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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를 어떻게 할까요? 사람의 영혼 곧 ‘에고(ego)’는 생각과 마음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마음공부는 생각이 마음과 접촉해서 알아차리는 것, 곧 생각이 마음을 챙기는 것으로도 이해됩니다. 사람의 인생은 지식과는 또 다르게 느낌과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에고는 마음이 상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생각과 마음이 너무 멀리 있어서 그럴 수 있어요. 그래서 되는 대로 느끼고 생각하면 아마도 그렇게 되기가 십상이고 그래서 간혹 인생에 크고 작은 문제도 일어납니다. 사람은 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정은 자신에게 옳습니다. 그런데 감정은 흐르면 흐를수록 마음이 건강해지기 때문에 좋은 감정이든 안 좋은 감정이든 흐르지 않고 빠지는 것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마음에 갈등이 생기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대체로 타인에게 휘둘려서 그러곤 합니다. 그래서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자신의 감정에 완전히 빠지면 생각이라는 좋은 친구를 만나기 힘들어집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고 어떻게 하나를 기웃 기웃거리다 마음을 다칩니다. 특히 생각보단 마음이 사라져 간 데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마 마음이 외출한 것이겠죠? 그래서 사람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고 갈 길을 가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이것이 영혼 돌봄 가운데 특별히 ‘마음공부’라고 합니다. 이 공부는 처음부터 저절로 안 됩니다. 하지만 배우고 연습하고 또 공부하면 됩니다. 마음공부는 영혼 속의 마음이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합니다. 사실 병은 물리적인 통증이 없는 병, 곧 아프지만 그렇게 느끼지 못해 보이는 병이 심각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아프고 병이 들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또 그걸 느끼면, 어떻게 고칠까요? 마음공부는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느끼는데서 출발합니다. 건강한 마음을 배우고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마음공부이고 곧 에고를 위한 영혼 돌봄입니다. 그러므로 그 방법을 아는데, 선생이 필요합니다. 학생이 정신을 차리고 준비되면 선생님은 나타납니다. 이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합니다. 선생님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제를 건드립니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루카 21,34) 특히 예수께서는 바리사이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마르 10,5)라며 율법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그 실천정신을 찾으라고 제시하십니다. 인생에서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식별할까요? 하느님이 내 인생에서 무엇을 바라실까요? 다양한 분야, 인생의 크고 작은 순간, 매일 일어나는 크고 작은 상황에서 하느님의 뜻이 나에게 어떻게 작용하는 것을 알아차릴까요? 사실 오늘의 사회는 더욱 강력하게 우리가 인생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식별할 것인가에 집중하도록 요구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가 하는 마음공부는 자기 의지를 내려놓는 수련입니다. 나를 내려놔야 하느님의 뜻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이제 자기 의지를 내려놓는 ‘겸손 수련’에 관해 나누고자 합니다. 그런데 아직 행동은 아니더라도 의지를 내려놓는데 왜 안 될까 고민하거나 자책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 먼저 성찰과 식별을 통해서 의지를 내려놓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라고 질문하고 이를 위해 생각과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그 과정을 표현하는 것이 마음공부입니다. 그런데 마음공부의 기본은 성찰과 식별인데, 성찰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고, 식별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공부하고 설명하다보면 자신의 의지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우선 마음을 온전히 들여다보려면 닫아 있고 닫혀있는 마음의 커튼을 활짝 제쳐야 합니다. 곧 마음의 빗장을 풀고, 마음을 열어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문고리는 밖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안쪽에 있기에 누구도 열 수 없고 오직 자기 자신만이 문고리를 잡아당길 수 있습니다. 열어 보십시오! 그 순간이 건강한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느낄 때입니다. 3년의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가 마음 중심의 시대를 살도록 움직였습니다. 지금까지 몸이 중심된 세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이 갖고, 더 크게 짓고, 더 넓게 차지하도록 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지금 마음 중심으로 살아가는 시대는 우리가 덜 갖고, 작게 지으며, 덜 차지하고 작은 것이라도 나누도록 안내합니다. 이는 물질만이 아니라 정신, 문화, 가치관 등입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자신 안으로 끝없이 소유하는 삶을 추구했다면, 이제는 자신 밖으로 나가 많이 나누고 전하는 시대를 살도록 특별히 하나밖에 없는 지구는 요구합니다. 이제 마음 중심의 시대입니다. 하루에 잠시라도 마음공부를 어떻게 할까요? 많은 종교인들이 그들 경전의 중심가치(유교, 불교, 그리스도교 등)를 체계적으로 알고 살아가는 것이 마음공부입니다. 지난 4년 동안 귀한 한호일보의 금요단상 지면을 통해 글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하고 감사했습니다. 필자는 이제 임기를 마치고 한국의 대전 교구로 돌아갑니다. 이곳에서 만나고 배웠던 한 순간 한 순간과 만났던 모든 호주 한인들을 마음에 담고 갑니다. 그리고 고국에서 마음에 담은 순간과 위대한 한국인 여러분을 위해 기도로 응원하고 기억합니다. 마음공부의 달인, 대한민국 사람들은 위대합니다. 모두가 한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되면 하지 못할 일이 없고 불가능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느님의 축복을 청해 드립니다. 사랑합니다.곽승룡 비오 신부(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12/01/2023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성경은 방대하지만 메시지는 간략하고 간단합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선포 ‘회개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말하면 “뭔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하라’의 마지막 종말론적인 말은 역시 ‘바뀌어야 한다’는 뜻의 “깨어 있어라!”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인간 중심세계관에서 우주 곧 자연중심적인 세계관으로 확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모두 정말 ‘뭔가 바뀌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진화론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구 온도가 1도 상승하는 시계가 7년도 남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왜 이런 지경의 생태지구가 되었나요? 바로 인류전체의 상태가 지금 지구의 상태입니다. 곧 지구가 현재 인류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인류의 모습은 인간들의 감정 드라마로 드러나고 있는데, 인류의 어떤 감정이 반영된 드라마일까요? 지금 우리가 초월해야할 감정의 드라마가 어떤 것일까요? 감정의 드라마 가운데 중심 감정은 무엇일까요? 바로 서로가 서로에게 드러내는 ‘불만’입니다. 특별히 정치와 종교의 중심인물들이 세상과 백성들과 벌이는 이익과 욕망에서 시작된 것이 ‘불만’의 감정입니다.모든 불만은 자기를 강화하고 굳어버리게 합니다. 우월감이 그 불만의 예입니다. 그 우월감이 우리의 적이고 원수이며 악입니다. 그러면 불만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불만의 감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자리에 바로 자신이 옳다는 뿌리 깊은 욕심과 상처가 자기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만을 주장하는 만큼 우월감의 끝판왕은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옳기 위해서 틀린 누군가 필요합니다. 자기는 바로 진실을 방어하려고 그런다고 주장합니다. 착각입니다. 진실은 어느 경우든 방어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로 자신만을 방어할 뿐입니다. 그런 환상이 자신을 방어합니다. 새로운 지구, 새로운 나라를 위해 ‘깨어 있어라!’ 곧 우리는 뭔가 바뀌어야 합니다. 국민들도 그 회개와 깨어있음의 중심을 차지하지만 특별히 종교와 정치를 담당하는 위정자들에게 매우 강력히 촉구되는 바가 ‘깨어 있어라’는 자각입니다.인류에게 요청되는 깨어있는 행동에는 세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받아들임’, 둘은 ‘즐거움’ 그 가운데 마지막 하나가 바로 ‘열정’입니다. 가장 단순한 일부터 매우 복잡한 일까지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가 작동하도록 회개하고 특별히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열정에 대한 의미를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열정은 영어로 ‘enthuasiasm’인데 이 단어를 분석해 보면 en(in) thus(theos, God)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곧 열정이란 ‘내 안에 신을 둔다’는 뜻으로 하느님의 영감상태 곧 ‘신에 사로잡힌 상태’인데 그것이 바로 열정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정을 품고 사는 사람은 한 개인이 할 수 없는 것을 훨씬 뛰어넘어가는 창조적인 힘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열정이란 말은 한편 영감(靈感)의 말과 유사합니다. 영감의 영어 단어는 inspiration인데 바로 in spirit 영 안에서, 영 속에서 신의 계시를 받는 것같은 감각인데, 창의적인 일의 동기가 되는 생각이나 자극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회개, 깨어 있어라! 이 말은 “뭔가 바뀌어야 한다”는 강력한 주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영 속에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힘으로 회개하고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지구 우리의 공동의 집을 위해 깨어있도록 합니다. 우리 모두는 뭔가 바뀌어야 합니다. 깨어 있어라! 곽승룡 비오 신부 (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24/11/2022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단테의 신곡 관련 그림  단테(1265-1321)는 13세기 중엽에 태어나 14세기 초반까지 살면서 그 유명한 ‘신곡(La divina Commedia)’을 집필하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가톨릭교회가 14세기 교황 베네딕토 12세에 의해 선포된 연옥에 관한 믿을 교리를 단테는 자신의 인생 말년 저작한 신곡에서 미발표된 소위 최신 교리정보인 ‘연옥에 대한 이야기(La divina Commedia – Purgatorio)’를 써 내려간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11월 한 달을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달로 지내는 관습을 가지고 있다. 살아있는 이들이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으며, 이 기도가 죽은 이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전통이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 가톨릭교회는 오직 우리만 가지고 있는 연도(죽은 이를 위한 기도,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를 바친다. 다시 단테이야기로 가보면, 연옥의 칠층산에 죄들에 대한 벌들 7P(peccati 죄들)가 있다. 오늘날에도 성찰하고 반성할 영감을 제공하고 있다. P의 7가지 목록을 보면 1층부터 차례로 교만, 질투,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음욕의 죄를 지은 사람들이 위치하고 있다. 그 죄를 지은 자들이 칠층산의 각층에서 받고 있는 벌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교만의 죄를 지은 자들은 죄 무게만큼의 바위를 짊어지고 있다. 질투의 죄를 지은 자는 철사로 눈을 꿰매는 형벌을 받고 있고, 분노의 죄를 지은 자는 짙은 연기 속에서 벌을 받고 있다. 나태의 죄는 멈출 수가 없이 계속 달리는 것이다. 그리고 탐욕은 땅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음이고, 탐식은 허기와 갈증으로 고통을 받고, 비쩍 마른 모습으로 걸어가고 있음이다. 음욕은 불의 장막을 지나가는 형벌을 받는다. 칠층산에서 벌을 받고 있는 죄인들은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1층부터 3층에 있는 자들이 지은 것들은 교만과 질투와 분노이다. 이는 나쁜 사랑의 죄를 지은 자들로서 사랑을 해야 하는데 그 반대로 나쁜 사랑을 하고 있는 자들의 목록들이다. 4층에는 나태의 죄를 지은 사람들인데 이는 나쁜 사랑은 아니지만 부족한 사랑을 지은 자들이 있다. 시드니 한인성당에서도 코로나 이전보다 절반 이상의 교우들이 성당에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혹시 코로나가 나태의 기회를 제공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5층부터 벌을 받고 있는 자들 곧 탐욕과 탐식 그리고 음욕을 행한 사람들은 지나친 사랑을 하는 죄인들이다. 나는 나쁜 사랑, 부족한 사랑 그리고 지나친 사랑을 행한 자들이 가는 단테의 연옥이야기를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성찰을 해본다. 단테의 연옥이야기를 통해 오늘의 우리들은 칠층산의 7가지 죄들에 반대되는 덕목들을 성찰할 수 있다. 필자는 그 덕목들 곧 좋은 사랑, 넘치는 사랑, 절제하는 사랑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우선 좋은 사랑은 무엇일까? 교만에 반대하는 겸손한 사랑이며, 시기 질투를 넘어 인내하고 받아들이는 사랑이다. 그런데 분노를 해야 한다면 옳은 것을 위해 하면 어떨까? 한편 부족한 사랑으로서 나태는 우리가 선의 행실을 위해 성실함과 꾸준함을 살아가는 넘치는 사랑으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나친 사랑, 곧 탐욕, 탐식, 음욕의 죄는 어떻게 이겨낼까? 탐욕은 인내로 탐식은 음식이나 음주의 절제로 음욕은 정화의 삶으로 옮겨가는 절제하는 사랑으로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러한 사랑을 기초로 삼아 건강한 믿음의 삶은 어떻게 실천할 것일까? 하느님께 기도하고 자신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사람들과 친교를 이루고, 사람들과 많은 경험을 나누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네 가지 방향이 한 가지에만 계속 집중하면 건강하지 못하여 연옥에서 형벌을 받는 칠층산의 죄들에 빠질 수 있다. 이제 봄이 지나가면서 여름으로 가는 이 계절에 지구도 혹시 연옥의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지구의 아픔은 인간들이 지은 나쁘고, 지나치며, 부족한 사랑의 결과가 아닐까 반성해본다. 특별히 주님을 믿는 신앙인들이 단테가 성찰했던 연옥이야기에 나오는 칠층산의 7가지 죄들을 반대하여 좋은 사랑과 부족하지 않은 사랑 그리고 절제된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지구를 더 사랑하기를 기도해 본다.곽승룡 비오 신부 (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20/10/2022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어머니 마리아는 혼인잔치에서 아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4) 아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밝힙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5) 어머니 마리아는 잔치를 위한 부족한 술을 채울 것을 원합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의 뜻대로 실행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어머니의 말씀이 자신의 생각과 틀렸다기보다 다르기 때문에“물독에 물을 채워라.”(요한 2,7)하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다른 생각과 의견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사실 서로의 생각들과 의견들은 틀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요즘 심리학자들이 자기 이해에 대해 말할 때 감정도 자신에게 조차 틀렸다고 말하지 않듯이 나와 다른 상대방의 생각도 존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나눌 수 있고, 생각이 다르지만, 상대방의 생각대로 실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 마리아와 아들 예수님의 대화처럼 말입니다. 아마 느낌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대의 생각과 의견이 ‘틀리다’는 것보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상대방도 자신과 기대이상으로 그의 뜻이 다른 나의 생각을 받아주는 일이 선물처럼 다가올 수 있습니다.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실행한 예수님의 첫 기적 카나 잔치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어머니의 생각과 아들의 의견이 틀리다기 보다 다르기 때문에 서로 사랑의 눈빛이 비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그 눈빛과 함께 어머니를 바라보았고, 그래서 어머니의 뜻을 그 눈빛으로 같지 않지만 알아듣고 허락하는 힘이 생겼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아버지에게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런 다음 앞으로 조금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나의 가치가 소중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가치도 소중하게 여겨 봅니다. 분명 좋은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생각이 소중하기 때문에 상대의 다른 뜻도 소중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생각과 뜻은 다를 뿐 틀리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우리는 말을 할 때,‘틀리다’는 말을 종종 사용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 말을 바라보면 평가하는 의미의 ‘틀린 것’이라기보다는 ‘다르다는 것’을 그렇게 말하곤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용하는 문장 속 ‘틀리다’는 말을 영어로 통역해보면 분명히‘다르다’는 말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이 식당의 음식이 저 식당보다 ‘맛이 틀리네’”라는 말을 영어로 통역해본다면 ‘it is wrong’인데, 본디 영어 문장의 의미는 ‘it is different’입니다. 즉 맛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색이 서로 달라도 함께 있으면 아름답고 보기 좋으며 새로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듯이 말입니다. 색은 다를 뿐이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서 너무 많이 평가하며 사용하는 표현‘맞다, 틀리다’를‘그렇다’, ‘다르다’라고 사용하면, 비교하고 평가하는 사회 분위기가 훨씬 긍정적이고 다양하게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에너지가 일어나는 사회로 변화 될 것입니다. 사실 다름의 차이를 자세히 알 때 평가하고 비교하는 차별은 훨씬 줄어들고, 상대의 생각과 의견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되면서, 나의 생각과 의견을 잠시 내려놓고, 단지 틀리지 않고 나와 다르므로 어떤 방식으로든 협력할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다름은 존중이고 하나 됨을 지향하지만 틀림은 평가하고 편가르기를 일상화합니다.‘다르다’고하면 서로 살고‘틀리다’고 하면 죽습니다. 곽승룡 비오 신부 (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08/09/2022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자, 내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카 12,19) 이런 삶이 영원히 지속될까요? 주님은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고 질문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1)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에게 잘못된 생각은 자기의 재산전부가 자기 소유라는 것부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열심히 일을 해서 부유해진 사람에게 저주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루카12,15)는 말씀입니다. 모든 물질의 축복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이룬 재화를 모두 내어 놓으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 성실함 또한 하느님의 축복을 드러내는데, 이는 용서의 개념과 동일합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예수님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용서의 기초를 제시하십니다. 이는 영화 ‘밀양’(전도연 주연), ‘죄와 벌’(이정재, 차태현 주연)의 메시지와 동일한데, 바로 하느님께서 이 지상에서 이루어진 용서에 대해서 하늘에서 문제 삼지 않겠다는 영화입니다. 영화 ‘밀양’에서 살인범은 교도소로 자신을 찾아간 피해자(전도연)에게 말합니다. 자신은 회개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피해자(전도연)는 분노합니다. 어떻게 가해자가 피해자인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하느님이 용서할 수 있단 말이냐고... 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확실히 반대합니다. 곧 인간들의 용서가 하느님의 용서를 통하게 하는데,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용서의 축복을 막아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용서축복은 잘못한 가해자가 피해를 받은 사람에게 용서를 빌면서 이루어지는 은혜입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청하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용서를 어떻게 하느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다시 시작의 주제, 재화문제로 돌아갑니다. 성실한 사람이 모은 재화는 자신의 소유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명은 그 재화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1)는 말씀입니다. 이는 용서의 복음과 유사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부유하다는 것은 자신의 재화를 이웃과 나누는 애덕행위입니다. 자신이 나눌 수 있는 만큼을 가난하고 어려운 곳에 봉헌하는 사랑의 나눔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랑과 통합니다. 작은 일에 성실한 자는 큰일에서도 그 모습이 드러납니다. 기회 앞에서 절박했던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존재합니다. 크고 작은 기회는 또 다른 기회를 창조합니다. 재화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사랑이 움직이는 데로 하면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 톤즈의 이태석 신부, 그들은 곁에서 함께 살던 이웃들을 친구라 부르며 살았습니다. 행복하세요! 사랑합니다! 울지마 톤즈! 친구라 불러주세요! 이들은 주님의 친구로 통하며 살았습니다. 어떤 인간적 권위와 위세 없이 다정하고 따뜻한 친구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못 잊어 하고 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사람을 종으로 부르지 않고 벗으로 부르신 예수의 삶을 증거하며 노예를 해방하였습니다. 김 추기경은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사랑의 공감을 살아간 이 시대의 어른친구셨지요. 그러면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늘 바보라고 불렀습니다. 곽승룡 비오 신부 (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04/08/2022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1890~1969년)는 위대한 리더십의 비법을 묻는 이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앞에서 끌면서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짐승은 뒤에서 몰아도 사람은 앞에서 인도해야 됩니다.” 다시 기자가 리더십의 비밀을 묻자, 아이젠하워는 책상 위에 가느다란 실을 하나 올려놓았고 한손으로 실을 뒤에서 밀어보았습니다. 실은 서로 엉겨 얽히게 됐습니다. 다시 한 손으로 실의 앞쪽을 살짝 집고 앞으로 당겼습니다. 실은 엉기지 않고 반듯한 줄이 되어 바르게 따랐습니다. 뒤에서 채찍으로 위협하며 명령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담긴 태도입니다. 지도자는 앞장서, 그들로부터 행동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뒷짐 지고 멀찍이 방관해서는 누구도 추종할 의사를 비치지 않을 것입니다. 앞장서서 쉽지 않은 첫 행보를 누군가 내디뎌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리더의 몫입니다. 누가 따라 오는가 뒤돌아볼 필요도 없습니다. 리더는 얼굴보다 뒤통수가 멋있어야 합니다.이스라엘 사람은 본디 유목민입니다. 유목민은 길을 잘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과 양들에게 물과 풀을 먹입니다. 목자는 길을 잘 찾는 현장경험을 필요로 합니다. 양들 곧 구성원들에게 믿음도 주고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매사 합당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머리를 맛 대고 양들과 방법을 찾는 대화를 합니다.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안 된다... 전에 해봤는데 실패했다...는 경험은 이해하지만 지금 가능한 방법을 찾으면 됩니다. 방법을 찾지 못하니까 안 된다고 말합니다. 또 구성원들이 믿어야 하는 것은 하느님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백성이 걸어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자는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친히 혹은 천사를 보내 인도합니다. 그리고 왕, 예언자, 사제들을 뽑아 당신의 길을 인도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천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억하는 하느님은 그들을 인도하는 분입니다. 그 기억의 뿌리는 이집트에서 나온 출애굽과 광야의 길에 있습니다. 그 길에서 하느님은 절대로 당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명령하는 얼굴보다 모범을 보이는 뒤통수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사랑이 움직이는 데로 하면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 톤즈의 이태석 신부, 그들은 곁에서 함께 살던 이웃들을 친구라 부르며 살았습니다. 뒤통수가 멋진 분들입니다. 행복하세요! 사랑합니다! 울지마 톤즈! 친구라 불러주세요! 이들은 친구로 통하며 살았습니다. 어떤 인간적 권위와 위세 없이 다정하고 따뜻한 친구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못 잊어 하고 있습니다.에이브러햄 링컨은 사람을 종으로 부르지 않고 벗으로 부르신 예수의 삶을 이루도록 노예해방을 하였습니다. 링컨은 예수님이 더 이상 사람을 종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벗으로 부르신 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사랑의 공감을 살아간 이 시대의 어른 친구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늘 바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존엄하고 소중한 존재임에 틀림없지만 자신 그리고 자신이 속한 단체나 모임이 특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 자만이 움직여 공동체를 힘들게 하고 갈라지게 합니다. 성철스님은 평생 누더기 옷 네 벌로 살아가셨습니다. 기자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나는 바보이기 때문에 이런 옷을 입는 것이라고...”말씀하셨습니다. 지혜자이십니다. 지식은 내 안에 무엇을 자꾸자꾸 쌓는 것이지만 지혜는 그것을 내려놓고 비우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뒤통수가 멋진 사람입니다.곽승룡 비오 신부(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30/06/2022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기도는 고요한 곳에 머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때 대화는 시작됩니다. 고요히 깨어나는 곳이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순간순간 예수님은 고요히 머물며 기도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35) 주님은 먼저 말하는 기도보다 하느님의 뜻을 듣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침묵입니다. 내 안의 고요한 순간, 하느님 곧 사랑의 시선이 머물러 존재합니다. 고요하면 비로소 내 안의 온전한 마음의 시선이 움직입니다. 내면의 고요함이 길어지면 그 고요함 자체가 사랑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고요함 자체로 사랑의 시선과 깊은 교감이 일어납니다. 기도입니다. 기도가 깊어질수록 언어는 줄고 고요함은 지속됩니다. 또 하나의 기도는 대화입니다. 친구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친구로서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이기 때문에 대들기도 하고 때론 투정을 부릴 수도 있으며 재밌는 것을 말하기도 하는, 있는 그대로 진실 되고 솔직히 서로를 대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느님과 자신, 둘이 기도하면 둘만이 아니라 늘 셋이 됩니다. 성령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령은 기도의 스승이고, 온전한 나를 만나는 동반자입니다. 고요한 곳, 마음의 고향에서 자신을 만나는 동반자와 함께 걸어보세요.  러시아 익명의 영성작가가 쓴 ‘순례자’에서 고백합니다. “우리의 눈들이 열렸다면 모든 것 안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땅에 키스하고 꽃을 가슴에 안고, 누구든 만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만나기 때문이지요. 이를 위해 모든 것이 나를 이제 다음과 같이 기도하도록 도와줍니다. “하느님 아들 주님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시간과 함께 인생이 지나갑니다. 그렇다고 단지 시간이 삶에 의미를 주지는 않습니다. 삶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떠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영원하시고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나를 만나는 따뜻한 위로자이십니다. 우리는 신앙과 함께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것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고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영원한 생명을 사는 네 가지가 일어납니다. 하나, 늘 새롭게 변화한다. 둘, 누구와도 통한다. 셋, 상대 의견을 수용한다. 넷,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찰한다. 첫째, 새롭게 변화하는 예수님의 일성(一聲)은 회개(metanoite)입니다. 전인적인 변화가 첫 선포의 말씀입니다. 변화는 나 아닌 존재가 아니라 나의 존재가 되는 것으로 이미 충분한 것입니다. 변화는 변질(變質)이 아니라 본디 나로 있는 것입니다. 둘째, 통하는 예수는 요한이 쓴 편지와 복음이 전하는‘통하는 말씀’자체입니다.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을 따르면 구원되고, 요한에 의하면 예수님과 함께 통하면 구원됩니다. 셋째, 수용하는 예수님은 남이 바라는 그대로 해주는 공관복음의 황금률 가치를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넷째, 예수는 성령에 이끌려 하느님의 뜻과 보살핌 받을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움직입니다. 늘 중대한 일에 앞서 머무는 고요한 시간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이 전하는 나를 위한 아름다운 응원, “나를 만나는 따뜻한 위로”를 받아 본래의 자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곽승룡 비오 신부 (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26/05/2022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성경이 전하는 하느님 메시지의 결론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런데 신앙체험을 적어 써내려간 성경의 중심에 남아있는 ‘부활은 사랑의 완성’이라는 메시지를 담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사순시기 금요일마다 성당에서 드리는 십자가의 길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로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부활로 완성되었습니다.” 복음을 돌이켜보면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루카24,1) 하지만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당황한 여인들에게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루카 24,5-6)하고 전합니다.주님을 따랐던 성경의 여인들은 예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를 늘 자신의 눈에 보이는 곳에 두었던 자들인 듯싶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돌아가셨다고 믿었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성금요일에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셔서 당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다른 이들의 죽음을 살려내셨습니다. 한편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로마 6,3)는 사실을 모르냐고 질문합니다. “과연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사실...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로마 6, 5)하고 바오로 사도는 고백합니다. 그러고 보니 인간은 죽어야 하고, 현세상과 작별을 고해야 하지만, 이미 세례 때 그 신비 속에서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통해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 = ‘그리스도 안에서 탄생’이라는 공식이 성립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십자가 죽음의 성금요일이 오늘 부활한 주님과 함께 단절되지 않고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의 과거로 되돌아감이 아니라 새로운 빛, 영원한 광채 속에서 새롭게 일어나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어둠과 미지 속으로 넘어가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만나면, 죽음이 생명을 부수지 못하고, 저승을 가더라도 그것은 영원한 생명으로 오르는 길이 됩니다. 그래서 부활의 놀라운 은총으로 우리의 죽음은 그분의 것이 되었고, 그분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 죽음과 함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죽음을 넘어섰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 = 사랑의 완성’이라는 등식 곧 부활은 완성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그렇다면 현실에서 부활은 어떤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진실이 되살아나는 순간인 듯합니다. 그래서 진실을 거부하면 진리는 멀리 도망가 버리고, 진실과 진리가 단절되면 모두에게 부적합한 사회가 됩니다. 그래서 죽음이 보이는 세상과의 접촉을 끊게 한다면, 부활은 보이지 않는 세상에 눈을 뜨게 합니다. 복음을 돌이켜보면 예수께서는 지상 생활에서 종종 병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일찍이 부활의 전형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전혀 다른 새로운 생명으로 나타나 근본적인 치유로 사람에게 다가옵니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여기에서 자유와 해방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드러내고 있는 부활을 계속 전하고 있습니다.우리는 사랑과 영혼으로 새롭게 살아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이는 부활을 검증하려는 시도가 아닙니다. 이 시대의 믿는 이들 특히 젊은이들이 부활을 믿고 고백하려는데 도움이 되고자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에야 비로소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로 믿었을까요? 또 부활사건이 어째서 모든 신약성서 그리스도론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까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곽승룡 비오 신부 (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21/04/2022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나는 하느님께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예수님을 용서의 선물로 파견하셨습니다. 용서는 자기 사랑의 최고 행위이기에 자신을 사랑하는 힘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래야 타인이 나의 평화를 방해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는데 그 이전에 자신을 많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용서란 아무도 나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똑바로 바라보는 일종의 ‘깨어남’입니다. 용서는 정신과 육체건강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복음의 예수님은 병자에게 항상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이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가 죄를 지어도 자녀를 사랑하듯이 하느님 또한 죄인인 나를 사랑하시기에 믿는 이는 하느님께 고해를 하면 됩니다. 죄와 사랑 가운데 죄의 고백은 자신이 사랑의 중심에 존재하는 것입니다.용서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위해서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에고(자아)는 늘 분노와 원한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삶을 살며 견디어 냅니다. 그런데 그런 분노와 원한이라는 심적 고통은 과거와 미래에 대해 에고(자아)가 생각하는 것인데, 실제로 그것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합니다. 그래서 고통은 늘 영혼(자아)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고통은 상황이 아니라 생각인데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고통의 몸을 사랑과 연민 그리고 ‘비판단’으로 바꿔야 합니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앞으로도 나아진 감정 또는 부정적인 생각은 늘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부정적인 모든 경험은 당신이 걸어온 삶의 경험에서 우선되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당신의 경험과 관련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모든 경험을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용서의 새로운 자각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순간 자신에게 부정적인 에너지와 무의식 순간이 죄를 경험하는 일정한 시간대라는 주기의 덫에서 자신이 벗어날 때를 아는 것인데 그 순간은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사실 사람에게 다가온 고통은 영적 각성을 일으키고 상실과 비탄은 진정한 기도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원수와 미워하는 자를 파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험을 적지 않게 합니다. 오히려 치명적인 분노와 행동 그리고 증오만이 그렇게 합니다. 당신이 가장 멸시받은 점이 그 보다 더 보람있고, 만족스러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을 지켜보세요. 바로 넬슨 만델라처럼 아니 십자가에서 용서를 하시는 주님처럼 말입니다.용서는 ‘해독제’ 같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용서하지 않고 화를 내는 것은 독을 먹고 죽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는 for와 giving이 만난 선물을 의미합니다. 때론 나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용서하고 각자가 인생의 길을 계속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더 안전할 것입니다. 용서는 계획된 것이 아닙니다. 생명과 우주의 본질로서 나 스스로에게 자신을 위해 주어진 영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용서하는 것보다 남을 용서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상대보다는 더 높은 책임감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곽승룡 비오 신부 (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24/03/2022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사람은 각자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가끔 정한 목표와 반대방향으로 걸어가기도 합니다. 출발했던 처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뿌리가 겸손인 섬김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섬김은 낮게 살고자 스스로 마음먹는 문제입니다. 사람은 자유롭게 원하는 데로 살아갑니다.‘자유’와 ‘원의’가 서로 충돌할 때도 있습니다. 상대가 추구하는 원의가 내 자유와 충돌하면 존엄성과 인간관계가 훼손 됩니다. 하지만 타자의 원의를 동의와 함께 수용하면 그것은 나의 원의가 됩니다. 통하고 서로 받아들이는 원리가 섬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것이 섬기는 노력이 됩니다. 섬김은 상대를 받아들이는 사랑입니다. 섬기면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어떤 기대가 없습니다. 기대는 내 안의 깊은 곳에 존재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아(ego)가 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무런 기대나 요구를 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기대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여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프리드리히 니체는 기독교가 에로스를 독살하였지만 완전히 죽지 않고 더 악한 것으로 변질되어 버렸다고 주장하며 기독교를 노예, 종의 종교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종교의 본질 아가페 사랑을 살지 못한 교회의 모습과 실천에 대한 비판입니다. 섬기면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됩니다. 섬기면 기대는 없습니다.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10,37)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 못한다.”(마르10,38) 섬기는 사람이 사랑하는 자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태중에서부터 섬기고 평생 섬기는 사랑을 하셨습니다.돌아온 길 잃은 양을 미워하지 않도록 해 보세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보다 아흔아홉를 챙겨 버티는 것이 이익입니다. 하지만 집을 나가 헤매는 양까지 찾는 뜻은 한 마리가 소중하고, 그래야 양의 무리, 공동체가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돌아온 아들’은 ‘자비로운 아버지’를 소개합니다. 자비는 자기 몫을 챙겨 가출한 아들이 돌아올 걸 믿고 있는 사랑하는 아들에 대한 마음입니다. 자비로운 아버지 집에는 가출이란 없습니다. 아버지께는 단지 아들의 외출만 있습니다. 아버지 품에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사랑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양과 목자의 관계를 더욱 심화합니다. 잃은 양도 백성 가운데 한 멤버로 인도되기를 원합니다. 비록 실수하고 잘못을 해 완전하지 않은 양들이라도 착한 목자에게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른 누구도 결코 다시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자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과 제자 열둘이 21억 양떼의 기독교가 된 힘을 잃은 한 마리 양을 다시 껴안은 따뜻한 자비심(慈悲心), 온유한 섬김이지요. 그래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참 목자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 희생됩니다.하지만 아버지로부터 많은 기대와 원의를 품고 있는 큰 아들은 생각이 다릅니다(루카 15장). 죄를 지었지만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동생을 미워합니다. 그 미움의 뿌리는 어디일까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처럼, 유아기와 아동기 때 미움을 품게 한 상처나 두려움이었을까요? 아니면 태교 때 그 미움의 씨가 뿌려졌을까요? 분명한 것은 원인이 다양하고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이지요.이러한 과거의 내 삶에 기록된 상처나 불안을 일으켰던 인간의 역사를 지우고 다시 쓸 수는 없지만, 내 삶을 다시 이해하며 읽어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인생을 알아차리는 것은 중요하지요. 아마도 프로이드(Freud)의 작업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거는 존중하더라도 거기에 매이지는 말아야 합니다. 과거는 치유해야하고, 현재에 머물며, 미래는 긍정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그런데 신앙의 복음은 마치 몸을 튼튼히 하는 보약과 같다면, 프로이드는 하느님의 사랑인 씨앗을 잘 심고 파종하는 밭인 나 자신을 잘 일구는 데 공헌을 한 것이라고 봅니다. 상처가 될 마음 밭 속의 돌도 골라내고, 아프게 하는 병도 치유하고, 기억이 나지 않는 복잡한 무의식에 남아 있는 집착, 애착, 상실, 불안, 애도 등 나를 알지 못하게 한 많은 장애들을 극복할 필요가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는 본디 모두 좋은 땅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과 복음으로 잘 살아갈 수 있다면, 전혀 내게 잠재된 문제는 정말 문제가 되지 않지요. 하지만 자신과 다른 이가 감당할 수 없는 장애를 지니고 있다면, 복음의 가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고 봅니다. 도움을 받아보는데 주저하지 마세요. 그래야 우리도 돌아온 길에 잃은 양을 미워하지 않도록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움에서 용서, 사랑, 봉사, 섬김으로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 양들은 길을 잘 잃습니다. 작은 몸과 짧은 보폭이라 아직은 온전하지 않아 그런가봅니다.곽승룡 비오 신부 (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10/02/2022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부활하신 예수께서“성령을 받아라!”하고 생명의 숨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성령은 선물입니다. 선물의 포장을 뜯어보세요. 그 속에 자비의 열매, 용서가 살포시 들어있습니다. 용서는 무엇일까요? 용서는 높은 자가 아래 사람에게 내려주는 관대함의 하사품이 아닙니다. 대상관계가 틀어지기 이전처럼 나를 받아들이는 조건 없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선물로서 용서가 지향하는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불안과 두려움이 남아있던 곳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지니는 것입니다. 바로 평화입니다. 용서는 평화를 이루는 초대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를 받아야 평화롭습니다. 그런데 용서를 구할 상대가 사라져 없다고 한 번 생각해보세요. 큰일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체 평생을 살아야 하니까요. 그런 일이 우리 주변에 없기를 바라지만 실재로 그런 일이 많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서로 용서하면 그 열매, 곧 평화가 우리 안에서 맺습니다. 그러므로 용서가 꽃이라면 그 열매는 평화입니다. 사도들 머리 위에 불혀 모양의 성령이 내려왔습니다. 불은 우리 삶에 꼭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은 성령의 불꽃 속에 들어가면 생명처럼 살아나고 성숙하여 겸손의 옷을 걸치게 됩니다. 그래서 내 안에 임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불, 성령께서 인간의 영혼을 정화하고 거룩하게 변화하도록 온전히 이끌어 주십니다.“태워버리는 불이시며 질투하시는 하느님”(신명 4,24)과의 접촉은 영혼을 정화시켜 줍니다. 내면의 불꽃이신 성령은 영혼을 정화하고 우리를 성숙한 삶으로 이끌어 정신을 비추고 마음을 위로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나를 온전히 받아주는 용서와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그 순간 용서는 사람을 수락하는 치유행위가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느님께 이미 용서받은 것처럼 나도 상대방을 용서하면 됩니다. 성령께서 이미 내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용서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나를 바꾸는 회심이 어려운 것은 자신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나를 만나려면 성령의 위로를 받으세요. 예수성탄의 주변 인물들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 엘리사벳과 즈카르야 그리고 엘리사벳의 태속에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그들이 준비한 예수님 성탄은 바로 성령에 순종한 겸손함이었습니다. 겸손함은 자기 자신을 알아차림입니다. 요셉, 엘리사벳, 즈카르야, 세례자 요한 특히 마리아는 성령을 통한 예수님 잉태소식을 천사께 그리고 성령에 가득차서 들었는데, 그 첫 자리가 자기 자신을 알아차리는 은혜였습니다. 사람은 영(pneuma)과 혼(psyche) 그리고 몸(soma)의 3중 구조 단일체로 태어났습니다. 몸은 움직이고, 영은 기도하고, 혼은 영과 몸 사이에서 갈 방향을 선택합니다. 몸의 음식이 빵과 밥이고, 몸을 위해 체력 운동을 하듯이, 혼의 음식은 하느님 곧 영의 말씀이고, 혼을 위한 운동은 내 안에서 영이 하는 기도입니다. 말씀을 잘 알고 이해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만, 마음 안에 말씀과 영만을 품고 있어도, 하느님께서 나를 지켜주시고 움직이십니다.성탄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영에 의해 태어나신 기쁨의 축제 생일입니다. 예수성탄의 주변 인물들이 영에 순종하여 교만이 아니라 겸손의 복을 받으셨듯이, 주님을 믿는 이들은 그들과 같이 영에 순종하도록 주님은 초대합니다. 영에 순종하는 사람은 그래서 가난한 자들과 코비드-19로 어려움에 처한 자에게 예수성탄의 축복을 나눕니다. 특히 내년부터는 끝없이 사람들을 용서해 온 아픈 지구가 이제는 사람의 생태적 회심인 삶의 구체적인 변화로 되살아나는 새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곽승룡 비오 신부 (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23/12/2021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크게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될 때, 사람은 좋은 일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아하고, 잘하는 것 가운데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좋아하는 것입니다. 음악에 소질이 있으면 음악을, 숫자놀이나 계산하는 것을 좋아하면 수학을, 들을 귀가 있으면 걸맞게 놀면 됩니다. 그런데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예수님과 인격적 만남으로 가능합니다. 인간의 약점, 강점이 본래의 나로 회복됩니다. 재능이 없던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던 것이지요. 빛을 비추어 주세요. 그리고 잠깐 내 안의 잠자는 재능을 일으켜 보세요.세상일에 푹 빠져 있던 마태오,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세금을 받아내던 마태오가 자기 속에 잠자고 있던 능력을 깨웠습니다. 집필하는 복음의 작가가 되었습니다. 거둔 돈 계산을 하던 세관장을 진리 선포의 봉사자로 세웠습니다. 자기계발을 넘어 내안의 재능 선물을 발견하도록 초대합니다. 회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디 자신이 되어, 온전한 변화로 인도됩니다.제자가 되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봉사자가 되는 길은 무엇을 하는 것이라기보다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수학을 풀고, 음악의 소질, 그리는 재주 등 탈렌트의 발견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행위가 부르심이고, 회심이지요. 호기심이 많은 자케오는 나무 위에서, 마태오는 세관에 앉아 있다가 주님을 만납니다. 어느 곳, 어느 시간에서나... 영화 인터 스텔라에서 거리와 사랑의 밀도에 따라 시간이 흐르지요. 환한 미소는 비추는 달님이 되어 서로를 통하게 합니다.서로를 비추면 충분합니다. 어둠에 빛을 비추면 통합니다. 통하는 빛은 자신을 비추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등불입니다. 빛으로 관계가 밝아집니다. 빛은 자신을 알도록 인도하는 등불이라서 자신을 보는 힘과 지혜를 줍니다. 존재를 알 수 있지만 온전히 이해하려면 빛의 도움이 필요하지요. 하지만 아무리 빛을 비추어도 최악의 경우가 생깁니다. 최악은 등불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빛이 사라져 서로의 관계를 볼 수 없도록 어둡게 만듭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4,21) 거짓말은 다리가 짧아 멀리 못갑니다. 지혜롭게 보이지도 않습니다. 거짓은 애초부터 진실을 막고 침묵하게 하지요. 하지만 언젠가 행한 모든 것은 빛 앞으로 가고 세상의 진실한 시선 앞에 서 있습니다. 진리와 진실이라는 빛의 목적지가 우리를 기다립니다. 상대방과 통(通)하려면 웃으면 됩니다. 환하게 미소를 띠면 더욱 괜찮지요. 오해가 편견으로 자라게 되는 데, 통하는 특효약은 일단 미소입니다. 웃으면 오해가 더 전진하지 않습니다. 실수가 생겼을 때, 당황해 하는 굳은 얼굴 보다 살짝 웃는 미소가 오해와 감정을 풀 수 있습니다. 실수와 잘못으로 생겨나는 불통(不通)의 치료제는 웃음과 마음을 모아 약간 고개를 숙이는 인사입니다.조선 3대 국왕 세종이 보위에 올라 가장 먼저 한 것은 집현전(集賢殿)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현자들을 모은 일종의 브레인 그룹의 협력자 집단입니다. 그런데 세종이 한글을 만들고자 했을 때, 제일 먼저 반대한 사람들은 집현전 학자들이었답니다. 하지만 통하는 임금 세종은 훌륭한 인품답게 환하게 웃으며 학자들과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한글을 만들어 갔답니다. 예수님이 보여준 길이 자신을 따르는 것이라면, 구원의 길은 서로 통하는 문, “나는 문이다.”(요한 10, 9)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 5) 모든 벽이 문이 되는 순간 통하는 사람, 통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곽승룡 비오 신부 (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18/11/2021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