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리 글, 백경 그림
초록색 선은 시드니에서 브로큰힐까지 가는 여정이며 회색 실선은 돌아온 여정의 표시. 아웃백은 원래 패밀리식당이 아니라 호주 내륙의 반사막 지역을 말한다. 사진에서 흰 점으로 표시된 브로큰힐 앞의 골짜기는 비가 오면 일시적으로 만들어지는 거대한 와디(wadi)이다.
언덕마저 사라진 평평한 사막
삶은 단조로운 인생의 연속이라며 여행가들은 호시탐탐 진기한 다른 삶을 찾아 떠나는 야릇한 방랑자이다. 그 낯선 곳에 익숙해질 즈음이면 또 다른 낯설기를 자처하면서 정처 없이 떠난다. 때로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비움의 여행이거나, 가끔씩은 욕심껏 많은 것을 채워오기에 바쁜 욕심쟁이가 되기도 한다. 미지를 향한 여정은 분명 가슴 설레지만 돌아올 집이 있기에 여행가는 더욱 행복하다. 그래서 우리는 떨리는 가슴으로 브로큰힐을 향한 오지 여행길에 올랐다.
이제 그 추억이 빛바랜 무광 액자로 내 인생에 한 조각 퍼즐로 들어앉으려 한다. 조각난 퍼즐의 먼지를 터는 지금 이 순간을 지나간 과거처럼 그리워하자. 인생은 랜덤의 연속이거늘 우리는 어느 순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날까. 호주 시드니에 사는 사람들조차 잠시 문명의 세계에서 벗어나 사막이라는 곳을 느껴보고 싶어 했다. 어린왕자 책속의 지리학자처럼 서재에만 머무르기보다는 넓은 호주 대륙을 체험해 보고픈 욕망을 품고.
“영원히 시들지 않을 듯 트래블 플래너의 꿈을 꾸는 남의편(ㅋㅋ)이여 파이팅! 길이 있기에 우리는 떠나노라.”
물론 시드니 관광코스에는 사막체험이 있어 저비스 베이의 하얀 모래 위에서 낙타타기, 모래썰매 체험을 해보는 것만도 큰 행운이다. 그러나 이런 재미 다 팽개치고 호주 오지의 고생을 찾아 떠나기로 한 때는 태양의 고도가 제일 높은 1월로 찌는 듯 무더운 날씨였다.
호주 동부 시드니(Sydney)에서 출발하여 브로큰힐(Broken Hill)을 왕복하는 2400km의 대장전이라면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두 번 왕복이 조금 못 미치는 거리이다. 이만하면 한국의 거리감과 호주라는 대륙의 거리감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네 명이 교대로 온종일 달려야만 겨우 첫날 밤 예정 숙소인 코바에 어둡기 전에 닿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위 지도에서 보듯이 더보(Dubbo)까지는 초록색이지만 코바(Cobar)부터는 완전 누렇고 평평한 사막지대로 사람이 사는 곳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곳에서 한참 더 가면 아들레이드가 나오나 이 지도에서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브로큰힐은 NSW주의 서쪽 끝에 위치한 도시로 브로큰힐이라는 단어에서 주는 느낌이 벌써 심상치 않다. 우리는 여행에 들뜬 마음을 눌러보려는 듯 투덜거린다.
“언덕마저 끊어진 곳이라니 볼 것 없는 누런 사막이겠지. 가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삭막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이 느낌!”
“맞아. 우리 왜 그 오지에 가는 거야?”
패트롤 2통과 마실 물 2박스가 맨 먼저 차 트렁크에서 위용을 자랑하며 버티고 앉았다. 가는 도중 주유할 곳 없는 사막에서 두 종류의 리퀴드는 생명줄이라고 수 명의 여행가들에게 조언을 받았으니까. 땡볕에 고장이 날 경우에 대비하여 차주는 차를 조이고 기름 치는 등 철저 점검을 마친 후, 동승자들도 몸을 털며 가벼운 체조를 해본다.
“앗싸, 이제 광야를 달리는 거다!”
서부 퍼스에서는 12월, 1월 등의 여름(호주는 북반구에 위치해 남반구의 한국과는 완전 반대 기후) 성수기에 양철지붕 위에 달걀을 놓으면 프라이가 된다 하니 사막의 1월은 그야말로 불볕이었다.
“그래도 겨울여행은 사막 추위 때문에 움찔하지 못하니 더위가 낫지!” 라며 두 커플이 완전 의기투합이 되었다. 평소에는 별로 닮은 점이 없다고 자처하는 시동생 내외가 우리 부부와 완전 찰떡궁합인 때가 있으니 바로 여행이라는 마약 앞에 설 때이다. 끝내고 돌아서는 순간 입맛을 다시며 다시 지도 옆을 서성거리는 그런 중독증 말이다.
진정한 오지체험은 로드 킬
브로큰힐까지의 여정 중 도로에 즐비한 로드 킬이야말로 고개를 돌리게 할 정도로 공포 그 자체였다. 운전 중 로드 킬을 만나도 절대 눈을 돌리거나 핸들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당부를 받았음에도 덩치 큰 사체를 피하고 나면 공포와 애처로움이 밀려왔다. 그러나 빈번하게 널브러진 사체를 접하면서 점점 그런 감정이 무디어지고 있었다. 급기야는 그 동물들이 시도했던 도전에 더 큰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은 왜일까?
그들 중 더러는 길 건너는데 성공해 안전하게 착륙했을 것이고, 더러는 눈앞에서 창자까지 펼쳐진 채로 아귀다툼하는 시커먼 까마귀들의 밥이 되고 있었다. 어느새 그 처절한 잔해로부터 고개를 돌리며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었다.
‘저건 약육강식과 자연 순환의 먹이사슬일 따름이야.’
사막의 동물들은 자동차라는 거대한 문명의 희생양이 되면서도 줄곧 도로를 건너는 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2차선 도로에 띄엄띄엄 무한대로 이어지는 죽음의 사체들이 그걸 말해주었다. 그것은 험난한 바다에 떠도는 일엽편주 피난민보트와 다를 게 없었다. 보트에서 떨어져 나뒹구는 군상들은 물이나 먹이를 찾아 목숨을 걸고 미지의 신세계로 이동하려다 더러는 부모와 자식을 놓친 비운의 낙오자들이었다. 앞의 죽음을 보면서도 길을 건너는 행렬을 멈출 수 없음은 도로 건너편 막연한 환상의 섬에 닿기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필 그 지역에서 운전대를 잡았던 겁쟁이 이 운짱도 수백 킬로미터 로드 킬에 차츰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도로 위의 희생양을 보면서 인류의 도전과 역사가 되풀이되는 교훈을 읽어나갔다. 그리고 현인인 체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더 큰 꿈을 향해 나아가려면 희생이 따르지. 항상 더 큰 도전이 필요해.’
널브러진 다섯 마리의 크고 작은 돼지가족의 몰살 장면은 동승자 모두에게 꽤나 충격적이었다. 온 돼지 가족이 당한 참사 앞에 신경을 끈 채 차라리 운전대를 잡은 나는 달리기에만 몰두할 수 있어 어쩌면 운 좋은 운짱이었다. 다리를 벌러덩 위로 벌린 채 등으로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는 어미 곁을 스쳐갔다. 여태 뜨거운 김이 운무처럼 솟아올라 햇살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제발 편히 잠들기를.’
브로큰힐까지 달리는 내내 제일 큰 문제는 로드 킬을 피해야하는 운전기술이었다. 120km가 넘는 빠른 속도로 달리다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드는 거대한 동물을 피하려면 중앙선을 침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가끔씩 반대편에서 쏜살같이 나타나는 차량을 종잡을 수가 없기에 정면에서 오는 차량에 신경을 쓰면서 사체를 피해가야 한다. 그래서 이중 방어운전의 자세가 필요했다.
어쨌거나 동물의 충돌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사륜구동 보닛 아래 부분에 돌출한 기다란 쇠막대기 – 무지한 나는 아직도 그 이름을 잘 모르지만- 를 붙이는 것도 십분 이해가 되었다. 차량도 많지 않고 변화 없는 일직선 도로가 운전하기 편할 것 같지만 실은 집중력을 무지하게 요구했다. 그러니 나 같은 겁쟁이 운짱에게는 옆에서 수다를 떨어주는 동승자가 구세주였다. 너무 긴장한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사방에 초록 풀도 푸른 나무도 없이 누런 억센 잡풀만 무성한 들판을 양쪽에 두고 차는 하염없이 달린다. 발목정도 오는 길이의 누런 잡초인 사막의 유일한 건초 스피니펙스(spinifex)가 나타난다. 그래도 오지의 유일한 이 억센 잡초 덕분에 야생 캥거루와 산양이 살아간다니 신비의 풀이기도 하다.
“원주민이 이 건초 가루를 내 무기 만드는데 끈끈한 풀로 썼다니!”
그 질긴 풀은 사막의 왕자다. 죽음 같이 누런 사막에서 마침 눈에 띈 산양이 플라스틱 같은 그 줄기를 열심히 흡입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오랜만에 발견한 생명체를 보며 의아함 반 경이로움 반으로 소리를 질렀다..
물이 없는 곳에 생명체가 나타났다는 경이로움도 잠시 와디가 나타난다. 그러고 보니 지도에 하얗게 보이는 ‘와디(wadi)’라는 곳을 실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비가 오면 일시적으로 물이 흘렀던 곳이지만 건기에는 마른 골짜기가 된 곳이다. 이런 사막에도 한 번 씩은 비가 온다는 증거일 테니, 오지에서도 생명이 살아가도록 설계된 자연의 질서가 경이로울 따름이다.
“이런 가는 물줄기가 다른 생명을 살린다는 족적이구려!”
“그렇지. 자연의 공생인 거지.”
“아, 공생!”
도로와 사체에 익숙해져 운전에 자신감이 붙을 무렵 차가 끼익, 스키드자국을 내며 쏜살같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작은 송아지만큼 큰 캥거루 사체 앞에서 급정거했지만 거의 차를 들이박을 뻔했다. 소중한 세 인간을 공포에 떨게 했다는 죄목으로 남편에게 항의도 못한 채 나는 운전대를 뺏기고 말았다. 난 씩씩거렸다.
“휴,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 저 덩치 큰 캥거루 녀석 때문이라고!”
나는 잠깐 고개를 핸들에 박고 사체를 못 본 척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헐떡거리는 캥거루 배에서 흘러나온 창자가 부연 수증기를 내뿜는 게 어른거렸다. 고개를 돌리며 나는 정신 나간 주술사마냥 중얼거리고 있었다.
“괜찮아. 조금만 견뎌. 건조한 땡볕이 너를 차라리 미라로 만들어줄지도…….”
그러나 삽시간에 시커먼 고양이만이나 한 까마귀들이 떼를 지어 날아들었다. 어떻게 신통한 저녁거리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걸까. 남편이 말했다.
“자연의 섭리지. 먹이사슬에 순응하는 거야.”
자연과학을 한 그의 메마른 답에 나는 다른 답을 찾아 반항하고 싶어진다. 좀 더 인간적인 답을 찾지 못한 채 의도적으로 재촉만 한다.
“밖에 신경 쓰지 말고 빨리 달려요. 시간이 금인데.”
그에게 운전대를 뺏긴데 대한 최대한의 보복이다.
갑자기 어린 시절 멋모르고 고무줄넘기하며 불렀던 노래가 떠오르는 건 웬 일일까. 어쩌면 사체를 건너왔기 때문인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흘러가라 우리는 전진한다.”
어린 시절 멋모르고 부르던 소녀들 노래가 으스스한 전장 노래였음을, 무심코 달려온 이 길이 피난민 보트의 행렬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과연 이렇게라도 인간과 자연은 나름의 순환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비움의 여행이고 싶었는데 어느새 나는 사유하는 욕심쟁이가 된다. 어디선가 바람처럼 숨소리처럼 속삭임이 채근한다.
“오지가 너를 부른다. 어서 달려가 보렴.”
두 작가소개 :
그림 작가 백경선생은 청산에 묻혀 그림이 일상이고 일상이 예술인 자유로운 영혼. 이마리 작가와 호주의 붉은 흙을 좋아하는 성향이 맞아 3회로 연재될 브로큰힐 여행 글에 살아있는 자연의 혼을 불어 넣어주기로 단합하다.
센트럴코스트에 묻혀 사는 이마리 작가는 청소년 역사소설 <대장간소녀와 수상한 추격자들><동학소년과 녹두꽃>에 이어 삼대 째 이어지는 독립군이야기 집필에 열을 쏟고 있으니 멋진 독립군의 탄생이 넌지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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