이 해결되고, 돈 몇 푼 생기고, 공포정치에서 벗어나 좋아도 오래 가지 않을 수 있다. 포용주의 통일론을 내세워 정권의 요직에 앉은 인사들 말이다. 그 소신은 과연 정직한가 아니면 정권에 빌붙기 위한 편의인가 묻고 싶다. 내 생각으로는 그들이 통일을 진정 위한다면 공허한 통일 논의보다 일상생활의 실천을 통하여 국민 간 결속에 먼저 신경을 써주는 게 옳다. 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 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skim1935@gmail.com 사진: 2019년 6월 30일 판문점 앞. 문재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김정은 위원장의 역사적 만남.

29/10/2020
독자의 편지 - 김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