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 타라무라 연합교회에서 열린 한 모임에 참석했다. 주총회장이 매년 은퇴목사 부부와 미망인들을 초청하여 함께 예배 드리고 점심과 다과를 나누며 교제하는 느긋한 모임이다. 지난 몇년간 이런저런 핑계로 난 한번도 참석치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서두화( Alan Stuart) 목사가 오신다고 해서 그를 만날겸해서 참석했다. 그는 호주 선교사로서 1960년대 부산장신대 학장을 역임했으며 호주에서는 첫 한인교회인 멜번 한인교회를 개척한 초대 목사였다.
서 목사를 개인적으로 알게 된 것은 2000년 1월 부터였다. 빅토리아/타즈마니아 주총회의 다문화 선교목사로 부임했을 때, 그를 포함한 30여명의 옛 한국 선교사와 가족들이 우리 부부를 위한 환영 파티를 해 주었다. 몇 년 후 그는 두 아들이 거주하는 뉴카슬로 이사했다. 나 역시 시드니 그레이스텐스 교회 목사로 부임한 후 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2012년 그의 아내 리타가 소천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92세된 그가 혼자 어떻게 생활하는지 궁금해서 한번 그의 집을 방문하려던 계획이 있었기에 기꺼이 이 모임에 참석하기로 했다.
정작 그를 만나보니 나의 기우보다 더 건강하고 정정했다. 반갑고 감사했다. 가까운 곳에 사는 두 아들 가족과 자주 오가며, 식사도 하며 여러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한 교회에서 매월 두번 설교하며 양로원 심방도 한다고 했다. 핸드폰으로 내 사진을 찍으며 초상화를 그려 우편으로 보내겠다고 했다. 다 완성되었다고 연락하면 내가 직접 가져 오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건강의 문제로 혹은 갑자기 주님 부르시면 다 완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말 그렇게 될 가능성도 있지 않는가! 선배 목사의 그 말이 왠지 쓸쓸한 여운으로 아직 내 귓가에서 맴돈다.
삶에는 여러가지 중요한 일들이 많다. 나는 그 중에서 태어남과 죽음이 가장 중요한 두가지라고 생각한다. 태어남으로 부모 형제와 관계를 맺게된다. 모국어와 조국을 갖게된다. 그것들은 삶의 전 과정을 통해 큰 영향력을 끼친다. 반면에 죽음은 모든 것의 끝으로 간주된다. 이 땅에서의 인간관계나, 소유, 직분만이 아니다. 육체의 포기, 감정의 소멸까지 포함된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며 고통스러워한다. 또한 죽음 앞에서 진실해지고, 영원하고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중세 수도사들의 인사말인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가 생각난다. 이는 라틴어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라’ 혹은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이말은 원래 로마의 개선장군 환영 퍼레이드에서 비롯된 말인 줄 안다. 개선장군은 네마리의 흰말이 이끄는 전차를 타고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데, 그 순간은 마치 황제가 아니 신이 된듯한 착각을 하기 쉽다고 한다. 그래서 비천한 노예를 시켜서 그 장군의 귀로 들을 수 있도록 큰소리로 ‘메멘토 모리’를 계속 외치게 한다고 했다. 개선장군에게 수여되는 관에도 같은 이 말이 쓰여졌다고 한다. 또한 로마황제들이 승전을 축하하며 베푼 큰 연회의 건배사도 ‘메멘토 모리’였다고 한다. 나는 문득 이것이 로마의 천년영화를 가능케 했던 위대한 정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주간이 죽음을 앞둔 마지막 몇날임을 안다면 , 누구든지 남은 모든 날, 매 시간을 참으로 의미있게 살려고 할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말은, 겸허하게 살라, 우쭐대지 말라, 현재에 충실하여 지혜롭게 행동하라는 뜻과 일맥 상통한다. 대화 가운데 자주 ‘죽고 싶다’ 혹은 ‘너 죽고 싶나?’등의 표현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여러 장례식 등에 참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치 않으며 살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이고, 불확실한 것은 다만 그날이 언제일지 모른다는 것 뿐인데도 말이다.
이번 주는 고난 주간(Holy Week)이다. 성금요일은 사순절의 끝날이다. 또한 부활절 연휴가 시작된다. 기독교의 전통은, 이날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묵상하며 성찬식이나 세족식 혹은 금식기도를 하는 특별한 날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일년 중에 미사가 없는 유일한 날이 성금요일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이날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것 같다.
이번 주간에 각기 다른 방법으로 기도의 삶을 사는 기독교인들이 많은 줄 안다. 나는 새벽시간에 혼자 주님의 죽으심을 묵상하며 기도한다. 의자 대신 마루에 무릎 꿇고 앉는다. 전깃불 대신에 촛불을 켜서 어둠을 밝힌다. 그런 것 자체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나의 눈과 마음이 그 분을 바라며 집중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서다. 아무 것도 애쓰지 않고 구하지 않고 그냥 가슴을 열고 잠잠히 그 분의 임재를 기다리는 시간이 더 많다.
그 분 죽으심에 대한 묵상은 결국 내 자신의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내가 이번 주 금요일에 죽는다는 것을 안다면 무엇을 구해야 될까? 그 분의 자비로우심에 내 영혼을 맡기는 것 외에 달리 구할 것이 없음을 고백한다. 메멘토 모리! 나의 죽음에 대한 어설픈 성찰을 통해서도 문득 내 삶을 위한 어떤 빛과 의미를 볼 수 있다. 나의 누추한 생각과 우선 순위가 바뀌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부활의 아침이 기다려진다. 목마름으로 기다린다.
최정복(호주 연합교회 은퇴목사) Jason.choi46@gmail.com
(02) 8876 1870
info@hanhodaily.com
http://www.hanho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