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한해의 반 자락인 이달의 마지막 주, 그동안 마음에 담아놓았던 숙제를 과감하게 풀어버렸다. 지난 2월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던 일을 학교 측에 통보하고 은퇴를 신청했었다. 십 대 청소년들과 이십여 년의 시간을 함께하면서 생각이나 외형적인 모양새까지 꽤 많이 젊게 살아온 날들이다. 나의 그런 모습에 익숙했던 학교 동료들이나 지인들은 하나같이 같은 반응을 보였다. “왜, 왜 은퇴를 하는데, 말도 안 돼!” 교장은 나와의 이별이 믿기지 않는지 “벌써 은퇴할 나이가 되었나요? 아직 삼십 대가 아닌가요?” 하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마음은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한 학기를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했다.
공립학교에서 지낸 이십여 년은 내 삶의 중요한 시간이었으며 그동안 만났던 다양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과 같이 성장하고 배우는 과정을 겪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이십여 년간 유학생 프로그램(International Student Program)과 IB 프로그램(International Baccalaureate Diploma Program: 11, 12학년 준학사 과정)은 학생들과 나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일을 통해서 글로벌교육을 실감할 수 있었고 아시아, 유럽, 남아메리카 등 세계 각지에서 호주 공립학교에 유학을 온 학생들과 부모들을 만났다.
나의 특별한 업무는 언제나 도전과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정말 힘든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 속에서 나 자신과의 갈등 그리고 해결책을 찾아가는 성숙함도 배웠다. 학생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들의 감정과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지원하면서 십 대 청소년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소중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학생들과 함께한 시간은 또한 나에게 큰 보람과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학생들의 성장과 발전을 지켜볼 수 있었고, 그들이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었다.
다양한 배경과 문화를 가진 학생들과의 만남은 나에게 열린 마음과 존중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었다. 다국적의 유학생들은 학교에서의 나의 경험을 더욱 풍부하고 흥미롭게 만들어주었으며, 이를 통해서 나 자신의 역할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었다. 서로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며 세대를 떠나서 제대로 된 소통을 할 수 있게 한다. 은퇴 결정은 누군가가 학교를 떠나라고 등을 떠밀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결정하고 때가 찾아왔음을 깨달은 것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충고하듯 말했다. “축하합니다.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기 위한 순간이 왔네요.”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 상태이지만 학교에서 보낸 날들을 오랫동안 기억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앞날의 남은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싶다.
내가 근무했던 학교의 행정빌딩 복도의 교장실 앞에 한국의 전통예술을 대표하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장승 둘이 학교의 보호자로서 의젓하게 버티고 서있다. 안동 하회마을의 파계승 탈춤전수자이며 솟대와 장승의 명인 김종흥 선생님의 작품이다. 십여 년 전에 브리즈번에서 탈춤 공연을 하며 그 자리에서 유칼립투스 나무를 직접 깎고 다듬어서 만든 아주 귀한 예술 작품이다. 그 작품들을 고맙게도 우리 학교에 기증해 주셨다. 한국문화를 해외에 알리는 홍보대사의 역할을 기꺼이 하시는 그분의 마음에 호소해서 두 장승을 학교의 가디언으로 모셔온 것이다. 그리고 장승 작가는 나와 함께 학교 강당에서 안동 하회탈춤 공연을 하는 깜짝 이벤트를 벌려서 학생들과 동료 교사들의 열띤 환호를 받았었다. 교장은 장승에게 ‘인두루필리학교의 수호신(Guardian of Indooroopilly State High School)’이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
교장은 나의 은퇴를 축하하는 송별모임 모닝티 파티를 학교회의실에서 열어주었다. 송별회 장소가 바로 장승이 서 있는 곳과 가까워서 장승을 껴안고 기념 촬영을 했다. 왠지 감회에 젖어 들며 숙연해지는 마음이 되었다. 가장 친한 동료가 편지를 낭독하는데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감정을 자제하고 있던 나도 울컥하는 심정이 되어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나는 답사의 한 부분에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비록 떠나지만 아주 소중하고 귀중한 한국문화 예술품을 학교에 남겨두고 갑니다. 교장 선생님, 부탁이 있어요. 인두루필리학교의 가디언에게 일 년에 한 번씩 기름칠해서 장승에 금이 가지 않도록 잘 보살펴주세요.” 교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을 했다. 한국의 부천영화제에 몇 번 다녀온 이후로 나만 보면 김치와 막걸리를 좋아한다며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사람이다. 따스한 동료애가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 조용히 스며드는 듯했다.
다음날에는 성당 교우들과 함께 바이런 베이에 데이투어를 가는 행운을 가졌다. 마치 나의 은퇴를 위로(?)해주는 듯 들뜬 기분이 되었다. 오랜만에 다시 본 바이론 베이의 바다는 여전히 신비롭고 환상적이었다. 사파이어 보석을 뿌려놓은 듯한 확 트인 태평양의 푸른 바다, 그리고 그 위의 절벽에 우뚝 솟은 하얀색의 등대는 내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먼 길 험난한 항로를 헤쳐오는 배를 인도해주는 구원자의 역할, 그 등대의 불빛이 다가올 나의 새로운 미래에도 함께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제, 스스로 파이팅을 외치며 힘을 모아본다. 아자~ 아자! 은퇴자! 홧~~팅!
황현숙(칼럼니스트) teresacho737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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