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느님께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예수님을 용서의 선물로 파견하셨습니다. 용서는 자기 사랑의 최고 행위이기에 자신을 사랑하는 힘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래야 타인이 나의 평화를 방해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는데 그 이전에 자신을 많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용서란 아무도 나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똑바로 바라보는 일종의 ‘깨어남’입니다. 용서는 정신과 육체건강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복음의 예수님은 병자에게 항상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이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가 죄를 지어도 자녀를 사랑하듯이 하느님 또한 죄인인 나를 사랑하시기에 믿는 이는 하느님께 고해를 하면 됩니다. 죄와 사랑 가운데 죄의 고백은 자신이 사랑의 중심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용서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위해서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에고(자아)는 늘 분노와 원한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삶을 살며 견디어 냅니다. 그런데 그런 분노와 원한이라는 심적 고통은 과거와 미래에 대해 에고(자아)가 생각하는 것인데, 실제로 그것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합니다. 그래서 고통은 늘 영혼(자아)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고통은 상황이 아니라 생각인데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고통의 몸을 사랑과 연민 그리고 ‘비판단’으로 바꿔야 합니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앞으로도 나아진 감정 또는 부정적인 생각은 늘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부정적인 모든 경험은 당신이 걸어온 삶의 경험에서 우선되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당신의 경험과 관련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모든 경험을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용서의 새로운 자각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순간 자신에게 부정적인 에너지와 무의식 순간이 죄를 경험하는 일정한 시간대라는 주기의 덫에서 자신이 벗어날 때를 아는 것인데 그 순간은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사실 사람에게 다가온 고통은 영적 각성을 일으키고 상실과 비탄은 진정한 기도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원수와 미워하는 자를 파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험을 적지 않게 합니다. 오히려 치명적인 분노와 행동 그리고 증오만이 그렇게 합니다. 당신이 가장 멸시받은 점이 그 보다 더 보람있고, 만족스러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을 지켜보세요. 바로 넬슨 만델라처럼 아니 십자가에서 용서를 하시는 주님처럼 말입니다.
용서는 ‘해독제’ 같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용서하지 않고 화를 내는 것은 독을 먹고 죽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는 for와 giving이 만난 선물을 의미합니다. 때론 나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용서하고 각자가 인생의 길을 계속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더 안전할 것입니다. 용서는 계획된 것이 아닙니다. 생명과 우주의 본질로서 나 스스로에게 자신을 위해 주어진 영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용서하는 것보다 남을 용서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상대보다는 더 높은 책임감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곽승룡 비오 신부 (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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