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금요일, 내일과 모레는 부활절이다. 원래 기독교에서 시작된 절기지만 국가적 공휴일이 되었다. 연초부터 열심히 살아왔던 고삐를 잠깐 늦추며 여행을 가고, 집에서 가족들과 편히 쉰다. 빵집에는 ‘핫 크로스 번’이 넘쳐난다. 달콤한 빵 표면에 하얀 십자가를 그려 놓았다.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려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기념하며 성금요일에 먹는다.
십자가는 양면성을 갖는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광의 상징이지만,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광포(狂暴)의 도구다. 사람이 사람을 가장 치욕스럽게 죽일 때 이 십자가를 사용한다. 벌거벗기고, 팔다리에 못을 박아 며칠 동안 고통 속에 신음하다가 죽어가게 한다. 가장 증오하는 적을 죽일 때, 혹은 배신의 대가가 얼마나 엄중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십자가를 사용했다.
글래디스 베레지크리안 NSW 주총리의 할아버지는 아르메니아 출신이다. 그 분이 고향을 떠나 호주로 온 이유는 1915년에 일어난 대학살 때문이다. 그 당시 오토만제국이 자행했던 인종청소로 인해 1백 50만 여명이 학살됐고 그 중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벌거벗겨져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사람은 이토록 잔인할 수 있다. 어떤 짐승보다 더 할 수 있다. 지금 시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살극이 그 생생한 증거다. 지난 6년 동안 정부군과 반군들이 싸우면서 무고한 백성들이 수도 없이 죽었고, 4백만 명 이상이 난민의 길을 떠났다. 2013년에는 자국민을 향해 독가스까지 쏴댔다. 그 피해자는 말한다. “불로 만들어진 칼이 가슴을 마구 찢어내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2014년에는 고립된 도시 ‘홈스’에서 생존자들을 돕던 네덜란드인 예수회 ‘프란시스’ 신부가 무장 괴한에게 피살되었는데, 죽기 전 페이스북에 이런 메시지를 올렸다. “굶주림에 도덕은 사라졌다. 인간이 야생동물로 바뀌고 있다.” 몇 주 전 시리아가 다시 독가스를 사용한 정황이 포착되자, 미국은 토마호크 미사일 59발을 쏘아 대며 응징했다. 그 여파를 몰아 악의 축인 북한을 향해 항공모함 ‘칼빈스’의 기수를 돌리니, 우리 조국은 비참했던 6.25전쟁의 악몽에 다시 시달리고 있다.
조국이 경험한 6.25에 버금가는 비극은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이다. 왜구라고 낮춰 보던 일본은 기독교와 함께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50년이 채 되기도 전에 동양의 강국이 되었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이 현해탄을 건너 부산에 도착, 파죽지세로 한반도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왜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가 십자가 군기를 앞세우고 조선을 침략할 때, 그의 진중에는 교황청이 파견한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신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가 있었고, 밤마다 미사를 드렸다. 조선의 영웅 이순신 장군은 고니시의 십자가 깃발을 보았으나,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한 작가는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부산에서 평양까지 북상할 때 고시니는 가마 앞에 열십자 무늬의 깃발을 앞세웠다. 나는 그 열십자 무늬의 뜻을 (부하) 안위의 보고를 통해서 알았다. 인간의 죄를 누군가가 대신 짊어진다는 것이 그 야소교의 교리라고, 안위는 포로의 말을 전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십자가의 양면성 앞에 역사는 아이러니하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목에 걸고 의롭게 살다가 죽어가고, 어떤 사람은 십자가 깃발을 들고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침략전쟁의 앞잡이가 된다. 정말 십자가만큼 이상하고도 신비한 것은 없다. 영광과 치욕이 교차하며, 진리와 탐욕이 공존한다. 지난 2천년전 예수의 십자가가 세워진 이후, 사람들은 그 위에 탐욕의 옷을 입히고, 정의를 가장하여 타인을 수탈하고 공격했다. 십자가를 들지 않았으면 오히려 좋았을 때가 적지 않다. 십자군 전쟁이 그랬고, 임진왜란이 그렇다. 그렇다고 십자가 드는 것을 무서워하거나, 피할 수는 없다. 십자가 밑에 감춰진 인간의 탐욕과 잔인성을 깨부수기 위해서는 예수의 십자가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담지 않을 수 없으며, 기아의 끝에 서면 구더기라도 먹어야 한다.
광포(狂暴)의 십자가는 버려야 한다. 그런 십자가는 예수 이전에 끝났다. 예수의 십자가는 용서와 사랑, 화해와 희생의 십자가다. 이런 십자가 말고, 괜히 다른 십자자가 들고서 자신의 욕심을 차려서는 안 된다. 우리의 선택은 셋 중 하나다. 그 앞에 무릎을 꿇던지, 그 위에 인간의 욕심을 덮어 휘두르던지, 아니면 아예 팽개쳐 버리든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김성주 (새빛장로교회 목사) holypilla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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