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르완다 대량 학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호텔 르완다”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옵니다.
“우리를 구해줄 사람도, 우리를 위해 나서 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를 도울 것은 우리 자신밖에 없습니다.”
1994년, 여러분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나요?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시리즈인 “응답하라 1994”에서는 1994년을 20세기 가장 다사다난했던 한 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문민정부의 시작과 기술의 발달로 90년대의 한국은 눈부신 발전을 이뤘지요.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는 약 세 달 동안 80만 명의 사람이 살해당하는 대량 학살이 르완다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약 2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생명의 위협을 피해 난민이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르완다 사람들은 깊은 상처와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엔(The United Nations)에서는 생존자들을 지원하고, 이날을 기억하여 다시는 이런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4월 7일을 르완다 대량 학살 희생자 추모의 날로 지정하였습니다.
르완다 대량 학살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식민지 정책의 결과로 발생한 사건으로 내전의 시작이 외부적인 요인으로 기인하였다는 것에서 모든 국제 사회가 함께 이 사건에 대해 반성하고, 책임을 져야 함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다양한 씨족들로 구성된 르완다에서 식민 정책의 일환으로 “유럽인과 닮은 외모”를 기준으로 투치족을 통치 계급으로 삼은 것에서부터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식민 독립 이후, 식민 시대 때의 기득권이었던 소수의 투치족과 르완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후투족의 기득권 갈등은 점점 더 심화되었습니다. 1961년 주민 투표와 선거를 통해 르완다의 주 종족인 후투족이 자치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고, 이후 투치족은 부룬디로 강제 추방되게 됩니다. 투치족은 새롭게 기득권을 차지한 후투족 정부를 지속적으로 공격하였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63년 12월 약 2만 명의 투치족이 학살당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투치족은 르완다 애국전선(The Rwandan Patriotic Front)로 불리는 반정부 세력을 조직하고 후투족을 상대로 테러를 자행하였으며, 이에 르완다 정부의 후원을 받은 후투족 민간 군사조직이 투치족에 대항하여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내전은 30여 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1994년 4월 7일, 전 날의 후투족 대통령이 탄 비행기에 대한 공격이 투치족의 소행이라는 주장과 함께 후투족 정권은 투치족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시작하였고, 이에 대한 반발로 투치족의 르완다 애국전선도 후투족을 중심으로 하는 정부를 공격하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학살은 민간인으로까지 확대되어, 3개월 동안 약 8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엔(The United Nations)의 평화유지군은 내전 가운데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민간인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남겨 둔 채 철수를 강행하였으며, 이는 더 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발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지난 2004년, 20주년을 맞은 르완다 대량 학살 희생자 추모의 날에 당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이었던 콜린 키팅은 공식적으로 사과하기도 하였습니다.
앞서 글을 시작하며 언급한 “호텔 르완다”는 르완다 대량 학살에 대한 영화로, 인용한 대사는 영화상에서 유엔(The United Nations) 평화유지군이 떠날 때 나온 대사입니다. 이는 르완다뿐 아니라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이 과거 식민 정책의 영향으로 다양한 분쟁과 갈등을 겪고 있지만, 이러한 사건들에 대한 국제 사회의 무관심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힌 국제 사회를 대신하여 굿네이버스와 같은 구호단체들이 빈곤과 재난 억압으로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며 그들과 함께하였으며, 그 아름다운동행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진작가 미리암(Myriam Abdelaziz)은 르완다 대량 학살 피해자들의 인물 사진을 인터뷰와 함께 전시하였습니다.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의 모습을 절대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 저는 9살이었어요”
- 다이앤 (Diane Niyongira) (사진 3 좌측)
“저는 제 다리와 모든 가족을 잃고, 버려진 집에서 홀로 4년을 살았어요. 그때 저는 13살이었습니다.”
- 진 (Jean Pierre Sibomana) 사진 3 우측)
오늘날 우리가 매년 4월 7일 한 번도 가본 적도 없는 아프리카 르완다의 대량 학살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은 누구나 존엄하다.”라는 가치에 동의한다면,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함께 노력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2011년에 시작된 시리아 내전은 수니파, 시아파 간 종파 갈등을 주축으로 하여 주변 아랍국과 국제 사회의 관계 등 복합적이 요소로 인해 수년째 계속되고 있으며, 2018년까지 약 36만 명이 사망하고, 시리아 인구 절반이 넘는 1200만 명이 난민으로 떠돌고 있습니다. 또한, 미얀마의 로힝야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차별과 폭력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2016년, 생존을 위협하는 폭력에 약 75만 명의 로힝야 사람들이 난민의 지위로 방글라데시로 도피하여야 했으며, 이중 40만 명 이상의 어린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얀마의 이러한 상황은 민주화운동과 소수민족 갈등이라는 이슈가 혼합되어 최근까지도 수백 명이 넘는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하여, 국제 사회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올해 “르완다 대량 학살 희생자 추모의 날”은 제2, 제3의 비극이 발생하지 않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관심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낼 때, 국제 사회는 결코 이를 간과할 수 없으며, 더 많은 사람들은 보호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국적이나 인종과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하는 어린이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요.
후원문의: 굿네이버스 호주 (W. http://goodneighbors.org.au /P. 0416 030 381)
이효실 (Good Neighbors Australia) gnau@goodneighbors.org
사진 01: 르완다 대량 학살 사건을 다룬 영화 ‘호텔 르완다’ 포스터 (좌측/사진 출처. 네이버)
, 유엔에서는 매년 4월 7일 르완다 대량 학살 희생자 추모의 날로 지정하였다 (우측 상단 / 사진 출처. 유엔 홈페이지) ,투치족이 덩치가 크고, 유럽인에 더 가깝게 생겼다는 이유로 식민 통치 시에 르완다의 통치 계급으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측 하단 / 사진 출처. Weebly)
사진 02: 르완다 내전 당시 굿네이버스의 긴급구호 모습
사진 04 : 난민 캠프로 이동을 위해 기다리고 있는 로힝야 난민, 비비와 자나툴의 모습 (사진 출처. UNHC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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