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대학 기독상담학과 학생들을 위한 집중강의에 참여했다. 이번 학기에는 시드니 지역에서 떨어진 애들레이드, 호바트, 골드코스트에서 참석한 분들도 있었다. 온라인 과정에 등록한 학생들이었다. 대부분 4-50대의 나이로 대학에 입학해서 공부할 나이가 지난 만학도들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74세의 나이로 학사과정에 새로 등록한 한분이 단연 돋보였다. 가장 나이가 많은 학생이었다. 뒤늦은 배움의 열정으로 쉽지 않은 결정을 한 그 분의 용기가 존경스럽다. 하나의 신선한 충격이다.
유엔이 발표한 청년의 연령대는 25세부터 64세까지이다. 언뜻 동의하기 어렵지만 이것은 공식적인 사실이다. 그 기준에 따른다면, 65세부터 74세, 아니 84세까지를 장년기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어쨌든 그러한 분들을 가르치는 선생의 한사람으로써 더욱 겸허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 교재나 지식 이상의 강의로 섬겨야겠다는 다짐을 하게한다. 그리고 내 자신 또한 저들 청장년처럼 진취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되겠다는 도전을 받는다.
가는 세월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 세월에 따라 나이가 더해지고 이런저런 연약함이 드러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을 거부하거나 위장하려고 안간힘을 쓴다면 그것은 억지요 생떼를 부리는 어리석음이다. 세월에 마모되어가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주어진 기회 중에서 새로운 배움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은 적극적이고 아름다운 도전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더 이상 기다리거나 미룰 수 있는 세월이 제한되어 있어 과감히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한다고 볼 수는 없을까?
미국에 사는 아들 가족이 손자들의 방학을 맞아 시드니를 방문했다. 아내와 나는 2년 전에 미국에 가서 저들을 만나고 왔다. 그 사이에 8학년짜리 손자는 나보다 더 큰 키로 훌쩍 커 버렸다. 4학년짜리 막내도 훨씬 더 의젓하고 활동적인 어린이가 되었다. 세월의 위력을 실감케 한다. 같은 기간의 세월인데, 내게는 아무런 긍정적인 변화가 없었던 것 같다. 아니다. 오히려 시력이며 기억력, 순발력 등이 퇴보한 것을 깨닫고 조금은 쓸쓸한 생각이 든다.
아들 가족이 여행의 피곤을 풀고 시차에 적응하는 처음 며칠은, 그냥 집에서 함께 보냈다. 같은 교회에 가서 함께 주일 예배를 드렸다. 함께 자고 일어나며, 식사를 하는 그런 평범한 일들도 아주 좋았다. 막내 손자의 깔깔대는 웃음소리를 듣는 것도 행복했다. 그리고 마젠타 해변에 있는 풀만 리조트에 가서 2박3일을 같은 빌라안에서 함께 생활했다. 산책을 하고, 가까운 해변을 걷기도 했다.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며, 몸을 부딪히면서 물장난도 했다. 멀지 않은 롱 젯트에 가서 거닐며 스냅 사진을 찍기도 했다. 엔트란스의 펠리칸 먹이주는 것도 구경했다. 저녁 에는 윷놀이를 하고, 손주들이 닌자 용사들을 좋아한다고 해서 텔레비젼에서 2018년 호주 닌자 결승전 (Australian Ninja Warrior Grand Final 2018)을 시청했다. 그런 작은 것들이, 아니 혼자서라면 결코 하지 않거나, 보지 않았을 것들도 즐거웠던 것은 손자들과 함께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된 것을 알기 때문인 것 같다.
큰 손자는 속이 깊고 듬직해서 믿음직하고, 막내손자는 쾌활하고 애교가 넘쳐 사랑스럽다. 막내는 “할머니가 만들어주시는 음식이 제일 맛있다. 미국보다 호주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기 원한다. 그러나 한가지 나쁜 것은 할머니께서 힘들게 요리해서 싫다”고 말해 할머니를 감동시킨다. 하루에도 몇번씩, 안아주고 키스하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녀석의 솜사탕같은 애교에 나도 모르게 매료된다. 저들이 시드니에 있는 17일 중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앞으로 아들 가족들이 친구들과의 만남이며, 케언즈 여행, 사촌들과 함께 자며 보낼 계획 등도 정해져 있다. 그만큼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남은 시간이 더 짧게 제한되어 있다는 게 아쉽다.
은퇴 후 벌써 5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인생시계의 오후에 이른 것을 안다. 그러나 심리학자 융은 이 시기를 ‘인생의 대낮’이라 했다. 사회활동이나 생물학적인 면에서는 결코 아닌 줄 안다. 그렇다면 그런 표현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 내적인 면에서 삶의 지혜와 세월의 무게 등의 측면에서 한 말이 아닐까 싶다. 현재의 내 삶이 ‘대낮’이 될 수 있는 긍정적인 이유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를 자문해 본다.
먼저 일에 대한 어떤 의무감이나 부담이 없다. 자녀들을 위한 기도 외에 실제로 저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하거나 신경 쓸 것이 별로 없다. 물질에 대한 큰 필요도, 욕심도 없어 자유스럽다. 그렇게 내 자신이 원하는데로 매일을 자유롭게 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또한 지금까지의 삶을 통해 만나고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소중하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후회되고 가슴 아픈 옛일들까지 말이다. 그것은 세월 속의 경험이 깨우쳐주는 작은 지혜인 듯 싶다. 꽃과 바람, 하늘과 구름, 바다와 숲의 신비와 아름다움이 예전보다 더 귀하게 느껴진다. 문득 지금이 내 인생의 대낮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앞으로 남은 내 삶의 세월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작은 일, 평범한 일상도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기 원한다. 마치 시드니를 방문한 손자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으로, 저들과 함께하는 작고 평범한 일들까지도 소중히 여기듯 말이다. 가난한 마음으로 사랑을 주고 받으며 대낮처럼 밝게 살수 있기를 기도한다. 세월이 살같이 빠르게 가고, 그만큼 내 삶의 경주는 끝에 가까와진다는 소망이 크기 때문이다.
최정복 (호주 연합교회 은퇴 목사) Jason.choi4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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