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를 만나기 위해 뉴카슬에 갔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분이다. 노스웨스트에서 전철을 타고 에핑에서 내려 뉴카슬로 가는 기차를 탔다. 등교하는 학생들과 통근자들로 소란스럽고 붐비는 아침 시간이었다. 그러나 혼스비를 지나면서 객실안은 한산해졌다. 기차는 이름도 낯선 작은 역들도 정차하며 천천히 달렸다. 밖은 소리 없이 실비가 내렸다. 차창밖으로 안개에 덮힌 낮은 산등성이들이 동양화처럼 보인다. 울창한 숲들이 있는가 하면,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물이 펼쳐진다. 때로는 바로 그 수면위로 기차가 달리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기도 했다. 두시간이 넘는 나홀로 여행이었으나 전연 지루하지 않았다.
그 친구는 노란색 비옷을 입고 우산을 들고 마중나와 있었다. 그는 아내를 먼저 보내고 혼자 사시는 분이다. 나는 역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커피를 나누며 얘기하다 돌아 올 계획이었다. 그는 점심이 준비되어 있으니 집으로 가자고 했다. 운전에 자신이 없어 얼마 전에 면허증을 자원 포기했다고 말했다. 택시를 타고 그의 집으로 갔다. 그의 집은 둘째 아들의 뒷 마당에 지은 그래니 하우스(별채)였다.
중국 식당에서 배달해 놓은 요리 두가지를 전자 레인지에 데워 점심으로 먹었다. 한국말로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세요”라고 하셨다. 지금도 우리말을 기억하고 있어 놀랍다고 하자 그는 정반대라며, 얼마 전의 경험을 얘기했다. 그곳 한인교회에서 축도를 부탁했는데, 다 잊어 버려서 당혹스러웠다고 말했다. 나이를 더 먹어가도 기억력은 더 좋아지지 않는다고 너스레를 떨어, 나 역시 그렇다며 함께 웃었다. 내 나이를 물어서 73세라고 대답했더니 참 좋은 한창 때라고 하셨다. 그 분의 나이를 물었더니 93세로 나보다 20세나 더 많은 나이였다!
그 분은 연합교회 은퇴목사인 서두화(Alan Sturt)목사다. 한국 전쟁후1955년부터 13년간 마산과 부산지역에서 선교사로 섬기며, 부산신학교 교장과 경남노회장도 역임하셨다. 호주의 첫 한인교회인 멜본교회의 담임목사로서 3년간 사역했던 분이다. 그 분과의 만남은 2000년 1월, 멜본 주총회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였다. 다른 한국 선교사와 가족 등 30여분과 함께 우리 부부의 환영 파티를 열어 주었다. 또한 이미 은퇴했던 그 분과 리타 사모의 집이 우리의 사택과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쉽게 만나곤 했었다. 그렇게 몇 년을 가까이 지내다 나는 시드니로, 그 분은 두 아들이 살고 있는 뉴카슬로 이사하셨다.
리타 사모님을 보내고 혼자 어떻게 사시냐고 물었다. 두 아들 가족과 교회 식구들, 그리고 해야 할 일들이 있어 잘 지낸다고 하셨다.바로 앞에 사는 며느리가 호스피스 전문 간호사여서 아내의 마지막 몇주간도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임종을 맞이 했던 좋은 추억들이 위로가 된다고 하셨다. 또한 애써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아침 식사는 60세된 첫째 아들이 직장 가는 길에 둘러 함께 하고, 저녁 식사는 둘째 아들 식구와 하며, 점심은 혼자 해결한다고 했다. 매월 둘째와 넷째 주일은 출석하는 호주 교회에서 설교하고, 첫째와 셋째 주일에는두 양로원에서 예배를 인도하신다고 했다. 매주 월요일은 초상화 그리기를 하는데 지금까지 980명이라며 컴퓨터 파일을 열어 보여 주셨다. 화요일은 기도회 참석하고, 수요일은 40Km정도 떨어진 토론토에 가서 작은 스터디 그룹에 참석하신다고 했다. 요즈음은 최근 신학의 흐름과 현대교회에 대해 공부한다고 하셨다. 목요일은 기억력이며 인지능력 저하를 막기 위해 퍼즐과 수도쿠(Sudoku) 문제와 씨름 한다고 하셨다. 금요일은 휴식하며 주일 예배 준비를 하며, 토요일은, 첫째 아들과 함께 교회 식구 혹은 양로원에 있는 분들을 심방하신다고 했다.
가는 길에 초콜렛을 선물로 갔다드렸다. 그 분은 초콜렛을 먹으면 인지력이 좋아진다며 고맙다고 했다. 그것이 얼마만큼 사실인지, 그냥 우스개 말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초콜렛을 적게 먹어 인지력이 좋지 않다고 말했더니, 그러면 수도쿠를 공부하라며 책 한권을 주셨다. 10월 1일에는 한호 선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키 위해 한국에 갈 계획이라고 했다. 이번에는 큰 아들과 함께 그리고 다른 호주 선교사 가족등 20명이 참석할 예정인데 어쩌면 마지막 한국 여행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심장약을 먹는 것 외에는 아직 다른 건강문제가 없어, 자신의 시신을 연구를 위해 기증키로 했다고 하셨다. 아직 푸르고 청청한 노년의 삶이다. 나 자신의 느슨한 매일을 돌아 보며 도전을 받는다.
돌아오는 길, 내 삶의 내용과 습관 등을 돌아보며 어떤 변화가 있어야겠다는 진지한 상념에 잠겼다. 나도 가족과 친구들과 특히 주님과의 친밀한 사귐의 시간을 더 많이 즐기고 싶다. 또한 사랑하며 자유로운 영혼이기를 추구하며 노력해야 되겠다. 그런 다짐 자체가 내 자신을 조금 더 젊게 만드는 것 같다. 느낌만이 아니라 발걸음이 더 빨라지고 힘이 실리는 듯 싶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의, 두아들과 그 가족들이 아버지와 매일 만나며 보살피며 사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아름답다. 한폭의 수채화처럼 정겹고 풋풋하다. 그런 가족 관계가 참 부럽다. 따뜻한 감동을 준다. 그래서 기분 좋은 하루였다.
최정복 (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교수) jason.choi4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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