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위안부 할머니에 관한 기사를 읽다가 계속 끝까지 읽기가 쉽지 않았다. 이분의 인생 자체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또 한편으로는 누가 이분의 삶을 이렇게 송두리체 짓밟았을까 하는 막연한 분노가 더 이상 그 기사를 읽는걸 힘들게 만들었다. 그분의 인생이 어떻게 그렇게 흘러가게 되었을까라는 운명적 질문과 해석에 대해서는 우리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분이 겪었던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는 위안부 할머니들은 분명히 ‘참혹한 피해자들’이셨으며 천재지변에 의한 피해자가 아닌 이상 분명한 가해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질문은 가해자, 즉 이러한 반인륜적 범죄자들을 확인하고 법에 따라서 처벌했느냐의 질문일 것이고 또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국가차원의 응당한 보상과 위로가 이루어 졌느냐는 질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피해자 할머니들을 대표해서 변론할 수 있는 한국 정부는 가해자 범죄집단을 대표할 수 있는 일본 정부에게 어떤 진심어린 사과를 요구했으며 또 그러한 사과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얼마만큼 전달되었는지를 점검하는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며 당연한 일이다. 한국 또는 해외에 있는 과거 조선 사람의 후손이라면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고 정확하게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고 답을 얻어 내야할 의무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베 일본 수상이 자신있게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보란듯이 범죄집단의 묘지에서 참배하는 행동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뿐만아니라 한국인 모두에게 모멸감과 동시에 분노를 일으키게 한다. 그렇다면 수많은 피해 할머니들이 증언을 하고 물적증거 자료들까지 확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의 일관된 역사부정과 사실왜곡은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고도 무엇을 근거로 자신있게 ‘무죄’를 주장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놀라운 것은 해방후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조직적이고 의도적으로 양국의 보수 우익정권에 의해서 사실이 왜곡되거나 침묵의 강요로 은폐되어져 왔고 그 작업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해방 후 너저분한 모습으로 친일 세력과 야합하여 정권을 탄생시킨 이승만 정권이나 히로히토 일왕에게 혈서로 충성을 맹세한 박정희 아니 ‘다까끼 마사오’에게 위안부 할머니문제 해결을 기대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시작부터 어불성설이었을 것이다. 자신과 오호히라 전 일본 수상과의 관계를 형제의 관계가 아니라 스스로 꼬붕과 오야붕의 관계라고 정정까지한 박정희의 사고는 일본 우익집단에게 과연 어떤 인상을 심어 주었을지는 대략 짐작이 간다.
일제로부터 해방 70주년을 맞이한 지금까지도 한국 내부에서 보수의 탈을 쓰고 있는 이들 친일세력의 조직적 방해작업과 일본 극우정권의 정치적 거래가 맞물려서 지난 반세기 이상을 피해자 할머니들은 막연한 기다림 속에서 오히려 자신들의 숨을 죽이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 “좀 기다려봐라”라는 말은 차별받는 모든 흑인들에게는 귀를 찌르는 아주 익숙한 단어라고 말했다. 입법기관이 인종차별법이 폐지 될 때까지만 그만 데모하고 “기다려라”라고 말할 때 “Wait”라는 단어는 피해자 흑인들에게는 항상 “Never” 라는 단어로 바뀌어 되돌아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의의 회복이 너무 오랫동안 미루어지면 정의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피해자 할머니들에겐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시간이 없다. 이분들에게 더 이상의 기다림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이분들은 이미 70년 이상 고통의 세월을 숨죽이며 버티어 오신 분들이다. 박근혜 정권은 오늘도 피해 할머니들에게 똑같은 말로 강요를 한다. “이제 제발 그만 하세요” “양국간 모든 합의가 다 이루어졌잖아요” “10억엔 받아서 위안부 재단 만들잖아요”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후에도 긴 니뽄도를 허리에 차고 거울보며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는 다까끼 마사오의 딸다운 말이다. 아베 정권은 반세기 이상 이런 친일성향으로 만들어진 한국정권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의 조언처럼 조선을 조선답게 다루는 장인정신까지 전수받은 극우 정치인 아베가 아닌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필요한건 보채는 아이에게 떡 한점 던저주듯이 던지는 10억엔이 아니다. 친일집단으로 꽉 채워진 위안부 재단도 아니다.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단 한번이라도 합의내용의 동의를 구한적이 없는 합의는 정치적 거래 일 뿐이다. 이미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으며 몇 안되는 생존자 할머님들도 거동이 많이 불편한 상태다. 일본 정부로부터 범죄자들을 대신한 진정한 사과를 현 박근혜 정권을 통해서 기대해 본다는건 이젠 거의 불필요한 노력일것 같다는 생각이든다.
시드니에서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되는 이유와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거짓을 거짓이라고 분명히 말하지 않으면 거짓이 진실처럼 탈바꿈 한다는게 역사의 교훈이다. 또한 우리가 진실을 알려는 질문의 시기를 미루거나 놓치면 거짓의 주장이 판을 치는 사회에서 비굴한 삶을 강요당하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현재 진행형으로 경험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의 소녀상 건립은 지나간 고통과 수치의 역사를 마무리 짓는 단순한 상징적 의미가 아니다. 소녀상은 침묵으로 동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끄러운줄 알게하고 범죄를 저지른 집단이 반성하지 않으면 그 후손들이 언젠가 그 앞에서 무릎꿇고 참회하는 그날을 만들자는 우리 모두의 결단식이다. 왜냐하면 소녀상은 역사의 형상화이며 영속적으로 보존해야할 인류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백시현(사업가, 시드니 교민)
마틴 루터 킹 목사(1929~1968)가 평화의 소녀상 건립식에 참석했다고 우리 모두가 상상해 봅시다. 아마도 이러한 말을 우리들에게 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진정한 사과는 가해자들이 스스로 알아서 가져다 주는게 아님을 우리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아픈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성노예라는 부당한 고통을 겪어 보지못한 자들이 짜놓은 정치적 거래에 따라 나는 결코 움직이지 않았으며 행동의 요구가 필요한 그때에 나는 직접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 Martin Luther King, June 17, 2016
이번 시드니 평화의 소녀상 건립식에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않고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로 부당한 고통을 겪어 보지못한 자들이 비굴하게 조건부(평화의 소녀상 철거) 10억엔에 팔아치운 아베정권과의 거래를 분명하게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일 뿐입니다.
[원문]
“We know through painful experience that freedom is never voluntarily given by the oppressor; it must be demanded by the oppressed. Frankly I have never yet engaged in a direct action movement that was "well timed," according to the timetable of those who have not suffered unduly from the disease of segregation.” - Martin Luther King, August 28, 1963
“자유는 억압자들이 스스로 알아서 가져다 주는게 아님을 우리는 아픈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자유는 억압을 당하는 피해자들에 의해서 요구 되어져야만 합니다. 차별의 병으로부터 부당한 고통을 겪어 보지못한 자들이 짜놓은 스케줄에 따라 나는 결코 움직이지 않았으며 행동의 요구가 필요한 그때에 나는 직접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 번역 백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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