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금요단상 차례임을 알려드립니다.” 라는 이메일을 받고 나면 겁이 덜컥 난다. 이번엔 무슨 글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내가 어떤 전문분야를 연구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한 학자도 아니고 어떤 직장에 다니면서 인간 관계속에서 몹시 불편한 일이나 좋은 일이 생겨서 이런 내용만은 여러 사람과 공유했으면 하는 그런 짜릿한 내용도 없다 보니 더욱이 그렇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렇고 그런 얘기들을 다시 끄집어 내는 것은 도리어 아픈 가슴에 돌을 하나 더 올려 놓는 격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펜을 들수 있는 힘에 맥이 빠져 버린다. 게다가 양분된 진보니 보수니 하는 얼치기 정치 영역에 얼씬 거리다 보면 종교인이 왜 어느 한 쪽에 치우치는냐는 비아냥이 돌아온다.
그렇다고 맹자와 공자를 들먹이면 현실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듯이 생각되고 부처님 말씀을 옮겨 적기도 본인의 마음에선 내키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느 책에 좋은 말씀이 없을까? 하고 이것 저것을 뒤적 거리다가 이내 책장을 접고 만다. 좋은 말이 너무나 많아서 도리어 혼란스러움이 더 가중된다. 정선되고 세련된 고급 용어를 그냥 막연히 인용하는 것은 소꼴을 베면서 자란 촌스러운 나에겐 개에게 코끼리 가죽을 입힌 듯 어색한 모양새다. 이래 저래 차, 포 다 떼어내고 나면 내놓을 만한 힘있는 병사는 별로 없게 되어 버린다.
그러다가 이 제목, 저 내용으로 몇 자 써 내려가다가 점심을 먹고 와서 읽어 보면 내성에 차지 않아서 그냥 버린다. 저녁에 또 시도를 해서 끄적 거려 두었다가 그 이튿날에 연이어 쓰려다 보니 또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많아서 접어 버린다. 변덕은 죽 끓듯이 출렁거린다. 그렇다 보니 한 달에 한 번 쓰는 글이건만 그때마다 허둥댄다. 사실이지 이곳에 와서 오래 살다보니 글 쓸 소재가 다소 빈약한 것도 하나의 핑계가 될 수 있다. 원래 글 재주가 넉넉치 못한데다가 독서량도 적고 여행도 못가다 보니 견문이 부실해서 더더욱 그렇다.
그래도 한국엔 절기의 변화에 따른 다양한 느낌도 있고 만나는 사람들도 여러 계층이다 보니 재미나는 얘기 거리가 제법 있게 마련인데 이곳에선 힘들어 못 살겠다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다 보니 나도 덩달아 멍청해짐을 느낄 때도 더러 있다.
이럴 땐 펜과 종이를 몽땅 벽장에 집어 넣고 명상에 드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글을 쓸려는 자신의 마음과 조용하게 만나서 그곳에서 문제점을 확인해 보는 것이다. 그 시간과 장소로는 밝은 달 빛이 내 방 유리창으로 넘어 와서 내 방을 은은하게 비춰 주는 보름 전후면 상당히 좋고 맑은 날 이른 아침 가을 바람이 소리없이 유칼립투스 나뭇잎을 흔들며 지나갈 때 쯤 전통 다실 의자에 앉아서 흘러 가는 백운을 쳐다보며 사색에 들어가면 매우 좋으며 새벽 기도를 마치고 나서 내 방 창문을 모두 열어두고 전깃불을 끈 어둑한 상태에서 정좌하고 마음을 비우는 시간을 갖게 되면 그 때가 제일 좋은 시간이다.
그 비움의 시공속에서 글을 쓰려는 자기와의 만남이 이뤄지며 그 속에서 자신의 문제점 역시 발견된다. 우선은 글을 잘 쓸려고 노력하는 위장한 자기의 허상(虛像)을 발견하게 된다. 왜 잘 쓰려고 하는가? 과시하려는 생각에 사로 접혀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자기의 존재 가치를 몇 줄의 글을 통해서 인정받으려 하는 자기도취에 허우적 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내 글을 읽어 보고 그 어떤 감흥도 일으키지 않는데도 본인 스스로가 그렇게 헛 발질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우습지 아니한가?
두번째로 나는 무슨 일이나 뒤로 미루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는 자신임을 알아 차렸다. 벗은 양말은 그때 그때 빨면 될 터인데 두 켤레가 모이면 세 켤레가 되어서야 빨겠다는 생각으로 변덕이 생긴다. 양말이 보이면 빨까 말까하다가 또 미루게 되다 보니 이젠 그만 그 못된 습관이 몸에 배어 버렸다. 이른바 생각과 행동이 따로 노니 이것 또한 작은 일이 아니다. 글 역시 한 10 여 일전에 써 두면 되련만 거의 이메일을 받고서 시간에 쫒기면서 쓰게 되니 그에 대한 푸념을 엉뚱한 데로 전가시킨다. 그래서 준비성이 부족하고 나태한 자신을 발견한다.
그 다음이 긍정을 쉽게 하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다. 패기가 없이 물에 물 탄 듯이 평생을 살아 왔으니 그에 따른 고통이나 문제는 오롯이 본인의 몫이 된다. 애초에 글을 잘못 쓰면 사양을 했어야 마땅한 일인데 엉거주춤 승낙을 하고 나서 끙끙대는 그런 내가 문제를 일으키는 장본인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자신의 허점들을 나름대로는 파악을 하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개선이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믿음과 이해를 실천적 행동으로 승화시켜야 되는 불법(佛法)을 배우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이행하지 못하는 불법(不法)을 자행하고 있으니 심히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부활절 연휴도, 모질게도 덥던 여름도 지나갔다. 우리들의 삶 역시 그 속에서 공존하다가 그 속으로 소멸된다. 그 반복되는 여정에서 희망을 가꾸고 행복을 찾는다. 그러나 그 두가지 목적이 자신과는 상당한 거리에 있음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다. 특히 남의 나라에 와서 살수록 고뇌와 한스러움이 많아질 수가 있고 그로 인한 정신적 압박과 신체적 불편함도 더 느껴질 수가 있다. 그럴수록 자신의 삶의 가치 체계를 어디에 두고 사느냐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사실 인간이 살아가는데 기본 욕구는 그리 많지 않다. 적당한 물질로 인한 안정, 깨끗한 공기와 맑은 물, 편안한 주거, 보건과 의료, 교육과 정보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개발할 수 있는 여가 시간이 있으면 큰 불편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보다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 대상들이 우리들이 희망하는 행복의 조건이 된다고 선전, 선동하는 세력에 너무나 쉽게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행복을 원한다면 그것을 추구하는 중심 세력인 내 마음의 실체를 잘 바라 봐야할 것이다. 행, 불행을 결정하는 가장 온전하고도 분명한 열쇠는 바로 내 마음속에 숨어 있는 슬기로움의 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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