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자(목) 호주 주요 신문들의 1면 톱기사는 대부분 미쉘 거트리(Michelle Guthrie) ABC 방송 사장 해임 스캔들이었다. 바로 하루 전인 26일 전국 ABC 방송 사옥 앞에서 사장 해임 의혹 조사를 촉구하며 부당한 개입을 규탄하는 항의 시위가 열렸다. 존 하워드 전 총리 시절과 토니 애봇 총리 때 ABC 대규모 구조 조정(감원) 이후 전국적 항의는 처음이다.
거트리 전 사장은 이번 주 초 ABC 이사회에서 해임됐다. 5년 임기 중 2년 정도 재임했으니 아직 절반 이상 임기가 남았다.
왜 갑작스럽게 잘렸을까? 거트리 해임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저스틴 밀른(Justin Milne) ABC 이사회 의장(Chairman)이 밝힌 해임 배경은 “거트리 사장의 임기 지속으로 ABC의 이익이 저해된다는 것이 이사회의 의견이다”였다.
너무 추상적인 명분에 대해 거트리 본인은 물론 ABC 관계자들(임직원들과 기자들) 모두 강력 반발하며 부당한 개입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거트리는 소송을 제기할 의향을 밝혔다. 밀른 의장은 사퇴 압박을 거부하고 있지만 결국 그도 27일 사퇴했다.
거트리 전 사장과 밀른 이사회 전 의장 모두 말콤 턴불 전 총리가 임명했다. 밀른은 턴불 전 총리의 지인(친구)이며 사업 파트너였다.
페어팩스가 이번 주 밀른 의장이 이메일로 거트리 사장에게 ABC의 중견 여성 저널리스트인 에마 알버리치(Emma Alberici) 선임경제 기자를 해고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보도했다. 이유는 턴불 정부가 그녀를 매우 싫어했기(hate)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어 데일리텔리그라프지는 26일 “앤드류 프로빈 정치국장(Andrew Probyn) ABC 보도국 정치국장 해임도 압박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알버리치 기자는 대담 방송 진행자로서 당시 턴불 총리와 인터뷰를 했다. 특히 예산 관련 이슈에서 매우 비판적인 질문으로 턴불 전 총리와 설전을 벌인 적도 있다. 언론인으로서 이같은 보도행위는 조금 튀었다는 점 외 특별하게 문제될 것이 없다. 오히려 성역 없는 보도 활동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페어팩스 보도(밀른 의장이 거트리 사장에게 보낸 이메일)에 따르면 “지난해 턴불 총리와 크게 한 판 붙은 이후 정부가 알버리치를 매우 싫어한다. 우리는 알버리치가 아니라 ABC를 구해야한다. 그녀를 해임하라”는 내용이다. 또 앤드류 프로빈 정치국장도 해임하라는 압박설까지 나왔다. 그런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자 거트리 사장을 쫒아낸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밀른 전 의장은 “이런 이메일을 보내지 않았으며 의장으로서 논조 독립성(editorial independence)을 보호해 왔다”고 부인하면서 정부를 공격한 논조의 독립성과 정확성은 의장이 개입할 사안이며 알버리치 해임 여부는 ‘당시 배경 안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needed to be explained “in context”)’는 7.30 리포트의 리 세일즈(Leigh Sales) 진행자와 대담에서 밝혔지만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
총리 퇴출 후 줄곧 미국 뉴욕 맨해탄에 머물고 있는 턴불 전 총리는 밀른 의장에게 거트리 사장 해임을 지시하도록 압력을 넣었다는 의혹을 27일 완강히 부인하면서도 일부 ABC 보도에서 부정확성, 저널리즘의 질적 하락으로 시청자들의 불만이 고조됐다고 비판했다. 전직 총리의 이런 쓴소리에 대해서는 의회를 통해(절차를 거쳐) 국가예산으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에 대한 조사가 필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신문 보도(밀른 전 의장의 이메일 관련)가 사실이라면 이는 공영방송에 대한 부당 개입(논조 변경 등)과 간섭으로 매우 큰 파문을 초래할 수 있다. 정부의 경제정책에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구체적으로 특정 언론인들의 해임까지 요구했다면 독재국가에서나 가능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배경에서 수백명의 ABC 기자들이 독립 조사를 촉구하면서 조사 기간 중 밀른 의장의 직무 중지 요구했다. 언론에서 독립성과 객관성이 없으면 알맹이 없는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호주 최고의 유력지로 인정받는 시드니모닝헤럴드지의 제호 아래 ‘Independent. Always.(언제나 독립된)’이란 모토가 붙은 이유도 그런 점 때문이다.
파문이 커지자 미치 피필드 통신장관이 통신부 자체 감사를 단행할 수 있다는 의향을 밝혔다. 그러나 노동당과 녹색당은 본질이 호도될 가능성을 우려하며 상원 조사를 촉구했다. 밀른 전 의장 사퇴 후 스콧 모리슨 총리는 27일 트위터를 통해 “ABC 이사회와 의장이 옳은 결정을 내렸다. 이제 ABC는 독립적으로 편견 없이 정상 복귀를 재개해야 할 시점이다. 호주 납세자들이 원하며 세금을 내는 이유가 바로 그 것이다”라고 밝혔다. 모리슨 총리가 ‘정치권의 간섭없이 독립적으로 또 편견없이(independently and without bias)’를 강조한 이유는 보수 정치권의 시각으로 ABC의 논조는 여전히 좌편향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에 대한 객관적 분석도 필요하다.
이제 막 터진 ABC 사장 해임 스캔들을 보면서 한국인들에게는 전임 정부(이명박근혜) 시절 정치권의 부당 개입과 간섭으로 처절하게 망가졌던 KBS와 MBC 보도 행태와 범사회적 거부 사태가 연상되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언론사에 오점으로 기록될 부당 언론 장악의 과정에는 정치적 임명으로 권한을 일시 위임 받은 자들의 월권(과잉충성)과 갑질(법률을 벗어난 부당 개입과 간섭)이 항상 문제였다. 호주 ABC 파문과 한국의 과거 KBS, MBC 사태는 심각성과 규모 등에서 비교할 정도가 물론 아니다.
이번 파문은 공영방송의 독립성은 반드시 보장되어야하고 정권 교체로 어떤 외압, 정치적 입김을 배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 확고하게 작동해야 한다는 점이 호주에서도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 시스템(견제 장치)을 확고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시청자, 청취자의 눈과 귀다. 다행히 호주에는 'ABC 프렌즈'의 공영방송 지킴이 군단이 강고하다. 그만큼 호주 사회가 아직은 건강하다는 의미다.
그러나 경계를 풀면 안 된다. 방심하거나 무관심하면 한국의 이명박근혜 정부 시절 KBS와 MBC를 망친 주범들 같은 괴물이 언제 호주에 등장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ABC 방송의 좌편향 논조가 심각한 문제라면 이에 대한 조사도 정당하고 객관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더욱이 부당한 간섭은 반드시 중지되고 반복되지 못하도록 감시해야 한다. 호주의 자랑 중 하나인 ABC에는 더러운 간섭의 손이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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