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에서 건강한 피로함으로 살아가기
벌써 십년이 지났으니 최근 작이라곤 할 수 없겠지만, 2010년 가을에 재독 한국인 철학자가 독일 지성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조그만 문제작을 출간했고, 독일 최고의 권위지 중의 하나인 ‘프랑크프루트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지가 특집으로 다루면서 이 문제작은 독일의 베스트 셀러가 되었으며, 곧이어 2012년에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번역이 되자 그 해 말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국 출판계에서는 신임 대통령이 꼭 읽어 보기를 권하는 대통령 강권 도서 1호로 꼽히며 한국에서도 유명세를 탔었던 책이다: ‘피로사회’(한병철 저)가 그 책이다.
100페이지 조금 남짓한 시집 형태의 작은 책이 서구뿐 아니라 아시아 권에서도 선풍적 공감대를 형성한 것은 그 책이 가지는 사상사적 깊이와 현대 사회의 병폐를 꼭 짚어 진단하는 저자의 예리한 통찰력 때문일 것이고, 또한 말미에 제안의 성격으로 제기된 결론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라 말들 한다. 해서 이 책의 주제들을 중심해서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자신 만의 삶의 의미 가꾸기’를 함께 해 보면 좋겠다.
먼저 저자는 현대 사회를 과거의 ‘규율사회’와는 다른 ‘성과사회’라 진단을 하며, 그렇게 된 이유로는 ‘개선된 인권과 자유에 대한 포스토모던적 경향’으로 말미암아 사회 전반이 개방되어 무한 경쟁의 사회로 진입했기 때문이라 진단했다. 그는 특별히 과거의 규율사회를 나와 타인의 경계를 중심하여 타자를 밀어내고 배척했던 의학적 면역체계로 설명했는데, 과거에는 나와 다른 이방인의 진입을 적극적으로 막아 ‘나’를 보호하는 것이 덕목이었다면, 포스트모던 사회는 ‘타자’를 적극 유입하는 것이 더 좋다는, 즉 경계가 허물어지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성과를 낼 수 있음을 바탕으로 하는 무한 경쟁을 하게 되었다고 진단했다. 그런 경향을 부추킨 것은 또한 과도한 긍정에의 숭배였다. 흔히 ‘I can do’란 말로 표현되는 ‘과잉 긍정’이 현대의 문제점을 잉태하고 성장시켰다는 것이다.
좀 쉽게 설명하자면, 현대인은 고양된 자유와 강조된 긍정적 사고로 말미암아 더 많은 성과를 도출해 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게 되는 새로운 시스템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현대인의 질병은 외부에서 침입하는 병균이 아니라 오히려 내 안에 있어서 나를 몰아치는 ‘과잉된 긍정’이 범인이라는 말이다. 저자는 유대인 학자 발터 베냐민의 글을 인용하며 ‘현대인은 자극에 과잉 노출되고, 정보에 과잉 주의를 함으로 인해 오히려 공동체성이 퇴행’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포스트 모던 시대의 ‘성과’에 끌려 자신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을 보았는데, 이런 시대적 현상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소심한 사람들은 ‘우울증’으로, 또 성과사회에 과잉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은 ‘과잉행동성 소진증후군’을 앓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런 성과사회에서 살아 남고 성공하기 위하여 인간은 자신도 잃고, 이웃도 잃어 가고 있으며, 아무도 강제하지 않지만, 스스로를 ‘착취’하는 분열적 피로사회에서 몸살을 앓으며 살고 있다고 지적한다. 참 아픈 지적인데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 용기도 없다. 이런 현상은 이탈리아 출신의 조르조 아감벤이 묘사했던 ‘호모 사케르’(어떤 사회에서 범죄하여, 추방당하고 그를 만나는 사람은 누구라도 죽여도 괜찮은 인간)가 이제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착취하고 죽게 하는 그런 현대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가 되어 가고 있다는 말로 들린다. 그래서 현대는 성과의 폭력에 물든 ‘피로사회’라고 말하며, 그런 피로사회의 구성원인 현대인은 자아를 챙길 여유가 없으며, 감동이 없는 그런 삶을 사는 존재로 전락해가고 있으며, 큰 기계의 부속품이 되어 죽음을 향해 계속 돌아가는 하나의 부속품으로 전락하여 탈진하고 고립된 피로한 자아가 되어가고 있다는 외침은 우리를 아프게 한다. 이런 시대 이해가 아마도 삐에르 쌍소의 ‘느림의 미학’이 강조하고 있는 강조점과 연결되고 있다: “그저 한 번 멈추어 서 보라, 한 번 천천히 사물을 돌아보라”는 쌍소의 권고말이다.
이런 스스로를 착취하는 피로사회에서 저자는 ‘분노해 보라, 아니라고 말해보라’라고 권하며, 또한 신약성경의 오순절 공동체를 소환하며 재미있는 제안을 하고 있다. 자신에 집착하여 과잉 긍정의 노예가 되어 탈진하게 만드는 그런 피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섬김과 봉사로 피로 했었지만, 도무지 탈진에는 이르지 않는 신약 공동체의 ‘타인을 위한 피로함’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글이 이즈음에 이르자, 목사로서 또 후학을 가르치는 학자로서 전투 의지(?)가 살아났다. 한병철의 오순절 공동체를 좀 더 무게있게 강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유대인 철학자 에마누엘 레비나스를 전공한 서강대 철학과 교수 강영안의 글이 그것이었는데, 강교수는 이런 현대사회에서 진정으로 회복되는 길은 어린 시절의 무목적한 동네 친구들과의 놀이라고 하였다. 어떤 성과를 내기 위해 땀 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간혹은 아무런 대가 없이 그냥 재미있게, 그것도 땀 흘리며 놀이할 수 있는 삶의 공간을 확보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삶의 현장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아닌 타인이 함께 있을 때 비로서 내가 보인다는 것이다. 참 공감이 갔다. 우리는 매사를 너무 ‘성과’를 도출해야 하는 것에만 집착하며 사는 것은 아닐까? 레비나스가 그랬단다: ‘타인을 통해 나를 보는 것,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수용할 때에 비로소 나의 나됨이 드러난다’
코로나로 온통 세상이 어지럽고 불안이 가중된 삶을 살고 있다. 피곤함에 익숙해 있어서 이렇게 록다운 되어 강제로 쉬는 것도 불안하다. 피로함이 탈진으로 인도하는 피로함이 아니라, 활기찬 기쁨으로 나아가게 하는 그런 피곤함은 없을까? 이웃과 함께 고통도 나누고 기쁨도 나누는 삶의 확장과, 영원한 생명을 나누는 그런 피곤함이라면 어떨까? 사랑하는 자녀들 위해 땀 흘리는 부모는 결코 탈진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사한다. 내 안에 내가 너무 커서 스스로를 소진하며 착취하는 자리에서 멈추어 서서, 나를 위한 피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피곤을 즐거이 감수해 보는 그런 ‘건강한 피로’가 물결치는 새로운 피로사회를 강추한다.
주님이 말씀하셨다.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아멘”
김호남 박사(PhD,USyd)
시드니 신학대학 한국신학부 학장
(02) 8876 1870
info@itap365.comhttps://www.itap365.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