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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엄마는 귀신에 홀린 듯 걸음이 빨랐다. 동생과 나는 허덕이며 엄마를 쫓아갔다. 슬리퍼가 종아리까지 진흙물을 튀겼다.‘철벅 철벅!’엄마가 돌아보지도 않고 소리쳤다.“그만 집에 가... 계속 따라오면 가만 안...!”장대비 속에서 엄마 목소리가 계속 끊어졌다.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흘러내렸다. 나는 동생 손을 잡아끌며 소리쳤다. “그만 울어! 제발 집으로 돌아가자.”울부짖던 동생이 빗속에서 떨고 있었다. “강리야, 우리가 돌아가야 엄마가 온다!”동생 손을 잡아끌고 갔던 길을 돌아왔다. 뛰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개울가에 멈추어선 엄마가 지하여장군처럼 서 있었다. 집에 오니 우리는 물에 빠진 생쥐가 되었다. 어둠속에서 빨간 담뱃불이 빛났다. 아빠가 현관문 밖에 서서 중얼거렸다.“감기 걸릴라.”나는 말없이 동생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동생은 젖은 머리를 털며 배고프다고 했다. 냉장고를 열었지만 빼빼 마른 빵 조각이 전부였다.“빨리 먹기나 해.”우리는 꾸역꾸역 식빵을 삼켰다. 그것은 마른 나뭇잎처럼 퍼석거려 목이 메었다. 곧 잠이 든 동생은 꿈속에서도 가끔씩 흐느꼈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는데 아빠가 들어왔다. 나는 잠든 척 돌아 누었다. 술 냄새를 풍기는 아빠가 우리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얼마가 지났는지 눈을 뜨자 장마 후 여름햇살이 눈부시다. 어젯밤 일이 꿈은 아니었다. 아빠 방에서 풍기는 시큼털털한 냄새랑 동생 얼굴에 마른 눈물자국이 그걸 말해주었다. 동생을 깨울까 하다 그냥 가방을 멨다. 그래도 우리를 지켜보던 아빠에게 동생을 미루기로 했다.학교 가기 전 엄마가 걷던 길을 걷는다. 엄마가 있을 리 없지만 행여나 하는 마음에. 젖은 돌계단을 따라 개천으로 내려간다. 장맛비를 뒤집어쓴 시퍼런 돌들이 얼음처럼 미끄럽다. 두 번이나 넘어져 무릎에 피 먹과 풀물이 푸르죽죽하다. 시퍼런 풀숲 아래로 쏟아지는 물이 콸콸 소리를 지르며 쓸려간다. 개울 앞 넙적 돌 위에 서니 눈앞이 부옇게 흐려진다. 엄마가 서 있던 자리다. 행여나 했지만 기적은 없다. 엄마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어느새 학교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또 지각인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빛나가 다가왔다. “지지리!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네가 일등으로 오다니!막 교실로 들어가려던 나는 엉거주춤 섰다. 빈정대는 빛나 목소리가 날카로운 가시처럼 와 박혔다. 정말 내가 어떻게 일등으로 온 건지 모르겠다. 항상 뒷자리가 내 단골자리였는데. 우리 반은 지난달부터 일찍 온 순서대로 앉기로 했었다.내 진짜 이름은 지해리다. 언제부턴가 반 애들이 나를 놀리며 지지리로 불러댔다. 지지리 못하는 게 많다면서. 사실 내가 공부를 못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왕따 당할 정도로 못된 아이는 아닌데 말이다. 빛나가 선생님 앞으로 팔랑거리며 나간다. 머리 위의 노란 리본이 춤을 춘다.“선생님, 안녕하세요?”“응, 노란 나비가 앉았나? 빛나 덕에 교실이 환하네.”예쁜 빛나는 더욱 빛나고 나는 졸은 쫄면처럼 바짝 오그라든다. 잡초에 젖은 옷에서는 쉰내까지 난다. 눈치를 보며 엉덩이를 들어 딸려 올라가는 속옷을 잡아 내렸다. 그때 ‘탕탕탕!’ 창문이 흔들렸다. 모두 놀라서 창문을 보니 수찬이었다.“엄마아!”유리창에 바짝 댄 수찬이 얼굴이 납작 만두가 되었다. 빛나도 그 모습에 배꼽을 잡고 웃었다. 납작 만두면 어떻고 둥글 만두면 어때. 어쨌든 난 수찬이 덕에 살았다. 선생님 외아들 수찬이는 착한 애인데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다. 순간 선생님 얼굴이 시커먼 먹지처럼 어두워졌다. 수찬이가 복도로 사라진 후 선생님이 다시 나를 향했다. 항상 꼴찌로 오는 지지리가 최고로 일찍 왔으니 뭔가 수상하기도 하겠지. 빛나도 자꾸 나를 힐끗거렸다. 나는 빛나에게서 되도록 멀리 의자 끝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드니 코앞에 수족관이 있다. 세상에나, 그곳에 황색 금붕어가 노는 걸 처음 보다니! 나는 항상 단골 지각이라 뒷자리가 지정석인데다, 고기밥을 한 번도 주어보지 않았다. 날쌘돌이 아빠와 배불뚝이 엄마 금붕어가 껴안은 채 바위 밑으로 들어간다. 주위를 맴돌던 새끼들도 꼬리를 물고 따라 들어간다. 새끼들은 엄마를 놓칠까봐 안절부절 못한다. 앗! 엄마 아빠 붕어가 사라졌다. 허둥대던 새끼들마저 없다. 건달 물풀만 김샌 듯 혼자서 흐느적거린다.  시퍼런 물풀 아래 조약돌들이 강가에 있던 그 미끄러운 이끼돌처럼 푸르죽죽하다. 그때 빛나가 코를 막으며 소리쳤다.“선생님, 냄새 나요!”나는 얼음놀이 때처럼 숨을 참고 정지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쉰내가 퍼져나갈 것만 같다. “그렇지, 이끼 때문이야.”휴, 이번엔 선생님이 나를 살렸다.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선생님이 말했다.“이끼가 끼면 고기가 죽어.”“네, 선생님. 내일이 수족관 물청소 날이에요.”“잊지 않았구나. 내일 방과 후 실시한다. 시간 되는 친구들 함께 참여하도록.”앗, 그러고 보니 엄마 얼굴에도 이끼가 끼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라며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깔깔대는 소리가 크게 다가왔다. 빛나가 국어책을 두드리며 종알거렸다. “지지리, 뭐해? 선생님이 너 이 동시 읽으라 하시잖아.”수십 개의 눈동자랑 선생님 얼굴이 확대되어 다가왔다.“해리,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와!”따르릉 첫 교시 끝나는 종이 울린다.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한다. 나는 멍하니 수족관만 바라본다. 앗, 엄마 금붕어가 나타났다. 배를 내밀고 으스대면서. 아빠 금붕어가 꼬리로 엄마 배를 다독인다. 새끼 금붕어들이 엄마 주위를 빙빙 돌며 황홀한 율동을 한다.  새끼 금붕어들은 참 좋겠다. 엄마가 절대 수족관 밖으로 못 나갈 테니까. 갑자기 주황색 금붕어가 부옇게 보인다. 눈에 티끌이 들어간 것도 아니면서. 개천으로 급히 내려가던 엄마의 모습도 그랬다. 그때가 엄마와 아빠가 큰 소리로 싸운 후였다. 베게가 날아다니고 TV 리모컨이 깨졌다. 엄마 아빠가 다툴 때면 돈, 학원비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빠는 술 담배를 많이 하다 어느 날 회사를 그만두었다. 아니 회사를 그만두어서 술 담배를 많이 한 건지도 모르겠다. 오전 수업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꼬르륵거리는 배꼽시계를 얼른 움켜쥔다. 나는 나쁜 딸이다. 엄마가 가출을 했는데도 배가 고프다니. 교무실 밖에서 눈치를 보는데 선생님이 손짓을 했다. 선생님 옆에 앉았다. “해리야. 집에 힘든 일이 있는 거 내가 다 알아. 요즘 많은 회사들이 경제 위기를 겪고 있지. 빨리 경제가 좋아져야 할 텐데.”선생님이 내 무릎의 풀물을 보고도 못 본 척했다. 그것이 창피하고 더 슬펐다. 참았던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해리야, 나랑 수찬이를 봐라. 세상에 걱정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잘 견뎌내야만 환한 미래가 있어.”그때 교무실 창문이 쾅쾅거렸다. 수찬이가 하회탈처럼 너털웃음을 짓자, 선생님이 다가갔다. 엄마 품에 안긴 수찬이는 온 몸을 흔들며 팔을 꼬았다.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환히 웃었다. “수찬이가 방과 후에 또 달리기를 하겠대. 패럴림픽에 나간다고. 기적이야, 기적.”수찬이는 걷는 것조차 싫어했었다. 그러던 수찬이가 캐나다 패럴림픽 중계를 보며 달리기를 시작했고, 노력을 거듭하다 대표로 뽑혔다. ”해리야, 너 수업 내내 수족관만 들여다보던데. 이끼 보았지? 돌멩이가 좁은데 갇혀서 멈춰 있으니 이끼가 끼는 거다.” “네∼”“그런데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낄 수 없단다. 돌이 구르면서 때로는 쪼개져 제 몸을 깎아내리고 거센 물살과 폭풍을 만나기도 해. 그렇게 힘든 아픔을 참아내는 돌엔 이끼가 끼지 못해. 그건 기적이지. 기적은 저절로 생기지 않아. 스스로 노력해 만들어 가는 거야.”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리야, 목표를 정하고 네 자신을 돌처럼 굴려보는 거야. 네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그게 힘든 부모님을 돕는 일이지.”얼마 후 오후 수업이 시작되었다. 내 맘속에 엄마가 들어와 앉았다. 나는 귀를 쫑긋하고 선생님 설명을 열심히 들었다. 빛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지해리, 너 오늘 뭐 잘못 먹었어? 웬 일?”이번에는 지지리라고 부르지 않았다. 수업 후 다가왔다.“너 혹시 이 문제집 가질래? 두 권이나 있어서.”그걸 받아 가방에 넣었다. 빛나가 내 마음을 읽은 걸까. 운동장을 나오는데 수찬이가 트랙을 달리고 있었다. 결승선 쪽에서 선생님이 두 팔 높이 초시계를 들어올렸다. 수찬이를 안을 듯 양팔을 벌린 엄마와 땀투성이 아들의 모습이 마치 영화 같았다. 가슴이 뭉클해져 나도 교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집이 가까워지자 가슴이 쿵쾅거렸다. 엄마, 라고 외치며 무작정 안방으로 달려갔다. 역시나 엄마는 없었다. 눈물이 쿡 솟구쳐 앞 이를 꽉 물었다. 아빠가 빠져나온 애벌레 껍질 모양의 이불에서는 구린 냄새가 지독했다. 코를 막은 채 창문을 활짝 열고 커튼을 젖혔다. 장마 후 따가운 햇살이 살 속으로 콕콕 파고들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나는 펑펑 울고 말았다. 엄마가 동생 강리랑 외갓집에 있단다. 아빠가 동생을 데리고 엄마를 찾아갔던 거다. 전화를 끊고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울 엄마가 온다!”갑자기 삼손처럼 힘이 솟았다. 퀴퀴한 이불을 불끈 들어 쨍한 햇볕에 널었다. 책상과 방바닥에 빠득빠득 걸레질을 했다. 물을 틀어 설거지도 쏴쏴 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빛나가 준 문제집과 책을 가지런히 펼쳤다. 집중이 잘 되는 게 기적이다. 가슴이 덜컹덜컹 설렌다. 엄마가 빨리 오면 좋겠다. 어느새 방싯 웃는 엄마 얼굴이 보인다. 내일 학교에 일찍 가고, 수족관 물청소도 도울 거다. 이끼가 끼면 고기가 죽는다.  제3회 한우리문학상 등단으로 동화쓰기 시작해 <코나의 여름> <구다이 코돌이><버니입호주 원정대>등의 장편동화 출간과 현재 <캥거루소녀>출간을 앞두고 있슴.최근 청소년역사소설 <대장간소녀와 수상한 추격자들>(2021.2)의 속편 <동학소년과 녹두꽃> (2021.7)을 출간하였으며 시리즈로 계속 집필 중임.이마리 전자우편 leemalhya.yahoo@gmail.com으로 연락주세요.

  16/09/2021
  문학지평

자갈길에 덜컹거리던 봉고차가 초라한 집 앞에 섰다. 미닫이 유리문으로 된 집이다. 유리문은 시커멓게 먼지가 껴 안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엄마 어릴 때 고향이라 다시 시골로 이사를 온 거다.“휴! 차가 분해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아빠가 이마의 땀을 닦는다. 겨울인데도 땀투성이다. 아빠는 살림도구를 다 비집고 엄마 휠체어부터 꺼낸다.“자, 먼저 엄마를 밀고 집으로 들어가라.”아빠는 짐을 옮기고 나는 엄마 휠체어를 민다. 하마터면 자갈밭에 엄마를 굴릴 뻔했다.매서운 겨울바람이 집을 통째로 날려 보낼 듯 으르렁거린다. 귀신이 나올 듯 썰렁하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에 눈이 맵다.“윤빈아, 나를 싱크대 쪽으로 밀어주고. 밖에 가서 쌀부터 날라 올래?”나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곧 엄마의 쌀 씻는 수돗물소리에 빈집이 술렁거렸다 시골로 이사한 첫날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밥을 먹고 우리는 이삿짐을 정리했다. 아빠는 대패랑 연장을 공방 차릴 곳에 진열했다. 엄마는 휠체어를 탄 채 작은 짐을 이쪽저쪽으로 날랐다.얼마 후 나는 얼룩진 천장을 보며 잠을 청했다. 우리 가족은, 아니 나는 서울생활이 무서웠다. 학교에선 아이들이 나에게 판자촌놈이라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이곳 시골 아이들은 좀 순하겠지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뒤척이는 소리를 들었는지 엄마가 말했다.“좀 추워도 참아라. 그래도 이 집엔 네 방이 따로 있잖아?”비닐로 천막을 쳐놓은 서울 판자 집보다 이곳이 훨씬 찬바람이 약했다. 새우처럼 옹크려보았다. 면적을 적게 해야 덜 춥다던 아빠 말을 떠올리면서.새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무리 추워도 새는 숲이 좋은가보다. 숲은 춥고 학교 가는 길은 멀다. 첫날이라 아빠와 함께 갔다. 담임 선생님이 나를 교실로 데리고 갔다.“서울서 전학 온 채 유빈이다. 해룡아, 네 옆에 앉히고 잘 지내도록.”나는 해룡이 옆자리에 앉았다. 쉬는 시간에 해룡이가 물었다.“너 서울에서 온 거 맞아?”아이들이 까마귀 떼처럼 달려들었다.“그런데 우리보다 더 시골뜨기네?”나는 속으론 열불이 나는데도 못들은 척했다. 해룡이가 날 힐끗거리며 아이들에게 말했다.“수업 끝나고 알지? 등나무 아래 모이는 거.”해룡이 말에 모였던 남자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너도 초대한다. 채 유빈!”그때 급식당번이 소리쳤다.“서바이벌 흡입시간!! 일급비밀, 담임 샘은 옆 교실에서 식사 예정!”아이들이 로봇 춤을 추며 달려 나갔다. 나는 제일 뒤에 식판을 들고 섰다. 내 차례가 오자 해룡이가 달려왔다. 그는 내 앞 아이 식판에 남은 닭볶음탕을 몽땅 부어주었다.“아이 이걸 어쩌나? 서울 친구에게 줄 게 없네. 이거라도 받으시지.”밥 한 숟갈만 얹힌 식판을 들고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자꾸 헛기침이 나왔다. 목에 멍울이 얹힌 듯 울컥해서다.“야, 밥 먹는데 재수 없게 왜 컥컥 대냐?”해룡이 숟가락을 탁 털고 일어선다. 아이들도 모두 일어선다.“서울 급식하고 다르냐? 안 먹을 테면 받지를 말던가.”해룡이가 내 식판에 퇴! 하고 침을 뱉었다. 내 두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순간 식판을 들어 해룡이 얼굴에 처박았다.아악! 비명과 함께 밥알이 해룡이 얼굴에 납작 달라붙었다. 꼭 곰보 탈바가지가 허우적거리는 듯했다. 그때 선생님이 들어오셨다.“내가 없으면 꼭 이 모양! 음식으로 장난치는 녀석은 용서 못해. 벌로 너희 둘 오늘 수업금지. 해룡이, 유빈이 다 교무실로.”나는 건물 끝 귀퉁이 음악실에 해룡이는 교무실에 갇혔다. 오후 내내 선생님은 나를 부르지 않았다. 배속에서는 속도 없이 자꾸 꼬르륵 소리가 났다. 눈물이 나왔다. 흐릿한 눈으로 창밖을 보았다. 들판 위에서 떨고 있는 허수아비가 좀비처럼 움직였다. 재수 없는 날이라고  투덜대며 주위를 둘러봤다.큰 북이 눈에 띄었다. 북채를 잡고 둥 쳐봤다.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울렸다. 다시 쳐봤다. 더 큰 소리가 났다. 두둥. 두둥둥. 두둥둥둥. 점점 소리가 커져갔다. 한참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음악실이 외따로 떨어진 게 이래서였나보다.이제 미친 듯 북을 두드렸다. 땀이 줄줄 흘렀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선생님이 들어왔다.“화가 좀 풀렸니? 참는 게 이기는 거야. 나쁜 녀석들이 신고식을 지나치게 시켰구나. 녀석들 가만두지 않을 거다.”선생님이 내 등을 다독이며 이제 집에 가도 좋다고 했다. 집에 오니 이미 저녁밥이 챙겨져 있었다. 정신없이 밥을 퍼 넣었다. 자꾸 목이 막혔다. 아빠가 뭔가를 눈치 챈 듯 국을 밀었다.“유빈아, 체할라. 국이랑 먹어라.”엄마가 말했다.“아빠는 벌써 일감이 들어왔대. 휴, 이사 온 게 얼마나 다행인지. 너도 그렇지?”“네? 아 네.”집에 도착했을 때 공방에서 나가던 아줌마 뒷모습이 생각났다. 그 아줌마가 손님인 것 같았다. 식사 후 설거지는 항상 내 몫이다. 아빠는 열심히 대패질을 한다. 향긋한 나무 향이 집안을 헤엄쳐 다닌다. 아빠는 벌써 <나무향기>라고 쓴 간판을 달고 있다. 엄마는 휠체어에 앉은 채 부지런히 사포질을 한다. 아빠가 만든 목공품은 모두 엄마의 손을 거쳐 완성된다.날씨가 얼음장 같다. 학교 가는 숲길에 나무들이 죽은 듯 서 있다. 저 나무에 언제쯤 새순이 날까? 보송한 솜털로 싸인 볼록한 곳에 더운 입김을 불어주었다. 학교에 도착해 가만히 교실 문을 열었다. 앗, 해룡이가 문 뒤에서 귀신처럼 나타나 쏘아붙였다.“야! 너 어제 노예놀이 하러오라니까 왜 그냥 갔는데?”“........”“너 같은 신참이 노예 해야 했어. 네 덕분에 내가 노예 했잖아?”다른 녀석이 소리쳤다.“어쨌든 채 유빈, 넌 이 시간부터 노예다.”나는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뭐해? 이 가방 들고 내 옆자리에 앉아!”나는 말없이 가방을 들었다.“야, 그 노예 쓸 만하다.”내가 앉자 애들 눈이 나를 좇았다.“야, 노예가 어디 주인이랑 함께 앉으려고? 넌 바닥에 앉아.”둘러선 녀석들이 나를 한 방씩 먹였다. 주먹을 피해 쓰러지려는 내 몸을 해룡이가 잡았다.“인마, 노예가 어디서 맘대로 쓰러져?”해룡이가 다시 명령했다.“이제 쓰러져. 어서!!”여자애가 소리쳤다.“야, 너무 심한 거 아냐?”“너, 까불면 알지? 선생님한테 이르기만 해봐라.”누군가가 소리쳤다.“선생님 납시오!”삽시간에 아이들이 자리에 앉았다. 휴! 담임이 나만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나는 아픈 볼만 어루만졌다.“방학 동안에 국악반에 가입할 사람은 신청해라. 초보자도 대환영. 석 달 후엔 군청에서 열리는 대회가 있다. 상금도 걸려 있고.”수업 내내 북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수업 후 음악실로 달려갔다. 문을 여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았다.“노예께서 북을 쳐 보시겠다?”돌아보나마나 해룡이가 틀림없었다.“이 노예야. 말 좀 해봐. 너 혹시 벙어리는 아니지?”“에이씨.”“에이씨? 언어순화 좀 시켜줘야겠군. 너 이리 따라와.”내가 끌려간 곳은 급식관 모퉁이였다. 이미 모여 있던 남자애들이 나를 가운데 놓고 돌아가며 한 대씩 때렸다. 나중엔 내 가방을 마구 밟았다. 나는 콩 벌레가 되었다.“헐, 작은 고추가 맵다더니?”그때 슬리퍼 끄는 소리가 가까워졌다.“담임이다! 토껴!”아이들이 삽시간에 흩어졌다. 찬 시멘트 바닥에 코피 몇 방울이 떨어졌다. 골이 띵 했다.“유빈아! 일어나라!”겨우 눈을 들었다.“나쁜 녀석들. 이제 그만 둘 때도 되었는데. 그렇게 말했는데 또.”나는 선생님을 따라 음악실로 들어갔다. 선생님은 말라빠진 코피를 물휴지로 닦아주었다. 돌처럼 굳은 내 손을 한참 녹이더니 북채를 꼭 쥐어주었다.“자, 마음껏 쳐라. 이 북이 죽이고 싶도록 미운 놈이라고 생각하면서.”둥, 둥둥, 두둥둥 북소리가 커졌다. 맘껏 두들기고 나니 눈물이 쏟아졌다. 북을 치며 울다 웃다가 소리도 질렀다.“나쁜 녀석들!”한참 후 선생님이 들어왔다.“유빈아, 북을 치면 정신 건강에 아주 좋단다.”“아, 네.”“국악반 악동들을 훈련시켜 많이 나아졌는데 아직 갈 길이 멀어. 너도 신고식을 치렀으니 이제 친구가 될 거야.”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네 북소리는 힘이 있어. 아주 소질이 있어 보여.”가슴이 막 뛰었다. 곧 선생님이 악보를 들고 왔다.“자, 여기 세모와 동그라미가 있지. 세모는 북 모서리를, 동그라미는 북 가운데를 울려 진동시키는 거야.”“네.”“첫날 네 북소리를 들었지. 네가 북하고 인연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갔어. 잘 참아내는 사람이 북도 끝까지 잘 치거든. 악동들도 북, 장구, 징을 두드리며 마음이 많이 열려가고 있어. 혹독하게 연습하며 애들이 성장하지. 해룡이 녀석 부모 문제로 잠깐 비뚤어지긴 했는데 맘은 여린 놈이지.”“.....”‘그래도 나쁜 녀석이에요.’라는 말이 내 입속에서만 맴돌았다.“악동들이 연주하면서 마음이 하나가 되더라. 목표를 세우고 함께 가다보면 어느새 아이들이 친구가 되지.”선생님 말에 얼었던 마음이 봄눈처럼 녹고 있었다.“집에서 북채만 가지고 와. 아버지께 한 개 만들어달라고 부탁드리지?”담임은 벌써 아버지가 공방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 내일부터 열심히 연습하자.”선생님과 헤어져 숲속을 걸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숲길은 그다지 춥지 않았다. 희한하게도 아이들한테 맞은 일도 이미 잊었다. 저녁을 먹으며 아빠를 보았다.“아빠, 저 북채 하나 만들어주세요.”아빠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와, 우리 유빈이도? 북 채 주문을 30개 받았는데. 이제 31개네?”“유빈아, 엄마 어릴 때 친한 친구가 여태 이곳에 살고 있더라. 그 아줌마가 북 채를 주문한 거야. 그 집 아들도 국악반이라던데.”‘누굴까?’그때 아빠가 긴 나무 조각을 내밀었다.“우리 유빈이 북채는 제일 단단한 박달나무가 어떨까?”“아빠, 이런 얼룩무늬는 싫어요. 깨끗한 걸로요!”“이 얼룩무늬는 착한 옹이야.”“옹이가 뭐예요?”아빠는 내일 뒷산에서 옹이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시골에 와 처음 맞는 주말이기 때문이다. 아빠는 일을 쉬고 엄마를 엄마가 좋아하는 절에 데리고 가기로 했다.숲속으로 난 낙엽 위로 엄마 휠체어를 천천히 밀어주었다. 햇살이 일렁이며 엄마 얼굴 위로 번져갔다. 엄마 얼굴이 환해졌다. 아빠도 싱글벙글 난리다. 아빠가 나무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유빈 학생, 이 혹 같은 거 보이지요? 이걸 톱으로 켜면 얼룩처럼 보이는 겁니다. 이게 뭘까요? 옹이라는 겁니다.”“선생님, 옹이는 왜 생길까요?”“에헴. 나뭇가지가 바람에 꺾이거나 사람들이 자르면 그 자리에 상처가 생겨요. 나무도 힘들 때는 사람처럼 눈물을 흘리거든요. 그 눈물을 삼키며 참고 노력하면 착한 옹이가 되죠. 나무와 한 몸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견디어내지 못하면 나무 살에서 떨어져 나와 죽은옹이가 되는 겁니다.”엄마가 유빈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우리 유빈이 옹이는 어떻게 생겼을까요?”나는 생각에 잠겼다.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아들, 나무에 옹이가 있듯 사람들의 가슴에 사람들 각자의 옹이가 있단다. 착한 옹이가 생기면 그만큼 넉넉한 마음을 가질 수 있지.”엄마의 옹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싸했다. 나와 해룡이의 가슴속 옹이는 어떤 모양일지 궁금했다. 그 후 북치는 일이 공부보다 더 재미있었다. 내가 늦게 시작했다는 생각에 다른 아이들보다 더 열심히 북을 쳤다. 아빠가 만들어준 옹이가 든 북채를 들면 마음이 넉넉해졌다. 악동들도 열심히 북을 쳤다. 해룡이가 한 번씩 내 손을 잡고 북 치는 걸 가르쳐주었다. 나는 말없이 따라했다. 천방지축 악동들이 야무지고 단단한 국악 악동들이 되어갔다.드디어 공연 날이 다가왔다. 무대에서 우리 악동들은 하나가 되었다. 연주가 끝난 후 모두가 땀이 질퍽했다. 사람들은 계속 앙코르를 외쳤다. 학부모 한 명과 담임이 무대 위로 나왔다. 담임이 말했다.“아버님 어머님들, 우리 귀여운 악동들을 믿고 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디어 하나로! 라는 우리의 꿈은 이루어졌습니다.”이번엔 학부모가 마이크를 받았다.“선생님, 우리 말썽꾸러기들을 지도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훌륭한 연주를 하도록 북채를 만들어준 분께도 감사드립니다.”떠나갈 듯 박수소리가 들렸다. 아! 무대 옆에서 엄마의 휠체어가 다가오고 있었다.“바로 제 고향친구 채 유빈 엄마를 소개합니다.”사람들이 모두 일어서서 환호했다.“유빈아, 너희 엄마하고 우리 엄마다!”아, 집에 왔던 그 아줌마였다. 해룡이가 속삭이며 내 손을 쥐었다. 땀으로 끈끈했지만 나는 그 손을 빼지 않았다. 엄마 눈에서 눈물이 반짝였다. 악동들이 북채를 두드리며 우우 환호했다. 눈을 감으니 기쁨에 찬 옹이들의 춤사위가 보이는 듯했다. 북소리에 맞추어 공연장에 모인 모두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덩더꿍 덩더꿍” “얼씨구 절씨구” 악동들과 온 동네가 한마음이 되었다. 북소리의 뜨거운 열기가 그치질 않았다. 차가운 겨울이 저만치 물러나 앉았다.<목포신인문학상 수상작> 기고글제3회 한우리문학상 등단으로 동화쓰기 시작해     <코나의 여름> <구다이 코돌이><버니입호주 원정대>등의 장편동화 출간과  현재 <캥거루소녀>출간을 앞두고 있슴.최근 청소년역사소설 <대장간소녀와 수상한 추격자들>(2021.2)의 속편 <동학소년과 녹두꽃> (2021.7)을 출간하였으며 시리즈로 계속 집필 중임.이마리 전자우편  leemalhya.yahoo@gmail.com으로 연락주세요.

  01/09/2021
  문학지평

'발그림'님의 멜빵바지 삽화 페북서 발췌차가 끼익 문 앞에 섰어. 엄마가 틀림없는 거야. 외할머니가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리는 게 보였거든. “어휴, 저렇게 밤낮으로 사들이는 옷을 언제 다 입힌다고!”엄마는 쇼핑봉투를 잔뜩 들었어. 뾰족구두가 엄마를 쓰러뜨릴 것만 같아.“다녀왔습니다. 흐흐, 세일 기간이라 어찌나 싼지 이것저것 사다 그만.”엄마는 실실 외할머니 눈치를 보았어. 리안이 소리치며 달려갔어.“엄마, 내 옷은?”딸과 손녀딸을 지켜보던 외할머니가 중얼거렸어. “쯧쯧. 옛날엔 이 할미가 네 어미 옷을 다 만들어 입혔는데.”외할머니가 딸, 마리의 멜빵이 이야기를 시작하셨어. 손녀딸 리안이 귀를 쫑긋 기울이네.  늦더위에 지쳤던 과꽃이랑 맨드라미가 보스락거리며 고개를 드네. 처마 밑의 빨간 감이 내려다보며 속삭이고, 뒤뜰에선 여린 갈대들이 노래하기 시작해. 아기 갈잎 하나가 마당을 건너 마리 엄마 옆에 사뿐 내려앉았어.“응. 밤이 깊었다고? 바느질 그만 하라고?”마리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 마친 바느질감을 들어 올렸어. 그걸 멀찌감치 들고 감상하는 눈치였어. 나는 몸이 떨렸지. 내가 누구냐고? 나는 마리 엄마가 밤새 만든 감색 멜빵바지야. 마리 아빠의 헌 양복바지를 잘라 태어난 꼬마 바지지. 마리 엄마가 말했어. 바지 날이 반듯한 게 마리 동화책 속 프랑스 꼬마병정 같다나. 난 내 모습을 내려다봤어. 가슴 위로는 네모난 양 모서리에 단추가 달려 있고, 등에서 양쪽 가슴으로 내려오는 멜빵이 두 개 있어. 그 양쪽 멜빵에 송충이처럼 송송 단추 구멍이 나 있지. 아, 그런 멜빵바지를 입어본 적이 없다고? 그렇담 한 번 상상해서 그림을 그려보렴. 마리 엄마는 허리를 펴며 일어섰어. 나를 대청 옷걸이에 걸고 쓰다듬으며 말했어. “내일 마리에게 입혀야지.”휴, 내가 맘에 드나봐. 노란 달빛이 대청마루를 성큼 디디니 귀뚜라미가 날개를 비비네. 찌르르 찌르르. 옆방에서 마리 아빠 코 고는 소리랑 합창하면서.하얀 달빛에 비친 내 모습에 맘이 설렜어. 벽에 걸린 다른 옷들이 한 마디씩 했거든.“깜놀 멜빵!”“오, 프랑스 병정 납시오.”“헌옷 싹싹 잘라 쓱쓱 박아 나온 요술바지!”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잠을 청했어. 내일 마리를 빨리 만나고 싶어. 그러다 곧 단잠에 빠졌나봐. 얼마를 지났을까 아침햇살에 눈이 부셨어. 고소한 음식냄새가 풍겨오네. 대청마루가 통통거리고, 까르르 웃음소리는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듯했어.마리 엄마가 다가오더니 나를 옷걸이에서 내렸어. 바로 내 앞으로 소녀가 달려왔어. 앗, 마리다. 내 가슴이 콩콩 뛰었어. 까만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귀여운 아이야. 마리 엄마가 말했어.“마리야, 이 바지는 돈 주고도 못산단다. 세상에 딱 하나뿐인 바지야.”“우리 엄만 ‘세상에 하나뿐인’을 너무 좋아해.”종알대는 소리까지도 귀엽더라니까. “와, 우리 마리, 너무 멋지다!”엄마는 마리에게 나를 입힌 후, 마리를 앞뒤로 돌려세우며 감탄했어. “우리 마리는 큰딸이라 속이 꽉 찼어요.”엄마는 사람들에게 마리 칭찬을 하곤 했어. 마리는 엄마가 돈을 아껴 쓰는 것을 알았어. 마리에게 새 옷을 사줄 돈이 없다는 것도 물론. 엄마는 매달 할머니 댁에 쌀이랑 고기를 사보내야 했지. 사람들은 엄마표 마리 옷을 보며 칭찬을 했어. 언젠가부터 마리는 점점 사람들 칭찬이 진짜라는 걸 알게 되었지. 그래도 마리는 친구들과 같은 바지를 입어보고 싶었어. 친구들은 모두 코르덴 고무줄 바지를 입고 다녔어. 허리에 고무줄이 들어간 풍덩한 바지였지. 시장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다고 했어.“엄마, 나도 애들처럼 고무줄바지 한 번 입어봤으면.”마리가 애원해도 엄마는 모른 척했어.“공장에서 찍어낸 옷보다 멜빵이가 얼마나 멋진데.”사실은 화장실 갈 때가 죽음이었어. 학교 전체에 여자 화장실이 일곱 개 밖에 안 되었거든. 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곤 했지. 다른 애들은 그냥 고무줄바지만 쑥 내리면 되었지. 그러나 멜빵인 단추가 말썽이었어. 화장실에 들어간 후 단추를 푸느라 시간이 걸렸어. 그만 실수한 적도 있었지. 일을 본 후 다시 단추를 채워야하니 더 애가 탔어. 꼭 그때면 수업시작 종이 울렸어. 아이들이 쾅쾅 화장실문을 두드렸어. “빨리 나와. 마리 죽었니?”그러니 고무줄바지를 입는 게 마리의 소원이었어. 그런데 엄마는……. 드디어 시장으로 고무줄 바지를 구경 가기로 한 날이 다가왔어. 마리와 짝꿍 순희는 신이 났어. 시장이라는 말에 나도 가슴이 설레었어. 시장엔 없는 게 없다고 했거든. 비릿한 생선가게 앞을 지났어. 커다란 생선 눈알이 우릴 보고 눈을 끔벅거렸어. 나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만 같았어. 그 옆은 돼지머리 파는 곳이야. 돼지 콧구멍에 돈도 끼워져 있어. “널 잡아먹을 테야.”라며 쫓아오는 거야. 우리는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지.한참 가니 늦여름 옥수수가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처럼 쌓여있네. 방앗간에선 막 찐 빨간 팥떡을 엎고 있었어. 김이 몽실몽실 오르자 우리는 꼴깍 침을 삼켰어. 얼씨구절씨구 춤을 추는 호박엿장수를 지나 달렸어.드디어 고무줄 코르덴바지가 산더미처럼 쌓인 옷집이 나왔어. 마리는 넋을 놓고 고무줄바지만 훔쳐보는 거야. 순희가 입은 빨간 바지들이 잔뜩 누워 있었거든. 나는 풀이 죽고 말았어. 옷집 아줌마가 다가오더니 나를 만지작거렸어. 그리고 마리에게 말했어. “너 이딴 멜빵바지 말고, 유행하는 빨간 고무줄바지 입고 싶지? 그러면 엄마를 데려와.”난 화가 나 씩씩거렸어. 그런데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어. 마리가 돌아서서 “가자.”라고 말했어. 우리는 흙냄새 풍기는 감자가게를 지났어. 빨간 감이랑 사과가 수북한 과일가게도 거쳤어. 그리고 말없이 시장을 빠져나왔어. 갑자기 마리가 순희에게 소리쳤어. 학교까지 달리기 내기를 하자는 거야. 이긴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라면서. 순희는 고개를 끄덕였어. 마리는 순희가 좋아하는 짝꿍이니까.마리와 순희가 달리기 시작했어. 논둑을 지나 좁은 길을 휙휙 달렸어. 다리를 지나고 농협창고를 돌아 드디어 학교에 닿았어. 마리가 소리쳤어.“내가 이겼다!”화장실로 들어오라며 순희에게 고갯짓을 했어. “빨리 들어와!”나는 가슴이 떨렸어. 마리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마리가 들어가자 순희도 따라 들어왔어. 마리는 화장실 안에서 문을 잠갔어. 그리고 내 몸의 단추를 풀기 시작하는 거야. 나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어. 순희 눈도 왕방울이 되었어. 마리가 다시 명령했어.“약속이니까, 너도 바지 벗어!”순희는 벌벌 떨며 빨간 고무줄바지에 손을 넣었어.“자, 빨리 벗어. 약속은 약속대로.”마리는 어느새 벗은 나를 순희에게 건네주었어. 나는 눈을 꼭 감아버렸어. 주인이 바뀌는 순간이었어. 마리가 다시 달래듯 말했어.“자, 네가 내 멜빵이를, 나는 네 고무줄바지를 입는다!”똥 냄새가 지독했어.“자, 숨 쉬지 마. 빨리 입고 나가자.”그때서야 울먹이던 순희 얼굴이 펴졌어. “순희야. 내일 하루만 바꿔 입는 거야. 너도 내 멜빵이를 입어보고 싶었지?”빨간 고무줄바지를 입은 마리는 신이 났어. 허리가 큰 줄도 모르고 손을 넣어 여기저기 돌려봤어. 너무 편하다며 중얼거렸어. 그런데 순희는 바지를 제대로 못 입는 거야. 나는 속으로 안달이 났어. 휴, 마리가 몇 번이나 도와준 후 겨우 내 몸의 단추를 채워주었어.“휴! 그런데 엄마한테 들키면 어쩌지?”“바보. 집에 들어가면 네 방으로 직행. 치마로 갈아입는 거야. 내일은 소풍날, 멜빵이를 입고 와. 소풍가방이 넓적하니 잘 가리고.”화장실에서 나온 우리는 맑은 공기를 흠뻑 마셨어.  그날 그럭저럭 소풍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이었어. 순희가 갑자기 멜빵을 당기며 울상이었어. 김밥을 너무 많이 먹었나봐. 설사가 나올 것 같다고 발을 동동 굴렀어. 나는 땅이 꺼지는 것만 같았어. 내 몸이 누런 똥으로 변신하는 게 어른거렸어. 마리가 사정했어.“순희야, 조금만 참아. 제발.”“흐흑. 폭발 일보직전인데.”“순희야. 여기서 똥 싸면 아이들과 멀어져. 우린 숲에서 길을 잃고 말아.”드디어 학교가 보였어. 마리와 순희는 온 힘을 다해 화장실로 달리기 시작했어. 화장실에서 순희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어. 마리가 문을 두드렸어.“순희야, 왜 그래?”“바지 단추가 안 풀려서 그만. 흑흑”마리가 화장실로 들어갔어. 마리는 내 몸의 단추를 풀고 나를 벗겼어. 그리고 순희에게 말했어.“내가 바지를 빨아올게. 그동안 넌 속옷을 벗어서 버리는 거다.”마리는 나를 움켜쥐고 수돗가로 달려갔어. 나는 삽시간에 물을 왕창 뒤집어썼어.“어휴. 똥 냄새.”마리가 나를 탈탈 털었어. 가을 햇살 속에 누런 물방울이 떠다녔어. 나는 숨을 죽였어. 물을 터느라 마리는 정신이 없었나봐. “앗!” 벗겨지는 고무줄 바지를 주워 올리며 마리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어. 허겁지겁 주위를 살피네. “맴 맴.” 매미소리만 운동장을 떼며가라 울어댔어. 마리와 순희는 겨우 바지를 바꿔 입었어. 나는 다시 주인을 찾아 돌아간 거야. 마리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내 몸을 쓰다듬으며 말했어.“나는야, 내 게 좋아!”나는 너무 좋아 울고 싶었어. 순희도 자기 고무줄바지에 손을 넣고 싱글벙글했어.“나도야!”쨍한 해님이 내 손을 꼭 쥐었어. 축축했던 몸이 어느새 가을 고사리처럼 고실거리네. 아, 하늘까지 땅 끝까지 달리고 싶어. 내 마음을 읽은 듯 마리가 소리쳤어. “우리 집까지 달리기 내기할래?”“좋아, 이번엔 내가 이길 거야!”순희가 어느새 앞장서 달리네. 살랑거리는 갈바람 속으로 바지 두 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가네. 감색 멜빵이와 빨간 고무줄바지가. -코로나로 우울한 즈음 이 동화로 웃어보세요--2021 부문협 우수작품선집 기고 글- 제3회 한우리문학상 등단으로 동화쓰기 시작해 <코나의 여름> <구다이 코돌이><버니입호주 원정대>등의 장편동화 출간과  현재 <캥거루소녀>출간을 앞두고 있슴.최근 청소년역사소설 <대장간소녀와 수상한 추격자들>(2021.2)의 속편 <동학소년과 녹두꽃>(2021.7)을 출간하였으며 시리즈로 계속 집필 중임.이마리 전자우편  leemalhya.yahoo@gmail.com으로 연락주세요.

  18/08/2021
  문학지평

 화장 하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을 뚫고 나온 칼날 같은 빛줄기에 눈이 벨 것 같았다. 새벽 어스름이 벗겨지고 태양이 떠오른 것이었다. 나는 반쯤 눈을 감았다. 꼬랑지머리가 벌떡 일어선 건 그때였다. 날카로운 빛이 그에게로 확 쏠렸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나는 한 동안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여자에게 신경을 뺏긴 탓이었을까. 강한 빛을 받은 꼬랑지머리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꼬랑지머리의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립스틱을 바르던 여자가 동작을 멈추고 그를 향해 콤팩트를 집어던졌다. 꼬랑지머리는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자와 꼬랑지머리가 한동안 옥신각신 다투기 시작했다. 지독한 슬랭을 쏟아놓는 그의 발음을 나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의 표정조차 안 보이는 상태에서 여자가 지껄이는 말만 듣고서는 그들의 관계를 알 길이 막막했다.  도대체 꼬랑지머리는 여자의 누구인가? 재형과 나처럼 딱 1개월을 동거한 ‘엑스(x)’? 벌떡 일어나 물어보고 싶은 심정을 억눌렀다.  “후처의 출생에 웃을 땐 벌건 잇몸이 한 뼘이나 드러나는…….” 재형의 어머니 목소리에선 독기마저 느껴졌었다. 그녀가 우리의 극적 결말을 내리던 날을 떠올리다 나도 모르게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고 말았다. 경주에서 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러 올라온 그녀에게 나는 고스란히 낭패를 당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불치병에 가까운 그녀의 독특한 기질을, 아들은 알고 있었겠지만 나는 생판 모르고 있었다.  잠시 후, 슬그머니 일어선 꼬랑지머리가 원시부족이 춤을 추는 것처럼 건들건들, 머리를 이상한 각도로 젖힌 채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나는 그가 다음 역에서 하차하리라 직감했다. 기차는 정차하려고 속도를 줄였다. 대놓고 꼬랑지머리의 면전에서 무기수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질퍽하게 화장을 고치는…… 둘의 관계가 점점 더 궁금해졌다. 하긴 이 세상에 하지 못할 사랑은 없는 법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 있을 뿐.  꼬랑지머리가 떠난 것을 확인한 여자는 머리를 숙이고 콤팩트를 찾기 시작했다. 한 파트는 여자의 좌석 밑에 한 파트는 꼬랑지머리가 앉았던 좌석 밑에 뒹굴고 있었다. 콤팩트를 집어든 여자가 뚜껑과 몸체를 끼워 맞춰보려고 애를 썼다. 포기한 여자는 주술에 걸린 듯 갈증과도 같은 집념으로 물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는 나르키소스처럼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 재형이 깨어나 몸을 스트레칭 하느라 그의 손이 내 옆구리의 경락을 건드렸다. 흠칫 놀라는 순간 기차가 네 번째 터널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가 질문을 쏟으며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렸다.  “감옥의 러브레터, 아니 먼저 알렉산더 그린이란 사형집행인부터 확인해야겠는데, 칼이라고 했어 도끼라고 했어? 대체 호주 사람들 발음이 왜 이래.” 질문을 많이 하는 것은 그의 직업병인 모양이다.  “완전 술 중독자였데. 감옥의 담벼락에 접목한 코티지에서 살았는데, 술독에 빠져, 수천 명의 관중이 교수형 장면을 즐기려고 모여 있는데, 목사나 신부가 사형수에게 마지막 명복을 빌기도 전에 밧줄을 내려버리곤 했다지. 밧줄을 내릴 순간이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늦는 바람에 사형수의 목이 제대로 안 잘리면, 술에 떡이 된 몸으로 비칠비칠 달려 내려가 칼로 사형수의 목을 단칼에 잘랐다고 해. 사무라이처럼.” 내 목을 내가 자르는 액션을 보여주었다.  “알렉산더란 사내가 셰익스피어 비극에나 등장하는 인물 같지?” 나는 덧붙였다. “사형집행인의 부주의로 교수대에서 살아나는 행운을 얻었다면 살려줘야 하는 것 아냐?” 재형이 기자답게 자신이 원하는 질문만 푸고 있다.  “그건 나도 몰라. 해부용으로 팔려가다 살아난 사형수나, 무덤에서 살아난 사형수 이야기는 들었지만, 사형집행인 부주의로 살아난 사형수에 관련해선 나도 아는 게 없네 뭐.” 나는 내가 아는 만큼 설명해 주려고 애를 썼다.  “호주문학의 아버지란 칭호로 불리는 헨리 로슨은 왜 세 번씩이나 수감 되었지?” 재형이 머리를 갸웃거린다.    “그야 그의 부인이 끌어다 넣은 것이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술에 미친 시인과 사형집행인이라……, 뭔가 상통하는 게 있는 것 같다. 그렇지?” 나는 한 번 웃겨보겠다고 기껏 농담을 뱉었지만, 그것도 농담이냐는 식으로 그는 웃지 않는다. 하긴 그는 원래 잘 웃지 않는 남자였다. 바보와 시인의 차이는 종이 한 장밖에 안 된다는 말을 접고 대신 조금 고상한 말을 골라 덧붙였다.  “맑은 정신으론 독자의 영혼을 송두리째 꿈틀거리게 할 정도의 시를 쓸 수 없었나 보지 뭐, 헨리 로슨은.”  “러브레트 말인데, 직접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가 계속해서 내 말은 씹어버리고 자판을 두드리며 자기 질문만 한다.  “오리지널 러브레터는, 지금은 아트스쿨이 된 그곳 감옥의 도서관에 전시되어 있어. 오늘은 토요일이어서 개관을 하지 않았고.” 나도 기자가 묻는 질문에만 대답하기로 작심했다.  한 동안 이야기는 별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야기 할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옛 감옥에서 굶주림을 견디다 죽어간 죄수들의 빈 위장에 감염된 것처럼 허기가 몰려왔다.  “래밍턴이라고 들어봤어?” 내가 재형에게 질문했다.  “응.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안톤 쉬거가 사용하던 산탄총이잖아.” 나는 백팩에서 종이봉투 속 래밍턴을 꺼내 재형에게 한 개를 한 개는 입에 물었다. “말하자면 이게 호주전통 케이크야, 래밍턴. 조리법을 발명한 사람의 신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크하하하”그가 웃었다. 드디어 그를 웃겼다. 그가 하도 재미있어 하는 바람에 나는  레밍턴과 래밍턴에 대해 언급하지 못했다.  재형은 래밍턴을 우적우적 씹으며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기차가 일곱 개의 터널을 관통하기 전에 ‘감옥의 사랑’에 대한 기사를 끝낼 기세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아침에 일어난 사건을 생각한다. 여자는 무사할까? 기차가 몸을 흔들며 다섯 번째 터널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나 또한 일곱 개의 터널을 관통하기 전에 아침에 보았던 사건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다. * 기차가 막 역에 정차했을 때 망막에 사물과 사람들이 헛돌아 보이기 시작했다. 햇빛을 맞받으며 출구 쪽으로 꼬랑지 머리가 나가고 몇 분 후의 일이었다. 그가 객차와 플랫폼 사이에 떨어지는 것을 내 눈이 보았다. 강렬한 아침 태양빛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반쯤 눈을 감은 상태로, 그 광경을 보고 귀신을 본 것처럼 놀랐다. 잠시 시간이 정지하는 것 같았다. 자동으로 놀라는 감정을 막을 수 없었다. 벌떡 일어난 나는 밖으로 뛰어나가려고 했지만 밀고 들어오는 승객들 때문에 한 발도 떼지 못하고 꼼짝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꼬랑지머리가 휘청하더니 기차와 플랫폼 사이에 푹 꼬꾸라졌다고 믿었다. 나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손바닥만 세차게 문질러댔다.  기차가 출발 했다. 꼬랑지머리가 다쳤다면 기차가 정상으로 출발하진 못할 터였다. 그때서야 나는 안도의 숨을 들이켰다. 헛것을 보았나? 나는 내가 이상했다. 설마하니 내가 꼬랑지머리가 기차에 빠지길 바라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내가 잘 못 본 것이든, 혹은 꼬랑지머리가 빠르게 중심을 잡고 플랫폼으로 뛰어올랐든, 잘 된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여자를 떠난 것은 정말 잘 한 일이었다. 둘이 마주 앉아 있어봤자 계속 사랑싸움만 하게 될 것 같았다. 기차는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102살 중환자라고요!” 빽빽한 승객들의 밀림에서 한 여성의 외침이 들렸다.  “누구도 이 여인을 건드려선 안 돼! 감옥에 면회 가는 몸이야.” 꼬랑지머리였다. 나는 청신경을 곤두세웠다. 조금 전 사투리를 뒤섞어 지껄이던 그 자 특유의 발음이 틀림없었다. 믿을 수 없었다. 그가 객실에…… 한 번 떠났으면 됐지, 왜 언제 어떻게 무엇 때문에 돌아 왔는가.  “누구와도 함께 앉을 수 없어. 누나는…… 종신형의 애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꼬랑지가 하이에나처럼 소리쳤다. 누나? 그럼 그렇지,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세상엔 누나라고 부르는 애인도 흔하디흔하다.  “애인? 그 알량한 몸이 소중하다면 출구의 대기구역, 아니 객차와 객차를 연결하는 대차공간에라도 나가 무기수인지 뭔지를 오매불망 그리워하면 되잖아!” 여자 승객이 쌀쌀맞게 소리쳤다.  “몇 번을 말해야 해. 안된다고 했어.” 꼬랑지머리가 딩고처럼 으르렁댔다.  사람들이 일어선 것 그때였다. 검지를 곧추세워 흔들어대며 여자와 꼬랑지를 향해 메뚜기처럼 떼를 지어 몰려갔다. 덤빌 테면 덤비라는 식으로 앉아 있는 여자의 얼굴이 승객들의 다리 사이로 삐뚤삐뚤 보였다.  여자는 꼼짝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서, 거울만 깨져라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자에게 그들의 존재는 그리 중요하게 보이는 것 같지 않았다. 어떤 특별한 목표에 정신이 꽂혀버려, 외부적인 모든 일들이 상대적으로 그 힘을 잃어버린 의식상태라고나 할까.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뱉어냈다.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날마다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에 물든 관성 탓이야. 스스로를 달랬지만 한 번 떠들린 패닉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저 여자와 남자를 끌어내야 한다.”누군가 날카롭게 외쳤다. 몇몇 승객이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여자와 꼬랑지머리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정말 여자를 밖으로 끌어내릴까. 멀리 희미하게 다음 정차할 역의 입간판이 보였다. 하차하려는 승객들은 가방을 들고 힘겹게 출구로 빠져나가면서도 여자를 흘끔거리는 것만은 놓치지 않았다.  “경찰이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경찰이 얼굴을 내밀자 순식간에 객차의 분위기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빼빼마른 승객이 자신이 신고를 했다며 밀림을 헤치고 나가 경찰에게 접근했다. 그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그 동안의 일을 설명했다. 남자와 여자 경찰은 빼빼마른 승객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여자와 꼬랑지머리 앞에 버티고 섰다. 그때서야 여자와 꼬랑지머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빠른 동작으로 여자와 꼬랑지머리가 앉았던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금 전 102살 환자에게 자리를 양보한 승객까지 포함해서 모두 다섯 명이었다.  꼬랑지머리와 여자를 앞세우고 출구로 나가는 경찰의 뒷모습을 승객들은 복잡한 눈길로 지켜보았다. 경찰은 다음 역에서 꼬랑지머리와 여자를 하차시킬 모양이었다. 오래 되어 낡고 허름한 기차는 심하게 몸체를 덜컹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기차의 엔진 소리가 몸서리치는 금속성을 질렀다. 바퀴의 마찰음이 고막을 찢으며 급정거 했다. 불시착이었다. 금속이 타는 냄새가 진동하고 연기가 솟구쳤다. 앉아 있던 승객들이 파도처럼 일어섰다.  꼬랑지머리의 절규가 들렸다. 사람이 다쳤으니 가만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라는 경찰의 경고가 승객들을 제압했다. 기차 아래 여자가 떨어졌다고 누군가 입가에 손을 대고 속삭였다. 어떻게? 굳게 문을 닫고 달리는 기차에서 어떻게? 그렇다면 차량과 차량의 연결 고리 사이의 아득한 틈새에? 잠시 후 하늘 저 편에서 헬리콥터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나는 숨을 죽이고 째깍째깍 시간의 흐름을 가늠했다. 플랫폼에 내려앉은 헬리콥터의 날개 회전하는 소리가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구조대가 여자를 들것에 태우는 광경을 손바닥으로 햇볕을 가리고 쳐다보았다. 승객들도 손가락을 바퀴벌레 다리처럼 차창에 붙이고 쳐다보고 있었다. 하늘색 담요를 덮고 누워 있는 여자에게 인공호흡을 시도하진 않았다. 생명에 지장이 없거나, 또는 아예 숨을 멈췄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다. 밀폐된 차창으로 바라볼 순 있었지만, 정확한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었다.  곧이어 헬리콥터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동시에 기차도 출발했다. 낡은 기차의 엔진 소리는 한 동안 헬리콥터 날개소리와 뒤섞였다. 기차는 시드니를 향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자가 떠난 객차의 ‘조용한 칸’은 죽음처럼 고즈넉했다. 나는 충격 받은 감각기관들을 추스르며 잠시 완벽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아담을 만나러 가던 이브가 떠난 객차에서 나는 한자도 읽을 수 없었다. (끝)테리사 리 소설가 15회 재외동포 문학상 대상수상11회 민초문학상 대상수상소설집 <비단뱀 쿠니야의 비밀> <어제 오늘 내일>  

  05/08/2021
  문학지평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형과 나는 고개를 숙이고 일층 객실로 들어가는 층계를 내러가고 있었다. 둘은 빈자리를 찾기 위해 민첩하게 움직였다. 나는 재형과 멀찌감치 떨어져 앉게 된 것에 안도했다. 전날 밤을 꼬박 뜬눈으로 보낸 탓으로 눈을 좀 붙여볼 참이었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 두 자리 떨어진 마주보는 대각선에 여자가 보였다. 여자의 통화하는 목소리는 끈적끈적한 허스키에 숨소리가 거칠게 갈라졌다. 여자의 머리 위에서는 Quiet Carriage란 붉은 글자가 꿈틀 꿈틀 살아나서 금방이라도 여자를 덮칠 것 같았다. 한 쌍의 전갈 같은 두 단어가 여자의 정수리에 꼬리를 푹 찔러 넣을 것처럼 보였다. 정작 여자는 통화에 매달리느라 전갈의 위험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관중석엔 아랑곳 하지 않고, 혼자 차지한 삼인용의 좌석을 연극무대 삼아, 리허설을 하는 여배우 같았다. 관객들 또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려는 시도는 고사하고, 한시바삐 공연이 시작되길 초조하게 기다리는 착한 관람객처럼 안달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목을 뒤로 빼서 재형을 흘깃 바라보았다. 이어폰을 꽂고 내가 출력해 준 자료를 읽고 있는 백인들 속 그의 표정이 불안해 보였다. 재형을 쳐다보느라 허리를 너무 길게 빼고 말았다. 창가에 앉은 비대한 남자의 살찐 손이 꿈틀하며 내 허리를 건드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리며 진저리를 쳤다. 그 순간 내 경락들이 축축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내가 옮겨 갈 수 있는 빈자라곤 여자의 옆 좌석 두 자리와 꼬랑지머리의 옆 한 자리 뿐이었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여자와 마주 앉아 있는 꼬랑지머리를 여자의 일행으로 간주해 버린 상태였다.  여자의 목소리는 코맹맹이로 바뀌어 갔다.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아도 통화내용은 내 귀를 후비며 파고들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잠깐 떴다가 또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하며 통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여자의 붉은 볼을 힐끔대며 백팩에서 달링허스트 감옥의 자료를 꺼냈다. 스테이플러가 안 된 자료는 뒤섞여 있었다. 차례를 무시하고 한 장을 뽑아들고 읽기 시작했다. ‘감옥의 채플 룸…… 하층 바닥에선 남자 죄수들이, 하현달 꼴의 편편하게 생긴 상층 갤러리에선 여자 죄수들이 예배를 보았다. 남자 죄수와 여자 죄수들 사이는 소통이 금지되어 있었고, 간수들이 엄하게 보초를 썼다. 미지의 남자 죄수가 던진 봉인된 러브 레터는 오랜 세월 쐐기꼴로 서까래 사이에서 끼어서……’  여자의 목소리는 내가 읽는 단어와 단어를 분절시켰다. 통화는 좀체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백팩을 뒤적거려 이어폰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한 손으로 왼쪽 귀를 막고 자료를 계속 읽으려 애썼다. 하지만 여자의 소리는 내 고막 안으로 울림을 만들어 뇌를 자극하며 독침처럼 찔러댔다. 나는 소리기피증 환자처럼 신경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달링, 내가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지? 편지 받았어? 아직……? 꿀과 체리잼은? 것도 아직? 제발 믿어줘……”  여자의 목소리는 애원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다시 자료에 집중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대표적인 부시 발라드 시인이자 단편소설가인 헨리 로슨은 세 번이나 달링허스트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가 투옥될 때마다 감옥 안에서는 동요가 일어났다. 수용자들에게 빈약한 음식을 공급하는 것을 놓고 발라드를 써서 빈정댔다. 달링허스트 감옥을 스타빈허스트 감옥이라 빗댄 시들이었다.…….’ 여자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간절해졌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통화는 그칠 줄 몰랐고, 나는 읽기를 포기하고 자료를 백팩에 쑤셔 넣었다. 도무지 차분해 질 수 없었다.  “달링, 기차가 미치게 느려. 기다려 달링, 조금만, 조금만 참으면 돼. 잠깐 후면 내 얼굴을 보게 될 거야. 이상한 꿈……? 다시 말해봐! 죽음……? 무슨 소리야, 나는 죽지 않아, 그리고 달링을 만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여자의 통화내용은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들어도 현실감을 느끼기 힘들었다. 그때 한 승객이 여자와 꼬랑지머리가 앉은 자리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작은 키의 빼빼마른 남자는 빈약한 가슴을 앞으로 쑥 내밀고 고개를 흔들며 비틀비틀 걸어 나아갔다.  “조용히 합시다. 여긴 조용한 칸입니다. 당신을 제외한 승객들은 조용하잖아요.” 승객의 목소리는 조금 높은 편이었다.  그때 벌떡 일어난 인물은 꼬랑지머리였다. 나는 뒤돌아선 그를 보며 아하, 한숨과 탄성을 동시에 터뜨렸다. 그가 여자라고 믿고 있었던 내 무지함에 대한 실망이 컸다. 꼬랑지머리가 키 큰 사내였다니, 내 안에서 쉬익, 김이 빠져나갔다. 누구를 빼닮은 것 같은데 누군지는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꺼져, 네가 뭘 알기나 해?” 꼬랑지머리가 승객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이곳은 조용히 해야 하는 거야, 어찌되었든.” 승객이 맞받았다.  꼬랑지머리가 폴로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이자 분위기가 살벌하게 느껴졌다. 그의 육중한 팔 근육이 울퉁불퉁 움직였다. 그러한 상황에도 여자는 꼼짝없이 앉아서 통화에만 몰입했다. 한참 후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여자는 통화상태인 전화기를 삼인용 좌석 위에 살짝 던졌다. 그리고 꼬랑지머리를 밀어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사나운 눈길이었다.  “퍽큐! 꺼지지 못해?” 소리치며 승객의 가슴을 힘껏 밀었다. 승객이 뒤로 넘어지면서 투박한 좌석의 팔걸이에 부딪쳤다. 승객은 끙, 신음을 토하며 일어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벌벌 떨었다. 그의 코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나는 그가 여자를 향해 주먹을 날릴 순간을 기다리며 잠시 숨을 멈췄다.  꼬랑지머리는 다리 하나를 팔걸이에 걸치고 앉아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의 파란 안구가 차창 밖을 탐색하며, 으스스한 미소를 흘렸다. 승객은 코피를 닦으며 머리를 심하게 흔들기만 할뿐 대항할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기대가 빗나간 것이 크게 실망스러웠다. 도대체 저 꼬랑지머리는 누구며 또 여자랑은 무슨 관계인가?  그처럼 소란스러웠음에도 승객들은 꼼짝 않고 스마트폰에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몇몇 승객이 가자미눈으로 실내를 힐끔대거나 입술을 달싹거리긴 했지만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겁쟁이들! 그들, 호주인의 기질을 나는 얼마간 알고 있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났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승객은 개처럼 슬며시 꼬리를 내리고 손으로 코를 틀어막고 자리로 돌아갔다. 소란은 막을 내렸다. 승객의 꽁무니를 따라가던 내 동공이 재형의 동공과 마주쳤다. 나는 그때까지도 승객이 재형과 동석인줄 모르고 있었다.  여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통화를 이어갔다. 상스러운 욕설을 여자의 달링은 모두 청감했으리라. 허나, 기적처럼 일어난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란? 사랑에 빠진다는 폭발적인 환상엔, 둘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장벽도 무화시켜버릴 악마적 힘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자 또한 전염병 중에서도 최악의 전염병인 사랑의 전염병에 감염되어 있었다.  * 재형이 호주에 도착한 날, 첫 마디가 호주의 의적 ‘네드 켈리’를 조사하러 간다면서 안내를 부탁했다. 나는 쉽게 답을 내리지 못했다. 뉴캐슬 도매스틱 공항의 커피숍에 앉아 핸드백을 만지작거리며 뜸을 들였다. “시드니의 달링허스트 감옥을 안내 해 줄게.” 그가 학보사 기자시절 더러더러 시를 학보에 발표했던 일과 시인 헨리 로슨이 한 때 수감되었던 감옥을 머릿속에서 합성하며 설득했다. “감옥의 아트, 감옥의 아트란 테마도 좋지!” 나는 재형이 혼자 멜븐에 가서 네드 켈리의 ‘아이론 헬멧’을 관람하고, 희대의 예술이라고 감탄하는 표정을 상상을 하며 속으로 웃었다.  나는 재형과 동행하고 싶지 않았다. 나란히 비행기에 탑승해야 하고 같은 호텔에 묵어야 하는 시간을 피하고 싶었다.  “1942년 일본 잠수함이 이 도시를 침공했거든. 당시의 기록을 새로운 버전으로 업데이트하는 3D 다큐멘터리 프로젝트팀에 합류한 사정이라 시간이 안 될 것 같아.”  자연스럽게 둘의 대화는 일본으로 점화되었다. 천황을 향한 일본인의 광기어린 충성심과 일본이 잠수함으로 호주를 침공했던 불굴의 일본 정신에 대해서…… 둘은 제법 거창한 담론을 벌였다. 그럼 그들의 미친 정신에 희생당한 우리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생목숨과 영혼은? 하다 보니 논쟁이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까지 이어졌다. 재형과 제법 거친 설전을 벌여보았지만 결론이랄 것도 없이 대화가 중단되고 말았다.  재형이 내 사정을 이해한다고 했을 때, 나는 물고 있던 숨을 토했다. 지난한 기억의 노예에 불과한, 옛날 박물관을 돌아보는 것 같은 성적 긴장감 없는 남자에게 수형되어, 형벌노역을 하고 싶지 않거든, 하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전에 그토록 매력적이던 재형이 지금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의 감정이 맞고 그때의 감정이 틀렸거나, 그때의 감정이 맞고 지금이 틀렸거나……. 그가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 그를 만나면서 깨닫게 된 감정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잠들어 있는 재형의 옷을 한 번 훑어본다. 아내가 있는 남자의 옷은 어딘지 모르게 섬유의 결이 안정되어 보인다. 선입견일지도 모른다. 나는 고개를 뒤로 밀어서 사라져가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본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란 이름을 가진 꽃잎들이 부르르 진저리를 치고 있다. 바람이 분다. 이렇게, 이렇게 몸으로 보여줄 수는 있어, 하지만 사랑을 설명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세 가지 색의 꽃잎이 동시에 몸을 흔든다.  기차가 네 번째 터널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나는 몇 명의 남자와 연애를 해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안과 백인 또 아프리카인까지. 나는 곧 그들이 나의 외로움을 막기 위한 방패역할임을 알아채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 내 양심을 알고 있을 바에야, 누구도 나를 위해 희생시키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 뿐이었다.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번번이 상대를 향한 내 배반의 점괘가 먼저 떨어졌다. 문득 나는 징그럽게 인간적으로 변해버렸다.  * 오늘 아침, 마치 누군가 음향기기의 스위치를 꺼버린 것 같았다. 끈질기게 이어지던 여자의 통화음이 멎은 것이었다. 드디어 객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승객들의 표정을 바삐 훑었다. 더러는 표정을 노출하고 더러는 음흉하게 표정관리를 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몇 분 후, 여자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여자의 눈에서 검은 마스카라가 녹아내리는 것처럼 흘렀다. 여자가 몸을 들썩일 때마다 산호조개껍질 같은 그녀의 귓바퀴에서 물고기 모양의 귀걸이가 잘랑거렸다. 나는 여자가 살아 있는 물고기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다시 객실의 정적이 깨져버렸고, 여자의 울음이 그녀의 감정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되어 온 객실에 흘러넘쳤다.  한 동안 울던 여자가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여자는 플랩백에서 화장품을 꺼내기 시작했다. 삼인용 좌석 위에 화장품 용기와 도구들을 가지런히 줄지어 늘어놓고 콤팩트의 뚜껑을 열었다. 나는 화장하는 여자를 응시했다. 순간 묘한 수치심이 내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왜 자꾸만 내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나는 정말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 부끄러웠다. 물론 내가 살아가면서 그와 비슷한 감정에 빠져보았던 일은 그 일 외에도 한두 번이 아니었을 테지만.  마스카라가 번진 여자의 눈은 검은 우물 같았다. 남자들의 눈에 여자가 아름답게 보일까, 나는 자신 할 수 없었다. 파란 눈, 목소리, 옷차림, 긴 머리와 짧은 치마 그리고 짙은 화장은 삼십대로 보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나는 사십대란 숫자에 내기를 걸었다. 아무리 잘 가꾸어도 피부의 탄력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는 내 탐구심을 신뢰했다.  여자가 콤팩트를 천장과 수평으로 쳐들었다. 한 장, 두 장, 세 장의 티슈를 꺼내 눈가의 검은 마스카라를 세 번에 나누어 닦아냈다. 다시 말아 올린 여자의 속눈썹이 송충이처럼 생동감 있게 살아났다. 분을 토닥이고, 삼각형 구도로 볼터치를 살리고, 가는 붓으로 입술의 선을 긋고 그 위에 립스틱을 바른 후, 아래위로 쫀득하게 빨아먹었다. 그리고 골고루 향수를 뿌린 후 긴 금발 머리를 수십 번 빗질했다. 포도주색 매니큐어가 발린 손가락을 바들바들 떨어가며 여자는 계속 화장에 공을 들였다. 테리사 리 소설가 15회 재외동포 문학상 수상11회 민초문학상 수상소설집 <비단뱀 쿠니야의 비밀> <어제 오늘 내일>

  21/07/2021
  문학지평

객차에 올라타는 재형의 뒷모습을 보았다. 기차가 출발하려고 했다. 나는 급히 전화통화를 끊고 그의 뒤를 따라잡았다. 출입문에 발을 올리는데, 플랫폼과 객차 사이의 벌어진 틈이 섬뜩하도록 무섭게 느껴졌다. 재형을 찾으려고 객실 안을 두리번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또 하나의 재형이 놀란 표정으로 손을 휘저으며, 출입문을 향해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고, 소리치며 재형의 손을 잡으려고 팔을 뻗었다.  기차가 출발했다. 나는 어금니를 앙다물고 재형의 바지자락을 힘껏 잡아 당겼다. 객차의 출입문에 낀 재형의 바지가 북, 찢어지며 빠져나왔다. 반동으로 둘은 나가떨어져 맞은 편 출입문에 부딪쳤다. 콰다당, 양철북소리를 내며 둘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토끼눈을 뜨고 구경했다. 재형의 바지는 여남은 군데 실밥이 터지고, 20센티미터 정도 단이 찢어졌지만, 그나마 그 정도라 다행이었다.  잿빛 흙먼지가 두 사람의 옷에 도배되었다. 숨을 고르며 급히 일층의 빈자리를 찾아서 둘이 나란히 앉았다. 그때 한 소년이 재형의 백팩 옆구리에 찔러놓았다가 부러진 부메랑 반쪽을 들고 왔다. 나는 얼굴을 붉혔다. 재형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그것을 받았다.  나는 뒷모습을 보고 재형으로 오인한 남자가 궁금했다. 자라목을 길게 빼서 객실을 270도 각도로 훑었다. 그럴 만한 남자는 눈에 쉽게 띄지 않는다. 카키색 바지와 버간디톤 티셔츠 그리고 갈색 머리카락까지 재형과 같았던 남자가 백인이었는지 아시안이었는지도 아리송했다.  기차는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찢어진 바지 때문인지, 아니면 모든 게 나 때문이란 원망인지, 둘 다인지…… 불만이 가득한 재형의 옆얼굴을 바라보다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차가 머리를 터널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어두운 차창에 재형의 얼굴이 스쳐간다. 뭉개어진 어둠에 반사된 재형의 실루엣이 전생에서 옷깃 한번 스쳐본 적 없는 인연처럼 낯설다.  문득 재형과 나에 대한 승객들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객차의 문틈에 낀 재형의 바지가 빠지면서 둘이 포개지듯 부둥켜안고 넘어졌었다. 승객 중 몇몇은 입구까지 뛰어나와 구경하지 않았던가. 나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가자미눈으로 승객들을 훑어보았다. 다행히 승객들은 하나같이 스마트폰의 액정에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다. 노란 형광등의 반향을 받으며 앉아 있는 그들은, 항성계의 성간과 성간을 이동하기 위한 암호를 풀고 있는 미래의 지구인들처럼 보인다.  나는 목을 좌우로 움직여 긴장을 풀었다. 그때 재형의 눈길과 내 눈길이 복잡하게 마주쳤다. 재형이 일으킨 해프닝이 생각하면 할수록 비현실처럼 느껴졌다. 나는 재형이 기차와 플랫폼 사이에 추락한 사태를 상상해 보았다. 그러자 기분이 현실로 돌아왔다. 문득 두 사람의 침묵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가 내 눈치를 보는 것도 같았다. 나 때문에 침묵이 이어지는 것 같아서, 그동안 고집해 오던 표정관리를 해제하고 입을 열었다.  “여행객이 왜 혼자서 딴 눈 팔고 그래?” “물 한병…… 벤딩머신에 낀 코인을 뺏어야 하는 건데……, 돈이잖아” 그의 대답이 내 귀에는 불퉁거리는 조로 들렸다.  나는 백팩에서 물을 꺼내 재형의 손에 쥐어주었다. 재형이 물병을 입에 물면서 대화가 가능한 객실이냐고 질문하다 사레가 들렸다. 그의 입에서 분무된 물이 부채꼴로 두 사람의 팔과 다리의 맨살 위에 떨어졌다. 갑자기 조금 전의 기억과 짜증스런 기분이 자연스럽게 합성되었고, 그래서 심사가 뒤틀렸다. 뭔가 몹시 억울한 생각까지 들었다.   “러브레터……, 감옥의 사랑이라! 자극적이지 않아?” 그가 갑자기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왜 감옥에서 사랑하면 안 돼?” 나는 티셔츠 자락을 잡아당겨 재형의 입에서 떨어진 팔의 물기를 닦아냈다.  “글쎄, 그 러브레터가 얼마나 오랫동안이나 감옥 ‘채플룸’의 서까래 밑에 방치되어 있었을까?” 그가 잡지사 기자답게 재빠르게 질문을 돌렸다.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고…… 최근에 내부공사를 하면서 발견됐다고 해.” 평소 내가 박물관 고객을 상대하던 식으로 대답하려고 애를 썼다.  감옥의 러브레터가 재형의 감성을 자극했단 점이 어쩐지 나는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내 책상서랍 깊숙이 보관되어 있는 재형으로부터 받은 연애편지 묶음을 떠올렸다. ‘사랑스러운 악마’, 첫 편지의 제목을 기억하자 피, 웃음이 터졌다. 고작해야 도서 대출카드 양면에 깨알 같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은 쪽지에 불과한 것이지만. “하, 사랑스러운 악마 좋아하시네. 사랑의 악마는 시간의 빗자루를 타고 마녀로 진화하고, 또 다른 시간은 귀여운 마녀에게 독이 발린 손톱을 달아줄 텐데.” 입안에서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길게 뺐다. 오늘 새벽 6시 7분 뉴캐슬발 기차를 타고 도착한 시드니에서, 달링허스트 감옥(Darlinghuster Gaol)을 관람하고 돌아가는 길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진다. 시계를 보았다. 기차를 탄 시간부터 계산한다고 해도 장장 13시간이 소모되었다. 그것을 노동시간으로 환산해보다, 현실적인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에 명치가 따가웠다.   긴 하루였다. 한 개의 터널을 통과했으니 나머지 지여섯개를 통과하면 집이 있는 도시 뉴캐슬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오늘 새벽, 재형이 묵고 있는 호텔의 주차장에서 그를 기다리며 하현달을 올려다보는데, 불현듯 내가 한없이 비참하게 느껴진 이유가 뭘까?  기차가 두 번째 터널 속으로 몸을 밀어 넣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앉아 있는 지금의 객실도 만원이지만, 오늘 새벽의 객실사정에 비할 바는 아니다. 형광등이 짙은 노란빛에서 희미한 노랑으로 탈색하며 전율한다. 나는 다림질 하듯 엉덩이를 앞으로 쭉 빼서 등을 길게 폈다. 재형이 스마트폰에 연결된 무선키보드를 두드려 ‘감옥의 예술’을 지우고 ‘감옥의 사랑’으로 기사 제목을 고치고 있다. 그가 에어컨이 가동된 객실의 냉방에 어깨를 부르르 떨더니 백팩에서 잠바를 꺼내 걸친다.  피곤하다. 재형도 에너지가 소진되어 버렸는지 게슴츠레 눈이 감긴 상태다. 기차가 터널에서 빠져 나오자 차창을 뚫고 들어온 한 여름 석양빛이, 재형의 고어텍스 재킷에 무심하게 떨어진다. 마른 몸매, 큰 키, 나오지 않은 배, 각진 턱은 예전 그대로다. 옛날에도 그는 옷을 잘 입었다. 그는 한 때 그 나름의 고상한 방식으로 멋있어 보였었다. 키보드 위에 놓인 두 손등의 불거진 힘줄만이, 그도 늙어 간다고 힘주어 외치는 것 같다.  잠시 후, 코를 골며 입까지 벌리고 잠이 든 재형을 멀뚱히 쳐다본다. 내 발등 위에 떨어진 그의 찢어진 바지자락으로부터 나는 발을 가볍게 당겼다. 그리고 차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주택의 울타리에 줄지어 서 있는 꽃나무를 응시한다. 세 가지 색의 꽃잎을 한 나무에 매달고 있는 꽃나무가,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갈 때면 잠시 얼굴을 숨겼다가, 기차가 터널에서 빠져나오기 무섭게 얼굴을 내밀어 시선을 잡아당긴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했다. 이름이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다. 꽃잎은 짙은 보라색으로 피어나, 옅은 라벤더색으로 변하고, 마지막엔 흰색으로 탈색해 낙하한단다. 꽃잎의 탈색과정을 문장으로 좀 더 잘 은유해 보려고 혀를 굴려보자, 문장이 입안에서 꼬이다 지워져버린다. 말이나 글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꽃의 은밀함, 사랑의 여정? 생각하다 나도 모르게 피, 웃고 말았다.  나는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17년 만에 만난 재형에 대한 내 기분을 묘사할 길이 막막하다. 과거와 현재를 한데 묶어서 재형의 이미지를 그려내려고 애써 보지만, 그 어떤 의미지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떨어져 살았던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에게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났겠지만, 그것들은 결코 내 인생의 시간 안으로 들여놓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에로틱했던 기억들은, 천연소재 속옷을 표백처리 한 것처럼 탈색되어 버렸다. 캠퍼스에서 손을 잡고 다니던 둘의 사랑이 은밀한 행위로 진화하고, 수없이 주고받은 몸의 기억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자메뷰현상으로라도 남아 있어야 할 기억들이 그의 면전에서조차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한때 들끓어 올랐던 에로틱한 순간들이 생리작용에 불과한 것이라고 쳐도, 기억에는 남아 있을 것 같은데. 그러함에도, 가끔 하릴없는 마음에 등대가 보이는 언덕에 올라가, 구두를 벗어들고 두 짝의 바닥을 마주 박박 문질러대며, 문득문득 재형을 생각했던 내 모습은 기억할 수 있다. 때로는 쌍무지개를 올려다보며, 문득 문득 재형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앉아 있었던 모래사장의 쓸쓸했던 내 실루엣은, 그가 남긴 편지처럼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다.  성적인 긴장감은 탈색된 속옷 같아졌지만, 그의 편지는 어제 읽은 문장처럼 기억할 수 있다. 허구, 속임수, 신기루…… 환상만 기억하고 구차한 사실은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의 심리인가. 기회를 봐서 재형이 내 편지를 보관하고 있는지 물어볼까? 아직도 내 편지를……? 나는 컥, 웃었다. 재형이 내 헛웃음 소리에 번쩍 눈을 뜨더니 그대로 다시 눈을 감는다.  기차가 세 번째 터널로 들어간다. 형광등 불빛이 파르르 떨고 있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새근새근 잠든 재형의 숨소리가 들린다. 꿈이라도 꾸는지 재형이 손을 뻗어 내 무릎에 올린다. 나는 그의 손을 가볍게 밀어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그 바람에 충격을 받은 스마트폰의 자막이 살아났다. ‘감옥의 사랑’, 오늘 새벽의 사건이 날아간 앱을 복구한 것처럼 기억위에 떴다. 물론 13시간 전의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사건일 터이지만.  우리가 목격하게 된 사건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였을까? 재형과 나는 오늘 새벽 간신히 Quiet Carriage(조용한 객실)의 일층에 올라탈 수 있었다. 객차와 플랫폼 사이는 악어의 입처럼 벌어져 있었다. 약간만 몸의 균형을 잃어도 추락해, 바퀴에 몸이 갈려버릴 것 같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 어제, 재형이 호주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으러 그를 끌고 간 바닷가 레스토랑에서였다. 늦가을의 밤바다가 울부짖는 소리가 음흉하게 들린다며, 재형이 메뉴판에 눈을 박고 물었다. “호주 전통요리 한 번 먹어볼까?” “호주 전통요리? 그런 것 없어. 설명하려면 길어, ‘그냥 피시 앤드 칩스’나 시켜.” 나는 그렇게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미 그렇게 말해버린 후였다.  정작 요리가 나왔을 땐 어설픈 분위기 탓으로 재형도 나도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각자 잔뜩 신경 써서 할 말을 고르느라 제대로 음식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내 앞에는 셰리 와인, 재형 앞에는 호주산 화이트 와인을 웨이터가 놓고 갔다. 술잔을 만지작거리는 재형의 표정이 약간 복잡해 보였다. 대화 중간에 잠깐잠깐 말이 끊어지면, 그 사이에 둘이 경쟁하듯 술을 넘겼다. 각자의 술잔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다가, 갑자기 꿀꺽 목구멍으로 털어 넣는 식이었다. 버성긴 마음에 두 사람간의 대화가 한번 끊어지면 좀체 연결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래 와이프는 어때? 아직도 귀여운 악마……?” 왜 그 소리가 불쑥 나왔는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술기운을 빌어 겨우겨우 턴 말문도, 앞뒤가 잘 맞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 술만 취하는 꼴이 되었다. 떨어져 살아온 긴 세월에 대해 묻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할 땐, 목구멍으로 술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요란했다. 침묵이 마치 내 책임이라도 되는 양, 어떻게든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려고 애쓴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쓸데없는 말만 잔뜩 늘어놓은 격이 되었다. 돌아와 생각해 보니 후회가 막심했다. 재형은 내가 예전과 달리 쿨하게 구는 것이 새롭게 받아들인 서구문화쯤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그 추측도 아주 일리가 없진 않겠지만.  남은 술을 털어 넣으며 나는 와락 현실감을 되찾았다. 달링허스트 감옥의 자료를 준비하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다음날의 계획을 철저하게 준비하지 못하고 맞닥뜨리는 일을 두려워했다. 그러한 심리는 성격이기 전에, 그동안 남의 나라 말로 공부하고 다른 문화에 적응하며, 숨 가쁘게 달려오느라 새까맣게 더께가 달라붙은 발뒤꿈치의 굳은살 같은 거였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혼자 살아온 여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익혀버리게 된, 작은 일에도 고아처럼 불안에 떨고, 죄지은 사람처럼 두려워하게 되는 기이한 의식이었다. (계속)테리사 리 소설가 15회 재외동포 문학상 수상11회 민초문학상 수상소설집 <비단뱀 쿠니야의 비밀> <어제 오늘 내일>

  08/07/2021
  문학지평

한참 만에 너는 창틀 가리개를 끼운 채 다시 밖을 보았다. 아저씨는 계속 절을 하고 아빠는 팔짱을 낀 채 꿈쩍도 않고 서 있었다. 그때 경찰차 경적소리가 좁은 시골길에 울려 퍼졌다. 드문드문 지나가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너희를 바라보며 멈추어 섰다. 이윽고 경찰차가 멈추고 경찰 아저씨가 내렸다.“신고하신 분이 여기 아주머니신가요?”엄마를 향해 달싹거리는 경찰의 입모양으로 묻는 게 짐작이 갔다. 다시 무슨 말인가를 하는데 그 후는 알아챌 수 없었다. 경찰이 드디어 너희 차로 다가와 밖에서 운전석 문을 열어보려 애썼다. 그러나 차는 끔쩍도 하지 않았다. 조수석의 우그러진 부분도 만져보며 펜을 꺼내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얼마 후 아빠가 경찰아저씨에게 잘 해결되었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경찰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차에 탔다. ‘쳇, 저렇게 그냥 가려면 왜 여기까지 왔어? 한국 경찰의 현주소!’‘또 엄마는 왜 신고는 한 거야? 싱겁기는.’너는 아까운 현장을 놓친 것처럼 허망했다.경찰 아저씨가 차를 몰고 떠나려다 다시 차 창문을 내리더니 소리쳤다.“쌍방에 합의를 잘 보면 그게 더 나아요. 그런데 거기 개 트럭 아저씨, 다시 한 번 나한테 걸리면 그때는 국물도 없을 줄 아쇼!”아저씨가 경찰차를 향해 숙인 고개를 더 푹 떨어뜨렸다. 아빠가 드디어 엄마를 앞세우고 차로 들어왔다. 계속 트럭 아저씨와 아줌마는 너희 차에 대고 인사를 했다. 옆에 여자 애 둘이 엄마 손을 잡아끌어도 트럭 부부는 꼼짝도 안하고 서 있었다. 네 머릿속에 정말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너는 갑자기 차문을 밀었다. 그러나 이미 아빠는 시동을 걸고 있었다. 엄마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미쳤니? 왜 내리려고?” 네가 허둥댔다. “아빠, 왜 그냥 가세요? 참 인자하기도 하시네요?” 차 쫓을 때는 완전 레이서 걸 같던 엄마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래도 애들이 불쌍하잖아.” 동생도 질까봐 네 말에 한 마디 거들었다. 엄마 아빠는 앞만 보고 달렸다. 너는 씩씩거리다 울퉁불퉁 흔들리는 시골길에 리듬을 탔다. 어느새 마음속에서 개 트럭 철창을 한 개씩 무너뜨리고 있었다. ‘다 도망가라!’ 개들이 미친 듯 트럭에서 뛰어내려 들판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마침내 열셋을 다 세고 나서 너는 엄청난 자유를 느꼈다. 너도 개를 따라 숲으로 달려갔다. 개와 너. 둘 다  숨이 가빠 헉헉거렸다. ‘헉헉!’ “형아, 왜 그래?” 동생이 놀라 너를 깨웠다. 너는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챙겼다. 주위를 돌아보니 아직 흔들리는 차안이었다. 벌써 주위는 어둑해지고 밖에는 꼬리를 문 전조등의 행렬만 보였다. 피곤한 밤이었다. 너는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떨어졌다.그렇게 길길이 날뛰던 엄마는 조용해졌다. 그날 밤 집에 도착해 엄마 아빠는 짐을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엄마는 그날 밤 더 이상의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빠가 일찍 출근을 하며 현관을 나가고 있었다. “당신, 화장대 위에 핸드폰 좀.” 엄마는 또 자동적으로 너를 불렀다. “큰 아들!” 너는 학교에 일찍 가기 싫어 얼쩡거리던 참이었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홀로서기 안 되는 가장, 내가 이 집 머슴인가?” 너는 투덜거리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핸드폰을 집는 순간 생뚱맞은 물건이 네 눈에 들어왔다. 싸구려 파마머리처럼 푸수수한 낡은 돈뭉치였다. 뭔가 머리통을 찌르듯 예리한 통증이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노랑 고무줄로 둘둘 묶인 돈다발은 낡고 헤져 옆에 놓인 성경책만큼 두툼했다. 떨리는 손으로 너는 배춧잎 돈을 눌러보았다. 그 돈다발 아래 몇 장의 구겨진 돈이 숨겨지듯 놓여 있었다. 가슴속에서 기차소리가 났다. 쉭쉭 소리가 점점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위에 ‘13. 30만원’이라는 번진 글자가 보였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배춧잎을 재빨리 세어보았다. ‘28, 29, 30 . . . ’ “핸드폰 삶아먹니? 빨리 가져오지 않고!”“아, 갑니다!”엄마 고함소리에 너는 정신이 돌아왔다. 핸드폰을 집은 채 비틀거리며 급히 나갔다. 동생이 방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소리쳤다. “아빠, 우리 차 고치려면 돈 많이 들겠지?” 핸드폰을 받으며 곤혹스러워하는 아빠의 표정을 너는 놓치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를 배웅하러 집 밖까지 따라 나갔다. 차가 얼마나 망가졌나 한 번 더 봐야겠다면서. 안방으로 달려간 너는 배춧잎을 노려보며 눈을 감았다. 꾀죄죄한 털을 한 개들이 퍼런 배춧잎 위로 어른거렸다. 이어 누렁이의 슬픈 눈동자와 세종대왕 얼굴이 겹쳐졌다. 거래. 도둑. 밀매라는 단어들이 머릿속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세종대왕이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너는 눈을 꼭 감아버렸다. 어차피 숫자 밑에 희미하게 지워진 날짜를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13장. 30만원’이제야 알겠다. ‘난 정말 뇌섹남이다!’신이 난 너는 계산을 시작했다. 그러나 30 나누기 13의 계산이 자꾸 흔들렸다. 아무리 암산을 해도 나누어떨어지지를 않았다. 에잇, 나눗셈 더럽게 어렵다.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배불뚝이 트럭 아줌마가 떠올랐다. 가슴에 뭔가를 안은 채 트럭에서 내리는데 배가 남산 만하게 불러 있었다. 그 뒤로 엄마를 부르며 달려가던 두 명의 여자애들이 빠른 화면으로 스쳐갔다. 너는 머리를 세차게 휘저으며 네 방으로 돌아왔다.그날 밤 엄마 아빠 방에서 새어나오는 한숨소리가 들렸다. “왜 그걸 받았는지 모르겠어.”“우리가 너무 화가 났었나 봐요.”“어쨌든 그 녀석 우리가 신고한 대로 뒀으면 뺑소니, 음주운전, 개 도둑, 그리고 불법 도살 견 운반 죄로 감방 살게 분명해.”“그럼 우리가 구제해준 셈으로 생각합시다.”“그래도 어쩐지 찝찝하다. 오늘 견적 받아봤지. 생각보다 차 수리비가 적게 나온 것 같아. 좀 그거 내 눈에서 안 보이게 치워버려. 자기가 알아서 쓰던가.”“한 다발만 받을 뻔 했나 봐요. 그 여편네가 안겨주기에 그냥.”엄마는 씁쓸한 듯 뒷말을 흐렸다. 그 후 며칠 동안 그 돈은 화장대 위에 짱 박혀 있었다. 너는 오며가며 일부러 안방 문을 힐끗거렸다. 단지 돈뭉치의 위치만 맨 옆 구석으로 옮겨졌을 뿐 그대로였다. 동생에게 한 번 물어봐야겠다. 혹시 그 여자애가 같은 반인가를. 그럴 리도 없겠지만 만약 그렇다 해도 이제 와서 네가 어쩌겠다는 것이지? 너는 더 네 방에 틀어박혔다. 화장대 위의 걸레 같은 돈다발을 잊자고 애썼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꾸 숫자가 맴돌았다. 30만 나누기 13이니 핸드폰에 넣어야겠지만 마리 당 2만원은 넘는다.머리를 조아리며 병자처럼 비틀거리던 아저씨, 울먹이며 가슴을 싸안고 나오던 배불뚝이 아줌마, 엄마를 따라 달려가던 놀란 소녀들 눈빛이 천장에 맴돌았다. 그래, 그 아저씨는 그냥 개 운반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아저씨의 인생이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 어쨌든 도둑은 도둑이니까.그러나 그걸 눈감아주고 양심을 판 건 도둑이 아닐까? 아냐, 경찰에 넘기지 않은 것만 해도 한 인간을 살려준 건지도 모른다. 개 도둑. 더러운 배춧잎. 30만 나누기 13에 훔친 개를 사들인 돈. 그 더러운 돈의 대가로 음주운전과 뺑소니를 눈감아 준 과장님. 너는 갑자기 돈다발을 집어 들고 옥상으로 달려갔다. “에이 씨!”너는 돈다발을 40층 옥상에서 뿌렸다. 공중에 햇빛을 받은 배춧잎들이 자유를 찾은 개떼처럼 흩어졌다. 너도 배춧잎을 따라 고삐 풀린 개가 되어 어디론가 달아나고 있었다. 사람 없는 들판에서 자유의 냄새가 풍풍 풍겨왔다. 끝없는 해방감이 코끝을 톡 쏘며 상쾌하게 밀려왔다.그런데 달리면서도 또 걱정이 생겼다. 돈이 땅에 닿는 순간 사람들의 반응이 말이다. 모른 척 주위 눈치를 보며 틀림없이 발 앞의 돈을 자기 것처럼 끌어들일 게 뻔했다. 오! 온갖 기발한 도둑들로 흥청거리는 세상. 너는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빙빙 돌았다. 개가 된 너는 도둑님들 발을 노려보며 왕왕 짖어댔다. 아차, 하면 물고 늘어질 기세로. 그때 엄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큰 아들, 어서 내려. 공부하느라 피곤해서 그리 잠만 퍼 주무시는지 쯧쯧.”“집에 다 왔어!”동생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허겁지겁 차에서 내리다 보니 밖은 이미 어둠이 가득했다. 어둠 속에서도 아빠 차가 우그러진 곳이 선명히 보였다. 너는 가만히 머리를 흔들었다. 아직은 개가 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도둑들을 물었으면 또 한 바탕 소동이 날 뻔했는데. 어디서부터 꿈이었는지는 나중에 조용히 생각해봐야할 일이다. 아니, 선견지명이 있는 너는 미리 미래의 꿈을 꾼 것인지도 모른다.   “이마리 선생님은 어린이와 청소년이 차별 없는 사회에서 행복하기를 염원하는 작가입니다.” 이마리 선생님은 생각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소설가입니다. 지금은 호주에서 청소년 역사 소설 시리즈를 집필하고 있으며, 한글학교 선생님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조선후기 청소년의 삶을 ‘대장간 소녀’에 담았다면, 동학운동과 관련된 소설에서는 ‘동학 소년’을 그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소년 독립군, 촛불 소녀 등의 연작 시리즈로 독자들과 만날 것입니다.  - 추천도서 선정(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도서)2015년 『버니입 호주 원정대』2016년 『구다이 코돌이』2017년 『코나의 여름』* 청소년소설 <대장간 소녀와 수상한 추격자들>이스트우드 북랜드에 있슴.

  24/06/2021
  문학지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