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2월자 내셔널지오그래픽은 ‘바이러스의 신비'를 다루면서 질문한다. “Are we born to Wander? 우리는 방랑자로 태어났는가?” 코비드 때문에 1년 집콕 생활을 하다보니 제기되는 근원적 질문이다. 그로부터 2달이 지나 백신이 투여되면서, 이젠 조금씩 ‘여행 버블’이 만들어지고 있다. 지난 몇 달 동안 매스컴에서 ‘버블 버블’ 하길래 ‘부글거리는 거품’ 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 NZ 여행이 풀리면서 비로소 알았다. “비격리 여행권역”. 지난 19일(월) 하루만도 수천 명이 타스만 바다를 건너갔다. 난 아직 해외여행을 할 형편이 안되니, 일단 주변 여행에 나섰다.
2.
먼저 영화관에 가서 ‘노매드’를 봤다. 이번 주말이 있을 아카데미 영화상의 유력한 후보작이다. ‘미나리’의 경쟁작이니까 봐야했고, 기괴한 시리즈 드라마 ‘Fargo’에서 활달한 경찰관으로 나왔던 주연 여배우의 변화된 모습을 보기 위해서도 갔다. 평생을 살던 동네에서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직장도 폐쇄됨으로 유랑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이야기다. ‘미나리’와 비슷하게 담담하면서도 결이 조금 달랐다. 쓸쓸하게 공감가는 영화였다. 나 역시 ‘노매드’이니까.
3.
맨리 여행을 나섰다. 얼마 전 받은 시니어 오팔카드로 무장했다. $2,50만 주면 온종일 어디든지 갈 수 있음을 확인해보고자 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선착장으로 가서 배를 타고는, 서큘라키에서 갈아탔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서 그런지 전부 호주인 직장인들이다. 페리로 통근할 수 있는 삶을 약간 부러워하면서, 사방을 둘러보며 사진기를 눌렀다. 도착한 맨리 부두와 중심거리는 횡했다. 해변 길은 지역주민들과 개들의 산책로였고, 모래사장은 근처 사는 청년들의 비치발리볼 놀이터였다. 파도 타는 사람들도 전부 주민들이었다. 동양인은 나 혼자인가 싶었다. 외로운 방랑객이 되어 약간은 어색한 가운데 케밥을 잘라 먹다가 다시 발길을 돌렸다. 사실 여기까지 배 타고 온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둥근 해와 보름달이 한 하늘에 있는 특이한 광경을 배 위에서 보기 위함이었다. 당당하게 오팔카드를 들이댔는데 삑 소리가 났다. 당황하여 기계 화면을 쳐다보니 카드에 돈이 없단다. 고속 페리를 타고 왔기 때문이다. 그저 생각없이 먼저 오는 배를 탔는데, 그 때문에 $9이 추가로 떨어져 나간 것이고, 다시 고속 페리를 타려면 $9이 필요한데, 그만한 잔액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나에게 직원이 다가와서 설명을 해 주더니 저쪽 가서 노란색 배를 타란다. 퇴역을 앞둔 완행 페리. 나를 비롯한 대기 승객들 모두가 난민처럼 보였다. 올 때 봤던 승객들과 비교하니까 그렇다. 빈부와 인종을 날카롭게 구분해 버린 코비드의 위력을 다시 실감했다. 출렁이는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배를 타고 가다보니 결국 일몰 시각에 맞추질 못했다. 매우 아쉬웠지만 그래도 좋았다. 진분홍 석양에 물든 하버브리지는 장관이었다. 지는 해를 빠른 속도로 따라가 불루마운튼을 넘어가면 황량하지만 익숙한 아웃백이 있을 터였다.
4.
로얄이스터쇼에 갔다. 소, 돼지, 닭 사이를 다니며 구경하던 수만의 인파는 저녁이 되자 둘로 갈라졌다. 초등학생 이하는 부모와 함께 스타디움에 가 앉았고, 하이스쿨 이상 20세 초반의 젊은이들은 놀이기구들에 몰렸다. 여기나 저기나 완전 해방구였다. 지난 1년 동안 강요되었던 사회적 거리두기의 원한을 최대로 풀어야 한다는 생각들인지, 앞 사람 머리가 내 코앞에 바짝 밀착될 정도로 밀려다녔다. 나도 마음은 젊은 터라 놀이기구 쪽으로 가 봤다. 발랄하고 미끈한 젊은이들 한가운데서, 난 갈 곳을 잃었다. 시선 둘 곳도, 존재의 위치감각도 다 잃어버린 채 남십자성 밑에 홀로 서 있었다.
5.
와라감바 댐으로 갔다. 바람 한 점 없고 높은 구름만 조금 떠 있는 아주 좋은 날이었다. 방학을 맞이하여 애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 노인들, 연인들이 소수 있었다. 평온 그 자체였다. 수위를 검색해 보니 98%였다. 문제는 이 수위가 100%에 달했을 때다. 수문을 열 수밖에 없었고, 네피안/혹스베리 강 하류는 범람했다. 집이 떠내려가고, 말과 소도 둥둥. 물에 갇힌 차 속에서 거의 한 시간 동안 000 번호를 누르다가 죽은 사람도 있었다. 70년 만의 홍수라니까 그 정도는 어쩔 수 없었다고 자위하겠지만, 피해 입은 당사자들의 삶이 다시 회복되기까지는 수년이 걸린다. 떠나간 생명은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그렇다고 완전한 끝은 아니다. 죽음은 또 다른 세상을 향한 여행길의 시작이다.
6.
인간은 그렇게 홀로 여행하는 방랑자다. 빈손 들고 홀로 왔다가, 그 손에 힘이 빠지면 홀로 돌아간다. 문제는 그사이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있다. 열심히 모으고 챙기는 것은 앞뒤와 맞지 않다. 빈손 인생답게 살아야 한다. 생기는 대로 나눠주면서 ‘노매드’로 사는 것이 맞다. “여행이 이성적 행동은 아니지만 우리 속에 유전인자로 존재한다.”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 말에 공감하는 나는 다시 작은 여행 가방을 챙긴다. 3월 말에 끝난 여권도 우체국가서 거금 $301 + 사진 $20 주고 10년짜리로 갱신했다. 만반의 준비는 했지만 아직은 멀리 갈 수 없어 일단은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온다. 가볼 곳은 무궁무진하다. 라켐바/어번을 가면 중동 여행을 할 수 있고, 노던비치를 가면 영국여행을 할 수 있다. 의욕이 없어서 못 가고, 건강이 여의치 못해서 못 갈 뿐이지 ‘코비드 사이를 뚫고 코를 디밀 곳’은 무한하다. 우리네 인생이 짧을 뿐이다.
7.
만약 모든 것이 여의치 못하면 집에서 책을 편다. 내 컴퓨터 모니터 밑에는 벌써 몇 년 동안 붙어 있는 구절이 있다. 1801년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가서 18년을 지내던 정약용의 일기다.
“나는 지금 구덩이에 빠졌다. 하지만 평지려니 하고 지낸다. 이런 평상심이 가능한 것은 오로지 독서의 힘이다. 책을 읽으며 허물어지는 마음을 하루하루 다잡는다”.
그는 그 오도가도 못 하는 유배생활 속에서 ‘목민심서’를 비롯한 조선 후기 최고의 지적 유산들을 만들어냈다. 나도 어쩌다 보니 문명의 유배자가 되어, 동쪽에 있는 서양 나라에 살게 되었다. 300년 전까지만 해도 서양은 후진국이었다. 개화된 문명은 해가 뜨는 동쪽에서 왔다. 그 상태가 역전된 것은 서구인들 속에 잠재되었던 노매드 정신을 발휘해 대양의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배를 타고 온 세상을 제패한 그들은 이제 우주를 향해 거보를 내 딛는다. 테슬라나 아마존이 그러고 있다. 나에게 우주 여행은 아직 먼 후의 일이기에, 코비드 1년이 지난 지금, 난 조금씩 열려지는 주변 세계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이전에 못 보았던 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 간다. 작은 책도 하나 들고서 간다. 그렇게 떠돌다가 기진하면 다른 세상으로 훌쩍 넘어가면 된다. 난 이 세상의 ‘노매드’니까.
김성주목사(새빛장로교회) holypilla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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