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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산업과 목재업으로 이루어진 윙햄(Wingham) 아침에 일어나 평상시와 다름없이 베란다에 나가서 가볍게 몸을 풀며 심호흡한다. 봄이 오는 것을 시샘하는 바람이 심하다. 그러나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기 시작하는 춥지 않은 아침이다. 집에서 벗어날 생각을 한다. 너른 들판을 볼 수 있는 윙햄(Wingham)이라는 동네에 갈 생각을 한다. 윙햄은 내륙으로 40여 분 운전하면 갈 수 있는 가까운 동네다. 따라서 들판이 보고 싶을 때마다 찾아가는 친숙한 동네다. 인구 5,000명 정도 되는 자그마한 이 마을에 막연히 알고 지내는 지인도 있다. 로빈(Robyn)이라는 이름을 가진 할머니다. 로빈에게 전화를 해본다. 점심을 같이하자는 나의 제안을 반갑게 받아들인다. 로빈은 윙햄에서 태어나 할머니가 된 지금까지 이곳에서만 사는 동네 토박이다. 시골의 작은 마을을 벗어나지 않고 60년 이상 살고 있다. 한국을 떠나 모든 것이 생소한 호주까지 이주해 와서 지내는 나로서는 로빈의 삶을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로빈은 고향에서만 지낸 자신의 삶을 무척 대견스러워하는 눈치다. 동네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윙햄 자랑을 자주 한다. 제법 큰 도시 타리(Taree)를 지나 윙햄에 들어선다. 동네 입구에는 큼지막한 환영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호주 시골을 여행하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마을 표지판이다. 표지판 옆에는 자그마한 공원이 있다. 공원 끝자락에는 오래된 풍차가 우뚝 서 있다. 수도 시설이 없던 시절, 지하수를 끌어 올리던 오래된 풍차다. 풍차를 보니 옛날 동네의 모습이 대충 그려진다. 조금 일찍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다. 주변을 걷는다. 오래되고 허름한 간판에 중국 식당 이름이 쓰여 있다. 이 구석까지 들어와 식당을 운영하는 중국 사람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된 동네라는 것을 알려주는 건물도 보인다. 건축 연도가 각각 1929년 그리고 1931년이라고 크게 새겨진 석조 건축물이 나란히 있다. 언뜻 보아도 역사와 전통이 있어 보이는 교회와 학교도 도로 건너편에 보인다. 동네 한복판에 있는 공원에는 공군 비행기가 전시되어 있다. 윙햄을 소개하는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비행기다. 전쟁에 참여했던 군용기를 군대에서 이 동네의 재향군인클럽(RSL)에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설명서에는 비행기 이름이 ‘흡혈귀 제트기(Vampire Jet)’라고 적혀 있다. 이름이 잔인하다. 공원에는 거대한 통나무도 전시해 놓았다. 통나무에는 길이 16m 그리고 무게는 19t이라는 설명서가 붙어있다. 내륙에 있는 작은 동네이지만 목재 사업이 번창했던 동네라는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에 맞추어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니 로빈이 반갑게 맞이한다. 점심시간이다. 무슨 음식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아무 음식이나 가리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로빈은 동네 한복판 식당들이 있는 곳으로 앞장서 걸어간다. 지나치는 식당을 하나하나 소개한다. 마지막에 있는 식당을 가리키며 유기농 재료를 사용하는 식당이라며 들어간다. 식당 분위기가 좋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인지, 너른 정원에 식탁이 듬성듬성 떨어져 있다. 봄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맑은 날씨에 이름 모를 화초와 식물에 둘러싸여 있는 식탁에 앉으니 음식이 나오기 전이지만 입맛이 돈다. 시골 동네에서만 맛볼 수 있는 식당 분위기에 매료된다. 메뉴를 본다. 오가닉 식당답게 각종 야채 이름이 많이 쓰인 호감 가는 음식이 대부분이다. 상대방에게 음식 주문을 맡긴다. 로빈은 익숙하게 음식 설명을 하며 나름대로 주문한다. 이곳에 자주 온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분위기 있는 식탁에 앉아 지인에게 동네 이야기를 듣는다. 아일랜드 사람과 스코틀랜드 사람이 오래전에 정착한 동네라고 한다. 지금도 매년 6월이 되면 스코틀랜드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물론 올해는 바이러스 때문에 축제가 취소되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더니 이곳에서는 화목하게 지낸다고 이야기하며 옅은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윙햄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본다. 이름 뜻은 모르겠으나 영국에도 같은 이름을 가진 지명이 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윙햄은 벌목한 나무를 가공하는 공장과 도축장이 있는 150년 이상 된 동네다. 지금도 도축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도축장 주인이 일본 사업가라고 한다. 소고기를 좋아하는 일본에 수출하려고 일본 기업이 인수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식사를 끝내고 몇 번 가 보았던 강이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윙햄의 볼거리 중의 하나인 박쥐가 많은 산책로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동네 터줏대감답게 잠시 걸으면서도 로빈은 지나는 사람과 인사를 나눈다. 이 동네에서만 60년 이상을 살았으니 아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숲으로 둘러싸인 매닝강(Manning River)이 흐르는 곳에 도착했다. 아담한 선착장이 있다. 보트를 타고 낚시와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을 위해 만든 선착장이다. 이곳까지는 나무를 실어 나르는 배가 물줄기를 타고 올라 올 수 있다. 따라서 오래전 화물선이 드나들며 목재를 실어 나르던 곳이다. 오래전에 사용했던 선착장 흔적이 아직도 있다. 이곳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작은 타일로 모자이크한 의자다. 동네를 상징하는 물고기, 가축 등을 타일로 멋지게 묘사해 놓은 특이한 의자다. 동네를 위해 봉사했던 사람을 기념해 만든 것이다. 박쥐가 많은 이색적인 산책로에 들어선다. 새로 보수한 산책길은 동물들의 이동에 방해되지 않도록 땅에서 1m 정도 높이에 만들어져 있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야생 칠면조가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칠면조가 알을 낳으려고 만들었다는 큼지막한 덤불도 군데군데 보인다. 덤불 안은 따뜻하기 때문에 칠면조가 알을 낳아 부화 시키려고 만들었다고 한다. 오래된 거목도 많다. 나무 위에는 박쥐들이 다닥다닥 나무 열매처럼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한국에도 박쥐가 있느냐고 로빈이 묻는다. 동굴에 박쥐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나무에서 사는 박쥐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나의 대답을 들은 로빈은 아마도 그것은 호주에서 이야기하는 박쥐(flying fox)가 아니고 다른 종류의 박쥐(bat)일 것이라고 한다. 이 방면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차이를 이해할 수 없다. 동네 소개를 열심히 해준 로빈과 헤어지고 자동차에 오른다. 문화유산에 올려 있다는 석조로 지은 우체국 건물을 지나친다. 큰 통나무를 가득 실은 트럭을 만나기도 한다. 아직도 목재 사업이 한창인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함께 지낸 로빈을 생각한다. 한 동네에서 일생을 보낸 삶이다. 문득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생각난다. 칸트는 자신의 사는 동네를 벗어나지 않은 철학자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은 한곳에서 오래 지내면 권태를 느낀다. 따라서 요즈음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여행을 못 간다고 투덜대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나 또한 집을 자주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기에 불만이 많다. 여행하지 못하는 내 처지를 보며 양로원이나 집에서 외롭게 지내는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삶에는 정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성인들은 한결같이 행복은 멀리 가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 주위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염병 때문에 한곳에 머물기를 강요당하는 요즈음, 지금 처한 주위 환경을 받아들이며 만족하는 삶을 연습한다. 행복한 삶은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누릴 수 있다는 성인의 말씀을 곱씹어 본다. 이강진 (자유기고가, 전 호주 연방 공무원) kanglee699@gmail.com

27/08/2020
시골 엽서

요즈음은 집에서 주로 생활하고 있다. 혼자 지내다 보니 외출할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극성스러운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동네 사람들도 모임을 자제하는 분위기다. 오늘 하루도 집에서만 지냈다. 밤늦게 포도주 마시며 하루를 정리한다. 내일은 어딘가 가고 싶다는 생각이 술기운과 함께 올라온다. 무료함도 달래고 바닷바람도 쏘일 겸 가까운 포스터(Forster)에 가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잠을 청한다. 포스터는 관광지로 알려진 주변 인구가 20,000여 명 되는 제법 큰 동네다. 따라서 휴가철이 되면 관광객으로 시끌벅적하다. 우리집에서 20분 이내에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고, 큰 쇼핑센터가 있어 자주 찾는 동네다. 먼 곳에서 지인들이 찾아오면 관광지라고 하며 데리고 가는 동네이기도 하다. 나 혼자 계획하고, 나 혼자 하는 외출이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다. 마음껏 게으름 피우며 일어나 하루를 준비한다. 며칠 만에 자동차 시동을 건다. 도로에는 생각보다 자동차가 많다. 출근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대도시 같은 교통혼잡은 없다. 평소에 손님이 오면 자주 찾는 방파제와 선착장이 있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넌다. 텅커리(Tuncurry)라는 동네와 포스터를 연결하는 멋진 다리다. 다리 아래로 보이는 바다는 짙은 청록색을 내뿜고 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시선을 붙잡던 그 모습 그대로다. 내가 본 바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을 가진 바다라는 생각을 아직도 하고 있다. 방파제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평일이지만 보트를 싣고 온 자동차들이 생각보다 많이 주차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이곳에서 바닷바람이나 쏘이며 지낼 생각이다. 요즈음은 특별히 하는 일없이 넋을 놓고 보낼 때가 잦다. 한국에 멍때리기 대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아마도 멍때리기 대회에 나가면 일등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방파제를 따라 길게 조성한 산책로를 천천히 걷는다. 겨울 아침이지만 날씨는 봄이 찾아온 것처럼 따뜻하다. 구름 한 점 없는 눈이 부시도록 맑은 하늘이다. 태양은 이미 대지를 데우고 있다. 사람들은 겨울답지 않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적당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산책을 즐긴다. 산책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함께 걷고 있다.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주위를 보니 반려견도 없이 혼자 걷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아니, 멀리 한 사람 보인다. 몸이 좋지 않은 할아버지가 보행기에 몸을 의지해 천천히 혼자 걷고 있다. 건강을 위해 걷는 모습이다. 산책로에 설치한 운동 기구에서는 중년 남자가 반려견을 옆에 앉혀놓고 열심히 운동 중이다. 산책로에 있는 벤치에서는 공사장 유니폼을 입은 두 건장한 사내가 바다를 바라보며 간식을 즐기고 있다. 운동복을 입은 젊은 엄마가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걷는 것이 아니라 가볍게 뛰고 있다. 낚싯대와 큰 바구니 통을 들고 방둑으로 향하는 낚시꾼의 발걸음이 가볍다. 방파제 옆 백사장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한겨울에도 추위를 모르고 수영하는 호주 사람들이지만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조금 이른 시간이라 아직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산책로가 끝난 방둑에 도착했다. 섬하나 보이지 않는 태평양 수평선이 펼쳐진다. 산책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발걸음을 멈추고 바다를 바라보며 잠시 숨을 고른다. 방둑에서는 낚시꾼들이 바다를 향해 낚싯대를 던진다. 낚시하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쉬는 사람도 있다. 보트가 시원하게 물살을 가르며 큰 바다를 향해 질주한다. 평일이지만 주말처럼 하루를 보내는 사람이 많다. 방둑에 올라선다. 바다를 바라본다. 심호흡도 한다. 적당히 불어오는 공해없는 바닷바람이 마음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기분이다. 자연과 함께 하는 이 순간이 좋다. 사람을 만날 때처럼 상대방을 의식할 필요도 없다. 꾸밈없는 내 모습 그대로 내가 원할 때 찾아가 함께 할 수 있는 자연이다. 왔던 길을 되돌아 보트 선착장이 있는 곳으로 걷는다. 생선 다듬는 선반에서 건장한 두 청년이 잡아 온 생선을 손질하고 있다. 큼지막한 생선이 선반에 널려 있다. 이른 아침에 생선을 손질하는 것으로 보아 새벽바람을 뚫고 큰 바다에 나가 낚시하였음이 분명하다. 선반 주위에는 손질하고 버리는 생선을 먹으려는 펠리컨이 떼를 지어 있다. 호주 사람들은 살만 대충 발라내고 나머지는 버린다. 얼마전에 버리는 큰 생선 뼈를 얻어 매운탕을 실컷 끓여 먹은 적이 있다. 살도 엄청나게 많았다. 지금도 펠리컨에게 던져주는 생선 뼈를 달라면 줄것이다. 그러나 혼자서 요리해 먹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선착장은 바다로 나가는 배와 들어오는 배로 적당히 붐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정박해 있는 두 척의 하우스 보트다. 배에 빨래가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선상 생활을 하는 사람이 살고 있을 것이다. 특이한 삶을 택해 지내는 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개성이 강한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선착장 건너편 야영장에는 캐러밴이 줄지어 있다. 간이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시는 중년의 남녀가 눈길을 끈다. 큼지막한 캐러밴에 자전거까지 싣고 온 가족도 있다. 큰 욕심 없이 삶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모습이다. 호주 특유의 여유 있는 삶을 본다. 빠르게 흘러가는 삶의 흐름에서 벗어나 잠시 머무른 시간,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난 시간을 가져 보았다. 이곳에 잠시 있는 동안 다양한 삶을 만났다. 모든 사람은 나름의 삶을 지내고 있다. 좋고 나쁨으로 평가할 수 없는 자신만의 독특한 삶을 보내고 있다. 삶은 과정이라고 한다. 지난 나의 삶을 잠시 돌아본다. 앞으로의 삶도 생각해 본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겠다는 노래가 떠오른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는 윤동주 시인의 읊조림도 머리를 스친다. 내가 삶을 사는 것인지, 삶이 나를 살게 하는지 모를 정도로 헷갈리는 하루하루를 요즈음 보낸다. 평소에 즐겨듣던 ‘살다보면 살아진다'라는 한이 넘쳐흐르는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위안을 삼는다. 이강진 (자유기고가, 전 호주 연방 공무원) kanglee699@gmail.com 사진설명: 01 낚시꾼들이 대어를 기대하며 낚싯줄을 바다에 드리우고 있다. 은퇴한 노인들이다. 02 호주 사람들이 꿈꾸는 전형적인 캐러밴 여행,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03 포스터(Forster)와 텅커리(Tuncurry)를 잇는 아름다운 다리, 1959년에 완공. 04 선착장에는 낚싯배로 붐빈다.

13/08/2020
시골 엽서

아내가 암에 걸렸다. 한국에서 암 진단을 받았다. 지난번 한국에 들른 김에 위내시경을 했더니 위암이라고 한다. 암에 걸린 사람은 불행하다고 생각했었다. 암이라는 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암에 걸린 것이다. 물론 요즘에는 완치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러나 암에 걸렸다는 말을 듣는 순간 어느 정도 충격을 받았다. 호주에 도착해서 가정의(GP)를 찾았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검사 결과를 보여주었다. 가정의는 즉시 전문의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아준다. 같은 날 오후 소화기 계통 전문의와 마주했다. 전문의는 시드니에 있는 암 전문의와 약속을 잡아 주겠다고 한다. 이틀 후 암 전문의로부터 연락이 왔다. 시드니에 있는 콩코드 병원에 입원해 정밀 검사를 하자고 한다. 지방에 살면서 큰 병에 걸리면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일이 순조롭고 진행이 빠르다. 다행이다. 입원 날짜에 맞추어 시드니에 사는 친구 집으로 떠난다. 다행히 친구가 사는 집은 콩코드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아내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지인들로부터 위로 전화가 수시로 온다. 식사 대접도 받는다. 과일을 가지고 방문하는 지인도 있다. 심지어는 암에 걸리면 잘 먹어야 한다며 곰국을 집에서 끓여 온 지인도 있다. 시드니를 떠나 시골로 떠난 지 6년 가까이 지났지만, 아직도 잊지 않고 기억해 준다. 고마운 사람들이다. 콩코드 병원에 입원해 내시경을 비롯한 자세한 검사를 받는다. 검사 결과는 나쁘지 않다. 의사는 완치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며 위로한다. 입원실에 근무하는 간호사들도 친절하다. 특히 한국말이 조금 서툴지만 한국말로 우리에게 도움을 주던 간호사가 인상적이다. 시드니를 떠나 서너 시간 운전해 집에 돌아왔다. 시골에 사는 이웃으로부터도 위로의 말을 듣는다. 꽃다발을 가지고 방문하는 이웃, 카드를 보내는 이웃 그리고 전화로 안부를 묻는 이웃도 있다. 암에 걸렸던 이웃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나에게도 전화를 걸어 바쁜 일이 있으면 아내를 돌보아 주겠다는 제안도 한다. 이웃에 사는 의사에게서 전문적인 조언도 듣는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조금 전에는 크리스마스 때 함께 지내자는 전화도 온다. 한국 사람이 없는 시골이지만 이웃사촌이라는 말은 이곳에서도 통한다. 세금을 내도 아깝지 않은 이유 치료를 받으려고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타리 병원(Taree Base Manning Hospital)을 찾았다. 의사로부터 치료 계획을 자세히 설명해 준다. 몇 년 전부터 항암 치료(Chemotherapy)를 먼저 받고 수술한다고 한다. 그리고 수술이 끝난 후 항암 치료를 더 받는다고 한다. 계산해 보니 치료가 끝날 때까지 6개월 정도가 걸린다. 항암 치료는 포스터 병원(Forster Private Hospital)에서 받기로 했다. 항암치료 받기 하루 전날 포스터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병원에 갔더니 치료에 대한 설명이 장황하다. 부작용이 생겼을 때를 대비한 설명이 대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약을 주면서 내일 집에서 떠나기 전에 먹으라고 한다. 항암 치료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약이라고 한다. 한 알에 수천 달러(수백만 원) 하는 비싼 약이라고 한마디 덧붙인다. 앞으로 6개월간 받는 치료비용이 무료다. 직장 생활 하면서 세금으로 낸 돈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고난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다음 날 아침 고생이 심하다는 항암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도착했다. 간호사가 친절히 우리를 맞는다. 우리 집 주소를 자세히 보더니 간호사의 작은 아버지가 우리 동네에 산다고 한다. 이름을 들어보니 함께 골프 치며 지내는 이웃이다. 이런저런 동네 이야기를 나누며 간호사와 가까워진다.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아내가 항암 치료를 받기 시작한다. 주사기를 비롯해 쓰고 남은 쓰레기는 큼직한 비닐봉지에 버린다. 비닐봉지에는 독성 물질을 버린 쓰레기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간호사도 마스크와 가운으로 무장하고 약을 투입한다. 암세포를 죽이기 위해 독성 물질을 몸에 투입하고 있다. 집으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힘들지 않다며 아내는 평소와 다름없이 저녁을 보낸다. 시드니에서 찾아온 지인과 좋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며칠 전에 초대받았던 집에 가서 식사도 맛있게 먹었다. 한국에 사는 친척에게도 큰 어려움 없이 항암 치료를 받았다는 연락도 취했다. 그러나 사흘째 되는 날 통증을 호소한다. 식사도 하지 못한다. 항암 치료사에게 전화하니 응급실에 가라고 한다. 급하게 20여 분 떨어진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아내는 입원까지 하면서 후유증에 고생한다. 다행히 큰 문제는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아픔을 견디는 수척한 아내의 모습이 안쓰럽다. 문득 목포 둘레 길에서 읽은 어느 시인의 글이 생각난다. ‘파도가 없는 바다는 바다가 아니다. 고난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라는 시구가 떠오른다. 맞는 말이다. 아픔이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죽음 저편으로 떠난 사람에게는 아픔이 없을 것이다.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삶을 반증하는 아픔을 가슴 깊이 간직하며 2019년을 보낸다. 이강진 (자유기고가, 전 호주 연방 공무원) kanglee699@gmail.com 사진 01 : 항암 후유증으로 입원해 치료받고 있는 아내 사진 02 : 마스크와 가운으로 중무장하고 항암제를 투약하는 간호사

19/12/2019
시골 엽서

- 나만의 삶을 그려본다 코로나바이러스가 극성이다. 사람을 만나도, 텔레비전을 보아도 코로나 바이러스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시골 동네임에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만남을 기피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잊을만하면 식사 함께하자고 연락하던 이웃도 요즈음은 소식이 뜸하다. 색소폰 들고 매주 참여하던 동네 밴드 그룹도 모이지 않는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우리 동네에는 한국 사람이 살지 않는다. 따라서 온종일 한국말 한마디 하지 않고 지낼 때도 종종있다. 이웃과의 왕래도 줄어들면서 불교에서 한다는 ‘묵언 수행’을 강요당하는 날도 가끔 있다. 얼마 전 멀리 떠난 아내가 생각난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삶이다. 이러한 삶을 살아내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다른 삶이다. 다른 삶을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한다. 어딘가로 잠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그러나 혼자 떠나는 여행에 익숙하지 않아 망설여진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콥스 하버(Coffs Harbour)에 사는 지인이 떠오른다. 연락해 본다. 자주 만나는 친숙한 사이는 아니다. 따라서 조심스럽게 내 계획을 전했다. 다행히 기꺼이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한다. 특별히 짐을 챙길 것도 없다. 콥스 하버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한다. 집에서부터 2시간 28분 걸린다는 숫자가 표시된다. 하루 지내고 오기에 적당한 거리다. 간단한 세면도구가 든 작은 가방 하나 들고 자동차 시동을 건다. 콥스 하버는 자주 들리는 동네다. 딸이 사는 골드 코스트(Gold Coast)에 가려면 지나쳐야 하는 큰 동네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는 결혼기념일을 맞아 이곳에서 일주일 정도 지내기도 했다. 따라서 조금은 친숙한 동네다. 오랜만의 외출이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일까, 평소보다 고속도로가 한산하다. 낯익은 고속도로 주변이 정겹다. 맑은 물이 넘쳐나는 매닝강(Manning River)은 예전과 다름없이 유유히 흐른다. 볼 때마다 마음을 씻어주는 강이다. 초원에는 예전과 다름없이 소들이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다. 볼 때마다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는 풍경이다. 느즈막한 오후에 하루를 정리하고 있는 지인을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근처 쏘우텔(Sawtell)이라는 동네로 향한다. 작은 언덕이 있는 경치 좋은 해변에 도착했다. 겨울바람이 심하다. 거대한 파도가 바위에 몸을 던져 하얀 물거품을 하늘에 흩뿌리며 아스라진다. 전형적인 겨울 바다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심한 바람과 높은 파도가 훌륭하게 그려내고 있다. 작년 한국에 갔을 때 목포 앞바다에서 보았던 시가 떠오른다. ‘파도가 없는 바다는 바다가 아니다. 고난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처음 읽은 이후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시구다. 다음날은 근처 관광지를 찾았다. 바닷가에 있는 우릉가(Urunga)라는 동네다. 인구 3,000명 정도 되는 작고 아담한 동네다. 우릉가는 ‘긴 백사장'이라는 뜻을 가진 원주민 말이라고 한다. 동네에 들어서니 이름에 걸맞은 긴 백사장과 동해 바다가 펼쳐진다. 주차장에 자리가 없을 정도다. 많은 사람이 찾는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주차장 근처 바닷가는 여행객이 지내는 캐러밴으로 빈자리가 없는 야영장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동네를 많은 사람이 찾는 이유 중 하나는 나무판자로 만든 산책로(boardwalk)가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 정도만 비껴갈 수 있을 정도의 넓지 않은 산책로가 1km 가까이 대양까지 연결되어 있다. 산책로는 1988년에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 복구와 연장을 몇 차례 거듭하면서 2010년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산책로를 걷는다.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보고 있다. 자세히 보니 바닷물이 빠져나간 모래사장에 작은 게가 떼를 지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소라게(soldier crab)’이라는 이름을 가진 게다. 자세히 보니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모습이 군대를 연상시킨다. 특이한 점은 게들이 옆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걷고 있다는 점이다. 게는 옆으로 걷는다고만 알고 있는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조금 더 걸으니 난간 아래에 큼지막한 물고기들이 서서히 헤엄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도미다. 입구에 있는 안내판에는 이곳이 도미 낚시로 유명하다고 소개하고 있다. 두어 마리 잡아 회를 뜨고, 매운탕도 끓여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들판에 있는 가축을 보면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만 그런 것일까. 난간에 기대어 이야기 나누는 우리에게 지나치던 중년 여인이 인사한다. 한국 사람이다. 호주 동해안을 혼자 여행하는 중이라고 한다. 햇볕에 그은 얼굴이 인상적이다. 왜 혼자서 여행할까. 누군가와 함께 다니는 것이 좋지 않을까. 혼자 여행한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 뉴스를 보면 혼자 지내는 사람이 늘어난다고 한다. 한국에 독신 가정 비율이 전통적인 가정보다 높다는 통계를 본 기억도 있다. 바야흐로 타인의 간섭없는 자신만의 삶을 선호하는 독신이 대세가 된 세상이다. 전문 여행가는 혼자 떠나는 여행을 조언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경험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있는 철학자 중에는 독신으로 지낸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도 인문학 강의에서 들은 기억이 있다. 거리낌 없이 자신만의 생각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삶을 바라본다. 지금부터의 삶은 혼자서 꾸려가야 한다. 앞으로 지낼 삶을 그려본다. 만족할만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삶은 무엇인가? 쓸데없는 질문이 떠오를 정도로 침울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살아내야 한다. 삶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이 없는 내일은 없다. 찾아오는 ‘오늘’을 나의 색으로 칠하다 보면 나만의 삶이 형성될 것이다. 나만의 색을 가진 인생이 펼쳐질 것이다. 이강진 (자유기고가, 전 호주 연방 공무원) kanglee699@gmail.com 사진 1: 화가가 동네 사람을 모델로 그렸다는 벽화가 이색적이다. 사진 2: 관광객을 유혹하는 동네에서 해양까지 뻗어있는 긴 산책로 사진 3: 수많은 작은 게가 물이 빠져나간 모래 사장에서 먹이를 구하고 있다. 사진 4: 도미가 많기로 소문난 바다에서 낚시에 여념이 없는 강태공들

30/07/2020
시골 엽서

호주에 정착한 이후 비행기보다는 자동차 여행을 주로한다. 호주 오지를 비행기로 둘러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비행기를 타고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여행보다는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에도 주변을 즐길 수 있는 자동차 여행을 선호하는 개인적인 취향도 한몫한다. 지금도 오래전 호주 대륙을 한 바퀴 돌았던 여행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서호주(Western Australia)에서 원주민들과 18개월 정도 함께 지내기도 하면서 집을 떠나 있었던 경험은 큰 자산으로 남아있다. 그래서일까, 자동차로 호주 대륙을 달리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떠오른다. 요즈음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장거리 여행이 불가능하다. 퀸즐랜드(Queensland)주를 비롯해 교통을 통제하는 주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을 내서 가까운 동네를 지도에서 찾아본다. 하이랜드 공원(Hyland Park)이라는 마음에 드는 동네 이름이 보인다. 동네 이름에 공원(park)이 들어가 있으니 분위기가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집에서는 2시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곳에 있는 동네다. 숙소를 예약했다. 집을 나서는 날이다. 장거리 여행이 아니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 없다. 평상시와 같이 천천히 일어나 가방을 챙긴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다. 봄이 멀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여행하기에 좋은 날씨다. 눈에 익은 고속도로를 천천히 운전하며 민박집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먼저 민박집에서 가까운 남부카 헤드(Nambucca Heads)라는 동네를 둘러본다. 남부카 헤드는 큰 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있는 동네다. 지방 뉴스에도 자주 언급되는 제법 사람이 많이 사는 동네다. 강을 따라 만든 긴 산책로를 걷는다. 최근에 보수한 산책로가 마음에 든다. 주중이지만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걷는 사람이 많다. 산책로가 끝나는 곳에는 긴 제방이 있다. 호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방과 다른 점이 있다면 크고 작은 바위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다. 제법 멋진 작품(?)도 있다. 이곳에도 강태공들은 물고기와 세월을 낚고 있다. 느지막한 시간까지 걸으며 하루를 정리한다. 다음 날 아침에는 숙소 근처를 걷는다. 집을 나서니 정원을 잘 가꾼 평범한 단독 주택이 줄지어 있다. 봄기운을 알아채고 일찌감치 기지개를 켜는 꽃나무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바닷가 동네답게 보트를 가지고 있는 집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우체통을 특이하게 만들어 시선을 끄는 집도 있다. 호주 시골 동네를 다니다 보면 집주인의 개성을 드러내는 우체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곳도 예외가 아니다. 민박집 주인이 알려준 대로 작은 숲속 오솔길에 들어선다. 가파른 경사에는 계단을 만들어 놓았고 하천을 건너는 다리도 만들어 놓아 산책하기 좋은 길이다. 천천히 걷는데 중년 여인이 반려견과 함께 따라온다. 잠시 옆으로 비켜서면서 먼저 보낸다. 여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앞질러 간다. 물병이 매달려 있는 작은 배낭을 짊어지고 씩씩하게 걷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덩치가 큰 개도 익숙하게 주인을 따라간다. 산책로를 따라 해변에 도착했다. 바닷물이 빠진 너른 모래사장에 서너 명의 사람이 개를 데리고 한가하게 바다를 즐기고 있다. 오늘 하루는 온전히 나의 것이다. 특별한 계획도 없다. 해변을 걷는다. 신선한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파도가 내는 소리를 들으며 두어 시간 걸었다.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오후에는 이웃 동네에 가보았다. 벨라 비치(Valla Beach)라는 동네다. 동네에 들어서니 바닷가 언덕에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는 이미 한 남성이 큼지막한 카메라를 들고 해변을 주시하고 있다. 카메라 가방이 옆에 있는 것으로 보아 순간을 기다리는 사진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사진작가 옆에서 핸드폰으로 해변을 담는다. 집에 두고 온 큼지막한 카메라가 생각난다. 그러나 핸드폰으로도 내가 원하는 사진을 찍는데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전망대 옆 도로를 따라 해변까지 자동차로 내려가 본다. 주차장이 넓다. 해변 입구에는 상어가 포착되어서 해변을 폐쇄한다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잠시 주위를 걷는다. 벽돌로 큼지막하게 최근에 지은 샤워장도 있다. 한여름에는 많은 사람이 찾는 곳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해변은 한가하다. 상어 때문에 물놀이를 금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해변을 향해 있는 벤치에 작업복을 입은 청년이 한가하게 점심을 먹고 있을 뿐이다. 해변에서 보니 멀지 않은 곳에 하천을 가로지르는 사람만 다닐 수 있는 다리가 있다. 대충 짐작으로 방향을 잡고 다리를 찾아 나선다. 다리 근처 물가에는 대형 야영장이 있다. 그러나 생각보다 야영객은 많지 않다. 야영장 근처에서는 주택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다. 안내판을 보니 은퇴한 사람을 위한 주택단지를 짓고 있다. 노후 생활을 지내기에 좋은 환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리 주변에 차를 세우고 걷는다. 바닷물과 얕은 강물이 만나는 곳을 건너 해변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만든 운치 있는 다리다. 입구에는 큼지막한 게시판에 온갖 물고기 사진과 함께 잡을 수 있는 물고기 크기와 수량이 적혀 있다. 사람 두 명이 함께 가기에는 비좁은 그러나 제법 긴 다리를 걷는다.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니 수심이 얕은 물 속을 물고기가 떼를 지어 다닌다. 지나가는 청년에게 물고기 이름을 물으니 숭어(mullet)라고 한다. 도미가 아니냐고 재차 물으니 다른 물고기를 가리키며 저것이 도미라고 한다. 도미와 숭어가 떼를 지어 다니고 있으나 낚시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다리에서 잠시 물고기를 구경하는데 큼지막한 가오리(Stingray) 한 마리가 배회하고 있다. 물고기를 구경하며 잠시 다리에서 시간을 보낸다. 다리를 건너 태평양 물결이 출렁이는 백사장에 도착했다. 해변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사람이 없어서인지 황량하게 보이면서도 아름다운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이다. 되돌아오면서 강을 따라 만들어 놓은 숲속 오솔길을 걷는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바다와 강을 번갈아 보며 바다 냄새와 풀냄새를 만끽한다. 혼자 걷는 외진 오솔길이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책상에서 나온 사상은 신뢰하지 말아라. 걸으면서 나온 사상만을 신뢰하라고 했다는 철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떠오르는 생각을 통해 삶을 나름대로 다시 짚어본다. 집에서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낯선 동네에서 이틀 밤을 보내고 민박집을 떠난다. 관광이 목적이라면 아침 일찍 와서 구경하고 갈 수도 있는 거리다. 그러나 가끔은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상에서 한발 물러선 시간, 잠시 거리를 두고 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일상생활에 파묻혀 자신을 되돌아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가끔 자신과 떨어져 관조하는 여유를 갖겠다고 다짐한다. 내가 꾸려가는 나만의 삶을 위하여...

10/09/2020
시골 엽서

광산의 도시 마운트 아이자(Mount Isa)건조한 호주 내륙에서 지는 해가 만들어 놓은 멋진 색상의 하늘아침에 일어나니 밤 깊도록 흩날리던 빗줄기가 멈추었다. 오늘은 지금 머물고 있는 버크타운(Burkestown)에서 마운트 아이자(Mount Isa)라는 동네까지 먼 거리를 가야한다. 비가 올 것을 염려해 비포장도로를 따라 계속 운전해야하는 지름길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마운트 아이자까지 가는 길에도 중간에 비포장도로를 거쳐 가는 지름길이 있다. 지도를 보니 중간에 있는 지름길로 가면 431km, 포장된 도로만 따라 운전하면 532km다. 비포장도로가 100km 더 가깝다. 그러나 비포장도로 사정을 알 수 없다. 일단 그레고리(Gregory)라는 다음 동네에 가서 사람들 의견을 듣기로 했다.그레고리까지 가는 길은 잘 포장된 직선 도로가 대부분이다. 언덕 하나 보이지 않는 평지가 계속된다. 도로에는 자동차에 치인 캥거루가 유난히 많다. 캥거루가 쓰러져있는 도로에는 솔개들이 모여 있다. 이곳에 사는 솔개들은 살아있는 먹이를 잡으려고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예전에 캥거루를 친 경험이 있기에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운전한다. 심심치 않게 자동차 소리에 놀란 캥거루가 풀숲에서 나온다. 주위를 살피며 운전하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동차 소리에 놀란 캥거루가 뛰어온다. 캥거루는 예상했던 대로 도로를 가로질러 뛰어간다. 내가 주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면 도로 한복판에서 마주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놀란 캥거루들이 도로 쪽으로 나오는 이유를 모르겠다. 캥거루들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도로변에 주유소와 카페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그레고리라는 동네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약 300km를 더 가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휘발유를 채우고 직원에게 물어보니 비포장도로 사정이 괜찮다고 한다. 승용차로도 갈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고민 끝에 거리가 가까운 비포장도로를 택하기로 했다. 조금은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한몫했다. 동네를 벗어나자 마운트 아이자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은 비포장도로를 거쳐서 가는 지름길이다. 자동차가 다닐만하다는 이야기다. 만약 길이 험하다면 사륜구동차만 갈 수 있다는 경고판이 있을 것이다. 도로 입구에는 다음 주유소까지 220km를 가야 한다는 경고판이 세워져 있을 뿐이다. 마운트 아이자는 광물이 풍부한 돌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린다. 새로 포장한 직선 도로가 다시 펼쳐진다. 이곳도 지평선이 계속 보이는 평야다. 생각해 보니 작은 산하나 보이지 않는 도로를 1,000km 이상 운전했다. 한반도를 남에서 북쪽 끝까지 갈 수 있는 거리를 운전했지만 작은 산하나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포장된 도로를 꽤 많이 달렸다. 드디어 비포장도로가 시작된다. 자동차가 다니기에는 괜찮은 비포장도로다. 그러나 캐러밴을 끌고 가기에는 쉽지 않은 도로다.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천천히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운전한다. 가끔 마주 오는 자동차를 지나치기는 하지만 캐러밴을 끌고 가는 자동차는 없다.두어 시간 이상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조심스럽게 운전하니 포장된 도로가 나온다. 반갑다. 포장된 도로를 시원하게 달린다. 얼마나 운전했을까, 목적지 마운트 아이자가 가까워지면서 작은 산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무가 많지 않은 돌산이지만 오랜만에 보는 산이 반갑기까지 하다. 야영장에 도착했다. 점심시간이 많이 지났다. 시장하다. 캐러밴을 야영장에 주차만 시켜놓고 시내 중심가를 찾았다. 마운트 아이자는 내륙에서는 큰 도시에 속한다. 쇼핑센터도 있고 핸드폰도 연결된다. 오랜만에 핸드폰과 인터넷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동네 한복판에는 먹을거리가 즐비하다. 패스트푸드점에 들려 점심을 해결한다. 인터넷도 연결해 이메일도 열어본다.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쇼핑센터에 들렀다. 장바구니에 담고 싶은 물품이 넘쳐난다. 오지를 다니며 굶주렸던 신선한 채소와 과일 위주로 풍성하게 쇼핑했다. 야영장에 돌아오니 흙먼지를 뒤집어쓴 캐러밴이 기다리고 있다. 내부에 들어서니 물건들도 제멋대로 흩어져 있다. 심지어는 환기통이 떨어져 바닥에 뒹굴고 있다. 오랜 시간 걸려 청소와 정리를 끝냈다. 앞으로는 포장된 도로만을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가지고 다니는 캐러밴은 비포장도로용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생각한다.  오랜만에 푸짐한 야채와 스테이크로 식사를 끝냈다. 의자에 앉아 멀리 보이는 황량한 내륙을 바라본다. 산골짜기를 타고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며 술잔을 기울인다. 긴 여행의 피로가 감미롭게 다가온다. 여행이 힘들어도 많은 사람이 집을 나서는 것이 이해된다. 여행도 중독이 되는 것 같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광산의 모습마운트 아이자가 자랑하는 박물관박물관 입구에 전시되어 있는 조각품마운트 아이자는 광산 도시다. 다음 날 아침이다. 광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를 찾았다. 석탄이 산처럼 쌓여 있다. 봉우리가 일직선으로 깎여 있는 산이 보인다. 이곳에서는 땅속에 들어가 광물을 파는 것이 아니라 크레인으로 긁어내기 때문이다. 거대한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지금은 환경 오염의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지만, 부의 상징이었던 굴뚝이다.전망대에서 내려와 박물관을 찾았다. 예상했던 대로 박물관 입구에는 광산과 관련 있는 조각품이 즐비하다. 규모가 큰 박물관이다. 중장비를 비롯해 수많은 광물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이 세계에서 광물질이 가장 풍부한 지역이라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광산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나의 시선을 사로잡을 정도로 박물관에는 볼거리가 많다.황량한 내륙에서 만난 규모가 큰 호수(Lake Moondarra)다음날에는 근처에 있는 호수(Lake Moondarra)에 가 보았다. 관광지로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돌덩이로 뒤덮인 산을 바라보며 호수로 향한다. 호수가 있다는 이정표를 따라 조금 들어가니 예상하지 못한 큰 호수가 펼쳐진다. 호수를 따라 운전하는 데에도 꽤 많은 시간이 걸릴 정도로 넓다. 내륙 한복판에 거대한 호수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호수는 성을 쌓아 놓은 것처럼 나무보다는 돌덩어리가 대부분인 산으로 둘러 싸여있다. 호수 끝자락에 있는 댐에 도착했다. 근처에는 널찍한 공원도 조성해 놓았다. 공원에 들어서니 대여섯 마리의 공작새가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공원 주위를 한가히 노닐고 있다. 여행하면서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호주에 사는 야생동물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사람들이 다니는 산책로 주변에서 태연하게 낮잠(?)을 자는 뱀을 본 적도 있다.전망대에 설치된 물탱크, 물탱크에는 이곳에서 서식하는 동물을 그려 놓았다.오늘은 이른 저녁을 끝내고 지난번에 들렸던 전망대를 다시 찾았다. 광산 건물 야경이 볼만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전망대에 오르니 카메라와 핸드폰을 들고 여행객들이 해가 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도 카메라를 챙겨 들고 전망대에 올랐다. 너무 일찍 와서일까, 아직 광산 불빛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유난히 아름다운 석양이 펼쳐진다. 건조한 내륙에서 지는 해가 만들어내는 석양의 풍경은 유별나다. 카메라에 담아 보지만 분위기를 살릴 수가 없다. 아름다운 석양에 마음을 빼앗겨서일까, 광산의 야경도 볼만하지만 마음을 흔들지는 못한다. 멋진 석양을 만나지 않았다면, 광산의 야경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평소의 생각이 떠오른다. 절대적으로 좋고 나쁘다는 것은 없다. 따라서 인생도 좋은 삶, 나쁜 삶으로 판단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각자의 삶이 있을 뿐이다. 나만의 고유한 삶을 호주 내륙에서 홀로 보낸다. 이강진 (자유기고가, 전 호주 연방 공무원) kanglee699@gmail.com

13/01/2022
시골 엽서

봄 방학이 시작되었다. 연휴도 끼어있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외국은 물론 다른 주 경계선을 넘는 국내 여행도 쉽지 않은 현실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동네에는 예전보다 시드니에서 온 관광객으로 넘쳐난다. 평소에 자리가 넉넉하던 해변 주차장에는 주차할 곳을 찾기 어렵다. 식당들도 예약할 수 없을 정도다. 한적한 시골 풍경은 당분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전형적인 관광지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복잡한 동네를 잠시 떠날 생각으로 구글 지도를 열어본다. 제일 먼저 시선을 잡는 것은 매닝 강(Manning River)이라 불리는 큰 강줄기다. 강줄기는 하류로 내려오면서 낮은 평야 지대를 갈라 놓아 여러 곳에 삼각주를 만들어 놓았다. 따라서 섬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다섯 곳이나 있다. 바다와 가장 가까운 지점에 미셀 아일랜드(Mitchells Island)라는 삼각주가 있다. 그리고 미쉘 아일랜드 끝자락에는 매닝 포인트(Manning Point)라는 작은 동네가 있다. 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역에 위치한 작은 동네다. 아주 오래전에 둘러본 적이 있지만, 기억이 아물아물하다. 매닝 포인트를 목적지로 정하고 집을 나선다. 섬이라고는 하지만 다리가 있어 육지와 다름없이 다닐 수 있는 동네다. 맑은 하늘, 신선한 바람 그리고 봄을 맞아 더욱더 싱그러워진 푸른 초원과 하나가 되어 운전한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지방 2차선 도로에 들어서니 시골 냄새를 물씬 풍기는 풍경이 펼쳐진다. 띄엄띄엄 보이는 농가, 가축들이 풀을 뜯는 들판 등 전형적인 한가한 호주 농촌 풍경이다. 호주에서만 볼 수 있는 나무(Gum Tree)가 가로수가 되어 늘어선 흔히 보기 어려운 구경도 한다. 운전하는 것만으로도 집을 나서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도로변에서 보이는 매닝 강에 굴 양식장이 많이 보인다. 굴을 판다고 쓰인 간판을 내걸어 놓은 집도 있다. 주위를 즐기며 여유롭게 운전하다 보니 도로가 끝난다. 매닝 포인트라는 동네에 도착한 것이다.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흐름을 멈춘, 경치 좋은 곳에 조성된 동네다. 외진 곳이긴 하지만 해변에는 관광객에게 빌려주는 집들이 즐비하다. 이 동네도 이미 관광객이 많이 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동네만큼 붐비지는 않는다. 잔잔한 바다 위에 만들어 놓은 선착장에서는 아이들과 어른이 어울려 낚시하고 있다. 한 가족이 휴가 온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선착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나를 환영이라도 하는 것인가, 멀리서 대여섯 척의 큼지막한 보트가 질주해 온다. 줄지어 달려온 보트들이 하얀 물거품을 삼키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숨을 고른다. 얼마나 머물렀을까, 다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모든 요트가 다시 질주한다. 요트를 타고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동호회라는 추측을 해본다. 선착장에서 찰랑거리는 바다를 내려본다. 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물이다. 낚싯대를 물에 담그고 있는 가족이 있는 곳을 기웃거린다. 그러나 잡은 물고기는 보이지 않는다. 물고기보다는 세월을 낚고 있는 가족이다. 조금 떨어진 모래사장에서는 강아지 한 마리가 물에 젖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개구쟁이처럼 뛰어논다. 강아지를 데리고 온 부부는 백사장에 앉아 한가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전형적인 호주 사람들의 휴가 모습을 뒤로하고 산책로를 걸어본다. 선착장 옆에 있는 숲이 우거진 산책로다. 산책로 입구에 들어서니 허름한 목조 테이블 하나가 보인다. 테이블 위에는 낙서가 씌어 있다. ‘모든 것을 사랑하자, 무엇도 미워하지 말자’(Love For All, Hated For None)라는 글이 적혀 있다. 조잡한 글씨체에 글도 엉망이지만 글을 쓴 사람의 마음은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바다를 끼고 산책로는 계속 이어진다. 얼마나 긴 산책로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적당히 걸은 후 발길을 돌린다. 돌아가는 길에 강아지와 함께 천천히 산책하는 할머니를 만나 눈인사를 나눈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일 것이다. 아무 걱정 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몸을 맡기고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는 모습이다. 온화한 인상의 할머니 모습이 마음에 와닿는다. 책에서는 지식을 배우고, 자연에서는 지혜를 배운다고 하는 말이 있다. 세상살이를 터득한 듯한, 지혜로운 할머니의 뒷모습을 한 번 더 훔쳐본다. 산책길을 빠져나왔다. 선착장에서는 아직도 가족이 낚시하고 있다. 보트를 바다에 내리는 사람, 하루를 끝내고 보트를 뭍으로 올리는 사람으로 해변은 조금 전보다 더 붐빈다. 동네를 자동차로 돌아본다. 뒷골목에 들어서니 호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박한 주택이 줄지어 있다. 잔디와 정원을 예쁘게 꾸민 집도 보인다. 동네 한복판에 잔디 볼링장도 있다. 볼링장에는 하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클럽하우스도 보인다.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클럽 내부 모습이 눈에 선하다. 동네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떠들썩할 것이다. 호주는 외진 곳이라도 은퇴한 노인을 위한 시설이 잘 되어 있음을 자주 느낀다. 동네를 빠져나온다. 국도를 달리는데 도로에 무엇인가 보인다. 서행하면서 보니 도로 한복판을 뱀이 지나가고 있다. 겨울잠에서 깨고 나온 뱀일 것이다. 도로 한복판에 자동차를 세우고 뱀이 지나가기를 기다리지만 뱀은 움직이지 않는다. 빨리 안전한 곳으로 피하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은 알아주지 않고, 나를 자신의 방해자로 알고 있는 것이다. 뱀을 피해 중앙선을 넘어 운전한다. 그러나 백미러를 보니 뒤에서 오는 자동차가 그대로 질주한다. 겨울잠을 자고 나온 뱀은 자동차에 치었을 것이다. 시골 도로에서는 야생동물이 너무 많이 죽는다. 집으로 가기에는 이른 시각이다. 근처에 있는 또 다른 해변에 들러본다. 왈라비 포인트(Wallabi Point)라는 지인이 오면 자주 소개하는 동네다. 파도가 높은 곳이라 서핑하는 사람을 항상 볼 수 있고, 전망대도 있어 볼거리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잠시 벤치에 앉아 서핑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낸다. 심한 바닷바람에 등이 굽은 나무들이 인상적이다. 천천히 운전하며 집으로 향한다. 동네 공원 근처를 지나가는데 행글라이더가 하늘을 날고 있다. 심하게 불어대는 바닷바람이지만, 젊은이는 편안하게 앉아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닌다. 바람에 거역하지 않고 순응하며 행글라이드를 조정하고 있다. 잠시 행글라이더를 보며 시간을 보낸다. 자연과 함께 하루를 보냈다. 인간과 신과 자연은 하나라고 한다. 자연에 순응하며, 신의 품 안에서 지내는 삶을 그려본다. 거친 바람에 대항하지 않고 순응하며 삶을 즐기는 행글라이더에 앉아 있는 젊은이처럼...

08/10/2020
시골 엽서

투움바(Toowoomba)로 들어서는 국도에서 만난 풍경골드 코스트(Gold Coast)를 떠나는 아침이다. 캐러밴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첫 목적지는 호주 대륙을 가로질러 남해안의 작은 도시 포트 오거스타(Port Augusta)로 정했다. 내비게이션으로 거리를 알아보니 2,000km 정도가 된다. 장시간 장거리를 운전하고 싶지 않다. 몇 번 나누어 가야할 것이다. 여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운전도 즐기고 싶기 때문이다. 지도를 보니 적당한 거리에 피츠워스(Pittsworth)라는 동네가 있다. 야영장(Caravan Park)도 있다는 정보가 있다. 기착지로 적당한 동네다. 야영장 예약은 하지 않았다. 동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나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제멋대로 다닐 생각이다. 발길 닿는 대로.이제는 익숙해진 솜씨로 캐러밴을 자동차에 연결하고 도로에 들어선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자동차에 경고등이 켜진다. 이틀 전에 정비받았다. 그럼에도 자동차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내륙으로 들어가면 제대로 된 정비소 찾기도 힘들 것이다. 오히려 지금 문제가 생긴 것이 다행일 수도 있다.피트워스(Pittsworth)의 작은 동네에 있는 대형 교회. 정비소를 찾아가니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다행히 부품은 있지만 서너 시간은 걸려야 한다고 한다. 살다 보면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이 다반사이다. 이것이 인생 아닌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마음 편안히 먹고 근처 쇼핑센터에서 시간을 보낸다. 좋아하는 월남 국수로 점심까지 먹었다. 아침 일찍 떠날 생각이었는데, 늦게서야 길을 떠난다. 정비가 끝난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달린다. 브리스베인(Brisbane)과 골드 코스트(Gold Coast)를 잇는 왕복 8차선 고속도로다. 그러나 도로가 정체될 정도로 자동차가 넘쳐난다. 드디어 복잡한 고속도로를 벗어나 투움바(Toowoomba)로 향하는 국도에 들어선다. 산도 넘는다. 커브가 심한 도로다. 속도 내기가 힘들다. 그러나 힘든 만큼 멋진 경치가 차창 밖으로 펼쳐진다. 투움바에 들어서니 오래된 건물이 많다. 영국 냄새가 물씬 풍기는 내륙에 있는 오래된 도시다. 늦게 떠났지만 가까운 곳이라 해가 떨어지기 전에 피트워즈에 도착했다.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야영장을 찾았다. 캐러밴 자리가 서너 개밖에 없는 작은 야영장이다. 다행히 자리가 있다. 예상외로 주인은 인도에서 온 사람이다. 이렇게 외진 곳에 정착한 이유가 무엇일까. 커피라도 한 잔 나누면 많은 사연이 나올 것 같다. 캐러밴을 주차하고 동네를 걸어본다. 생각보다 큰 동네다. 울월스(Woolworth) 가게도 있다. 그러나 무척 작다. 이렇게 작은 울월스를 본 기억이 없다. 동네 중심가에는 축산업을 중심으로 1,900년도에 형성된 동네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래서일까 작은 동네이지만 정육점이 두 개나 있다. 정육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소를 키우는 동네에서 스테이크를 먹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이다. 다음 날 아침에 자동차로 동네를 둘러본다. 교회 건물 두 개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웅장함을 겨루고 있다. 이렇게 큰 교회를 건축할 정도면 예전에는 신도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교회를 찾을까. 아마도 교인 숫자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다. 대도시의 많은 호주 교회가 그렇듯이. 생각보다 붐비는 작은 동네지만 정육점이 두 개나 있다.교회를 지나 다음 골목에 들어서니 골프장이 보인다. 들어가 본다. 사무실은 자물쇠로 잠겨 있다. 입구에 봉투가 놓여 있을 뿐이다. 가격은 25불이다. 봉투에 돈을 넣어 설치된 함에 넣으면 된다. 골프도 치며 여행할 생각이었기에 골프채는 자동차에 실려있다. 금액을 지불하고 계획하지 않았던 골프장에 들어선다. 혼자서 하는 여행이기에 가능하다. 골프 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나 혼자다. 사람은 없어도 관리는 잘 되어 있다. 거의 끝날 즈음에 골프 치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방 정부에서 운영하는 골프장이다. 지역 주민을 위해 적자를 감수하는 것이다. 호주를 여행하다 보면 오지의 작은 마을에서도 골프장을 볼 수 있다. 호주 사람들의 골프 사랑이 유별나서일까. 늦은 오후에는 동네를 걸어본다. 시골 동네치고는 거리에 사람이 제법 있다. 가게도 많은 편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침술원이다. 이곳에도 침을 맞는 사람이 있을까. 분명 중국 사람이 운영할 것이다. 길 건너편에는 중국 식당도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적지 않은 중국 사람이 거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네 끝자락까지 걸어본다. 실버타운(Retirement Village)과 병원(Medical Centre)이 보인다. 그리고 택지를 조성해 분양도 하고 있다. 부동산 붐까지는 아니더라도 여느 시골 동네와 달리 활력이 넘치는 모습이다. 인도인이 경영하는 야영장, 중국 식당과 침술원 등이 있는 것을 보면 이민자가 많은 동네라는 생각이 든다.지평선까지 펼쳐진 농장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 저녁이다. 해가 서서히 하루를 마감하며 기울기 시작한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지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본다. 유난히 붉은 태양이다. 마음을 사로잡는다. 한참을 서성이며 해가 넘어갈 때까지 발길을 떼지 못한다. 뜨는 해도 아름답지만, 지는 해도 아름답다. 관광지 없는 외진 동네에서 이틀을 보낸 후 모리(Moree)로 향한다. 모리는 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온천으로 유명한 동네다. 거리는 300km 조금 더 운전하면 되는 짧은 거리다. 규정 속도보다 천천히 달리며 주위 풍경을 즐긴다. 사방으로 지평선이 보이는 들판이 계속된다. 지평선 끝자락에 보이는 숲이 가물가물하다. 사막에 있다는 신기루가 이런 모습일 것이다. 지평선까지 펼쳐진 농장도 있다. 잠시 차를 세우고 농장을 카메라에 담는다.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농장이다.주로 동구권 사람들이 많이 찾는 온천장으로 유명한 야영장 모리에서 온천장으로 유명한 야영장을 찾았다. 야영장에는 수온이 다른 온천장이 4개나 있다. 큰 수영장도 있다. 안내판에는 지하 720m에서 퍼 올린 물이라고 쓰여 있다. 깊은 지하에서 솟아난 온천수는 몸에 더 좋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운전에 지친 몸을 39도 온천수에 담근다. 좋다. 무엇을 더 원할 것인가. 온천장에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들어보면 영어가 아니다. 동유럽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국말도 들린다. 한국말로 인사를 하니 무척 반가워한다. 심지어는 저녁까지 초대한다. 오랜만에 한국 음식으로 배를 채우며 한국말로 수다를 떠는 좋은 시간을 보냈다. 고마운 사람들이다.모리는 지난번에 온 적이 있다. 따라서 관광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다음 날도 온천물에 몸을 담그며 시간을 보낸다. 옆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 나눌 기회가 생겼다. 시드니에서 왔다고 한다. 열흘 묵으면서 수영과 온천욕으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관광보다는 온천욕을 목적으로 온 사람이 대부분이다.관광지 없는 작은 동네에서 바라본 지평선 너머로 떨어진 해 노인 연금을 받아서일까. 무위도식(?)하는 은퇴한 사람으로 넘쳐나는 온천장이다. 무위도식, 좋은 뜻으로 쓰이지 않는 말이다. 우리는 의미 있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의미 있는 삶이 있을까. 어느 사상가의 주장처럼 의미 있는 무엇을 한다는 사람들이,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옳고 그름의 잣대를 만들어 편을 가르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는 전쟁까지 일으키면서.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나의 삶을 가꾸어 가려고 한다. 타인 혹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을 벗어난 나만의 삶을. 이강진 자유기고가, 전 호주 연방 공무원 kanglee699@gmail.com

26/10/2023
시골 엽서

블루마운틴엔 세 자매봉, 우리 동네엔 세 형제 국립공원 타리 인근 ‘미들브라더국립공원’과 버드트리 우리 동네에서 조금 내륙으로 가면 타리(Taree)라는 지방 도시가 있다. 이 근처에서는 가장 큰 동네다. 따라서 관공서는 물론 상점도 이곳에 몰려있다. 색소폰 하나 들고 가입한 밴드 그룹도 타리에서 모인다. 따라서 자주 찾는 동네다. 고속도로를 따라가다 타리 근처에 도달하면 높은 산들이 줄지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산림이 울창한 국립공원들이 있는 곳이다. 오래전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높고 광활한 산세가 마음을 끌기 때문이다. 같은 밴드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칼리(Kali)라는 할머니가 이 동네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네 토박이다. 칼리를 앞장세워 국립공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약속 날짜를 잡고 집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외진 산속에 살기 때문에 내비게이션이 자기 집을 찾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집에서 가까운 무어랜드(Moorland)라는 동네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국립공원을 둘러보기로 한 날이다. 주유소에서 기름도 채우고 약속 장소로 향한다. 고속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니 눈에 익은 산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칼리는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 반갑게 인사하고 안내를 받으며 산으로 향한다. 안내자가 있으니 든든하다. 고속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조금 운전해 미들브라더 국립공원(Middle Brother National Park)으로 들어선다. 블루 마운틴(Blue Mountain)에 세 자매 바위가 있다면 이곳에는 세 형제 국립공원이 있다. 그중에 산세가 가장 높은 미들브라더 국립공원에 온 것이다. 길은 물론 비포장도로다. 칼리가 제일 먼저 안내한 곳은 버드 트리(Bird Tree)라고 부르는 거대한 나무가 있는 장소다. 나무를 보니 오래전에 왔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관광객이 주로 다니는 도로가 아닌 샛길로 와서 그런지 처음 온 기분이다. 한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고목이다. 높이가 69m, 둘레가 11m나 되는 나무다. 뉴사우스웨일즈(Nsw South Wales)에서 높이는 두 번째이지만 크기로는 가장 큰 나무라고 한다. 관광객이 나무 주위를 둘러볼 수 있도록 난간이 있는 보도도 만들어 놓았다. 나무 주위를 걷는다. 그런데 난간 위에 돋보기가 얌전하게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관광객이 놓고 갔을 것이다. 잠시 벗어놓았다가 깜박한 것 같다. 고목에 너무 심취했었나 보다. 안경 주인이 다시 찾으러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안경을 제자리에 두고, 목이 아프도록 나무를 올려보며 시간을 보낸다. 제일 높은 나무를 중심으로 울창한 숲을 사진에 담는다. 그러나 어떠한 구도로 찍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수많은 고목으로 들어찬 숲속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사진으로 살려낼 자신이 없다. 사진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한다. 점심시간이다. 산자락 하남배일(Hannam Vale)이라는 동네에 있는 카페를 찾았다. 규모는 작지만 오래된 카페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내부에는 예전에 사용하던 선풍기, 램프 등 각가지 물건이 진열되어 있다. 마치 자그마한 박물관에 온 것 같다. 냉장고도 특이하게 오래된 함석으로 장식되어 있어 운치를 돋운다. 식사를 주문하고 카페 입구에 있는 야외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옆 식탁에는 나이 들어 보이는 그룹이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대화 내용으로 보아 이곳을 처음 찾은 관광객으로 보인다. 도로 건너편에는 있는 학교가 시선을 끈다. 하남배일 공립학교(Hannam Vale Public School)라는 이름이 교문에 붙어 있다. 그리고 학교 이름 옆에 1892년에 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는 문구가 있다. 그 오랜 옛날인 1892년, 이런 외진 곳에 학교를 세웠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외진 동네의 운치 있는 카페에서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오늘 하루 여행 가이드를 자처한 칼리와 함께 다시 자동차에 오른다. 왼쪽을 가리키면 왼쪽으로 핸들을 돌리고, 오른쪽을 가리키면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리며 산길을 운전한다. 조금 들어가니 이곳부터는 지방 정부에서 도로 관리를 하지 않는다는 팻말이 나온다. 그래서일까, 도로가 험해지기 시작한다. 관광객이 다니지 않는 외진 도로다. 쓰러진 나무가 도로를 막기도 한다. 쓰러진 나무를 치워 가면서 숲속을 운전한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비포장도로에서 내뿜는 흙먼지 또한 장난이 아니다. 자동차는 흙먼지로 뒤덮여 흡사 오지를 탐험하는 자동차 모습이다. 짧은 산책로가 있는 곳에 차를 세웠다. 산책로를 걷는다. 산에서 살아서인지 칼리는 나무에 대해 아는 것이 많다. 보이는 나무들 이름을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나무에 대한 설명도 열심히 한다. 그러나 이 분야에 지식이 전혀 없는 나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이름을 들어도, 설명을 들어도 기억에 오래 남지 않는다. 산책로를 조금 걸으니 밑동이 크게 비어 있는 나무가 있다. 서너 사람은 충분히 들어가도 남을 만큼 큰 공간이다. 그러나 뿌리는 넓게 퍼져있다. 하늘로 솟아있는 큰 몸통을 지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특이한 고목을 뒤로하고 이름 모를 새소리를 들으며 조금 더 걷는다. 이번에는 벌목으로 몸통은 잘려 나가고 밑동만 덜렁 남은 고목을 만났다. 남은 몸통에는 크게 파인 자국이 있다. 벌목하는 사람들이 도끼나 톱을 사용하려고 파놓은 것이라고 한다. 칼리 할아버지도 이곳에서 벌목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인다. 아마도 자기 할아버지가 자른 나무일 것일 수도 있다며 빙긋이 웃는다. 전기톱이 없던 시절, 맨손으로 거대한 나무를 잘라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산책로를 나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길을 떠난다. 이번에 도착한 곳은 와이투이 폭포(Waitui Falls)라는 곳이다. 그동안 차 한 대 보이지 않았는데 이곳에는 대여섯 대의 자동차가 주차해 있다. 주차하고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가니 작은 폭포가 나온다. 폭포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봄이 왔다고 하지만 산속에서 흐르는 물이 차가울 것 같은데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물놀이를 하는 사람 중에는 조금 전에 카페에서 만났던 사람들도 있다. 물에서 나와 수건으로 흘러 내리는 물을 닦으며 아는척한다. 춥겠다는 나의 질문에 물이 시원하고 좋다고 한다. 보기만 해도 추워하는 나에게 물에 들어가 보라고 권한다. 호주 사람들은 물을 정말 좋아한다. 맑은 물에 손과 얼굴을 적신 후 다시 길을 떠난다. 이번에는 전망대(Newby’s Lookout)에 도착했다. 전망대 입구에 큼지막한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에는 이곳에 서식하는 동식물에 대한 정보를 사진과 함께 제공하고 있다. 동굴이 있다는 표시도 보인다. 산책로도 많다. 며칠 이곳에서 지내도 다 둘러보지 못할 것이다. 전망대에 들어서니 조금 전 폭포에서 수영했던 사람들도 있다. 환한 웃음과 농담을 주고받는다. 아이와 함께 온 중년 부부와도 인사를 나눈다. 얼마 전에 도시를 떠나 이곳에 정착했다고 하며 멀리 보이는 동네를 가리킨다. 깎아지른 절벽과 끝없이 펼쳐진 산맥이 얕게 깔린 구름과 어울려 장관을 이룬다. 흙먼지를 뒤집어쓰면서 찾아온 보람이 있다. 하루를 끝낼 시간이다. 짧은 산책로를 걷기도 하고, 볼거리가 있으면 쉬기도 하면서 집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바위가 하늘로 높이 솟은 최고봉(Big Nellie Mount Summit)에서 잠시 쉰다. 전망대와 함께 테이블도 있는 장소다. 잠시 테이블에 앉아 최고봉을 올려본다. 언젠가 다시 와서 산을 오르겠다고 마음먹는다. 인적없는 깊은 숲속 분위기가 좋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호흡을 가다듬는다. 마음조차 맑아지는 기분이다. 많은 정신적 지도자가 깊은 산속에 은거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22/10/2020
시골 엽서

요즈음 텔레비전 앞에 앉으면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길어야 몇 개월 떠들썩하다 시들해질 것으로 생각했던 바이러스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을 뒤엎고 아직도 앞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다행히 나는 시드니에서 3시간 이상 떨어진 작은 동네에 살기 때문에 불편함은 적은 편이다. 아직 마스크를 사용한 적이 없다. 이웃과 만남 혹은 편의 시설 사용도 대도시보다 자유스러운 편이다. 오늘 아침 뉴스를 보면 호주는 세계에서 8번째로 바이러스를 잘 통제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해외로 나갈 수 있는 하늘길이 열릴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서일까, 호주에서는 국내 여행이 붐을 이루고 있다. 바닷가 우리 동네만 해도 휴가철만 되면 숙소를 구하기 어려울 정도다. 민박(Airbnb)을 운영하는 이웃의 말에 의하면 평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찾는다고 한다. 고속도로를 운전하다 보면 캐러밴을 끌고 여행하는 사람도 쉽게 볼 수 있다. 오랫동안 혼자 집을 지키며 지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든다. 해외여행은 힘들다. 캐러밴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호주 대륙을 돌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오래전 호주를 한 바퀴 돌았을 때의 생각이 떠오른다. 벌써 20년이 지난 일이다. 지난 세월의 경험은 아름답게 남는 것일까, 그 당시 여행에서 겪은 좋은 생각만 새록새록 떠오른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캐러밴을 사기로 했다. 이번 여행에는 동행이 없다. 혼자 다니는 여행이다. 따라서 견인하기 쉬운 작은 캐러밴을 고르기로 했다. 캐러밴 여행을 자주 다니는 동네 사람들의 조언을 받기도 하고, 인터넷으로 알아보기도 하면서 작고 똑똑한(?) 캐러밴을 찾아본다. 마음에 드는 작은 캐러밴을 찾아냈다. 작지만 있을 것은 갖춘 캐러밴이다. 지붕을 펼치면 두 사람 정도는 편안하게 지낼만하다. 가까운 곳에 있는 대리점을 찾았다. 그러나 재고가 없다고 한다. 지금 주문하면 10개월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실망이다. 집에 돌아와 오늘 겪었던 이야기를 동네 사람들에게 전했다. 해외여행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캐러밴을 많이 구입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이러스 때문에 생산에 차질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한다. 다른 회사 제품도 새것을 사려면 6개월 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생각을 바꾸어 중고 캐러밴을 사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열심히 검색한다. 내가 원하는 캐러밴을 판다는 광고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찾아갈 수 있는 가까운 동네에서는 광고가 나오지 않는다. 하루가 멀다고 열심히 찾는다. 드디어 두어 시간 떨어진 동네에서 내가 원하는 캐러밴 광고가 나왔다. 거의 새것이다. 서둘러 찾아가 캐러밴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 할아버지 인상이 좋아 대충 흥정했다. 조금 비싸게 산 기분이 들기는 한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다정함이 보상하고 남는다. 며칠 후 난생처음 캐러밴을 견인하여 집에 왔다. 먼저 가까이 지내는 동갑내기 켄(Ken)을 불렀다. 큼지막한 캐러밴을 가지고 호주 전역을 돌아다니는 이웃이다. 집을 팔고 캐러밴으로 여행이나 하면서 노후를 지내자는 아내와 가끔 말다툼한다고 한다. 여행이 좋아도 집은 있어야 한다고 켄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화를 받고 달려온 켄이 능숙한 솜씨로 캐러밴을 둘러본다. 바퀴 아래까지 누워서 들여다본다. 내부도 꼼꼼히 살피며 이런저런 설명을 해준다. 냉장고 사용법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캠핑장에서 지낼 때 챙겨야 할 것에 대해서도 설명이 장황하다. 캐러밴을 견인해 동네를 돌면서 전기 브레이크의 작동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해 준다. 내가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일까,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인다. 몇 번 다니다 보면 익숙해질 것이니 너무 염려하지는 말라고 한다. 자기 일처럼 꼼꼼히 챙겨주는 이웃이다. 고맙다. 본격적으로 호주 여행을 떠나기 전에 캐러밴 생활을 경험해 보기로 했다. 외진 곳보다는 여행객이 많은 큰 도시가 좋을 것 같다. 캐러밴 점검도 하고 캠핑에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구입하기에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목적지는 골드 코스트(Gold Coast)로 정했다. 골드 코스트 해변에 있는 캠핑장을 예약했다. 떠날 준비를 한다. 옷가지와 세면도구 등은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것이라 쉽게 챙긴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마를 비롯해 부엌 용품도 챙겨야 한다. 간장, 기름 등 조미료까지 혼자서 챙기려니 정신이 없다. 이부자리도 가지고 가야 한다. 나름대로 꼼꼼히 챙겼다. 그러나 캠핑장에 가면 잊고 온 물건이 있을 것이다. 떠나는 날이다. 이웃이 조언한 대로 캐러밴을 견인하는 데 문제가 없는지 다시 점검한다. 전기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동네를 벗어나기 전에 확인한다. 드디어 평소에 자주 다니는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평소보다 느린 속도로 운전한다. 자동차가 추월한다. 평소에 캐러밴을 견인하는 자동차를 항상 추월하며 운전했던 나 자신이 생각난다. 무리하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운전하며 예정한 시간보다 늦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캠핑장은 생각보다 붐비지 않는다. 캐러밴을 야영장에 주차한다. 그러나 혼자서 후진으로 캐러밴을 정확한 위치에 주차하기가 쉽지 않다. 옆에서 보고 있던 젊은이의 도움을 받아 주차했다. 주차했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가림막을 설치해야한다. 그런데 끈을 고정하려는데 망치가 없다. 조금 전에 도와주었던 젊은 부부에게 도움을 청한다. 처음으로 캐러밴에서 지낸다는 말을 듣고 이런저런 도움을 준다. 큼지막한 캐러밴을 끌고 어린아이와 함께 여행하는 부부다. 사륜 구동차에는 요트와 도로에 빠졌을 때를 대비한 장비도 갖추고 있다. 이야기 나눌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호주 전역을 다니는 여행객임에 틀림없다. 예전 호주 여행 중 오지에서 자주 보았던 전형적인 히피 모습이기 때문이다. 농촌 일손을 도와주면서 필요한 생활비를 마련한다. 그리고 호주 전역을 떠돌아다니는 삶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저녁 시간이다. 캐러밴 작은 공간에서 고기를 굽는다. 김치도 넣어 볶는다. 가지고 온 밥도 함께 섞는다. 계란도 넣는다. 김치볶음밥 비슷한 요리가 끝났다. 음식을 식탁에 올린다. 먹을 만하다. 가지고 온 포도주도 한잔한다. 캐러밴에서 처음으로 요리해 먹는 나만의 식사 시간이다.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지낼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캐러밴에서 첫날을 편안하게 지내고 아침을 맞는다. 생각보다 침대도 편하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특별한 계획이 없다. 바다가 내륙 깊이 들어와 있는 해변을 산책한다. 명상가들은 걸으면서도 호흡과 걸음에 정신을 집중하며 명상한다고 한다. 나 같은 범인으로서는 흉내 낼 수 없다. 낯선 풍경과 하나가 되어 걷는 것만으로도 부족함이 없다. 혼자 걸으니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자신의 미래를 훤히 안다는 것은 고통이라고 한다. 불안한 미래야말로 사람을 싱싱하게 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변화를 시도하라는 옛 성인의 말씀도 생각난다. 얼마 후에는 캐러밴에서 지내는 나만의 삶이 시작될 것이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들었던 ‘고독력’이라는 단어가 머리에서 맴돈다. 여행 중에는 작은 오솔길을 혼자 걸어야 할 때가 많을 것이다. 고독을 친구 삼아 떠날 때를 기다린다. 불안한 미래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린다. 필자: 이강진 kanglee699@gmail.com (자유 기고가, 뉴사우스웨일즈 Hallidays Point에서 은퇴 생활) 사진 설명: 1. 캠핑장 앞 해변에서 하루를 즐기는 사람들.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가족이 많다. 2. 캠핑장에 있는 수영장. 캠핑장 시설이 좋다. 3. 캠핑장에 늘어선 캐러밴, 호주 사람 중에는 여행광이 많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4. 집에서 생활하는 것과 다름없는 고급 캐러밴도 많이 보인다. 위성 안테나까지 구비하고 있다.

18/02/2021
시골 엽서

봄이 왔다. 꽃샘추위도 넘볼 수 없는 따뜻한 봄이 찾아왔다. 올해는 유난히 봄이 기다려졌다. 나이가 들면 봄이 가장 좋은 계절이 된다고 하던데, 나도 예외는 아닌가 보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과 따뜻한 봄바람이 집을 나서도록 유혹한다. 자동차 시동을 켠다. 계획 없이 직관에 따라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은퇴해서 혼자 지내는 삶의 특권이다. 어디로 갈까. 일단, 몇 번 가보았던 케이프 호크(Cape Hawke)라는 바닷가 산봉우리를 목적지로 정했다. 바다를 한눈에 내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 곳이다. 운이 좋으면 철새처럼 호주 동해안을 오르내리는 고래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고래를 만나지 못해도 30여 분 정도 산을 올라 태평양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가볼만한 곳이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포스터(Forster) 중심가를 지나 산길로 들어선다. 너른 들판에 드문드문 보이는 저택들이 시선을 끈다. 현대 사회가 각박해지는 이유는 시야가 짧은 도시의 주거환경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시야가 확 트인 들판을 바라보며 지내는 사람들은 마음도 넓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산길을 따라 운전해 케이프 호크에 도착했다. 이곳은 관광안내 책자에 소개되는 장소다. 그래서일까, 외진 산속이지만 올 때마다 주차장에는 항상 서너 대의 자동차가 주차해 있다. 조금은 익숙한 산책로를 따라 정상을 오른다. 가파른 산책로다. 산을 오르는 나의 모습이 힘겹게 보여서일까, 아이들과 함께 정상에서 내려오는 가족이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된다고 격려한다. 호주에서는 산책로를 걷다 보면 마주치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주고받는다. 간단한 인사말이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한국에서 산책하면서 마주치는 사람과 눈인사도 하지 않고 지나치던 기억이 떠오른다. 정상에 설치된 전망대에 올랐다. 파도가 심한 태평양이 발아래 펼쳐진다. 바람이 심하다. 그러나 온기를 담은 봄바람이다. 고래를 열심히 찾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파도가 심해 고래가 있어도 보이지 않을 날씨다. 포스터 시내로 시선을 옮긴다. 동네를 둘러싸고 펼쳐진 호수가 한폭의 그림이다. 전망대에서 내려 보이는 숲은 호주의 아카시아 나무라고 불리는 와틀(wattle)이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다. 봄이 온 것이다. 옆에서 사진을 찍는 중년의 남녀와 가벼운 농담을 나누기도 하면서 봄을 만끽한다. 가벼운 산책을 끝내고 조금 더 남쪽에 있는 스미스 호수(Smiths Lake)라는 동네로 향한다. 오래전 한 번 운전하며 지나쳤던 동네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동네 입구로 들어선다. 나이 든 사람들이 주로 즐기는 잔디 볼링장이 보인다. 작은 동네이지만 클럽 건물과 볼링장 규모가 크다. 은퇴한 사람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네 한복판 전망 좋은 곳에는 집들이 생각보다 많다. 화려하지 않은 그러나 큼지막한 주택들이다. 천천히 자동차로 주위를 둘러본다. 비탈길을 내려가니 도로가 끝나면서 넓은 호수가 펼쳐진다. 작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호수 주위를 걷는다. 자그마하고 정겨운 어린이 놀이터가 있다. 서너 채의 집이 호수를 바라보고 있다. 놀러 오는 사람에게 빌려주는 집이라는 팻말이 보이는 집도 있다. 호숫가 백사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한가하게 지내는 가족의 모습이 정겹게 다가온다. 조금 떨어진 경치 좋은 곳에는 시골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큼지막한 건물이 있다. 식당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건물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생각했던 대로 건물 앞에는 카페라는 간판이 있다. 그러나 영업을 하지 않는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주말에만 영업한다는 안내문이 유리창에 붙어 있다. 카페 끝자락에 있는 식탁에 앉아 신선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마시는 커피는 별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언젠가 다시 오겠다는 다짐을 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옮긴다. 점심시간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 퍼시픽 팜(Pacific Palm)이라는 동네가 있다. 젊은이가 많이 찾는 해변이다. 따라서 관광객을 위한 다양한 숙소도 많은 곳이다. 동네 중심가에 주차하고 식당을 찾아본다. 확실히 젊은이가 많다. 가게들도 젊은이들이 좋아할 물건이 많이 진열되어 있다. 도로 건너편에 있는 식당에 들어선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띄엄띄엄 놓은 식탁 하나가 비어 있다. 메뉴를 보니 인도네시아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인 것 같다. 키가 작고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은 젊은 동양 여자가 주문을 받는다. 식당 주인의 딸이나 친척일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 직원이다. 메뉴에는 호주 사람이 즐겨 먹는 햄버거 등도 있지만, 낯선 음식 이름도 적혀있다. 두부와 이름모를 야채가 적혀 있는 음식을 주문했다. 인도네시아 향이 나는 음식이 식탁에 올려진다. 맛있게 음식을 먹었다. 특히 동남아시아 특유의 야채와 소스가 입맛을 돋구었다. 빈 접시를 가져가는 직원에게 음식이 좋았다고 인사를 한다. 직원은 고맙다고 하며, 인도네시아 사람이 즐기는 음식이라고 한다. 해는 아직도 중천에 떠 있다. 특별한 계획을 갖고 집을 나선 것도 아니다. 평소에 자주 들리는 야외에 있는 교회가 생각난다. 우연히 알게 된 건물이 없는 교회다. 야자수가 울창한 호숫가, 운치있는 장소에 자리잡고 있는 교회다. 따라서 우리 집을 찾은 지인들과 종종 함께 찾는 교회이기도 하다. 야자수로 뒤덮인 좁은 길에 들어서면 나무로 만든 작은 기둥 하나가 서 있다. 이 땅에 평화가 넘쳐나기를 기원한다는, “May Peace Prevail On Earth”, 말씀이 쓰여 있는 기둥이다. 영어를 비롯해 6개 국어로 번역된 육각형으로 만든 작은 기둥이다. 세계가 서로 화해하고, 평화로운 미래가 도래하기를 기원하며 만든 기둥이라는 설명이 쓰여있다. 전 세계 180여 개국에 25만 개 정도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는 설명도 있다. 좁은 길을 따라 더 들어간다. 통나무로 만든 긴 의자들이 호수를 바라보고 있다. 예배드리는 장소다. 비를 가릴 수 있는 천장도 없다. 바로 앞에는 파도도 일지 않는 너른 호수가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자연 속에 있는 꾸밈없는 교회가 마음에 든다. 한 번 날을 잡아 이곳에 와서 석양을 마주하겠다고 다짐한다. 호수에서 눈을 돌리니 구석에 있는 나뭇가지로 엉성하게 만든 십자가가 보인다. 크고 웅장한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십자가가 아니다. 초라한 십자가 앞에 다가선다. 예수님이 온몸으로 담당했던 고뇌와 외로움이 보이는 듯하다. 신이라는 이름으로만 포장된 예수가 아닌, 인간의 몸으로 몸부림치며 삶을 마친 예수의 모습을 본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곱씹어 본다. 야자수 나무에 둘러싸인 십자가를 뒤로하고 교회를 떠난다. 들어오면서 보았던 평화를 이야기하는 기둥과 다시 한번 더 마주친다. 나만이 옳다고 하는 편협함을 떨쳐버린 삶을 그려본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이웃도 사랑할 수 있는 삶을 그려본다. 이강진 (자유기고가, 전 호주 연방 공무원) kanglee699@gmail.com

24/09/2020
시골 엽서

 ‘호주의 배꼽’이라 불리는 앨리스 스프링스(Alice Springs) 첫 날 계곡 사이를 거닐다 마주한 자연이 조각한 동상악마들이 가지고 놀았다는 희귀한 바위 구경을 끝내고 호주 내륙에 있는 도시 앨리스 스프링스(Alice Springs)로 향한다. 고속도로를 타고 400km 정도만 운전하면 도착할 수 있다. 황량한 평야를 가로지르는 직선 도로다. 솔개들이 아침을 장만하기 위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머물고 있다. 자동차가 많이 다니지 않기 때문에 가끔 마주치는 운전자들은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것이 예사다.얼마나 운전했을까, 도로에서 새 떼를 만났다. 작은 새들이 도로변에 있다가 자동차 소리에 놀라 날아간다. 그러나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보다 빠를 수 없다. 새 한 마리가 앞유리창에 부딪혀 옆으로 튕긴다. 서너 마리의 새가 도로 한복판에 줄지어 죽어 있기도 하다. 도로를 주시하면서 새가 보이면 경적을 울리며 운전해야 했다. 오지에서만 겪을 수 있는 특이한 경험이다.  앨리스 스프링스에 도착했다. 동서남북 모두 바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호주 대륙 한가운데 있는 도시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도시이기도 하다. 동네 중심지 가까운 곳에 예약한 야영장에 도착했다. 큰 야영장은 아니지만 깔끔하게 잘 정돈된 야영장이다. 그러나 사람이 많아서인지 외진 장소밖에 없다고 한다. 더운 날씨다. 조금은 지쳐있기도 하다. 금액을 더 주고 좋은 장소(Ensuite Site)에서 지내기로 했다. 공중 시설이 아닌 나만의 샤워실과 화장실이 바로 옆에 있는 장소다. 이렇게 좋은 장소에 캐러밴을 주차하기는 처음이다. 오랜 여행 중에 한 번쯤은 호강(?)해도 되지 않을까.중국인이 경영하는 한국 식당에서 막걸리를 즐기는 호주 사람. 오지를 다니느라 한국 음식을 오랫동안 먹지 못했다. 혹시나 해서 한국 식당을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다. 이외로 한국 식당 하나가 올라온다. 반갑다. 저녁 시간에 맞추어 식당을 찾았다. 식당에 들어서니 눈에 익숙한 소주 광고가 벽을 장식하고 있다. 한국 냄새가 어느 정도 풍기는 적당한 크기의 식당이다. 그러나 김치와 찌개 냄새가 진동하는 한국 식당과는 거리가 멀다. 메뉴에도 얼큰한 국물은 보이지 않는다.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자가 주문받는다. 그런데 한국말을 하지 못한다. 중국 사람이라고 한다. 한국말을 한마디도 못 하는 중국 사람이 한국 식당을 운영하는 것이다. 메뉴에서 '부다'라는 이름이 붙은 채식 비빔밥을 주문하고 주위를 둘러본다. 식당 주인이 옆자리에 막걸리를 놓고 간다. 막걸리를 주문한 호주인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막걸리는 처음 마신다고 한다. 한국 식당도 처음이라고 한다. 원주민 학교에서 일하게 되었다며 자신을 소개한다. 나에게도 막걸리를 권한다. 흔쾌히 한 잔 받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한국 음식도 호주에 많이 알려졌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 사람까지 한국 음식점을 운영할 정도가 되었으니. 다음 날 아침 느긋하게 일어나 야영장을 나섰다. 낯선 동네에 가면 자주 들리는 식물원(Olive Pink Botanical Garden)에 가보기로 했다. 식물원 입구에 자리 잡은 카페에는 늦은 아침을 즐기는 사람이 제법 많다. 카페 옆으로 산책로가 보인다. 돌계단을 밟으며 천천히 걸어 작은 동산 꼭대기에 도착했다.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식물원 뒷동산 정상에서 만난 캥거루 가족정상에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캥거루 두 마리가 나를 쳐다본다. 이곳에 서식하는 캥거루 가족이다. 사람들과 자주 마주치는 캥거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옆으로 지나가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동산에서 내려와 식물원을 둘러본다. 건조한 들판에서 자라는 선인장 종류 식물이 대부분이다. 식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평범한 사람의 눈길을 끄는 화려한 꽃이나 특이한 식물은 보이지 않는다.앨리스 스프링스에는 볼거리가 널려있다. 사막 관광(Alice Springs Desert  Park)을 비롯해 은하수를 찾아 밤에 떠나는 관광 상품도 있다. 시내에서 떨어진 농장에 있는 베트남 식당도 인상적이다. 베트남에 있다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베트남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식당이다. 밤늦게 각국 음식 냄새가 진동하는 시내 한복판에서 동네 사람들의 공연을 구경하기도 한다. 관광객이 많이 찾을 수밖에 없는 호주 대륙 한가운데 있는 도시다. 오늘은 벼르고 벼르던 맥도넬 산맥(West MacDonnell Ranges)을 둘러보기로 했다. 앨리스 스프링을 찾은 관광객이라면 빠짐없이 둘러보는 산맥이다. 따라서 이곳을 둘러보는 관광상품도 다양하다. 산맥은 650km 정도로 방대하다. 모두 둘러보는 것은 무리다. 시간이 허락하는 데까지만 둘러볼 생각으로 자동차에 오른다.서쪽으로 길게 늘어선 2차선 도로를 달린다. 왼쪽 차창 밖으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산맥이 줄지어 있다. 산이라고 하지만 정상은 잘려 나간 산봉우리가 없는 산들이다. 드디어 첫 번째 볼거리(Simpsons Gab)가 있다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려 들어가니 거대한 돌산이 보이기 시작한다.관광객이 많이 찾는 장소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주차장이 넓다. 큼지막한 안내판에는 사진과 함께 이 지역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산을 향해 걸어 들어간다. 거대한 두 개의 돌산이 마주 보고 있다. 돌산을 올려본다.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자연의 웅장함이 펼쳐진다. 두 개의 돌산 중간에는 제법 많은 양의 물이 고여있다. 우기에는 물이 많아 관광할 수 없을 것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단체 관광객들이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있다. 하루 동안에 가능하면 많은 곳을 구경할 생각이다. 서둘러 다시 차에 오른다. 도로변에 관광지 이정표가 있으면 빠짐없이 둘러보며 서쪽으로 계속 운전한다. 이곳에는 시선을 끌 만한 계곡이 줄지어 있다. 구경도 많이 하고 걷기도 많이 했다. 돌아갈 시간이 되어간다. 깎아지른 돌산이 마주하고 있는 유명한 관광지(Standley Chasm)조금 늦은 시간이지만 관광포스터 사진에 자주 나오는 관광지(Standley Chasm)를 외면할 수 없다. 서쪽으로 더 운전해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했다. 대여섯 대의 캐러밴이 보인다. 주차장 근처에 무료 야영장이 있기 때문이다. 의자에 앉아 포도주잔을 들고 늦은 오후를 즐기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모습이 인상적이다. 서둘러 돌산을 향해 걷는다. 깊은 계곡 사이에 조성된 산책길이다. 주위에 시선을 돌리며 천천히 걷고 싶은 길이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 서둘러야 한다. 드디어 사진에서 보았던 거대한 돌산에 도착했다. 풀 한 포기 없는, 깎아지른 돌산과 돌산 사이에 작은 공간이 있다. 공간에 들어선다. 수직으로 뻗은 산에 잘려 나간 하늘을 올려본다.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적막한 공간이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정이 스며든다.     많이 걷고 많이 구경했다. 자동차에 오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중년의 여자도 자동차 시동을 켠다. 자동차에서 숙식이 가능한 밴이다. 작은 도로를 함께 빠져나와 큰 도로를 만났다. 앞에서 가던 밴은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는다. 계속 산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오늘 밤은 산속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할 것이다. 여자 혼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야영장에 돌아와 땀에 젖은 하루를 씻어낸다. 나만의 호화스러운(?) 개인 샤워장이다. 문득 늦은 시간임에도 산 깊숙이 들어간 여자가 생각난다. 따뜻한 물에 샤워도 하지 못할 것이다. 저녁은 비좁은 자동차에서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힘든 만큼 특이한 경험도 많이 할 것이다.흔히 ‘삶을 여행(Life is journey)’이라고 한다.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은 힘들었던 경험을 많이 기억하며 이야기한다. 심지어는 고된 여행을 일부러 찾아 나서는 사람도 있다.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려웠던 시간이 나의 삶을 살찌우는 데 도움을 준 경우도 많았다. 많은 영적 지도자가 어려운 삶, 심지어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강조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베트남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식당. 석가모니 동상까지 모셔 놓은 식당이다.이강진 (자유기고가, 전 호주 연방 공무원) (kanglee699@gmail.com)

19/05/2022
시골 엽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