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해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8주 정도 지나야 부러진 뼈가 제대로 붙는 다는 의사의 말에 한숨부터 나왔다.
신체의 한 부분이 잘못되니 그동안 모른 체 넘겼던 다른 장기들도 같이 만세를 부르며 여기저기 문제를 드러낸다. 나이 드는 것도 잊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하고 살았더니 이제는 그런 때가 아니라고 경고를 받는 모양이다. 통증 때문에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니 많은 일들이 불편하고 짜증이 날 때도 많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남을 위해 뛰어다니기도 잘했는데 왜 나에게 이런 힘든 일이 생겼을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맴돌기도 한다. 베푼 만큼 위안 받지 못한다는 서운함과 외로움이 마음까지 속 좁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다. 사순절을 맞아서 옆구리가 아픈 고통을 맛보니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 생각이 절로난다.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그 분은 정말 많이 외로웠겠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에 콕하니 박혀온다. 옆구리가 아파보니 이제서야 ‘신앙적인 철’이 드는 가보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법륜스님이 브리즈번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100일 동안 전 세계 100여개의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이 묻는 ‘인생에 관한 질문’을 듣고 즉석에서 명쾌한 답변을 해준다기에 강연회에 참석해보았다. 질문자들은 인생에 관한 심각한 질문을 던질 거라는 나의 예상을 깨고 대체로 청중들의 웃음을 터지게 만드는 엉뚱한 질문들이 나왔으며, 한 여성 질문자는 눈물을 흘리며 아주 개인적인 질문을 던져서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법륜스님의 즉설적 답변이 그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는 그들 스스로가 판단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내가 받았던 느낌은 사람들이 많이 외로워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위안을 받고 싶어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위한 한인 카운셀링이 필요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아픔을 나눈다는 것은 듣기 좋은 매끄러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오랜 시간동안 우정을 쌓아온 소중한 친구들이 있다. 한국에서 데려온 아들딸을 훌륭하게 키워준 호주인 양부모들이다. 간혹 입양아 아이들 중에서 십대 청소년 시기를 지나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부모들은 전문 심리의사에게 상담을 의뢰하거나 나에게 문화적인 충격에 대해서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한국에 있는 친부모를 찾아서 만났을 때, 보여주던 따스한 포옹과 눈물을 보면서 진정한 위안이란 어떤 것인지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삶은 생물학적인 나이와 상관없이 영위해 나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지금은 옆구리의 통증이 사라지기를 손꼽아 가며 기다리는 중이다. 일상적인 일을 그저 즐겁게 열심히 하는 것이 나의 삶을 얼마나 윤택하게 만들었는지를 그리워하고 있다. 모든 일을 뛰어나게 잘 할 수는 없지만 노력하며 이루는 행복감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내가 힘들 때 받았던 한 통의 위로전화가 가슴 속을 타고 흘러내리는 따스한 꿀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러이 깨닫게 된다. 베풀어 주었던 마음을 되받기를 기대하지 않고 무조건 주었을 때 가졌던 기쁨만을 기억하는 게 편할 듯싶다. 단지 몇 주 동안의 체력소모가 있었을 뿐인데 한동안 힘들게 운동해서 만들었던 근육도 소문 없이 도망가 버렸다. 손가락에 작은 생채기 하나가 생겨도 몸살을 앓는데 갈비뼈의 손상은 온몸과 정신을 혼란에 빠지게 만든다. 이 나이에 아직도 경험해야 할 일이 더 남은 것일까.
통역 일을 하다보면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 육체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가 생긴다. 모두가 내 어깨에 걸쳐진 무게가 가장 무겁다고 생각하며 힘들어 한다. 몇 년 전에 퀸즐랜드대학교에서 카운셀링을 공부한 적이 있었다. 나는 카운슬러가 상담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한 답변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다. 카운슬러는 상담자의 고민을 가능한 다 들어주고 상담자의 마음에 담긴 갈등을 밖으로 끌어 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배웠다. 상담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따스한 위로가 처방약으로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자기의 소리를 들어 달라고 부탁을 해오면 거절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 마음이 조금 힘들어져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따뜻한 위안을 줄 수 있다면 나 자신 또한 위로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사랑은 돌아오는 거야” 라고 외친 것처럼 그냥 주었던 그 위안은 부메랑처럼 나에게 다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좋다. 살면서 사람 때문에 힘들 때가 생긴다. 무작정 사람을 피하기보다는 그 상처 또한 사람으로 인해서 치유된다는 것을 알아가야 나의 성장이 이루어지고 스스로 치유할 수가 있다. 내 몸이 편치 않다보니 지나간 일까지 끄집어내서 없던 미움도 생기고 옹졸해지는 것 같아서 걱정이 앞선다.
“인생에서 해 온 모든 일을 되돌아 볼 때,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이기거나 더 잘했던 순간보다 그들의 삶에 기쁨을 준 순간을 회상하며 더 큰 만족을 얻을 것이다.” 헤롤드 쿠시너의 희망의 말로 나에게 위안을 주고 싶다.
황현숙(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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