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크리스마스에 LA에 사는 오랜 친구의 가족이 시드니에 다니러 왔다. 지난 번 미국에 출장 갔을 때 만났었는데 벌써 4년 전 일이다. 이번에 호주에 여행을 오는 가장 큰 이유는 나와 아이들을 만날 뿐 아니라 한국을 떠난 후 한번도 뵙지 못한 자신의 엄마의 친구인 나의 모친을 만날 수 있는 것이 너무 기대 된다며 시드니에 오게 되었다.
어린 시절 우린 한 동네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1학년을 입학하면서부터이니 50여년 동안 인생 내내 친구인 셈이다. 그 시절이 그랬듯이 친구 집은 허리를 숙이고 어둔 부엌을 통해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족 네 명이 간신히 누울 수 있는 단칸방에 살았다. 두 살 터울 형은 늘 우리를 훈시하는 엄하면서도 모르는 걸 잘 가르쳐주고 먹을 걸 잘 나눠주는 친근한 형이었다. 아버지는 양복점을 하셨는데 좁은 방 앞 켠에 길거리로 유리창을 낸 좁은 상점엔 누비이불과 포목들이 즐비하게 깔려 있었다. 이곳이 어린 시절 우리의 놀이터가 되었다. 양복점을 뛰어 다니고 엎어지고 소리치면 노는 우리를 향해 아버지는 늘 웃음을 머금으셨다. 당시 월남에 기술인력으로 가 계셨던 나의 아버지의 빈자리에 늘 인자한 아버지가 되어주셨다.
친구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 했을 뿐 아니라 인기도 좋아 전교 회장도 하고 백일장에서 줄 곳 상을 탈만큼 글도 잘 썼다. 중학교 때 썼던 소설이 내용은 안 떠오르지만 수백장 원고 뭉치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늘 호기어린 말투로 난 커서 노벨문학상을 탈거라고 말하곤 했는데 아직 그 꿈이 있냐고 물었더니 그저 웃기만 한다. 그는 중학교 때 폐결핵을 앓고 한 쪽 폐를 절단해야 했던 큰 수술을 해야 했다. 그래서일까, 자신의 클리닉이 몇 군데 있어 바쁘기 그지 없는데도 큰 병원의 응급 환자들의 생명을 책임지기를 고집하는 초 응급환자 베테랑 의사가 되었다.
딸과 아들도 공부를 잘 해 누나는 하버드 로스쿨을 다니고 아들도 작년 하버드에 입학해 전공을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엄마도 유명 대학의 교수로 있다가 이제 남편의 병원 사업이 커져 재정 관리를 돕고 있다.
불루마운틴을 다녀온 크리스마스 날 우리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느라 가족들을 모두 만날 기회가 되었다. 50년 지기 친구 가족과 우리 가족 전부가 함께 만나기는 처음인 셈이다. 변호사인 둘째 아들과 동갑인 첫딸은 금새 말이 통했다. 미스터 캘리포니아로 뽑혔다는 아들은 운동을 좋아 하는 우리 큰 애와 화제가 줄을 잇는다. 미국과 호주 영어가 억양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니 아이들도 서로 궁금한게 많은가 보다. 내 모친 옆자리에 옮겨간 친구는 이젠 모두 돌아가신 엄마 아버지를 기억하며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참동안 물었다. 내 어머니를 보면 친구였던 자신의 어머니가 자연스레 떠오르나 보다. 어린 시절 얘기로 흉도 보고 웃다 보니 옛 노래도 기억이 나서 구석에 있던 기타를 꺼내 생각나는 대로 노래도 부르게 되었다. 아침 이슬,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 막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남미로 이민을 떠났던 사춘기 소년은 정든 친구들과 조국을 기억하며 짙은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가득찼을 것이다. 혼자 기를 쓰며 공부하면서도 잘돼서 나중에 만나야지하는 다짐을 하며 보고픈 맘을 달랬을 것이다. 나도 눈물을 삼키며 공항을 떠나던 친구의 뒷모습을 기억하며 늘 부끄럽지 않은 친구로 살아야지 마음을 먹곤 했으니까..
친구는 아버지처럼 큰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우리에게 늘 근엄했던 형은 이미 같은 교회의 선배 선임 장로라고 한다. 아버지와 함께 재단을 하며 도매상을 하던 아동복 사업도 잘 되어 돈도 많이 벌었다고 한다. 어릴 때 아버지의 부재가 늘 허전 하던 나는 친구 집에 갈 때마다 선물처럼 찾아오는 편안함으로 빈 마음을 채울 수 있었다. 나는 그 시절 비록 가난했지만 늘 기쁘고 꿈으로 채운 평화가 무엇인지 이제는 알 수 있다. 그건 지금까지 우리 가운데 함께한 하나님의 은혜가 분명하다. 아이들은 자주 들어 볼 수 없는 아빠의 어린 시절 얘기를 들으며 마치 자신들의 뿌리의 현장 검증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일 것이다. 선물도 나누고 노래도 부르고 50년 자기로 지낸 친구와 자녀들과 가족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저녁은 깊어져 갔다. 진정한 평화로 오신 그 분의 날에..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한 채 그저 좋은 친구로 지냈다. 그저 함께 있는게 좋아서 먼 길을 걸어 학교에 가고, 비를 맞고 미끄럼틀에서 거꾸로 물구덩이로 던져지며 신나 소리지르며 깔깔 대며 영화도 보고 책도 보며 운동도 하며 그 시절을 지냈다. 그 아스라한 기억은 이제 20대 자녀들을 둔 중년의 현실이 되었다. 올해도 빨리 지나가겠지.. 여러 가지 일들이 있겠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또 새해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은 내 능력보다 큰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면 좋은 미래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이번 크리스마스에 친구를 만나며 분명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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