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고요한 곳에 머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때 대화는 시작됩니다. 고요히 깨어나는 곳이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순간순간 예수님은 고요히 머물며 기도하였습니다. “
예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35) 주님은 먼저 말하는 기도보다 하느님의 뜻을 듣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침묵입니다. 내 안의 고요한 순간, 하느님 곧 사랑의 시선이 머물러 존재합니다. 고요하면 비로소 내 안의 온전한 마음의 시선이 움직입니다. 내면의 고요함이 길어지면 그 고요함 자체가 사랑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고요함 자체로 사랑의 시선과 깊은 교감이 일어납니다. 기도입니다. 기도가 깊어질수록 언어는 줄고 고요함은 지속됩니다.
또 하나의 기도는 대화입니다. 친구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친구로서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이기 때문에 대들기도 하고 때론 투정을 부릴 수도 있으며 재밌는 것을 말하기도 하는, 있는 그대로 진실 되고 솔직히 서로를 대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느님과 자신, 둘이 기도하면 둘만이 아니라 늘 셋이 됩니다. 성령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령은 기도의 스승이고, 온전한 나를 만나는 동반자입니다. 고요한 곳, 마음의 고향에서 자신을 만나는 동반자와 함께 걸어보세요.
러시아 익명의 영성작가가 쓴 ‘순례자’에서 고백합니다. “우리의 눈들이 열렸다면 모든 것 안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땅에 키스하고 꽃을 가슴에 안고, 누구든 만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만나기 때문이지요. 이를 위해 모든 것이 나를 이제 다음과 같이 기도하도록 도와줍니다.
“하느님 아들 주님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시간과 함께 인생이 지나갑니다. 그렇다고 단지 시간이 삶에 의미를 주지는 않습니다. 삶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떠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영원하시고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나를 만나는 따뜻한 위로자이십니다. 우리는 신앙과 함께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것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고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영원한 생명을 사는 네 가지가 일어납니다. 하나, 늘 새롭게 변화한다. 둘, 누구와도 통한다. 셋, 상대 의견을 수용한다. 넷,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찰한다. 첫째, 새롭게 변화하는 예수님의 일성(一聲)은 회개(metanoite)입니다. 전인적인 변화가 첫 선포의 말씀입니다. 변화는 나 아닌 존재가 아니라 나의 존재가 되는 것으로 이미 충분한 것입니다. 변화는 변질(變質)이 아니라 본디 나로 있는 것입니다. 둘째, 통하는 예수는 요한이 쓴 편지와 복음이 전하는‘통하는 말씀’자체입니다.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을 따르면 구원되고, 요한에 의하면 예수님과 함께 통하면 구원됩니다. 셋째, 수용하는 예수님은 남이 바라는 그대로 해주는 공관복음의 황금률 가치를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넷째, 예수는 성령에 이끌려 하느님의 뜻과 보살핌 받을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움직입니다. 늘 중대한 일에 앞서 머무는 고요한 시간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이 전하는 나를 위한 아름다운 응원, “나를 만나는 따뜻한 위로”를 받아 본래의 자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곽승룡 비오 신부 (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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