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여름은 무척 더웠다. 길고 지루한 계절이었다. 집의 수영장을 가장 많이 사용했다. 아침에 수영장을 청소하는데, 손에 와 닿는 물의 촉감이 지난 주와 다르다. 시원함보다 차가움이 크다. 얼굴에 스치는 바람도 서늘한 청량감을 준다. 여름이 가고 성큼 가을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느낀다. 그 수영장가에서 하늘을 쳐다 볼 때, 문득 오래 만나지 못했던 옛 친구들이 생각난다. 조용필의 노래 ‘친구여’가 떠오른다. 노래말은 다 잊었지만 웬지 그 멜로디가 아직 귓전에 아니 기억속에서 멤돈다.
친구는 억지로 만들 수 없다. 서로 좋아해야, 서로 끌리는 것이 있어야 이루어 진다. 친구 사이에는 서로의 생각이나 하는 일들을 부담없이 나눌수 있다. 기쁨이나 외로움, 좌절의 시간에도 함께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할 수도 있다. 형제들과 멀리 떨어져 사는 이민생활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나는 친구를 좋아한다. 친구라는 그 말에 정감을 느낀다.
한국에 여러 친구들이 있지만 오래 소식없이 지내고 있다. 멜번에서 사역하는 동안 개인적으로 가까워진 친구들이 있지만, 그들과도 마찬가지다. 우정은 풍선과 같아서 꼭 잡고 있지 않으면 훌쩍 날아가 버린다는 격언을 떠올리며 나의 친구들을 생각해 본다. 요즈음 젊은이들처럼, 나도 페이스북 등 지역에 매이지 않는 소통의 방법들을 통해서 그들에게 계속 연락하고, 우정을 확인해야 되는 것일까? 아니면 소식 없어도, 한번 친구 되었기에 묵묵히 같은 자리에 친구로 남아 있는 것일까?
시드니에도 여러 친구들이 있다. 중학교 동창도 있고, 대학 때부터 가까웠던 친구도 있다. 이곳에서 만나 2-30년이상 사귀어 온 친구들도 있다. 물론 목회자 친구도 있고, 골프 친구도 있다. 그러나 같은 시드니에 살면서도, 자주 만나거나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있다. 오래 전에 어떤 분이 은퇴하고 나니 더 바쁘다고 말해 함께 웃은 적이 있었다. 그냥 웃기기 위해 말한 과장된 허풍이려니 했다. 지난 몇개월을 돌이켜보니, 나 역시 은퇴자이지만 이런 저런 설교며 강의, 모임 참석 등으로 한가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집중력이나 순발력이 떨어져 아마 일 처리가 더디고 버벅거리느라 시간이 더 걸렸기 때문이었을까? 어쨋든 그러한 일과 봉사 등으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전혀 무료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원하는 만큼 친구들과의 사귐을 위한 느긋한 시간을 낼 수 없었던 것이 유감이다.
오늘 아침에 읽은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였다. 그 중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리라” (요한복음 15:15)고 하신 말씀이 아직 내 안에 있다. 그 짧은 한 구절의 말씀이 더 긴 질문과 묵상으로 초대한다.
내가 아는 구약의 큰 인물들 가령 모세나 여호수아, 다윗 등을 성경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기록했다. 사도 야곱은 그의 서신서 첫 머리에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불리워지기를 바라며 혹은 스스로 그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종’, 그것은 자랑스럽고 명예로운 호칭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종이 아니고 친구라 하셨을까? 예수님은 지금 나의 친구인가? 나는 자신있게 참 좋은 친구요, 그 분과 같은 친구는 세상에 없다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 분의 친구인가라는 물음에는 선뜻 대답을 주저하게 된다. 포도나무 가지처럼 약하고 부러지기 쉬우며, 누추한 내가 감히 거룩하신 그분과의 우정이 가능할까하는 공허함이 앞선다. 한가지 내가 예수님을 친구로 택한 것이 아니라 그 분께서 나를 먼저 택하셨다는 것을 부인 할 수 없다. 왜 그리 하셨을까? 다 알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일, 다른 관계를 시작하시겠다는 새로운 선언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그 분이 사용하신 ‘친구’라는 그 말씀에 진한 감동을 느낀다.
지난주 원로 철학자 김형석 은퇴교수가 쓴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수필집을 읽었다. 자신의 친구들 선후배, 가족 등에 관한 단상들이었다. 난 개인적으로 평범한 두가지를 배웠다. 첫째, 나이가 들어 갈수록, 좋은 친구의 역할이 어떤 의미에서는 자녀의 그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이라는 고백이다. 바로 이 두가지가 비록 그가 97세가 되었어도, 건강한 몸으로 능동적이며 행복한 삶을 살게하는 버팀목이 될 수 있었다는 깨달음이다.
예수님의 친구로 택함 받은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특권이요 은총이다. 그분의 친구된 자로써 먼저 나의 친구들에게, 이웃들에게 좀 더 따뜻한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또한 지금 내게 주어진 일들을 의무감이나 봉사한다는 그런 자세보다는, 친구를 위한다는 사랑으로 기쁨으로 감당하면 그것이 때로 힘들고 어려워도 행복이 될 수 있다는 도전을 받는다.
몇해 동안 그냥 살았던 집이어서, 녹슬거나 삐걱거리는 곳들을 수리하고 새로 페인트칠을 했다. 돈이 들었지만, 말끔하니 우선 기분이 좋다. 오랜 친구사이며 심지어는 함께 사는 가까운 친구인 부부관계도 가끔 그런 수리나 페인트칠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얼마간 만나지 못했던 한 대학 친구가 생각난다. 가까운 날에 그 부부와 함께 커피를 마시든 점심을 하든 한나절을 즐기고 싶다. 하늘 높은 가을 날이면 더 좋을 것 같다. 오늘 오후 유튜브를 통해서라도 ‘친구여’ 노래를 듣고 싶다. 멀리 있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가장 귀한 친구 예수님께 저들을 위한 소박한 기도를 드리고 싶다.
최정복(호주연합교회 은퇴목사) Jason.choi46@gmail.com
(02) 8876 1870
info@hanhodaily.com
http://www.hanho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