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자인가? 충신인가?>
”사람 되다 못된 것이 신숙주라고 하고 콩나물 되다 못 된 것을 숙주나물이라고 한다” 신숙주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유명한 변절자이다. 그가 단종을 저버리고 수양대군을 받들었기 때문이다.
사육신의 충절이 빛을 더 할수록 신숙주는 반비례한다. 충의(忠義)는 유가에서는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아무리 부당한 임금이라도 목숨을 다해 받들어야 한다. 이 것이 이씨 왕조 가신의 중심 윤리였다.
냉정히 그 것이 민족, 국가, 국민을 위한 윤리는 아니다. 그는 동료 사육신이 죽임을 당한 후 부귀영화를 누렸다. 변절은 매도되어야 하지만 민족차원으로 확대 적용할 적에 꼭 그렇지 만은 않은 경우가 있다
이런 뜻에서 신숙주를 역사에 다시 비추어 본다. 그는 조선전기 성리학자, 관리, 언어학자, 외교관이다. 훈민정음 창제자의 한 사람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신장(申檣)의 아들이다.
1438년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고 1439년 친시 문과에 합격하여 세종 때 24세로 집현전 학사가 되었다.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와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하였다. 1447년(세종 29년) 문과중시(重試)에 4등으로 합격했다. 당상관이 되었으며, 이후 계유정난과 세조반정을 지지하고 세조의 최 측근으로 활약하였다.
문신의 신분이었으나 병력을 이끌고 여진족과 왜구 토벌에 여러번 출정하였다. 전라남도 출신으로 1461년부터1464년, 다시 1471년부터 1475년까지 영의정을 역임했다.
그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정운 등을 편찬했다. 조선전기 성리학자, 관리, 언어학자, 외교관이다. 훈민정음 창제자의 한 사람이다.
<세종과 신숙주>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하고 우수한 학자들을 뽑았다. 그들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하며 학문만 닦게 했다. 신숙주는 자기 집의 책을 모두 읽은 후 궁중에 있는 장서각의 책을 모두 독파할 계획을 세웠다. 어느 날 밤 세종은 집현전에 누가 있는지 보라고 했다.
내시는 “신숙주 경이 책을 읽고 있습니다”고 보고했다. 세종의 명으로 내시가 서너 차례나 가서 엿보았는데 신숙주는 닭이 울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이 얘기를 듣고 세종이 가 보니까 신숙주가 책상에 앉은 체로 잠이 들어 있다.
세종은 “자기 아버지 신장이 저러더니 그 아들도 그렇구나” 했다. 세종은 자기 위 옷을 벗어 덮어주고 왔다. 신숙주는 잠이 깨어서 용의를 보고 감읍하였다고 한다.
<일본행과 왜녀(倭女)>
세종이 대마도를 정벌 한 후 왕래가 끊겼던 일본이 외교관계를 맺기 위해 사절을 보내달라고 요구해 왔다. 우리의 문화를 과시하기 위해 세종은 신숙주를 보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일본의 문사와 승려들이 몰려왔다. 그의 서예, 시, 학문 수준에 그들은 흠뻑 빠졌다. 그는 일본의 지도를 작성하고 제도, 풍속을 기록했다. 이런 모든 내용을 귀국 후 도면과 함께 나라에 바쳤다.
이것이 유명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이다. 이 책이 일본에 대한 안내서가 되었다. 일본에 있을 때 왜녀(倭女)를 바쳐 데리고 살았다. 그녀가 임신을 하자 데리고 배에 올랐다. 오는 길에 현해탄의 풍랑이 심하자 뱃 사람들이 계집 때문에 용왕이 노했다며 왜녀를 바다에 빠트리자고 했다. 이를 신숙주가 한사코 반대해 그녀를 끝내 구했다.
<신숙주의 인격>
첫 벼슬 길에 서리의 잘못으로 그가 맡은 일을 못 했다. 서리가 벌을 받게 되자 신숙주는 “서리가 전해 주었지만 내 스스로 안 나갔다”고 거짓 자복을 했다. 결과 서리는 벌을 면했고 신숙주는 파직되었다. 그의 덕망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단종이 죽자 연고자들을 다 종으로 만들어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단종의 비 송씨도 종이 되었다. 신숙주는 송씨를 자기 종으로 달라고 요청했다. 송씨를 잘 보호하기 위함인 걸 알고 수양이 허락하질 않았다.
그는 종들에게도 언제나 인간적으로 대해주었다. 그는 뛰어난 언어학자로 중국어, 일본어, 여진어, 몽골어에 능통하고 아라비아어와 인도어는 문자를 알았다. 그는 통역 도움 없이 대부분 의사소통을 했다. 그의 저서 동국통운(東國正韻)에 보면 외국어 발음 하는 방법이 나온다. ㅂ 앞에 작은 동그라미 표시로 영어의 F나 V도 발음 할 수 있다. 그는 훈민정음을 제작할 때 그의 어학 실력을 발휘했다.
<신숙주와 수양대군>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중국에 갈 적에 신숙주가 서장관으로 뽑혔다. 그들은 39세 동갑 내기였다. 6개월 이상 같이 여행하며 수양은 신숙주의 실력에, 숙주는 수양대군의 그릇됨에 서로 감명을 받는다. 두 사람은 서로 존경하며 우의가 두터워졌다.
귀국하여 문종이 임종 시 신숙주에게 단종을 부탁했다. 문종은 수양대군의 야심을 걱정하고 있었다. 수양은 할아버지 태종이 형제들을 죽이며 왕위에 오르고 셋째 아들에게 왕위를 준 걸 잘 알고 있었다. 수양은 어린 단종 보다 자기가 왕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자 중엔 수양의 동생 안평 대군이 명망이 높았다. 글과 그림에 능한 그를 김종서, 황보인 같은 대신들이 따랐다. 수양은 한명회, 권남 등이 있으나 비중이 적었다. 한명회는 수양에게 문신보다 무신을 사귀라고 권했다. 수양은 한명회의 꾀를 받아들여 “활 쏘기”를 열었다.
<계유정난(癸酉政亂)>
매일 활 쏘고 술 마시며 무사들을 포섭했다. 김종서, 황보인을 안평 대군과 역모를 꾀한다고 죽였다. 그리고 반대파 대신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제거했다. 이 때 살생부를 쥔 사람이 한명회였다. 이 사건을 ‘계유정난’이라고 한다.
수양대군은 실권을 쥐고 영의정이 되었다. 신숙주는 공신이 되고 동부승지가 제수되었다. 집현전을 지킨 성삼문에게도 공신의 칭호가 주어졌다. 성삼문은 이를 부끄럽게 여겨 밥맛을 잃을 정도였다. 공신들이 차례로 잔치를 벌일 적에도 성삼문은 안 했다.
수양의 세력이 온 나라를 누르자 15세의 단종이 겁을 먹고 옥새를 작은 아버지에게 건네어 주었다. 예방승지인 성삼문은 옥새를 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이 날 밤 박팽년이 경회루 연못에 빠져 죽으려 하자 성삼문이 뒷날을 도모하자며 옷깃을 잡고 말렸다. 이 둘은 같이 뒷간(화장실)에 가서 통곡하였다고 한다.
<단종 복위운동>
성삼문을 중심으로 집현전 학사들은 단종 복위운동을 비밀스럽게 진행시켰다. 신숙주는 다시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다. 집현전 학사들은 복위운동에서 그를 제외시켰다. 신숙주는 새 왕의 즉위를 알리는 주문사로 북경에 갔다.
수양의 백부 양녕이 단종을 멀리 보내라고 충고한다. 세조는 이 말을 듣지 않고 엄중히 단속만 강화했다. 6월에 중국사신이 오자 잔치를 베풀기로 하였다. 창덕궁 잔치는 상왕 단종도 참석한다. 복위세력은 이 날을 거사일로 잡았다. 성승, 유응부가 칼춤을 추다가 세조 쪽을 치기로 했다. 성삼문은 “신숙주는 나와 평생 친구지만 죄가 무거우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며 그를 살생부 명단에 넣었다.
눈치 빠른 한명회가 운검을 금지시켜 실패로 돌아간다. 거사일이 미루어지자 진짜 변절자 김질이 고자질했다. 반대 세력은 세조 앞에 끌려 나왔다. 세조 옆에 서 있는 신숙주를 보고 성삼문이 “세종에게 원손을 부탁받은 걸 잊었는가?” 라고 꾸짖자 세조가 신숙주에게 “뒤편으로 피하라”고 일렀다. 신숙주가 피하고 나서 사육신이 처형을 당했다.
신숙주가 집에 돌아오니 부인이 상복을 입고 두어 자 되는 베를 가지고 대들보 아래 앉아 있다. “왜 그러고 앉아 있소?” 신숙주가 물었다. “영감이 오늘 옥사에 성학사와 같이 죽었을 걸로 알고 자결하려고 했습니다”하자 신숙주는 몸둘바 몰라 했다고 야사(野史)는 전한다.
사육신 사건 뒤에 노산군이 된 단종이 죽임을 당한다. 그 모든 비난은 신숙주와 정인지에게 쏟아졌다. 단종이 죽고 나서 세조는 정치적 안정을 누렸다. 신숙주는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세조반정의 으뜸 공신은 한명회, 정인지 등이다. 그러나 평소 세조는 신숙주는 “나의 위징”이라고 했다. 당 태종에게 위징처럼 신숙주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신숙주는 모든 실력을 세조의 문화사업에 바쳤다. 선대 왕의 말을 모은 ‘국조보감’을 편찬했다. 세종이 국가 기본질서를 적은 ‘국조오례의’를 교정했다. 사서오경의 구결을 새로 만들었다. 훈민정음도 그의 손을 거쳐 발전, 보급되었다. 불경 및 많은 고전이 그에 의해 번역 되었다. 성삼문도 죽었는데 그가 없다면 누가 이 일을 했겠는가?
<신(申)정승과 신(新)정승>
신숙주가 영의정 때 우의정으로 구치관이 임명되었다. 세조는 이 두 명과 술자리를 같이 했다.
세조: 신정승!
신숙주: 예.
세조: “내가 새로 된 신정승(新 政丞)을 불렀는데 경이 대답을 잘못 했으니까 벌주를 내리겠소”
세조: “신정승”
구치관: 예.
세조: “내가 신(申) 정승을 불렀는데 벌주를 내리겠소”
계속 벌주를 받자 이번엔 왕이 불러도 두 명 다 대답이 없었다.
세조: “신하가 임금이 부르는데 대답을 안 했으니까 두 명 다 벌주요” 하고 또 술잔을 따랐다. 이 날 밤 3명은 다 크게 취했다(연려실기술 중)
<김시습과 신숙주>
생육신 김시습과 신숙주는 어릴 적 친구다. 김시습이 서울에 오면 아무도 찾지 않았다. 신숙주는 김시습이 왔을 때 집주인에게 찾아가 술을 많이 먹이라고 당부했다. 김시습이 술에 곯아 떨어지자 가마에 태우고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술이 깬 김시습이 신숙주 집인 걸 알고 나가려고 했다. 신숙주가 그의 손을 잡고 “어째서 나와 말 한마디도 않는가?” 하며 안타까워 했다.
그러나 김시습은 소매를 뿌리치고 말없이 떠났다. 김시습은 변절한 그를 친구로 생각 안 한 것이다. 신숙주는 아픈 마음으로 떠나는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정승인데도 누구 보다 검소한 생활을 했다. 그는 “장례는 검소하게, 내 무덤엔 책만 넣어라”라고 유언했다
<새로운 평가>
그의 결함은 물론 실절(失節)이었다. 이제 그 인간의 전체를 보아야 제 모습을 볼 수 있다. 신숙주는 너무 인간적이고 완벽한 벼슬아치였다. 그는 목숨을 부지하여 영화를 누리고 명예를 잃었다. 성삼문은 목숨을 바치고 청사에 이름이 남겼다. 그러나 성삼문은 더 이상 이룬 게 없었다. 신숙주는 우리 역사에 커다란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업적 보다 절의가 중요한지는 수단과 목적처럼 묘하다. 신숙주는 수양과 친했고 역사의 흐름에 따랐을 뿐이다. 그는 인정 많은 깨끗한 벼슬아치고 학자였다. 그는 그 자신의 손을 더럽힌 적이 없었다. 세조 반정에 방관자였지 참여자가 아니었다. 생육신으로 초야에 묻혀 살았으면 업적을 남겼을까? 독립투사 신규식과 단제 신채호는 그의 직계 손이다.
<당시 세계는…>
중국의 명나라에서는 가뭄과 기근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는데 지진까지 일어나 대 혼란에 빠진다. 일본에서는 용인의 난이 일어나 본격적인 전국시대로 돌입한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이 설립되고 베네치아 도서관이 설립 되었으며 로마에서는 처음으로 인쇄소가 섰다.
프랑스 시인 비용이 1462년 유언 시집을 발행하고 다음해 죽었다. 유럽에서 문예부흥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흑사병이 돌면 유럽인구의 3분의 1이 죽기도 했고 기근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아사하기도 했다. 아비뇽 유수가 일어나 교황이 두 명일 적이 생긴다.
한상대 (린필드한국학교 교장, 대한문화학교 교수) info@hanho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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