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월요일은 추석이었다. 오래 전 추석에 먹었던 음식이며 함께 했던 가족등 포근한 추억들이 그립다. 외국에 살면서 어설프게나마 명절의 정취를 느낀 것은 아들과 딸이 어렸을 때였던 것 같다. 지금은 그 자녀들이 40대의 청장년이 되었다. 이젠 저들도 자녀들이 있는 생활인으로 분주한 삶을 살고 있다. 문득 오랜 세월동안 고국과 형제들을 떠나 살아온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명절을 앞두고 얼마간 소식없이 지냈던 한국과 미국의 형제들에게 간단히 안부를 전했다.
아내는 다른 일로 딸과 통화하다가 그 다음날이 추석인 것도 모른다며 핀잔(?)을 주는 것 같다. 미국에 있는 아들에게 추석 잘 보내라는 카톡을 보냈다. 그는 아.. 추석이었네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하며 여기보다 더 명절 분위기나는 추석 보내시라는 회답을 보내왔다. 추석날 아침에 아들 가족과 화상통화를 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다른 친구와 함께 마젠타 쇼에 있는 한 리조트에 가서 1박 2일 쉬다가 왔다. 실은 얼마전에 예약을 하면서 그날이 추석인 것을 확인치 못했다. 아니 모르고 그렇게 했다. 전통명절을 지키는 일에 소홀한 것은 아버지나 딸, 아들 모두 엇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집에서나 식당에서 음식을 가리지 않고 두루 잘 먹는 편이다. 아내는 가끔 무슨 음식을 먹었느냐고 묻는데 대답하지 못할 때가 많다. 아내는 그것이 기억력의 문제라며 염려된다고 했다. 나는 맛있게 먹고 잘 소화했으면 됐지 그 이름 등에 신경쓰지 않는다고 변명한다. 내 기억력이 떨어지고 있음을 수긍한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일과 관심있고 중요한 것은 제법 잘 기억한다고 응수한다. 가령 이 단상을 마치고, 금요일의 강의와 주일예배를 준비하고, 토요일의 자선음악회 참석도 잘 알고 있다. 두 세시간의 강의 정도는 버걱대지 않고 자신있게 가르칠 수 있다. 오래 전 일이지만, 나를 만나 주셨던 주님의 불꽃같은 눈이며 많은 물소리같은 그 분의 음성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 더 젊고 총이 좋은 아내 보다, 나의 기억력이 더 좋은 것도 있다. 이것은 내 생각이 아니고 아내가 하는 말이다.
오래 전의 미국 영화 한 편이 생각난다. 우리 말로는 ‘죽은 시인의 사회’로 번역된 이 영화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어떤 재미나 감동이상의 도전을 주었던 좋은 영화였다. 특히 참교육 아니 성숙한 삶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게 하였다. 또한 개인적으로 가슴에 울림을 주었던 그런 대사들도 나온다. 가령 의학이나 법률, 경제, 기술등은 삶을 위해 필요한 수단이지만, 사랑과 낭만, 아름다움과 시는 삶의 목적이다. 지혜로운 삶을 위한 현실적인 도움말도 있었다.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라. 그러나 이를 위해서 네 목숨을 버리지 말라”는 것등은 아직도 생각난다. 아마 아내는 그런 말들을 기억하지 못할 것 같다.
영화 중에 죤 키팅 선생이 첫 수업시간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고 제자들 등 뒤에서 속삭여 주었던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이말은 라틴어로 ‘오늘을 즐겨라’는 뜻으로 번역되어 90년대 한국에서도 널리 퍼진 하나의 유행어가 되었다. 원래 이 말은 로마시인 호라티우스의 ‘내일은 최소한만 믿고 오늘을 붙잡으라’는 싯구절의 부분인용이다. 그가 속했던 에피크루스 학파가 쾌락주의자들로 알려져있어 ‘오늘을 즐겨라’는 뜻으로 번역된 것 같다. 그러나 실제 이 학파가 추구했던 목표는 육체적 괘락이 아닌 충만한 삶과 평화로운 영혼등 정신적인 기쁨이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같은 우리 노래말의 뜻과는 그 깊이가 다르고 거리가 먼 다른 내용이다.
우리의 삶에서 과거나 현재, 미래는 모두 중요하다. 서로 깊이 연결되어서 영향을 주고받는 하나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과거에 메어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가령 과거의 상처나 후회때문에 현재도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이들이 있다. 이와는 반대로, 잘 나가던 과거의 자랑이며 재산, 직함등과 그렇지 못한 현재를 비교하며 스스로 오늘의 삶을 불행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이는 현재와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는 매우 안타까운 삶의 태도요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어떤 이들은 내일을 소망하며, 오늘을 송두리째 희생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가령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오늘의 필요를 부인하며 고단하게 사는 이도 있다. 한 자녀의, 미래를 위해 사립학교에 보내고 그 학비를 빌려서 마련하는 등 온 가족이 전전긍긍하며 힘겨운 생활을 하는 경우도 보았다. 그러한 희생과 수고가 반드시 내일의 큰 보상으로 주어진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그런 경우에 이 또한 지혜롭지 못한 삶이지 않는가!
오늘을 붙잡고 누리며 충만하게 사는 삶이, 후회가 적은 과거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큰 줄 안다. 또한 오늘의 충만하고 행복한 삶이 내일도 불행하지 않을 것 같은 상식적인 예측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주 그럴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시간이 부족하다느니, 자신이 시간을 통제할 수 없다는 등의 핑계를 대기도 한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똑같은 분량의 시간을 공평하게 허락하셨다. 우리 각자는 오늘을 붙잡고 누릴 수 있는 동일한 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만의 삶을 스스로 꿈꾸고 선택하고 행동하지 못 할 뿐이다. 왜 그러할까?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다른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나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세상을 보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은 아침부터 봄비가 차분하게 내리고 있다. 기다렸던 참 반가운 친구처럼 비가 내린다. 오래 목말랐던 나무들이며 정원의 꽃들이 그 비를 더 반기는 듯 싶다. 수영장 옆 살구나무는 한꺼번에 꽃망울들을 터트려서 그 비를 환영하는 것 같다. 단비에 함초롬히 젖어가는 창밖의 수목들을 바라보며, 그 나즈막한 빗소리를 들으며 내 마음도 넉넉해진다. 행복한 아침이다.
카르페 디엠! 나는 오늘 하루 그렇게 살고 싶다. 내가 아는 모든 이들도, 20대 청년이든, 50대 장년이든 80대 노인이든 오늘을 붙잡고 누리는 삶, 오늘을 충만하게 또 의미있게 살기를 소망한다. 오늘 사랑하며, 오늘 반가운 봄비와 꽃들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오늘 기뻐하며, 오늘 감사하는 하루를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최정복(호주 연합교회 은퇴목사) Jason.choi4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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