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한국 해군 사관생도들의 순항훈련 부대를 전송하면서 느꼈던 생각들을 정리해 보려한다. 이민 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저런 이유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서로 상처들을 주고받고 하는데, 들어보면 상처를 준 사람은 하나도 없고, 모두 상처받은 사람들뿐인 것 같다.
고향 떠나 영어권 다문화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이민자들이 조금은 성숙한 모습으로 이런 일들을 소화해 갔으면 하는 작은 바램으로…
각설하고, 선상에서는 막 해군 군악대의 송별 팡파레가 시작됐다. 악대를 지휘하는 악장의 능란한 손놀림에 따라 군악대는 고향냄새 물씬 풍기는 흘러간 옛 노래 가락들을 토해내며 송별 나온 동포들의 마음을 휘저어갔다. 한참을 그렇게 마음을 흔들어 놓더니 드디어 호주 해군 제독을 비롯하여 함상에서 송별연을 마친 이곳의 유지들이 하선을 했고 시드니를 떠나는 순양훈련함대도 곧 바로 송별을 위한 차비로 부산해졌다.
곳곳에 걸려있던 환송 현수막이 걷혀지고 배를 오르내리던 트랩도 올리워졌다. 장기간의 원양 훈련에 그을린 사관생도들과 늠름한 장병들이 하얀 제복을 입고 갑판 위에 도열하고 있었다.
두 척의 호위함이 천천히 항구에서 멀어질 때만 해도 그저 ’이제 떠나나 보다‘하며 가볍게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함대 사령관이 탑승한 마지막 배가 닻을 걷어 올리고 출항 뱃고동을 울리며 초등학교 졸업식 때 불렀던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정아‘하던 그 곡이 연주되기 시작하자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급하게 내가 송별해야 하고, 손을 흔들어주어야 하는 후배가 어디에 있는 지를 확인했다. 닻은 완전히 걷어 올리워졌고 큰 군함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선내 방송으로 ”차-려-엇"하는 구호가 나오더니 함대에서만 쓰는 짧고 힘있는 시그널과 함께 갑판에 도열해 선 온 해군 장병들이 일제히 큰 함성으로 부둣가의 환송객들에게 송별의 경례를 붙였다.
환송객 대표격인 호주 해군의 제독일행도 절도있는 동작으로 답을 하고, 민간인인 동포들도 얼떨결에 손을 눈썹 옆에 같다대며 답례를 했다. 그렇게 짧게 인사를 주고받는 동안, 장병들의 경례가 아직도 모자의 창 끝에 붙어있는데도 무심한 배는 서서히 후진하며 부둣가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경례를 한 후, 군인들과 송별객들은 이제 격식을 갖춘 경례가 아니라 손을 흔들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기 시작했다. 배의 중앙에 있던 후배가 나를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보려고 앞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군인들과 환송객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데 유독 그 후배와 나는 양손을 마주 흔들며 자리를 이동하고 있었다. 그는 후진해서 뒤로 빠지고 있는 배의 선수쪽으로, 나는 민간인이 갈 수 있는 울루물루 해군 기지의 가장 끝자리로 움직이며 손을 흔들어댔다. 서로를 조금이라도 더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시드니의 아침 햇살이 따갑게 느껴진 것은 아마 그 때쯤이었을게다. 후배는 아예 장교 모자를 벗어 흔들며 “형, 나 여기있어!”하며 고함치는 것 같았다. 함대는 고동을 울리며 멀어져 갔고 훈련되고 멋있는 제복을 입은 사관생도들은 여전히 자기의 위치를 고수하며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먼 이국에 사는 동포들이여, 힘을 내십시오!”하는 것 같았다. 점점 시야에서 희미해져 가던 후배는 이제 군함의 맨 앞까지 나왔다. 하얀 모자를 벗어서 크게 흔들어 댄다. 해군 장교의 체면보다도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인간의 본능이 먼저인가 보다. 후배는 배 맨 앞에 설치된 국기 계양기가 있는 난간 위에까지 걸터 올라 모자와 양손을 흔들고 있었다.
갑자기 마음속이 ’찡‘하게 울리며 눈물이 핑돈다. “녀석하고는...”에라 모르겠다, 나도 양복의 윗도리를 벗었다. 목사의 체신이 무에 그리 중요하랴, 냅다 윗도리를 흔들며 “잘 가! 권소령, 이 녀석아, 군목역할도 잘하고 참모 역할도 잘해!”하며 옷을 돌리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고, 후배도 배의 난간에 기대어 서서 계속 모자와 양손을 저어 돌리며 서로 반쯤 넋 나간 사람처럼 이별의 애잔한 마음을 달래었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무심한 항구의 갈매기들이 아침 햇살을 고즈넋하게 가르며 유영하고 있을 뿐이었다. 선상에 도열한 하얀제복들이 이젠 점. 점. 점으로만 보이며 아스라이 시야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환송객들은 거의 나가고 없고 함께 동행한 교회의 집사님만 안타까이 우리의 별난 송별 몸짓을 보며 눈시울을 훔치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에이, 항구의 이별이 이렇게 마음 메이게 할 줄 알았으면 오지 말 걸 그랬습니다.”며 말꼬리를 흐리고 있는데 집사님이 거든다. “목사님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보내는 사람도 이리 마음이 아린데, 저기 가시는 후배 목사님이나 군인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여기서 이렇게 손 흔들며 보내니 보기가 좋습니다. 아무도 안오고 그냥 자기네들끼리만 떠났으면 군인아저씨들 마음이 얼마나 서운했겠습니까?”한다.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아리아리하다. 단칸방의 우리 신혼방에 와서 우리 사이에 끼어자며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고,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던 후배라 그런가? 책 한 권 사보려고 끼니를 라면으로 떼울 때 그 귀한 라면을 나눠먹던 후배라 마음이 이리 찡한가? 좌우간 학교를 졸업하고 서로의 갈길에 충실(?)하느라 거반 15년을 넘게 못보던 후배가 순양함대의 군종참모가 되어 먼 객지에서 만났으니 속절없는 세월이 무심하기만 했다.
공항에서의 이별도 보내고 돌아 나오는 걸음이 무거웠는데, 이렇게 헤어지는 항구의 이별은 정말 내가 먼 외국에 살고 있는 이민자구나하는 고독감을 물씬 느끼게 해 주었다. 힘들어하는 감정을 눈치챘는지 운전을 하시는 집사님의 너스레가 많아졌다. 차창에 기대어 따사로운 아침 햇살을 맞으며 눈을 지긋이 감았다.
“김 목사, 마음이야 아프겠지만 이런건 아름답고 멋있는 이별이쟎아, 니네들은 기쁨으로 또 만날 것이니까, 이별은 이렇게 다음에 더 깊은 사랑으로 만날 것을 기대케 하는 이별이라야 돼 알겠니? 누구를 만나고 사귀든 그런 이별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름다운 성도의 삶이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래요, 주님, 그런 아름다운 이별을 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전역하고 부산의 역사 깊은 교회에서 목회하는 후배를 코비드19 상황이 끝나면 한번 볼 수 있겠지… 시드니의 아침은 언제나처럼 위대했답니다.
김호남목사(PhD, USyd)
시드니신학대학 한국신학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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