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는 내셔날리즘(민족주의)이 강하지 않는 편이다. 1월 26일 오스트레일리아 데이(Australia Day) 기간에 이 이슈가 종존 거론된다. 인종차별주의(racism)와 함께.
오스트레일리아 데이에 호주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이 호주 국기를 몸에 휘감고 걸어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지방과 변두리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런 행위는 이들에게도 나라 사랑과 호주인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일텐데 부정적인 반응이 나오는 이유는 두 가지다. 혹시라도 그 저변에 ‘추한 인종차별주의’가 숨어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국기를 나라와 동일시하는 ‘국가주의 기호’로서 오용될 수 있다는 경계감을 갖기 때문이다.
올해 3·1절에는 한국에서 태극기 게양이 확 줄었다고 전해진다. 작년까지는 아파트 단지에서 관리사무소가 매번 태극기 게양을 독려했지만 올해는 태극기 게양 방송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친박단체 회원들이 태극기를 들고나와 자신들의 집회를 ‘태극기 집회’로 부르면서 태극기가 탄핵 반대 집회의 상징처럼 굳어졌다. 이 때문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국경일인 3·1절에도 태극기를 달지 않은 집이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태극기 게양의 의미가 자칫하면 탄핵 반대나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로 보일까봐 꺼렸다는 설명이다.
지난 연말 등장한 탄핵 반대 시위를 빼고 역사적으로 태극기가 특정 세력만의 아이콘이 된 전례는 없는 것 같다. 1882년 태극기가 국기로 정해진 이래 태극기는 일제강점과 해방, 4월 혁명, 6월 항쟁을 거쳐 지금까지 줄곧 근현대기 한민족사의 상징이었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등을 통해 거리에 게양되면서 민중에게도 알려졌지만 초기에 태극기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3·1운동을 계기로 태극기는 진정한 독립정신과 한민족의 상징이 됐다. 당시 몰래 만든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에 쏟아져나온 군중 시위의 극적인 광경은 민족 주체성이 국기 안에 살아있음을 민중들이 깨닫는 전환점이 됐던 것이다. 그 뒤 상해 임시정부가 태극기를 국기로 삼고, 숱한 독립지사들이 태극기를 품에 안고 항일의거를 벌인 데는 이런 역사적 각성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이후 여러 정권들이 정통성 확보를 위해 태극기를 관제 행사 등에서 널리 활용했다. 그러나 60년 4월 혁명, 80년 광주항쟁, 87년 6월항쟁, 88년 남북학생회담 등의 여러 민주화, 통일운동 노정과 2002년 월드컵 응원장에서도 태극기는 어김없이 등장했다. 2002년 서울 시청 앞에 모인 ‘붉은 악마들’의 태극기 응원은 여전히 우리들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3월1일 시드니한인회관에서 3·1절 98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3·1절 기념식의 마지막 순서는 항상 태극기를 손을 들고 부르는 만세삼창이다. 올해는 황명하 광복회 호주지회장이 직접 만세삼창을 했다. 만세삼창 전 황 회장은 ‘3·1절 태극기의 의미’라는 한국 광복회의 성명서(2월 27일)를 낭독했다.
성명서의 요점은 “국민들의 화합과 단결을 상징하는 국기의 기본 정신을 무시하고 국기가 국민 분열을 야기시키는데 사용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무분별한 국기사용은 신성한 국기에 대한 모독행위에 해당한다. 태극기에 담긴 진정한 의미, 자주적인 주권의식과 통합정신을 음미하면서 3·1절에 태극기에 대한 엄숙한 마음을 가져달라”는 호소 겸 당부를 했다.
이어 황 회장은 최근 한국 정국을 염려한 듯 만세삼창에 예년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를 부여랬다. 첫째는 자주독립과 겨레를 위해 희생하는 애국선열들을 기리고 우리가 계승해야 할 3·1 독립정신을 되새기며 “대한독립만세”, 두 번째는 우리 시드니 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해 교민들의 화합과 단결을 촉구하고 올바른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진정한 애국과 애족을 위해 힘쓰기를 기원하며 “한인사회만세”, 세 번째는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하루 빨리 난국을 지혜롭게 수습해서 영원무궁한 번영을 누리고 우리의 숙원인 민족대통합을 이루는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대한민국만세‘로 했다.
이 기념식 후 한인회관 앞마당에서 ‘3·1절 기념 시드니 태극기 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는 당초 한인회관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한인회의 불허 결정으로 옥외 행사가 됐다. 한국의 태극기 집회에서 성조기가 보였는데 시드니에서는 호주 국기가 함께 등장한 것은 한편으로 흥미로웠다. 그런 반면 태극기가 요즘 ‘극우’ ‘친박’의 등록상표처럼 보여지면서 젊은 층에게 자칫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감도 들었다. 이래저래 태극기가 시드니에서도 고생이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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