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인들은 이집트에서 종으로 살았다. 그들은 억압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 그리고 구원으로 가는 길을 원하였다. 오늘날에도 의로움을 구현한다지만 폭력과 테러가 많이 일어난다. 검사, 판사, 변호사와 감옥의 수가 정비례한다. 정의와 자비가 서로 싸우는 현실에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정말 정의와 자비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폭력이 없는 정의, 미움이 없는 옳음, 이를 위한 첫 걸음은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불의와 폭력을 미워해야 하지 않을까?
운동 감독은 전략을 짜고 체력을 기르며 팀 훈련에서 선수들과 운동장에 함께 있지만, 경기가 시작되면 오히려 감독은 운동장 밖에 있어야 한다. 테니스에서 코치는 코트 안에 함께 있을 수 없다. 게임 중간 쉬는 시간에도 남자 테니스선수들은 코치들과 대화가 불가능하다. 오케스트라는 다르다. 지휘자는 연습과 실제 공연 때나 항상 공연자들과 함께 한다. 지휘자가 실수한다면 단원들도 실수를 하기 때문이다. 지휘자와 단원들은 온전히 하나이며 전체이다.
정의와 자비도 그렇다. 정의가 실행되는 과정이 편파적이고 불공정하다면 의로움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정의와 자비는 파트너다. 서로 반대할 어떤 이유가 없다. 자비와 정의는 다른 길이 아니라 다른 수단과 방법으로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간다. 한 방향의 도로에서 같이 달리는 다양한 자동차들과 같다. 그 길은 평화라는 동일한 목적지를 함께 가지고 있다. 평화로 가는 길 위의 자동차들은 정의와 자비다.
사는 것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마음이 찡한 자비의 마음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추기경 카스퍼에 의하면 정의는 최소한의 자비이고, 자비는 최대한의 정의다. 자비에 대한 갈망이 정의에 대한 갈망을 능가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정의는 무엇일까? 평화는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라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씀했다. 정의는 또한 자제와 관용을 요구하는 덕목으로서 수양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 세상에는 필요한 정의들이 많이 있다. 믿는 이들에게 정의란 자비하신 하느님의 의로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우리 안에서 움직인다고 믿으면 된다. 정의와 믿음은 그 점에서 같은 말이다. 믿는 대로 하느님의 의로움이 우리 안에서 발생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씀하신다. 온전한 변화를 향하는 회심(悔心)은 정의와 연대하는 구체적인 헌신이다.
자비는 최대한의 정의이니, 최대한의 의로움을 향하여 증거하고 연대하는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하는 삶이 자비를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자비란? 미안마, 아프카니스탄의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일텐데... 우리도 코로나 판데믹 델타 변이로 너무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찌 이런 일이! 화도 나고, 원망도 들며, 미움이 올라와, 기도도 손에 잡히지 않고, 어쩔 땐 주님의 말씀도 들어오지 않는다. 아! 이렇게 마음이 굳어가고 생각은 많아지며 힘든 몸을 모두 체험한다.
억지로 뒤집어 보면 이런 시간이 언제 다시 올까! 하느님의 선물 같은 생각도 억지로 들게 한다. 아마도 초기 교회의 박해를 체험하는 듯하다. 그래서 초기 신자들은 maranata! 주님. 어서 오소서! 하고 기도했다. 이처럼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두려움과 불안을 이긴다면 분명 희망의 새로운 하늘, 새 땅이 다가 오리라고 믿는다.
지금 사랑하는 친구들도 많이 보고 싶다. 혹시 오해를 해서 미워했던 친구들은 정말 보고 싶다. 하지만 지금, 나쁜 종말은 분명 아니다. 주님의 끝은 새로운 시작이고. 축복이기 때문이다. 오늘 혼자 독거의 시간을 보내시는 모두를 위해 나는 기도로 기억한다. 그들이 몸, 마음, 정신의 건강을 챙기는 이 시간의 날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곽승룡 비오 신부 (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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