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될 때, 사람은 좋은 일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아하고, 잘하는 것 가운데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좋아하는 것입니다. 음악에 소질이 있으면 음악을, 숫자놀이나 계산하는 것을 좋아하면 수학을, 들을 귀가 있으면 걸맞게 놀면 됩니다. 그런데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예수님과 인격적 만남으로 가능합니다. 인간의 약점, 강점이 본래의 나로 회복됩니다. 재능이 없던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던 것이지요. 빛을 비추어 주세요. 그리고 잠깐 내 안의 잠자는 재능을 일으켜 보세요.
세상일에 푹 빠져 있던 마태오,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세금을 받아내던 마태오가 자기 속에 잠자고 있던 능력을 깨웠습니다. 집필하는 복음의 작가가 되었습니다. 거둔 돈 계산을 하던 세관장을 진리 선포의 봉사자로 세웠습니다. 자기계발을 넘어 내안의 재능 선물을 발견하도록 초대합니다. 회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디 자신이 되어, 온전한 변화로 인도됩니다.
제자가 되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봉사자가 되는 길은 무엇을 하는 것이라기보다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수학을 풀고, 음악의 소질, 그리는 재주 등 탈렌트의 발견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행위가 부르심이고, 회심이지요. 호기심이 많은 자케오는 나무 위에서, 마태오는 세관에 앉아 있다가 주님을 만납니다. 어느 곳, 어느 시간에서나... 영화 인터 스텔라에서 거리와 사랑의 밀도에 따라 시간이 흐르지요. 환한 미소는 비추는 달님이 되어 서로를 통하게 합니다.
서로를 비추면 충분합니다. 어둠에 빛을 비추면 통합니다. 통하는 빛은 자신을 비추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등불입니다. 빛으로 관계가 밝아집니다. 빛은 자신을 알도록 인도하는 등불이라서 자신을 보는 힘과 지혜를 줍니다. 존재를 알 수 있지만 온전히 이해하려면 빛의 도움이 필요하지요. 하지만 아무리 빛을 비추어도 최악의 경우가 생깁니다. 최악은 등불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빛이 사라져 서로의 관계를 볼 수 없도록 어둡게 만듭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4,21)
거짓말은 다리가 짧아 멀리 못갑니다. 지혜롭게 보이지도 않습니다. 거짓은 애초부터 진실을 막고 침묵하게 하지요. 하지만 언젠가 행한 모든 것은 빛 앞으로 가고 세상의 진실한 시선 앞에 서 있습니다. 진리와 진실이라는 빛의 목적지가 우리를 기다립니다. 상대방과 통(通)하려면 웃으면 됩니다. 환하게 미소를 띠면 더욱 괜찮지요. 오해가 편견으로 자라게 되는 데, 통하는 특효약은 일단 미소입니다. 웃으면 오해가 더 전진하지 않습니다. 실수가 생겼을 때, 당황해 하는 굳은 얼굴 보다 살짝 웃는 미소가 오해와 감정을 풀 수 있습니다. 실수와 잘못으로 생겨나는 불통(不通)의 치료제는 웃음과 마음을 모아 약간 고개를 숙이는 인사입니다.
조선 3대 국왕 세종이 보위에 올라 가장 먼저 한 것은 집현전(集賢殿)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현자들을 모은 일종의 브레인 그룹의 협력자 집단입니다. 그런데 세종이 한글을 만들고자 했을 때, 제일 먼저 반대한 사람들은 집현전 학자들이었답니다. 하지만 통하는 임금 세종은 훌륭한 인품답게 환하게 웃으며 학자들과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한글을 만들어 갔답니다. 예수님이 보여준 길이 자신을 따르는 것이라면, 구원의 길은 서로 통하는 문, “나는 문이다.”(요한 10, 9)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 5) 모든 벽이 문이 되는 순간 통하는 사람, 통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곽승룡 비오 신부 (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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