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도 걸었다. 어제도 걸었다. 그 전날도 걸었다. 내일도 걸을 것이다. 다음 주 코비드 록다운이 풀릴 때까지 걸을 것이다. 그것 외에는 밖에 나갈 일이 없다. 1년 반 전에 그토록 많이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걷고 있다. 그때는 지겨웠지만 지금은 감사하며 걷는다. 물이 있고 석양이 있으며 내 시선의 소실점이 되는 커피 공장 굴뚝이 있다. 그곳에서는 나의 후각을 자극하는 커피 향이 사이렌의 노래처럼 흘러나온다. 나는 오디세이가 아니기에, 그 향기가 내 온몸을 충분히 감싸도록 기꺼이 내어 준다. 커피는 마실 때 보다 원두를 갈고 볶을 때가 더 좋다. 목으로 넘기는 미각보다는 후각으로 마시는 커피가 더 좋다.
2.
아주 오래전, 나는 아라비아반도의 동쪽 끝 시장길을 걷고 있었다. 한국 건설회사들의 현장과 아람코 석유회사가 맞닿아 있는 길이었다. 혼미하도록 강렬한 커피 향이 내 코를 파고들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진원지로 여겨지는 잡화 상점으로 들어갔다. 자기들이 마시려고 커피를 끓이고 있었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저도 한 잔 마실 수 있을까요? 향기가 정말 죽이네요!” 나그네를 기꺼이 대접하는 베드윈의 후예는, 햇빛에 거칠어진 얼굴에 자애로운 웃음을 함빡 담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한잔 따라주었다. 맛은 그저 그랬다. 크지 않는 잔을 반쯤 기울였을 때는 진흙 같은 잔류물도 보였다. 원두커피를 볶고 갈아서 그냥 끓인 커피였다. 맛은 그랬지만 그 향기는 내 머릿속에 강렬한 추억으로 남아 있게 된다. 그 추억을 잊지 못하고, 시드니 뉴타운이나 어번에 가서도 터키쉬 커피를 시킨다. 맛은 여전히 그렇고 그렇다. 그때 내 머리에 각인된 그 향기를 그 어디서도 소환해 낼 수가 없다. 커피 공장 굴뚝에서 흘러퍼지는 향기에서 반쯤을 맡아낼 뿐이다.
3.
코로나-19에 감염되면 후각과 미각을 상실케 된다. 한 지인은 코비드에서 몸은 회복되었지만 후각과 미각은 6개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음식을 먹어도, 커피를 볶아도 전혀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삶은 얼마나 건조할까? 그럴 때는 뇌를 달래보는 수밖에 없다. 미각/후각을 인지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뇌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맛을 기억하는 원래의 경로는 이렇다. 향기의 정보가 코와 입을 거쳐 머리로 올라갔다가, 다시 가슴으로 내려와 마음을 푸근하게 만든다. 긴급 상황이 벌어졌을 때는, 이 과정 중 입/코에서 뇌로 올라가는 과정을 생략해도 된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직접 내려오게 하면 된다.
그래서 추억은 소중하다. 좋은 추억은 현실을 향기롭게 만든다. 그 오래전, 아라비아 상인이 피워낸 향기를 다시 소환하는 것처럼.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한적함이 필요하다. 바쁘면 안 된다. 작디작은 뇌세포 하나 속에 깃들여진 냄새의 추억을 소환하기 위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어쩔 수 없이 한가해진 록다운 기간은 삶의 본질을 소환해 볼 수 있는 기막힌 기회다.
4.
나는 사진을 찍는다. 매일 산책을 하면서 몇 걸음 걸었는가는 스마트폰을 보면 된다. 그 산책의 시간이 얼마나 아름다웠는가는 찍어 온 사진을 통해서 본다. 내 책상에는 두 개의 화면이 있다. 노트북 컴퓨터를 대형 모니터에 연결해 놓았다. 큰 화면에서 이뤄지는 대부분의 작업은 건조하다. 이 글을 쓰는 일도 지적 노동이다. 옆에 있는 작은 화면에서는 유튜브가 돌아가거나, 내가 찍어온 사진들이 1분마다 장면을 바꿔가며 보여 준다. 그렇게 나는 큰 화면을 통해서는 현실을 살고, 작은 화면을 통해서는 추억을 소환하며 기대를 현실화한다. 음악을 들으며 연주회장에 있음을 추억하고, 이국의 영상을 보면서 여행의 발자국을 떼며, 사진을 통해서는 지나칠 때 보지 못했던 디테일을 본다. 바쁘게 걸어가는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이다. 내가 보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 것들. 그것들을 다시 발견하며, 현재의 고달프고 건조한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5.
지금 우리가 올려다보는 밤 하늘의 별빛들은 실상이 아니다. 수 억 년 전에 존재했던 빛들의 그림자다. 그러면서 질문한다. 실체는 무엇인가? 무엇이 진실인가? 내가 경험한 그것인가? 아니면 내가 나중에 확인하게 되는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인가? 아주 오래전 플라톤이 말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동굴 속의 그림자일 뿐. 왜? 우리의 몸과 시선이 동굴 안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 결국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그림자다. 몸과 눈을 돌려야 한다. 동굴 입구를 향해 한 걸음씩 나가야 한다. 그때 비로소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동굴 경계에는 ‘한계 Limit’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한계는 ‘접근 금지’란 말이 아니다. Doorway(현관)이란 말이다. 복잡한 세상에서 편안한 집으로 들어가는 현관, 충분한 휴식 후 다시 세상으로 뛰어나가기 위해 다시 거쳐야 하는 현관이다. 정신질환을 다루는 병원에서는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사람, 혹은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임시 거처를 말할 때 Doorway란 말을 쓴다. 그곳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나옴을 전제로 한다.
지금 코비드 록다운은 ‘현관’이다. 필요하면 평안의 집으로 들어가라. 참되고 좋은 것을 추억하여 행복해지라. 머지않아 록다운이 풀릴 것이다. 그때 잘 쉰 사람만이 힘차게 세상을 향해 뛰어나갈 수 있다.
김성주목사(새빛장로교회) holypilla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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