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담을 넘어 들어 왔다. 가을을 건너 뛴 채 코로나의 한파를 몰고 찾아온 찬바람이 우리를 더욱 스산하게 한다.
필자는 올해 고국 방문 길에 올라 코로나 비상사태로 삼엄한 서울에서 체류하는 기회를 가졌다.
소수의 연락이 되는 초중고 동창생을 상봉하는 모임에서 2년 전에 만났던 고교 시절의 벗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허망하기 이를데 없었다. 더구나 내년에 다시 만나자고 함박웃음 짓던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또한 서울의 거리에 구두가 사라져 가고 운동화 시대가 도래해서 거리의 행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있는 길거리 구두 수선공의 눈길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문명이 발달 할수록 구두와 정장이 사라 지는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남을 배려해서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정장을 하고 하이힐 구두를 신고 다니던 그 시절에서 이제는 남보다 나를 생각하면서 편리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이기심의 발로가 아닐까?
아예 정장 대신 등산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남녀노소가 차고 넘치는 서울의 거리.
전철이나 버스에 승차했을 때 모든 승객들이 타자마자 일제히 스마트 폰을 켜고 정보의 홍수 속을 유영하며 타인과의 대화가 단절되는 현상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한강변을 걸으며 귀여운 자녀가 타야할 유모차에 반려견을 태우고 희희낙락하며 웃고 있는 젊은 부부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최근 뉴스에 신혼 여행 중인 신혼부부가 산책을 하다가 신부 품에 안겨있는 반려견을 향해 달려드는 도사견의 공격을 막다가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이제는 신혼여행도 개와 동행하나?
아기의 웃음소리와 울음소리로 하루가 시냇물처럼 흐르던 고국의 시골 마을에 아이들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고 푸념하는 노인의 한숨 소리.
필자의 방문 중 때마침 한국 대통령 선거기간이었는데 자당의 정책 공약보다 상대당 후보의 실수를 침소봉대하며 까십(gossip)을 증폭시키는 정치인과 이를 즐기는 유권자들.
자신이 만든 색안경으로 정국을 바라보면서 자기만이 정의라고 고성을 지르며 삿대질하는 사람들.
고대 로마 제국의 정치인 세네카는 “고성은 이유가 박약하다”, 즉 큰소리로 떠드는 사람들은 이유가 얇고 약하다고 지적했다. 시대가 변해도 사람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가 보다.
지상 최고의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단군 이래 초유의 풍족한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고마움과 만족을 외면하며 살면서 불평과 불만을 토해내고 있는 한국의 시민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머나먼 타국으로 이민을 떠난 첫 사랑이 외국에서 불행한 삶을 살면서 별세했다는 비보를 풍문으로 들었을 때, 성형으로 얼굴을 변장하고 자신만만하게 나타나 옛 동창들을 당황하게 만든 성형 미인(?)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마음의 거울이 얼굴인데 표정이 사라져 버렸으니..
부부 동반 친교 모임에서 부인의 심기를 거스릴까 봐 가만가만 주위를 서성거리는 늙은 남편, 하얀색과 분홍빛으로 활짝 피며 구름처럼 무리지어 꽃 숲을 이루며 자태를 뽐내던 벚꽃 꽃잎이 단 일주일 만에 일제히 스러져 버렸을 때, 가을비가 처연하게 내리는 산사의 오솔길에 떨어져 있는 단풍잎, 비 내리는 저녁 무렵 나무 가지에 비를 피하지 못하고 앉아 있는 어린 새. 비 오는 겨울밤 시골 여관에서 듣는 빗방울 소리, 항해를 잊은 채 파도에 밀리며 포구에 정박해 있는 주인 없는 호화 요트, 가을의 따스한 햇살 아래 하염없이 앉아 있는 공원 벤치의 백발 노신사, 금 코팅으로 장식한 관을 싣고 묘지로 향하는 최고급 장의차, 이제는 은퇴한 왕년의 톱스타의 빨간 하이힐 구두, 출 퇴근 길에 바삐 뛰어 가는 피곤에 절은 워킹맘의 좁은 어깨, 풍광이 아름다운 관광지에서 스마트 폰을 연상 켜 대며 깔깔거리는관광객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1980년 이전 고국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한 동포들은 기억하고 있으리라. 그 당시 국어 교과서에 실린 명문으로 독일 시인 안톤 슈낙 (Anton Schnack)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일생을 살아오면서 잊혀지지 않는다. 특히 수필가 이진섭의 명번역에 더욱 큰 감명을 받았다.
그 외에 국어에서 명문으로 ‘청춘 예찬’(민태원), ‘그믐달’(나도향), ‘낙엽을 태우면서’(이효석)의 문장들이 추억의 텃밭에서 아직도 자라고 있다.
한국 문교 당국은 1981년 국어 교육의 실용적이고 사회적 내용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국어 교과서에서 정서를 기르는 문장과 인성 교육에 필요한 작품들을 퇴출해 버렸다고 한다. 이런 조처가 현재 청소년들이 날로 정서가 황폐해 지고 있는 실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슬픔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정서 가운데 최고의 것이고 동시에 모든 예술의 전형이요 시금석이라고아일랜드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도 증언했다.
무엇보다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국어에서 사라진 사실이 더욱 우리를 슬프게 한다.
‘슬픔은 가장 좋은 친구’라는 말이 있다.
슬픔의 아침 뒤에 즐거운 저녁이 깃들인다.(A joyful evening may follow a sorrowful morning)는 영국 속담도 있지 않는가..
김봉주(자유 기고가) bjk19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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