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지 어느새 10개월의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은퇴를 결정하기 전에는 여유를 갖지 못했던 나의 삶을 생각했으며, 아무 곳에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움을 갈망했다. 그리고 세상사가 마음먹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기본상식을 경험한 나이도 되었으므로. 그저 넉넉함과 여유로움이 주는 느긋함을 기대하며 들뜨는 마음이 되었다는 표현이 적절한 듯싶다. 그런데 한계를 느끼는 것은 체력이 따라주지 않는 문제가 생기고 있다. 시간이 남아돌 거라는 착각 속에서 세웠던 여러 가지 계획 중에서 하나씩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가고는 있지만, 자신감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한밤중에 쏴~하고 나무들 사이를 내지르는 바람 소리와 흔들리는 나뭇잎들의 부딪힘, 굵은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히는 소리에 잠을 설칠 때도 있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경험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것을 느끼게 되고 숫자가 더해지는 내 나이에 걸맞은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지난해 12월경 크리스마스 무렵에 새 아파트로 이사했다. 한 곳에서 십여 년이 넘도록 살다 보니 장안에 쌓여있는 수많은 짐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짐을 정리하면서 버릴 것과 가져갈 것을 분리하는 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이 나이에 왜 이리 가진 것이 많은지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산다는 것에 대한 자책과 후회를 곱씹어 보기도 했다. 이제는 더 가질 필요도 없고 나눔을 실천하며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생활을 하고 싶어졌다. 사용하던 가구들, 옷, 소중한 나의 분신인 책 그리고 컬렉션 장식품 등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지금의 새 아파트에 들어서면 거실이 휑한 느낌이 든다. 자선단체에 기부할 상자 안에 마구마구 담아서 넘겨줄 때는 시원섭섭하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이제는 마음이 가볍고 아주 편안한 느낌이다. 내 인생을 만들어가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며, 나 자신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자기 효능감이 우리의 통제능력을 되찾아줄 수 있다. 이제는 남은 시간 동안 소소한 변신을 시도하며, 살면서 깨닫게 되는 지혜를 얻어야 하지 않을까…….
지난 주말, 오랜만에 한국입양아 호주 부모님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점심을 함께하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는 30여 년이 넘는 우정을 지키며 각자의 다른 자리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만나왔다.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서로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아낌없이 전한다. 지난 시간을 뒤돌아보고 추억에 젖는 호주 엄마 아빠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린다. 일 세대 입양아의 나이는 삼십 대 중반에 들어서 결혼하고 자녀들을 키우며 대부분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다. 한국 딸 두 명을 입양한 로즈와 앤디는 초등학교 교사로 은퇴 후에는 여행을 즐기며 손자들을 돌보기도 한다. 나는 로즈를 항상 천사라고 부른다. 사근사근하고 다정한 말투 안에는 늘 애정과 격려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한글학교에서 첫 수업을 시작하던 날을 회상하며 가슴이 찡해왔다. 코흘리개였던 그 아이들이 이제는 호주사회에서 당당하게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주 정부 수상실에서 수상 보좌관으로 일하는 K, ABC 방송국의 클래식 음악 담당 PD인 C, 모두가 자랑스러운 한국계 호주인이다. 호주인 부모들은 자신에게 입양된 자녀들의 정체성을 한국인이라고 가르치며 자녀들도 자신을 소개할 때 코리안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형성된 동서양 문화의 결합이라 말하고 싶다.
최근에 가장 놀라운 소식은 k-문화와 K-팝 음악에 빠져들면서 자신을 낳아준 친부모를 찾아서 한국을 방문했던 H가 있다.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좌절감을 속으로 숨겨두고 살았던 아이였는데 큰 변환의 접점을 맞은 것 같아서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자녀들의 소식과 다른 아이들의 소식을 전해주는 양부모님들의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환한 빛을 엿볼 수 있었다.
바로 그 빛은 “사랑”인 것을.
“행복, 그것은 누구든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이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만남 안에서 이루어진다.”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호주에서 지낸 나의 시간 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한국입양아와 양부모들과 만남,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내 시각을 더 넓고 새롭게 만들어주었으며 우정 이상의 행운이었다는 믿음을 가진다.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나를 발견할 때에 비로소 가장 나다운 자아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누군가를 생각하고 위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에너지가 솟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은퇴 전, 학교에서 바쁜 일상을 보낼 때는 시간이 나면 여행을 가고 싶다는 욕망이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그런데 막상 짐가방을 싸려고 하니 왜 이리 힘이 드는지. 어떤 지인의 말을 빌리면 나이가 들어서 그렇다는데, 나는 지금 시간의 변경선 위에 서 있는 모양이다. 시간은 나에게 주어진 만큼 또 주어질 만큼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마음 다짐을 하게 만든다. 영원할 수 없는 주어진 시간 안에서 새로운 삶을 보람있게 살고 싶을 뿐이다. 좋은 친구들과의 특별한 인연을 이어가며 만남을 계속하는 것도 꽤 괜찮은 삶의 한 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황현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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