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인 이승하 시인은 한호일보 주관 신년문예 심사를 2회 한 바 있고, 2017년과 2018년에 2019년 3회에 걸쳐 ‘한호일보 문학아카데미’의 초빙교수로 단국대 박덕규 교수와 함께 시드니에 와서 문예창작 강좌를 진행한 바 있다. (2020년 제4회째는 ‘시드니 문예창작교실’이라는 이름으로 맥쿼리대학 몰링칼리지에서 열렸다.)
이승하 교수는 2019년 한 해 동안 한호일보에 해외 동포문학의 현황을 소개하는 ‘디아스포라의 여정’을 연재한 바 있 다. 미국과 오스트리아 한인 문학의 면면을 소개했고 이어 호주 한인 문학사를 5회에 걸쳐 연재한다. 원고를 쓰는 과정에서 유금란 작가(시드니 수필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30년 호주 한인 문학사를 최초로 총정리한 이승하 교수에게 지면을 통해 감사드린다. [편집자 주(註)]
30년 호주 한인 문학사(1회)
이승하(시인ㆍ중앙대학교 교수)
1. 호주 교민사회의 형성 과정
2020년 현재 호주에서 살고 있는 한국 교민의 수는 15만 명을 상회하고 있다. 지역별로 한인회가 결성되어 있는데 인구 10만 명 가까이 살고 있는 시드니가 가장 크다. 이밖에 퀸즐랜드 한인사회ㆍ캔버라 한인사회ㆍ빅토리아 한인사회ㆍ서부호주 한인사회ㆍ남부호주 한인사회ㆍ태즈메이니아 한인사회 등이 결성되어 있다. 종교단체를 제외한 교민들의 생활공동체라고 할 수 사회단체가 적지 않지만 규모면에서 호주한인복지회ㆍ파월동지회ㆍ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세 군데가 규모도 가장 크고 지금까지 가장 활발히 활동해 왔다.
시드니에 최근 20년간 교민의 수가 부쩍 늘어난 것은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에서의 사업체를 그만두고 이민을 간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은 대졸자의 취업난이 심화되고 있는데 호주에 유학을 가거나 워킹홀리데이, 어학연수, 여행 등을 갔다가 ‘살기 좋은’ 호주에 정착하는 경우도 많다. 이들 가운데 문인으로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이는 약 0.1%인 150명 정도로 추산된다. 본국의 문예지를 통해 등단했거나 현지에서 문학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는 문인의 수가 100명이 넘어 어느덧 호주 교민들도 ‘문단’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현재 호주 내 한인 문인단체는 글무늬 문학사랑회ㆍ노만허스트 가톨릭문우회ㆍ동그라미문학회ㆍ문학동인 캥거루ㆍ시드니 글벗세움 문학회ㆍ시드니 한인작가회ㆍ호주한국문학협회ㆍ퀸즐랜드 문학회 등이 있다. 문학 동인회는 1989년 5월, 아동문학가 이무와 시인 윤필립에 의해 창립된 ‘재호한인문인협회’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 문학사와 문단사를 살펴보기 전에 호주의 역사, 한국ㆍ호주의 관계사를 먼저 간단히 일별하기로 한다.
원주민인 애보리진이 살고 있던 호주대륙을 영국인 해군 제임스 쿠크 선장이 발견한 해가 1770년이었으니 정확히 250년 전이었다. 이후 영국이 산업혁명에 성공하면서 도시범죄가 빈발하자 죄수를 수용할 교도소가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1788년, 초대 총독 아서 필립이 732명의 죄수를 포함한 1,373명을 데리고 시드니 항구에 상륙하고서부터 백인이 호주에 정착하게 된다. 백인으로서는 개척의 시작이었고 애보리진으로서는 수난의 시작이었다. ‘추방’과 ‘격리’가 국가 건설의 요인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호주의 역사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한국전쟁 때의 호주 참전이다. 유엔군의 한 나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호주는 연인원 1만 7,164명의 병력을 보내는데 이 가운데 339명 사망, 1,216명 부상, 29명 포로 발생으로 큰 피해를 입는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남으로 밀릴 때 경기도 가평에 주둔해 있던 호주 군이 막아주어 미군과 한국군이 퇴각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호주의 젊은이들이 피를 흘렸다. 임진강변 마령산 전투 때도 많은 호주군 사망자가 나온다. 339명 사망자 가운데 281구는 지금도 부산 유엔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나라는 ‘우방’ 정도가 아니라 ‘혈맹’이나 ‘형제국가’라고 할 만하다. 캔버라에 있는 전쟁기념관 앞 안작 거리(Anzac Parade) 광장에는 한국전 참전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 한국인 호주 이민의 물꼬를 튼 최영길 씨는 바로 한국전쟁 때 16세 소년이었다. 호주군 3연대의 마스코트 통역관을 한 인연이 이어져 1968년, 33세 때 최초의 한국인 호주 이민자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이 해는 박정희 대통령의 호주와 뉴질랜드 공식방문이 있었고 1970년 6월에 마침내 시드니 총영사관이 설치되었다. 최영길 씨에 이어 선박기술자 김용수 씨가 영주비자를 받았고, 헬기조종사 7명, 지질연구자 9명이 이민 대열에 섰다. 호주 정부는 다수의 태권도 사범들에게도 영주비자를 내주었다. 뒤이어 양모기술자, 공립학교 교사, 조선설계사, 보석세공사들이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 이와 같이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는 전문기술 인력이 호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 WAP)는 어떻게 된 것일까? 외국인의 이민을 좀체 받아들이지 않던 호주에 우리 교민이 15만 명이나 가서 살게 된 연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범죄자와 교도관, 일반 시민들로 초기 이민사회가 형성된 호주에 1850년대에 큰 금광이 여러 곳 발견되었고 미국과 유럽에 이 사실이 알려졌다. 호주로 가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에 ‘골드러시’가 일어났고, 이로 인해 호주로 많은 이민자가 몰려들었다. 중국계 이민자가 특히 많았는데 1881년에는 5만 명에 달했다.
이들의 저임금 노동은 백인 노동자의 임금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호주 의회는 1888년에 열린 회의에서 중국계의 호주 이민을 제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896년에 열린 회의에서는 호주에서 모든 유색인종을 배척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키기에 이른다. 백호주의 정책 도입은 호주 연방이 성립된 1901년 이후 얼마 되지 않아서 ‘이민제한법’이라는 법률이 통과되면서 정식으로 도입되었다. 이 법이 발효되면서 영어로 입국시험을 치르게 한 결과, 비유럽인의 이민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게 되었다.
백호주의가 사라지는 계기는 베트남의 통일이었다. 1973년 1월에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되었는데 이는 베트남전쟁이 월맹(북베트남)에 의한 통일로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군과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즉각 철수하였고,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의 수많은 국민이 해외로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마을단위 혹은 가족단위로 배를 구해 외국으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난파하여 떼죽음을 당하는 사례가 빈번해지자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보트 피플(boat people)’로서 호주는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베트남 난민을 받아주기로 했다. 그 당시 베트남공화국의 군인ㆍ경찰과 그들의 유가족, 지주계급, 종교인 등은 물론 공산주의 이념에 반대하는 이들은 공산화된 새로운 국가에서는 살아갈 수 없음을 절감하고 목숨을 건 탈출을 하게 되었다. 지리적으로 남쪽으로 계속 가면 나오는 호주가 그들을 받아주기로 하면서 이민제한법은 사실상 폐지되었고 1975년 인종차별 금지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호주에서는 인종에 따른 이민정책이 불법화된다.
68-72년 전문기술인력 호주 이민 개척
73-76년 파월 인력 가세, 사면령
76-80년 중동.남미.유럽 거친 동포들 정착
90년대 유학자유화, 사업.투자 이민 증가
다수의 베트남인이 호주에 정착하게 되는 과정에서 베트남에 군인이나 군속으로, 또 사업차 가 있던 한국인이 베트남인들 사이에 끼어 호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호주가 70년대에 받아준 한국인 또한 대다수 기술자들이었다. 군 관계 기술자나 건설업 관련 기술자와 전문 노동인력이 수십 명 호주에 정착하였고, 그들이 본국의 가족을 호주로 건너오게 하였다.
요약하면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전문기술 인력이 호주 이민의 개척자였고 1973년부터 76년까지 2차로 파월 세력이 이민 대열에 가세하였다. 사면령이 도움을 주었다. 1976년부터 1980년까지는 중동 파견 기술자, 용접기능공, 동두천 미군부대 군속, 남미 이민자, 서독 파견 간호사ㆍ광부의 호주 진출이 이어졌다.
이렇게 되자 호주가 살기 좋다는 소문이 대한민국 전역에 퍼졌다. 그래서 미국이나 캐나다 쪽 이민을 꿈꾸던 사람들이 방향을 바꿔 호주 이민을 모색하게 되었다. 돈을 얼마 이상만 갖고 오면 받아주는 ‘투자이민’은 해마다 수십 명씩의 이민자로서 호주로 오게 하였다. 1980년대와 90년대의 일이었다. 1993년에는 해외유학 자유화 조치가 있었다. 호주의 한국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 아시안게임(1986), 올림픽(1988), 월드컵(2002) 개최로 한국의 위상도 급격히 높아졌다. 월드컵 출전을 위해 한국과 호주가 시합을 하면 대체로 호각지세였다. ‘우리가 도와주었던 아시아의 작은 나라’의 위상이 달라졌던 것이다. 호사다마라고, 앞서 언급했듯이 1997년 한국의 IMF 외환위기는 수많은 한국인을 해외이민자로 만들었는데, 그들이 택한 나라가 바로 호주였다. 그러니까 이 해부터 호주 이민자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계속)
사진 1: 한국전에 참전한 호주 육군 3대대 병력이 이동을 하고 있다(1951년 3월 1일)
사진 2: 호주부대의 마스코트였던 최영길 씨가 한국전쟁 당시 야전병원 앞에서. 최초의 호주 이민자로 알려졌다.
사진 3: 제2대, 4대 호주 시드니한인회 회장을 역임한 최영길 씨(2007년 작고)
사진 4: 1983년 경기도 가평군 북면에 건립된 ‘호주전투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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