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파제를 걸으며 바라본 석양
올해도 한 달이 훌쩍 지났다. 불꽃놀이 보며 연말을 보낸 것이 어제 같은데, 세월 빠르다는 판에 박힌 말이 저절로 나온다.
새해가 되었다고 특별히 달라질 것 없는 은퇴 생활이다. 소소한 집안일을 한다. 동네 바닷가를 걷는다. 책도 읽지만,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도 많다. 이렇게 하루하루 지내는 동안 달력 한 장이 넘어가고 2월로 접어들었다.
일상적인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다. 가장 쉬운 방법은 집을 떠나 지내는 것이다. 가고 싶은 목적지를 찾아본다. 집에서 두어 시간 운전하면 도착할 수 있는 남부카 헤드(Nambucca Heads)로 정했다. 가까운 곳이라 몇 번 들렸던 동네다. 바다가 아름다웠다는 기억이 있다. 그러나 숙박을 한 적은 없다.
떠들썩한 휴가철이 지나서일까.. 야영장(Caravan Park)을 쉽게 예약했다. 위치와 시설이 좋은 야영장이다. 따라서 다른 야영장에 비해 가격은 비싸다. 한 사람이라고 해도 두 사람 지내는 것과 같은 가격이다. 혼자 지내는 사람을 위한 가격은 왜 없는 것일까. 숙소에 갈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짐을 챙긴다.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이라 챙겨야 할 물건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외진 동네로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 지내는 짧은 여행이다. 혹시 잊고 온 물건이 있으면 동네에서 구입할 생각으로 대충 짐을 꾸려 자동차에 싣는다.
캐러밴을 자동차에 연결하고 길을 떠난다. 한여름이 지난 2월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덥다. 에어컨을 켜고 고속도로를 달린다. 도로에 캐러밴을 끌고 가는 자동차가 많이 보인다. 문득 호주에는 놀러 다니는 사람이 많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시간과 재정적인 여유가 있는 여행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을 즐기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내일 걱정은 하지 않는 삶이라고 해야 할까.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캐러밴이 야영장을 차지하고 있다.
차박의 삶을 즐기는 여행객들의 전형적인 밴 자동차
파도 소리 들리는 해안에 자리 잡은 야영장에 도착했다. 휴가철이 지났다고 하지만 빈자리가 많지 않다. 자리를 배정받고 캐러밴을 주차하는데 건너편에 있던 사람이 와서 주차를 도와준다. 혼자 캐러밴 주차하는 어려움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고맙다.
캐러밴을 주차하고 물건 정리하는데 잊고 온 물건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한다. 가림막을 치는 데 필요한 망치가 들어 있는 연장통을 싣지 않았다. 야영장에서는 필수품에 가까운 야외용 의자도 가지고 오는 것을 잊었다.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요즈음 깜빡할 때가 많다. 망치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빌려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자에 대한 아쉬움은 크게 남는다.
호주에서 가장 길다는 바다 생물들을 조각한 작품
방파제 바위에는 수많은 사람이 흔적을 남겨 놓았다
더위도 식힐 겸 바닷가 방파제를 걷는다. 파도 소리와 함께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감싸 안는다. 방파제에 길게 늘어진 바위들은 다양한 그림과 글로 치장되어 있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흔적을 남겨 놓은 것이다. 가족 이름과 함께 1983년에 이곳에 왔다는 글이 고래 그림과 함께 쓰여 있다. 핑크 색을 듬뿍 담은 바위에는 남자와 여자 이름이 사랑스럽게 쓰여 있다. 한국 사람 이름도 2022년 12월이라는 날짜와 함께 쓰여 있다.
저녁 시간에는 인터넷으로 갈만한 곳을 알아본다. 동네 정보가 나온다. 인구는 7,000여 명 정도다. 남부카(Nambucca)라는 이름은 원주민 말로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해변과 멋진 바다 풍경이 동네 소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 풍경
다음 날 아침 자동차로 작은 동네를 둘러본다. 전망대가 있다는 이정표가 보인다. 화살표를 따라 찾아간다. 서너 대의 자동차가 주차해 있는 전망대에 도착했다. 동네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비취색을 내뿜는 바다와 조화를 이루는 모래 둔덕 그리고 멀리 보이는 산이 어우러진, 보기 드문 경치다.
풍경에 매료되어 사진을 찍고 있는데 큼지막한 카메라를 든 중년 남자가 다가온다. 호주를 여행하며 도큐먼트를 촬영한다고 한다. 카메라에 관심을 보이는 나에게 카메라에 대한 설명이 장황하다. 동영상을 주로 찍는 카메라다. 호주 전역을 관광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다. 부럽다.
전망대를 떠나 해안 도로를 따라 운전한다. 한적한 해변에 도착하니 밴(봉고차)이 주차해 있다. 차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떠돌아다니는 여행객이 사용하는 자동차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자동차 문에 비치타월이 걸려있고 어수선한 잠자리가 있는 내부가 보인다. 남을 의식하지 않으며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방파제 바위에는 수많은 사람이 흔적을 남겨 놓았다
야영장으로 돌아와 늦은 오후를 보낸다. 특별한 계획을 세우고 떠난 여행이 아니다. 음악을 틀어 놓고 책을 읽는다. 해가 질 무렵에 어제 걸었던 방파제를 다시 찾았다. 석양을 보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더위를 피해서일까, 방파제를 산책하는 사람이 많다. 바다 끝에 보이는 산을 넘어간 태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한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에서 심호흡하며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빠져든다.
다음 날 아침은 일찍 일어났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도 없이 혼자 지내는 캐러밴 생활이기에 가능하다. 새벽바람을 맞으며 방파제를 산책한다. 해가 뜨기 전이지만 많은 사람이 걷는다. 큼지막한 낚싯대를 바다에 던져 넣고 대어를 기다리는 강태공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방파제 끝까지 걸으니 바다에서 엷은 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해가 떠오르는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핸드폰에 일출을 담으려고 분주하다.
게으름 피우며 아침을 보내고 동네 중심가를 찾았다. 가게가 줄지어 있는 중심가에는 사람이 제법 많다. 카페에는 여느 동네와 다름없이 브런치(brunch)를 즐기는 나이 든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시선을 끄는 것은 경찰서를 둘러싼 담벼락에 조성된 모자이크다. 돌고래, 문어 등 바다 생물들을 섬세하게 타일로 조각해 놓았다.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인 작품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호주에서 가장 긴 조각품이라고 한다.
점심시간이다. 호주를 여행하며 가장 아쉬운 점은 한국 같은 맛집이 없다는 점이다. 식사하기에 무난한 재향군인회가 운영하는 클럽(RSL Club)을 찾았다. 남부카 강(Nambucca River) 옆에 위치한 현대식 건물이다. 식당은 경치 좋은 3층에 있다. 분위기가 좋다. 강이 한눈에 내려 보이는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4인용 식탁을 차지했다.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혼자라고 구석진 곳에서만 식사해야 할 이유는 없다. 당당하게 맥주 한 잔과 스테이크 햄버거를 앞에 놓고 풍경을 즐긴다.
남부카 헤드에는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강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길이는 3.5km 정도 되는 적당한 거리다. 하루 한 번 이상 산책로를 걸으며 시간을 보낸다. 강을 따라 걷다 보면 큼지막한 물고기 떼를 만나기도 한다. 물안경 쓰고 바다 경치를 즐기는 수영객, 카누를 저으며 강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그리고 수영하는 그룹도 볼 수 있다.
방파제를 걸으며 바라보는 바다 풍경과 파도 소리도 일품이다. 낚싯대를 펼쳐 놓은 강태공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방파제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먼저 좋은 곳으로 떠난 사람을 생각하는 많은 글과 사진이다. 태어난 날짜를 보면 나와 비슷한 나이도 많다. 떠날 준비를 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다시 확인한다.
세상에 생겨난 모든 것은 언젠가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한다. 라틴어는 전혀 모르면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문구가 떠오른다. 죽음을 기억하라(메멘토 모리), 운명을 사랑하라(아모르 파티), 현재에 충실하라(카르페 디엠)
불편한 캐러밴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향한다. 메멘토 모리, 아모르 파티, 카르페 디엠을 되새김질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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