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같지 않은 추석이 지나갔다. 그래도 연분홍 송편을 불전에 올리고 여럿이 모여서 선망부모님께 공경과 감사의 차례를 모셨다. 어떤 노 보살님은 한복을 곱게 다려입고 나왔고 라이드에 사는 젊은 세 식구들은 꼬마까지 큰 주머니가 달린 예쁜 한복을 입고 차례에 참석했다. 매일 같은 날이지만 의미를 부여하니 못 보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행사를 마치고 내 방에 들어오니 2개의 선물 박스가 놓여져 있었다. 하나는 홍삼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국차였다. 이것 역시 명절이라고 지어둔 시간에 대한 관념의 선물이다. 누가 언제 살짝 갖다 두었을까? 늘 받고만 사는 듯 해서 미안하기도 하면서 고맙기도 하다.
오후엔 평소에 잘 아는 청년과 마주했다. 그는 교직에 근무하는 새 색시처럼 생긴 얌전한 성격이다. 지금이 3번째의 직장인데 너무 힘이 든다고 하소연을 했다. 가르치는 곳이라 공업이나 상업 등의 분위기와는 다르리라 생각하고 힘들게 공부해서 선택한 희망어린 새 직장이건만 부딪히는 내용은 다른 곳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만큼 그는 아직까지 순수하였다. 더 많은 다른 직종을 찾아 나서다가 지금하고 있는 그 현재적 위치와 자리가 자신에게 제일 적합하고 만족스럽다는 자각을 할 때까진 그에겐 아직 희망이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될 듯하다.
10 여 년전 필자가 한국에서 요양할 때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중이 많은 큰 절에 있으니 새벽 3시에 일어나서 기도하는 등등의 대중생활이 힘들었으나 식사를 대접받는 것은 또한 혜택이었다. 잠만 푹 자고 내맘대로 쉴 수 있는 곳에 가 있으면 건강이 금방이라도 회복될 듯 하였다. 그래서 깊은 산골짜기에 흙벽돌로 집을 짓고 혼자 지냈다. 처음 며칠은 좋았으나 다달이 지나고 나니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해야 되는데서 오는 또 다른 불편함이 생겼다.
그 때의 추석날 원두막에서 혼자 앉아 보름달을 쳐다보며 한 생각이 일어났다.
‘이 곳보다는 저 곳이, 이 사람보다는 저 사람이 더 좋을 것이라고 꼬득인 그대는 바람잡이다. 그러나 난 그대가 없었던들 차 밀린 십자대로에서 납짝한 뻥튀김 되어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우린 외나무 다리를 함께 건너야 되는 동반자 그래서 난 오늘도 내일을 넘본다.’
아니거니 하면서도 또 한자락의 희망심을 갖고 전전하는 우리네의 중생살이, 그런 마음속의 멈춤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불교 철학의 인식론중에 사승마(蛇繩麻)라는 그럴듯한 비유가 나온다. 어떤 무지한 사람이 여름 밤에 시골길을 걷다가 발길에 긴 무엇을 밟게 되었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 틀림없이 뱀이라고 생각하여 두려운 마음을 내었다. 그로 인해 그날 밤 꿈에 뱀에 물리는 무서운 꿈을 꾸면서 고통에 시달렸다. 이튿 날 밝은 날에 되돌아 오면서 자세히 바라보니 굵은 새끼줄이었다. 그는 그것을 한참을 들여다 보니 그 새끼는 짚으로 만든 것임을 깨달았다. 어둠속에서 억측으로 지어낸 뱀도 아니었고 밝은 날에 건성으로 인지한 새끼라는 이름도 명상(名相)에 집착한 헛된 이름이었으며 그것의 본질은 짚이라는 것이었다. 뱀의 경우 어리석은 마음때문에 실체와는 전혀 거리가 먼 뱀으로 착각하여 자타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경우를 뜻하고 밝음(성인)의 기운을 받아서 자각하여 자세히 바라보니 새끼줄이라는 것도 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짚이라는 것으로 된 가짜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들의 삶 역시 그 비유에 견주어 보면 전혀 허황된 정보로 사실을 왜곡하고 결정해서 서로에게 힘들게 하는 일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진실을 볼 수 있는 안목이 그릇됨을 떠나서 따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사승마의 비유를 부즉불리(不即不離)라 하여 허망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적 삶속에서 희망을 가꾸고 영원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지혜의 안목을 갖추게 되는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공기 좋은 시드니에서 둥글고도 밝은 달을 바라보면서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교민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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