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방문
새해가 되어, 오랜만에 친하게 지내던 장로님 댁에 들렸다. 1990년쯤 같은 교회에서 만났으니 벌써 3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흘렀다. 한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 일찌감치 호주 이민을 선택한 장로님은 이곳 대학에서도 강의를 하였다. 나도 영어를 배운다며 등록을 했다가 몇년 동안 같은 학교를 한 차로 다니며 장로님이 가르치는 과목도 몇 과목 수강하면서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 땐 아이들도 어렸지만 이젠 모두 시집 장가를 가고 큰 딸은 이미 대학을 다니는 아이를 두었다.
팬데믹 때문이기도 했지만, 부인 권사님에게 암이 생겨 항암 치료 때문에 자주 올 수가 없었다. 다행히 항암 치료가 호전적이고 교회도 나가며 일상을 병행할 수 있게 되어 비로소 들르게 되었다. 권사님의 얼굴은 반가워하며 평온한 얼굴이다. 일부러 점심 때를 피해 오후에 잠시 들린다며 불쑥 들렸는데, 저녁을 먹고 가라며 상을 차려 텃밭에서 가꾼 채소들과 나물들로 예전 맛있게 먹었던 기억도 되살리며 밀린 얘기를 오래 나누게 되었다.
이제 8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고 아이들도 다 커서 자리를 잡았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얘기를 하면서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곳을 가야하는 두려움이 있는 건 사실이라며 어린 아이처럼 솔직한 속내를 말한다. 언젠가 뵐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반가움 가운데도 슬픈 마음이 한 켠을 채운다. 곧 들르겠다며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 왔다. 아내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호주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들이라며 30여년의 인연을 고마워한다. 화려하지 않아도 순전하고 정겹게 살아온 친구 같은 장로님에겐 세상 속에 여전히 때묻지 않은 사랑이 있다.
2. 장례
식사 중에 전화를 받은 권사님이 아들의 장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었다. 한 교회에서 만나 결혼한 아들의 장모는 우리도 잘아는 교회에서 봉사를 열심히 하던 성격이 소탈한 분이다. 그분의 두 딸과 아들은 우리 아이들과도 형, 동생으로 같은 교회에서 자랐고 지금도 틈틈이 소식을 듣곤 했었다. 최근 파킨슨 병을 앓다가 팬데믹으로 가족들을 보지 못해 안타까워 하다가 한국에 가서 고통 사고를 당하고 호주로 돌아오자 입원을 하곤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며칠 후 교회에서 열린 위로 예배에 오랜 만에 만난 남편 집사님과 아들을 껴안자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는 말을 귓전에 전하며 내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더욱 힘있게 껴 안는다. 천국에서 만날 것을 기대하면서도 슬픈 마음은 떨굴 수 없다. 조문을 하고 저녁 식사를 위해 선 줄에는 순서를 기다리는 반가운 옛 얼굴들을 만날 수 있었다. 30년 가까이 알던 분들이 먼발치서 손짓을 하고 잡은 손을 몇번씩 흔들며 건강도 묻고 근황도 궁금해 한다. 머리가 희고 주름 잡힌 세월을 피할 수 없는 모습이지만 하나도 늙지 않았다며 웃는 하얀 거짓말과 함께 반가움이 얼굴에 가득 피어오른다. 한 때 관계가 소원 했던 사람도, 생각이 달라 불편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도 있지만 세월은 그런 쓴 기억 정도는 가볍게 묻어 버리게 하는 초능력이 있다. 슬픈 순간이지만 옛 얼굴들을 만나니 정겹고 반갑기 그지 없다. 장례는 슬프지만 천국을 동반하는 곳이다.
3. 소식
몇 주 전에 알던 목사님의 별세 소식에 이어 어제도 한 목사님의 부고를 받았다. 새해를 시작하며 유난히 부고의 소식이 많다. 유족들도 지인들도 갑작스런 죽음을 쉽게 마주하기 힘들다. 공자는 제사와 전쟁과 질병을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모두 세상과 죽음, 그리고 제사에 관한 것이다. 전쟁과 전염병과 죽음이 주위에 산재한 지금 시대를 예견이나 한 듯, 오랜 세월 난제로 남은 죽음의 슬픔은 기쁨이 대신 해야 비로소 감당 될 수 있는 모순을 감춘 숙명을 가졌다. 예수는 이 난제를 풀어주기 위해 세상에 왔다. 난처한 제사를 지내는 애곡의 현장에, 천지를 만든 생명의 주인이 함께 하는 천국으로, 죄 많은 인간이 죽고나서 들어 올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이다. 참으로 믿기지 않는 약속이어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른 것 보다 늘 믿음을 칭찬하고 불신을 책망했다.
새해에 이제 겨우 발걸음을 떼는 손자 손녀들과 다녀온 아버지 산소에서, 여기 계시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반가운 사람들이 언젠가 모두 떠날텐데, 오랜만에 또 만날 수 있다면, 이 슬픔을 해결할 더할 나위없는 기쁜 소식 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정원일(공인회계사) wijung@gmail.com
info@itap365.comwww.itap365.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