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지난 주에 이어, 토라의 대표 정신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쉐마-들으라’ 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 보고자 한다. 폴란드의 대대로 유명한 랍비 가문의 후손인 야곱 라이너는 선조의 뒤를 이어 ‘야곱의 집’이라는 주석을 썼는데, 그가 성전 패망의 애도일에 ‘듣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 사람의 관점에서는 보는 것이 듣는 것보다 더 정확한 지식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사실, 듣는 것이 더 큰 힘이 있다. 보는 것은 형체의 외부를 인식하지만, 듣는 것은 내면의 것을 감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 이스라엘이여 잠잠하여 들으라(신명기27:6) “는 것을 상기시킨다고 설교했다.
그는 “ 하나님은 결코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분이지만, 들을 수 있고, 듣는 것은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친밀감과 변환을 경험하고 ‘차이나는 클라스’의 인생을 살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르네상스 문화의 산실-피렌체
1. 그리스 문화
BCE 5-3세기의 그리스는 문화와 고대 문명에 있어 단연 앞서 있었다. 예술과 건축, 조각과 극장 등 시각적인 분야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거대한 성취를 이루었다. 그리고 나중에 유럽의 르네상스는 세상과 예술, 고대 그리스의 재 발견을 이룬 최고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이 분야에서 드러낸 것이 없지만 서방에 버금가게 기여한 점들이 있다. 그들의 관심이 눈에 보여지는 것 보다는 들리는 모든 소리의 영역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교는 눈이 아닌 귀로 표출 되는 문화의 우수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스 콘과 같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문화’ 학자는 “ 그리스 사람들은 공간과 시각과 조형의 감각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마치 흐르고 떠다니는 것과 같은 인생의 요소들을 안식과 공간과 한계의 영역 속으로 변환 시켰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이 듣는 만큼 보지 못했다. 그들의 주요 조직은 ‘귀’이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날 때 그는 아주 잠잠한 세미한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그것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결코 그리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라고 고대 그리스와 히브리 문화의 차이를 이렇게 비교 했다.
르네상스의 예술과 조각
그리스, 헬라의 서구 문화는 지금까지, 지식에 관해 말할 때 모두 보는 것과 관련해서 표현했다. 이해 했다는 말을 할 때 ‘ I see, 라고 하고 사람들의 주목을 위해 ‘Look, 또 많이 쓰는 Idea 란 단어인 ‘Video’가 같은 라틴어 뿌리에서 온 것을 상기시킨다. 이것들이 모두 고대 그리스에서 부터 유래한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2. 히브리 문화
반면, 유대인들은 생각은 보는 것에 기인 하는 것이 아니라 들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그들의 표현의 기초를 서술한다. 그리스인들에게 진리는 보는 것에 있고 유대인들에게는 듣는 것에 기인한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이방 문화는 신들을 본다. 그들에게는 현상의 문제들이다. ‘태양, 폭풍, 땅, 바다, 강력한 힘등이 인간에게 치명적이지 않도록 경감해주는 것들이다. 무력의 파쇄가 현상의 진실로 나타나는 다신교의 상상의 시각은 인간의 운명과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의 세속 문화에서도, TV나 스마트 폰, 테블렛, 컴퓨터 스크린등도 모두 시각적 표출이고 이미지의 세계이며 아이콘들이다. 이 역시 옛 이교도들의 잔재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교는 그에 반해 사람 중심의 문명으로 사람들간의 말을 통한 소통을 중시한다. 대화는 영혼과 영혼을 연결하고 대화로 공동체를 형성한다. 고대의 조상들과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보이는 세상의 부분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호렙산에서의 엘리야와 하나님과의 만남은 그것을 잘 서술하고 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왕상 19: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열왕기하19:12-13)”
여기서 지진과 불과 폭풍은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조용한 음성은 볼 수가 없다. 유대인들은 잠잠한 것에 집중할 것을 배운다. 탈무드는 흔히 말하는 ‘ 얇은 침묵의 소리’ 는 ‘오직 들으려고 집중 할 때만 들을 수 있는 소리’라고 정의 한다.
동굴 속에서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된 선지자 엘리야
3. 차이나는 클라스
탈무드는 유대교의 믿음은 ‘존재’나 ‘지적 이해’에 있지 않고 서로 소통하는 사이의 ‘관계’에 있다고 정의 한다. 그래서 알렌 터닝은 ‘인간성의 내실은 말을 통한 소통의 능력에 기인한다’라고 평가한다. 프로이드 역시 신을 부정하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심리 분석 치료는 ‘ 소통 치료’ 다른 말로 ‘경청 치료’라고 부르곤 했다. 이는 ‘내가 듣는다’는 말이 곧 ‘내가 이해한다’는 말로 받아들여지는 현대의 미국적인 정신 분석 문화에도 영향이 있다고 평가한다. 듣는 것을 강조하는 유대인의 신앙은 신과 친밀함을 교감하는 정서에 기초하고 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서 죄를 짖고 숨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소통의 문을 열었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다가가 대화를 걸어온 것이다. 탈무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무한의 존재가 유한한 존재에게 말을 걺으로 관계가 형성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말이 형이상학의 심연에서, 영혼과 영혼이 연결되는 다리가 된다고 본 것이다. 하나님은 하갈의 부르짖음을 들었고, 애굽의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을 들었고, 모세에게 형제들의 억울함을 들어주라는 말이 현대의 법정에서 ‘Hearing’이라고 불리는 것도 같은 맥락의 뿌리를 갖고 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요청한 가장 큰 선물인 ‘지혜-Wisdom’는 실제 ‘hearing Heart’로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 줄 수 있는 ‘듣는 마음’ 이었다는 것도 히브리적 세계관의 기초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광야 속의 침묵
탈무드는 ‘듣는 것은 기술이며, 종교적 훈련이며 예술이고, 또한 영혼의 가장 깊은 심연 속의 반향’이라고 설명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오랜 시간, 광야의 척박함과 고요 속에 내버려진 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훈련되기 위한 것이었음을 비로소 조금 이해할 수 있는 힌트가 된다. 솔로몬 처럼, 소란한 세상속에서도 외롭고, 버려지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억울한 사람을 구해 낼 수 있는 지혜가 습득 되게 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탈무드엔 ‘클라스가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는 해법을 그저 덤덤히 알려주는 신적 너그러움이 담긴 듯하다. 샬롬!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 문화교류학박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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