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경 ‘유딧트’와 인간의 기준
벌써 몇 년째 ‘신학적 인문학’이란 강의를 해 오고 있다. 시중에 하도 여러 종류의 ‘인문학’이 범람(?)을 해서 그런 하나님 없는 인문학의 문제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데 수준이 떨어지는 인문학 유행의 문제를 어떻게 성경의 조명 아래서 이해해볼까하다가 개발된 과목인데, 학우들에겐 꽤 관심을 끓었던 과목이다.
그 과목을 시작하는 어간에 조선 문인화의 백미인 추사의 ‘세한도’와 더불어 소개하는 서양화가 바로 오늘 보려는 크리스토파노 알로리 (Cristofano Allori, 1577년 10월 17일 ~ 1621년 4월 1일, 이탈리아 화가)가 1613년도에 그린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든 유디트 (Judith, with the head of Holofernes)’란 그림이다.
무릇 그림이란 것이 어떤 것은 ‘명화’가 되기도 하고, 그저 이발소 작품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 그림은 구약 성경 중 정경이 아닌 ‘외경’으로 분류된 책 ’유디트’의 주제로 그린 그림이며, 서양화단에서는 이 유디트를 주제로 그려진 유명한 화가의 그림만해도 수 십점에 이른다. 이 그림은 특별히 여인의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팜무 파탈’ 경지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에서 시작해서, 온 인류가 함께 고민해 보아야 하는 종족 윤리적 문제를 다루기에 더욱 화단을 뜨겁게 달구었던 고뇌하는 화가들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물론 필자는 서양화를 전공한 사람이 아니기에 그림에 대한 미술사적, 혹은 미학적 가치를 논하는 일에는 그리 해박하지 못하다. 비록 필자의 부친이 꽤 유명한 서양화가라 어릴적부터 집에 있는 아버님의 아틀리에에서 나는 유화물감 냄새에 찌들려 살았다곤 해도, 그림에 대해선 그저 평론가들의 평을 몇 권 주어 읽고는 평하는 것이니 그 점은 고려하고 들어 주셨으면 좋겠다.
일단 이 그림을 이해하려면 그림이 주제가 되는 구약 외경인 ‘유디트’에 대해서 간략히라도 아는 것이 필요하다. 고대 이스라엘의 ‘베툴리아’ 마을에 앗수르의 대장군 ‘홀로페르네스’가 대군을 이끌고 마을을 포위하고 항복을 요구했다. 마을의 원로들은 이 난국을 수습할 방안을 마련하지 못해 머리를 싸매며 기도했지만 특별한 대안이 없이 전전긍긍하며 마을이 몰살될 위기에 처해있었다. 항복을 하자니 하나님의 백성이 저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에게 항복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울 것이고, 결사항전을 해서 싸우자니 전멸할 것이 불보듯 뻔한 그런 전세였던 것이다. 그런 진퇴양난의 유곡에서 그 마을의 젊은 과부 ‘유디트’가 마을의 원로들에게 나아가 자기에게 방도가 있으니 기회를 달라고 요청한다.
별 대안이 없던 유대 마을의 지도자들은 허락을 하고, 젊은 과부 유디트는 과부의 어두운 옷을 벗어 던지고 꽃 단장을 한 후에 하녀 한 사람과 약간의 예물을 준비하여 적진으로 나아갔다. 적진에서 여러가지 검문 검색을 거친 후 마침내 천하의 대장군 홀로페르네스 앞에 서게 된다. 그녀는 거기서 그 옛날 다윗을 만났던 ‘아비가일’이 그랬던 것처럼, 홀로페르네스 대장군을 하나님이 이 시대를 구원하라고 보낸 구세주라고 치켜세우며, 저 유대의 늙은이들이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사자를 몰라보고 저렇게 버티고 있으니 자신이 답답해서 이렇게 친히 대장군을 맞이하러 왔다고 치하하고는 장군의 마음을 산다. 홀로페르네스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천하 절색의 미인이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감히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라고 칭찬하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았을까! 남녀간의 운우 지정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이렇게 대장군의 마음을 훔치고, 전장에서 피로해진 장군과 함께 있게 된 유디트는 한 동안 그이와 좋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어느 날 완전히 긴장을 풀고 거나하게 한잔하여 취해 쓰러진 대장군을 그녀의 하인의 도움을 얻어 목을 베고는, 그 밤에 장군의 머리를 수습하여 몰래 유대의 마을로 도망을 친다는 이야기이다.
다음 날, 유대의 마을에서는 잔치가 벌어지고, 총사령관의 목 없는 시신 앞에서 놀란 앗수르 군대는 신이 노하여 그렇게 되었다면서 한 걸음에 줄행랑을 해서 유다의 마을 베툴리아가 앗수르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내용의 이야기다.
물론 이 그림은 배경을 어둡게 처리하고 여인의 몸으로 거사를 감행한 젊은 과부의 약간은 겁에 질리고 긴장한 듯한 표정과 이 결과 자신이 죽어도 좋다는 성취감이 묻어 나오는 유디트의 표정은 정말 일품이라 아니할 수 없고, 또 그런 거사를 치루는 젊은 주인을 바라보는 노회한 여종의 걱정반 존경반의 감탄하는 눈매묘사 또한 거장의 솜씨라 아니할 수 없겠다. 그림 후기에서 작가 알로리는 그 하인은 자신의 어머니를 대역으로 했고, 목 잘린 장군은 자신의 초상화라해서 더욱 유명해진 그림이다.
그러나, 이 그림이 단지 그런 표정 묘사나 음영 배치만으로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아니다. 이 유딧트의 행위는 유대 민족에게는 우리의 안중근 의사의 쾌거처럼 민족을 구원하는 영웅적 행위임에 틀림없으나, 반대로 앗수르의 입장이나 그 아들의 입장에서는 부모를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용서하지 못할 행위인 것을 어쩌랴!
그래서 화가뿐 아니라 철학자에 윤리학자, 문화학자들까지 논쟁에 가세한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그렇다! 인간이 기준이 되면… 우리가 하는 일에서 인간이 기준이 되면, 거기엔 항상 음영이 함께 존재하게 되는 것 아닐까? 인간의 세상에 창조주 하나님 외에 절대 선이 있을 수 있을까? 사람은 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려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고, 학자들은 그런 경향성을 ‘세계관’이라 그러기도 한다.
그러나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내 좋으라고, 내 판단, 내 기준대로만 살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시드니의 겨울이 깊었다. 내 생각 잠시 내려놓고, 흘러가는 저 구름 위에 더 높이 계실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에 남은 생애를 헌신해 봄이 더 의미있고, 힘이 나게 하는 것이리라! 자위하며 늙어 힘없어 가는 몸 주님께 의탁한다.
김호남목사(PhD, USyd)
시드니신학대학 한국신학부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