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자주 들어왔던 지상천국이라는 나라에 처음 들어왔던 그때의 감흥은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게 새겨져있다. 곧 착륙할 것이란 안내방송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다 본 시드니의 모습은 듣던 대로 천국처럼 느껴졌다. 붉은 지붕과 푸른 초원, 그리고 우거진 숲속에 파묻혀 있는 아담하고 낮은 집들의 가지런한 모습은 시멘트 집으로 높게 쌓아올린 한국의 고층아파트만 쳐다보던 이방인에겐 하루 한 끼만 먹고도 살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나 정해진 공간에 짐을 풀고 보면 우선은 의ㆍ식ㆍ주라는 생존의 일차적 조건과 부닥치게 마련이다. 그리워했던 천국은 지금 앉아있는 곳이 못 마땅한 사람들의 희망의 세계였을 뿐 사람이 사는 곳은 다 그렇고 그렇더라는 푸념을 하기에 이르고 만다. 특히 남의 나라 터서리에 뒤늦게 들어와서 자리 잡아 보려는 객지 사람들에겐 천국이 주는 혜택을 받으면서 살아가기엔 상당한 노력과 함께 긴 시간이 요구된다. 그 중에서도 국내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비자 문제가 제일 큰 골칫거리다. 그것은 신청하는 과정도 까다롭지만 해당 비자가 나오는 것을 기다리는 당사자의 조바심 또한 상당하다. 받아놓게 되면 별 것도 아닌 듯이 느껴지지만 그 이전의 상황에선 언제나 마음을 졸이게 한다.
그래서 필자가 영주권을 얻기 전 한 생각이 떠올랐다. 비자제도를 없애야 되겠다는 다소 황당한 문제 제기였다. 비자제도를 제일 먼저 고안해낸 것은 서구사회였다. 그들의 논리에 의하면 이 세계의 원주인은 창조주인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그 주인으로부터 어떤 사람이 이 땅은 당신이 주인이라고 사인을 받은 사람이 있는가? 그 아무도 없다. 그래서 이곳은 우리나라라고 국경을 설정해두고 비자를 받아야 입국할 수 있다는 현실적 논리가 원천무효가 된다. 이 땅의 원주인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 영주권을 얻고 난 직후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했다.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하려고 여러 전문인들에게 알아본 결과 그곳에 안건으로 채택되려면 상당한 기간에 걸친 절차와 그에 따른 얼마만큼의 경비가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그 당시 최소 3만 불 정도는 들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 후 여러 갈래로 준비를 하다가 그만 둔적이 있다. 그만큼 비자 문제로 인한 심리적 부담이 타국 사람들에겐 크기 때문에 나온 비현실적 발상이지만 논리적으로는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타당한 이론이다.
본래로 뭇 생명체는 조건이 맞는 곳에서 태어나고 살게 되어있다. 그 조건이 다하면 더 좋은 환경을 찾아서 이주하게 되어있다. 그런 흐름의 자연현상을 그대로 놓아두면 자신의 생존 조건에 맞으면 그대로 살고 그렇지 못하면 스스로가 떠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국가라고 하는 이기적 집단체를 구성해두고 이 땅은 우리 땅이니 허락을 받고 들어와야 된다는 비자문제는 창조주 이론에도 위배 되지만 자연스런 생존조건에도 어긋나게 된다. 그러니 원천무효라는 발상이 터무니없는 허황한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우리 인간은 제재하지 않고 그냥두면 마구잡이로 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는 부분도 상당히 많다. 특히 사람들은 도덕적인 사유와 합리적인 사고를 많이 하는 영감이 뛰어난 고등동물이기 때문에 생존여건에 따른 취ㆍ사와 거래를 잘 구분할 수 있게 되어있다.
그 실례로 88년 서울올림픽 직전에 실행된 교복자율화와 야간통행금지 해제가 이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그 당시 그 제도의 반대론자들은 그 두 가지를 해제해버리면 한국사회가 무법천지가 되어 큰 혼란이 올 것이라고 큰 걱정을 했다. 결과는 생각보다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도리어 제도적으로 묶어두면서 인간의 본성을 관리 감독하면서 억압하려드는 것이 어쩌면 더 큰 부작용을 꽤 크게 일으킬 수 있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사람은 하나 됨의 평화스러움에서 탄생된 자연스러움의 품성과 후천적으로 생존적 조건을 충족시켜야 되는 욕구의 혼합체이다. 이 두 가지로 형성된 가족과 사회의 더 큰집합체가 국가라고 하는 한 단위의 공동체로 구성되면서 비자문제가 고안되었을 것이다. 우주적 자연 질서의 큰 틀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참으로 우습고도 불합리한 문제이다. 마치 어린애들이 두 팔을 벌리고 제사지내는 우리 집에 오늘은 들어오지 말라고 가로막는 모습과 다들 바 없다. 출입국을 할 때마다 가방을 들고 길게 줄을 지어 서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비자제도의 개선점을 늘 생각하게 되는 것도 서있음에 대한 지루한 감도 있지만 인간에 대한 좀 더 폭넓은 이해가 선행된다면 더 좋은 방안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된다.
근래에 457 비자제도가 없어지고 또 다른 대안이 나온다고 한다. 툭하면 바뀌는 이민법 때문에 따분한 천국에서 살게 되는 서러운 타향살이, 호주에만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을 듯이 감언이설로 꼬득이는 일부고 약한 이민 브로커들 때문에 이곳에 와서 오가도 못하게 된 사람들이 상당수에 이른다. 수일 전에도 어떤 모녀가 찾아와서 하소연을 했다. 딸이 학생 비자로 호주에 온지 8년, 그사이 결혼을 해서 네 식구가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학생 비자로 살아간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이 특정 자격증을 얻어서 일은 하고 있지만 비자문제로 사기를 당해서 다른 직장으로 옮긴지가 한 달이 되었단다. 이곳에서도 스폰서를 서준다고 언약을 해서 가긴 갔는데 너무 여러 번 속아서 지금도 불안하다고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비자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은 없는 것일까? 흔히들 이 세태를 ‘지구촌’이라고 한다. 하늘에 깔린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면 이 지구야말로 우주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태양에 견주면 반딧불과 같은 미미한 존재이다. 그 속에서 국가라고 하는 눈금을 그어놓고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지문을 찍게 하고 도장을 쿵쿵 눌러야 출입국이 가능하게 만든 이 비자제도의 불합리성,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는데 첫 번째의 조건은 거래의 자유이다. 그 고귀한 자유를 제한하는 비자문제, 그것은 바로 우리만 이라고 하는 집단적 이기주의의 발상에서 비롯됐다. 더러는 그런 통제가 없으면 여러 가지의 혼란스런 문제가 야기될 것이라고 염려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생명성을 깊이 있게 이해한다면 그것은 기우에 지날지도 모른다. 뭇 생명은 스스로가 자기 살길을 찾아가게 되어있다. 그러면서 안정적 평화를 희망한다. 인간 실존의 정체성을 만족하게 서로서로 이해하면 혼란스러워 보이는 현실 속에서도 질서를 유지할 수가 있다. 인도 여행을 해본 이들은 이 사실을 부정 못할 것이다. 그곳 대도시엔 신호등도 경찰도 없다. 그저 자기가 갈 길을 그냥 갈 뿐이다. 소도, 개도, 사람도, 버스와 릭샤도 함께 어우러져 지나간다. 그래도 사고가 없다. 도리어 사고는 교통통제가 제도적으로 잘 설치되어 있는 곳에서 더 많이 일어난다. 자연스러움이 배제된 억압이 더 큰 불행을 초래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나라마다 출입국 관리사무소를 설치해두고 긴 줄을 서게 하는 비자문제, 그것이 원천무효임을 재차 천명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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