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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규/수필가, 이효정문학회 회장 언제부터인가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아픈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마치 정해진 대화의 주제인 듯 너도나도 끼어든다. 증상부터 치료 단계의 설명에 들어가면 의사들 빰치게 종합병원에 다녀온 듯한 기분마저 들 때가 있다. 헤어질 때의 인사는 ‘다음에 만날 때까지 아프지 말자’이다. 하긴 이 나이 되도록 사용하느라 혹사시킨 치아나 장기가 온전할 리가 있겠는가. 젊었을 땐 딱딱한 호두를 통째로 깨물어 두동강나게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 맛있는 음식들을 배불리 먹을 때마다 몸 속의 아우성을 듣지 못하고 행복해 했다. 나처럼 아날로그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 인터넷으로 유튜브로 온갖 건강 정보를 넘쳐나게 얻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 몸의 적신호에 대한 핑계를 댄다 한들 무슨 소용이랴. 게다가 길을 갈 때도 예전엔 앞을 똑바로 보고 걸었는데 이젠 땅바닥도 내려다 보며 걷는다. 넘어지면 큰일이라니 조심하게 된다. 멀쩡하던 허리며 무릎이 자칫 삐끗 결리기라도 하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니 몸의 상태를 잘 헤아려가며 다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어느 날 남편이 뒤뜰에서 일하다가 허리를 다쳤다. 삐져나온 디스크가 척추의 신경을 압박하여 통증 쓰나미가 발끝까지 내리 덮쳤다. 그는 혼비백산하여 고통의 소리를 집안이 떠나갈 듯 뱉어냈다. 지금 생각하면 구급차를 불러야 했는데 남편의 만류를 나는 어리석게도 그의 말을 따랐다. 대신 옆집 부인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집에서 남편의 큰소리가 들리더라도 개의치 말아 달라고.  물리치료사가 여러번 왕진을 왔으나 큰 진전이 없던 차에 한국에서 재활전문의였던 지인의 소개로 디스크를 원상복구 시키는 기구가 있는 물리치료병원을 가게 되었다. 남편과 남편의 나이만큼이나 오래되어 보이는 – 딸친구의 할머니가 사용하셨던 – 휠체어를 차에 싣고 내가 운전대를 잡은 것까지는 순조로웠다. 그런데 길에 주차를 하고 휠체어에 남편을 앉히고 밀기 시작하자 갑자기 앞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게 아닌가. 내가 손만 놓으면 그대로 찻길로 돌진할 판이다. 내 심장이 멎을 듯한 상황이었다. 그제서야 보도블럭이 약간 경사져 있는 것을 알았으나 너무나 당황하여 브레이크는 생각도 못하고 오로지 나는 온 힘으로 휠체어를 내 한쪽 무릎 안쪽에 대고 끌어 당기는 데만 열중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내 무릎통증이 시작되었다.   일련의 도미노 현상이 그때부터 일어났다. 남편은 허리를 다친 김에 여러가지 검사를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 전문의 예약을 하고 나니 내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며칠 후면 우리 모녀가 제주도에 가서 해녀인형극을 공연하기로 몇 달 전부터 예정이 되어있건만 어떻게 해야하나. 접이식 테이블이며 스크린 등 공연을 위한 모든 채비를 마치고 공항에 갈 준비가 되어 있는데 혼자 일어서는 것도 힘든 남편을 혼자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이제와서 공연 취소를 통보해야 하다니 쉽지 않은 기회였는데 실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에 몹시 실망스러웠다. 결국 딸이 한국행을 포기하고 아빠와 남기로 했다. 전문의를 만나는 일과 다른 검사를 할 때 아빠의 휠체어를 밀고 동행하기로 했다. 딸은 내가 제주도에 가서 프리젠테이션이라도 할 자료를 준비했다. 내가 아침 비행기로 떠나는 전날 밤 우리 모녀는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말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내 무릎에 기어이 이상이 오고 말았다. 예정했던 대로 한국과 일본, 다시 한국에 가있는 동안 나는 다리를 절룩거리게 되었다. 탱탱하게 부어오른 무릎을 굽히지도 못하고 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결국 정형외과에 가서 스테로이드 주사를 약하게 맞기도 했다. 시드니로 돌아와서 MRI 검사결과 연골파열에 인대도 조금 손상이 갔다는 것을 알게 되고 물리치료를 시작하기까지 8주나 걸렸으니 병을 키운 셈이 되고 말았다. 소를 잃었는데 외양간이 고쳐지질 않는다. 결국 나는 지팡이 신세까지 지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또 사고를 쳤다. 이번엔 부엌 뒤뜰에서 넘어져 양쪽 무릎을 다쳤다. 골절되지 않아 천만다행이나 손바닥만한 반창고를 양쪽 무릎 전체에 붙일 정도로 상처가 컸다. 그는 마침 집에 있던 등산용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부부가 갑자기 나란히 지팡이를 짚는 신세가 되다니 나이들어가는 광고를 주위에 톡톡히 하는 처지가 되었다.   서양에서도 나쁜 일은 연거푸 세번 일어난다는 속담이 있으니 세상의 이치는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남편은 허리를 다친 김에 여러 검사까지 하고 몸 안의 적신호를 미리 발견할 수 있게 되어 치료를 겸하고 있어서 전화위복이 아닐 수 없다. 그의 회복은 빠른 편인데 내 무릎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 같다. 때마침 여고 친구들 카톡방에‘세상 힘들어도 웃고 살아가요’라는 카드가 올라왔다. 이제 이만큼 살아왔으면 세상살이에 의연해 질 때도 되었건만 여전히 호들갑을 떨게 되니 나는 얼마나 더 살아야 미숙함에서 벗어나게 될 것인가. 나이 듦의 과정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겨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나 스스로의 위안일지도 모른다. 이런 모든 과정이 인생살이인 것을.권영규/수필가, 이효정문학회 회장

26/03/2024
문학지평

  “# * ^^ % @ #”내가 타이핑한 이 부호들은 나의 우스갯 소리이다. 후후, 그냥 우스운 노래라고 생각하면 안되나요?  나는 조금 웃기고 싶을 뿐이다. 내 새해의 넋두리를 읽는, 혹은 듣는 사람이 살짝 순간이라도  행복하면  좋겠다.일어나자마자 거실의 커튼을 걷고 ABC FM라디오의 스위치를 올릴 때, 갑자기 터져나오는 말러 1번 4악장 알레그로 프리오소의 심장 두드리는 경쾌한 음률은, 밤의 장막이 걷히고 새롭게 태어나는 아침의 얼굴과 만나는 나를 기쁘게 한다. 때로는 하바네라가, 또는 베토벤의 7번 교향곡 2악장일 수도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은 많으며, 가끔 우연히 그 음악을 들으면 옛애인을 다시 만나는 것처럼 마음에 사무친다. 그럴 때는 음악은 음악대로 거실에서 놀게하고 나는 침대로 다시 돌아간다. 그리고 어젯밤 읽다가 내팽개치고 잠들었던 그 지독한 연애소설을 다시 집어든다. 오르한 파묵의 ‘순수 박물관’끝부분이다. 때로는 ‘아프리카 방랑’, 혹은‘난주 Maria’일수도. 멜로디는 거실을 빠져나와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고, 나는 음파의 리듬을 타고 저 고대 술탄의 도시 이스탄불로 달려간다. 또는 탄자니아의 세렝게티를, 제주와 추자도의 바닷가일 수도. 꽤 오래전부터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나는 좋아했고 잘 부르기도 했다. 사실은 트로트 노래풍은 뽕짝이라 하여 싫어했으나, 세상에는 트로트 마니아가 무척 많으며 분위기에 따라서는 뽕짝노래 하나쯤은 18번으로 가지고 있어야 함을 노래방 문화에서 깨달았다. 나는 오페라<춘희>의 비올레타를 동백아가씨에 대응시키며 그 노래를 오직 하나 나의 트로트 목록으로 등재하고 지금도 사용한다. …그리이움에 지쳐서…울다아 지쳐서…를 부를 때면 간혹 내 눈 가로 살짝 물기가 내비치는 사실을 나만 안다. 그러고 보니 2번도 있다. <섬마을 선생님>이다. 우주의 바다에 떠 있는 지구라는 섬에서 가없는 코스모스를  바라보는 센티멘탈 어떤 남자를 그리워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일을 회상할 때면 나는 다행스럽게도 재미있고 즐거운 사건들을 먼저 떠올린다. 현재의 나도 과거의 나처럼 깔깔거리고 소리지르며 화를 돋우기도 하지만, 지난 사연들은 왜 그리 예쁘고 반짝이는 것인지…. 그래서 미래로 가서 지금을 되돌아 보면 현실의 혼돈스러움도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을테니 나는 내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그냥 지금을 사랑하고 느끼며 살아갈 일이다. 그 안에서 추억의 과거와 희망의 미래를 연민의 눈빛으로 엿보며 오늘을 사는 시간 여행자가 될 일이다.  언젠가 일루저니스트(Illusionist) 이은결의 마술을 유튜브로 보며 환상과 환각, 착시와 착각을 겪은 즐겁고 우스운 순간이 있었다. 사과를 그린 종이에 성냥으로 불을 붙일 때 성냥개비 머리부분의 황과 인이 마찰하여 발생하는 특유의 타는 냄새를 느꼈던 것이다. 나와 같이 보던 이도 동시에 느꼈으니 그는 우리에게 분명 연금술사처럼 환상을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그 환상연출가는 사과는 타버리고(없어지고) 사과꼭지만 남은 종이를 들어 올리며 ‘사과가 사라진 오늘의 세상’을 일깨워 주었다. 진정, 개에게나 사과를 주는 따위의 패륜이 횡행하는 시대가 되었나?새해를 시작하며 사라진 사과를 소환하고 싶다. 생뚱맞게도 섬마을 선생님과 동백아가씨를 노래하고는 소피스트처럼 궤변을 늘어놓은 내 이야기에‘피식’하고 조금이나마 웃으셨나요?  나는 정색하고 말할게요. 그대들도 동백아가씨를 그리워 해 보시라, 푸른 섬에서 바다 건너 당신을 바라보는 어떤 남자를 상상해 보시라. 잘 익은 사과를 가슴에 품고 누구에겐가 나누어 주길 꿈꾸며, 멜랑콜리아한 노래를 부르면서 음악과 문학의 향취를 일루전(Illusion)을 거친 현시점으로 소환해 보시라.  “# ^ & ^ $ @ % *”김인숙/수필가, 이효정문학회 회원

23/02/2024
문학지평

가을 하늘이 유난히 청명한 5월 어느 날, 오페라하우스를 향해 걷는 우리 모녀의 발걸음은 마냥 가벼웠다. 정오의 산들바람은 우리들의 뺨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는데 시드니 하버의 물결은 태양이 보석을 쏟아 놓은 듯 반짝거렸다. 주변은 화창한 날씨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붐볐고 길 한쪽에 일렬로 설치된 레스토랑들의 흰텐트 안에는 식탁보를 씌운 테이블에서 점심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우리들이 오페라하우스에서 관람한 연극은 이렇게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시드니의 한낮 풍경이 무색하게도 몹시 무거운 주제의 실화극이었다.  역사의 매운 바람에 휩쓸린 사람들의 이야기, 보통사람들이 불행히도 그 때 그 곳에 있었던 탓에 겪어야 했던 엄청난 상황들을 주로 제작하는 이 극단은 노르웨이에 본거지를 두고 유럽 여러나라의 아티스트들과 연계하여 20여년간 공연을 해왔다고 한다.                                                                                                                                                                                                                                                                                                                                                                                                                                                                                                                                             그 날 본 연극의 제목은 We Come From Far, Far Away.‘우리는 아주 멀리서 왔어요’였다. 그저 멀리 가야한다는 일념으로 온갖 위험과 죽음을 무릅쓰고 내전 중인 시리아를 탈출해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까지 온 난민 청소년들과 대화를 통하여 제작되었다. 극 중에서 15살된 소년이 어머니가 마련해 준 돈을 모자 속에 넣어 푹 눌러 쓰고 친구와 함께 트럭에 숨겨져 도착한 곳은 해안가였다. 불법으로 지중해를 건너 그리스까지 태워주는 이들에게 큰돈을 지불하고 캄캄한 밤에 배가 떠났다. 정원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너무 많이 태웠으니 도중에 배에 문제가 생겨 개인 소지품을 모조리 바다에 던져야 했고 어디인지도 모르는 캄캄한 바다에서 작은 배로 뛰어 내려야 했다. 절망하며 먼저 내리는 친구의 손을 잡아 주었는데 그는 차갑고 어두운 바다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대개 이런 식으로 25,000명이나 수장되었다고 한다. 구명조끼라고 받은 것은 기능을 할 수 없는 모조품이었다. 소년은 그리스에서 자기에게 무서운 얼굴로 무어라고 소리치는 가게 주인으로부터 캠프용 작은 텐트를 구입했다. 얼마나 떨렸을까. 두려운 가슴을 조이며 이동할 때마다 소년은 공포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마치 죽은 친구가 곁에 있는 것처럼 혼자 말로 주고 받으면서 외로움과 두려움을 떨쳐냈다. 드디어 오슬로에 도착한 소년은 경찰서를 찾아가 난민신청을 하면서 기어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 동안 살얼음판을 건너는 지독한 공포와 긴장이 풀리면서 자신의 온 몸을 부여잡고 눈물을 쏟아내는 소년을 바라보는 나의 뺨에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뿐만이 아니라 훌쩍이는 소리가 관객석을 적시고 있었다. 무서운 바다, 잃은 친구, 엄마를 생각하며 15살의 소년이 구사일생으로 먼 북유럽까지 왔으니 그 끈질긴 생명력은 기적으로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소년은 청소년 난민센터로 보내지게 된다.  오페라하우스의 스튜디오, 그 큰 공간에 직경 8미터가 되는 몽고 유목민의 거주 텐트가 설치 되어 있었다. 유목민들의 실제 거주 텐트보다 훨씬 더 크게 만들어서 보통은 문이 한 개인데 연극을 위하여 만든 문은 네 개나 된다. 연극 자체는 몽고와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관객들은 배우들의 안내에 따라 그 몽고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네명의 배우 중 두명의 남자배우는 관객들이 모두 착석할 때까지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 텐트 안에는 다른 세계가 있었다. 2/5 가량이 무대로 사용되었고 무대에는 작은 캠프용 텐트가 한가운데 놓여 있다. 벽에는 구명조끼, 경찰 퍼펫 등 장치물이 걸려 있다. 관객들은 나머지 공간에 비교적 푹신하게 마련된 바닥에 앉는데 미리 신발을 밖에 벗어 놓게 되어있었다. 가장자리에는 벤치가 몇 개 놓여져 있어서 우리는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관객수는 미리 예약한 시드니의 어느 하이스쿨 학생과 선생들 합해서 80명이었다고 한다. 60명가량이 비교적 편하게 채워지는 공간에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인원수인 셈이다. 감히 비교도 안되지만 극이 진행되는 동안 정원을 훨씬 넘은 배처럼 닫힌 공간에 모두 끼어 앉아 연극에 몰두할 때에 머리를 스카프로 감싼 중동여학생이 눈물을 닦으며 옆자리의 친구에게 속삭이는 모습이 보였다.시리아 내전은 2011년에 발발하여 10년이상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데 그 동안 민간인 40만명 이상이 죽고 국민의 절반 이상인 120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고 한다. 호주에 살고 있는 여늬 청소년들과 똑같은 보통아이들이 시리아에서 태어났기에 삶터가 폭파되어 잿더미로 변하고 귀중한 생명들이 파리목숨처럼 죽어가는 가운데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유럽으로 몰려드니 그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능력이 없는 유럽국가들이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지만 어쩔 것인가. 지금도 내전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지역이 어디 시리아뿐인가. 아프리카와 중동 등에서 종교적, 민족간의 갈등으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멈출 줄을 모르니 무고한 아이들이며 민간인들의 삶이 언론에서 소개될 때마다 그 처참한 모습에 마음이 무너진다.연극이 끝나자 몽고텐트의 한 면을 바깥쪽에서 조금 풀어 올렸는데 금세 시원하게 통풍이 되니 모두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배우들이 나란히 서서 인사를 한 뒤에 질문과 답하는 시간이 이어졌는데 또래의 하이스쿨 학생들의 적절한 질문에 산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이 이야기가 사실입니까? 왜 이런 연극을 만들었어요? 등. 주연배우가 답하기를“사실은 함께 탈출했던 소년의 절친은 투르키예 국경에서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지만 작은 배로 옮겨 내리다가 바다에 빠져 죽어간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친구로 표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연극을 보고 충격이나 상처를 받은 청소년들이 있을 경우에 대비해서 카운슬링 전문가가 앞에 나와 자신을 소개했다. 푸근한 아줌마 같은 인상을 주는 여성이었다. 이 작품은 노르웨이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연극을 통해서 상황을알리고 인간애를 느끼게 하려는 그들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할만했다. 이 복잡한 지구촌에서 과연 해답이 나오기는 할까. 오직 하늘의 큰 힘에 의지하며 희망을 가져볼 뿐이다.   우리 모녀는 정오에 지나갔던 하얀텐트의 레스토랑에 자리 잡고 와인이 포함된 세트메뉴를 골랐다. 압둘라 라는 실제 인물을 떠올리며 지금쯤 성인이 되어 있을 그에게 건배를 올렸다. 하버브릿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 즐거운 모습으로 우리들 곁을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세상이 아무리 불공평하더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야한다는 진실을 새삼 느꼈다. 씁쓸했다. 권영규/수필가, 이효정문학회 회장             

23/01/2024
문학지평

왼팔엔 링거 오른편 가슴엔 다양한 색의 선들이 모니터와 연결되니 나는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간호사들이 계속 주시해야 한다며 커튼을 닫아 주지 않아 밤새도록 간호사들의 움직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일벌처럼 쉴 새 없이 들락거리는 모습이 무척 부산스럽기도 하였지만 특별한 사명감 없이는 감당키 어려운 직업이라는 생각이 드니 그들이 대단해 보였다. 간호사들의 빠른 움직임처럼 다양한 색으로 변하는 컴퓨터 화면과 신음 그리고 쉴 새 없이 들리는 근거 없는 소리가 마치 오일장 한복판에 서 있는 느낌이다. 응급실로 들어오며 머리 사진과 가슴 X-Ray를 찍었다. 의사가 곧 결과를 가지고 올 거라는 간호사의 확신 없는 대답이었지만 아들과 나는 밤새워 기다렸다. 정오가 훨씬 넘었는가 두런거리는 소리에 설핏 잠에서 깨었다. 눈을 뜬 내게 의사는 의례적인 몇 가지를 물은 뒤 보호자와의 통화를 원했다. ‘이, 삼 주 되어야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이는데요.’ 의사의 말에 ‘그전에 우린 런던으로 떠날 예정인데요.’ 어느새 나의 보호자가 된  아들의 대답이 암담하게 들려왔다.  무엇이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일까.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던 팬데믹이 사그러지자, 그동안의 칩거한 보상이라도 받는 듯이 사람들의 움직임은 왕성해졌다. 얼마 전 런던으로 이사한 딸이 우리를 초대했다. 결혼 후 둥지를 틀었던 브라이턴이 번잡하지 않은 관광지라 그곳으로 오길 원했다. 몇 개월 후면 휴가를 받을 수 있는 아들까지 함께할 수 있어, 한동안 정지되었던 여행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자신들의 생활에 바빠 얼굴 보기도 쉽지 않은 다 큰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기쁨에 몇 달이 후다닥 지나가고 있었다. 슬슬 떠날 준비를 해야 할 날이 가까워져 올 무렵 전혀 예기치 않던 일이 일어났다. 근 한 해 동안 입맛이 없어 먹지 못하던 것의 원인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주는 대로 약을 먹고 주사를 맞고 가장 힘들었던 채혈에도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친절한 간호사와 의사의 따뜻함이 낯설었다. 병실 또한 건물 가장 위층에 있어서인지 병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조용했고, 모든 것에 불편한 점이 없다는 것이 점점 더 무기력해져 우울했다. 갑자기 몇 명의 간호사들이 들어와 부산을 피웠다. 드디어  MRI  촬영 스케줄이 나왔다고 했다. 코로나 이후로 감소한 병원의 인력으로 모든 것이 늦추어지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툭툭 벽을 들이받으며 침대를 밀고 가는 비숙련자의 서투름에 웃음이 나오기도 했지만, 잔뜩 긴장한 나를 위해 장난을 하는 것 같아 오히려 고마웠다. 드디어 MRI 촬영 방 앞에 섰다. 몇 겹의 귀막이 위에 이어폰까지 한 후 원통으로 스르르 빨려 들어갔다. 천둥 번개 그리고 모여있던 세상의 온갖 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 같았다. 잠시 멈출 땐 이게 끝인가 긴 한숨을 내쉬었지만 몇 차례나 반복되니 점점 더 겁이 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들과 날짜를 확인한 딸은 몇 가지 공연 표를 사느라 동분서주했다. 계획상 우리가 도착하는 다음 날에 손흥민 선수가 활동하고 있는 팀의 유럽피언 챔피언십 경기가 있어 날짜를 바꾸면 안 된다며 재차 확인을 해왔다. 청천벽력이었을 소식에 딸의 놀라움은 얼마나 컸을까. 조석으로 들려오는 딸의 목소리엔 답답함이 태연하게 감추어져 있었다. 퇴원해도 탑승을 할 수 있을까하는 소리가 지나쳤지만 귀담아듣고 싶지 않았다. 수술실에서 막 나와 캡을 벗어버린 시원한 긴 머리의 여자가 방으로 들어섰다. 새로 나를 맡게 된 의사의 조수 같았다. ‘퇴원하면 2주 있다가 의사가 보자는데요.’ 그녀의 말에 ‘두 주만 더 늦추면 안 되는지 물어봐 줄 수 있을까요?’ 대답은 하였지만 정히 안된다면 그 안에라도 다녀오고 싶었다. 얼마 전만 해도 여행으로 잔뜩 부풀었던 남편과 나의 아이들 그리고 내 마음도 다녀와야 바람이 빠질 것 같았다.   나이가 지긋한 거구의 신사가 들어왔다. 여느 날같이 평복을 입은 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앞에 놓고 있었다. 편안하게 느껴지는 그의 첫인상에 나의 담당의이겠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 이미 들어 알고 있는 나의 증상에 대해 간결하게 설명한 후, ‘언제 퇴원해야 딸한테 갈 수 있어요?’ 나직이 물었다. ‘늦어도 내일모레는 퇴원해야 그다음 날 새벽에 떠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를 빤히 쳐다보며 웃으며 대답했다. ‘음 ~ 알았어요.’ 문을 나서며 들릴 듯 말 듯 한 그의 짧은 대답이 여운을 남긴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그의 널따란 등 뒤에 희망의 날개가 솟는 것 같았다. ‘네가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가 너를 돕는다’라는 연금술사에 나오는 글귀가 확 떠올랐다. 차루나/수필가, 이효정문학회 (aka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21/12/2023
문학지평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거미줄에 먹잇감으로 얽매여 있다가 탈출한 듯 홀가분한 해방감과 설레임으로 한국으로 향한다. 하지만 한나절 날아간 비행기가 내려 놓은 곳은 아련했던 추억의 땅이 아닌 냉엄한 현실의 땅이다. 살아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에 앞서 사라져버린 사람들과 풍경들이 먼저 그리워진다. 먹먹한 슬픔으로 잠시 길 잃은 아이처럼 서성인다. 누구를 만날까…작은오빠를 만나기로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자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서 현관문이 열린다. 손을 내밀며 서있는 오빠의 처연한 모습에 무릎이 휘청인다. 웃음도 말도 잃어버린 듯 텅 빈 얼굴로 내 손을 잡고 앉아서 축축해진 눈으로 머리만 끄덕이는 오빠에게 나도 아무 말 못하고 손만 주무른다. 아프게 목을 조이며 차오르는 울음이 먼저 튀어나올 것 같아서. 눈치 없는 강아지는 계속 짖어대고 있었다. 조용히 달래던 조카가 못 참겠다는 듯 실내화 한쪽을 벗어 들고 팔을 번쩍 올리며 낮은 소리로 말한다. “마르, 조용히 하지 못해!” 그 순간 정지된 화면처럼 조카의 모습에 오빠가 겹쳐진다. 묘한 기시감을 느꼈고 수십 년 만에 들어보는 마르라는 단어는 마치 체면술사의 암시처럼 한 순간 먼 옛날의 추억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우리 마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의 마르는 짧게 잘린 꼬리대신 넓적하고 커다란 귀를 펄럭이던 잉글리쉬 포인터였다. 가게에 붙여 지은 별채에서 아버지와 동거하며 사랑을 독차지했다. 칸막이가 있는 커다란 책상 밑이 침실이었고 낮에도 손님과 앉아있는 아버지의 손을 핥고 또 그 손은 마르를 쓰다듬는 애정행위가 이어졌다. 게다가 아버지의 잔심부름도 잘하는 동네사람들이 알아주는 명견이었다. 돈을 물고 가 담배를 사오고 단골 정육점에서 소고기를 물고오면 아버지상에만 올라갈 맑은 전골이 끓여졌고 어김없이 반쯤 남겨져 마르의 밥그릇으로 옮겨졌다. 팔 남매 끄트머리로 태어난 우리들은 질투심으로 의기투합하여 마르를 구박했다. 가끔 귀를 축 내리고 눈치를 보며 안채를 기웃거릴 때 작은오빠가 신발 한 짝을 벗어 들고 “마르, 니 아부지 한테 가, 임마!” 윽박지르곤 하던 이유였다. 겨울방학때 서울에서 언니 오빠들이 내려와 집안이 북적거리면 사냥을 떠나던 아버지. 자식들에게 꿩만두를 먹여 보내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신이 나 껑충거리는 마르와 아버지의 배웅이 끝나면 우리들은 장끼이냐 까투리인가를 써 놓고 내기를 했다. 긴 겨울 밤 따뜻한 아랫목에 깔린 이불속에 발을 집어넣고 둘러 앉아 내기에서 진 사람들이 사온 뻥튀기과자를 먹으며 게임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풍경은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추억이다. 그러던 어느 날 큰언니가 우리들이 기억 못하는 마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눈도 얼어붙고 싸리 눈이 어지럽게 흩뿌리던 유난히도 추웠던 날, 목화 솜을 두툼하게 넣고 누빈 하얀 바지저고리를 챙겨 입은 아버지는 엄마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사냥을 떠났다. 그리고 며칠 후 반쪽 시야로 눈을 뜬 곳은 병실이었다. 사냥터에서 가까운 마을에 살며 아버지가 가끔씩 들려 몸도 녹이고 꿩도 한마리씩 떨구고 오던 친구의 말은 이러했다. 그날 마르가 갑자기 뛰어들어와 끙끙거리고 짖어대며 바짓가랑이를 물어 끌어당겨 뭔 일이 생겼구나 생각하고 마을사람들과 함께 쫓아가니 아버지가 쓰러져 있었고 구조한 후 우리집에 연락을 했다고. 그리고 병원으로 옮겨진 후 처음 치료한 의사의 말은 한쪽 눈을 잃을 만큼 머리와 얼굴에 부상이 컸지만 파편과 혈흔이 닦아진 듯 깨끗했으며 만약 그 날씨에 골든 타임을 놓쳤으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다고. 그날 아버지는 꿩을 향해 총을 조준하고 몇 발작 움직이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방아쇠는 얼어붙은 땅을 향해 발사되었고 튀어 올라온 파편들은 얼굴에 많은 부상을 입히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마르는 깨어나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피범벅이 된 상처를 핥아내고 곁을 지키다가 아저씨네로 달려간 것이었다. 마르는 팔 남매의 아버지이며 가장을 구해 낸 우리 가문의 영웅이었던 것이다. 큰언니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 우리들은 마르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인정했고 아버지의 한쪽 눈이 의안인 것조차 모르고 있었던 철부지들은 마르 앞에 서면 먼저 꼬리를 내렸었다. 평화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마르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서울로 떠나던 이삿짐트럭 조수석에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엄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슬픔과 절망속에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가는 길에서 허공에 흩어진 아버지의 시선과 마르의 시선은 닮았었다. 전학 수속이 늦어져 몇 달 후 서울에 올라와 보니 마르가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부르며 찾아다니는 나에게 “마르는 사라졌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표정이 너무나 쓸쓸해 보여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마르는 어디로 갔을까! 낯설은 서울이 싫어서 고향의 사냥터로 향했을까? 전설의 주인공 답게 뒷모습도 보여 주지 않고 죽을 곳을 찾아 떠났을까? 작은오빠도 속수무책 불치병으로 소멸의 길을 향하고 있다. 과거 신장이식을 결정 못해 골든 타임을 놓쳐버린 자신에 대한 뼈저린 후회와 아내가 설득해서 추진해 주지 않았다는 뒤늦은 원망. 그의 곁에는 아버지의 마르같은 존재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과 꼭 닮은 아들과 함께 남겨질 전설 하나쯤은 있으리라. 지나온 인생길에서 절체절명의 순간에 타인의 생명을 살려내는 일과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고통의 구렁텅이 속에서 가족을 위해 스스로 자기자신을 건져내는 사건들. 이렇게 삶과 죽음의 중간에서 생겨난 이야기가 전설로 남는다면 살아남은 자들의 몫은 그것을 기억해 주는 것이리라. 이영덕/수필가, 이효정문학회(aka 시드니한인작가회)

23/11/2023
문학지평

[문학지평] 지금 그리고 여기 친구가 밤새 비행기를 타고 이른 아침 시드니에 나타났다. 사진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에게는 등에 한 짐 그리고 어깨와 목에 카메라 장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호주 풍경을 하나라도 더 담고 싶어하는 그의 열정은 땅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준비 탕!’이다. 출발지가 한국이었으니 시차적응도 필요없으렷다. 하이드파크에서 아치볼드 분수대를 한참 감상하더니 드디어 렌즈를 만진다. 360도를 조금씩 조금씩 돌며, 멀리 또 가까이서 쉼 없이 셔터를 누른다. 마치 이 순간이 지나면 분수대가 없어지기라도 하는 듯, 담고 싶은 만큼 충분한 시간을 보낸다. 물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조용히 옆에서 지켜보는 것. 드디어 카메라가 손에서 놓여지고 다시 한 번 전체를 바라본 후에야 몸을 돌린다. 그제야 아름드리 큰 나무들로 이루어진 초록터널이 눈에 들어오나보다. 시내 한 복판에서의 거대한 숲 속 느낌에 감탄하며 또 손이 바빠진다. 덩달아 나도 고개 들어 감상하다보니 나무 사이로 살짝살짝 보이는 하늘이 마치 초록 옷에 매달린 반짝이는 단추같아 보여 다음 글쓰기 첫 문장으로 저장해 놓는다. 근처에 있는 세인트 메리 대성당 안에서는 플래시만 사용하지 않으면 사진찍기가 허용된다하니 바닥부터 천장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을 담는다. 덕분에 나는 긴 시간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 친구와 중학교 입학때 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같이 했던 오십년도 넘는 시간들이 꿈결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러다 떠오른 바로 두 달 전의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양 생생하다. 그는 한국 방문 중인 나를 파주 헤이리예술마을로 데려갔었다. 수 십년간 아나운서였던 황인용씨가 틀어주는 클래식이 높은 천장의 카페 안을 채운다. 웅장한 음악 공간으로 다시금 빠져드는데 인기척이 느껴져 눈을 떠보니 어제는 서울에 있던 친구가 떡하니 내 앞에 서 있다. 맞다. 지금 우리는 같이 시드니에 있다. 오전 내내 땅에 발을 딛고 담은 모습들을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싶다면서, 그녀는 또 ‘준비 탕!’을 외친다. 우리는 309 m 높이의 시드니 타워로 올라가 하나의 드론이 된다. 해의 움직임에 따라 이동하는 커다란 그림자로 인해 성당 지붕 위와 넓은 공원은 시시각각 색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또 다른 장관을 놓칠세라 카메라에 부지런히 담는다. 관람층에서 한 바퀴를 다 돌며 분주히 찍다가 저 멀리 보이는 바다를 가리킨다. 우리는 페리를 탔다. 파도가 어찌나 심한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듯 하다. 친구는 뱃머리에서 아찔함을 즐기며 특이한 장면을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오히려 좋아한다. 20여분만에 도착한 맨리비치, 거친 파도 속에서 서핑하는 많은 무리들에게 마음을 빼앗겨 이끌리듯 해변가 물 가까이로 달려간다. 게다가 불그레한 석양까지 배경으로 또 그렇게 한참을 머물며 앵글을 조절한다. 멀찍이 떨어져 벤치에 앉은 나는 그 전체 모습을 한 장면으로 바라보며, 친구의 사진 작업을 통해 나의 글쓰기에서 부족한 부분을 찾아 보았다. 그것은 열정이었다. 어느 새 늦저녁 어둠이 밀려온다. 첫 날 일정은 그렇게 12시간만에야 막을 내렸다. 어떤 날은, 오페라하우스 계단 위에 자리잡고 앉아 몇 시간이고 건물 끝에 걸쳐진 하늘의 흘러가는 구름 모양을 비스듬히 찍다가 아예 엎드려 찍다가를 반복했다. 그렇게 5박6일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그녀는 떠났다. 그 후 어느 날, 친구와의 추억이 떠올라 맨리비치를 다시 찾았다. 나는 샌드위치를 손에 들고 한 입 베어물며 생각에 빠져 해변가를 걷고 있었다. 친구 대신 이번에는 ‘준비 탕!’하는 갈매기 한 마리가 등 뒷쪽에서 순식간에 내 손도 건드리지 않고 기술적으로 봉지 속 음식만 낚아채 길바닥에 떨어트리니 갈매기들이 떼로 몰려든다. 마치 지금의 내 모습 같아, 졸지에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만 손에 쥐고 갈매기 무리 속에서 빠져나왔다. 느닷없이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 허탈감이 그 친구가 함께 없음을 더 실감나게 했다. 머물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음에랴. 바로 페리를 타고 오페라하우스 쪽으로 돌아왔다. 샌드위치 가게에 다시 들렀다. 이번엔 안전한 곳을 둘러 보다가 '갈매기 쫓기'를 전담하는 순찰 도는 훈련된 개를 발견했다. 오페라하우스 근처 식당 야외 테이블 위 음식을 낚아채고, 유유히 날아가는 불청객 갈매기들을 쫓기 위해 순찰견을 활용하여 이 문제에 대처하다니. 여러 방법 중 이 묘안은 성공적이라한다. 그 도둑 갈매기 한 마리가 나를 맨리비치 대신 오페라하우스 앞에 머물게 했으니 평화롭게 점심을 먹은 후, 친구와 몇 시간 함께 했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았다. 사진작업을 처음 지켜보며 ‘지금 그리고 여기'에 온전히 머물러야 훌륭한 작품이 나온다는 것을 알았으니 나의 글쓰기에도 적용해 본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모발폰에 새 글의 초안을 써서 저장했다. 친구는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지고 시드니에 나타나 ‘매 순간 현재에 머물기’를 몸으로 내게 보여주었다. 순간을 포착하는 갈매기와 무심히 지나치는 구름에서조차 찰나의 한 장면을 포착하려는 그녀의 열정에서 나의 안일했던 글쓰기를 돌아본다. 은퇴 후 요즘, 남은 에너지는 청춘 때와 같지 않지만, 언제 어디서나 글쓰기의 글감을 떠올릴 수 있으니 게으름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매월 첫 토요일의 ‘지금 그리고 여기’는 메도우뱅크에서 모이는 문학회이다. 차수희/수필가, 이효정문학회 회원

19/10/2023
문학지평

Sun에게는 처음인 유럽을 그룹여행으로 떠나게 되었다. 나는 조금 미안한 마음으로 패키지 여행을 선호하는 그의 뜻을 따랐다. 그는 그룹여행이, 여럿이 우르르 몰려 다녀서 재미있으며 먹고 자는 중대사를 쉽게 해결하고, 어딘가에 종속되면 편하다는 것이다. 그 핑계로 꾀를 내어 나도 아직 밟지 않은 동유럽과 발칸반도 6개국을 12일만에 패스하는 여행을 시작한다. Putin’s  War로 인해, 서울에서 항공로 변경으로 두 시간이 지체되어 열 네 시간후에 프랑크푸르트에 도착, 플러스 4시간 버스를 타고 바바리아(바이에른)에 이른다.  휴우, 약 18시간에 걸친 거리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간 8시간(시차)을 고려하면 10시간만 걸렸다는, 시간을 번(=돈을 번) 나의 다소 이상한 계산법으로 힘든 몸을 달래었다. 여행의 끝무렵에는 프라하의 유서깊은 성당에 내걸린 현수막의 소리없는 웅변으로 위로 받기도. ‘HANDS OFF UKRAINE, PUTIN!’   모짜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가 첫 구경지이다.(카라얀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게 뭘까? 현지 여행가이드가 나타나 ‘얼마나(x2) 빨리(x2) 우리를 몰아 가는지..아, 미칠 뻔 했다. 이런 저런 해설을..이건 뭐 이런 약장수도 없다. 아, 자유여행이 그립다.’(그날 내 일기장에 이렇게 씌어 있다) 알고보니 시간맞춰 해야 할 선택관광 때문에 그렇게 난폭한 진행(?)을 하는 것이었다. 영화 ‘Sound of Music’이 태어난 미라벨 궁전의 정원을 찍고, 잘츠강의 풍경과 다리에서 찰칵, Mo氏의 생가, 세례당, 자주 다녔다던 카페, 초콜렛 가게와 대성당과 돔 광장을 찍었다, 찰칵, 찰칵, 찰칵…. 물론 박물관과 성당 내부 관람은 당연히 생략이다. S와 나는 과감히 선택관광을 취소하고 한 시간의 자유시간을 얻기로 한다. 먼저 모짜르트가 자주 이용했다는 Café Tomaselli(since 1700-)로 가서 멜랑주(mélange)를 주문했다. 알고보니 오스트리아의 커피 멜랑주가 오늘날의 카푸치노 원조라고 하지 않은가. (그후 빈에서 즐긴 비엔나 커피는 아인슈패너einspanner였다) 모짜르트는 뜨거운 커피에 설탕과 생크림을 가득 올린 부드러운 커피를 즐겼을까? 여기서 떠올린 악상은 무엇이었을까?  너무나도 관광객이 붐비는 지금, 그의 감성을 느끼기가 어렵기만 하다. 돔 광장과 미라벨 정원에서 트렙가의 일곱 아이들과 마리아가 부르는 도레미송이 들려오지 않은 것처럼. 차르르 차르르 영사기가 돌아가듯 잘츠부르그를 떠나 할슈타트를 지나고 두번째의 국경을 넘어 발칸반도로 들어간다. 발칸반도의 산천을 가로지르며 나는 니콜라 부비아의 여행기 [세상의 용도]중의 첫째권 ‘아, 봄꽃들이여 무얼 기다리니’를 읽었다. ‘..우리는 일체의 사치를 거부하고 오직 느림이라는 가장 소중한 사치만을 누리기로 작정했다..’ 그는70년전 느림의 미학으로 이곳을 지났다는데, 나는 흐드러진 봄꽃들의 향기를 추억의 밑바닥에 서둘러 파묻으며 고속으로 스쳐간다. 블레드, 중세의 성과 호수, 아흔아홉의 계단을 신부를 안고 올라야 축복받는(?)결혼식을 올릴 수 있다는 작은 섬의 예쁜 교회..오늘날에도 동화는 계속된다. 아드리아해의 항구도시 피란(Piran)을 거쳐 크로아티아의 국립공원 플리트비체에 들어선다. 아침 이른 시각에도 많은 사람이 트레킹에 나섰다. 한국 여행사들의 여행객 합집합이 압도적으로 많다. 고대 로마의 시저(Julius Caeser)처럼 왔노라Veni, 보았노라Vidi, 이겼노라Vici(찍었노라)를 외친다. 카이사르 집합의 원소가 된 나도 찰칵거리며 부지런히 발을 내딛는다. 여러가지의 걷기 코스가 안내되어 있다. 일주일 정도 머물며 저 코스들을 다 밟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당연한 생각을 냉큼 뿌리치고 안광을 부라리며 멋진 경치를 시신경에서 뇌세포와 가슴까지 전달한다. 나는 S의, S는 나의 모델노릇을 일사분란하게 진행하면서 찰칵 찰칵, 두 발은 또 다른 풍광을 겪으려 열심히 움직여야 하노니..많은 일정을 빠르게 진행하는 패키지 여행에 나의 자유와 여유로움이 빼앗기고 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16개의 천연 계단식 호수를 연결하는 98개의 크고 작은 폭포로 이루어진 이곳..진초록 에메랄드빛 호숫가로 난 통나무 트레킹 코스는 정녕 느림의 미학으로 가야하는 길이 아닐까.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본다. 세포 하나하나에 자연의 에너지를 받아들인다. 그 청량한 우주적 힘이 축적되길 바라며. 여행5일차에 묵었던 보스니아 땅 네움(Neum)의 초저녁 하늘에는, 아마 몇천만km 거리의 초승달과 샛별이 내 육안으로는 100m간격으로 떠 있었다. 가늘고 매혹적인 몸매의 초승달과 빛나는 별이 혜원(신윤복)의 그림 월하정인(月下情人)의 두 연인처럼 애틋하였다. 그러니 더욱 요염한 달은 삼경에 떠 있는 부분월식의 눈썹달이 아닐까. 이건 정말 순전히 혜원의 그림 탓이다. 아, 예술의 위대함이여! 오백년, 천년, 이천년 전 그들도 같은 달을 바라보며 삶을 살아내어 문화를 문명을 이끌어 왔을 것이다. 이제는 예술이 된  옛날의 도시들을 구경하며 멀리 있는 과거로 갈 때는 예술에 의지해야 함을 깨닫는다.  바쁘고 바빴던 이번 여정의 막바지, 하얀 달은 어김없이 차올라 밤 이슥히 독일 시골 마을의 조촐한 호텔 창문 밖으로 내다 보이는 성당의 뾰족한 종탑 위로 반달이 되어 걸려있다.  세상의 봄꽃들이 따사로운 햇살과 달빛의 정기로 꽃망울을 터뜨리는 듯 달은  반원의 달무리를 그리며  천지에 은빛을 뿌린다. 봄이 무르익어 간다. 문득 시드니가 그립다. 김인숙/수필가, 이효정문학회(aka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김인숙/수필가, 이효정문학회(aka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21/09/2023
문학지평

 한나 안오랜만에 헌 구두를 꺼내어 닦았다. 구두 앞부리 껍질이 벗겨진 부분을 구둣솔 끝에 구두약을 살짝 찍어 바른 후 촘촘하게 박힌 구둣솔로 살살 윤을 내 봤다. 옆면과 뒤꿈치까지 약을 바르고 쓱쓱 문질러가며 광을 냈더니, 뿌옇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헌 구두가 구름을 헤치고 얼굴을 내미는 햇님 모습이다. 오는 일요일에는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모처럼 정장 차림으로 교회 가야지.서울에서 살 때는 집을 나서기 전 꼭 하던 일이다. 그때는 신발장에 갈색, 검정, 체리 빛과 흰색 구두를 뚜껑 달린 신발장 안에 가지런히 넣어 두고 신었다. 회사 다니던 때 구두는 항상 반질반질하게 닦여 있어야 했고, 바지 주름은 칼날처럼 서 있어야 했고, 옷과 구두와 핸드백 색을 매치해서 입고 다녔었다.  시드니에서 생활하는 요즈음은 메시(Mesh)천으로 만들어진, 운동화 비슷한 검정 신발 한 켤레이면 모든 옷에 통한다. 검소해진 걸까 게을러진 걸까. 바지 역시 겨울철에는 주름이 서지 않아도 되는 레긴스바지이다. 편하기도 할뿐더러 어디를 가던 그런대로 괜찮다. 헌 구두가 새 얼굴로 반짝이듯 나이 든 사람의 마음도 반짝이게 하는 약과 솔은 없을까 생각해 본다. 겉만을 닦고 광낼 게 아니라 마음도 반짝반짝 광을 낼 수 있는, 그냥 바르고 쓱쓱 문지르기만 하면 활기차고 젊어지는 것 말이다. 마음은 아직도 젊은데 나이가 영 생경하다. 내 나이 칠순이 넘은 게 맞나? 알면서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불로초를 좋아하는 이들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구두를 닦듯 구두약을 발라 쓱쓱 문질러 광을 내고 싶어진다. 외출이 점점 싫어지는 것은 집이 아늑하고 좋아서만은 아니다. 친구들의 전화마저도 귀찮아지고 꿈쩍하기 싫어지니, 특별히 제작한 맞춤구두약과 구둣솔이 필요한 게 분명하다. 아침이면 감나무, 살구나무들이 잎을 모두 털고 나목으로 서 있는 뒤뜰에도 가보고, 풀만 무성한 텃밭도 둘러보고, 다육식물 녀석들 형형색색 물든 화분들도 둘러본다. 꽃들의 활짝 핀 모습과는 달리 내 마음은 갈수록 점점 갈대처럼 드러눕고만 싶어진다. 마음을 닦고 광을 내고 싶은데 약과 솔은 어디에 있는 걸까.  구두약과 솔을 찾아 바닷가로 나섰다. 본다이 비치에서 브론테 비치까지는 약 1시간 20분 걸렸다. 마주 불어오는 해풍을 점퍼 가득 품고 해안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오월의 물기 어린 바닷바람에 마음속 덕지덕지 낀 먼지를 한 움큼씩 짙푸른 바다에 띄우며 나는 가끔 이 길을 걷는다. 일상의 권태와 나이 듦의 나른함에서 도망칠 수 있는 내 마음의 장소이기도 해서이다.  벼랑 위에 우뚝 선 고층 건물 안 카페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시원한 통유리창 너머로 지난날들이 꼬리를 물고 눈앞에 나비처럼 나풀거렸다가는 파도가 되어 멀어져 간다. 빗속에서도 걸었고, 뙤약볕 속에서도 걸었다. 때로는 축복처럼 눈이 내린 후의 아침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인생은 늘 선택의 길 연속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그게 최상의 선택이라 여겼는데 지금은 그건 아니었던 거야 해 지기도 한다. 첫사랑이 그렇고, 멀어져간 친구도 그렇고, 결혼도 남편도 그렇다. 그때 이럴 걸 그랬어....... 동굴 속에 숨어든 메아리처럼 외로움이 덩어리 채 만져지는 때면 잃어버린 관계들 상실의 아픔이 스멀거린다. 헌 구두를 닦듯, 구두약을 칠하고 새로 광을 내어 관계를 새롭게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유리창에 비치는 시들어진 내 모습은 구두가 낡아졌듯, 무슨 근심이 있냐는 질문을 들을 법한 얼굴이다. 고개를 돌려, 젊음이 있고 생기가 있었던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포도 위를 걷던 때를 퍼 올려본다. 그때가 그리운 요즈음, 마음을 광낼 수 있는 구두약과 구둣솔을 찾아 두리번거려본다. 매일 조금씩 글을 쓰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내 등짝을 밀어붙이는 영혼의 바람 중의 하나이다. 소설 쓰기 강의를 수강한 게 일 년이 넘었다. 환갑을 지난 할미꽃들 모임이다. 아마 그들도 나처럼 지난 삶의 무늬들을 종이 위에 그려보고 싶어서이리라, 누가 그랬던가. ‘노년은 생각보다 멋지다, 마음을 비우며 살아가기에 좋은 나이다’ 라고. 담담한 삶의 여백을 가슴에 담으며, 순간 다시 젊어지는 느낌은 구두약이 되고 구둣솔이 되어 새로워지며 상쾌한 기분이 솟는다. 머리를 드높이 희망이란 파도를 탈 수 있는 한 나이가 더 들어도 영원한 청춘의 소유자, 헌 구두를 닦듯 글쓰기를 벗삼아 까부라지려는 나를 하루하루 닦으며 광을 내 보련다.  한나 안/수필가, 이효정문학회(aka 시드니한인작가회)회원

17/08/2023
문학지평

모든 이별은 마음에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나 흔적을 남긴다. 그 이별 중에서도 혈육을 나눈 가족이나 마음을 나누고 지내온 친구와의 이별은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내가 겪은 마지막이 된 배웅은 오랫동안 나에게 텅 빈 세상, 허무한 나락을 경험하게 했다. 70년대 말. 갑자기 찾아온 병마로 아버지는 오른쪽 반신불수에다 언어장애까지 와서 온가족을 충격과 절망에 빠뜨렸다. 뇌졸중이란 단어조차 주위에서 들은 적이 없었던 그 당시 아버지는 57세 젊은 나이였다. 장녀인 나는 결혼해서 동경으로 간지 일년이 되었고 나머지 동생 넷 중에 셋이 학생이었다. 그 후 나는 시드니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어머니는 시집간 딸네 집에 가보고 싶은 마음을 가슴에 누르며 13년을 단 하루도 빠짐 없이 아버지 곁을 지켰다.  중환자실을 거쳐 처음 몇 년 동안은 위독하다는 연락이 오면 나는 비행기를 탔고 내 눈 앞에서 아버지가 경련을 일으키며 온 몸이 멍든 것처럼 보라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게 된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이 세상을 떠나려고 식음을 전폐하기도 했으나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 회복시키려고 혼신을 다했다. 수소문하여 한의와 양의를 병행해서 치료에 임했는데 서울 토박이 어머니는 친척이나 지인 한 명 없는 지방 어디어디에 침을 잘 놓는 한의사가 있다는 얘기를 듣기가 무섭게 싫다는 아버지를 무시한 채 어떻게 해서든지 모시고 갔다. 그 지성이 하늘에 닿았던가. 언젠가부터 경련이 멈추고 다리의 마비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왼손으로라도 글을 써서 가족과 소통을 하면 좋으련만 의사표시는 왼손의 제스처로 했고 어머니가 유일한 통역사가 되었다. 가족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기 싫어서였을까. 말하기 좋아하던 사람의 입에서 소리가 나질 않으니 아버지는 그렇게 냉가슴을 앓았다. 식사조차도 아내가 곁에서 떠먹여 드렸으니 미안한 마음이 컸으리라. 어머니와 자식들은 아버지가 그런 상태라도 살아 계시기만을 간절히 원했다.  아버지는 6남매 중 막내였다. 막내가 갑자기 쓰러지니 위로 두 형님이며 누님들이 애절해 하셨다. 연로하신 큰고모님은 아버지의 병세를 아시면서도 나를 보실 때마다 눈시울을 붉히시며 ‘아빠 어떠시냐’고 물었다. 내 입에서 한가닥이라도 희망적인 말이 나오길 기대하시던 그 애절한 눈빛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도 막내동생 걱정을 하시던 큰아버지, 둘째아버지 두 분이 70의 벽을 간신히 넘기고 먼저 별세하셔서 아버지가 칠순이 되던 그 해에 나는 혼자서 속으로 긴장 했다. 다행히 아버지는 병세가 많이 호전되어 비록 말을 못하고 오른 손 사용을 할 수는 없지만 혼자서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이발소도 다녀오실 정도가 되었다. 어머니 덕분이었다. 좋아하는 맥주도 한잔 하게 되었다. 안된다고 하면 화를 내는 바람에 좋아지던 병세가 도루묵이 될까봐 드리게 되었다. 식구들은 그런대로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 집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리게 되었을 때 나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와 어머니를 호주에 모시고 오고자 했다.  아버지는 손사래를 치시며 ‘나는 아니고 엄마만 모시고 가라’고 왼손으로 말씀하셨다. 동생들도 모두 어머니가 호주에 다녀오시길 원했다. 아버지는 이제 많이 회복하신데다 자기들이 잘 보살펴 드릴 테니 엄마는 아무 걱정 말고 호주에 잘 다녀오시라고 했다. 아아,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던 기회인가. 그러나 어머니 입장에선 병중에 있는 아버지 곁을 자식들 보다 자신이 지키기를 고집하셨다. 결혼한 딸네 집에 왔다갔다하며 지내는 친구들이 늘 부러웠다는 어머니는 결국 처음으로 딸네 집엘 다니러 가기로 했다. 호주로 떠나는 날. 온 가족이 김포공항에 모였다. 아버지가 엄마를 배웅하러 공항에 나오셨다는 건 우리 가족 친지에겐 뉴스거리가 되었다. 60일만 헤어져 있다가 다시 반갑게 만날 터이니 서양사람들 같으면 서로 끌어안고 인사를 하건만 우린 그냥 몸을 숙여 절을 하고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시드니 집에 와서 어머니와 나는 그 동안 쌓였던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누었다. 어머니는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시드니 하버의 푸른 물결을 하염없이 쳐다보며‘속이 후련하구나’하셨다. 그러나 운명은 딸과 잠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머니를 그냥 두지 않았다. 호주에 온 지 오십일. 이제 열흘만 있으면 한국으로 돌아갈텐데 한밤중에 남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쌍초상이 날까 두려워 협심증이 있는 어머니에겐 사실을 숨기고 아버지가 병원에 가셨다고만 했다. ‘내가 13년을 하루같이 돌봐드렸는데 내가 없을 때 무슨 일이 나면 절대로 안된다.’고 완강한 어머니의 믿음과 고집. 급히 한국에 도착해서 집으로 가는 도중에 내가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말씀드려야 했을 때의 그 상황을 어찌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으랴.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를 몸부림치며 배웅했다. 50일 전 김포공항에서 아버지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다면 가장 힘들었던 배웅이 아니었을까.  나는 아버지와의 돌이킬 수 없는 사별을, 먼 길을 떠나시는 아버지를 배웅해 드렸다고 표현하고 싶다.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권영규/수필가, 이효정문학회 (aka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장

06/07/2023
문학지평

음(音)의 안내로 그림 속을 거닐었다. 전람회의 그림 콘서트에 간 것이다. 빠방하고 트럼펫이 전시회의 개막을 알리자, 나는 전시회장으로 급류처럼 빨려들어갔다. 무소륵스키가 연인처럼 사랑했던 화가 빅토르 하르트만이 동맥파열로 39세 젊은 나이로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자 그 애틋함을 친구의 유작전 전시회를 본 후 열 다섯 곡의 음악으로 재탄생시킨다. 그러나 슬픈 이야기가 아니다. 열 점의 그림을 보며 산책하는 이야기. 그리고 150년이 지난 오늘 오페라하우스에서 시드니 심포니의 선율로 그는 나를 마중한다. 감히, 단테가 베르킬리우스의 안내를 받으며 사후세계를 여행하듯 나는 그를 만나 그림 속의 세상과 소리의 세계를 동시에 산책한다. 먼저 난쟁이를 만난다.(1곡 Gnome) 나는 유년의 백설공주가 되어 일곱 난쟁이들을 만나고 해리네 집에 불쑥불쑥 끼어드는 집요정 도깨비도 맞닥뜨리다가 운유시인이 노래하는 중세의 고성으로 들어가기도 하며 (2곡 The Old Castle) 루브르 궁전역 튈르리 정원으로 뛰어가서 싸움박질하는 아이들을 말리기도 한다. (3곡 Tuileries) 휘익 갑자기 들리는 채찍소리는 처음들어보는 타악기 음향인가. 저 멀리서 소달구지가 달려오네. (4곡 Bydlo: 비드워 폴란드의 우마차) 어서 여기를 지나야겠다. 귀요미 꼬마들의 발레 연습도 지켜보고 (5곡 Ballet of the Unhatched Chichens), 두 남자를 만난다. (6곡 사무엘 골든베르크와 슈무일레) 두 폴란드 유대인, 부자는 고음에서 빽빽거리고 가난뱅이는 저음으로 징징댄다.  행복이란 즐거움, 몰입, 음이 있는 삶의 3박자가 맞아 떨어져야 진정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팬데믹으로 1년여를 집콕했을 때 나는 이 3박자를 얻으려고 뒤뜰 데크에서 음악을 자주 들었다. 소리로 바이러스가 퍼져나가고 들어오진 않으니 그나마 다행일까. 좋아하는 지휘자 아바도의 뒷모습을 유튜브에서 붙들어 유화 한 점을 그렸다. 그의 음악이 내 그림 속에서 조금이라도 뿜어져 나오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나의 기묘하고 욕심있는 소망은 그 전에도 있었다. 퇴근하는 길목 타운홀 역에서 가끔 연주되는 경쾌한 멜로디와 뮤지션의 풍경을 어설프게 그림으로 엮어내기도 했고, 세인트 제임스(St James) 지하철역 출구 앞에서 다리하나를 포개고 연주하는 색소폰 주자를 그린 적도 있다. 특히 그 때는 St. James는 성 야고보, 성 야고보는 생장, 생장은 산티아고…. 이런 낱말 잇기 놀이를 하며 지하철 출구에서 나오며 들어가는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의 출발점인 생장(프랑스와 스페인의 접경마을)과 도착점인 산티아고의 별이 쏟아지는 들판에 선 사람들이라는 상상을 즐기기도 했다. 이젠 시장 구경을 간다. 리모주의 시장 (7곡 Limoges Market)에서 가격흥정 끝에 싸우는 두 여인들을 보고 혀를 끌끌차며 예나 지금이나 인간군상들아 <현재를 즐겨라>하고 충고하다가 불쑥 카타콤 (8곡 Catacombs)으로 들어간다. 아, 화가 하르트만이 랜턴을 듣고 직접 나를 안내하네. <죽은 언어로 말하는 죽은 사람과 함께 죽음을 잊지 말라> 우리는 간다. 시계가 땡땡 12시를 알린다. 현실로 돌아가라. 닭발 위에 오두막집 (9곡 The Hut on Fowl’s legs)에서 러시아 민담 속의 마녀 바바야가(Baba-Yaga)가 경고한다. 현실로 돌아가라! 개선문 위에서 펄럭이는 파랑과 노랑 두색갈의 깃발, 키이유의 성문 (10곡 The Great Gate of Kiev) 앞에선 나는 눈물이 찔끔 난다. 일 년 넘게 계속되는 현재진행형의 전쟁, 죽어가는 사람들, 파괴된 도시와 마을…. 그러나 1874년 무소륵스키는 오늘의 상황을 예견하고 키이유의 대문에서 댕댕 승리의 종소리를 울려퍼지게 했는가. 벅찬 마음으로 성문을 통과하며 평화와 승리의 깃발이 하루속히 빨리 나부끼기를 염원한다. 캔버스 속으로 걸어 들어가 소리의 아름다움을 창조해 낸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들> 음악으로서 눈이 보는 것보다 훨씬 선명하게 더 멀리 볼 수 있게 한 그에게 브라보하며 환호한다.문장에 음악을 들려주는 고금의 많은 시인들처럼 음악과 미술의 만남 그리고 그를 표현하는 나의 문학적 서사가 캔버스 위에서 스며나오는 리듬과 음조와 더불어 나를 더욱 행복하게 이끌어갈테지.뿌듯하게 충만했던 그 반시간남짓한 시간은 오래오래 내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데 기여하리라.김인숙(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22/06/2023
문학지평

오늘도 꿈쟁이 나의 영혼은 내가 잠든사이 제멋대로 육신을 빠져나가 낯선 곳을 헤매며 나의 애간장을 태웠다. 집 밖으로 나간 호기심투성이의 감성은 날개 옷으로 갈아 입고 여기기웃 저기기웃 잿빛의 세상이 궁금하다. 침대에 누워서 돌아오라 외치는 추상같은 이성의 명령은 그저 종이 호랑이 일뿐이다. 나는 아직도 애칭 아가라고 부르는 어리버리 열아홉살 작은 아이를 옆에 태우고 지그재그 바다로 난 길을 향하여 카 레이서가 무색할 정도의 스피드로 바람을 가르며 달렸다. 이내 아스팔트 도로가 물에 잠겼다 보였다 하다가 저 멀리 하늘로 치솟은 도로의 끝에서는 길이 끊어져 자동차들이 심연의 물속으로 빠지고 있었다. 그냥 그대로 달려버릴까.. 노심초사 이성에게 어깃장을 놓아 보았지만 철없는 감성도 아이가 다칠까 걱정스런 마음 앞에선 어미의 마음이 되는가 보다. 그대로 멈췄다. 새해 다섯째 날 작은 아이가 두번째 운전면허 시험을 보는 날이다. 햇수로는 지난해12월24일, 날 수로는 열이틀 전의 불합격에 재도전을 하는 것이다. 시험에 합격해서 친구들과 여자친구 앞에서 자랑하고, 축하 받는 특별한 성탄을 맞이하고 싶다며 들떠 있다가 첫번째 시험에 참패를 당했다. 그날의 RTA내부 풍경을 스케치해 보자면, 한바탕 테스트가 끝나고 여러 팀의 시험관과 응시자가 거의 동시에 우르르 몰려 들어온다. 그리고 시험관들은 바로 자신들의 룸으로 들어 가는데 낙방한 사람은 호명이 빠르고 떨어진 이유를 설명하느라 시험관의 말이 길어진다. 또한 합격된 사람은 컴퓨터에 면허증 발급을 위한 신상 등을 입력 하느라 조금 지체되는 경향이 있고 일단 호명이 되면 사인란에 사인을 하라고 볼펜이 주어진다. 연두색 유니폼 조끼를 입은 시험관들은 다소 사무적이고 무표정 했으나 나름 권위가 엿보였다. 그들은 20여분의 테스트 시간동안 응시자들에게는 절대 권력자가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아주 작은 실수의 경우라 할지라도 점수를 주고 말고는 그들의 재량에 달려 있으므로 사람을 잘 만나는 것도 그날의 운이라 할 수 있겠다. 아이와 나는 인상이 좋아 보이는 시험관에게 걸리기를 간절히 바랬으나 삐죽삐죽 검은 수염이 면도한지 삼사일은 되어 보이는 듯한 남자에게 불려나가는 순간 예감이 좋지 않았다. 사람은 결코 겉모습만 보고 평가 할 것이 못된다고 하지만 내 삶의 체험으로 미루어 볼 땐 대체적으로 생긴 이미지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우리말‘꼴값’의 어원이 알고 보면 결코 속된 표현이 아니라고 한다. 현장에서 느끼는 긴장감은 살이 떨렸다. 아이의 수능 시험 때도 하지 않았던 기도를 했다. 기도라기 보다는 주술같은 중얼거림으로 기다리던 20여분의 시간은 좌불안석이었다. 차가 돌아올 때가 되어 연신 주차장을 내다보니 아직 주차가 능숙치 않은 아이에게는 무리수인 듬성듬성 이 빠진듯한 좁은 공간들만 남아 있었을 때도 마음이 심란했다. 그러나 주차 직전에 이미 채점이 끝난 상태이므로 나의 걱정이 기우였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드디어 아이가 바짝 긴장된 모습으로 돌아오고 호명이 빨랐고 칸막이 유리를 사이에 두고 설명이 길었다. 어쩌나.. 아이의 꿈이 옛날 이야기속 항아리장수가 되어 버렸다. 항아리를 지게에 지고 장으로 가던 사내가 잠시 쉬어가려 항아리를 내려놓고 상상의 나래를 폈다네. 이것을 팔아 병아리를 사야지, 닭이 되면 내다팔아 돼지를 사야지, 그것을 키워 내다팔아 송아지를 사야지, 송아지가 어미 소가 되고 새끼에 새끼를 치면 부자가 되겠지. 그러면 첩을 보겠지, 본 마누라와 첩이 머리채를 잡고 싸우겠지. 그러면 내가 이렇게 뜯어 말려야지…. 사내의 손에 맞은 항아리가 쨍그랑 작살이나고 꿈이 깨졌다. 어린날 들은 어머니의 이야기에 나는 몹시도 아파했었다. 가련하게도 아이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계획이 무참히 부서졌다. 깨진 상심의 파편 한조각이 내마음에 와 박혔다.   와신상담 두번째 시험날이 왔다. 지난밤 꿈에 달리다 멈춰선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좋은 운세를 내어주길 간절히 기도하며 시험장에 도착하니 이번엔 마음이 좋아 보이는 시험관에게 호명이 되었다. 과속이 낙방의 원인이었던 지난번의 실수를 되새기며 침착한 모습으로 시험에 응하는, 단 며칠새에 성숙해진 아이의 모습을 보니 좌절이나 실수가 때론 교만의 브레이크가 되는구나 싶어서 되려 지난번 참패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시험관의 수신호에 따라 좌,우 방향 제시등과 브레이크등을 확인하고 떠나는 차의 꽁무니를 먼길 떠나 보내는 어미의 심정이 되어 바라보았다. 도로가 밀리는 바람에 종전 보다 십분 정도 늦은 30여분이 지나서 들어오는 아이의 표정이 침울했다. 실수한 것 같다고 지레 낙심하며 실패를 각오하는 듯한 태세를 취한다. 주행 중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과잉 방어 급정지를 한 것이 감점이 될 것 같다며 불안해했다. 꿈에 갑자기 멈춰선 것과 아이의 급정거가 불길하게 연관이 되었다. 그러나 아이를 채점한 시험관은 이름을 바로 부르지않고 무언가 이쪽저쪽을 오가며 업무가 바쁘다. 아이와 나의 가슴속에서 팡파레 직전의 두그 두그 두그 북소리가 주거니 받거니 눈빛으로 감지되었다. 드디어 이름이 불리워지고 볼펜이 주어졌다. 잠시 후 자신의 얼굴이 박힌 P면허를 받아들고 차마 소리치지 못하고 가슴으로 바르르 터뜨리는 환희에 찬 아이에게 찬물 한잔을 권했다.젊은 청춘에겐 귓등으로 흘려 들을만한 뻔한 충고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 산다는 것 또한 운전과 같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어떤 날은 시종 일관 청색신호 질주에 세상 살만한 것 같고, 어떤 날은 시종일관 황색신호 턱걸이에 안도의 한숨을 쉬고, 어떤 날은 시종일관 빨간신호 정지에 안달도 나지만 삶과 운전의 신호등 앞에 순명 해야함을, 질풍노도의 파란 청춘도 빨간불 앞에서는 봐 주기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두려울건 없어 얘야.. 마음의 GPS를 틀고 논길, 밭길, 가시밭 길을 헤치고 네가 점찍은 먼곳을 향해 달려라 하니(Honey).꼭 어제같은 10년 전의 일이다. 결혼을 앞둔 어깨가 떡 벌어진 아들은 이제 더 이상 어리버리한 아기가 아니다.이항아(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08/06/2023
문학지평

몇 년 째 인사를 나누는 나무가 있다. 아픈 손가락인 셈이다. 산책을 시작했던 초창기에는 여느 나무처럼 서 있었다. 특별히 눈이 가지 않았던 이유다. 심한 태풍이 다녀 간 다음 날, 홀로 뿌리를 다 드러내고 옆으로 쓰러져 누웠다. 가슴이 철렁했다. 뿌리 몇 가닥이 아직 땅 속에 묻혀 있기는한데 살아남으려나 안타까워 매일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잎파리가 마르지 않고 있으니 일단 안심은 되었다. 나무가 그 상태로 살고 있는 모습에서 나를 본다.  해마다 크리스마스는 추운 겨울에 맞았다. 털장갑에 두툼한 목도리를 두르고 꽁꽁 언 길 위를 조심조심 걸어 성당으로 향했었다. 마침 첫 눈까지 오는 해에는 세상을 다 얻은 듯 희망을 가득 품곤 했던 추억을 몸이 기억한다. 호주 도착 후 제일 힘든 일이 생겼다. 너무 더워 해변에서 지내야 했던 첫 해에는 무엇이든 새롭게 느껴졌다. 해가 거듭될수록 반바지 차림의 산타할아버지를 내 아이들은 자연스레 쳐다보는데 내 몸이 받아들이지 못해 낯설기만 했다. 결국 십 년을 넘게 버티다 12월이 되면 한국 나들이하는 것으로 나를 달래주었다. 서서히 그렇게 겨울과 여름을 넘나들다가 이제서야 겨우 내 몸이 더운 성탄절에 낯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에서 몸에 익었던 날씨, 언어, 문화를 뒤로 하고 사회초년생인양 새로 구축해가야하는 과정이 쉬울 수 있었겠는가. 누워 사는 나무가 그렇게 정상으로 회복되듯 나의 이민 생활도 그런 과정을 거쳐야 했다.  얼마 전 화창한 목요일, 시드니에서 열린 ‘설치 미술가 서도호’의 개인전을 다녀왔다. 작가 자신이 어릴 적 살았던 성북동 한옥을 실물 크기 그대로 옮겨 놓은 아래층 전시관에서는 몸이 얼어붙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그 집 외벽 전체에 종이를 붙이고 일일이 손가락으로 문질러 본을 떴다. 그리고 떼어 내어 완성했다는 설명이다. 속이 텅 비어있는 그 종이집을 직원 네 명이 사방에서 지킨다. 멀찍이 떨어져 놓여진 긴 의자에 앉아 넋 놓고 바라본다. 이 전시관을 나서면 코 앞에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가 보인다는 사실도 잊은 채, 한옥에 빠져들어 마음은 이미 어린 시절 고향으로 와 있다. 디딤돌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동그란 문고리에 둘째 손가락을 넣어 잡아 당긴다. 열려진 방문 안에 엄마가 차려준 밥상이 보인다. 둘러 앉은 식구들 속에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도 함께다. 올망졸망 형제들이 조잘대며, 구운 김을 하얀 밥 위에 얹는 숟가락들이 분주하다. 그 때는 하루가 천 년 같아 언제 어른이 될 수 있나 막연해 했던 기억이다. 순식간에 어린 시절이 가 버릴 줄도 모르고. 가물가물 했던 원가족의 한 자리 모습을 또렷하게 보는 순간 잠깐이어도 미소가 절로 머금어진다. ‘집은 개인적 공간인 동시에 문화의 결정판’이라고 말하는 작가 서도호는 서울을 떠나 런던, 뉴욕에서 생활하면서 문화 차이를 작품에 녹여내려 했다. 그의 마음이 내게 전해져서였을까? 아니면 내가 어릴 적 살았던 혜화동 한옥이 떠올라서였을까?  나도 덩달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내가 살고 있는 호주 주택에 한옥을 겹쳐 느껴 보았다.  나의 고향을 느끼게 해주려고 이 전시회 표를 선물해 준, 호주에서 자란 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건물을 떠나려는데 아쉬움이 밀려온다. 전시회가 끝나면 그 아름다운 한옥은 흔적도 없이 시드니를 떠나겠지. 마치 내 어린 시절이 없어지기라도 하는 듯한 안타까움에 한 번 더 느껴보고파 전시회 마지막 날 다시 찾았다. 보고 또 보고, 기억 창고에 넣고 또 넣고, 그렇게 안간힘을 써 본다. 오늘 새벽 산책길엔 보름달이 동행한다. 여명에 집을 나섰으니 아직 달이 빛을 발한다. 태양이 조금씩 떠오르며 보름달은 점점 옅은 빛으로 자리를 내어 준다. 달과 태양 아래 옆으로 당당히 누워있는 나무를 또 만난다. 몸통을 굳건히 땅에 뉘인 채 아랑곳없이 가지들은 하루가 다르게 하나씩 하늘을 향해 서기 시작했더니 계절이 바뀔 때면 꽃도 피워낸다. 뿌리를 공중에 드러내고도 해와 달의 도움만으로 제법 서 있는 모양새를 갖추어가고 있어 자세히 보지않으면 다른 나무와 다름이 없어보인다. 서울 혜화동을 떠나 이 곳 시드니에서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은퇴 후 생활을 즐기고 있는 나를 이 나무에서 다시금 본다. 나의 뿌리를 못 느낄 때 호주에서의 삶이 공중에 떠 있는 줄 알았다. 사실 그렇게 뜬 채로 살아가는 나무는 한 그루도 없다. 땅 속에 묻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뿌리가 없는 나무는 결국 죽는다. 큰 뿌리를 고향에 두고 온 듯한 나에게, 붙어 있는 몇 가닥 뿌리는 문학회였다. 한글로 글쓰기를 할 수 있어 그것이 나를 호주 땅에서 여느 나무처럼 바로 서게 지탱해주는 큰 힘임을 어찌 모르랴.차수희(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25/05/2023
문학지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